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12a 부산강의 : [시편]7(3편)-사랑과 소유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3편에 시편이라고 돼있지만 사실은 무엇이 축약돼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압축이 돼있어요. 시편이 하나의 결과적인 찬송입니다. 신앙고백이기도 하고. 어떤 무엇이 됐는데 그 결과가 시편 3편이라면 도대체 어디서 출발해서 나왔는지 풀어놔야 되겠지요. 시편 하나하나가 압축돼있으니까. 보통 압축된 파일은 풀어야 되잖아요. 그냥은 모르잖아요.
시편 3편에는 다윗이 등장해요.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라고 돼있는데 여기에 두 사람이 등장하죠. 다윗이 등장하고, 또 한 사람 압살롬. 역사 속에 수많은 인간들이 있는데 하나님의 계시를 위해서 어떤 인물이 성경에 나온다면 다윗이나 압살롬이란 개인적인 역량 때문에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되겠다고 비장한 각오로 역사 속에 등장한 게 아니에요.
다윗이 이렇게 생겼다면 다윗을 이렇게 형성하도록 하나님께서 배후에 뿌리부터 작용했을 것 아니겠습니까. 다윗이 역사 속에 등장한다? 다윗 사적인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에요. 계시니까. 계시란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계시 되고 싶다고 계시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특정 인물을 지정해줘야 돼요. 지정하게 되면 그 사람의 구원문제와는 아무 관계없어요. 계시와 관련돼있습니다. “다윗이 구원받았습니까?” 이런 질문 자체가 안 돼요.
그렇다면 보통 인간이 있다면, 다윗을 보라, 시편 3편을 보라면 우리도 구원문제에 대해서는 손을 놔야 돼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계시문제에 동의해야 됩니다. 구원문제와 계시문제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구원은 내가 들어갑니다. “내가 구원받아야 되겠습니다.” 이건 구원문제에요.
그런데 계시는, 주인공이 내가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주인공이죠. 하나님께서 계시하실 때 누구는 천국 가고 누구는 지옥 간다면, 이 점에 대해서 하나님의 이런 결정에 대해서 우리는 순순하게 수용하면 되는 겁니다. 내가 꼭 천국 가고 내가 꼭 구원받을 이유가 없어요. 완전히 다르죠. 구원문제는 항상 나를 제쳐놓을 수가 없어요. 내가 잘돼야 되고, 내가 나중에 미래가 피어야 되고, 내가 행복해야 되고. 항상 내가 들어갑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내 가정, 내 교회, 내 사회, 또는 내 직장, 내 직업 할 때 앞에 ‘내가’가 붙잖아요. 그러면 그 뒤에 나오는 필연적인 말은 살아야겠다, 살아야겠다, 살아야겠다는 항상 내가 살아야겠다. 가정, 교회, 사회를 통해서 내가 살아야겠다. 내 교회를 지켜야 되겠다. 살아야 되겠다, 유지해야겠다, 보존해야겠다. 이게 항상 붙습니다.
이 전체가 나를 위한, 나의 영광을 위한, 내 체면과 명예를 위한 나의 계시가 이미 확정돼있는 거예요. 성경이야기를 듣는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나를 위한 계시 속에 나의 뿌리가 있습니까? 없어요. 너는 어디서 나왔느냐는 질문에 답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네가 죽고 난 뒤에 어디 가는지 아느냐? 몰라요. 나를 위한 계시란 그야말로 톰배기에요. 머리 떼고, 꼬리 떼고 그저 눈앞에 보이는 그것을 확대시켜서 이걸 진리인양 간주해버린다니까요.
이게 욥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욥이 그렇게 어렵다고 하니까 하나님이 대뜸 하시는 말씀이, 별 만들 때 네가 있었느냐? 밤하늘에 별이 있는데 네가 사는 게 진리라면, 별이 왜 있어야 되는지 설득력 있게 설명해보란 거예요.
평창올림픽 쇼트트랙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500미터에서 금메달 땄지요. 그런데 집사님이 뭐 보태준 것 있어요? 보태준 것 없지요. 그러면 평창올림픽 금메달 딴 것과 집사님과 관계없지요. 관계없다는 말은, 집사님이 평소에 나는 살아야겠다는 테두리에 평창올림픽 금메달은 떨어져나가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온전하게 다 품어서 설명할 수 있는 진리가 아니고 내 것만 챙기는 진리기 때문에 진리가 아닌 거예요.
