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자기통치 18051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5. 16. 21:25
2018-05-14 16:48:50 조회 : 142         
자기 통치 180514 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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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  (IP:14.♡.134.25) 18-05-16 14:22 
20180514a 부산강의 : [시편]10(5편)-자기 통치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5편에, “다윗의 시, 영장으로 관악에 맞춘 노래” 다윗이 없었으면 나오지 않은 시. 그런데 이 시는 나중에 성령으로 역사해서 하나님의 예언이 되고 계시가 되지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다윗의 말씀에 맞추어서 예수님이 활동하게 됩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긴 그림자라고 생각하면 간단하지요. 일찍 온 예수님, 그리고 그 시대에 필요했던 예수님. 

그러면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활동했는데 왜 다윗의 활동은 하나님의 계시가 되고 다른 사람의 활동은 하나님의 계시가 안 되는가?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다윗의 시를 통해서는 오시고 왜 다른 사람들이 한 행동은 참고로 하지 아니한가? 그 이유가 여기 시편 5편에 쭉 나와 있습니다. 5절에 보면,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라고 돼있지요. 여기서 다윗만큼은 오만한 자에 해당이 안 됩니다. 그리고 다윗 빼놓고 다른 사람들은 얼마든지 오만한 자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 외에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오만한 자로 보겠어요? 안 보지요. 

이런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하루일정, 스케줄이 있지요. 일정대로 사는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서 볼 일 보고 사는 거잖아요. 이게 오만입니까, 이게 교만이에요? 자기 하루 일정대로 사는데 교만이냔 말이죠. 절대로 교만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눈으로 보게 되면, 이게 오만이고 교만인 거예요. 왜냐하면 주의 목전에서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장차 심판 날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고 심판 오기 전부터 일상 행동 하나하나가 자기 앞에 주님의 현존을 의식하지 않는 겁니다. 이건 오늘이 마지막이란 의식이 없단 말이죠. 오늘, 나의 마지막이에요. 

아침에 기상했을 때는 나의 인생의 시작이고, 시작인 동시에 마지막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루 일과를 보내고 있다고 누가 이야기해주면 다른 사람이 있다가, “너는 너 혼잔데 누구로부터 심판 받는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한다면, 내 목전에 주님이 계시다고 이야기하면 되는 거죠. 살다보면 주의 목전에 있는 게 아니고 하루하루가 주의 목전에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야 이게 계시가 되는 겁니다. 하나의 예언이 되는 거죠. 그럼 누가 원형적으로 하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께서 아버지 앞에 늘 아버지를 의식하면서 살아가셨습니다. 신약에. 그걸 앞당겨진 예수님이 다윗이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쪽에선 할 말이 굉장히 많을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 계획대로 스케줄대로 마음먹은 대로 살아가는 이유가, 내가 여기 있다. 존재지요. 있는 내가 자생적으로 움직이는 에너지가 있음 속에서 나와서 존재에서 존재로 있게 하는 겁니다. 존재에서 존재로 계속 가는 거예요. 이게 오만이고 교만이고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럼 시편 5편에서 존재와 존재로 만나는 게 아니고 사명과 무사명, 사명 없음. 사명 우선이냐, 존재가 우선이냐를 파악하지 못한 사람은 악인이 되는 겁니다. 

사는데 있으니까 산다. 그렇게 되면 안 되겠지요. 장발장이야기도 있지만 길 가는데 제과점이 있다. 현재 내가 배고프다. 보니까 빵이 있다. 들어가서 빵을 먹었다. 뭐가 오만이고 뭐가 교만이고 뭐가 잘못된 겁니까? 내가 배고파서 먹을 걸 찾다가 눈앞에 나의 있음과 먹을 게 있기에 나의 있음이 먹을 게 있음을 취득해서 내 입속으로 집어넣었는데 이게 뭐가 나쁘냐는 거예요. 이거 누가 봐도 나쁘지요. 자기 빵이 아니기 때 돈은 지불하고 먹어야 될 것 아닙니까. 

왜 그러냐 하면, 빵이 있음은 나를 위함이 아니고 그 빵 주인이 따로 있거든요. 빵 주인이 빵을 구울 때는 돈을 얻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돈을 안 주면 빵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있게 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게 있어요. 그걸 지불하지도 않고 내가 여기 살아있기에 무조건, 무조건 나는 살기 위해서 살아가는 데 이게 뭐가 나쁘냐는 겁니다. 빵 주인은 눈에 보이는 게 문제지만 진짜 주인은 우리 눈에 보입니까? 안 보이죠. 그러니까 지 마음대로 사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주인을 다윗은 파악하고 있다는 겁니다. 5절에,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다윗에게 자기보다 더 중요한 존재는 자기 앞에 주의 존재가 더 중요하고 그 주님의 존재로부터 사명이 나와서 사명에 의해서 자기가 후차적으로 존재하는 거예요. 사명 없이 산다는 것은 그건 홀로 사는 건데 악이 되는 겁니다. 아담을 처음에 만들었을 때 주께서 아담에게 이미 사명을 줬어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 그러면 따먹지 말라는 것을 이해하려면 누구 입장에서 생각해야 돼요?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중간에 마귀에 끼어듭니다. 하나님 입장 생각하지 말고 네 입장을 생각하란 말입니다. “먹음직도 하지, 탐스럽지? 그러면 먹어.” 

이건 누구 입장이에요? 하나님이 우선이고 그 다음에 인간인데 마귀는 그 순서를 바꾼 겁니다. 너를 위해서 하나님이 있다는 겁니다. 그 마귀의 뜻은 한결 같아요. 변함이 없어요. 욥기 1장에도 나오잖아요. 사탄의 말이 뭐냐 하면, 까닭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인간 쪽에서는 없다. 하나님을 섬기되 인간은 자기한테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입장에서는 자기 사는데 도움 되기 위해서 하나님 믿는 사람은 전부 다 제거 대상입니다. 

그 일을 어디서 해야 돼요? 교회에서 해야지요. 이유가 있어서 온 사람, 병 낫기 위해서 온다든지, 복 받기 위해서 온다든지, 천국 가기 위해서 온다든지. 내가 하나님 앞에 잘하면 하나님께서 잘해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교회 나온 자들을 전부 다 지옥으로 돌려보낼 집념과 기능, 사명을 교회가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업적이 필요 없어요. 몇 명 모였느냐, 몇 명 남아있느냐는 업적이 필요 없어요. 주님은 업적을 보지 않거든요. 차라리 몇 명 돌려보냈는지가 더 중요해요. 세상으로 다시 꺼지라고 얼마나 자주 보냈는지가 중요한 겁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람이 세울 수가 없어요. 내 몸은 내가 세울 수 있어요. 그러나 교회는 주의 몸이기 때문에 주님이 아니면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악마가 지배하고 있으니까 악마가 원래 아담에게 찾아왔던 사고방식과 정신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겁니다.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중간 연락장소를 만들자. 요새 말로 교회라는 거예요. 교회를 만들자. 이 말은 뭐냐? 교회를 인간이 만들 수 있다가 돼요. 인간이 만들어낸 교회는 완전히 가짜겠지요. 

그리스도의 몸을 인간이 만든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인간은 성전도 만들고 교회도 만들 수 있다고 하니까 그 의식 배후에 결국 그걸 왜 만들겠어요? 물이나 의자, 테이블을 왜 만들겠어요? 하나님 좋으라고 만듭니까? 자기 좋으라고 만들지요. 그럼 교회가 왜 있어요. 성당, 교회를 왜 만듭니까? 누구 좋으라고? 만든 본인 좋으라고 돈 모아서 만드는 거예요. 출애굽기 32장에서 모세가 산으로 올라갔을 때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뭘 했어요? 금가락지 빼서 금은방 했습니까? 신을 만들었잖아요. 신을 만들 때 반대한 사람이 없어요. 이건 모든 인간에 보편적으로 담겨 있는 정신 상태는 하나같이 동일해요. 전부 다 타락한 아담의 품성이란 말이죠. 

그러면 타락한 아담의 품성은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갔을 때 본색을 드러내는 겁니다. 백 퍼센트 찬성한 거예요. 애굽의 황소 만들기에. 그리고 이름을 여호와라 한 거예요. 누군가 우리를 위해서 애굽에서 탈출했는데 그분이 누구냐? 바로 신이다. 신에게 마음을 통합하기 위해서 그들이 애굽에서 익히 알던 신을 도입한 겁니다. 금송아지 만들었지요. 

