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19a 부산강의 : [시편]8(3편)-관계 재정리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3편 5절부터,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 하리로다”
이 해석에서 제일 핵심은 ‘나’가 누구냐는 겁니다. 나가 현재 보고 있는 나일 수 있느냐?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구성된 나입니다. 언약에 의해서 구성된 나는 없는 나에요. 언약이 없었으면 등장하지 않는 나. 언약에 의해서 구성된 나인지 어떻게 아느냐 하면, 나 주변에 비 언약이 눈에 띠죠. 언약이 아닌 걸 우상이라 합니다. 우상을 한 자로 하면 ‘신’에요.
인간들이 나라는 존재라 하는 순간 신을 요청하게 돼있습니다. 요청한다는 말이 중요해요. 요청한다는 말은 자신의 뿌리, 자기의 근원을 사람들은 놓칠 리가 없어요. 나는 어디서 나왔으며,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그 부모는 누가 만들었지? 부모의 부모, 그 부모의 부모, 최초의 부모는 누구지? 신, 하나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비 언약이에요.
신이라 하니까 비 언약 아닌 것 같지요? 비 언약 신이란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과 연결이에요. 여기가 뭐가 없느냐 하면, 언약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들어갈 이유가 없어요. 나 여기 존재하는데 누가 만들었을까? 하나님. 여기에 무슨 언약이 필요합니까? 나 여기 있음에 누가 만들었을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 이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맞서 싸워야 될 가나안 족속들의 신이었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이 아니에요. 팔레스타인, 옛날 용어로는 블레셋.
블레셋은 뭐냐? 본인 있고 땅 있고 신 있고. 딱 이 세 가지 요소에요. 우리는 알라신 덕분에 이 땅에 산다. 그런데 알라는 신이에요. 특별한 내용이 없어요. 그냥 신이에요. 영어로는 god에요. god를 그 사람들 용어로 사용하니까 알라가 되는 것이지 알라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그냥 보편적 신이에요.
이것은 인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도에도 땅이 있고 그 땅은 그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왔던 땅이 있고 조상 있고 그래서 내가 있고. 그 조상들은 우리한테 전달하기를 이 땅과 조상은 바로 신에서 나왔다. 그래서 힌두교도 신을 믿잖아요. 이건 태국도 마찬가지고 스리랑카,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인도네시아 다 마찬가지에요.
그렇다면 그들이 신을 찾는 이유가 뭐냐고 과거로 돌아보게 되면, 사는 게 힘들어서 그래요. 세계에 220개나 되는데 그중에 경제력이 40위까지 빼놓고 거지꼴이라 보면 됩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한국에 사니까 이 세상이 살만한 세상처럼 보이지만 40위 밖으로 떨어지면 고통의, 저주의 세계에 자기가 태어난 걸 인식해요. 아프리카나 베네수엘라 같은 경우에는 물가가 6000프로나 올라갔지요. 먹을 게 없어서 동물원에서 사자가 먹어야 될 사료를 훔쳐 먹어서 사자는 빼빼 말랐고. 난민 신청이 10만 명이 넘고. 경제대국이 졸지에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뿐 아니고 아프리카는 줄곧 그래왔어요. 그런 나라에서 사는 처신의 방법은 마음을 낮추는 거죠. 하루 두 끼 먹는 게 어디냐. 그들이 마음 낮출 수 있고 견딜 수 있는 것은 다 같이 못 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아프리카 나라에 공산주의가 잘 치고 들어가는 겁니다. 잘 사는 사람 따로 있으면 속이 뒤틀려서 죽고 자살하겠지만 다 같이 못 사니까 다 같이 쓰레기 줍고 사니까 남아있는 것은 정, 이웃의 정으로 붙들고 사는 거예요. 마치 1950,60년대 우리나라 새마을운동 이전에 사람들이 정 나누고 살았잖아요. 새마을운동이 그 정을 다 빼앗아갔지만. 이스라엘이 그 척박한 땅에서 그만큼 사는 것은 키부츠란 협동조합 때문에 그렇죠. 이걸 모델로 해서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일으켜요.
