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동질성과 정체성 18040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8. 4. 13. 09:08
2018-04-09 18:39:30 조회 : 224         
동질성과 정체성 180409 이름 : 이근호  (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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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  (IP:14.♡.134.25) 18-04-13 08:59 
20180409a 부산강의 : [시편]9(4편)-동질성과 정체성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4편 1절.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나’가 네 번 나오는데 나가 누구냐, 할 때 이 점을 생각해봐야 돼요. 동질성과 정체성이 달라요. 동질성은 내가 생각한 나는 남이 나에게 심어준 거예요. 나란 나와 관련 있는 남이 원하는 것을 내가 구축했을 때 남이 생각하는 것을 나라고 남의 의견을 규합하는 거죠. 그런데 정체성은 몰라요. 내가 진짜 누군지 모르는 겁니다. 정체성은 하나님 몫이에요. 특히 성도한테는. 

시편 4편은 다윗의 시잖아요. 1절에 벌써 ‘나’가 네 번 나온단 말이죠. 그러면 누가 봐도 나란 것은 다윗이라고 하죠. 그건 동질성이에요. 다윗의 타인은 사울입니다. 사울을 마주하면서 그때마다 다윗 본인이 본인을 생각하는 것, 이게 전부 나라는 것을 구성하는 요소가 돼요. 사울도 그렇고 다윗 본인도 마찬가지고. 

예를 들어서 어려운 말인데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나라 할 때 이건 의미 없어요. 나는 나지 뭐가 되겠어요. 나는 어떤 인간인가? 이럴 땐 의미가 있어요. 이건 본인이 하면 안 되고 남들이 이야기해줘야 돼요. 남들 보기에 난 어떤 인간인가. 그 남이 사울이거든요. 사울은 다윗의 적입니다. 적에게 몰릴 때 미움 받을 때 그 밉상으로 인하여 다시 나를 생각하게 돼요. 난 도대체 무슨 짓을 해서 밉상 받지? 남이 없으면 정리가 안 된다니까. 나는 훌륭한 할머니라 생각했는데 할아버지한테 간다? 내가 생각한 나는 괜찮은 할머니인데 왜 나한테 오지 않고 할아버지한테 가지? 걔 눈에 내가 생각하지 않는 다른 게 있는 모양이야. 

그래서 주위에 남이 없으면 나도 같이 사라져요. 이게 치매 현상이라 하는데. 주위에 아무도 없으면 내가 사라지면서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서 옛날 나를 붙드는 것을 우울증이라 합니다. 보통 옛날 나는 잘 나갔던 나, 남한테 사랑받고 알아주던 나, 그런데 그렇게 해주던 주위 사람들이 죽던지 떠나든지 가버리면 나는 나를 구축할 수 없어서 옛날 나를 연속된 것으로 생각하고 나를 붙드는 거예요. 

그걸 form형식이라 합니다. 그래서 ⓐ동질성(남이 생각하는 나로 구축된 나)은 항상 형식으로 구축하게 돼있어요. 형식이 하나님의 정체성, 진짜 내가 누군지 아는 정체성 앞에서 녹아져야 됩니다. 경계선이 허물어져야 돼요. 허물어지는 가장 적절한 표현은 프라이팬에 치즈를 올려놓으면 분명히 막인데 녹아 없어지지요. 나라는 형식을 갖추기 위해서는, 남들이 이야기하면서 내가 있다면 나란 내용이 형식으로, 치즈처럼 흐물흐물 녹아져야 돼요. 그런데 남이 있는 이상 치즈 막(시멘트??)오히려 강화돼요. 굳어져요. 

혼자 있을 땐 긴장 풀고 있다가 남이 등장하면 타인과의 경계선이 굳어지잖아요. 굳어져서 오십견 걸린 것처럼 근육이 딱딱해지고 그렇습니다. 자기를 미워하고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오면 갑자기 근육이 긴장해서 수축이 돼버려요. 힘들어요. 그런데 자기 맘에 드는 사람 같으면 치즈 막처럼 녹아져요. 모든 경계를 내려놓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타인이 이야기하는 것이 쏙쏙 들어오면서 그것이 나의 동질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참 인생 사는 보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늘 같이 있는 것이 비록, 잠언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채소를 먹고 살아도 좋은 사람 있으면 그것이 최고라 했어요. 고기 먹고 살아도 꼴 보기 싫은 사람과는 못 살아요. 힘들어요. 정말 힘듭니다. 그래서 괜찮은 사람은 만나서 막 같은 걸 형성하게 되는데 

그럼 오늘 본문에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이것은 다윗의 동질성부터 시작해서 다윗의 정체성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이야기해줘요. 동질성이라면 다윗의 이야기지만 사실은 다윗의 이야기가 아니고 속에 있는 예수님의 이야기에요. 다윗은 우리와 똑같아요. 자기 자신밖에 몰라요. 그런데 주님께서 다윗을 다루어서 다윗 안에 있는 내용물이 사실은 예수님 자신에 관한 이야기라는 진짜 정체, 자기의 본질을 알게 하는 겁니다. 

쉬운 예를 성도가 주님 앞에 왔다. 처음에는 인간이죠. 인간이 주님 앞에 왔을 때 인간은 자기의 육적인 요소를 그대로 가지고 와요. 주변에 자기가 사귀었던 많은 타인들, 남들이 생각했던 성격을 가지고, “나, 이렇습니다.” 하고 오지요. 대표적으로 성질 급한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런 사람들이 와요. 오는데 주님께서 성령을 줘버린단 말이죠. 성령은 누구 마음이냐 하면 예수님의 자기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주면 베드로는 나중에 껍질만 남아요. 안의 내용은 성령이 역사하기 때문에 주께서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다룰 수 있습니다. 이게 베드로만 아니라 오늘날 성도에게도 해당됩니다. 

제가 동질성이란 어려운 말을 했지만 이 말 외에 적당한 말이 없어요. 왜냐하면 동질성이란 두 시간 전의 나와 지금 나와 같다는 거거든요. 그리고 앞으로 두 시간 후에도 나일 것이라고 계속 우기는 것을 동질성이라고 합니다. 나라는 것은 form을 재서 여기까지는 나고, 저쪽은 나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정체성이 돼버리면 동질성의 나를 뭐로 보느냐? 껍질로 바뀌죠. 껍데기로 바뀝니다. 두 시간 전에 저를 다루신 것처럼 앞으로 두 시간 후에도 저를 다루실 거니까 내 인생, 내 운명에 대해서 잘 될 것이라는 게 아니라 아예 없음이 돼야 돼요. 운명이 있으면 예정론 골치 아프지요, 천국 가는 건 골치 아프고 그러잖아요. 왜냐하면 나라는 동질성이 따로 있으면 15년 뒤에 천국 간다면 15년 동안 내가 성도로 유지해야 되는데 이게 얼마나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됩니까. 중간에 치매 걸리면 어떻게 할 거예요? 보통 문제 아니거든요. 

치매라는 게 타인의 기억에서 멀어지지만 자기 자신의 기억에서도 멀어져요. 치매가 아들 못 알아본다는 정도 같으면 중간쯤 되는 건데 정말 치매가 심한 것은 자기 자신을 못 알아봐요. 그럼 죽을 때 다 된 거죠. 그냥 육신의 껍데기만 있는 거예요. 죽은 상태지요. 나는 죽을 때 웃으면서 찬양하면서 죽을 게. 이러면 정상인이죠. 그런데 치매 걸리면 나는 죽을 때 웃겠다는 것도 5년 전에 이미 다 바닥났어요. 다 써먹었어. 그때부터 예수가 누군지 몰라요. 내가 뭘 할지도 몰라요. 그냥 자다가 헉하고 돌아가시는 거예요. 대비할 타이밍도 손에 쥘 수 없어요. 그냥 죽어버리는데 폼 나게 멋있게 죽는 그 계획도 실패로 끝나요. 

인간은 껍질입니다. 갑자기 차사고 나서 죽어보세요. 폼 나게 죽는 게 어디 있어요. 아직도 자기 동질성이 있으니까 난 죽을 때 자식들 모아놓고 예수님 간증하며 죽어야지, 라는 되지도 않는 망상을 품고 있다니까.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자기를 놔버리는 거란 말이죠. 성령께서는 미리 그걸 놓게 만들어요. 

십자가로 나는 죽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을 미리 경험케 하는데 아직 우리는 다윗처럼 동질성이 남아있기 때문에 정체성과 치열하게 싸움 벌이고 있습니다. 정체성은 내 마음이 아니고 누가 집어넣은 마음이기 때문에 우리는 정체성에 눈 돌리지 않게 돼요. 난 그런 거 몰라. 남들이 인정해주면 그걸로 오케이. 자식이 날 인정해주고, 남편이나 아내가 날 인정해주고, 교인들이 날 인정해주면 난 오케이. 

권 목사님이 아까 이야기했는데 교인이 열다섯 명쯤 된다 했어요. 본인은 열다섯 명의 목사에요. 그런데 하나둘 빠져나갑니다. 열세 명의 목사였다가, 열두 명의 목사였다가 지금은 몇 명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자 서 목사님이 그 사람도 언젠가 간다는 거예요. 보세요. 나의 동질성은 열다섯 명 이었는데 이제는 제로에요. “목사님, 교인 몇 명입니까?” “없습니다.” 이렇게 된단 말이죠. 그럼 나의 동질성은 교인이 하나도 없는 목사가 돼버려요. 