그러면 생각해봅시다. 모세가 40일만에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모세가 마음이 좀 어질고 사견이 있다면, 형태는 황소지만 마음까지 황소이겠느냐? 여호와를 묘사하기 위해서 어진 동물 중에 하나, 황소 만들자고, 그리고 여호와 섬기는데 정성을 보여준다고 제일 귀한 금을 뽑아서 주저 없이 자발적으로 헌금한 거예요. 요즘 같으면 성령으로 헌금했다고 하겠지요. 자발적으로 주저 없이 헌금해서 그 생각이 일치해서 황소로 했는데 설마 황소 자체를 섬기려고 그런 게 아니고, 눈에 보이는 황소 섬기려는 게 아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묘사하다보니까 괜찮은 비슷한 이미지로 황소 나왔구나. 그래 기특하다. 너희들 참 잘했어요. 이왕 잘한 김에 십계명 가져왔으니까 추가해서 십계명 지키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문제잖아요. 사람을 배려한다면. 

그게 왜 안 되느냐 하면, 십계명과 짝을 이루는 하나님의 모습은 눈에 보이는 존재의 형상이 아니에요. 십계명과 짝을 이루는 것은 바로 제사, 곧 피입니다. 죽음이에요. 하나님이 존재 형식, 어떤 형상으로 오는 게 아니고 피를 흘리는 기능으로만 십계명과 짝을 이룬다니까. 십계명과 황소가 결합될 수 없는 이유는, 그 황소에선 죽음이 없어요. 왜? 자기 정성을 죽이는 거잖아요. 이건 자기 부인과 관련돼있지요. 

어떤 사람이 헌금을 해서 강대상에 봉투 올라왔는데 그런 목사 없지만 충격적인 이벤트를 벌입니다. 여러분, 이분이 감사 헌금했습니다. 감사 헌금 어떻게 받는지 보세요. 그 자리에서 수표가 들어있는지, 오만 원짜리가 들어있는지 모른 상태에서 봉투를 찢어버립니다. 헌금 낸 사람 경악하고, 재정 집사부터 졸도하고, 교회관리 걱정하는 장로부터 나자빠지고, 교인들은 저 목사와 함께 못하겠다고 쫓아낼 궁리하겠지요. 제일 충격 받은 사람은 헌금 낸 사람일거고.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헌금 낸 사람은 돈이 일단 자기 손에서 떠났기 때문에 충격 받으면 안 되지요. 자기 돈 아니니까. 충격 받을 일 없지요. 해선 안 되지요. 그 다음에 교인들과 목사 입장에서 헌금을 찢는다는 말은, 헌금 낸 사람의 자기 의를 찢은 것이 되니까 복음적 교회란 것을 확인한 점에 대해서 찬성해야 되겠지요. 말이 너무 꼬인다. 지금 제 논리에 무리가 많지요. 이건 납득이 안 되지요. 

우리가 납득을 못하는 것은 왜 귀한 돌 판을 깨느냐 말이죠. 그건 돈 주고도 못 사잖아요. 하나님의 친필로 새겨진 열 개의 계명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깨든지 해야지 보여주지도 않고 깨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모세만이 하나님 편에 서있음을 시내 산 내려오면서 확인하는 겁니다. 이들과는 말이 통하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그런데 이들이 누굽니까? 인간이거든요. 인간과 하나님이 말이 안 통한다는 것을 모세는 새삼스럽게 느낀 거예요. 그래서 모세가 난 이 백성과 안 놉니다. 감당 안 됩니다. 더 이상 지도자 노릇 못한다고 선언해버리죠. 그래서 하나님의 조치가 뭐냐 하면, 너 혼자 있는 게 아니고 내 사자 보내줄게, 천사 보내줄게.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지요. 세 가지 시험 끝나고 난 뒤에 누가 찾아옵니까? 떡 주고 물주면서 원기 회복하라고 돕는 수호천사들이 오지요. 이 말은 천사들이 예수님 시험 받는 걸 다 지켜보고 있다는 거죠. 여러분은 수호천사를 평소에 얼마나 느낍니까? 수호천사의 현존, 임재를. 예수님이 수호천사를 느끼는 것은 바로 마귀로부터 시험 받을 때에요. 우린 매일같이 마귀한테 시험 받습니다. 이 말은 매일같이 수호천사나 성령이 함께 있다는 뜻이에요. 바울과 실라, 그리고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누가 옥문을 열어줬습니까? 천사지요. 그러나 베드로나 그 사람들이 그걸 의식했겠어요? 수호천사가 있으면 아예 옥에 안 갇히도록 조치해야 되지.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고 말이야. 

수호천사가 우리 말 안 들어요. 수호천사는 철저하게 누구 말 듣느냐 하면, 주님에 의해서 지시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천사라 하면 천사 붙들고 하는 말이, 내 스케줄 도와주세요. 내 계획 도와달라고 성질 급하게 천사들에게 부탁할 인간들이에요. 물론 수호천사는 우리 말 안 듣지요.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지요. 궁지로 몰아넣어야 내가 우기고 내가 생각하는 미래의 계획이라든지 하루스케줄이 이건 전혀 주의 목전에서 이뤄진 게 아니고 진짜 마귀가 시키는 대로 내 욕망대로 움직인다는 것을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난감한 상태가 돼요. 이 상태가 매일같이 주의 목전에 서있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설 수 없는 상태, 내 힘으로 하루 시간을 더 이어나갈 수 없는 상태, 잠을 자야 되는데 새벽 2시고 3시고 간에 정신이 맑아도 도를 닦아도 그렇게 맑을 수 없어. 잠이 안 오는 그런 상태, 난감한 상태에요. “주여, 잠이 오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한다 해봅시다. 그럼 주님의 응답은 간단해요. 네가 뭔데 잠자야 되느냐? 잠이 안 들면 잠이 안 오게 한 줄 알고, 잠들면 잠을 주셨다고 할 입장이고. 너는 잠드는 사명과 잠 안 드는 사명을 번갈아 하든지 사명의 문제지 네가 그런 권리도 없는데 잠자야 되겠습니다. 잠자서 뭐 할 건데? 잠 푹 자고 뭐 할 건데? 잠 잘 자고 또 자기 스케줄 추진할 거예요. 난감한 상태에서 벗어나면 자기밖에 몰라요. 지 잘나서 사는 줄 알고 있다고. 지 훌륭해서. 

다윗은 철저하게 사명 위주로 나갑니다. 그럼 그 사명이 뭔지 알아야 되겠지요. 그 사명은 이겁니다. 천국 없음이에요. 천국 없으면 지옥 없음이에요. 천국, 지옥 없음을 다윗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율법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로 여겼던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존재위주의 하나님 나라에요. 여기 있다가 죽으면 저 하나님과 합세한다. 그럼 내 존재는 미래에 천국 가 있는 존재가 된다, 이게 이스라엘의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잘 보존해야 돼요. 왜? 하나님의 나라고 하나님이 함께 있기 때문에. 

그런데 다윗을 통해서 준 사명은 천국이란 것이 없고 지옥이란 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이해하는 천국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없는 거예요. 내 존재를 위해서 사는 그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고 이해가 되는 천국은 애초부터 없는 천국입니다. 천국이 없으면 지옥도 없지요. 사람이 서로가 통한다는 것은 백 프로 가짜라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선지자거든요. 선지자 특징이 의사소통이 안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선지자는 미리 대비하라고 예언하는 게 아니고 현 상황이 여기서 하나님께서 끝장내도 너희들은 할 말 없어. 심판의 기능으로 선지자가 작동합니다. 이러한 사명을이야기하지 전에 먼저 다윗 자신부터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 것은 변형을 당해야 되는데 다른 생각으로 달라져야 되고 변화가 일어나야 돼요. 그런데 다윗이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 혼자 도 닦고 하는 것이 아니고 다윗이 변화되려면 다윗 존재 자체가 개무시 당하는 사건이나 사태가 일어나야 됩니다. 