이스라엘이 다른 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우리가 온 게 아니고 신이 불러 모았다는 거예요. 이 점이 어려운데 우린 여기서 태어났다가 아닙니다. 그럼 이 땅은 자기 땅이 돼요. 그러나 가나안 땅은 하나님 땅인데 자기 백성을 바깥에서 안쪽으로 불러 모았다는 의식이 강해요. 그렇다면 이들이 사는 것은 생존이 아니고 뭐냐 하면, 주의 말씀을 따르는 언약을 따르는 사명감으로 버티는 겁니다.
그 척박한 땅에서 죽기 살기로 일하죠. 그 뜨거운 사막에서 갈릴리 바다, 사해 물 끌어들여서 대규모 야자농장을 개척해서 농산물을 생산했고, 축산은 헐몬산에서 했고, 그 다음에 치안이 되면서 관광객들이 와서 국민소득이 한국보다 조금 못하겠지만 얼추 살아요. 그렇게 사는데 픙경은 우리나라 80년대 정도밖에 안 돼요. 그렇지만 아주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혼란스러워요. 안정감이 없고 전부 총 들고 있고.
그러면서도 그들이 버티는 것은 생존이 아니고 사명감이라는 겁니다. 이건 우리한테 굉장히 시사하는 바가 있지요. 이것은 생존 때문이 아니고 살아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살아야 됩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 언약 때문에. 내 목숨보다 언약이 우선이다. 이게 이스라엘의 특징이에요. 그런데 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죽었잖아요.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죽였다면 오늘 본문 시편은 이스라엘의 교과서에요. 이 시편을 통해서 두 가지 해석을 끄집어내야 됩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이스라엘적 안목을 끄집어내야 돼요. 또 하나의 안목은 뭐냐 하면, 그들은 새 언약을 믿지 않습니다. 구약 언약에 의해서 시편을 어떻게 봤는지 하나, 두 번째는 신약, 새 언약, 이 살과 이 피로 내가 새로운 언약을 세우리니. 너의 모든 죄를 이 피로 씻어 준다는 복음적인 관점에서 시편 3편을 다시 해석해야 돼요. 두 가지 해석이 나와야 됩니다.
만약에 첫 번째 해석, 구약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고 한다면 기존 교회처럼 돼버려요. 교회 나와서 하나님 덕분에 밥 먹고 살았습니다. 이건 하나님을 죽이는 사고방식이에요. 안목입니다. 하나님 믿었는데 해준 게 뭐 있나? 이거는 기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께 대들었던 그 사고방식이에요.
어제 오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세례요한을 주목해야 된다. 세례요한 생각하지 않고 신약이 나올 수 없어요. 왜냐하면 세례요한은 구약 사람이기 때문에. 구약의 율법으로 세례요한은 어떤 인간이었느냐? 여자에서 태어난 최고의 남자는 세례요한이다. 다시 말해서 가장 율법적 인간이에요. 율법적 인간이지만 예수님 오셨을 때 오실 메시아가 당신이옵니까, 라고 단절, 끊어짐ㄴ을 의미하고 있어요. 내가 생각하는 내 세계에서는 당신은 메시아 아닌 것 같습니다. 도대체 납득이 안 된다고 한 거예요.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례요한에게 하나님이 계시하기를 오실 메시아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돼있어요. 너는 물로 세례주지만 이쪽은 성령으로 세례 주는 거예요. 그렇다면 물로 세례 주는 구약과 성령으로 세례 주는 신약 사이에 단절이 있고 이 단절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십자가를 경유한 자에게만 물세례가 아니고 성령으로 세례를 줘버립니다. 건너올 수가 없어요.
세례요한이 지옥 갔다는 말이 아니에요. 세례요한은 하나의 배역, 역할을 맡은 거니까 역할한 사람을 나무라면 안 돼요. 배역과 자기의 속성을 일치시키면 이걸 메소드 연기라 하는데 너무 이러면 곤란해요. 배역과 그 사람의 역할에 빠져버리면 영화인지 실제인지 모르고 성폭행하죠. 이것 안 돼요. 그 배역은 본인의 속성에다 주께서 사명으로 입혀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십자가란 율법적 의식으론 뚫어낼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1번 해석을 꼭 알아야 돼요. 시편 3편에 나오는 구약적 이스라엘적 해석을 알아야 될 것은 바로 육적인 해석이기 때문에 알아야 돼요. 육적인 해석이 어떤 문제가 있기에 천국 가는 영적인 해석으로 건너올 수 없었느냐? 육적 해석 안에 어떤 요소가 영적 해석으로 건너오게 못 했는지 알아야 됩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한다면, 시편 3편 5절에서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 하리로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여기서 ‘나’가 누구냐 하는 거죠. 시편 읽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아까 이야기한 우상, 쉽게 말해서 신, 신을 믿는 이 사람들은, 힌두교가 대표적인데 베가라는 노래 작품집이 있어요. 신의 계시죠. 신의 계시를 보고 믿으면 된다. 믿음이란 본인이 본인에게 설득당하는 거예요. 이게 세상적인 믿음입니다. 자기가 자기한테 설득당하는 것. 억지에요. 본인에게 의심을 해야 되는데 의심 없이 그냥 믿어버려요. 왜 그러냐 하면 자기한테 이익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일단 끌어 모아보자.
