누가 십자가 마을이 어디에 있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을 해주지? 이근호 목사님을 알려드려야 하나? 근데 이근호 목사님은 십자가마을이 아니지 않나? 실상은 십자가마을이라는 존재는 없는데, 참 웃긴다. 십자가마을이라는 것을 존재로 여겨본 적도 없고 소유해본 적도 없고 사랑해본 적도 없고 귀하게 여긴 적도 없는데... 존재로 여기는, 어쩌면 있을지도 모를 일부를 가지고 존재로 여기지도 않는 전체를 대신해버린 탓으로 십자가마을이 존재가 되어 싸우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어쩌면 있을지도 모를 일부라는 것은 사실상 없다. 왜냐하면 다 죄인들이기 때문이다. 죄인들만 득실거리고 우글거리는데 십자가마을이 어디에 있는가?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본성만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고, 아주 적나라하게 발설하고 있는 집합체일 뿐이다. 어쩔 때는 그 죄가 싫어서 피하고 싶을 때도 있다. 죄는 아프니까. 서로에게 상처가 되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나게 하신다. 만남을 억지로 만들지도 않는다. 예상치 못한 만남을 주신다. 그 안에서 나도 깨지고 너도 깨지고 서로가 깨진다. 성공한 만남을 꿈꾸고 기대해보지만, 여지없이 무너트리신다. 실패한 만남이다. 복음 때문에 만났는데, 만나게 하셨는데, 복음은 실패한 만남으로 이끄신다. 버림받고 잃어버린바 되고 살이 찢기고 피 흘리신, 다 싫어버린바 되어 그 몰골에 얼굴을 돌리고 말았던 실패하신 예수님이 복음의 주인공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마을=이근호 목사, 라는 것도 성립되지 않는다. 십자가마을=그 안에 소속된 자, 라는 것도 성립되지 않는다. 이근호 목사=복음, 이것만이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저주받을 일이다. 이근호 목사님이 전하는 복음=그 복음을 듣는 나, 그렇기에 나는 복음을 안다는 것도 저주받을 짓이다.) 괄호의 내용은 나를 대상으로 해서 썼다. 그 어떤 목사님은 글을 쓰려면 상대를 생각하면서, 상대가 알아듣게 쓰라고 하는데, 나는 그냥 쓴다고 했다. 나를 대상으로 쓰는데 생각할 필요가 뭐가 있는지... 어떤 글을 쓰든 자기를 배제시키고 쓰면 안 된다. 알아듣든지 말든지 그건 내 소관이 아니다. 그러니 정말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어찌되었든지 괄호의 내용은 한때 나도 모르게,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었는데, 어느 순간 잘못된 그 생각들을 정돈시켜주셨다. 때가 되어 이것을 까발리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이렇게 생각한 것 자체가 어쩌면 사도바울이 무섭도록 선포한 다른복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1:8), 사도바울의 편지는 예수님 십자가만이 복음이지 그 외에 것은 깡그리 다 다른 복음이라고 저주를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이것만이 성령께서 복음의 매개체로 사용하시는 사도바울에게 준 복음전파의 심정이다. 이처럼 이 심정으로 복음전도자는 예수님 십자가만 전파하는데, 듣는 내가 예수님 십자가에 꽂히지 않고 다른 샛길로 새버리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었던가를 날마다 질책해주시는 것이다. 이번 계기를 통해서 알았다. 복음이 사람 잡는다는 것을. 복음을 내가 잡는 줄로 착각했었는데, 복음이 사람을 잡아서 털을 다 뽑고 펄펄 끓는 가마솥 물에 삶아버린다는 사실을...