그 사건이 어떤 사건인지 시편 5편에는 안 나와 있지만 어쨌든 이 시는 다윗의 시거든요. 여기서 다윗이, “통촉하소서”라고 돼있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스스로 알아서 꾸려나가는 그러한 상황은 지금 지장 있다는 뜻이거든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원활하지 않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1절을 봅시다.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자기 편들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 다음에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돼있지요. 이 이야기가 상당히 어려워요. 왜 어려우냐 하면, 하나님이 통치할 때 어떻게 통치하느냐는 문제와 관련돼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통치가 아닌 통치를 생각해봅시다. 현대 국가는 변질 됐고, 조선시대나 고려시대를 봅시다. 전제정치하던 그런 시대를 봅시다. 왕이 지침을 내립니다. “여봐라!” 지금 김정은 생각하면 딱 맞지요. 휴대폰 금지, 하든지. 어느 고을의 특산물을 바쳐라. 지침을 내리는 겁니다. 그게 왕의 통치가 되겠지요. 그건 여러분이 이해되시죠. 

그러면 지침을 내리면 자율성이 없지요. 타율적입니다. 지침이 내려질 때 그대로 행하면 통치기능이 유지된다고 보통 생각하겠지요. 다윗이 왕이 될 사람이고 왕이고 그런 겁니다. 그렇게 되면 뭐가 잘못됐느냐 하면, 백성들이 왕을 미리 알아버려요. 미리 알면 그 안다는 것이 인간들 마음속에 들어오게 됩니다. 왕이니까 알아서 기어야 돼요. 시키는 대로 해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본인이 기쁘겠어요, 왕과 하나가 되겠어요? 아니면 다른 것을 의식해서 더러워서 지켜주자, 이런 식이 되겠습니까? 고객이 왕이잖아요. 그러나 고객을 좋아하지 않지요. 마구잡이로 갑질하는 고객을 싫잖아요. 아내가 아내란 이름으로 잔소리를 해댄다. 그러면 기뻐요? 제발 결혼생활 3,4년 했으니까 홀로 있고 싶다. 이제 밥 먹여줄 만큼 했으니까 싸나이도 혼자 있고 싶은 순간이 오잖아요. 이게 억지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부터 통치가 뭐냐? 다윗은 왕이니까 통치가 뭔지 먼저 배워야 돼요. 왕은 아무리 명령하고 지시하고 폭력을 행해도 절대로 백성들은 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억지로 왕의 명령을 듣지요. 이것은 종과 주인의 관계지 진정한 왕이 아닌 거예요. 나라가 되려면 지시와 명령이 있어야 되니까 억지로 따라주는 거예요. 다윗부터 하나님은 명령하고 나는 따른다는 생각이 철폐돼야 돼요. 그럼 어떻게 돼야 돼요? 다윗 안에서 자발적으로 정말 사랑해서 감사해서 자율적으로 나의 왕을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알아서 희생하는 마음이 절로 나올 때 그 사람이 왕의 통치를 이해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되는데 인간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거든요. 자기가 제일 소중하니까. 

이걸 저는, 내가 나를 통치해야 된다. 이 말은 내가 보기에 내가 어설프다는 겁니다. 그럼 무엇이 어설픈지 그 기준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 기준이 뭐냐 하면, 나라는 인간은 자발적으로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돼요. 나를 만드신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감사해야 될 텐데 내가 말을 안 들어요. 순간 돌아서면 내 기쁨이 전부고 내 즐거움에 헤헤거리고 그게 최고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다윗도 그렇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뭘 줬습니까? “통촉하소서”란 말을 볼 때 뭔가 난감한 “하나님이여, 도와주서서” 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 힘든 상황에 이르렀어요. 그러니까 다윗이 기도를 하고 시를 썼지요. 힘든 상황을 보면서 그 상황을 벗어나는 과정 속에서 내가 문제라는 것, 내가 말썽꾸러기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 걸로 보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올 때 예수님 앞에 그리스도란 말이 붙지요. 그리스도란 말은 왕이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왕으로 오셨어요. 그런데 예수님 일상의 모습이 기존에 교만하기 짝이 없는 본디오 빌라도라든지 민족의 왕으로 사셨던가요? 그게 아니죠. 세상 권세자들은 지배하는 재미로 살지만 나는 어떻게 한다? 나는 너희를 섬기려 한다고 하지요. 누가 높으냐고 제자들끼리 다툼이 일어날 때 나는 이 땅에 섬기려 왔다고 했지요. 그러면 섬기러 온 그분이 지상에서 하나님이 인정하는 유일한 왕이 되는 거예요. 겸손하게 나귀 타고 오시는 거예요. 

이것은 다윗도 마찬가지고 일반 백성들이 생각했던 왕의 개념과 왕의 이미지와 완전히 다른 거예요. 사람이 누구로부터 통치를 받고 지시를 받는 것은 싫어하면서도 그 통치의 자리가 언젠가는 자기 자리가 되기를 은근히 노리는 겁니다. 지금 더러워서 참아주면서 내가 나중에 대한항공 가족이 되면 정말 갑질뿐 아니고, “어딜 상무한테 대들어?” 설계도면 던지고, “너, 내가 여자라고 무시하나?” 이러면서. 

갑질을 당해서 뒤늦게 몇 년 뒤에 고발한다는 말은, 그것도 <브이 포 벤데타> 영화처럼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한다는 것은 그 자리가 부럽다는 거예요. 직원들이 나빠요. 왜 그러냐 하면 조현민이 컵을 던졌잖아요. 그 자리에서 던지면 되잖아요. 미투가 왜 나쁘냐 하면 뒤늦게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나한테 몸 바치면 조연급으로 써줄게. 이럴 때 “아이고, 인간아”라고 왜 그 자리에서 못했습니까? 그 감독의 자리가 언젠가 내가 차지할 자리기 때문에 지금 꾹 참는 거예요. 그게 악마의 나라의 통치의 기능이에요. 그게 통치 방법이에요. 

힘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갑질하지 않으면 질서가 안 돼요. 그러나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은 없는 질서를 만들어요. 인간의 머리론 도저히 상상도 안 되는 질서를 만들어냅니다. 그걸 자율적 통치라 해요. 헌금을 자발적으로 하겠습니다. 이 수준이 아니에요. 주께서 못된 나에게 헌금하게 하셨습니다. 왜? 그래야 나는 남을 지배해야 성질이 풀리는 본성인데 더러워서 참아주는 데. 이 말은 스프링이 눌렸다는 거예요. 그 욕망이 사라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벨탑 왜 만들었습니까? 바벨탑 만들 때 이의 건 사람 있어요? 없지요. 

만약에 서울 롯데월드가 127층인데 그것 만들 때 사장님한테 지하 127층 하자고 건의하는 직원 있겠어요? 없지요. 높이 솟구치겠다는 말은 우리 이름을 지하에 묻는다? 아니에요.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겠다는 것이 바로 바벨탑의 취지였고 그것은 언어 통하는 정도가 이구동성으로 언어도 같을뿐더러 통해도 너무 통해요. 마음이 한결 같다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은 최고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가난한 자가 지옥 가는 거예요. 왜? 부자 될 여분이 있기 때문에. 부자만 지옥 가는 것 아니에요. 가난한 자도 지옥 가요. 병들고 어려운 사람이 지옥 가는 이유가 뭐예요? 병들고 어려운 것이 내게 합당하다가 아닙니다. 지금 장애자로 사는 게 합당한 게 아니고 나는 멀쩡한 게 합당한 데 하나님께서 행정을 잘못해서 도깨비한테 물어야 돼. 내가 죽을 것도 아닌데 이름이 같아 헷갈려서 행정착오로 그 사람이 죽은 내 몸을 사용해서 나는 중국집 주방장이고 은행 지점장 아닌데, 우리에게 이런 기적이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그게 불만이라. 도대체 인간이 살면서 불만을 갖고 있는 게 하나님 앞에서 불만이에요. 자기 통치가 안 돼요. 

사무엘하 15장 31절 봅시다. 그 구절이 어떤 대목이냐 하면,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켰거든요. 가만 보니까 백성들도 다윗이 지겨워. 지겨울 때는 “지겹다, 갈아보자.” 이렇게 되잖아요. 젊은 사람으로 하자. 다윗의 족보니까 압살롬도 괜찮다. 또 압살롬이 굉장히 미남이고 머리숱이 많다는 거예요. 그래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혹이 다윗에게 고하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 이 말씀은 간단한 말씀이에요. 다윗이 쫓기는 입장에서 어떻게 반란군이 망할까? 그쪽의 지략가가 아히도벨인데 그의 지략을 무효로 돌려서 어서 반란군이 진압되게 하옵소서, 라는 그런 내용으로 생각하겠지요. 누구나. 더 이상 끄집어낼 것 없잖아요. 