주부들 취미 가운데 이런 취미가 있어요. 티비 홈쇼핑 보고 무조건 사대는 겁니다. 하루 종일 하는 일이 문 열어주는 거예요. 혼자 노는 재미론 괜찮은 재미에요. 계속 문 열어주고 택배 받고 돌아서서 문 열어주고. 마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끊임없이 선물 준다는 호의, 바깥에서 나에 대한 배려 같은 느낌이 들어요. 난 외롭지 않아요. 계속 손님이 찾아오니까. 그 손님이 택배기사지만. 왔던 사람 또 오고, 왔던 사람 또 오고. 어떤 외롭지 않다는 것, 쓸쓸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아요. 본인이 그걸 요청한 거죠. 그게 바로 억지고 본인이 본인을 설득하는 거예요. 본인이 본인에게 굉장히 관대한 겁니다.
그렇게 끌어 모아놓고는 포장 뜯지도 않아요. 보면 쓸모없는 거예요. 괜히 긴박해서 저쪽에서 sos치는 것 같아서 빨리 구입했는데 보면 같은 것 두 번 산 것도 있어요. 화장품 많이 샀는데 또 화장품 사고. 샘플 더 준다고 해서 사고 그러거든요.
믿는다는 것은 본인이 본인한테 쏠렸다는 겁니다. 자기한테 이익이 되기 때문에. 이런 의식은 어떤 의식이냐 하면, 지금의 나를 블로흐라는 20세기 초기에 독일철학자가 있어요. 이 사람의 철학이 소망의 철학입니다. 이 사람의 철학을 조사해보면, 모든 예술이나 정치, 종교나 인간이 그런 행위를 하는 이유는 바로 소망 때문에 그렇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우리 철학자 강의에서는 안 다뤘어요.
소망이 뭐냐 하면, 지금의 나를 A라 하면 사람은 항상 B를 소망하게 돼있고, 더 중요한 것은 B가 있음에 A가 모든 고난과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의 결론은 인생 자체는 종교 없어도 모든 인간은 종교적이다. 종교적이고 묵시적이고 미래지향적이고. 그것을 인간은 타고난 것이다.
이 사람이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의 내용을 기독교에 머물지 말고 온 영역에 다 확대시켜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기독교에만 특별한 성도란 자에게만 고유한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만 있는 성향이 아니라 따지고 보면 절에 가든 안 믿는 무교주의라 해도 소망이 있다는 자체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묵시적 존재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시도를 매일같이 하고 있다는 겁니다. 힘은 현재에서 나온 힘이 아니고 미래에 자기가 상상해서 자기를 끌어당기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여기서 뭐가 빠지냐 하면, 십자가, 교리, 삼위일체 이런 것은 아무짝에도 소용없지요. 근본원리 알짜배기를 뽑아내니까 나머지는 장식품에 지나지 않지요. 청교도, 믿어야 구원받는다, 이런 것도. 소망으로 산다, 끝. 인간은 소망 없이는 못 산다. 일곱 넘어져도 소망 있으면 여덟 번째 일어난다. 그거잖아요. 마치 잠언에 나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말이죠.
그래서 교회에서 교인에게 본인이 본인을 설득하는 중이란 말은 블로흐의 철학을 본인이 지금 이런 체계도 모르는 채 구동, 스스로 가동시키고 있어요. 교회 나오든 안 나오든. 그러면 목사가 할 것은 그들의 소망을 현실화 할 수 있다고 뒤에서 후원하고 격려해주면 되는 거죠. 뭐로? 성경말씀으로. 이게 복음입니까? 이게 바로 우상이죠. 그 소망의 마지막은 신과 결합되고 신과 만나는 그날이잖아요.
