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정인순 목사님 녹취 원주 특강 - 잠언 속의 지혜 A
강사: 이근호 목사
오늘은 원주의 이성대 집사님 가정에서 생애 처음으로 성경 공부라는 걸 하게 되었습니다. 심방이라고 봐야 되겠지요.
오늘 제가 준비한 것은 잠언서 16장 33절, 다들 실력들이 있으니까 오늘 강의를 어렵게 할 수밖에 없어요. 16장 33절에 보면, 제가 어렵게 하는 게 아니고 이 성경 말씀 자체가 어려워요. 33절에 다같이 읽어볼까요.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아마 모든 신학을 이 한 문장으로 박살낸다고 보면 돼요. 왜 그런가 하면 제비를 누가 뽑느냐 하면 사람이 뽑잖아요. 그런데 일의 작정은 누가 합니까? 여호와가 하지요. 그러면 제비를 뽑으라고 왜 시켰어요? 참 이상하지요. 제비를 안 뽑았을 경우에는 일이 틀어지는가요? 그건 아니다 이 말이지요.
하나의 예를 봅시다. 태풍이 분다. 제비를 태풍이 온다 안 온다 나무 잎사귀 해가지고 태풍 온다 안 온다 뜯기 한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태풍이 뭘 보겠어요? 어떤 사람이 강원도에서 나뭇잎사귀 가지고 태풍 온다 안 온다 그거 보고 있다가 온다 안 온다에 따라서 태풍이 자기 마음대로 가지 말까? 방향의 진로를 바꿔. 이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이 말씀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 보면 일의 작정이란 말, 보통 작정했다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작심했다 이 말은 끼어들지 마 이런 뜻이에요. 끼어들지 마. 어디 함부로 나대, 이런 뜻이란 말이죠.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뭐냐 하면 “하나님 잘났습니다. 잘났어. 하나님 맘대로 하세요. 나는 내 맘대로 할 테니까.” 이렇게 토라져가지고 그렇게 나오겠지요.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사람이 제비를 뽑을 때는 아무 생각없이 제비를 뽑는 게 아닙니다. 신이시여. 주의 뜻이 뭡니까? 이래가지고 뽑잖아요. 제비를 뽑는다는 말은 뭔가 우리 손에서 신의 손으로 일을 넘기자는 거예요. 이건 우리 인간이 할 몫이 아니고 하나님께 맡기자. 열두 제자 맛디아 뽑을 때도 마찬가지고.
맡기자고 하면서 제비를 뽑는데 그러한 태도 자체가 평소에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행동에 문제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 일은 우리가 할 게 아니고 하나님이 하실 문제입니다.” 했을 때 이미 구분되어 있어요. 뭐가 구분 되어 있느냐 하면 인간이 하는 일 따로 하나님 하는 일이 따로 있을 것이다. 인간이 하는 일은 예를 들어서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어났을 때 인간이 하는 일은 제자들이 물 퍼내는 일이지요. 물 퍼내야지요. 물 안 퍼내면 배가 가라앉을 판인데.
인간의 일은 물 퍼내는 것, 그런데 인간의 일이 물 퍼냈을 때에, 이런 게 참 어려운데요. 인간이 물 퍼냈을 때에 물 푸면서 우린 물 푸면 안 돼. 주님께서 주무시는 가운데 일어나서 바다야 잔잔하라, 라고 생각하면서 물 퍼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일단 최선은 다해보자는 겁니다.
칠판 있다고 치고 제가 칠판에 뭘 쓰느냐 하면 최선, Best do it.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그러면 최선을 다했을 때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이게 부정한 것이고 나쁜 짓이고 해서는 안 될 짓이고 이건 터무니없는 악한 짓이라는 것을 생각하겠습니까? 최선을 다할 때. 그런 생각이 안 들어요. “하나님이여. 봐주세요. 우리 인간이잖아요. 천사 아니잖아요. 할 도리 다 하는데 이것까지 책망하시고 이것까지 탓하시면 우린 정말 곤란합니다.” 라는 의식을 가지고 “그래. 모든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인간이 할 도리는 다 해야 돼.” 지천명 하는 것 있지요. 일은 인간이 하되 결정은 신에게 맡긴다는 게 동양사상에 있거든요.
그런 사고방식이 동양철학에서는, 동양철학은 치우고 일반 상식에서는 그것이 박수칠 일이지요. 왜? 겸손하구나. 인간이 으스대가지고 내가 다한다. 내가 다 해낸다. 이렇게 까불거리는 게 아니고 대천명 하늘의 명을 기다리는 마음이니까 박수쳐줄게. 마음가짐이 대단하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성경 말씀이 그걸 고발한다면 어떻게 생각합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걸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고발감이라면. 도대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뭘 한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무섭지요. 인간이 어떤 한계를 정하고 이 너머는 신의 일이고 이 영역은 인간의 일이기 때문에 일단은 인간의 일은 다 하되 열두 제자가 물 퍼내되, 안 되니까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던 거예요. 풍랑 일 때.
그 때 예수님께서 “그래. 할 도리 다 했어? 최선을 나름대로 다 했구나. 대견하기는. 너희들 비켜 봐. 내가 알아서 할게. 너희들 할 도리는 다 했어. 내가 도와줄 게.”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면 책망했습니까? 책망했지요. 제자들로서는 자기 범주 안에서는 다 했어요. 최선을 다했는데 그 범주 안에서 다 행했다는 그러한 대견스러운 일조차도 주님께서는 이 믿음이 없는 자라고 책망부터 하고 그 다음에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했습니다.