하지만 그렇게 해도 자기 소망이 멈추지 않지요. 한 이 년 후에는 열댓 명 올걸? 이런단 말이죠. 이게 뭐냐 하면, 과거의 기억을 고집스럽게 계속 이어가고자 하는 거예요. 지금은 없지만 이 년 뒤에는 서울대학교 나왔다는 소리 듣고 열댓 명 들어올 수 있다. 그런 기대를 계속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래도 나는 가수다. 나는 목사다. 계속 가는 겁니다. 

이 다윗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겁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긴다 하지만 사울에게 쫓기는 게 아니에요. 다윗은 진짜 다윗 되게 하시는 주님한테 쫓기고 주님의 원수, 주님과 싸우는 자는 본인이 고집하는 본인을 놓지 않기 때문에 그걸 쥐고 있기 때문에 주님과 날마다 싸우는 겁니다. 사울이 적이 아니고 내가 나의 적이 되는 거예요. 나의 정체성이 적이 되는 겁니다. 동질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시편 4편에 나오는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할 때 대표적으로 이것을 왜곡되게 정말 터무니없이 잘못된 해석이 바로 다윗을 나와 동일시한다는 겁니다.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하는 금요철야기도회에서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하게 되면, 내가 부를 때에 그 다음에 뭐라고 돼있어요? 응답하지요. 금요철야기도회에 왜 왔습니까? 응답받기 위해서 온 거예요. 성경에 나오니까 그 다음에 나오는 멘트가 뭐냐? “주여, 성경말씀을 나는 믿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믿으니까 여기서 일어난 그것이 그대로 나한테 응답으로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 뒤에 보면,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 할 때 인생이란 자기를 평소에 괴롭혔던 아줌마라든지 있잖아요. 아래층과 층간 소음 때문에 성질 급한 그런 사람들과 적이 되는 거예요. 이 사람이 기도하면서, “주여, 저 사람을 밟아요, 말아요? 주여, 저의 기도를 들으소서. 저들이 나를 괴롭게 하지만 저들의 영광을 나중에 허사로 끝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미 정답 나온 것, 응답받기 쉬운 겁니다. 믿습니다, 하면 끝날 문제에요. 모든 성경을. 

그러면 그 사람은 자기 정체성이 아니고 자기가 고수하겠다는, 고집스럽게 자기 동질성을 계속 붙들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만약에 목사가 설교해준다면 교인들은 은혜 받았다고 난리도 아니에요. 뭔가 노렸던 게 있는 모양이죠. 나의 나 됨을 누가 인정해줄 때 우리는 그런 자리에서 우리의 노동과 돈을 아낌없이 제공합니다. 내가 생각했던 나를 남이 타인이 동의해줄 때 인정해줄 때 우리는 그 사람과 친구처럼 느껴지고 같은 운명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이게 아니라면 다윗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님의 정체성을 먼저 따져야 돼요. 지금부터 강의가 굉장히 어려워요.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 받는 대목이 나옵니다.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게 있어요. 예수님은 자기 증명을 사탄에게 하지 않았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첫 번째, 예수님은 사탄에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명하지 않았어요. 증명은 누가 하느냐? 사탄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인정하고, 메시아라는 증빙자료를 사탄이 제공한다는 사실. 두 개의 문장을 연결시키면 어떤 내용인지 아시겠습니까? 

광야에 갈 때 성령이 가게 하셨어요. 성령께서 사탄을 붙였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존재증명을 할 이유가 없어요. 내가 누구냐 하는 아까 이야기한 동질성이 예수님한테는 필요치 않아요. 모든 인간들은 동질성을 붙들고 삽니다. 남한테 인정받을 때 비로소 내가 안심이 돼요. “나는 이런 맞구나.” 남한테 나설 때도 너희들이 이야기한 나라고 그들에게 소개가 돼요. 명함 같은 게 그런 것 아닙니까. 

명함에 ‘○○회사 과장’, 이런 게 나와야지 ‘주의 종’이라고 안 쓰잖아요. 왜냐하면 보편성이 일반성이 떨어진다고요. 명함에다 ‘주부’ 이런 것도 안 돼요. 직업이 있어야 돼요. 방송에서 아주머니들 나올 때 꼭 직업 없으면 주부라고 나와요. 직업이 있으면 직업이 나온다고요. 여자라면 없을 때 주부지 일단 있으면 산부인과 의사, 내과 의사라든지 나오지 주부라고 안 나온단 말이죠. 

상대방이 생각하는 이상의 남들이 인정해주는 자아로 자기가 집중력을 가져야 되니까 그래요.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가 자기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데 성령께서 사탄을 부추겨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했을 경우에 사탄이 인정하는 메시아는 이런 조건이어야 하는데 그 조건에 당신이 맞습니까? 사탄 쪽에서 증명해대는 거예요. 성도가 성도라 하면 안 돼요. 성도가 자기를 믿는 자라고 하면 안 됩니다. 

십자가마을이 이것 때문에 갈라졌거든요. “이근호 목사는 예수도 안 믿는다.” 이것 때문에 갈라졌어요. 그 사람이, 예수 믿느냐고 물었어요. 내가 답변 안 했어요. 그런 건 나한테 묻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근호 목사는 예수 믿는지 안 믿는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서 갈라졌거든요. 

주님께서 사탄을 우리 주변에 계속 두는 이유가 뭐냐 하면, 네가 증명하는 것은 전부 가짜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동질성에서 못 벗어납니다. 동질성이 나기 때문에. 남들의 시선, 남들의 요구사항, 남들이 인정하는 것이 솜사탕처럼 뭉쳐져서 그게 나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 아무 내용이 없어요. 남들이 인정한 대로 그냥 따랐기 때문에 주변의 남이 뭘 요구하느냐에 따라서 그때마다 나가 변동되기 때문에 진짜 나는 몰라요. 

따라서 나의 정체성이란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이렇다. I am ⏿. 우리는 이 네모에 들어갈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건 누구 소관이냐 하면, 주님의 소관이에요. 신약에 갈라디아서, 로마서에서는 여기에 우리를 죄인으로 집어넣는다니까요. 죄인으로 집어넣을 때 감사해야 돼요. 왜냐?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을 알기 쉽게 하면, 앞에 뭘 집어넣으세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분이 아닌 그분이 보시기에 죄인이라고 하면 되는 거예요. 참 쉽지요. 

그러면 이런 정체성에서 그 다음에 기능이 나오는데 기능은 나의 동질성에서 나오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남들이 나한테 심어준 체면과 명예에 따라서 행동을 조절하는 그런 기능이 아니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심어준 정체성에서 나온 기능이 나와요. 이게 뭐냐 하면, 주의 기능이 나옵니다. 메시아의 기능이 나와요. 성도는 안에서 메시아의 기능이 나오게 돼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오늘 본문이 다윗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다 해당되는 겁니다. 

아까 제가 빠르게 이야기했지만 우리에게는 운명이라는 게 필요치 않아요. 죄인에게 운명이란 우리가 결정하는 게 아니고 우리를 죄인으로 규정할 때 주님이 보시기에 죄인으로 규정해줄 때 이렇게 들어오신 예수님의 메시아 기능 자체가 우리의 미래가 되고 우리의 운명이 되고 우리의 현재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과거도 되고. 

그러면 사탄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네가 메시아이거든 이렇게 하라 했거든요. 네가 메시아이거든 돌이 떡 되게 하라. 메시아이거든 뛰어내려라. 메시아이거든 할 때 뒤에 붙는 말이 뭐냐 하면, 사탄이 기대하는 사탄이 인간세계를 장악하면서 거짓되게 심어놓은 인간들이 기대하는 메시아 상이 따로 있어요. 그걸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되는지 대질시키는 거예요. 그것 하라고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은 겁니다. 예수님을 사탄만 지켜보는 게 아니고 모든 인류와 그 당시 유대사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다 지켜보는 거예요. 내가 원했던 오실 메시아 맞는지 자기 기준으로 정립된 게 있고, 그 기준에 준해서 예수님을 파악하고자 한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당시 사탄에 종속된 인간들, 이것이 광야의 시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사탄한테 시험을 끝났지만, 십자가질 때까지 일반사회에서 예수님은 동일한 시험을 계속 받습니다. 일단 대장이 사탄이니까 사탄한테 시험받고 난 뒤에 예수님과 사탄 사이에 있었던 테스트가 예수님 십자가질 때까지 계속해서 주변의 테스트가 이어지는 그런 삶을 예수님은 사시는 거예요. 