1992년 이장림이 예수님 재림한다는 이야기가 왜 그렇게 신드롬처럼 전염병처럼 퍼졌느냐 하면, 서민들은 복잡한 건 싫어요. 자기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블로흐에 의하면 소망의 철학이 들어있어요. 타고났어요. 또 집에서 그걸 강요하고. 다섯 살밖에 안 된 애를 유학 보낸답니다. <같이 살래요> 드라마에서. 왜 다섯 살밖에 안 된 애를 재벌 집에서 유학 보내느냐? 소망 때문에. 지금 이런 식은 안 되고 나중에 기업의 후계자가 될 그날을 생각해서 애를 유학 보내고. 엄마는 그걸 참아야 돼요. 참지 못하고 이혼하겠다면 이혼해라고 나왔지요. 세상의 모든 것이 종교적이에요. 종교가 없더라도 이미 종교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소망이 끊어진다? 자살이죠, 뭐. 나를 끌 수 있는 것이 깨졌는데 희망이 좌절됐는데 나는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에요.
그래서 블로흐란 이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무엇이 있다, 존재인데. 무엇이 있다는 생각하지 마라. 무엇이 움직이는지 봐라. 무엇이 움직일 때 그 배후에 무엇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왜 움직이는지 보라는 겁니다. 모든 것은 멈추지 않고 움직이니까. 사람들은 뭘 볼 때 스톱 시켜놓고 보잖아요. 그렇게 보지 말고 움직인단 말이죠. 만약에 스톱시키면 누가 나를 찍으면 사진이 나오겠지요. 하지만 이건 일종에 영정사진이에요. 왜? 움직임이 빠졌으니까 이건 영정사진 밖에 안 돼요. 그걸로 내가 스톱이 아닌데 마치 이걸 보는 순간 스톱이 된 걸로 알고 있어요.
우리 외손녀가 우리 집에 와서 동영상 300개 더 찍었을 거예요. 사진 찍고 집에 다 붙여놨어요. 떠나도 그리워 볼 것이라고 했는데 이 작전이 완전히 실패했어요. 왜냐하면 벌써 지난 이야기라. 재미가 없어. 계속 새로워. 아이가 나이가 드니까. 24개월에서 25개월. 옛날에 찍은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없어요. 존재는 없어요. 움직임밖에 없어요.
성경은 이야기하죠. 인간의 모든 존재는 흙이 된다, 죽음으로 간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안 믿기 때문에 죽는 건 알지만 그땐 그때 일이고 지금 내가 A에서 B로 뭐로 변하느냐? 여기에 관심 있어서 지금 나로 하여금 나답게 된다 이 말이에요.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신이시여, 도와주소서.” 신을 위해서 신을 믿는 게 아니고 내가 되고 싶은 것을 위해서 후원해달라는 겁니다.
그러면 B가 되면 끝입니까? 아니죠. B 돼야 비로소 보이는 게 있어요. B가 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C가 또 있습니다. C 있으면 D가 있고. 계속 흐름밖에 없어요. 그래서 어디로 가느냐? 죽지요. 결국은 자기가 왜 죽는지 모르지요. 사람이 죽는 것은 과학적으로 텔로미어가 닳아서 죽는다 하지만 그게 아니고 왜 죽느냐 하면 언약 때문에 죽어요.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그래요.
나는 언약 모르는데? 본인은 모르지요. 본인의 조상과 맺었으니까. 아담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있거든요. 다른 말로 하면 그때는 언약이라 하지 않고 약속이라 하는데 이 약속에 의해서 아담을 통해서 새 아담이 나오도록 약속돼있습니다. 죽음 가운데서 생명이 나오도록 돼있어요. 아담이 죽어야 두 번째 아담 나와요.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으로 오셔서 주가 되셨잖아요. 여자의 몸을 통해서 여자의 후손이 나옵니다. 여자의 몸에서 남자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이 나오는 것은 뱀도 후손을 내기 때문에 병행해서 경쟁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약속의 내용이 그런데 지금 초점이 그게 아니기 때문에 여기까지만 말씀드릴게요.