실상은 나라는 것에 복음을 가두어 놓고, 내가 주체가 되어 복음을 요리한 것이다. 갇힘 당할 수도 없는 복음의 능력을 과소평가했었나? 이번 사도행전 강의 때 들었던 말씀, 왜 사도행전 28장, 마지막 장에서 이사야의 글을 인용했는지... 들으면서도 마음이 착잡했는데, 오늘 또 다시 생각이 난다. 오지 말라고 하시는데 나는 기어코 가고자 한다. 듣지 말라고 하시는데 나는 기를 쓰며 듣고자 한다. 보지 말라고 하시는데 나는 눈이 빠지도록 보려고 한다. 그래서 고침을 받고자 한다. 새롭게 살아보겠다고. 이 고생스런 세상에서 숨통 제대로 트고 살만한, 돈 안 들이고 고상한 취미생활이나 우상을 하나 모시고 싶었던 것이다. 천주교에서 파는 성모마리아 상(像), 예수님 상(像), 교황 상(像)... 그런 것들은 거추장스럽고 돈 들고 하니까 별로였겠지. 그거나 이거나 별반 다를 게 없는데...
사도행전 28장 25-28
25절,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26절,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27절, 이 백성들이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28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더라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입술이 부정하고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다고 고백한다. 천사가 숯으로 그 입에 대어 죄를 사해주었다. 그 후에 누구를 보내며 누가 갈꼬? 라고 물었을 때, 내가 가겠다고 나선다. 그의 임무는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그 귀가 막히게 하고 눈이 감기게 하는 것이었다. 주님은 염려하셨다. 백성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봐서. 그래서 이사야를 망한 자로 만드신 것이다.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단호하게 내쳐야만 했기에. 이사야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었기에.
이스라엘은, 자기들은 언약 백성이고 율법 지켜서 의로운 백성이 된 줄로 알고 있었다. 그들의 사고방식에는 무조건 저주받아 마땅한데 언약 때문에 복 받았다는 그 상한 심령이 없었다. 그 이유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내치는 것이다. 그리고 대표적으로 니느웨 사람들, 이방민족에게 구원을 주신다. 그러나 이방민족 역시, 무조건 저주받아 마땅한데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구원해주셨다는 그 상한심령이 사라질 때는 또 내침을 당할 것이다. 그것이 주님의 구원방식이기 때문이다. 결국 주님의 구원방식은 성령이 오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언약 안에는 언약백성이 따로 숨어 있었다. 개 같은 수로보니게 여인, 창기와 세리, 남편 여럿이 있는 수가성 여인, 오라하면 오고 가라하면 가는 백부장, 돈 많은 삭개오,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 병든 자, 귀신들린 자, 몽땅 죄인들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 때문에 저주받아 마땅한 자들임에도 구원의 혜택이 주어짐을 아는 자들이다. 그랬다. 사도바울이 이사야를 인용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복음 때문이다. 복음은 믿고자 하는 자들을 내치는 것이다. 밀치는 것이다. 주님이 하신 일이 이러할진대, 사도바울처럼 복음전도자는 절대로 인간 구원, 개인구원을 주는 복음을 전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의 백성은 복음이 전파되는 그 현장에서 주님이 알아서 찾으신다. 해변에 쌓인 모래 속에서 보석을 찾으시는 것처럼, 복음전한다고 차려놓은 개판 같은 교회에서 주님은 찾아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영화를 다 보고 조명이 켜졌을 때의 허무함이었다. 영화의 내용이 기억나야 할 텐데... 기억나지 않았다. 영화의 내용보다도 좌석에 앉아서 영화를 즐겼던, 그 영화 속에서 살아 움직였던 나를, 다시 스크린 밖에 있는 나로 되돌아오게 한 그 여운에 적응 안 되었던 것이다. 영화관을 빠져나와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소리와 눈에 보이는 휘황찬란한 물건들과 커피 향과 맛있는 냄새에 의하여 여운은 깨지고 본래의 나를 찾게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이 태산이다. 이 모습이 내 모습이다. 아! 좋다. 나라는 인간? 역시 존재였다. 그러나 존재의 가벼움이다. 때론 안개로 몇 초 정도는 이미지 변신을 하게도 하신다. 그 몇 초가 주님 안에서 영원이라고 생각한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시공간이 다 무너진 그 안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