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마을 수련회를 다녀와서
유라굴로 광풍은 인간의 한계성을 보여줍니다.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행 27:20).”
이 속에서 죄수를 통한 구원이 일어납니다.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행 27:24).”
주님께서 일으키신 유라굴로 광풍은 인간들에겐 더 이상 구원의 여망이 없는 곳으로 끌고 갑니다. 하지만 주님은 오히려 그 광풍이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 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도구로 사용합니다. ‘구원이 무엇인가?’입니다.
배에 탄 275명은 구원이 광풍에서 살아남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광풍에서 살아남는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도행전 27장에서 28장으로 넘어가면서 이상한 것은 죄수 바울을 통한 구원이 그들에게 영생으로 연결되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멜리데에 거하는 토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을 고쳐주었고 그들이 대접했다는 내용은 나오는데 우리 인간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예수님을 믿었다는 내용과 구원에 대한 내용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구원이 우선이 아니라 예수님의 심판 주 되심이 우선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떠하든지 멜리데 토인들의 구원을 보고 싶고 배에 탄 사람들의 구원을 보고 싶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이들의 구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로 구원하시는 심판 주 되시는 주님을 증거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마지막을 이렇게 끝내는 겁니다.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금하는 사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안목으로 보게 되면 유라굴로 광풍조차, 죄수됨 조차 예수그리스도의 심판 주되심을 전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고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심판 주 되심이 증거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의 심판 주되심이 전파되는 것을 절대 금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이 그것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주님의 심판 주되심을 드러내는 현상들이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성도의 삶의 현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당할 뿐이고, 그 당함 속에 그리스도의 피만 증거 될 뿐입니다. 그러면서 성도는 이 땅에서 얼음 녹듯이 어느 순간 형체도 없이 사라집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2:22).”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사 40:8).”
말씀이 성도를 삼켜버렸습니다. 말씀이 날리는 대로 날립니다. 자랑할 것은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