하여튼 인간이 죽는 것은 인간 입장에선 섭섭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선 필수코스니까 주님의 필수코스에 참여한 것을 너무 서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죽어야 주님이 산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오잖아요. 난 날마다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를 뽑아내기 때문에 나 죽는 것을 섭섭하게 생각해선 안 돼요. 내가 죽으면 내가 믿던 신도 죽어요. 신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죽는 순간 내 가정, 내 사업, 내 하는 일에 협조했던 신들도 내가 죽음으로서 같이 은퇴해야 되고 파괴돼야 되고 없어져야 됩니다.
그럼 이야기를 진전해볼게요. 1번 해석은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편을 해석할 때, 2번 해석은 신약에 있는 성령 받은 사람 베드로, 성령 받은 사도 바울이 시편을 어떻게 해석했는가? 우리는 둘 다 해석을 알아야 됩니다. 첫 번째 해석밖에 모른 사람이 바로 세례요한이었지요. 세례요한이 큰 자지만 천국에선 소자라도 세례요한보다 더 크다고 했어요. 이미 천국 안에 있는 사람.
그래서 어제 낮에 끝부분에 이런 이야기했어요. 세례요한이 제시한 회개한 자는 이런 열매를 맺어야 된다면 오늘날 성도는 세례요한이 맺어야 할 열매를 따라야 됩니까, 어떤 열매를 맺어야 됩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존재 자체가 열매라고. 열매를 맺는 게 아니고 인간 존재 자체가 작품이고 열매에요. 바로 요한복음 15장이에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파생된 거예요. 엿가락 늘어나듯이 그리스도의 몸에 쭉 뽑아진 거예요. 우리가 따로 열매를 맺으면 그 열매는 몸체를 모독하고 있습니다.
너, 왜 그런 짓했어?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는데 그 말 외에 무슨 말 할 거예요? 너, 인생 왜 그렇게 살아? 주께서 그렇게 했어. 너, 일부러 억지로 그러는 거지? 억지가 아니에요. 억지라면 그렇게 살겠어요? 우리의 의사에 반해서 일어난 거예요. 내 뜻대로가 아님을 본인은 알아요. 남들은 그게 납득이 안 돼요. 본인은 납득되고 말고가 아니에요. 납득된다고 더 늘어지고 그런 것 없어요. 이미 주어진 상황 자체가 내가 원치 않는 상황이 자꾸 움직여지는 거예요. 존재가 아니고 자꾸 움직여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블로흐에서 특징이 뭐냐? 존재가 아니고 모든 것에 놀람이다. 소망의 철학은 한 마디로 놀람의 철학이에요. 좋아서 놀라는 게 아니고 이상해서 낯설어서 내가 원치 않는 인생에 대해서 화들짝 놀라는 거예요. 블로흐가 그런 이야기했어요. 왜 철학이 비 체험적이냐? 인생은 체험인데 체험은 놀람이다. 내가 의도하지 않는 방식으로 나는 B를 원했지만 주께서는 C를 원하는 식으로 했을 때에 그게 바로 모든 인간은 사실은 따지고 보면 종교적이라고 한 겁니다. 신비적이고 영적이고 그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그래서 기존 교회신학에 대한 도전이죠. 그것도 신학이냐? 그건 교회 장사해먹는 것이지 실제는 이거야. 너희가 인생을 알아? 이게 인생이야. 놀래는 거야. 자기에 대해서 놀래고. 놀랜다는 말을 저는 열매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주체가 아닌 열매, 내 안에 다른 주체가 만들어낸 열매, 그 열매를 놀랜다고 하지만 성경대로 하면 고마움과 감사에요.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 내가 구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사해야 되고, 앞으로도 내가 설계하지 않기에 감사하고, 내가 맡겨진 자로 다뤄주시니 감사하는 거예요.
맡긴다는 것은 구약적 안목이에요. 내가 맡길 때만 주께서 맡아준다는 것은 구약적 안목이에요. 내 시도 이전에 우리를 납치했어요. 납치하고 포획했고 덮쳤고 우리를 강간했어요. 주께서 성폭행했고. 그 성폭행 장면이 아가서에 나오잖아요. 오지 말래도 따라와요. 신랑이,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인에게. 문 열어! 다 부술 거야. 문 안 열고 버티니까 저쪽에선 벌써 나를 규정해버렸어요. 사랑하는 나의 누이여, 나의 신부여. 요새 말로 하면, 여보~. 상견례도 안 했는데 여보라고 달려들어요. 반드시 여보 되고 여보 되게 하고 말거란 거예요. 그걸 두 자로 사랑이라 하지요.