그런데 그 뒤에 아히도벨이 자살해요. 아히도벨의 계략이 실패로 끝나거든요. 다윗이 숨겨둔 이중첩자 후새의 계략을 압살롬이 더 낫다고 이야기해요. 후새의 계략이 굉장히 스케일이 커요. 사람을 붕 뜨게 만들어요. 아히도벨은 지금 즉각 다윗을 잡읍시다. 힘 모으기 전에. 그런데 후새의 모략은 임금의 실력이면 나머지 모든 나라를 다 빼앗을 수 있고 그래 놓고 나중에 다윗을 잡아야 다윗도 어쩔 수 없이 포기합니다. 지금 다윗을 잡으면 다윗은 아무리 궁지에 몰려도 적들에게 승리했던 전략가기 때문에 지금 만약 초전박살나면 백성들 마음이 흩어지게 되니까 임금의 계략이 실패로 끝날 것입니다. 

압살롬이 붕 떠서 후새의 계략대로 하니까 아히도벨이 자기 고향에 가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인간 대 인간의 전략 싸움이라든지 그동안 전쟁했던 노하우의 싸움으로 보는 것은 당연한데 이걸 유일하게 하나님의 일로 본 사람은 다윗 본인이에요. 그것은 반란의 본질이 누가 봐도 압살롬이 다윗을 공격하는 것이 반란이라고 생각하잖아요. 다윗에게 반란의 본질이 거기 있는 게 아니에요. 대신 왕국에 대한 공격으로 생각하는 것이 다윗입니다. 이건 다윗 말고 아무도 몰라요. 요압도 몰라요. 알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왕 되신 하나님이 함께 있어요. 자기가 왕이 아니에요. 누가 왕이냐? 여호와 하나님이 왕입니다. 그러면 누가 백성이에요? 다윗은 백성의 대표자가 돼요. 왕과 백성 사이에 통치하는 통치원리를 뭐라 했습니까? 섬김이죠. 다윗은 지금 하늘의 명대로 백성들 위해서 섬기고 있는데 압살롬이나 백성들 눈에는 다윗이 자기를 갑질하고 있다고 본 거예요. 그래서 그 자리가 탐이 나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모든 인간, 통치 받는 그 나라가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겁니다. 잔소리를 해대니까 억지로 참고 있는 것이지 인간들 마음은 자기가 자기에게 왕이 돼요. 이건 인간들 본인이 자율적 통치가 돼요, 안 돼요? 자율적 통치가 안 됩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과 반대되는 본질, 반대되는 원리가 각자 인간들 속에 강렬하게 작열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문제. 그렇게 작열하는 다윗의 섬김을 보고, 다윗이 저렇게 섬기니까 우리도 본받아서 다윗처럼 섬기는 자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 덕분에 우리가 존재하는 겁니다. 주님의 사명이 먼저지 내 존재가 먼저가 아닙니다. 이렇게 하고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바꾸자고 할 수 있겠지요. 그게 안 됩니다. 

그게 왜 안 되느냐?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 강물이 내려온다고 합시다. 어떤 연인들이 장난하다 물에 빠뜨렸어요. 장마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물이 깊지는 않아요. 그런데 물살이 센 걸 예상 못했습니다. 그러면 이걸 측면에서 보면 서울에서 보면 강원도가 높겠지요. 중력에 의해서 서울로 흘러가겠지요. 갈수록 물은 많아지고 물살은 세지지요. 자기 힘으로 못 빠져나오지요. 

오늘날 현대인들이 못 빠져나오는 이유가 이것 때문에 그래요. 자력으로 못 빠져나와요. 십일조 하라면 해요. 선교 하라면 선교 갑니다. 봉사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안 바뀌어요. 왜냐하면 악마가 준 마음이 물살이 세도 너무 세요. 무슨 수로 바뀝니까? 안 바뀝니다. 내가 지어낸 거지만 결국 어디 도착했는가? 제3한강교. 그 정도 되면 죽었겠지요. 빠져나오지 못하니까 죽는 거예요. 이걸 예수님은 넓은 길이라 해요. 넓은 길을 사람이 찾는 이유가 하나하나 따져서 그런 게 아니에요. 

사람들이 방탄소년단이 좋다. 하나하나 따져서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한두 명 방탄소년단 좋다고 하면 그 물살에, 방탄소년단 이야기 안 하면 친구들끼리 대화가 안 돼요. 이미 물살에 들어갔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몰라요. 내가 나중에 나이 들면 교회 다녀야지. 그게 안 돼요. 돈 좀 벌어놓고 교회 나갈게. 이게 안 된다니까. 내가 혼자 있는 게 아닙니다. 물살에 포위돼있어요. 내일 잘할게요, 모레 잘할게요. 안 돼요. 오늘이 최후의 날이에요. 오늘이 주의 목전에 심판 받는 날이라니까요. 나만의 생활, 나만의 터전, 영역, 그 ‘나만’이라는 게 없어요. 전부 외부의 물살이 다 만들어낸 소용돌이에요.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작은 건 될 수 있겠지요. 눈앞에 물. 나는 물을 마실 수 있다, 마신다, 마셨다. 봐, 내 마음대로 되잖아. 그러나 인간의 통치란 것은 내가 선택했다고 해서 인간에게 덮쳐있는 악마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방향성 때문에 정신은 방향성을 갖고 있어요. 모든 인간은 어떤 화살표가 있다고요. 교회 가도 노리는 게 있고요, 찬양해도 얻고자하는 기대함이 있고요, 헌금은 물론이고, 봉사는 물론이고. 행동 하나, 부모 효도하고 섬기고 누구와 친하게 지낼 때 뒤에 은근히 노리는 게 있다니까요. 

그게 뭐냐? 바로 인간의 근본적인 그 물살이 뭐냐? 인간이 임의대로 자기중심으로 선과 악을 나누고 있다는 그 점이 문제입니다. 선과 악이란 물살을 못 빠져나옵니다. 그러면 다윗은 선과 악을 오늘 본문에서 어떻게 봤는가? 7절, 8절 읽어봅니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7절에서는 주의 풍성한 인자하심, 긍휼, 불쌍히 여기심이죠. 주님의 사랑으로. 8절에는 주님의 의로.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벗어난 사람만의 고백이다? 선과 악을 본인이 선택하는 그 물살에서 벗어난 사람이 보는 세상보기입니다. 이것 10분 쉬고 합니다.



 한윤범  (IP:14.♡.134.25) 18-05-16 14:23 
20180514b 부산강의 : [시편]10(4편)-자기 통치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아히도벨이 죽었다는 것은 사무엘하 17장 23절에 나오는데 자기가 제안한 것이 안 됐다고 죽은 것은 다윗은 이렇게 생각해요. 다윗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를 이해 못한 사람의 대표자, 아히도벨.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죽은 사람 없거든요. 그것도 전쟁에서 죽은 게 아니에요. 아히도벨은 지략가잖아요. 누구보다도 다윗에 대해서 제일 잘 아는 자가 죽었다. 마치 가룟 유다가 자살한 것과 같은 맥락인 것예요. 

다윗은 자기 인생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자기가 처신을 잘못해서 일어나는 일로 보는 게 아니고 이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통치, 제대로 된 통치의 본질로 보는 겁니다. 이것은 존재가 아니에요. 기능이에요. 존재가 되면, 천국은 저기 있고 나는 여기 있고 죽으면 천국 간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나 천국은 저기 있는 게 아니에요. 인간이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에 천국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천국은 존재하는 인간에겐 없는 나라가 천국이에요. 물론 천국 없으면 지옥도 없어요. 

그러면 천국, 지옥은 어디서 나오는가? 다윗의, 다윗도 언약이니까 다윗언약에 의해서 움직이는 다윗의 기능을 통해서 새삼스럽게 어떤 질서가 나오면 그 질서로 인하여 비로소 하나님이 인정하는 자와 인정하지 않은 자로 구분될 것이고, 인정하는 자가 천국 가는 자요 인정 못한 자가 지옥 가는 사람입니다. 순간순간 그렇게 새롭게 등장하는 거죠. 

우리가 교회 세우길 기대하지 않아야 될 이유는, 교회는 그리스도 몸입니다. 그리스도 몸이란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는 기능이에요.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셔서 자꾸 일을 벌여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와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자가 성도 주변에 계속해서 아우라처럼 생겨나는 거예요. 사건들이. 