제가 지금 하는 일은 뭐냐 하면 인간이 믿는다는 일은 하지 말라는 거예요. 인간은 신을 믿는다는 그런 짓은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교회가 하는 짓은 하지 말라는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예요.
신을 믿습니다, 라는 헛소리는 제발 좀 그 소리는 그만. 윤시내가 불렀던 노래 보면 가사에 이런 게 있어요. 그 음악은 제발 그만 틀으라는 내용 나오지요. 제발 하나님 좀 믿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 태도 자체가 같은 인간들 보기에는 대견해. 얼마나 겸손하게 되면 인간의 자기의 의지와 결정과 자기의 자유의지를 의지하고 겸손 떠는 그 모습이 인간들 보기에는 박수 치고 싶고 나는 니 신앙 한 수 배우고 싶다. 이러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정말 지 주제파악도 안 된 거예요. 니 믿음 어디 써먹을 건데. 언제 니 믿음 내놓으라고 했느냐 말이지요.
에베소서 2장 8절에 뭐라고 되어있어요? 믿음은 선물이에요. 우리가 믿음을 조장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동행이 뭐냐 하면 예수님에 대해서 제자들이 어떻게 뭐든 일일이 다 감사기도하고 먹고 하여튼 뭐든 일일이 신에게 나름 이 정도는 바칠 용의가 되어있습니다 라는 믿음의 티를 내는 모습을 3년 동안 병행해서 다 보여준 거예요.
주님은 “놀고 있네.” 예요. 그 짓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기본이 안 되어 있거든요. 잠언서를 이해 못하고 있는 거예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죽 있지만 잠언서를 보시는 사람은 출애굽기할 때는 주님의 일관 된 노선이 있어요. 이 계획 다음에, 언약을 던져주고 언약의 노선대로 전개한다는 원칙이잖아요. 언약을 던져준 그 언약과 인간들의 배신과 견주면서 그러면서도 인간들의 죄를 극복해서 은혜를 주시고, 은혜를 주신다는 말은 선지자를 보내는 겁니다. 선지자를 보내서 계속 사람들을 적당치 않은 사람들은 광야에서 제거하고 불뱀 보내 제거하고 나머지는 주께서 인도하는 거예요. 알아서 인도하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잘라낼 것은 잘라내면서 나한테 원망하고 이렇게 대들면 이런 꼴 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계속 데려가는 겁니다.
데려가서 주께서 하는 일은 뭐냐 하면 애굽적인 인간성에서 아무도 경험하지 않은 나라, 그걸 약속의 땅이라 해요. 아무도 경험한 적이 없는, 이런 말이 어려워요. 사람들은 경험이라 하는 것은 과거 기억에서 나오거든요. 그런데 뭔가 미래를 생각할 때는 일단 체험한 것 중에서 추스려서 미래를 상상하게 되고 이미지를 그리게 되어 있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그려보라고 하는 것은 말조차도 안 되는 이야기예요. 이래 왔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렇게 될 거야, 라는 짐작을 예측해서 미래를 계산하게 되어 있어요.
그게 미적분 아닙니까? 수학에요. 이미 꾸준히 해왔던 그 논리가 계속 그 노선을 이탈하지 않을 것이라는 조건 하에 그대로 가는 겁니다. 수학에서 선을 긋는데 직선은, 점은 일차원인데 선은 이차원인데 선을 긋습니다. 그으면서 평지가 미래에 평평하다는 조건 하에 가는 거예요. 만약이 이게 울퉁불퉁 3차원이면 이건 직선이 나중에 곡선 되어버린다고요. 직선이라고 할 때는 무슨 공리냐 하면 유리알 같다는 공리 하에 되는 겁니다. 이게 과학이잖아요.
과학은 조건들이 있어요. 과학은 무조건 뽑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 조건들은 왜 뽑아내느냐 하면 인간에게 유리하다는 조건 하에. 인간에게 불리한 조건은 아예 조건에서 제거 되어 버립니다. 인류학 정치 경제 사회 심지어 시 예술까지 모든 것이 과학 바탕에 전개되고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이 시대가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주의라 하는 것은 이윤이 있어야 돼요. 이윤이 있으려면 늘어나는 인구를 노동을 시켜줘야 되는데 노동을 시킬 때 노동에 있어 동기부여가 되어야 해요.
동기부여라 하는 것은 옛날에는 밥이나 먹고 살았으면 됐습니다. 고등어가 아침에 두 마리 필요한데 네 마리 잡을 이유가 없어요. 지금도 마오리 족 파파뉴기니아에는 그렇거든요. 두 마리면 되는데 다섯 마리면 썩으면 자기만 손해잖아요. 그런데 파파뉴기니아 자식이 있는데 유트브 해서 방탄 소년단 노래를 들었습니다. 또는 한국의 드라마를 봤습니다. 보니까 잘 살거든요. 자기는 야자나무 입고 있는데 잘 산단 말이죠. “얘. 너는 밥이나 먹고 살아. 우리 조상들은 그렇게 살아왔어.” 이게 기억입니다. 이게 전통이고 역사예요.