세월호에서 사람들 죽었는데 나와 관계없잖아요. 안산사람도 아니고. 관계없으니까 죽든 말든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 애 입원하고 퇴원하는 게 중요한 문제죠. 그러면서 우리는 은연중에 내가 잘 되고 내가 행복한 게 진리고 우기고, 이건 우긴다는 말이 적당해요.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한평생 살아가면서 하늘의 별, 달과 관련성도 없으면서 왜 있는지도 모르면서 달이 있든 별이 있든 간에 나는 행복해야 돼, 라고 하는 것은 이건 말도 안 되고 우기는 겁니다. 정말 우리가 진리와 합치가 된다면 별이 있기에 내가 있다는 연관성을 부여해야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공원에서 연관성을 짓지요. 별 하나 너 하나, 별 둘 나 둘. 옆에 여자 친구가 어려운 걸 물어보면, “별들에게 물어봐.” 그리고 설날이나 되면 산에 가서 그때 해가 필요한 거예요. 우리 가정 건강하고 교통사고 일어나지 않고. 그냥 비는 거예요.
진리를 위해서 살아야 될 우리가 진리는 모르고 내가 곧 진리가 되는 예수님 흉내 내는지 내가 곧 진리고 길이고 생명 되는, 그런 식의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야기하죠. 네가 범사에 감사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우리 해체입니다. 우리의 진리, 나를 위한 세계관이 해체되는 거예요.
결국 이 말은 현실관이 두 가지 밖에 없다는 겁니다. 첫째는 나를 위한 현실과 그 외의 모든 현실. 인간은 나를 위한 현실을 붙잡다보니까 여기서 싸움이 벌어져요.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싸우지요. 창세기 32장에서. 왜 싸웁니까? 복을 받아도 시원찮을 분과 왜 싸우죠? 무엇 때문에 싸웠습니까? 야곱이 자기 것 지키기 위해서 싸운 거예요. 사전에 여차하면 피하려고 가족들 챙겨놓고 자기는 따로 있었는데 그때 온 겁니다.
이건 우리가 현실 지키기. 현실 지키는 필요 전쟁과 싸움을 유발합니다. 내 것을 내가 지키기 위해서 이익이 되고 타산과 계산에 의해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내 영역 밖으로 내쫓기 위한 치열한 싸움과 전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시편 3편의 이야기에요.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시편 3편을 보면서 우리의 평소에 인생사가 무엇이 계시고 무엇이 진리인지 이미 휘말려 들어갔는데 우리는 내가 잘되는 게 진리고, 신의 계시라고 확정짓고 교회 나갔고, 확정짓고 기도했고. 모든 기도 내용은 자기 잘되라고 기도하는 거죠. 달과 별에 빌듯이. 목사의 모든 기도는 자기 교회 잘되라고 하는 거예요. 이 교회 확장되고. 그게 하늘나라 확장이라고 가르치면서. 내가 있는 곳이 잘되도록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러니 성경을 천 독, 만 독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성경은 지금 누구와 싸우느냐? 주님 중심의 하나님의 계시와 내 중심으로 굳어진 나의 계시와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이 사실을 까마득하게 몰라요. 내가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몰라요.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다. 위에서 보기에 원수들이에요. 이 웬수들!
본인이 하나님의 원수란 사실을 모르고 그저 하나님께서 영광과 찬양을 돌린다고 할 때 이런 마음이 들 거예요.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은근히 하나님 편에 속한다고 하면서 뒤에서 엿 먹이고 뒤통수치는 거예요. 헌금하면서 자기 것 챙기다가 하나님에 의해서 부부가 하루아침에 다 죽었어요. 사이도 좋아. 끝까지 부부가 사이좋게 죽었어요. 아나니아와 삽비라. 어찌 그리 정이 많은지. 하나가 먼저 죽었으면 남은 하나가 우울증 걸렸을 텐데 둘이 같이 죽었으니 그럴 사이도 없고.