만약에 성도에게 정체성이 들어왔다. 십자가의 정체성, 예수님의 정체성이 들어왔다. 그러면 그걸로부터 해서 천국 갈 때까지 계속해서 사탄이 주는 시험에 성도는 시달리게 돼있습니다. 끊임없이. 시험의 기준이 두 가지인데 사탄이 이야기하는 메시아 상이 어떤 메시아 상이냐? 이것이 바로 땅을 위한 메시아에요. 이 땅은 인간의 생존 터전이기 때문에.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이 쫓겨나서 땅의 토지를 갈아야 되죠. 그렇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요. 죽기를 무서워한다는 것은 사탄에 매여 있으니까 땅을 위한 메시아가 오기를 원해요. 땅이 경작이 안 되면 자기는 못 사니까. 

땅은 쫓겨난 결과성이거든요. 인간은 원래 토지에서 농사지을 필요 없었어요. 쫓겨난 존재임을 마음껏 보여주는 것이 땅에서의 삶이에요. 땅에서 살다 결국은 죽게 됩니다. 죽어서 흙이 되지요. 죽어서 흙이 됨에도 불구하고 땅에서 생존하겠다는 말은, 땅에서 죽음이 일어나는 그 취지에 대해서 극구 저지하고 탈피하고 거기서 발을 빼려고 애쓰는 그 노력 속에서 뭐냐 나오느냐 하면, 악마의 본래의 뜻이 거기서 돌출되게 돼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살아야지, 하는 그 말 속에는 사탄의 요구조건이 함유돼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지. 결국 죽는데. 죽을 때 죽더라도 살 때까지 살아야지. 거기에 사탄이 뭔가 의도가 있어요. 그러면 묻지요. “왜 죽어야 될 인간이 삽니까?” 그건 묻지 말고. 하거든요. 그러다 더 화가 나면, “너는 죽고 싶어?” 하고 반대로 공격해 들어오지요. 

이런 인간들밖에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뭘 집어넣느냐 하면, 땅에다 죽는 이유를 집어넣어요. 죽는 이유가 언약궤입니다. 그러면 땅+언약궤=하나님 언약의 실현, 상태가 돼요. 그런데 언약궤 특징은 캄캄한 데 있어요. 이스라엘 성막 동영상 보시기 바랍니다. 이미아 씨가 녹취 다했는데. 이상현 목사님이 통역했거든요. 거기 지성소까지 들어가요. 그 지성소가 캄캄해요. 그래서 다윗이, 너무 캄캄한 데 계셨습니다. 이제 환하게 나오셔야지요. 그래서 성전 구상하게 된 겁니다. 캄캄하다는 것은 스스로 자폐적인 것, 밀폐되고 폐쇄적인 거예요. 

왜 언약궤가 어두운 곳에 있느냐? 거기는 정말 캄캄해요. 조명시설이 지성소에 있지 않고 커튼 앞에 성소에 있기 때문에 지성소에는 조명시설이 없어요. 왜 캄캄한 데 계시느냐? 땅의 정체성을 어느 쪽에 있을 때 비로소 밝혀지는지 보여주는 겁니다. 하늘이 땅에 섞였다고 보면 제일 쉬워요. 하늘과 땅이 끊어졌는데 하나님께서 언약이란 이름으로 하늘의 요소를 땅에 집어넣어버렸어요. 그게 언약이고 언약이 오게 되면 이 지상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장가가고 사고팔더라도 노아언약에 의해서 전부 물에 잠겨버려요. 엄청난 저주고 심판인 겁니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갈 때 뭘 속이고 남을 해코지해서 멸망한 게 아니에요. 땅 자체가 멸망의 요소의 표현들이기 때문에 땅의 열매기 때문에 땅과 더불어 멸망하는 겁니다. 노아 홍수가 올 때 온 땅을 덮었다는 말이 뭔 뜻일까요? 물이 안 덮친 곳은 한 군데밖에 없어요. 방주 안 밖에 없어요. 방주가 동동 뜨는 겁니다. 뜬다는 것은 다 잠겼다는 거거든요. 이것은 누구의 잘, 잘못을 따질 자격이 안 된다는 겁니다. 인간들끼리. 왜냐하면 인간은 땅에 밀착해서 살아야 되기 때문에. 

땅에 밀착한 동물 이름이 나오지요. 창세기 2장에. 뱀. 뱀과 더불어 땅과 밀착해 살아야 돼요. 부동산, 자기 땅 없는 걸 나그네라 해요. 우리 성도를 나그네라 하잖아요. 네가 있을 곳이 없단 말이거든요.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강남 가고 이민 가는 이유를 모르겠어. 이민 간 사람들 화내겠지만.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그것도 모자라면 방주 만들기 해서 땅 파고 핵전쟁 대비해서 들어가는데. 

땅은 호소하게 돼있어요. 죽음을 내뿜게 돼있지 피할 곳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지요. 산들아, 바위들아, 나를 덮쳐도 다시 오실 예수님의 영광을 도저히 피할 구석이 없습니다. 피할 곳이 없으면 안 피하면 돼요. 그 원인이 뭐냐 하면, 우리가 땅 없이는 못 산다는 근원적인 자기 정체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땅과 인간이 한 통속이에요. 왜냐하면 죽으면 땅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땅은 흙으로 돼있고 인간도 흙이고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땅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땅이 저주받으면 곧 그 땅만 믿고 사는 우리도 같이 저주받는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을 때 세 번째 시험이 그거였잖아요. 세상의 모든 영광을 너한테 줄게. 나한테 절하라. 절할 이유가 없어요. 왜냐하면 저주의 왕에게 왜 절합니까, 저주받으려고 절합니까? 그럴 필요 없잖아요. 

시편은 다윗언약이거든요. 언약궤가 함께 있다는 것을 다윗을 주목합니다. 사실은 다윗이 주목하는 게 아니고 언약에 의해서 다윗이 자기의 동일성에서 자아성에서 진짜 자아를 찾아가는 정체성으로 옮겨가는 작업에 다윗언약이 여기에 개입하게 돼있습니다. 그 언약이 개입하면서 다윗은 자기가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아예 처음부터 나는 죄인으로 출발했다고 하죠. 그렇게 되면 다윗은 저주받은 땅에 하늘의 언약과 유일하게 만나는 언약지점이 돼요. 그러면서 본인은 죄인이 되는 겁니다. 죄인과 언약의 죽음과의 결합에서 바로 천국이 거기서 나온 거예요. 

하늘에 올라갔다고 천국 나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하늘 올라가봐야 우리 동질성, 우리 자아성으로 올라가봐야 올라간 그것이 다 허무해요. 허망하고 허구라니까요. 어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이생 다음에 저 생 있다고? 그건 망상입니다. 없어요. 그런 논리는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생이라고 규정한 그 규정을 내 몸에서 규정했기 때문에 내 자아성에서 규정했거든요. 남들에게 들은 이야기 있잖아요. 이 몸은 이 땅에서 고생하지만 죽어서는 좋은 데 가야지, 편히 있어야 한다는 그런 계산을 정체성에서 하는 게 아니고 먼저 있는 내가 여기 있음에서 출발하거든요. 

나의 있음에서 출발하면 안 되고 내가 예수님께 옮겨와서 예수의 나라가 천국이에요. 내가 가고 싶은 나라가 천국이 아니고 예수의 나라로 옮겨가면서 거기서 나가 손실돼야 돼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야 된다 이 말이죠. 내가 손실되면서 내 꿈과 내 소망과 믿음도 같이 없어져버려야 돼요. 그야말로 주님 앞에서 우리는 치매 환자가 돼야 됩니다. 껍질만 남아야 돼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와야 돼요. 

껍질이란 말은 주께서 나를 아무것도 아니도록 멍게의 내용물 다 뽑아내듯이 뽑아낼 때 쓸 만한 걸 뽑아내는 게 아니고 쓸 만한 게 없음을 확정지으면서 뽑아내요. 죄인으로서 뽑아낸다고. 죄인으로 뽑아냈는데 주님의 언약 완성에서는 그게 유일한 쓸모 있는 게 돼요. 세리와 창기와 강도가 그런 사람 아닙니까. 그 사람들 천국 간다하면 그 당시에 사람들 놀랬어요. 왜냐하면 나쁜 사람들이거든요. 

그 사람들이 만약에 천국 간다면 예수님이 소개한 천국은 어떤 천국이냐 하면 나쁜 사람이기에 가야 될 나라가 돼요. 천국은. 그게 정답이에요. 천국은 나쁜 사람이어야 돼요. 나쁜 남자, 나쁜 여자. 나쁜 사람이 가는 곳은 천국이고 착한 사람들은 지옥을 가야 된다니까요. 그러니 시편 4편 보고 철야기도하면서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나를 의인되게 하소서” 이러면 이거는 지옥 가는 주문 외우는 것과 똑같아요. 여기에 열중하면 점점 더 지옥에 가까워지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 다시 하겠습니다. 내가 신자 맞습니까, 나는 교인입니까, 나는 성도입니까? 할 때 본인이 성도 되려고 하지 마세요. 남들 열다섯 명 오잖아요. 다 나가버려요. 세상은 그것 때문에 있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 옆에 누가 있었습니까? 강도 외에는 없어요. 우는 아줌마들 두어 명 있었지만 나머지 제자들은 멀찍이 보든지 다 갔어요. 없어요. 