한 가정에서 가르치는 것은 절대로 전수해 내려오는 것에서 벗어나질 않아요. “엄마. 왜 내가 그렇게 해야 되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그렇게 했어. 우리 집안의 관습이야. 우리는 뼈대 있는 집안이야. 이렇게 된다 이 말이지요. 애들이 용돈 타기 위해서는 할 수 없이 하지만 나중에 자기 생활에 나가게 되면 그걸 단호히 거부하지요. 걔들이 옛날시대 같으면 밥만 먹고 살았어요. 고기는 가끔. 그런데 다른 애들 돌아보세요. 해외 놀러가잖아요. 나이키 신발 신었단 말이에요. 스마트폰도 새로운 기종으로 바꿨어요. 엄마는 말합니다. “얘. 밥만 먹고 살아.” 이게 애들에게 안 먹히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비가 계속 축적되는 겁니다. 소비가 축적됨으로서 인간의 욕망을 끄집어내요. 들레즈는 그 욕망을 가지고 이걸 분열증이라고 했습니다. 분열증이라 하는 것은 계속 새로운 욕망의 출처를 찾아서 탈주 하는 것, 달려가는 거예요. 계속 달려가는 거예요. 지금 자녀분 하나 있지만 엄마 아빠 생각에 니는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들이 있지요. 자식 생각에는 그런 생각 없어요. 왜냐 하면 또래라는 게 뭡니까? 또래라는 게 엄마 아빠 이야기 안 듣겠다는 거예요. 유유상종인 또래. 애들이 엄마 아빠 품에 있다가 같은 또래를 만나게 돼요. 만나게 되면 그들에 대한 같은 행위를 같이 안 해주게 되면 그 공동체에서 소외돼요. 그러면 그들은 소속감이 없게 됩니다. 소속감이 없게 되면 인간은 불안해요. 자기 주변에 자기한테 이득이 오는 친구들로 둘러싸일 때 이건 오야봉처럼 되는 거예요. 우싸우싸 하는. 시간 가는 줄 모르죠.
부모는 잔소리만 해대니까 바깥으로 도는 거예요. 그들 또래에 흡수 되는 거예요. 그 또래가 그냥 노는 게 아니에요. 새로운 욕망의 분출구를 찾고 있습니다. 그게 자본주의 사회예요.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새로운 미래는 뭐냐? 과거에 결핍된 것을 보충하는 식으로 역사라는 표현을 쓰면서 밀어붙입니다. 역사라는 표현을.
그런데 이건 욕망의 멈추지 않는 도피? 또는 이탈? 일탈이라는 말이 적당하다. 일탈. 원주나 제천 바닥 촌에 있으니까 잘 모르지만 강남에 있으면 그 나이에 일탈하기에 바빠요. 그 나이에 전부. 품위 있는 여자 봤지요? 그거 전부 일탈하는 거잖아요. 지금 일탈이 왜 안 되느냐 하면 그만그만하거든요. 춘천 그 동네도. 돈이 있어야 일탈하지, 전부 다 그만그만 하기 때문에 그 정도해도 만족하는 거예요.
그런데 새로운 소비처나 자식을 통해서 “아빠 난 싫어. 이 정도는 해야 돼. 혼수 그 정도 해. 아니야. 이 정도는 더 되어야 해. 이거 이거 바꿔줘.” 이러면 골치 아픕니다. “우리 결혼할 때는 대충했어.” “엄마 나 대충하기 싫어. 여자 쪽에서 대충하기 싫대.” 이게 뭐예요. 너무나 우리 보기에는 철이 없어 보이지만 그들의 누적된 기억에 있어서는 인간이 산다는 것은 그 정도 될 때 산다는 그러한 개념을 구축하는 겁니다. 그것보다 낮아지면 비참하게 돼요.
옛날 신혼 때는 단칸방에 사랑하면 됐잖아요. 젊은 애들 아파트 파는 사람들 생각은 돈 없는 젊은 애들 아파트 구입할 거다. 정말 시건 없는 소리예요. 젊은 애들은 새집 얻어요. 헌집 있는데 안 가요. 대출 받아서라도 새 집 빚내서 가요. 새로운 인생은 새로운 깨끗한 집에서. 이러고 있다고요. 그냥 살지 헌집에. 수리 좀 해서 살면 얼마나 좋아요. 우리 세대 때 이야기입니다. 아파트 내 놔도 헌집은 나가지 않아요. 그리고 새 아파트 가요. 평수는 안 넓지만.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 욕망의 노선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거예요.
과거 기억한 누적된 지혜도 욕망에서 나온 거고 앞으로 그거에 근거해서 미래도 욕망뿐이에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간다. 약속의 땅은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천국은 없습니다. 천국은 없는 거예요. 우리가 천국이라 하는 것은 과거에 경험했던 욕망을 보다 극대화하고 가장 찬란한 모습으로 그려낼 때 성경 구절도 찾아내가지고 이 정도 보석 같은 데라면 내가 가볼만 하다. 이런 거 있잖아요. 그걸 내가 자꾸 상상하는 거예요. 그러나 천국은 그런 세계가 아닙니다. 천국은 내가 예상 못한 세계예요.
다시 갈릴리 바다로 옵시다. 풍랑 일 때 물 퍼내는 제자들에게 있어서 그 다음에 주님의 대책에 있어서 열두 명 가운데 아무도 미리 눈치 챈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이 어려운 거예요. 물 퍼내는 데 최선을 다하게 되면 주께서 “야. 비켜. 열심히 했어. 그 다음엔 내가 알아서 할게.” 이렇게 되는 게 아니고 만약에 그럴 것 같으면 책망할 필요가 없어요. 물 퍼내니까 인간이 할 도리를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니가 믿음이 없다.”고 하신 거예요.