오늘 강의의 핵심은 뭐냐 하면,
이 사랑을 위해서 모든 인간적 관계는 다 끊어버려야 돼요. 왜? 인간과 인간관계는 새 언약이 아니고 옛 언약, 우상적 관계로 얽혀있기 때문에.부부나 가정이나 자식이나.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에서 천하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다 끊어버려요. 아버지가 죽었는데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례하라. 이게 뭐냐 하면, 모든 인간관계를 다 끊어버리고 재규합하는 거예요. 다시 규합할 때 무슨 요소를 집어넣는가? 하나님의 새 언약 요소를 집어넣어서 새로운 가정을 만드는 겁니다. 사랑을 집어넣어요. 사랑을 집어넣는다는 것은 율법 말고 집어넣는 거예요. 내가 행한 것으로 집어넣는 게 아니고 행하지도 않는 새로운 관계로 주께서 집어넣은 십자가로써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는 새로운 관계를 구성합니다.
그렇게 되면 복수가 아니고 한 사람이 되면서 오늘 시편 3편에서 나라고 하는 거예요.
복잡하지요. 나라는 걸 끄집어내기 위해서 바로 1번 구약적 해석부터 제가 시작했어요. 본격적으로 할 건데 그 논리를 이제부터 전개할 거예요. 구약, 옛 언약에서 나라는 것은 옛 언약에 의해서 조성된 관계로 너, 나가 돼요. 우리가 되고. 율법이죠. 그런데 신약에 와서 복음에 와서 나라는 것은 율법에서 맺어진 관계가 와해된 것을 기초로 하게 되면 너, 나가 다 끊어져요. 끊어진 것을 마치 흩어진 철을 지남철을 갖다 대면 다 끌리죠. 십자가로 다 잡아당기게 되면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다 그렇게 돼요.
그 하나 됨의 힘은 머리에서 나오고 머리의 열매가 지체가 되면서 그것을 우주의 중심 또는 그리스도의 몸, 두 자로 하면 교회, 이렇게 되는 겁니다. 교회는 인간이 만드는 게 아니에요. 머리가 만들지 지체가 교회를 만드는 그건 반칙이고 사기고 엉터리입니다. 지체가 만드는 교회는 없어요. 머리 되신 분이 만들어요.
요한복음 6장 39절에 내가 택한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때에 다 살린다.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한다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약속을 했잖아요. 그 약속을 우리 사이에 한 번 찾아보자는 말이죠. 내가 공들여서 내 사람 만들었는지 아니면 주께서 잃어버리지 않는 그 힘으로 우리가 만났는지 본드가 십자가라는 복음이라는 본드로 결속이 돼있는지 아니면 내가 준 사랑, 정성으로 됐는지 보자는 말입니다.
제가 어제 낮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사실은 선교나 전도가 있으면 안 돼요. 주님께서 이미 누가 구원될지 확정 마감했거든요. 마감되고 난 뒤에 구원하는 게 아니고 누가 구원받았는지 찾아다니죠. 성령께서. 잠자고 있는 네가 구원받았어. 너도 합격, 너도 합격. 제가 어제 낮 설교하면서 <황금빛 인생> 한 대목을 소개해드렸습니다. 1억8천만 원 종신보험으로 나눠주듯이 이미 율법의 저주로 말미암아 돌아가신 분이 자기 생명을 종신보험 분배하듯이 우리에서 이름 부르면서 그냥 주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율법도 없는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 거예요. 성령세례로 말미암아. 무죄가 아니고 아예 적극적 의인이 돼버린 거예요. 더 나쁜 짓해도 의인됐어요. 이건 왜냐하면 나 있음이 블로흐처럼 A가 있음에 B가 되는 게 아니고 이 세상에 없는 것으로 인하여 내가 됐기 때문에 나는 낯설고 그냥 깜짝깜짝 놀라고 내 인생 어디로 가는 구경이나 해볼까? 자기 인생에 대해서 구경꾼 같은 입장에서 웃으면서 여유롭게 이론적이지만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이 어렵기 때문에 제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는데 그 과정을 봅시다. 7절에 보면,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라고 돼있어요. 구약적 안목부터 먼저 봅시다.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만들었어요. 없는 나라입니다. 히브리인이었지만 애굽이란 존재로 인하여 비로소 등장해야 될 없는 나라. 원래 이스라엘은 없는 나라인데 히브리인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이스라엘이 아니고 애굽이란 나라가 있는데 애굽에 히브리인도 살고 애굽인도 섞여 사는데 애굽인으로 말미암아 등장한 나라가 히브리가 아니고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뱀이 아담을 유혹함으로 말미암아 여자의 후손이 등장해야 되듯이 애굽으로 말미암아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면 애굽과 히브리인은 동일해요. 똑같은 인간들이에요. 그런데 여기에 경계선에 하나님의 언약을 집어넣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는 언약을 집어넣는 순간 똑같은 인간, 정 나누고 친하게 지낸 이웃관계가 어린양의 피 바르라는 이것 하나 때문에 죽음의 사자, 심판주가 개입해버려요. 그게 “여호와여 일어나소서”에요. 자기 백성을 애굽의 미끼로 먹히도록 허락하고, 이게 언젠가 할 날이 오겠는데요.