광주에 가면 식사를 일식뷔페로 먹어요. 약간 서민적인 거. 그 집에 특이한 게 있는데 솜사탕 만드는 기계에요. 다 먹고 난 뒤에 입가심으로 솜사탕을 줘요. 들어갈 때는 작대기만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그 작대기 주변에 아우라 같은 게 생겨요. 없는 게 생기는 거예요.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은 예수님의 활동으로 비로소 등장하는 겁니다. 그걸 사람들이 천국으로 보겠어요? 거부하죠. 왜냐하면 자기 나름의 천국이 따로 있기 때문에. 

대표적인 것이 마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하늘나라 천국을 보여주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 짓자고 나오잖아요. 베드로 생각이 뭐냐 하면, 기존에 알고 있던 사람들의 천국입니다. 가서 살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그러나 정작 천국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예수님이 별세해야 된다는 거예요. 죽음이다. 예수님이 죽어야 돼요. 예수님의 죽음 안에 거기서 천국이 번져 나오는 겁니다. 솜사탕기계에서 솜사탕 나오듯이 예수님의 죽음의 취지가 본질이 되어서 그게 이 땅에 와서 죽으신 죽음의 의미, 죽음의 의의, 취지가 뭉쳐져서 그게 천국이에요. 성령 아니면 못 들어갑니다. 누가 거길 들어가요? 

전북에 백제예술대학이라고 있는데 그런 대학이 없다고 칩시다. 대학은 없는데 모집요강만 있다면 희한한 대학이죠. 우리가 아는 상식은, 대학이 먼저 있고 신입생 모집요강이 있어야 순서가 옳잖아요. 대학은 없는데 모집요강만 먼저 있다면, 모집요강에 준수해서 모집한다는 뜻이잖아요. 그게 바로 주님의 방식이에요. 천국은 없어요. 없는데 천국 모집요강은 있어요. 요건이 있어요. 그러면 그 천국 가려면 어디서 어디로 이동해야 됩니까?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존재로서의 천국과 지옥을 포기해야 됩니다. 그냥 포기하면 안 되죠. 왜냐하면 첫째 시간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다. 물살이 세다 했잖아요. 그 물살을 단 한 사람도 극복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 봅시다. 9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수고스럽겠지만 로마서 3장 13절을 봅시다. 거기 뭐라고 돼있어요?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이걸 우리 존재에서 보기에는 특정, 나 말고 다른 존재의 특징을 이야기한 것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돼있는 거예요. 

우리가 공부하는 시편 5편에 나오는 이러한 특징이, 다윗이 보기에 하나님의 원수들의 특징들이 특정 인간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고 모든 인간에 빠짐없이 다 내재돼있다는 겁니다. 이게 때가 안 돼서 사태가 안 벌어져서 이런 특징들이 안 나오지 누구라도 자기에게 뭔가 일이 들이닥치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거예요. 그럼 들이닥침이 어떤 일인지 그걸 다윗부터 보여줍니다. 

그게 뭐냐 하면, 존재가 위태로울 때. 참 이것이 다윗 입장에서는 정말 신기한 건데 자기 존재가 위태롭다는 것은, 다윗 말고 언약이 없는 일반 사람들은 다 이걸로 끝나요. 존재가 위태로울 때는 살기 위해서 아첨이고 뭐고 무조건 살아남는 게 최고에요. 이 땅에는 돈의 물살이 세잖아요. 그러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 벌 수 있다면 놓치지 않는 거예요. 이걸 시편 5편 9절에서는 뭐라고요?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함에 해당되는 속성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이 희한한 것은 언약을 받았기 때문에 물론 이것도 있어요. 자기 존재가 위태로우면 도망칩니다. 하지만 뭐도 있느냐 하면, 이게 바로 내 안에 작용하는 언약의 통치성, 언약은 누굽니까? 언약이란 하나님이 왕이죠. 왕이 나를 통치하는 방식이 들어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통치하게 되면 다윗 내부에 무엇이 원수적인 속성이고 무엇이 하나님이 속성인지 같이 있는 거예요. 

이걸 교회론에 적용시켜 봅시다. 아까 제가 교회는 인간이 못 세운다 했지요. 그러나 인간 자체가 아첨함이죠. 열린 무덤이죠. 그래서 인간은 교회를 세웁니다. 그 교회를 세우는 취지가 뭐냐? 교회 세우기에 가담했던 모든 사람의 자기들 존재적인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서 교회를 세워요. 교회 세우는 것이 주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결국 자기 가치로 되돌아온다는 거예요.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의 목적은 최고가 되는 거예요. 자기 이름을 하늘에 이르기까지 높이는 것이 최고의 자리인데 그걸 목표로 하고 있는데 그것에 차질이 일어나게 되면 그걸 악으로 간주하고, 원활하게 잘 되면 선으로 간주해요. 결국 인간은 누굴 닮은 거예요? 최고의 자리가 누굽니까? 악마지요. 악마가 최고의 자리에서 통치하잖아요. 쉽게 갑시다. 현재 이 세상은 세상신이 다루고 있어요. 그래서 악마 이름이 그냥 세상신이에요. 세상을 통치한다는 것은 최고의 자리를 누가 갖고 있다? 이미 악마가 갖고 있는 거예요. 최고의 자리를 갖겠다는 것이 악마만의 생각이 아니고 그 악마의 특혜를 받는 인간들이 악마로부터 그대로 그 성질을 세뇌 받고 양육 받은 거예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자가 천국 가기가 힘들다는 게 그것 때문에 그런 거예요. 부자가 있으니까 오만하지요. 오만하니까 모든 걸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부자인데 “나, 부자 아니어야 돼”라는 생각이 부자 되고 난 뒤에 들 리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동안 나를 나 되게 했던 것이 부자 되기라는 목표에 대해서 집중했기 때문에 모든 정신을 지금 이 순간 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만약에 부자 안 된다면, 내가 부자 되려고 노력했던 모든 의지와 노력 자체가 근원적으로 문제 있다고 자인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인간으로선 성립이 안 되지요. “나는 부자 되려고 했기 때문에 죽어 마땅해.” 이런 생각 안 한다 말이죠. 부자가 부자 안 돼서 한 맺힌 건 아니잖아요. 무슨 새벽기도 가서 “부자 되지 말게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 봤습니까? 교회를 세울 때 “교회 좀 망하게 하옵소서.” 미치지 않고는 그렇게 안 되지요. 교회도 하나의 존재잖아요. 

제 말은 인간인 이상은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잘 되길 바라고 크기를 바라고 그래서 많은 경제적 혜택을 입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세워질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주께선 세워진 것을 허락하면서 그걸 허물어버립니다. 기존 교회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교회는 저렇게 세워져선 안 된다는 게 아니고, 안 되든 말든 교회는 세워지니까. 교회를 허무는 과정을 통해서, 그럼 교회를 세웠다 허물면 구원받습니까? 그것도 아니에요. 

세우는 것은 인간 뜻이고 허무는 것은 누구 뜻이다? 주의 뜻인 것을 교회 세우면서 인지하도록 그렇게 해당되는 사람이 구원받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 나오는 사람이 구원받는 사람이 아니고 교회에 아무 일도 안 하는 게 구원받는 사람이 아니고 자기 본성대로 하되 본성에 역으로 주께서 조치를 하신다는 것이 다윗처럼 양쪽을 느끼는 사람이 구원될 사람이에요. 그 사람 속에 언약이 들어있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성도기 때문에 로마서 3장 13절을 납득을 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음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누구 이야기다? 그게 바로 내 이야기인 것을 깨우쳐주신 것을 주여, 감사합니다. 그게 바로 교회에요. 

욥기에서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다. 그럼 욥은 하나도 없었습니까? 아니에요. 욥은 나중에 갑절이나 부자 됐잖아요. 욥은 지옥 갑니까? 부자 됐으니까. 아들 일곱, 딸 셋 다 죽었어요. 나중에 하나님께서 아들 일곱 주고 딸 셋 줬어요. 그럼 그동안 꿈이었어요? 이상하게 약간은 고통스럽고 깨보니까 꿈이네. 욥은 천국이 뭔지 알게 됐어요. 천국이란 내 힘으로 된다, 안 된다? 내 힘으로 되지도 않을뿐더러 내 존재로도 갈 수 없는 곳이 천국이에요. 그걸 아니까 욥은 천국 사람이 되는 겁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7절,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주의 집에 주인 누구죠? 주님이죠. 그걸 내가 통치라고 이야기했어요. 그 집에 가면, “야, 내 집이다.” 이게 아니에요. “주님이 통치하는 집이란다. 우리는 통치를 기다렸네.” 하면서 들어가겠지요. 주님이 통치하는 집에 들어간다는 말은, 주님의 통치를 좋아한다, 싫어한다? 좋아하는 거예요. 죽기 전에. 살아있으면서 주의 통치를 좋아하는 거예요. 