시편 3편에서 다윗에게 일어난 경우가 계시라고 시편에 집어넣었다는 말은, 다윗의 이야기로 듣지 말고 보편적 의미로 받아들이란 말이죠. 모든 인간에게. 이것은 다윗의 계시가 아니고 압살롬의 계시도 아니고 보편적 계시로. 모든 인간들이 자기를 돌아봐야 되고, 나만을 위해서 세상, 하늘의 별도 돌아가야 된다고 말도 안 되는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는, 왜 벗어나지 못하고 왜 나는 거기 갇혀있는지 그것을 생각해보란 겁니다.
지금 대구 지방에 비가 안 와서 제한급수 직전까지 갔거든요. 그래서 수돗물에서 냄새나고 그래요. 비가 안 온다. 하나님이 비를 안 내렸어요. 왜 비를 안 내렸느냐? 그건 하나님 마음대로죠. 비가 더 안 오면 대구시민들 죽어야죠. 대구시민들이, “하나님, 비가 안 와서 죽겠나이다.” 그러면 하나님 답변은 이거에요. “네가 왜 살라 해?” 아까 공식 있죠. 나로부터 시작한 것은 마지막에 뭐로 끝난다? 어쨌든 간에 나는 살아야겠다. 무슨 좋은 일을 하겠다고? 사는 이유 있어요? 살아야겠다는 건 있는데 사는 이유는 없어요.
이게 철학자들도 되게 고민이 되는 문제입니다. 제가 어제 낮에도 언급했는데. 살고는 싶은데 살아야 될 이유는 없다. 이걸 어제 낮 설교에서 인간은 거울 보면 자기 신체의 이미지, 얼굴, 덩치의 모습이 있지요. 두 번째 자아는 계속 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연구해보니까 이게 합치가 안 돼요. 이 말은, 어떤 신체가 있다면 있으면 있는 대로 놔두면 되잖아요.
예를 들어서 비가 안 와서 굶어 죽는다. 그러면 굶어죽으면 돼요. 내 신체라고 여기는 순간, 거기서 멈추면 괜찮은데 멈추는 게 아니고 그러니까 그 신체를 내 힘으로 끌고 더 오래 살도록 해야 되겠다는 거예요. 해야 되겠다는 것이 뭔 뜻이냐 하면, 미흡하다는 거예요. 여기가 좋사오니 죽이든 말든 하시옵소서, 라고 던질 어떤 대상이 없어요.
저 신체는 내가 건사하지 않으면 아무도 건사할 수 없다는 것으로 종결돼버려요. 그러면 ‘살아있다’에서 ‘살아야겠다’로 변해요. 살아있다는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살아야겠다는 우울증 걸리고 난리도 아니에요. 자식이 교통사고 났다. 병원에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아아, 때가 되면 주께서 데려가시는구나.” 이런 마음과, “아이고 의사 선생님, 어떻게 되든지 살려내야 돼요.” 의사 선생이 퉁명하게 하나님의 천사가 되어, “왜 살아야 되는데요?” “내 자식이거든요.” 남의 자식은 죽어도 본인 자식 살려내요. 돈이 얼마나 들든지 살려주세요. 왜? 그건 몰라요.
그래서 여기서 다윗이 그 다음에 무슨 말 나와요. ‘아들’이죠. 그것 찾는데 참 어렵지요? 역사 속의 두 존재가 계시 속에 출몰합니다. 그 관계가 있습니다. 아들입니다. 여러분, 다윗 생각하지 말고 우선 아브라함부터 등장했다. 그냥 아저씨죠. 그런데 성경에서 아브라함을 앞장세우면서 뒤따르는 계시를 덧붙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받는다고, 아브라함의 출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이유 있어서 그렇다는 거예요.