이스라엘 유적답사하면서 이상현 목사와 아내와 이야기했어요. 쿰란공동체 이야기를 쭉 하면서 이런 이야기했어요. 그 질문은 여러 번 했어요. 왜 하나님께서 좋은 땅을 주시지 않고 사막 땅을 주셨는지 질문을 했어요. 제가 생각하는 답변을 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온 세계가 저주의 세계에요.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가 저주받아야 돼요. 그렇다면 젖과 꿀이 흐른다는 의미는 당연히 줘야 되는 게 아니고 웬 보너스냐는 입장에서 받아줘야 돼요.
하나님께서 광야를 통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게 하시는 것은 사막 경험을 먼저 해서 신명기 8장 말씀처럼 사막을 가게 한 것은 마음을 낮추고, 낮추고, 낮추기 위해서 한 거예요. 마음을 낮춘 입장에서 가나안 땅이 멋진 땅이에요. 마치 에덴동산처럼 보이도록 주께서 세팅을 그렇게 한 거예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자 노력한 자들이 있었으니 우리가 갔던 쿰란공동체에요. 동영상을 굉장히 많이 찍었는데 성경에 안 나오기 때문에 유적답사 동영상에는 올리진 않았어요. 쿰란공동체가 기독교 신학에서 중요한 게 하나 있고, 복음적으로 중요한 게 있어요.
먼저 기독교적으로 중요한 게 쿰란공동체가 이사야를 필사했는데 이 사람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사는 게 아니고 자발적으로 사막에 살다보니까 글씨가 지워지지 않고 잘 보관이 됐어요. 이걸 양치는 소년이 동굴에서 발견했는데 이사야서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은 기독교계가 잠시 긴장했어요. 현재 있는 맛소라 사본과 이것보다 더 오래된 쿰란공동체에서 나온 이사야 사본과 글자 하나하나 다르면 어떻게 하나 하고 긴장했는데 놀랍게도 글자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제대로 맞는다고 안심했는데 제가 보기엔 믿음과 관계없지만 좋아들 했어요.
제가 복음적으로 보기에는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자발적으로 결별한 점이에요. 쿰란공동체의 특징은 뭐냐?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제사를 폐한다는 말씀대로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마지막 때에 의인이 된다고 우겼던 자가 쿰란공동체에요. 말씀을 지킴으로서. 제사를 인정하지 않아요. 마치 바리새인들과 비슷한 의식을 갖고 있는데. 그래서 예루살렘에선 이들을 이단시해서 추방했고 사해 근처에 황량하게 있었습니다.
사막에 있었기에 약속의 땅의 의미를 새롭게 할 수 있다. 언젠가는 예루살렘은 우리 것이 될 것이고 메시아가 감람산에 올 것이라고 믿었던 겁니다. 스스로 의인으로서. 철저하게 인간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거룩과 경건을 유지하려고 하루일과 스케줄도 다 나와 있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그 다음에 노동하고 밭 갈고 물 모으고 다시 기도하고 성경말씀 보고 자기 몸을 씻고. 거기서 나온 게 물로 세례 준 게 나오거든요. 그래서 학자들은 세례요한이 물로 세례 주는 걸 어디서 배웠겠는가? 아마 세례요한이 쿰란공동체 제자이거나 아니면 방문해서 한 수 배웠거나 이렇다는 거예요. 그건 말도 안 되지요.