그 상황이 그대로 우리 속에 들어와야 돼요. 외로워야 되고. 외롭다는 말도 건방진 말이에요. 아직도 친구 많다는 걸 미련 두고 있다는 것, 자기 동질성을 쥐고 있으니까 친구 열댓 명 되고 동창회 가면 알아주고 하는데 지금은 동창회 가기도 싫고 가봐야 술만 먹고. 이것은 주변이 알아서 나를 단절시켜주니까 이게 바로 광야에서 예수님이 당했던 시험인 겁니다. 

“나는 주의 종이다. 꺼져라. 사탄아!” 이럴 필요 없어요. 사탄은 성령께서 주님 뜻대로 나한테 보냈단 말이죠. 주님께서 사탄을 일부러 만나게 해줘요. 내가 정립되지 않은 정체성을 사탄이 와서 도와주는 셈이라니까요. 꼭 배고플 때 와요. 돈 떨어질 때 오고. 돌이 떡 되게 하라. 네 집에 있는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어 떼 부자 되라고 이런 식으로 오지요. 그럴 때 우리의 동질성에 의하면, “감사합니다. 주의 종이여” 하고 영접하겠지요. 부자 되게 하는데 누가 거절해요. 아무도 거절할 사람 없습니다. 이러면 성도 아니에요. 그런데 이게 바로 주께서 죄인 되게 하시는 방법이거든요. 

집세 600만원 올려줘야 되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이야기한 적도 없는데 딱 맞춰서 줬다. 그게 주의 은혜라고 하잖아요. 기본에 뭐가 있습니까? 이 땅에서 나는 더 살아야겠다는 것이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이걸 모르죠. 그럼 이런 것을 성도가 할 수 없는데 성령이 오게 되면 이걸 충분히 이렇게 해요. 빠지게 해놓고 돌아서서 소급해서 이게 네가 몰랐던 너의 진면목이라는 거예요. 얼마나 사탄이 감사해요. 먼 친척 아재가 얼마나 고맙습니다. 600만원 챙기고 죄인 되고 구원받고. 좀 그런 일이 자주 생겼으면 좋겠어. 챙길 건 챙기면 “주여, 죄인 여기 있습니다.” 해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음을 또다시 확인시켜주고. 

그런데 지난 낮 설교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제일 나쁜 게 뭐냐 하면, “사탄아, 물러가라!” 도대체. 이건 지금은 나는 성도다. 앞으로 성도답게 살아야 돼. 그런데 사탄이 얼마나 날 지옥 가라고 시험하겠느냐? 따라서 나는 이미 성령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내 힘으로 내가 성령을 조종해서 어쨌든 간에 나한테 오는 유혹을 물리치지 아니하면 나는 탈락이고 뿌리치면 성공이다. 이게 바로 사탄 아닙니까. 이런 사고방식이 사탄이에요. 

그 사람에게 당신 치매 걸리면 어떻게 할래? 지금 그 사람은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자기는 여기 있고 그리스도를 타인으로 봐요. 예수님이 타인 중에 하나죠. 예수님이 나를 지켜볼 때 나는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그 관계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니까요. 아까 이야기했죠. 나라는 것은 주변에 누가 나타나느냐에 따라서 그때마다 정립이 된다고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할 때 예수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개가 토한 것을 도로 먹듯이 비췸을 얻더라도 십자가 모르면 탈락하듯이 그 말씀이 자꾸 생각나는 거예요. 생각나서 그걸 이겨보려고 하는 겁니다. 하다하다 안 되면 어디 가느냐? 감람산 기도원 이런 데 가요. 이 세상 땅에 어디 가도 지옥이에요. 감람산 기도원, 지리산 들어가면 성자 되는 줄 알아요. 안 먹고 안 들으면 돼요? 이 세상에 피할 데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자기증명이에요. 지난 낮 설교에 했지만. 상상하는 거예요. “주님, 저 주님 제자 맞습니다. 주의 사람 맞습니다.” 하는 거예요. 이것 사탄의 짓이에요. 이것 아닙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떻게 됐습니까? 바로 종의 길을 가는 거예요. 외부에 있는 고통을 주님이 사용하셔서 나한테 스며들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영광 받는 왕의 자리가 고난 받는 종의 자리로 전환되면서 시편 4편이 쓰여지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겠다는 게 아니고 주께서 나를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쓰시는 거예요. 쓰시게 되면 장차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수님이 자기만 구원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아니죠. 구원할 자기 백성 있지요. 

그러면 자기 백성과 예수님 사이에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그들의 죄가 어디에 스며듭니까? 예수님께 스며들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잖아요. 그게 고난 받는 종이 되는 거예요. 고난 받는 종인데 그게 왕이에요.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 사탄은 일반 사람들이 메시아를 로마제국에서 벗어나는 위대한 영웅, 힘 쎈 왕, 진짜 다윗 같은 그들은 다윗의 자손을 기다렸어요. 

실패한 다윗 말고 성공한 다윗이 오시게 되면 우리 민족은 드디어 약속대로 택하신 민족으로 구원받는다고 자기 정체성이 아니고 자기 동일성을 계속 우기는 거예요. 동일성들이 모이면 집단적 동일성이 되잖아요. 집단 주체 아닙니까. 그게 바로 우리 유대민족은 하나님이 택한 민족이라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너 성도고 나 성도니까 우리 교회는 성도다. 이게 집단 주체거든요. 그러니까 나 자신을 귀히 여기듯이 내가 속해 있는 집단을 귀히 여겨요. 그게 우상이거든요. 

이단은 딴 게 아니에요. 자기의 우상을 숨기지 않고 집단의 모습으로 드러낸 게 이단입니다. 자기가 볼 것 없으니까 나는 어디에 소속돼있다고 자랑 질하는 것. 그렇게 기 안 죽으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자기 집안이 어려우면, 시삼촌이 청와대에 있고, 우리 조카가 이번에 울산시 토목직 9급에 합격했고. 자꾸 이렇게 뭔가 껍질에다 괜찮은 브랜드를 붙이는 거예요. 주께선 이미 죄인으로 규정했는데 그게 싫은 거예요. 죄인이지만 좀 괜찮은 죄인,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무슨 괜찮은 죄인이 있습니까. 전부 다 미더덕 찜이고 멍게인데. 

다윗의 시편 4편의 주제가 뭐냐고 물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기능으로 말미암아 왕임에도 불구하고 진짜 택한 백성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택한 백성의 아픔이 다윗 개인적 아픔으로 뿜어져 나온다는 것이 시편 4편의 주제입니다. 아픔을 즐기는 사람은 정신병자에요. 아픔을 왜 즐깁니까. 

그런데 다윗이 이렇게 하는 것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언약궤는 땅에 있거든요. 언약궤가 시내 산에서 주어졌지요. 언약궤는 상자에요. 물체에요. 그 안에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있고. 그 상자가 나중에 인격이 돼요. 이 과정이 어려워요. 이 과정은 다음 시간에 이야기할 거예요. 언약궤가 있다하니까 엘리 제사장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상자 있으면 적들이 물러갈 줄 안 거예요. 찌지직 어떤 전자파 나와서 이길 줄 알았어요. 상자 빼앗기고 전쟁에 패배했잖아요. 

다윗언약은 뭐냐 하면, 상자가 물체가 돼버리면 인간에게 대상체가 돼요. 인간 바깥에 있는 사물체가 된다고. 다른 사물 다루듯이 우리가 내 소유로 삼으려고 시도합니다. 이런 관계에서는 물체의 뜻과 내가 합치가 안 돼요. 언약궤가 인격체로 변해줘야 나란 인격이 합류하게 되고 함몰시키게 돼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특정 지점에 있으면 예수가 아니에요. 예배당 앞자리에 예수님 계시면 안 됩니다. 앞자리가 은혜 받는 특수한 자리가 되면 그건 하나의 지점이 돼요. 나의 대상으로 물체가 된다고요

그럼 주님은 뭐냐? 성령께서 어디에 옵니까? 어떤 특정 물체에 손대면 하는, 그건 옛날 언약궤고 언약궤 뚜껑 열면 죽고, 그거는 구약이지만 신약에서는 우리 마음속에 와요. 우리 내부에 온다고. 인격체로서. 내부에 오기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것은 내 육체만 보일 뿐인데 안의 기능은 주님이 기능하는 것. 물론 그렇게 되면 남들은 안 알아주지요. 왜? 남들은 우리 겉모습을 보기 때문에 안 알아주지요. 이 과정은 10분 쉬고 두 번째 시간에 하겠습니다.
 

 한윤범  (IP:14.♡.134.25) 18-04-13 09:00 
20180409b 부산강의 : [시편]9(4편)-동질성과 정체성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서 제일 어려운 단어가 뭐냐 하면, 상대방을 사물로 본다는 거예요. 이것은 바로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로 전쟁에 써먹는 신비로운 능력을 지닌 전쟁무기로 사물화 시켰다는 겁니다. 물체화 시켰다는 이것이 법궤에서만 그런 게 아니고 평소에 자기 자신을 볼 때 하나의 물체로 본다는 겁니다. 인간은. 물체로 보니까 폼이 형성되겠지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내 것이라는 겁니다. 내 것이기 때문에 내가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겠느냐 하는 거죠. 나를 불편하게 하고 괴롭히는 사람은 사정없이 밀쳐내죠. 