내 자식은 살려내야 된다고 할 때 왜 살려야 됩니까? 이유가 없는데 아브라함이 등장하게 되면, 여기에 이유가 있어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여러분 사는데 이유 있습니까? 이유 있어야 돼요. 오늘 강의 끝나면 이유가 생길 겁니다. 아브라함을 건드리면 하늘이 가만두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지정한 사람이라고 인정하게 되면, 하늘이 그냥 있지 않고 그 사람에게 구원의 축복, 영생의 축복을 준다는 겁니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이 굉장히 고맙거든요. 왜 고마우냐 하면, 모든 인간은 다른 사람을 파악할 때 내 선에서 파악해야 되는데 상대방을 내 선에서 파악하면 그 의미가 기껏 내가 알고 있는 의미만 소복하게 상대방에게 꽂힙니다. 우리는 내가 여기 온 것과 별과 관계없어요. 별을 빼놓고 내 이익과 관련된 의미를 갖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다가올 때 그 사람을 평가하고 이해할 때는 내가 아는 의미만 집어넣기 때문에 그 사람도 나처럼 별과 상관없는 의미라고 나를 함부로 평가하는 거예요. 그러니 인간이 얼마나 자기 이익을 위해서 일방적으로 세상을 봅니까. 그게 실제 현실이 아니고 나만을 위한 다른 현실을 꾸미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모든 인간이 아브라함을 생각하는 이상으로 등장했거든요. 그 아브라함의 등장을 성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없는 데서 생겼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의식하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출발이 항상 내가에요. ‘내가 여기 있다’부터 출발해요. 아브라함은 없는 데서 생겨난 거예요.
만약에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뒤에 붙지 않는다면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에요. 있는 데서 나갔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있다’에서 ‘아브라함이 없다’로 끄집어 당기겠지요. 그게 아브라함 뒤에 붙어있는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님의 의미, 계시가 아브라함이 없는 데서 나왔다고 해서 있는 데서 나왔다는 아브라함 의식을 삭제해버립니다. 아브람이 삭제되고 그 뒤에 등장한 이름이 아-브-라-함.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는 겁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이 성령을 받았다. 성령을 받게 되면 우리는 어디에 속하게 되느냐 하면, 전까지는 안동 권 씨,경주 이 씨나 각자 부모밑에 소속이되요 근데 성령을 받게 되면 십자가에 소속이 됩니다. 십자가는 죽어 없어진 분이에요. 죽어 없어진 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나왔지요. 성령이 나왔으면 우리의 이유와 우리의 뿌리는 안동 권 씨의 육이 아니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듬뿍 담고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모든 게 이유 있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계시에 포함이 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 되는 겁니다. 교회 백날 다니고 성경 봐도 소용없어요. 성령이 임해야 돼요. 그래야 세상에 대해서 남은 인생, 지금까지의 인생에 소급해서 앞으로 전개될 모든 인생이 내 인생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에 준한 "때가 되매 말씀에 응하기 위해서 펼쳐지는 인생"으로 가는 겁니다.
그러면 마태복음 25장에서 소자한테 아무것도 아닌 그런 인간에게 물 한 컵 대접한 것이 곧 예수님을 대접한 것이고, 옷 입혀주는 것이 내게 입혀준 것이고, 그들을 돌아본 것이 나를 돌아본 것이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영이 임한 성도 사이의 유대관계는 한 덩어리가 되지요. 그걸 머리 되시고 지체라고 에베소서에서 교회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렇게 형성되는 겁니다.
그래서 일어나는 교통사고나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돼요. 감사하기 전에 주께서, “짜증나지, 그지?” “짜증납니다. 왜 많은 애들 중에서 내 애가 교통사고 납니까?” 그런데 짜증난다는 이것이 사실은 내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저의 옛사람을 다시 한번 주께서 회생하게 하셨군요. 그런 일조차도 주께서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라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아야 돼요.
그렇게 될 때 그 사람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일어난 모든 일들이 예수님의 증인되라고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일들을 우리가, 마치 꿀 있는데 벌 달려들 듯이 나로 하여금 주님의 입에서 나온 꿀 발라 놓고 일어난 모든 사태가 예수님을 증거 할 용도로 결과물 있도록 발산케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다윗이에요.
성경에 시편만 있는 게 아니지요. 사무엘상, 사무엘하, 수많은 다윗 가정에서 일어날 모든 사건들이 나옵니다. 오늘 제가 이야기할 거예요. 그 이야기들이 시편 3편 하나로 응축된 겁니다. 주름 진 것을 하나하나 펼쳐내야지요. 펼쳐내면 보통 사람이고 어디로 가고 왜 태어난 지도 모르는 그 다윗이 하나님이 의도한 대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천국의 백성으로 어떻게 변모됐는지 보여주는 것이 시편 3편입니다.