어쨌든 간에 애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린양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나라가 만들어졌으니 밤에 나타난 나라, 그걸 여호와 밤이라 해요. 이스라엘이 낮에 있는 모든 나라를 공격합니다. 그럴 때 무엇을 앞장세우느냐 하면, 어린양의 피를 앞장세워야 돼요. 어린양의 피의 취지를 더하기 위해서 호렙산, 시내산에 모세가 올라가서 돌 판을 받고 돌 판과 나무상자를 결합해서 언약궤가 됩니다. 언약궤 실제 모형을 동영상으로 보셨지요.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해요. 언약궤를 성경 봐도 몰랐는데 동영상 보니까 눈에 들어온다는 거예요.
언약궤로 말미암아 애굽과 완전히 결별해야 됩니다. 결별하려면 그냥 결별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이들로 하여금 흩어지고 다시 모으고, 흩어지고 다시 소집되는 것을 광야에서 열 번이나 반복해요. 그렇게 해서 인식이 뭐냐? 같은 형제, 같은 친구가 같이 약속의 땅에 가는 게 아니고 새로 재구성해야 된다. 모든 가족이고 뭐고 재구성해야 되는데 재구성하는 요소가 뭐냐? 어린양의 피를 위해서 그리고 십계명 플러스 각종 규례, 율법들로 재구성하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신명기 21장에 보면, 아들이 술 먹고 개처럼 굴거든 부모가 손대지 말고 동네에서 돌로 쳐 죽여라. 안식일에 나무하거든 죽여라. 죽이라는 게 많아요. 꿈을 해몽하고 점치거든 죽여 버려요. 이건 기존의 관계를 죽여 버려라. 저 사람은 내 사람이니까 살려야 돼. 이러지 말고. 돼지고기 먹는 사람 죽여 버려라. 그래서 이스라엘서 햄 하나 못 먹어봤어요. 모든 관계를 전부 재편성하는 거예요. ‘어린양+율법’으로.
율법으로 제시해서 죄인 것은 죽이되 회개하면 살 수 있는 것은 어린양의 피의 제물을 바쳐서 어린양의 효과로 다시 어린양의 몸에 뿌렸다는 입장에서 들어올 때는 다시 내 자식이고 내 남편이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스라엘이 될 때 희한한 일이 벌어져요. 어린양을 앞장세웠더니 모든 민족이 언약궤에서 나오는 위력 때문에 이들이 이스라엘에 패배합니다.
시편 3편 7절,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언약궤여 일어나소서라고 이해하면 되지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식으로 등장한다면,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여기서부터 기존에 이방민족들이 이야기하는 악이란 개념이 깨져버립니다. 이스라엘의 악의 개념은 율법적 개념이고 피 개념이에요. 언약의 피를 믿지 않는 것은 악이 돼버립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언약궤를 믿으라는 게 아니라 어려워요. 언약궤를 살아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된다 이 말입니다. 나는 믿었으니까 죄 아니고 안 믿으면 죄다 이게 아니고 지금 우리만 있는 게 아니고 누가 우리 가운데 살아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때 그게 악이 되고 죄가 되는 겁니다.
만약에 집안에 세 식구라면 세 식구로 치면 그게 악이 돼요. 네 식구로 봐야 돼요. 주님이 우리와 함께서 있음을 인정할 때 그게 주님에 의해서 날마다 그 가정은 흩어졌다가 다시 구성되고 흩어졌다가 구성되는 것, 이것이 바로 옛날 언약적 입장에서 시편 5절에 8절을 해석한 거예요.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이 말이에요.
지금 설명한 것이 8절에 보면, 구원은 어디에 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이 말은 손 놔라. 네가 네 힘으로 이길 생각하지 말라. 소년 다윗이 바로 사울 군대에게 보여준 게 그거잖아요. 이건 여호와의 전쟁이지 할례 받지 않는 자를 못 이긴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어린양 피에 의해서 새로 구성됐다면 왜 구성되게 한 본드, 하나님의 피 약속을 믿어야지 우리 자신이 갖고 있는 사적인 힘과 저쪽 인간의 힘으로 직접 대결하려고 하느냐? 그러니까 기죽지.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몸이 큰 아낙 자손들을 약속의 땅에 버티게 만든 거예요. 강력한 여리고성부터 해서 모든 게. 저쪽을 생각하지 말고 네가 누군지 보라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