그 이야기를 받고 우리 입장을 옹호하는 입장으로 생각해봅시다. 믿음이 없다고 책망할 것이 아니고 알아서 잠 주무시지 말고 깨가지고 우리 하는 것을 “하지 마. 하지 마.” 하고 사전에 말렸어야지요.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이라는 위상이라고 보는 거예요. 스승이 스승다운 위상이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어떤 사업을 하는데 망하고 난 뒤에 “주여!” 라고 찾지 않도록 주께서 하기 전에 “그건 안 돼. 그거 접고 이거 해.” 미리 사전에 팁을 준다든지 조언하는 것이 훌륭하고 자비로운 주님의 할 일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상상이에요.
그러니까 평소에 우리가 예수 하나님 하지만 얼마나 성경에 없는 나 중심의 하나님을 얼마나 조작해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그렇게 조작해 내서 예수님한테 건방지게 우리가 지시를 해요.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 지시한다고요. 그런데 그 지시한 내용이 뭐냐? 애굽적인 거예요. 가보지 않은 나라에 대한 내용은 하나도 없고 애굽에 살 때 힘들게 살았으니까 앞으로는 호강스럽게 살게 해달라는 요구를 하나님께 내미는 겁니다. 교회자체가 엉터리예요. 전부 다. 설교하는 것부터 해가지고 기도하는 것부터 해가지고. 성경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여러분들 속으로 목사님은 잠언 펴놓고 엉뚱하게 돌아다니고 우회하느냐 하는데 그러면 잠언의 내용을 결론부터 딱 말씀드릴까요? 이겁니다. 잠언은 남의 일은 신경쓰지 말고 니 일이나 해라. 이게 잠언이에요.
그래서 잠언이 어려운 겁니다. 남의 일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도 남의 일이에요. 자식도 남편에 있어서 아내도 남의 일이고 아내에게 남편은 남의 일이에요. 남의 일 신경쓰지 말고 니나 잘하세요. 이게 잠언의 핵심이에요. 기존의 출애굽기나 레위기 민수기와는 달라요.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는 집단적입니다. 집단 구원이거든요. 개인이 구원받는 것 없어요. 이스라엘이 집단으로 표현된 하나의 대표적 개인처럼, 그걸 주체라 하는데, 하나의 집단 주체처럼 움직입니다.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인을 상대하지 않고 중간에 모이는 장소가 있는 거예요. 옛날 고대 그리스도 그랬어요. 아고라라는 게 있거든요. 그리스 도시국가에 아고라가 뭐 하는 동네냐 하면 둥근 원인데 옛날 전리품들을 모았던 장소예요. 전리품들을 모았던 장소에 누가 있느냐 하면 여자 사제가 있어서 신탁을 해요. 신탁을 하면서 사람들은 전리품을 가지고 신탁하는 장소, 구약성경을 아시는 분은 감 잡을 거예요. 이번 전쟁의 승리는 누구 몫이다? 우리가 믿는 신의 몫입니다. 여기에 드리러 왔습니다. 그러면 여자 사제는 신탁해요. 다음에는 전쟁을 어디를 치라. 그렇게 되거든요. 그러면 내가 너희들 믿는 신이 너희의 전쟁에 승리를 안겨주겠다.
승리라는 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표현하는 말로하면 잉여가치라 하는 겁니다. 요새도 노래방이나 치킨집할 때 항상 승리를 내다 보잖아요. 이 골목에서 백종원 만나가지고 내가 장사 한번 해보겠다. 이게 승리입니다. 가게 할 때는 반드시 승리를 내다봐요. 직정에서는 그게 좀 덜 하지만 개인이 할 때는 항상 승리예요. 교회도 개인사업인지 모르겠지만.
그리스 시대 때에 신탁이 있어요. 신탁은 시로 되어있습니다. 이건 상식이니까 알아놓으세요. 시로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시키는 대로 해.” 이게 신탁이에요. 신의 계시니까. 까불지 마. 따지지 마. 시키는 대로 해.
그러면 보세요. 다수가 여기 빈터에 여러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 전리품이 있습니다. 모아놓고 신에게 제사 드려요. 제사 드리면 여기에 신탁이 주어집니다. 그러면 그걸 누가 쳐다보느냐 하면 군인들 시민들 주부들 다 쳐다볼 것 아닙니까? 신탁이 주어지게 되면 다음에는 몇 년 쉬었다가 전쟁해. 앞으로 농사만 해. 지금 스파르타를 당장 쳐야 돼. 이렇게 신탁이 있을 것 아닙니까? 중국 같으면 거북이 껍데기로 하든지 뼈 조각 금, 이건 아무나 해석 못해요. 그러니까 제사장들은 사기꾼들이에요. 어떤 표식은 지가 일방적으로 그냥 해석하는 거예요. 그걸 과장된 해석이라 하는데. 과장된 해석해가지고 계속 붙이는 거예요. 앞에 있는 걸 과장된 해석이라 하고 밑에 있는 걸 상징이라 합니다. 심볼.
그 신탁을 들었으면 개개인이 아니고 집단에게 동일한 신의 미래가 엎어지는 거예요. 개인의 운명은 소용없어요. 신은 상대하지 않습니다. 해놓으면 돌아서서 각자 집으로 가겠지요. 이게 신탁이에요.
그런데 도시국가가 전쟁하다가 이제는 피곤한 거예요. 그리스에 왜 도시국가냐 하면 골짜기가 많아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신탁 자체를 시비를 걸기 시작합니다. 그 때부터 토론의 장이 마련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신탁에서 신화의 세계에서 이성의 세계로 과학의 세계로. 누가 이야기하면 “한번 보자. 앞뒤 논리 맞는가 한번 보자.” 과학의 시작이지요. 따지는 겁니다. “증거 대봐.”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화산이 일어났다. 왜 일어났는가? 이렇게 일어났을 거다. 아니. 화산 가보고 와. 그래서 화산 가보고 온 사람들이 내가 보니까 이렇더라. 내놓고 내가 가보니까 그렇지 않은데. 이것은 이런 논리가 있다면 앞으로 이런 논리가 계속 될 것이라고 미래 예측이 됩니다.