제 이야기 가운데 논리가 약간 비약된 건 있어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옮길 때 없는 데서 잡아당겨서 있음에서 출발해서 없음으로 가서 새롭게 전에 없던 있음이 되는 거죠. 대구에서 부산으로 오는 고속도로에 노포동 톨게이트 있지요. 그런데 제가 타고 온 버스는 톨게이트 지나서 해운대 쪽으로 빠져요. 빠지자마자 길이 두 개 있지요.
전에 큰 길로 출퇴근했다면 옛날 있음의 길이라면, 새 길로 빠졌다면 내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길로 가듯이 똑같은 얼굴 모습이고 똑같은 신체 이미지이지만 육의 길과 영의 길이 달라요. 이쪽은 의미가 있고 하나님의 계시적인 효과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효과를 누리게 돼요. 주님이 함께서 있으매 효과를 누리는 그런 인생을 가게 됩니다. 가는 곳은 천국이고 이 길은 지옥이죠. 노포동 톨게이트에서 길 잘못 들면 큰 일 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이쪽 길의 내력을 이쪽 길에 들어서야 비로소 보인다는 거예요. 육적인 인간들,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함께 있을 대는 정당해 보이는데 막상 빠져나가서 보니까 저쪽은 육의 길이고 마귀와 함께 있다는 것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저기는 감사가 없고 욕망과 욕망, 미흡감과 우울증, 그리고 답답함 끝까지 내 인생 내가 책임지려고 하는 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인생, 자기 인생은 없고 주님의 인생도 없고 남이 만들어준 인생이기에 남들 보란 듯이 자랑질 하고 또는 숨어 지내기 위해서 남들 눈에 띠면 안 되는 그런 불쌍한 인생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있지요. 그래서 지옥 가는 사람을 너무 나무라거나 하지 마세요. 나무란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측은하게 여기세요.
우리 아버지 안 됐다. 평생 술 좋아하다가 또 술 찾는구나. 아버지, 술이나 먹고 지옥이나 가세요. 말로 하면 안 되고 속으로. 아이고, 우리 엄마 안 됐다. 맨날 자식 잘 키운 것 자랑하다가 나중에 지옥 가서도 자식 잘 키운 것 자랑하고 끝나는 거예요. 나로부터 출발해서 나로 돌아오는 그 인생이 넓은 길이에요.
그런데 이쪽은 나로부터 출발했었는데(과거완료), <비트>란 영화에서 조인성이 오토바이에서 손 놓잖아요. 우리 인생에서 손 놔버리는 거예요. 물론 잘 생겼으니까 폼 나지만. 그냥 맡기는 거예요. 내일 일은 내일 일 주관하시는 분에게 맡기고 오늘만 감사하면 되는 거죠. 들풀처럼 사는 거예요. 바람 부는 황야에서 들풀처럼 사는 거죠.주께서 친히 키우시고. 남들 보기에 적당하도록 남 눈치 보며 살아야 되고. 남 눈치 본다고 하는데 그건 핑계고요. 내가 지금껏 살아온 식으로 산다는 게 정답이에요. 그게 남 눈치 보는 거잖아요.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하더라도 육이란 신체가 있으니까 남아 있더라도 성령께서 그때그때마다 방향을 틀어줍니다. 새 길로 가다 더 새 길로 또 빠지게 만들고.
아브람이 아브라함 됐는데 자기 아들을 하나님이 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점이 어렵지만 중요하기 때문에 설명해야 되겠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될 때 없음 요소에서 시작해야 되는데 그 없음 요소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아브라함의 아들에서 나와요. 우리가 생각하는 아브라함은 그 전에 선대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관심은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제일 마지막 때에 오실 분 예수님에게 관심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이삭이 가깝습니까, 아브라함이 가깝습니까? 이삭이 가깝고 아브라함은 멀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과거를 집착하지 말고 장차오실 예수님을 바라봐야 돼요. 이게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예수님 바라보기를 원했다. 그건 아브라함이 잘한 거예요. 아브라함이 과거에 이 정도로 잘나갔다고 보지 않고 미래를 바라본 게 중요하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기뻐했다.
