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강-갈 2장 11-14절(사도의 책망)1801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2장 11절-14절입니다. 신약성경 303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2:11-14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사도가 사도를 책망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지도자층에서 어떤 의견이 분열되는 양상인지, 아니면 계시의 혼선이 빚어진 것인지. 사도가 사도끼리 서로 다투게 된다면, 다투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다투게 된다면, 사도는 그리스도가 보낸 사도라고 알고 있는 다른 일반 사람들에게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사람은 성령이 와야 사도가 전한 그 내용이 자기 속에 온 성령으로 인하여 판정을 내리게 되어 있고 그것이 자기에게 온 성령과 사도가 전한 복음이 매치, 연결이 되면 그것은 사도로 인하여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저 사람이나 우리나 다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구나.’라고 인정을 하게 되어 있어요.
사도하고 일반교인을 묶어주는 것이 있습니다. 다 같이 성령이 오게 되었는데 성령은 언제 오느냐 하면, 모든 구원의 장벽이 다 없어지고 난 뒤에 성령이 와요. 성령이 온다는 말은 선물이 온다는 뜻이에요. 선물이 온다는 것은, 네 쪽에서 아무것도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할례를 행하냐, 마냐, 이런 이야기는 옛날 구약 때의 이야기고 지금은 구약을 통해서 인간이 뭘 준비해서 구원받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1장에 보면,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바치는 것으로 인하여 구원받는 일은 없다고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우리가 몸 바치고, 마음 바치고, 정성 바치고, 돈 바치고, 교회 바치고, 선교행위 바쳐서, 그래서 구원받는 것은 없다는 거예요.
주께서 먼저 주신 거예요. 심지어 선교하는 사도도 주께서 보내셨기에 하고 있지 주께서 보내지 않으면 절대로 이런 일을 할 수가 없고 또 행해서도 안 된다고 한 겁니다. 사도행전에 보니까 거기에 대비해서 어떤 대조가 일어나요. 성령을 돈 주고 살려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겁니다. 내 쪽에서 하나님께로 가보자 하는 어떤 스킬, 기술이나 기능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나 선교뿐만 아니고 산다는 것 자체가 기술도 아니고 기능도 아니에요. 그냥 누가 살려주는 겁니다. 계속해서 누가 살려주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사도바울이 사도베드로를 책망합니다. 여기 야고보도 끼어드는데 현장에는 야고보는 없었고 온다는 전갈만 있었어요. 그러면 여기 등장하는 사람은 세 사람입니다. 사도바울,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는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요. 유명한 분들이에요.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유명한 것 좋아하네.” 이렇게 한 겁니다. 유명하다는 것은 너희들이 제 3의 자리, 관찰자 입장에서 누굴 상대로 해서 누가누가 잘하나, 시합을 벌이고 있는 의식, 사고방식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듯이 게바(베드로)파냐, 심지어 자기파인 바울 파냐, 이런 것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나는 십자가 진 적이 없다고 해요. 나는 십자가 진적도 없는데 십자가 진적도 없는 나를 따라서 뭘 할 거냐 그 말입니다. 나를 따르면 지옥 간다는 말이에요. 그게 같은 말입니다. 목사 믿으면 지옥 갑니다, 하는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목사를 이용해야지 왜 목사를 따르고 그 말을 믿어요? 믿을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데. 십자가 지신 분이 예수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 십자가지신분이 예수님 밖에 없다는 그 사실을 고린도전서에서 이야기했지만, 십자가를 지신 분이 예수님밖에 없는 말이 무슨 뜻이냐? 그게 무슨 뜻이냐를 아는 환경과 배경은 계속 수시로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할례 행할까요, 말까요?” “하지 마.” “헌금 할까요, 말까요?” “그것도 구원과 상관없어.”
모든 것을 십자가 빼놓고 다 제켜 두는 거예요. “교회 키울까요, 말까요?” 교회도 제키는 거예요. “그런 것도 신경 쓰지 마.” 십자가 빼놓고, 예수님의 피 빼놓고 모든 것을 제거하는 겁니다. 이 말을 달리 하면, 사도바울은 예수님살인사건의 수사관이에요. 누가 죽였느냐?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마지막 남긴 하나님 됨의 증거는 살인사건입니다.