주의 통치를 뭐라 했습니까? 세우는 것은 내 일이고 허무는 것은 주의 일이고. 그 통치를 좋아하는 거예요. 작살나는 것을 좋아하고 깨지는 걸 좋아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잔을 마셔야 된다. 제자들이 그 소릴 듣고 잔 마시는 걸 희망으로 삼았습니까? 택도 없는 소리죠. 도망치기 바빴지요. 그런데 나중에 성령이 오니까 띠 띠고 원치 않는 길을 가죠. 

참 말씀이 재밌지요. 띠 띠고, 그 다음에 뭐라고 돼있어요? 원치 않는 길. 그러니까 원하는 길은 따로 있어요. 원하는 건 여전히 있는데 고맙게도 주께선 내 뜻대로 안 해주는 게 주님의 통치 현실인 걸 알고 고맙게 여기는 사람, 말을 하면서도 참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물론 그 당시는 고맙게 안 여겨요. 하지만 돌아서면 나중에 소급해서 보면 고맙게 여겨져요. 이런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천국 백성입니다. 


천국은 없는 거예요. 그러나 있어요. 내가 있기에 천국이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이 함께 있기 때문에 함께 계신 주님의 통치가 곧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면 그 통치에 대해서 거부하는 사람은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오만한 자가 돼요. 강의 처음에 했던 것 다시 봅시다. 어떤 사람이 있다. 아침에 눈떴다. 자기의 스케줄 따라서 했다. 이게 오만입니까? 제가 이걸 오만이라 했지요. 지금 이 사람이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 영역을 계속 세우고 있는 겁니다. 내가 세운 모든 것은 파괴돼야 마땅함을 본인이 느낄까요? 조마조마해요. 자기 뜻대로 안 될까봐. 

우리교회에 어떤 집사님이 계시는데 연세도 많아요. 칠십이 훨씬 넘었어요. 아들이 결혼상견례 한다고 해서 서울로 차 몰고 가다가 문경휴게소 지나고 난 뒤에 휴대폰 잃어버린 걸 안 거예요. 그래서 다음 휴게소에서 문경휴게소로 전화해서 휴대폰 잃어버렸다고 하니까 직원이 챙겨놨다고 했어요. 그럼 약속시간이 늦어지겠지요. 그래서 경황없이 허겁지겁하다 단양과 문경 사이에서 네 시간을 헤맸다는 거예요. 서울에 도착하니까 밤 열두 시. 상견례 끝. 그래서 입이 퉁퉁 부어서 교회 못 나왔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재수 되게 없다고 할 거예요. 오늘 이야기한대로 따져봅시다.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이건 신자나 불신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발걸음을 세세요. 들풀과 참새를 키우니까. 주께서 그렇게 하셨지요. 그 다음 문제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가 배웠잖아요. 내 뜻대로 안 되게 했죠. 그 말이 성립되려면 내 뜻이 따로 있다, 없다? 내 뜻이 있는 거예요. 차 몰고 나올 때부터 내 뜻 있는 거예요. 차 몰고 지금 가면 상견례 제 시간에 댄다. 그게 내 뜻인 거예요. 그런데 그게 오만입니까? 출발할 때 절대로 오만이 아니지요. 왜냐하면 자연스러운 거예요. 나는 내 존재를 위해서 사는 지극히 자연스런 존재에요. 

제가 어제 오후 설교하면서 저도 은혜 받은 대목이 이주일 이야기에요. 하나님 이야기 맨날 하면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주일한테 뭔가 나올지 기다린다고요. 그런데 이주일이 뭔가 보여주던가요? 뭐 별 것 없어요. 수지큐나 보여주지. 별로 보여주는 게 없잖아요. 자, 오늘날 우리가 성도라고 주께 보여준다는 데 그 대목에서 제가 은혜 받은 거예요. 주님께 뭘 보여줬습니까? 우리가 아침에 눈떠서 남한테 보여줄 게 주의 것을 보여줘요? 안 그러면 내 뜻을 고집한 겁니까? 내 뜻을 펼치지요. 결국 한 고집한다는 걸 보여줬잖아요. 내가 여기 있음을 보여줬죠. 아직도 안 죽었고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잖아요. 

그러면 주께선 성도를 통해서 어떻게 주의 일을 보여주십니까? 아까는 제가 약간 실패했다고 했는데 생각을 바꿔 봅시다. 내 뜻대로 이상하게 일이 잘 풀려. 내 뜻대로 다 됐습니다. 기쁘던가요? 아니면 허무하던가요? 허무해요. 내 뜻대로 다 되면 기쁨이 오래 가던가요? 아니면 이상스럽게 이렇게 살면 뭐하나? 된들 이게 뭐냐? 기껏 이것 성취하려고 내가 사느냐? 

사람들이 둘이 연애할 때 기뻐요. 만나면 주고받고 하죠. 연애하면서 기쁘지만 돌아서면 모든 일을 다 잘라내고 오직 그 사람/그녀만을 위하여 집중하는 내 선택이 지금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심이 돼요. 결혼할 때 여자가, “나만을 사랑해?” 할 때 남편이 뭐라고 합니까? 사랑 안 해, 이런 사람 없잖아요. 그러면 결혼 안 되지요. “사랑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여자는 오해하기를 저 남자의 모든 것은 나를 위하여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걸 ALL FOR YOU 

그런데 남자는 그게 아니고 약간만 떼 주는 거예요. 그 말은 어떻게 상세하게 구체적으로 이야기합니까. 딱 보면 알아들어야지. 여자는 그때 네가 날 위해 바친다고 했잖아, 라고 자꾸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언어란 언어의 본뜻을 언어가 다 담지를 못합니다. 바람 새게 돼있어요. 원어 연구가 그것 때문에 문제 있어요. 원어를 들여다보는 내 자신이 원어에 의해서 배척받는데 원어에 안 맞는 사고방식으로 원어 연구한다고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코에 걸면 코걸이라니까. 일방적이에요. 주님께서 원어 연구해서 구원시키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하지. 신학자들이 얼마나 불신자들인데. 마귀입니다. 

진짜 중요한 게 남아있는데요. 아까 이야기했듯이 선악이란 내 존재로부터 나와요. 내 존재 긍정, 나 잘났다, 나 이렇게 훌륭하다. 그런 것으로 선과 악을 판정합니다. 그러니까 아주 객관적으로 선과 악을 평가하는 게 아니고 내가 저 평가를 하고 난 뒤에 나한테 돌아올 이익이 있느냐? 있으면 내 평가는 선이 되고, 내가 뭔가 결정했는데 악으로 돌아오면 평가 자체를 수정해요. 기준을 수정한다고요. 자기한테 이익이 안 되니까. 

그걸 문제라고 하지만 인간치고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이 없어요. 다윗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해요. 그렇게 되니까 문제가 뭐냐 하면, 여러분 잘 아시지만 늘 확인해봐야 돼요. 내가 선과 악을 판정내리면 남은 뭐예요? 남 속에 예수님 들어있고 하나님 들어있는데, 타인인데 타인은 뭐예요? 나의 선악에 강제로 맞추어야 될 타인이에요. 내가 힘이 있으면 강제로 맞춰줘요. 내가 물 컵을 던지면 설계도면 던지면 대한항공 전무가 갑질하면 맞춰줘요. 그러면 내 선택이 옳았어요, 안 옳았어요? 남들이 따라주니까 내 선택은 옳았지요. 

이걸 보통 갑질이라 하는데 여러분이 목사니까 생각해보세요. 나는 교인들이 밥 사주고 무조건 섬겨. 그것 갑질 아니에요? 갑질이 뭐냐 하면, 폭력을 쓴다고 갑질이 아니에요. 나의 헌신과 희생을 반드시 상대가 알아먹어야 돼, 라고 정신적 강요도 갑질입니다. 로마서 3장 13절 벌써 잊어버렸죠. 모든 인간이 열린 무덤 같고 아첨하지요. 내 중심이잖아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럼 나는 악인 속에 포함시켜야 되잖아요. 그렇다면 나의 헌신과 희생이 뭐가 된다? 남에게 갑질이 돼요. 좀 같이 악해야 되는데 너무 앞서가서 착해. 