와! 이것은 인간의 모든 책에선 나올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건 큰 반칙입니다. 이렇게 쓰면 안 돼요. 인간은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남겨놔야 돼요. 모르겠다고 남겨놔야 되는데 확정을 지었으니까 본인이 미래까지 연결되었다는 고백이거든요. 일반 인간들은 미래와 연결돼있는 게 아니고 과거와 연결돼있어요. 과거가 이렇게 했으니까 오늘날 이렇게 되었다고 과거와 연관시키는데 아브라함은 미래와 연관시켜버렸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의 본 모습은 ①예수님이 알려주는데 그전에 가까운 미래는 이삭이에요. ②이삭이 죽고 없어지지요. ③그러면 이삭에게 일어난 현상이 아브라함이 미처 몰랐던 자기의 본 모습이에요. 죽어야 되는데 양으로 바꿔치기했지요. 바꿔치기 때문에 나는 어린양과 관련된 새로운 인간으로 부활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믿음의 조상과 공통적인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게 과거와 연결돼 있다가 미래가 연결 되어서 죽어도 좋다는 겁니다.
내 자식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하지만 내 자식이 예수를 믿는다면 교통사고로 죽은 자식도 다시 살 수 있고 그 자식의 모습을 보면서 아직 살아있는 이 어미도 자기의 본 모습을 가까이 받아들이는 겁니다. 나도 죽으면 주와 함께 영원히 살리라. 참 이론은 멋지다, 정말. 손톱에 가시만 박혀도 원망하고, 손에 습진만 있어도 내가 이러려고 사느냐 하는데, 뭐 하나 날 건드리면 목이 아프다면 편도선암이 아닌 가해서 난리도 아니에요. 병원에 돈 다 갖다 주고. 아무 일 없습니다.
그래야 안심하는 우리 육의 한계. 얼마나 평소에 내 중심이었는지 점잖을 때는 몰라요. 주께서 사건을 일으켜서 분산을 떨어줘야 내가 얼마나 이 세상에 집착해있는지 완전히 만 천하에 공개되는 겁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세상 끝나는 것처럼 하지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는 애인과 헤어졌는데 왜 파도는 치고 햇빛은 빛나는지. 왜 새는 노래하느냐 말이죠. 애인과 헤어져서 슬퍼 죽겠는데.
아들 문제를 다룹니다. 시편 3편에서. 다윗이 솔로몬을 낳고 난 뒤에 솔로몬의 원래 이름은 여디디야에요. 하나님께 사랑받은 자에요. 참 이런 게 성경을 설교하는 저도 충격적이에요. 왜냐하면 전에 다윗은 간음했습니다. 살인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처벌은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이걸 어떻게 직결시킵니까? 천하에 나쁜 놈인데 하나님이 사랑했어요. 이게 복음이에요. 복음은 복음을 얻겠다는 착한 시도는 아무짝에도 소용없어요. 예수 믿겠다는 시도도 아무짝에도 필요 없습니다.
간음하고 살인했는데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거예요. 말로? 아니요. 자식 줄게. 간음한 여자 사이에서 사랑하는 자식이 나왔습니다. 이걸 소급해서 봅시다. 솔로몬 입장에서 다윗과 밧세바 커플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식을 낳았다면 둘 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뜻에 따라서 간음하게 했고 뜻에 따라서 살인하게 하신 거예요.
간음하고 살인했다는 말은, 내가 간음하고 살인한 게 아니라 주께서 간음케 했고 살인케 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내가 내 인생에 책임진다는 요소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 새삼 느껴질 때 거기서 오는 자유함, 얼마나 큰 자유인 줄 몰라요. 분명히 천벌을 받아도 마땅한데 천벌 대신 천국을 주니. 글자 하나 바꿨을 뿐인데 “주여, 이것 받아도 돼요?” 그럼 하나님께서, “네가 나를 잘 몰랐구나.” “난 나쁜 짓하면 지옥 가는 줄 알았는데.” “그건 네가 알던 하나님이고 새로운 하나님을 알려줄게.” 주면 받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냥 천국이 온 거예요.