그래서 제가 치즈라는 말을 한 것은 그게 막이 없어지게 되면 인격과 인격이 교류가 되는 거예요. 이게 두 번째 시간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남을 사물로 본다는 것은 내 자신도 머리에 그리는 거예요. 키 얼마, 모습, 이렇게 자기를 사물로 보는 거예요. 사물로 보다보니까 아무리 어떤 사람이라도 그 막이 오히려 경계심이 더욱 더 증강될 뿐이죠. 흔히 말해서 마음 문이 안 열린다는 말입니다. 그쪽 내용과 이쪽 내용이 하나로 통합되면 되는데, 회사 통합하듯이 하면 되는데 각자 각자의 너라는 물체와 나라는 물체가 있는 거예요. 

부부 사이에 그러면 참 힘듭니다. 둘이 따로 놀아요. 인간이 생각하는 죄라는 것은 자기 불편을 이야기해요. 자기라는 것이 먼저 사물화 되고 난 뒤에 그게 불편하게 되면 죄가 되는 겁니다. 신혼 때 같이 침대에 눕더라도 등 돌리면 죄가 돼요. 신혼 때 이야기입니다. 신혼 때 등 돌리면, “당신, 나 싫어졌나? 권태기야?” 이렇게 나옵니다. 요새는 각 방이 기본 아닙니까. 여자가 화나서 베개 던지면서, “딴 방에서 자!” 하면 남자는 연기한다고, “있고 싶은데 …….” 하고 문 닫자마자, “야호! 오늘밤 해방이다.” <같이 살래요> 드라마 보면 나오지요. 신나지요. 그렇게 신나는데 아내 죽어보세요. 더 신나지. 

하나님의 약속이 왜 법궤란 물체로 왔을까요? 인간이 자기 자신을 그렇게 물체로 보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 옆에 가까이 해서 그리고 기도 간절히 해도 자기 막이 형성된 이상은 절대로 내가 나를 지켜야 된다는 정신이 투철한 이상은 뚫어내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러면 뚫어내지 못하면 주의 구원이 안 되지요. 안 되기 때문에 주께서는 비책을 쓸 수밖에 없지요. 그걸 다윗을 통해서 일부 보여줍니다. 

소년 다윗의 경우에 특히 그런데 소년 다윗이 어떤 기능을 발휘하는데 그 기능이 자기의 명예나 영달을 위해서 골리앗을 죽였습니까? 아니지요.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저 블레셋을 할례 받지 않은 자라고 규정합니다. 똑같은 방식이 신명기에도 나오지요. 갈렙과 여호수아가 열 지파와 함께 정탐하러 갑니다. 굉장히 멀리까지 올라가요. 단까지 올라가니까 지금의 이집트에서 시리아까지 올라갑니다. 다 정탐하고 내려와요. 해놓고 열 사람은 못 들어간다고 했는데 갈렙과 여호수아는 들어간다고 했어요. 들어가는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했기 때문에 그랬어요. 그 말은 약속이 이미 갈렙과 여호수아 마음속에 침투했다는 뜻이에요. 

천국은 침투돼야 돼요. 내가 찾아가서는 천국 못 갑니다. 에릭 크립톤이 부른 

천국 문을 두드린다는 유명한 노래가 있어요. 천국 문을 노크하면 문이 열리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시도하지요. 왜냐하면 이미 사물화 된 자기 자신의 세계, 천국은 주님의 세계가 아니고 자기가 제일 중요해요. 내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세계를 죽어서는 그 희망을 달성하겠다는 그 집념, 뒤에서 악마가 계속 밀어주고 있어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교회가 장사가 되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천국 갈 수 있습니다. 노크를 세 번 하라든지, 헌금하라든지 그렇게 들어가라 하는 거예요.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약속에 침투한 것이 아니라 약속이 갈렙과 여호수아의 마음속에 들어와 버렸어요. 네피림 후손의 장대한 아낙 족속들이 이미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잖아요. 약속이란 일방적으로 주님 우리 편이라는 게 아니에요. 약속의 약속됨은 우리 힘으로 갈 수 없는 불가능한 조건이 구비된 그것이 약속의 요소가 된다는 걸 믿는 거예요. 내가 안 되기에 더욱 더 약속답다 이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일조나 헌금이나 뭐든지 해도 이게 죄가 된다는 것을 확고히 하면 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약속이 더 완전하게 스며드는 거예요. 전도해도 안 되고, 기도해도 안 되고, 헌금해도 안 되고, 증보기도해도 안 되고, 뭘 해도 안 되니까 우리는 행복한 거예요. 기분 좋은 거예요. 그래서 이걸 어제 낮 설교에 죄짓고 난 뒤에 행복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한 거예요. 당장 오해할 소지가 있는데. 행복하기 위해서 죄지을 수가 있는데 그건 들을 귀 없는 사람은 그렇게 할 거고. 

얼마나 좋은지 족구해서 져도 괜찮고, 교인들 나가도 괜찮고, 들어오면 더욱 좋고. 교인이 들어왔다는 말은 내 동질성이 괜찮은 목사라는 것을 타인이 인정해주니까 나는 뭣에 빠진다? 사탄의 시험에 빠졌구나, 라는 것을 뒤늦게 생각하니까 교인은 교인대로 챙기고 죄인 되고 구원받고. 아까 그 공식 있지요. 

우리의 모든 행함은 불가능입니다. 폭죽이 불발이에요. 불발이라는 것을 갈렙과 여호수아가 아는 겁니다. 약속은 원래 그래야 된다는 거예요. 놀랍게도 소년 다윗이 키 큰 블레셋, 만약에 자기가 소년이지만 자기보다 키 작은 150정도로 난쟁이 수준이라면 소년 다윗 나갈 필요 없어요. 사울 쪽에서 서로 나서려고 합니다. 그런데 키가 너무 커. 3미터나 되는 엄청나게 커요. 아무도 나설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 키 크고 나설 사람이 없는 조건이 하나님의 할례 받지 않은 민족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키 크기로 전쟁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조건에 따라서 패배하도록 우리에게 허수아비처럼 주께서 심어놨다는 정신을 소년 다윗이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밥이지요. 사실은. 부러워하면 진다는 말이 있잖아요. 부러워할 수밖에 없지만 그 부러워함이 나로 하여금 이 세상은 지옥이라는 걸 보여주는 증빙자료가 돼요. 

다윗에게 그런 약속이 있기 때문에 다윗은 소년에서 어른 되면서 자기 주변에 분명히 인간끼리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오직 약속이란 것 때문에 이상하게 다윗은 좇기고 밉상 받고 미움 받는 일들이 계속 일어납니다. 사실은 할례언약 때 소년 다윗이 왕으로 됐지만 이상하게 그 다음 왕은 좇기는 왕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과 약속이 스며든 사람과의 관계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의라고 합니다. 시편 4편 1절에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에 골리앗과 싸워서 이기게 하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 응답하소서. 한 번 이겼다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계속해서 그 관계가 유지되게 하옵소서. 왜냐하면 의라는 것은 관계거든요.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같이 다니는 그거라니까. 

꼭두각시 인형은 조종하는 인형이란 말이죠. 조종하는 끈이 끊어지면 인형이 쭉 늘어지지요. 중력에 의해서. 그러니까 주께서 조종할 때까지 조종돼야 될 관계가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이건 신약도 마찬가지에요. 의를 소유할 때 내가 의인 되는 게 아니고 그 의 앞에서 내가 죄인이 될 때 죄인되게 하시는 근원적으로 죄인 되게 하시는 그게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어른이 되고 난 뒤에 밧세바와 관계를 해야만 했고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 장군을 죽여야만 했어요. 뭔가 죽음이 있어야 돼요. 자기 인생 속에. 나로 인하여 누가 죽어줘야 돼요. 누가 죽었느냐 하면, 우리야도 죽었고 밧세바와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도 죽고 맙니다. 그러니까 다윗 주변에 보면, 다윗으로 인하여 죽었던 자들이 포진된 거예요. 신약에선 이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주변에 예수님의 아픔과 고난이 나한테 스며들게 되면 우리는 주님과 의의 관계가 성립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에요. 언약은 예수님이 갖고 있습니다. 언약의 하나님이 부활하셔서 살아계시니까 우리에게 찾아올 때는 뭘 앞장세웁니까? 언약을 앞장세우는 거예요. 언약은 우리가 흔히 아는 대로 다 이루었다가 다가옵니다. 

그런데 다 이루었다고 다가오게 되면 우리는 동질성 입장에서는 아직 이룰 게 너무 많아요. 일단은 아들 결혼시켜야 되고 딸도 시집보내야 되고 취직도 해야 되고 내 연금도 확보해야 되고 몸 아프면 병원도 가야 되고 다 이루었다가 아니에요. 아직도 할 게 쌔고 쌨어요. 내년되면 또 내년에 할 게 있고. 이스라엘도 한 번 가야 되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할 게 너~무 많아. 