신탁으로 미래 예측을 하던 것을 과학적 인식으로 미래 예측을 하는 과학 시대가 된 거예요. 그 과학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제는 신과의 결별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이론은 신의 의중을 모르기 때문에 아는 건 뭐밖에 없어요? 우리가 앞으로 되고싶다는, 아까 자본주의 욕망했지요? 자본주의 설명하려면 시간이 많이 가는데 간단히 합시다. 욕망이에요. 욕망은 뭐로 구체화 된다고 했지요? 이윤이지요. 이윤을 얻으려면 새로운 소비처, 소비심리를 자극해야 되겠지요. 그러면 과학이라는 것도 자본에 따라서 필요한 기술이 있고 필요없는 기술은 도태되고 필요한 기술만 계속 살아남을 수밖에 없어요. 20년 연구했는데 시장에서 그걸 원하지 않는다. 그건 집안만 망해버린 불행한 발명이 되는 겁니다.
16장 33절 다시 한번 봅시다.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일을 작정하시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인간이 제비를 뽑을 때 순수하지 않다고 제가 말씀드립니다. 순수하지 않아요. 주여 이건 신에게 맡깁니다. 얼른 보면 신에게 맡기는 것 같은데 이미 이건 맡겨야 되고 이건 안 맡겨야 되는 것을 누가 했습니다. 본인이 했지요. 본인이 이런 결정을 하게 되는 이유는 과거에 결핍된 것을, 결핍은 어디서 생기느냐? 욕망에서 생겨요. 과거에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한 것이 아니에요. 그것으로 모자란다는 거예요. 더 키우기 위해서 결핍을 생각했고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나름대로 노력은 하지만 인간의 노력으론 안 되고 신께서 도와 주어야한다는 사전의 조건은 누가 만들어요? 인간, 결핍된 본인이 다 만들어요.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를 만났던 여인이 있지요. 그 여인이 사마리아 여인이지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던 계기가 뭐냐 하면 사마리아 여인이 먼저 물 길러 왔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물 왜 길러 왔어요? 물 마시기 때문에 온 거 아닙니까? 물 왜 마셔야 되지요? 그걸 보통 목마르다, 산다 하는데 그걸 뭐라 하느냐 하면 욕망이라 하는 거예요. 사는 것도 욕망이에요. 그걸 사는 욕망이라 하지 않고 놀랍게도 정신분석에서는 죽음의 욕망이라 합니다. 어렵지요? 살아있는 것을 보통 사는 욕망이라 하잖아요. 정신분석에서는 그걸 뒤집어요. 죽음의 욕망에 쫓긴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번 수련회 때 아가서 하는데 여기서 특별히 아가서 미리 이야기합니다. 누구도 죽음의 욕망을 못 이깁니다. 쫓기니까. 가만 생각해보세요. 이거 욕망입니까? 가만 앉아있는 것. 아니지요. 맛있네. 이건 욕망이지요. 탐내지 말라 했는데 탐내는 거예요. 그런데 왜 먹어야 되느냐 하면 이렇게 있을 때는 내가 살아있든지 죽었든지 관계없어요. 그러나 이거 먹고 살아야겠다는 것은 죽음이 자꾸 쫓아내니까 죽음에 대항해서 내가 더 살아야겠다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아가 핵심은 뭐냐 하면 그 욕망은 인간에게서 자기 살고 싶은 욕망을 벗어날 수가 없어요. 천국 가겠다는 것도 지옥 안 가겠다는 것도 결국 천국 지옥이 뭔지를 알아서가 아니라 쫓기기 때문에 이왕 갈 것 좋은 데로 빠지자. 그게 천국이에요. 나쁜 데로 가게 되면 지금도 고생했는데 죽어서 불구덩이에 가면 나만 손해잖아. 천국은 누구 세계냐 하면 내 좋아라고 하는 세계라고 인간은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하나님 나라인데 예수님은 그걸 반대라 하지요. 천국이 없는 게 아니고 인간이 생각하는 것과 반대의 천국이 천국이에요.
그러면 어떤 인간도 지금 천국 지옥을 매달려도 그걸 내 살고 싶은 죽음의 욕망은 사라집니까? 안 사라집니까? 안 사라지지요. 아가는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면 아가가 지금 관련되어 있어요. 잠언 아가 전도서 욥 시편 다섯 개를 지혜 문서라 하는데 관련되어 있어요.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면 사랑하면 돼요.
집사님 둘이 사랑해서 결혼했지요? 연애 결혼하셨어요? 그럴 것 같아요. 아가의 결론은 이겁니다. 간단한 건 아니지만 내가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사랑하게 되면 상대방 생각이 내 안에 흘러넘쳐나서 내가 어떻게 하면 사느냐 죽느냐 어떻게 하면 저 여자를 꼬시느냐 저 남자를 꼬시느냐 이런 생각이 없고 그대만 있다면 그대 앞에서 나는 죽어도 좋아. 이게 사랑의 위력입니다.