천국이 오니까 비로소 내가 알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내가 알던 예수는 예수가 아니었어요. 내가 만들어낸 가짜 예수였어요. 나의 선행과 결부된 예수, 나의 착함과 결부된 예수, 나의 헌신과 희생이라는 고귀해 보이고 경건해 보이는 행동의 보상으로 간다는 그러한 천국은 전부 다 가짜입니다. 그건 산당이에요, 우상숭배에요. 그건 목사들이 교회 키우기 위해서 사기 친 거예요. 여러분 가정이 불행한 것은 온전하게 헌신하지 못해서 그런 겁니다. 돈과 시간을 교회에 바치세요. 그러면 당신에게 하나님께서 원상회복해주실 겁니다. 그런 사례가 많으니까 믿으시고 하세요. 이건 사기에요. 마귀의 소리입니다.
우리가 정상적으로 편안할 때는 이러한 복음이 안 들려요. 복음이 들릴 때는 내 일상, 나의 현실이죠. 나의 영역. 나의 현실이 아픔이 찾아와야 돼요. 내 인생이 슬픔이 찾아와야 돼요. 이번 수련회에서 상처가 온다고 했지요. 사랑보다 더 깊은 상처. 어느 노래 가사에, 슬퍼하지 마세요. 그 다음 가사가, 첫눈이 온다고요. 아이 아빠가 교통사고 났는데, 첫눈이 온다고요. 이정석이 불렀던 노래거든요. 첫눈과 무슨 관계있어요? 관계없잖아요.
슬픔을 주고 슬퍼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오신다고요. 이건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주여, 나는 간음했습니다. 나는 살인했습니다. 슬퍼하지 마세요. 주께서 사랑이 온다는 겁니다. 내가 하는 행위가 나의 운명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평생 했던 내 행동이 내 미래를 결정하는 게 아니다. 결정은 따로 하는 거예요. 왜? 피조물이니까. 피조물에게 어떤 미래를 맡긴 적이 없어요.
신학계에 기독교계에 제일 큰 코미디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시면 안 돼요. 이 땅은 더러운 곳이에요. 오시면 안 돼요. 오시지 말아야 되는데 와버린 거예요. 인간들은 멀리 하늘이 별처럼 박혀있는 하나님을 계속해서 모든 상상의 고상함과 경건함과 거룩함을 처발라놓고 내가 처바른 거룩과 경건을 내가 숭상하고 숭배하고 있는 겁니다. 기독교만 아니고 불교, 모든 종교가 다 한 가지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직접 방문하신 거거든요. 그 모습이 꼴 보기 싫은 모습이죠. 모든 사람이 그를 외면해버렸어요. 그 말은 인간들이 얼마나 엉터리로 하나님을 그동안 섬겨왔는지 들통 난 순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잘못이 아니고 내가 생각한 생각이 가짜에요. 주님의 안목에서 나를 봐야 되는데 내가 보는 안목, 또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그것이 참조사항의 전부였습니다. 내가 참고할 그 범위가 주님의 십자가는 쏙 빼고 나머지로 참고한 거예요. 나는 이렇다고 규정한 겁니다.
만약에 경매하는데 세계적인 피카소나 고흐의 작품을 경매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거기에 만약에 예수님이 계셨다면 사람들이 고가의 미술품과 예수님을 견줄 때 예수님한테 오십만 원 걸겠다고 손들 수 없을 정도로 경매에 참석한 모든 신사숙녀들에게 외면당할 때 예수님이, “저, 얼마 쳐주겠어요?” 한다면 꺼져라, 할 거예요. 그 꺼져라가 십자가 사건이에요. 모든 사람에게 외면당한 분이에요. 이 말은 우리 쪽에서 예수님에 다가설 수 있다, 없다? 내가 싫어서 안 가요. 내가 아는 괜찮은 나를 괜찮은 나로 유지하려는 입장에서는 예수는 쓸데없는 거예요. 예수님은 소용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에게 다가가는 게 아니고 주님의 영이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면 건축자들의 버린 돌, 건축자가 쓸데없다고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어 주님이 거주할 수 있는 성전이 되는 겁니다. 만약에 내 식으로 가게 되면 주일 날 경건히 지키고 십일조 하고 주께서 하는 명령 있잖아요. 이웃사랑 하고 온유하고 할 수 있는 걸 다 했을 거예요. 그런 것은 과거 행동이거든요. 과거의 행동이 집중이 되면 우리는 미래를 보는 게 아니고 과거가 아까워서 과거를 놓칠 수가 없어요.