예수님 살인 사건. 사건은 터졌어요. 죽었어요. 이제 남은 것은 범인을 찾는 겁니다. 그 범인을 찾다보니 모든 인간이 다 연루되었는데 그 연루된 것이 뭐냐? 인간이 자기 행함으로 천국가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겁니다. 행함으로 천국 가는 것을 더 줄여서 이야기하게 되면, 인간은 자기 분수도 모르면서 천국 가려고 하고 있다는 거예요. 천국 가서 신과 함께, ‘신과 함께’ 어떤 영화의 제목 같다만, 신과 함께 영원히 살고자 하는 그것이 행함으로 도출되었고, 그 행함에 동조가 되었고, 그 동조된 자가 자기 식이 아니라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자기의 본성, 자기의 상식에서, 본마음에서 나온 것과 틀어진다는 단지 그 이유, 그런 것을 감추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니까 본색을 감출 수가 없어요.
확 드러나 버린 거예요. 사람이 자기 행함으로, 또는 자기 믿음으로, 믿음도 행함이거든요, 믿음으로 구원받겠다고 시도하는 자체가 뭐가 잘못되어 있느냐 하면,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나는 나로 인하여 산다는 이것이 항상 굳어져서 그래요. 여러분, 자기 자신에게 너무 접근하지 마세요.
본인 자아가 위험해요. 위험한 폭탄이 들어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접근하게 되면 꽉, 자기에게 물리게 돼요. 물리게 되면 그것이 우울증 되는 것이고, 그 우울증이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이 투기입니다. 비트코인, 부동산투기, 투자, 도박, 나는 나로 인하여 살아보겠다는 겁니다.
거기서 나온 결과가 뭐냐? 나의 나 된 것은 나로 인하여 내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 인간 가 봤지 지옥만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 인간은 천국에서 넣어주지를 않습니다. 천국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내가 된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된 겁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8절.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이 말이지요.
자꾸 자기에게 접근해 버리면, “내가 어떻게 뭘 더 하나님께 하면 됩니까?”라는 쪽으로 자기관심사에 무게를 두게 되면 뭐든지……, 왜 우울증에 걸리냐 하면, 자기책임이 너무 많아서 그래요. 자기관리, 자기책임, 여기에 몰두하는 겁니다.
사실 생물학에서 박테리아나 미생물에서 인간까지 다 조사를 해보게 되면, 그걸 유기체라 하는데 유기체는 자기 모양새가 찌그러진다든지 뭔가 변형이 된다 싶으면 그 순간에 갑자기 자기 속에서 저항성을 발휘해요. 모든 생물이 다 그래요. 그 모든 생물을 제가 임의로 자연, 또는 대자연이라고 일단 개념을 바꾸겠습니다.
유기체, 그것을 대자연으로. 대자연속에 누가 있느냐 하면, 인간이 들어 있어요. 인간이 들어 있는데 제가 인간을 대자연속에, 유기체 속에 포함시키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관찰자가 아니고 대자연속에서 들어 있어서 그 대자연의 본성이 빼도 박도 못하게 나온다고 대자연속에 인간의 발목을 잡아두는 이유가 출애굽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한 겁니다.
출애굽기 12장 29절을 읽어볼게요.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것이 무슨 재앙에 속하느냐 하면, 1, 2, 3, 4, 5, 6, 7, 8……10까지, 마지막 재앙에 포함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열 가지 재앙은 첫째 재앙과 연관되어 있어요. 첫째 재앙이 강이 피가 되는 것인데 그 강이 피가 되는 재앙부터 시작해서 개구리가 올라오고, 메뚜기 떼가 나오고, 흑암도 나타나는 이 모든 대재앙 속에 인간도 같이 섞여서 그 재앙의 대상자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요? 출애굽을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아까도 유기체 이야기를 했지만, 인간은 자기 몸에 어떤 변형이 온다 싶으면 강력한 거기에 대한 저항성을 발휘해요. 제가 광주강의에서 엠페도클레스라고 bc 5세기경의 철학자 이야기를 했어요.