교회 청소를 나눠서 해야 되는데 아무리 봐도 청소를 안 해. 더러워서 내가 한다. 그것 갑질입니다. 왜냐하면 그 선택이 나를 손실 나게 만듭니까, 내 이상에 부합되게 만듭니까? 남들은 청소 안 하는데 나 혼자 청소했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정신적으로 이익이 돼요, 손해가 돼요? 이익이 되지요. 육체는 힘들지만 이익이 되지요. 점점 더 격차가 벌어지니까. 저쪽은 악해지고 나는 선해지고. 동의 안 하면 그냥 넘어갑시다. 

인간의 모든 행동 하나가 내 중심이기 때문에 그 중심 자체가 갑질이 된다니까. 다른 사람은 가만있는데 자기 혼자 휴지를 줍는다. 내가 하는 모습을 보라 이 말이에요. 그래도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잖아, 하는데 그럴 위인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없는 이유가, 본인이 알기 때문에 그래요. 본인이 알게 된 그것이 누굴 만나게 되면, 구태여 자랑은 안 하지만 이게 행동으로 티가 나게 돼있어요. 

그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께서 금식할 때 금식은 몰래 하면 되잖아요. 몰래 할 수도 있어요. 문제는 금식할 때 금식한 그대로 나타나는 게 문제라는 거예요. 금식할 때는 머리에 포마드를 발라야 되는데 이걸 안 발랐다는 거예요. 예수님 말씀입니다. 금식할 때 금식 안 한다, 안 한다 하는 것도 갑질이에요. 포마드를 바르란 말은 뭡니까? 눈치 못 채게 하란 말이거든요. 그런데 인간이 자기가 알고 있는 이상은 아는 것이 행동으로 나오게 돼있습니다. 금식하는 티 안 내려고 포마드 발랐는데 일어서면서 아아 배고파. 반드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으로 티를 내게 돼있어요. 

우리나라 속담에 있잖아요. 미운 자식에게 뭐 줘라? 떡 하나 더 줘라. 에라 먹어라. 밉다는 티를 떡을 줌으로서 감추면서 강하게 의사표시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5편의 말씀은 인간의 힘으론 못 지킵니다. 지킬 수가 없어요. 인간의 본성을 건드리고 나오는 말씀이기 때문에. 

5절 봅시다.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이것이 다윗의 말로 그칠까요, 주의 말씀일까요? 주의 말씀이죠. 그렇게 됐으면 그 다음 봅시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할 때 그 인자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다윗을 통해서 나옵니다. 

그러면 다윗이 통촉하옵소서, 할 때는 다윗이 뭔가 난감한 상황에 놓여있었는데 결국 그 난감한 상황을 유발하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무엇을 아울러 제공하느냐 하면, 주의 풍성한 인자가 수호천사처럼 너와 너를 감싸고 지키고 있다는 것을 난감한 사태를 통해서 새삼 확인케 거예요. 여러분, 기쁘지 않습니까. 틈만 나면 주의 인자하심을 노래 부른다고 인자하심이 아니에요. 본인의 뜻대로 안 되고 본인이 의도한 것은 뭉개지고 내가 세우고자 하는 것은 주께서 파괴할 때 통촉이라는 약간의 불만이 나오면서 잠시 잊어버렸던 주의 인자를 다시 깨닫게 되는 기회가 되는 겁니다. 

그 다음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순서를 적어볼게요. 통촉하옵소서. 난감한 상태. 그런데 주의 원수 등장, 오만한 자. 지금 다윗이 적들에게 당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있는 다윗의 생각과 그리고 다윗의 언약을 모르는 인간들과 이미 차이가 나죠. 이걸 구분이라 하는데 구분 또는 구별됐지요. 언약은 쪼개기입니다. 언약은 인간과 인간 사이를 둘로 쪼개는 겁니다. 주의 백성과 주의 백성 아닌 것으로 쪼개는 거예요. 존재가 아니고 기능으로. 

그래서 나는 주의 백성이라고 우겼던 인간이 주의 백성 아닌 거예요. 주께서 나와 더불어 지금도 일하는 게 주의 백성입니다. 뭘 움켜주면 안 돼요. 소유하면 안 됩니다. 소유하면 그것은 존재로 딱딱하게 굳어져버립니다. 자기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쥐면 그 사람은 주의 일을 방해하고 있는 거예요. 주의 종은 주께서 힘차게 일하는 사람이지 도 닦는 것처럼 산 위에 앉아서 괜찮은 것 쥐고 소유하고 있는 그런 타입이 아닙니다. 

원수 됐지요. 그 다음에 나오는 게 주의 인자하심. 그래서 어디 갑니까? 주의 집에 들어가지요.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경외지요. 천국은 이런 사실을 다 알고 있는 자들의 모임이잖아요. 원수가 뭐고, 인자가 뭐고. 주의 원수니까 주님의 존재가 선행되지요. 주님의 통치니까 주도권을 가지면 주님의 존재 앞에 나의 존재를 생각할 필요 없어요. 나의 존재에서 나오는 게 선과 악이거든요. 나한테 이익 되는 것, 손해되는 것을 구분한단 말이죠. 나의 가치, 내가 최고가 되고자 하는 나의 욕망, 이런 것들이 주님의 존재에 밀려서 별 의미 없이 돼버려요.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입니다.

높인다고 해서 경외가 아니고
본인한테 경외가 우러나도록 그러한 결과가 등장하는 어떤 일들이 계속 내 몸에서 되풀이 되어 벌어져야 돼요.
그 기능이 내 뜻대로 되도 문제고 되도 허무하고 안 되면 화나는 것이, 보통 불신자는 되면 까불어요.
그런데 성도는 그것이 잠시 뿐이고, 그것 하려고 이 땅에 사나. 빨리 떠나고 싶다.
기껏 그것 하려고 내가 그렇게 수년 동안 공들였나. 그런 생각 안 듭니까?
특히 남자들 차 좋아하죠. 차 바꿀 때마다 주여, 더 이상 소원 없습니다.
하다가 한 6개월 되면 식상해. 이게 전부인가, 라는 허무가 오죠.
나의 선택을 허무하게 만드시는 고마우신 주님, 할 때 그 순간 주님이 경외가 됩니다.
 

좀 더 진도 어렵게 나가봅니다. 그러면 이야기 끝났네요. 끝난 게 아니에요. 방금 하나님께 경외한다 했어요. 그러면 그 하나님 어디 있어요? 경외하려면 뭔가 느껴져야 되는데 어디 있어요? 친절하시고 고마우신 우리 하나님께서 하나님 경외가 되는지, 안 되는지 이 땅에 확인케 해주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분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아들을 경외하는 자가 곧 아버지를 경외하는 거예요. 

그러면 기존에 하나님 경외하는 것은 경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던 자들이 누굴 핍박했습니까? 아들을 핍박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예수님 제자들이 예수님을 놔두고 다 도망쳤어요. 요한복음 5장에서 분명히 예수님이 사전에 알려줬어요. 나를 존경하는 자가 아버질 존경한다고 누누이 이야기했건만 그 이야기는 어디 갔는지 다 달아났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존재 위주기 때문에. 내가 잡혀서 고문당하고 죽으면 누구만 손해다? 나만 손해에요. 나는 살기 위해 사는 게 선이에요. 나한테 힘들게 하는 것은 악이 되는 겁니다. 

누가 힘듦은 유발했습니까? 예수님이죠. 그러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나, 저 사람 모른다.” 하고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나한테 손해되는 것은 다 끊어버리는 것이 타고난 인간의 물살이에요. 인간을 둘러싼 급류에요. 이걸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헤쳐 나옵니까? 헤쳐 나올 수 없어요. 

그래서 시편 5편으로 이야기 끝난 게 아니에요. 시편 5편은 무엇과 연관돼야 되느냐 하면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연결시켜줘야 됩니다. 시편 5편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피로 구원받지요. 아시겠습니까? 시편 5편 달달 외운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다윗이 이런 소리한다고 다윗이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다윗도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아요. 

10절 봅시다. “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인하여 저희를 쫓아내소서 저희가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성령 받은 자가 성경을 썼습니다. 성령은 구약용어가 아니고 신약용어에요. 성신은 미완료고 성령은 완료입니다. 성신과 성령은 그 차이에요. 성신은 미완료된 언약에서 나오는 신이 성신이고, 완료된 다 이룬 언약에서 나온 영이 성령이십니다. 성신 받고 얼마든지 지옥 갈 수 있지만 성령 받아 놓고는 지옥을 못 가요. 갈 수 없어요. 왜냐하면 두 발을 아예 천국으로 지상에서 하늘로 옮겨놨기 때문에. 누가? 성령이. 