사람이 왜 슬퍼하느냐 하면, 그만큼 과거를 건전하게 유지하려고 애썼다는 고백이거든요. 이만한 것이라도 지켜내기 위해서 얼마나 나한테 투자했고 희생했고 인내했고 해서 과거가 만들어낸 현재인데 이걸 차버리면 과거가 와장창 다 무너지는 거예요. 마치 카드 쌓기에서 카드 하나 빼버리면 완전히 다 무너지는 것처럼 주님이 뭔데 날 무너뜨리느냐는 거예요. 주님은, “네가 안 만든 게 따로 있기 때문에 내가 무너뜨렸다. 왜?”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네가 쌓아놓은 것이 무너져야 돼요. 그게 바로 우리한테는 슬픔이고 아픔이고 상처가 되는 겁니다.
평소에 우리는 투명인간처럼 살아갑니다. 내 할 것만 생각하지 내가 누구냐고 쳐다보는 것은, 혼자서 고민거리 있을 때나 하지, 평소에는 할 일 많아 바빠요. 그런데 언제 내가 왜 이러지, 내가 뭐지? 이런 것은 갑자기 화살 쏘듯이 나에게 상처, 슬픔이 일어났을 때 그 순간 도대체 나는 어떻게 되지, 나는 누구지, 라고 돌아보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솔로몬이란 아들이 있잖아요. 그 솔로몬을 하나님께서 바짝 밀어줍니다. 유일하게 하나님의 사랑받은 자이기에. 나머지 아들들도 있잖아요. 암논, 압살롬은 상대적으로 사랑받지 않았지요. 그냥 사랑받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고 어떤 속성들이 발산됐기 때문에 사랑받지 못했는지 사무엘하 13장부터 계속해서 압살롬과 전쟁을 통해서 다 보여줘요. 아들이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킬 때 아버지 다윗의 입장에서는 상처가 되지요. 슬프지요. 통곡합니다. 다윗이 통곡을 두 번 하는데 자기 아들 암논 죽을 때 통곡하고 암논을 죽인 압살롬 죽을 때 통곡하고. 아들 둘을 잃은 거예요.
암논이란 인간은 압살롬의 누이동생, 이복여동생을 너무 사랑해서 마음에 병이 났어요. 누굴 그리워해서 마음에 병이 들면 인력으로 안 됩니다. MRI찍어서 안 나옵니다. 이건 약도 없고 침 놔도 안 되고 입원해도 안 되고. 이 말은 뭐냐 하면, 외쪽에서 날아온 그것이 내부를 황폐화시킨 겁니다. 모든 정상적인 육체의 가동이 꼬이고 엉망진창이 된 겁니다. 그러면 외부에서 온다는 것은, 내부와 외부를 연결시키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본다는 겁니다. 보고 그리고 신체적으로 가까이 있는 거예요.
이것 재미난 이야기에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집니다. 연예인들 사귀다 헤어질 때 서로 활동이 바빠서 헤어졌다고 합니다. 주로 그런 식으로 핑계 대거든요. 눈에서 멀어지면 안 보이게 되면 마음에서 멀어져요. 이게 마태복음 5장에 나오잖아요. 눈은 마음의 창이에요. 눈을 통해서 그 사람과 교류가 되는 겁니다. 눈을 보면서. 여러분, 예쁜 얼굴이라고 끌리고 그런 것 없어요.
지금 암논이 다말을 너무너무 사랑해서 병이 났어요. 암논은 사랑이라 하지요. 그런데 암논에게 요나답이란 친구가 있어요. 성경에 보면 간교하다고 돼있거든요. 재벌 3세의 친구라고 보면 됩니다. 보는 데서 그 다음에 신체적으로 가까이 접근해야 돼요. 본다는 말에 앞에 나만 봐야 돼요. 나만 보기 위해선 다른 사람들은 물러가야 돼요. 결국 이건 내 마음으로 둘러 싼 덫에 다말을 가두는 겁니다. 그러면 사랑이 뭐냐? 사랑은 소유의 다른 표현이었다는 게 드러나요.
이 이야기는 10분 쉬고 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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