사랑이 없을 경우에는 뭐냐 하면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내가 나름대로 세운 법칙이 있어요. 착하면 더 오래 살고 내가 나쁜 짓하면 벼락 맞아 죽는다. 이렇게 돼요. 굉장히 고상해보이지만 사실은 어디에 쫓기고 있다고 했습니까? 죽음에, 악마의 저주에 쫓기고 있는 거예요. 사랑이 오게 되면 사랑을 하게 되면 우리 시대의 유명한 70 80 노래가 있어요. 나는 못난이 하는 노래가 있어요. 나는 못난이. 아무리 자기가 의사고 판사라 할지라도 자기가 확 반해버린, 그걸 아가서는 혼이 나갔다고 되어있어요. 혼이 나간 지경이 되어 버리면 내가 지금 재산이 수십억 있든 내가 판사든 의사든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 사람 앞에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나는 못난이가 돼요. 이게 자유입니다. 자유. 왜 우리의 영혼이 자유롭지 못합니까? 아가서의 결론은 간단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에요. 목사님. 저 사랑했었는데요. 그건 과거고 지금 사랑해야 돼요.
그러면 남편만 사랑해야 되는가? 아니에요.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이 되게 되면 어디로 떠나고 싶어요. 아무나에게 편지하고 싶어요. 이건 뭐냐 하면 선악에 쫓기는 게 너무 고달파요. 인생살이가. 행동을 해도 이게 지금 착한 일 하는 거야? 나쁜 일 하는 거야? 악마가 선악 가지고, 선악과는 원래 악마가 따먹으라 했으니까 하나의 미끼예요. 낚시에 걸린 거예요. 선악이라는 낚시가. 고기라는 게 있어가지고 니 안 착하면 이번 주 저주 받아. 이번 계약이 날아가는 거야. 계속 매사를 못살게 구는 거예요. 니 이번 일 안 된 것은 두 달 전에 나쁜 짓 했잖아. 계속 기억나게 만드는 겁니다.
이게 원인이, 해결책이 뭐냐 하면, “그래 착할 게. 계속 내가 선하게 할게. 내가 어려운 사람 도와줄게.” 이게 인간이 악마한테 쫓기는 해결책이에요. 평생을 교회 다니면서 그렇게 사는 겁니다. 교회도 사기고 그 당회장도 사기꾼, 사기를 치는 거예요. 마귀가 세웠으니까. 해답은 단 하나예요. 나를 못난이로 만드는 거예요. 자발적으로 그것도 기쁨으로. 이건 우러나면서 나 못난이라도 좋아. 그걸 세 자로 상사병이라 하는 겁니다. 정말 지혜 문서 시편 욥기 아가 전도서 잠언 같은 것은 내려오던 출애굽적인 언약적인 언약 노선으로 해석이 안 되는 거예요. 해석이 전부가 아니에요. 해석이 안 되는 게 아니라 그 해석을 옆구리에 꽂아 내지만 만개한 꽃처럼 언약을 옆구리에 쑤셔서 활짝 핀 게 바로 아가 잠언 시편 이런 거예요.
그래서 잠언서를 하면서 사실 이야기할 것 같으면 할 게 굉장히 많아요. 사람은 제비를 뽑으나 일의 작정하기는 여호와니라. 이 말은 잠언서 1장부터 31장까지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서 어떤 스토리가 하나도 없어요. 스토리가 전혀 없어요. 스토리가 5절까지 또는 6절까지 경우는 몇 가지밖에 없어요. 술 먹지 마라는 게 들어가고 그 다음에 음녀를 찾지마라, 하는 그게 5절 6절 가고 전부 다 단편 단편 그야말로 격언이에요. 격언집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을 할 때 보면 동양에 사는 우리로서는 평소에 아빠한테 엄마한테 윤리적 도덕적으로 잔소리 많이 들었던 내용뿐이에요. 니 세상에 나갈 때 행동 똑바로 해야 된다, 라고 하면서 나왔던 이야기들이 가득 차 있는 것처럼 as if 마치 그런 것처럼 보이는 귀절들이에요.
보면 깊이도 없어요. 다 아는 이야기예요. 나라도 몇 개 더 보태가지고 써 붙여 넣을까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다 아는 이야기인데 여기 32절 봅시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다 아는 이야기잖아요. 사람이 결혼하기 위해서 여자의 마음을 훔치고 하는 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성을 빼앗는 것보다 어렵다. 그래서 나 동의한다. 어쩌라고? 해석 넘어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잠언서가 해석은 목사가 설교할 게 없어요. 왜냐하면 설교할라 치면 교인들이 벌써 마음속으로 목사님 그건 내가 다 아는 거고 일찌감치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냥 넘어갑시다. 설명하는 자체가 잠 옵니다.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진짜 핵심을 몰라요. 남의 것 신경쓰지 말고 니나 잘 하세요. 그게 핵심이에요. 니나 잘 하세요.
사람들은 잠언서를 볼 때 이 말씀 지켰으니까 대인관계나 사회 나가서 이 말씀 지킨 값을 보상으로 얻어내려고 하는 거예요. 눈이 사회 가서 있는 거예요. 왜? 이것만 잘하게 되면 내 원하는 것 주실 거죠, 라고 기대를 가지면서 잠언서를 보면서 열심히 지키고자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잠언은 뭐가 되는가 하면 처세술이 돼요. 세상에 나가서 이렇게 하면 성공하는 사람의 입지론 그렇게 돼요.
똑같은 말을 해도 잠언대로 살았더니만 세상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아 성공했다. 이렇게 된다고요. 결론이 그렇게 난다는 것은 원래부터 그걸 노렸다는 뜻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니가 사회 나가서 어떻게 될까, 남들이 뭘 보냐가 아니라 니나 잘 하세요 하는 뜻이에요.