그런데 주님께선 우리한테 다 이루었다고 하거든요. 할 게 많은 것과 미완료지요. 완료가 계속 싸워나가는 거예요. 싸우면서 우리 안에서 나로 인하여 주님이 심히 가슴 아파하고 주님이 괴로워하는 요소가 우리 육의 죄를 통해서 계속 쏟아져 나오도록 그렇게 조치하는 겁니다. 그 일을 이제는 적들이, 사탄에 속한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유도하지요. 

그럴 때 여기서 내가 생각한 메시아와 주님께서 생각한 메시아가, 특히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이게 완전히 격차가 나요. 격차 나는 대표적인 사람이 세례요한입니다. 지금부터 세례요한 이야기를 좀 하겠어요. 세례요한은 묵시적 메시아를 원했습니다. 여기서 묵시적과 역사적 차이가 뭐냐? 역사적이라면 서서히 하늘나라가 되는거라면, 묵시적은 돌발적으로 되는 것. 

세례요한은 돌발적으로 하늘나라가 끝장날 줄 알았어요. 왜? 가까이 왔다 했으니까. 빨리 대비해야 돼요. 얼마 안 남았어요. 빨리 대비해서 물속에 뛰어들어야 돼요.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그리고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 복장부터 해서 전부 다 주께서 시킨 거예요. 예수님이 시킨 거죠. 예수님의 소리니까. 예수님보다 앞장서서 예수님 오실 것을 견인해야 되니까 주님께서 시켜서 세례요한 모든 것을 해놓고 요단강 정 북쪽에 안디바라는 성채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소식전하기를, “오실 메시아가 당신 맞습니까?”라고 했어요. 

묵시적으로 오신다는 것은 세례요한이 보기에 다윗이 왕답게 오는 걸 말합니다. 급작스럽게 사태를 완전히 호전시키고 반전시키는 거죠. 모든 괴로움을 다 씻어내는 겁니다. 그런데 이 다윗은 정치적 왕이에요. 정치적 왕의 특징은 하나에 사물이 되는 겁니다. 국가가 나의 물체가 돼버려요. 나라에 속해 있다. 보통 유니폼에 태극기 달잖아요. 태극기가 물체 아닙니까. 상징이잖아요. 그 말은 뭐냐? 나는 나한테 손댈 필요 없이 어디에 소속되면 자동적으로 그 나라의 혜택을 입게 돼있단 말이죠. 여권 하면서 회개할 필요 있어요? 나를 안 다치게 하면서도 그 나라에 소속될 수 있어요. 그 나라 가서 이민신청하면 된다 말이죠. 

여러분, 발리 섬이 어디 있지요? 인도네시아의 발리 섬이죠. 발리 섬을 천국 같다고 이야기해요. 너무 좋아서. 발리 섬이 천국 같다면 천국은 쉬워요. 표만 끊으면 돼요. 자기 자신을 변화할 하등에 이유가 없다니까요. 내가 누군지 새롭게 정립할 이유가 없어요. 표만 끊으면 된다는 말은, 나란 물체, 덩치를 돈만 주고 고스란히 발리 섬 같은 천국에 옮겨놓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누구든지 내 몸에 손대지 말라는 거죠. 고쳐도 내가 고칠 테니까 손대지 말란 겁니다. 외부에 있는 것이 나한테 스며드는 것을 물론 용납 안 해요. 

세례요한은 자기 할 일 다 했습니다. 분명히 옥에 갇혔으니까 세상 끝장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이렇게 천천히 온다는 걸 생각도 못한 겁니다. 내 뒤에 오실 분은 내가 신발 끈을 맬 정도로 그것도 안 될 정도로 대단한 분인데 불과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다. 어떻게 오신다고? 내가 물세례 줄게. 물세례 주는 것 봐서 성령도 불도 그런 식으로 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주일 낮에 세례를 뭐라고 했느냐 하면, 폭력적이라 했지요. 사람을 물에 집어넣는 것은 폭력적이에요. 아예 물속에 집어넣는다는 것은 죽으라고 집어넣는 거예요. 예수님이 제자들 씻길 때 발만 씻겼잖아요. 베드로는 타이 마사지하는 줄 알고 다른 곳도 씻어달라고 하죠. 그게 폭력적이에요. 일부만 씻어도 전체가 죄인이란 뜻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간수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손이 좀 더럽네요.” 이 말은 어떻게 보면 손만 씻으면 나머진 괜찮다는 것처럼 들리지요. “그럼 손만 씻지, 뭐.” “당신이 다 썩었다는 뜻이야.” 이러면 그게 언어폭력 아닙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기에 대한 폭력이에요. 십자가에 매달린 것보다 더 폭력이 있습니까? 아버지의 폭력을 예수님이 다 껴안은 겁니다. 

왜냐? 사람들은 워낙 자기라는 물체를 그냥 예쁘게 치장하고 다칠까봐 조마조마하면서 사수하고 보호하니까 주님께서 다 손을 벌린 거예요. 아버지의 저주를 온 몸으로 다 받은 겁니다. 그 받은 폭력을 우리에게 성령세례를 통해서 그대로 인수인계해버려요. 그러니까 우리 인생사는 것이 십자가 고난이죠. 자동적으로 고난의 길입니다. 사는 게 힘들어 죽겠어요. 살려하니까 힘든 거예요. 이런 것 해서 죽는 놀이하면 되는 거거든요. 오늘 수업은 우리 이렇게 해서 죽읍시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자기의식이 변화돼야 돼요. 여자에게서 태어난 중에서 최고가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 뒤에 모든 선지자가 줄을 쫙 서있어요. 예수님과 가까이 가면 갈수록 의인이 돼요. 이게 역사를 역행하는 방법입니다. 성경 해석할 때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가장 진리에 가깝지 멀어지는 것은 그만큼 진리가 옅어져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은 게 아니고 이삭 때문에 아브라함이 먼저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야곱 때문에 이삭은 본인을 알게 돼요. 요셉 때문에 야곱은 본인 자신을 알게 돼요. 이거는 자기가 물체가 아니고 주께서 언약 안에서 직접 다루신다는 겁니다. 다루는 내용이 뭐냐? 예수님 메시아 십자가에요. 

마태복음 17장에 변화산 나오지요. 거기서 엘리야와 모세 나오잖아요. 엘리야와 모세가 얼마나 일을 많이 했습니까. 그럼 자기 일로 구원받습니까? 아니에요.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엘리야와 모세가 의논한 것은 오직 예수님의 돌아가심, 십자가 죽으심 밖에 없어요. 그만큼 엘리야와 모세도 십자가 앞까지는 몽학선생, 초보자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그냥 희미하게 알고 있는 거예요. 세례요한도 마찬가지고. 

세례요한이 자기의식이 변하려면 뭘 느껴야 되느냐 하면, 자기라는 물체와 사물과 예수님이란 덩치, 육체 사이에 어떤 틈을 알고 있어야 돼요. 첫 번째는 알아야 된다. 두 번째는 그걸 뛰어넘을 가능성은 나에게는 없다. 이걸 분명히 해야 됩니다. 그래야 예수님만 증거 하게 돼요. 건널 수 없는 갭을 성령 오셔서 알게 하실 때 이 갭이 없어지는 게 아니고 갭에 그대로 덮치는 거예요. 그 갭을 가지고 계속해서 예수님만 증거 하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는 이렇게 성립되는 겁니다

나라는 것이 예수님 앞에서 부정적이니까 우리는 주님의 언약을 위해서 부정적인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더불어 동반해서 나와 줘야 되지요. 죄가 없는 곳에는 의가 없어요. 얼마 전에 누구와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자꾸 죄를 떼어내려고 합니다. 죄를 떼어내면 의도 같이 없어져요. 죄가 있고 그 죄에서 벗어날 길이 전무함을 내가 알게 될 때 그 안다는 것이 성령께서 오셨기 때문에 알게 된 거예요. 내가 어떤 짓을 해도 내 식으로 내 방법으로 나라는 물체를 천국에 집어넣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할 때 그게 바로 바깥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자기부정을 통해서 드러나는 거예요. 자기 미움을 통해서 드러나는 겁니다. 

세례요한 이야기를 계속해봅시다. 세례요한이 여기서 멈추는 게 아니에요. 세례요한과 다윗 사이에 또 뭔가 있어요. 미가 2장 13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지금 다윗은 왕이란 말이죠. 지배자, 왕, 철퇴내리는 사람. 철퇴내리는 사람은 시편 2편에 나오지요. 기름부음 받은 자가 다 부수리라. 시편 2편 9절,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다윗은 왕이에요. 왕이 수위를 낮추는 겁니다. 낮추면 고난 받는 종이에요. 이사야 53장. 왕인데 채찍을 맞아요. 채찍을 맞는데 때리는 사람이 높아요, 맞는 사람이 높아요? 때리는 사람이 강하죠. 때리는 사람에게 맞는 자리는 왕의 자리라니까요. 그러면 다윗에서 세례요한에 올 때까지 많은 선지자들이 수위를 낮추는 일들을 하겠지요. 스가랴에 보면 나귀 타고 온다 하고. 비행기가 착륙하려면 점점 낮아지거든요. 빌립보서 2장에서는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점점 더 낮아지는 거예요. 