성령이 하늘로 안 옮겨놨는데 하는데 성령 안이 천국이고 하늘나라고, 예수님 안이 하늘나라고, 십자가 안이 하늘나라에요. 성령 안이 하늘나라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오게 되면 그게 처소가 돼요. 요한복음 14장에. 처소가 되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그리고 성도가 같이 있어요. 삼위일체가 아니고 사위일체에요. 삼위일체하면 안 돼요. 하려면 사위일체라 돼요. 왜? 하나라 했으니까. 그때 내가 너희와 하나 됨 같이 전부 하나가 돼요. 완료가 된다고요. 완료가 되면 그 사람은 뭐가 되냐 하면, 바로 다윗은 예언이거든요. 시편 5편을 예언으로 보고 있잖아요. 성도가 예언의 결과물이 돼요. 우리 꼬라지는 이래도. 

물어봅시다. 완료인데 교인수가 2명이다. 완료입니까, 아닙니까? 완료지요. 우리가 그게 별로 즐겁지 않다는 게 문제지만. 새 언약에는 숫자가 문제가 아니에요. 그래서 베드로후서에 노아 때 구원받은 자가 여덟 명이잖아요. 숫자 나와요. 8명이라고 돼있어요. 작은 수지만 그게 완료에요. 9나 7 되면 안 돼. 8이 완료에요. 작은 숫자로 보여주는 완료에요. 숫자가 많다고 해서 더 많은 완료를 보여주는 게 아니고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면 주와 함께 있다고 두세 사람을 거론했다고. 참 인간의 능력으로 지킬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성령 아니면 그 기쁨이 안 와요. 두세 사람으로 보여주는 주와 함께 있음이에요. 수천 명으로 보여주는 주와 함께 있음이 아니고. 

다윗이야기 계속 해보겠습니다. 신약의 사도들이 설교할 때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여호와 이름을 다 주의 이름으로 바꿔요. 그건 뭐냐 하면, 시편 5편만 본 유대인들은 주님이 저기 계시다고 본 거예요. 자기가 상상한 하늘에 계시다고 본 겁니다. 하늘에 계셔서 하나님께서 예언도 하시고 율법을 주시고 우리는 지키면 된다고 본 겁니다. 그걸 첫째 시간에 인간들의 통치성이라 했지요. 왕이 지시하고 지침을 내리고 인간은 지키면 된다고 했지요. 그게 인간들이 납득하는 통치성이에요. 조선시대가 그렇잖아요. 

그런데 제가 그게 아니라고 했지요. 다윗이 갖고 있던 내부적인 통치성이 완성이 되면, 다윗의 언약을 따라서 다윗의 시편을 따라서 어디서 완성이 되느냐 하면 신약시대에 완성이 돼요. 그러면 성도의 특징이 위에서 누가 지시한다고 따라가는 게 아니고 내부적인 지시를 따르는 자가 성도입니다. 다윗 개인적인 상황이 신약에는 모든 성령 받은 사람에게 공통적인 상황이 되죠. 형편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관계에요. 옛 언약은 미완료 또는 미완성, 새 언약은 완성 또는 완료. 완성이라 할 때는 내용물이 찼다. 완료는 시간적으로 끝났다고 구분하시면 됩니다. 완성보다 더 어려운 게 완료에요. 시간이 흘러가도 새로운 것은 없는 거예요. 완성된 것의 반복이 완료됨을 반복하고 반복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나오잖아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했잖아요. 십자가가 어디 보입니까? 하지만 십자가의 기능이 완료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 반복해서 우리 마음 안에 작용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은 어디까지 들어오느냐 하면, 성신일 때는 문자, 우리 코앞에만 와요. 율법이.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 마음까지 들어와요. 이게 새 언약이에요. 그러면 우리 마음에 통치성이 일어나요. 통치성이란 주님의 갑질이 일어나는 겁니다. 갑질 되면 우린 기분 나쁘잖아요. 그런데 아까 경외란 말했지요. 이게 기뻐요, 감사해요? 감사하죠.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그것도 감사하단 말이죠. 감사한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이게 중요해요. 

왜 감사한 이유가 따로 없느냐 하면, 지금까지 되어진 모든 것이 주님의 언약 따라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자기가 숙제 낸 양 스스로 건지기 때문에 내가 거기에 편들거나 보태거나 협조한 적이 없어요. 이 결론에 동의하시죠. 그런데 어떤 사람이 복음도 모르면서 이런 소리합니다. 주께서 알아서 자기 백성 건지는데 내가 할 것 뭐 있나. 할 것 없잖아. 맨날 안 한다. 기분이 이상하잖아요. 같은 결론인데도 다른 의미를 나타내죠. 자, 어디서 문제입니까? 

아까 처음에 진짜 경외하는 사람은 과정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과정이 있었지요. 누가 열린 무덤입니까? 나. 누가 아첨하는 자에요? 나. 누가 의인이 아니고 죄인입니까? 나. 그 과정이 여전히 남아있는 거예요. 그래서 경외가 제대로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얌체 같이 결론만 열매만 따먹는 인간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주께서 알아서 했다는 결과를 얻었기 때문에 나는 그걸 알았기 때문에 나는 괜찮다, 나는 잘났다는 다시 자기 갑질을 또 시작하는 거예요. 다르지요. 한쪽은 내가 뭉개지지만 저쪽은 자기를 돛대처럼 높이려 한단 말이죠. 

오늘 강의를 정리해봅시다. 악마는 인간에게 선악이라는 기준을 줬어요. 인간이 생각하는 선악은 자기가 절대자 되면 선이고 자기를 낮추고 을이 되면 악이라고 본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보시는 선악은 인간에겐 없습니다. 언약이 와야 돼요. 언약으로 등장하는 게 선악입니다. 시편 5편에서 선은 인자하심이고, 그 다음에 뭐였어요? 누구 의로 구원받는다? 주의 의로 주의 집에 들어가죠. 그 다음에 또 경외함이 나왔지요. 이러한 것이 주께서 받아주시는데 이러한 것은 바로 주님의 통치입니다. 

그런데 내가 죄인이란 것을 과정을 밟아서 되니까 이런 통치가 슬픈 게 아니고 허무한 게 아니고 굉장히 고맙고 감사한 거예요. 그러면 이런 통치를 받을 때 이 사람 직업이 세리다. 또는 창녀다, 강도다. 이게 문제 돼요, 안 돼요? 전혀 문제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장애자다, 가난하다, 부자도 문제 안 돼요. 부자라도 구원받아요. 내가 갖고 있던 이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잘못된 선과 악을 계속 발휘케 했습니다, 라는 것을 주님의 인자와 주의 의와 주의 경외 밑에서 스스로 파악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고백하기를 다윗이 사적으로 자기 죄를 고백한 적은 없어요. 예를 들어서 밧세바와 간음한 그걸 자기는 회개 안 했어요. 다윗이 잘못한 것은 공적인 것, 인구 조사한 것. 왜 그러냐 하면 날 때부터 태생이 죄인이기 때문에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기 때문에 사적인 회개가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이것 잘못 됐다고 해서 내 태생이 바뀌느냐? 안 바뀌어요. 안 바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을 도리어 감사하죠. 

주께서 쓰신다면 쓰시옵소서. 인자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을 경외하기 위해서 쓰신다면 나를 어떻게 지저분하게 만들고 박살을 내고 작살을 내든지 저는 전혀 의의 없습니다.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그렇게 하겠지요. 그것 오래 가는 사람, 하루 갑니다. 내일 되면 또 서서히 내 스케줄 시작됩니다. 주여, 도와주옵소서. 아침에 기도하면서 슬슬 또 시작돼요. 그게 우리 존재가 하루치밖에 안 된다는 것을 오히려 그 점도 감사합시다. 나중에 치매 걸리면 희한한 소리하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갑질하도록 우리를 주님 앞에 내놔야 돼요. 주님의 숙제가 내 뜻을 뭉개는 그런 일이 벌어질 때 그 언약으로 인하여 주와 우리가 하나가 되고 이미 그것이 천국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윗을 새롭게 생각했습니다. 그냥 정치적으로 세상을 파악하는 것이 우리 뜻이라면 언약을 통해서 주님의 통치에 쓰임을 도리어 감사하고 예언하는 다윗처럼 우리 속의 성령의 이야기, 성령의 시를, 성령의 기도를 우리가 발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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