그래서 잠언서를 할 때는 언약적인 노선을 이야기하고 보태서 잠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에 그 언약적인 노선의 완성이 지혜 문서 잠언이에요. 지혜문서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이 두리번거리면서 살고 세상 어떠니 하나님이 어떠니 예수님이 어떠니 하는 것 그것 다 잠언이나 지혜 문서에는 다 쓸데없는 거예요. 세상일에 대해서 우주 일에 대해서 나한테 맡긴 적이 없다. 너 왜 그렇게 쓰잘데없는, 내가 일 하겠다는데 니가 개입하지 말라는데 니 왜 자꾸 껍죽대면서 우주가 어떠니 세상이 어떠니 왜 사회는 이러해야하니 촛불 집회는 더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왜 쓸데없이 그런 데 관심 두느냐? 그건 하나님 내 소관이야, 라고 다그치는 것이 잠언이고 그게 시편이고 그게 욥이에요.
여러분. 이러니까 좀 이해되지요? 욥의 마지막이 뭐라 합니까? 욥이 나의 고난은 어디서 왔느냐? 세상은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은 그건 니 알 필요없어. 니나 잘 하세요. 딴 데 신경쓰지 말고. 이게 삶의 지혜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러분 더 쉽게 하려면 전도서 보세요. 전도서에서 책 많이 내는 것도, 책을 많이 내고 공부 많이 한 것도 그리고 맞벌이해서 돈 버는 것도 그리고 선한 일 하고 바르게 사는 것도 아무 쓰잘데기 없는 짓거리를 해온 거예요.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선인이 당하는 것 악인이 당하는 것 착한 일이 악인이 당하는 것과 똑같이 당하고 악한 일이 분명히 저주받을까 했는데 의인처럼 멀쩡하게 살아가는 것 니 눈에 목격시켜줄게. 왜 이렇습니까? 말하지 마. 니나 잘 하세요. 니가 주제넘게 넘볼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쯤 해서 다시 본문 봅시다.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누구한테 있습니까? 여호와께 있느니라. 그 담겨있는 의미가 다가오지요. 인간이 설쳐봤자 설쳐 봤자예요. 몸 건강하려고 해독 쥬스 먹어 봤자예요. 잠언 내용하고 같이 보면 됩니다. 왜 자꾸 나대고 정치 문제 사회 문제 경제 문제 자꾸 나대느냐? 뭐냐 하면 내 가치를 내가 관리 안 하면 누가 관리하겠냐는 바로 비지혜적인, 주님을 엿 먹이는 그런 내부 성향이 계속 죽을 때까지 작동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부가 결혼했으면 잠언에 의하면 아내는 지 일 하면 되고 남편은 자기 일 하면 되지 둘이 간섭하지 마라는 거예요. 부부라 할지라도. 그러면 헤어지라는 말이 아니고 각자 일 하면 그게 부부라는 겁니다. 각자 일 하면. 잠언서 31장에 그렇게 나와 있어요. 아내가 아내 일을 할 때 그것을 아내가 똑똑하다고 보지마세요. 왜냐하면 잠언서에 보면 어떤 인간도 똑똑한 인간은 없습니다.
잠언서에서의 개인은 뭐냐 하면 백날 해 봤자 그 가치를 안 알아준다는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진짜 언약의 완성, 지혜로운 자라, 이게 포인트입니다. 내가 백날 맛있게 감 해봐야 알아주기를 원해서 깎아 봐야 내 소원대로 안 알아주는 것이 세상일이라는 것,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해서 이웃을 통해서 나를 개무시하기로 하나님이 작심을 했어요. 왜냐하면 인간이 설치면 하나님의 일이 가리워집니다. 내가 설치면.
그러면 우리는 그걸 알고 안 설치느냐? 안 설칠 위인들이 아니에요. 인간은 자기 가치를 자기가 챙기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강의에서 이렇게 했지요. 인간은 쉬지 않는다는 것. 인간은 쉬지 않아요. 자꾸 뭔가 꾸밉니다. 한번 해외여행 갔다 오면 그게 끝이 아니에요. 그 다음에 다음 계획 세웁니다. 다음엔 사이판에 갈까? 라오스 갈까? 이번엔 유럽 갈까? 이스라엘 갈까? 자꾸 계획 세웁니다. 돈이 없어 문제지. 또 나갈 생각하고 계속 나갑니다. 인간은 계속 움직입니다. 움직이면 살고 안 움직이면 죽어요. 그 자리에서. 돌이 됩니다. 그래서 항상 환자들도 움직여야 돼요. 의사가 20이고 환자 움직이는 건 80이래요. 90살 먹은 여자 의사가 그런 얘기했어요. 80대 20이에요. 의사는 20밖에 안 해요. 80은 지가 움직여야 돼요. 누워있으면 안 돼요. 움직여야 된다고요.
그러면 움직이면 나한테 이익입니까? 아니 그건 지혜가 아니에요. 움직일 수밖에 없는 그런 개 같은 인간이다. 나는 짐승에 불과하다는 걸 인지하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자기 모습을 제대로 파악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이게 잠언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잠언서에 나오는 모든 말씀들은 단락 단락 이 말씀들은 뭐냐? 이걸 보는 동시에 인간은 이대로 살려고 움직일 겁니다. 눈 감고 아무 것이나 펼쳐도, 펼쳤습니다. 펼치고 아무 거나 봅니다. 20장 20절 아무 거나 보는 거예요. 자기 아버지와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그 등불이 유암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자기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등불이 유암 중에 꺼지리라, 하는 이 대목을 칼 가지고 찢어봅시다. 찢어지는 것을 공중에다가 세워놓습니다. 그 다음에 21절을 세워놓는 거예요. 그 다음 19절 18절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를 주욱 세워봅니다.