점점 낮아지는 것에 대해서 인간들은 자기를 안 낮추지요. 안 낮추니까 대단한 왕, 멋진 왕을 계속 보는 거예요. 성경말씀에 문자대로 나오니까.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 메시아가 오게 되면 우리는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보고 있는 겁니다. 보고 있는데 주님은 그들의 발밑까지 내려와요. 멋있는 메시아를 세례요한도 같이 본 거예요. 

세례요한 정치적 메시아를 이야기했다는 것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필립이 제수씨와 결혼했지요. 왜 쓸데없이 그걸 간섭합니까? 결혼을 누구와 하던 왜 간섭하는 거예요? 세례요한은 그 당시 민중들이 갖고 있던 메시아 관을 대변해주고 있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회개할 때 열매들을 보세요. 그 열매들이 그 시대에서 정돈된 질서 있는 정치체제, 제대로 된 사회, 정직한 사회, 그걸 열매로 내놨어요. 군인들은 토색하지 말고 받는 급료에 족해라. 경찰관들아, 월급 적더라고 그걸로 감사하라. 그 시대 사회구조를 인정해줬다는 말입니다. 세례요한은 그 유대사회 전체를 정형화시키고(formation), 그렇게 폼으로 만들면 반드시 대상화된 물체가 돼야 된다니까요. 우리가 나를 폼으로 만들면 물체 같이 내가 다룰 수 있는 대상이 돼버려요. 

제 강의가 지금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안 되느냐? 그렇게 돼버리면 나한테 이익 되는 사람, 손해되는 사람, 내가 강하게 일치가 돼요. 하나의 자아상, 동질성을 갖추면 이건 주의 일을 하는 게 아니고 누구의 일을 하느냐 하면 내 자존심에 관한 일이 돼버리니까 거기서 나오는 의라는 것, 죄라는 것, 하나님의 뜻이란 규정이 전부 틀어지게 돼있어요. 잘못되게 돼있다고. 

미가 2장 13절, “길을 여는 자가 그들의 앞서 올라가고 그들은 달려서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고 좇아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행하며 여호와께서 선두로 행하시리라”고 돼있어요. 미가 선지자에 길을 여는 자가 나와요. 마지막 선지자 엘리야, 세례요한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가서 성문을 열면, 일단 성문이란 물체가 있어야 되겠지요. 그 다음에 왕이 들어가야 되겠지요. 스가랴에서처럼 나귀 타고 들어간단 말이죠. 

이러한 이벤트, 이러한 모습이 그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기분에 빠지게 하느냐 하면, 하늘나라 다 왔네. 가까이 온 정도가 아니고 됐어, 됐어. 끝났어. 그리고 저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야, 라고 확정짓게 만들어요. 종려나무 흔들고 환호하게 만들어요. 덩달아 누가 기분이 좋겠습니까? 열두 제자가 얼마나 기분 좋았겠습니까. 예수님 앞장세우고 뒤에선 가위바위보 누가 높은 자리에 앉는지 가리고.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와장창 깊은 계곡에 완전히 빠트려서 틈이 갈라지게 만드는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고난 사건이에요. 

기분 붕 떴는데 베드로는 이제 주를 죽겠다 하고 칼 들고 설치고. 자기 살아생전에 곧 오니까 괜찮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그게 와장창 다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정적, 고요했어요. 그걸 일본말로 시마이. 오늘 제목을 시마이로 할까? 끝났어요. 다 각각 고기 잡으러 갔어요. 하나의 물체로서 고기 잡는 기계, 농사짓는 기계로 전부 흩어졌습니다. 

주께서 부활했어요. 만지지 말라 했어요. 어디 감히 물체가 영을 만집니까? 못 만집니다. 부활로 오셔서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이라 했어요. 가봤다고 티낸다. 성벽 있다면 기드론 골짜기 감람산으로 해서 베드로 통곡교회가 있고 거기에 마가의 다락방이 있어요. 다윗의 가묘 있고. 여기 시온 산에 마가의 다락방이 있어요. 여기에서 오순절 날 성령을 받게 됩니다. 

성령을 받는다는 게 무슨 뜻이냐? 바람 같이 불 같이 오거든요. 물체가 성령을 받게 되니까 치즈처럼 다 녹아버린 거예요. 이제부터는 젊은이는 꿈을 꾸고, 이렇게 하면서 나와 너를 가로막는 그 막이 성령에 의해서 완전히 녹아져버린 거예요. 베드로부터 전부 다. 이제는 겁도 두려운 것도 없어요. 스데반 집사가 성령이 충만해서 설교할 때 저쪽에서 돌 들고 던졌거든요. 돌이란 물체고 던지는 사람도 기계, 물체거든요. 맞는 스데반 집사도 물체로 보이지만 스데반 집사는 이것이 성령께서 조장한 환경으로 본 거예요. 예수님이 만든 물체로 배치된 예수님이 계시는 하나의 상황 극으로 본 거예요. “저들을 용서해주옵소서.” 

십자가 사건이 끝난 게 아니고 계속해서 그 다음 사건, 그 다음 사건 속에서 그게 실존화 되고 현존화 돼요. 십자가 사건이 있는 그곳에 주와 함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낫게 했을 때 자기 목격자고 앉은뱅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지요. 욥바에서 고넬료를 만났을 때 이 세상이 물체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혼자 노시는 무대가 돼요. 충무든 통영이든 관계없어요. 어디든지 주님이 성령이 함께 있는 곳이 바로 천국이 되는,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의가 발생되는 장소에요. 

그걸 제가 usb라 했잖아요. 어디든 꽂으면 정보가 다 나오는 것, 이동용 정보저장장치 usb처럼 주께서 다루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오후에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이 동네 힘겹다 하지 마세요. 본인이 usb 되면 돼요. 그러면 그 현장이 종말이고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곳입니다. 본인이 설칠 필요 없어요. 주님이 다루시는 마귀들이에요. 아주 충실한 마귀 하수인들이 와서 성도 존재증명을 해줘요. 

이게 고난 받은 종의 모습으로 가게 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새로운 실존을 드러내죠. 지극히 작은 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주님이 한 것과 자기 사이에 막이, 갭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미가 이야기는 왜 하느냐? 방금 이야기한 것은 신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다윗부터 신약 사이에 다윗에게 주어졌던 모든 내용이 반드시 중간과정이 필요한 거예요. 다시 시편을 봅시다. 나라는 말이 나오고,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 전부 다 십자가 안에서 바라봤을 때 인생사는 걸 돌아보니 그들의 설치는 면면이 다 보이는 거예요. 그들은 허사를 좋아하고 자기 영광을 취하는 겁니다. 

여기에 누가 포함돼있습니까? 당연히 우리가 포함돼있는 거예요. 이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나는 죽고 이 말씀에 의해서 죄인이 되는 거예요. 따라서 여기 죄인에게 하는 지적이 곧 나에게 하는 지적이에요. 그래야 우리가 죄인 되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나와 상관없고 애먹이는 저 사람한테나. 이러면 안 돼요. 주님의 영광을 누가 변하게 하고 욕되게 합니까? 우리가 욕되게 하고. 누가 허사를 좋아합니까? 우리가 헛된 걸 좋아한다는 인식을 성령을 통해서 막이 열린 채 나 때문에 고난 받는 영, 나 때문에 대신 죽은 영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다윗이 고백했던 현장이 되고 십자가에 일어난 현장을 마음껏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너희는 덜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4,5절) 하는 모든 이야기는 우리에게 요구하는 거예요. 요구할 때 이걸 할 수 있는 재주와 능력은 없습니다. 없다는 걸 어떻게 아는가? 아까 미가 2장 13절에 보면, 지금 우리는 성에 갇혀있어요. 누가 성문을 열어줘야 된다니까요. 외부에서. 천국은 침투하는 거니까. 다윗에서 바로 예수님으로 오는 게 아니에요. 선지자들을 다 배치해놓은 거예요. 주님께서 그냥 나타나면, 왕이다, 이렇게 오해합니다. 나귀 타고 와야 돼요. 나귀 타고와도 환영했지만 결국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들은 다, 아니네, 하고 돌아서죠.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어올 때에, 갈렙과 여호수아 다시 해봅시다. 갈렙과 여호수아가 아주 키 큰 그리고 많은 숫자의 적들이 있어요. 그리고 자기들은 소수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 언약궤죠.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한 약속을 위해서 주께서 일부러 우리와 맞닥트리게 한 것을 압니다. 들어가면 진짜 약속이 이기는지 저들이 이기는지 약속은 스스로 약속됨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을 배치했기 때문에 약속은 이들을 이길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런 의식이 갈렙과 여호수아에게 있단 말이죠. 

그러면 나밖에 모르는 우리에게 주님의 십자가가 어떻게 들어오느냐? 십자가에서 이미 다 이루었다고 와요. 그 순간 우리는 여기서 강력한 반발이 일어납니다. 이 세상 떠나기 싫어요. 이 나이에 죽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더 살아야 되겠어요. 아직 해외여행도 못했는데 지금 가면 내가 너무 고생만 했잖아요. 

온갖 핑계대면서 얘도 커야 되고 손잡고 결혼식장 들어가야 되고, 온갖 것 이야기 다한단 말이죠. 만약에 병원에서, “당신은 일주일밖에 못 삽니다. 마지막 유언 남기세요.” 할 때 “잘 됐다, 시원하다, 감사하다.” 이런 이야기는 혼자서 간직해야지 옆에 있는 식구들에게 하게 되면 이건 너무 잔인한 사람 돼요. 너무 못된 인간 된다고. 남은 생각 안 하고 지 편한 것만 생각하는. 

어쨌든 간에 이렇게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강력한 반발하게 돼요. 그 반발이 어디서 나왔느냐는 겁니다. 반발이 다윗을 따라다니는 사울 쪽에서 나왔어요. 사울은 자기가 이스라엘을 뭐로 보느냐 하면, 자기가 삼켜야 될 대상, 물체로 본 거예요. 내가 왕이니까. 왕은 그래야 하니까. 왕은 나라를 책임져야 될 왕이잖아요. 사울은 이스라엘을 내 것이라고 여겼는데 다윗이 끼어드니까 다윗을 몹시 미워하는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내 소유라는 것을 강력히 민다면 오늘날 우리가 죄인 됐다면 다윗 편에 서야 돼요, 사울 편에 서야 돼요? 사울 편에 서봐야 주님이 우리를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이 말입니다. 지금 이 이야기하려고 길게 이야기한 거예요. 이 의식은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더욱 더 깊숙이 들어올수록 점점 더 다윗 되는 게 아니고 우리는 사울이 되는 거예요. 난 참 내 것만 챙기네. 

그래서 주님께서 오실 때 협상이나 타협하려고 오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갖고 있는 우리 마음도 어떤 의미에선 쓸모 있는 일방적으로 미가에 나오는 것처럼 성문을 열어젖히고 강제로 들어오는 거예요. 아까 세례가 폭력적이죠. 폭력적으로 물속에 집어넣는단 말이죠. 인간을 물에 집어넣으면 물에 잠기잖아요. 성령도 마찬가지고 불세례도 마찬가지고 지옥 마찬가지로 물에 잠겨버려요. 물에 잠기면 여기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어요. 부자가 지옥 가서 뭘 달라했습니까? 물 달라했거든요. 하여튼 지옥 가도 인간 안 돼. 노아 홍수처럼 뭔가 잠겨있단 말이죠. 잠겨있는데 아무리 착해도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문을 열고 쳐들어와야 돼요. 쳐들어오게 되면, 아이고 왕이시네요, 이렇게 반기질 않아요. 우리가 그렇게 괜찮은 사람들 아닙니다. 주님 십자가 지신 건 너무 고맙게 여기는데 아직까지 우리 형편이 죽을 때는 아니잖아요. 그리고 이왕 죽는 것 비참하게 죽지 말고 추하게 죽지 말고 좀 멋있게 죽고 싶습니다. 재산 좀 있어서 자식들 좀 나눠주고. 그걸 우리가 미리 상상한다고. 그게 멋있게 보이기 때문에. 

제가 주일에 그랬잖아요. 신앙에 무슨 멋이 있습니까. 십자가 피에 무슨 멋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왜 교회 가는 것도 멋있게 가려 합니까. 폼 잡고 남이 볼 때 기도하는 폼이 간절한 폼인지, 성의 없는 폼인지 이것까지 계산 다하고 있어. 내가 대표 기도하는데 지금 멈추면 너무 짧았다고 욕하지 않을까, 더 길게 할까, 할 게 없네. 기니까 벌써 저기서 꼼지락거리면서 그만두라는 소리 들리는 것 같아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마치고, 두 번 다시 안 한다고 나오고. 

모든 생각이 동일성이에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느냐? 그건 자기 물체거든요. 참 폼을 형성한다는 것, 폼 재는 것, 주님과 가까이 하면 할수록 더 깊숙한 노골적 폼이 점점 더 강렬하게 나와요. 그런데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주님이 더 감사해요. 왜? 이렇게 고집부리고 거의 마귀에 근접한 마귀라고 밖에 할 만한 인간을 다 이루었다는 것으로 쳐들어오니까 성문을 열어버리니까. 

그래서 선지자가 중간에 할 것은 뭐냐 하면, 결국 이스라엘은 망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있으면 그게 소유의 대상이 되거든요.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방법은 망하라고 기도하는 외에는 없어요.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는 방법은 자식을 망하라고 기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자식 듣는 데서 하면 안 되고. 안 듣는 데서 제발 죄인의 몸에서 태어난 인간이기에 망하는 것이 진짜 내 모습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망하면 망할수록 고마움과 감사 외에는 나올 게 없습니다. 모든 게 범사에 감사하고 고맙지요. 

다윗의 이런 이야기는 율법입니다. 여호와를 의뢰할지어다. 전부 다 우리를 쑤시는 말입니다.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6절) 여기서 나에서 갑자기 ‘우리’로 바뀌었지요. 나는 예수님이고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피조물 된 우리에요.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할 때 그 우리는 베드로, 요한 등 열두 제자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성령 받고 난 뒤의 열두 제자에요. 

성령을 받아서 갭을 뛰어넘어서 우리는, 주님의 의는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해주신 고난 받는 그것이 바로 의의 근거임을 분명히 해야 돼요. 내가 있는 게, 내가 잘하는 게 의가 아니라 나는 죄밖에 없는데 죄에 예수의 피가 보태줘서 그게 의가 되는 겁니다. 죄+피=의, 이게 하나님의 언약이에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넘어가는 거예요. 너무나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너무나 간단한 공식이 그냥 우리 앞에 머물러있으면 그건 하나에 내가 외울 공식이 되고 예수님은 물체가 돼버려요. 

성령 안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나는 그걸 안다고 돼버려요. 안다, 이해한다, 소유한다. 그것은 여전히 자기가 자기 인생을 책임지겠다는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자기를 물체화 시키는 겁니다. 자기의 폼을 만드는 거예요. 자기 폼을 만들고 나는 예수도 믿고, 언약도 알고, 십자가도 알고, 그렇게 테두리를 쳐요. 요게 바로 나라는 겁니다. 치매 걸리면 어떻게 할 건데? 그것 다 잊어버릴 텐데. 

삶을 통해서 우리는 죽도록 망가져야 돼요. 결국 어떤 인간도 죽을 때는 망가진 모습입니다. 아무리 화장발이라도 나이 구십 넘으면 화장발 나오는 사람 별로 없어요. 이미 피부가 화장을 밀어냅니다. 화장하면 다 떨어져나가는데. 결국 인간은 누구나 추하게 늙어요. 그런 의미에서 덜 추할 때 죽는 것도 복이에요. 별 할 일 없다 할 때 비행기 타고 죽으면 보상금이나 자식들한테 물려주면 최고지요. 

별 할 일도 없는 사람이 살아있으면 이거는 권태란 지옥에서 헤맬 수밖에 없어요. 맛 집 찾아가도 맛 하나도 없고, 요리사가 뭘 넣는 것도 맛을 더 잃어버리게 해. 모르면 그냥 막 조미료 친 것 먹으면 되는데 이건 뭘 넣고 어떻게 만들고 분석하는 건지 음식 먹는 건지 분간도 안 되고. 점점 더 안다는 것이 나를 힘들게 만들어요. 대충 먹으면 되는데 너무 똑똑해서 맛 변별 다하면 안 되거든요. 

보세요.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7절) 이걸 지키려 해도 아무도 못 지킵니다. 그런데 성령에 의하면 비록 포도주가 있고 곡식이 풍성하더라도 그게 기쁨의 요건이 안 되지요. 풍성한 그것에 나는 마음 빼앗겼고 풍성한 돈과 재산에 내 혼이 다 나간 이 죄인을 주께서 건너와서 구원해줄 때 그 돈보다 고난 받는 종이 나에게 더 기쁨이 되는 겁니다. 

이게 하나에 시나리오에요. 결국 구원의 시나리오인데 이것은 다윗이 지키는 게 아니고 다윗언약이 지킵니다. 다윗도 이렇게 못 살았어요. 그러면 다윗 그 다음에 다윗 자손, 선지자들에 이어져서 세례요한도. 세례요한도 나중엔 정신 차렸겠지요. 이게 아니구나. “오실 메시아가 당신이십니까?” 하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소경된 자가 눈 뜨고 죽은 자가 살고.” 이게 뭐냐 하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떤 근거가 있는데 그 근거가 뭐냐? 예수님 자신이 채찍 맞음이에요. 고난이에요. 예수님의 살과 피가 언약이에요. 우리의 행함이 거기에 섞여 들어가면 안 돼요. 오직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건너가는 것처럼 그 어린양이 우리 내부에 의식으로 자리 잡도록 성령께서 우리에게 집어넣는단 말이죠. 

8절에 보면,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여호와가 바로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스스로 내신 언약을 본인이 스스로 다 이루신 하나님께서 결국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자기 백성 만든다는 시나리오가 시편 4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령 받아서 증거 할 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얌체 같이 살고 나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갈수록 더욱 더 절실하게 느끼지 하옵시고 노출되게 하옵시고 파악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아무 행동도 우리 구원에 보탬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다 이루심이 우리 안에서 작용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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