이 우주 자체가 촘촘한 그물망입니다. 안 걸릴래야 안 걸릴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같은 잠언서 내에서 동일한 말씀이 충돌되는 내용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수십 가지예요. 하라 했다가 하지 마라 했다가. 술 먹지 마라 했다가 술 먹으라 했다가 일 하라 했다가 일 너무 하지 마라고 했다가 가난한 사람을 함부로 무시하지 마라 했다가 가난한 사람을 무시해도 좋다고 했다가. 이 잠언서 내부에서 충돌하는 거예요.
인간의 제한된 생각으로서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출지를 몰라요. 이거 하면 이게 걸리고 저거 하면 저게 걸리게 되어있어요. 걸리라고 만든 촘촘한 말씀의 장입니다. 그러면 예를 들어서 담양에 대나무 숲에 가면 길이 나 있지만 길 말고 대나무 숲 들어가면 걷기 힘들잖아요. 소나기 올 때 빗줄기가 촘촘하잖아요. 촘촘한 속에서 우리가 놓여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항상 거기서 “주의 말씀대로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 말씀 어겼다고 너무 탓하지 마세요. 동일한 주의 말씀에 이건 지켰잖아요.” 하고 자기 정당성을 하겠지요. 그럴 때 뭐라 하느냐 하면 사람은 제비를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니라. 이게 뭐냐 하면 니가 이거 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몽땅 다 아무짝도 소용없고 서로 말씀에 안 걸릴 수 없게, 걸릴 수밖에 없는 존재로 남겨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지혜인 겁니다.
잠언서 8장 봅시다. 잠언서 8장 1절에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지혜가 불렀다는 거예요. 명철이 소리를 높였다는 겁니다. 심지어 지혜가 거리에서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지혜가 키가 얼마인지 알 수 없는데요. 지혜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본 적이 없는데요. 근데 지혜가 뭐냐 하면 말씀 자체가 지혜라는 거예요. 잠언서 8장 22절 23절 보면 만세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에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뭔가 보이지 않는 분이 지혜가 인격체가 되어가지고 모든 인간들의 이 세상사가 움직이는 모든 것에 계속 어떤 작용을 하고 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욥기의 마지막 대목을 보면 돼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쉽게 말해서 모든 일의 결정은 이미 확정날짜 잡혔어요. 이미 결정 난 겁니다. 이렇게 알게 되면 니는 확정난 주님 앞에서 쓰잘데없이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잠언서에 나옵니다. 남의 일에 보증서지 말라 했어요.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니나 잘 하세요. 니 주제파악이나 하세요, 라는 것이 잠언의 핵심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살았습니까? 내가 남까지 배려한다는 칭찬을 고려해서 칭찬을 예상해서 얼마나 남 도와주려고 애를 썼습니까? 다 쓸데없는 짓을 한 거예요. 그게 제비 뽑는 것과 같은 짓을 한 거예요.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 있는 겁니다. 자식들 커온 거 주님의 희생 때문에 그렇게 온 거예요. 나는 거기에 전혀 보탠 적 없습니다. 주께서 지금도 인도하고 있어요.
우리는 이 말씀 잠언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 그것만 알면 돼요. 안 걸리는 게 없어요. 다 걸렸어요. 어느 대목이든. 가만 보면 전부 다 “니 이래도 살래?” 하는 식으로 우리를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 말은, 하지 말라가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과 세상 되어지는 일과 별개라 이게 무관하다는 사실이에요. 내가 내 인생 이렇게 살잖아요? 이게 내가 해왔던 것, 내 행한 것과 내 인생과 별개라는 겁니다. 내가 살아온 것은 주의 작정 된 뜻의 일이고 나는 그것도 모르고 내가 맨날 선택하고 고민하고 결정하고 어느 것이 옳은 선택인지 나쁜 선택인지 어느 것이 착한 일인지 나쁜 일인지를 선악적 논리에 빠져서 계속 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랑하게 되면 내가 강도가 되든 창기가 되든 세리가 되든 그건 관계없어요. 왜냐하면 사랑이, 사랑해주기 위해서 사랑하는 분이 나로 하여금 창기 되게 하고 강도 되게 하고 세리 되게 했어요. 강도가 자기 강도질 때문에 인생 망가진 인간 인생 망쳐버린 피해자를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아까 뭐라 했습니까? 남 생각하지 말고 니만 생각하라 했지요. 나로 인하여 내가 과속해서 박아가지고 신혼부부 죽었다. 세상적으로서는 용납 안되지요. 책임지려하지요. 책임지지 마시고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말 함부로 해가지고 자식이 삐쳐가지고 그때부터 빗나갔다. 자식한테 책임감 느끼지 마세요. 내가 그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제비는 내가 결정하지만 작정하는 것은 누가 합니까? 하나님이 그 자식을 그리로 가도록 주께서 그렇게 작정하신 거예요. 보통 독한 생각 아니면 안 됩니다. 독하게 마음먹고 내 한 짓은 다 헛 산 것을 독한 마음먹고 명심 또 명심해야 합니다. 머리 아플 때 먹는 약 명심이 아닙니다. 정말 내 하는 훌륭한 짓이 절대로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는 것. 니나 잘 하세요. 모든 작정은 여호와 손입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