세상 모든 운동, 움직임은 사랑하면 받아들이고 미워하면 밀어낸다는 거예요. 사랑과 미움의 원칙으로 되어 있는데 사랑은 받아들이는 것이고 미움은 밀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세포내의 백혈구의 활동과 똑같은 거예요. 이익이냐 손해냐. 인간은 약 70조개의 세포로 되어 있고 세포 하나마다 단독적으로 각자 방을 따로 갖고 있어서 세포 하나하나가 ‘이게 내가 이익일까, 손해일까’를 생각해서 받아들이거나 멀리하거나,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세포들의 집단이 개체를 이루면 그 개체를 인간이 자아라고 부르고 있는 겁니다. 누가? 인간의 천억 개의 뇌세포가 시뮬레이션처럼 웅웅거리면서 ‘자아’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의 자아라 하는 것은 이 몸의 유기체, 다른 말로 하면 대자연, 자연체가 ‘나 건드리지 말라.’는 그 울림, 그 울림이 자아가 되는 겁니다.
지렁이가 있으면 그 지렁이를 재미로 막대기로 쑤셔본다고요. 개구리에게 돌을 던져본다고요. 그러면 개구리가 뭐라고 반항합니까? 돌이 날라 왔을 때 나에게 이익이냐, 손해냐를 따지겠지요. 손해가 되면 피하겠지요. 피하면서 “던지지 마!”라고 외치겠지요. “개굴개굴!” 하면서. 그거나 인간이나 다를 바가 뭐가 있어요?
이런 대자연에 대해서 “그렇고 그런 거니까 자연을 존중하자. 대자연을 사랑하자.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듯이 개나 고양이 반려견도 서로 사랑하자. 개고기도 먹지 말자.”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그 사랑하는 것이 한계가 있어요. 그 한계가 바로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출애굽 사건에 있어서 아무 죄도 없는 메뚜기, 아무 죄도 없는 파리, 아무 죄도 없는 해와 달, 심지어 강물까지 다 하나님보시기에 싹 쓸어버리고 싶은 분노를 유발하고 있다는 겁니다. 멀쩡한 개구리가 다 죽고, 가축이 다 죽고, 죽고, 죽고, 계속 죽어나가는 마지막 재앙이 뭐냐 하면, 그 원인제공자가 나오는데 인간이라는 말이지요.
인간은 왕궁의 임금님인 바로의 장자부터, 더 놀라운 것은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 그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이 일어나는 그 때에, 음주운전 같은 사소한 일 때문에, 부부싸움 하다가 가정폭력으로 구치소에 들어간 사람의 그 아들까지, 아들은 감옥에 안가고 자기 집에 있다고요, 옥에 갇힌 사람의 아들까지 다 작살이 났다 그 말이지요.
피할 곳이 없다 그 말입니다. 대자연속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재앙을 피할 곳이 없다는 그 말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자아가 자아를 지킨다고요? 출애굽사건 앞에서도 이미 인간의 자아라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자아에요. 천국은 무슨 천국? 살 가치도 없는데 무슨 천국을 넘겨다봅니까? 말도 안 되는 거예요.
종교? 애굽에는 종교 없었어요? 신이 한 두 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장자와 신들을 칩니다. 신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니까 신을 만드는 족족 다 친다 이 말입니다. 일본에는 신이 10만개가 넘고 인도에는 신이 백만 개도 넘을 거예요. 백날 만들어내 봐야 만드는 족족 다 쳐버리는 거예요. 왜? 신은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에.
신은 인간이 상상해서 만든 거거든요. 인간이 신을 믿는 것은 뭐냐? 유기체적인 본성의 위장이에요. “나를 지켜주소서. 쓸데없는 것은 들어오지 말고 좋은 것만 오게 하옵소서.” 그것 빌기 위해서 대상자로 신을 만든 겁니다. 그런데 모조리 치는 신이 진짜 신일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그리고 세월이 지나서 천 4백년이 흘렸고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왔습니다. 직접 이 땅에 왔는데 사람은 점잖고 인격적인 사람, 남 배려할 줄 아는 사람, 성격 좋은 사람, 품위 있는 사람, 많고 많은 사람이 있지만 어느 하나 예외 없이 전부 다 예수님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있습니다.
<오리엔트특급살인사건>하고 똑같은 거예요. 모든 인간은 거기에 다 연루되어 있어요. 그 수사관이 누구냐? 사도바울입니다. 왜 사도바울이 사도베드로를 이렇게 책망할 수밖에 없는가? 거기에 꼭 책망해야만 될 건더기가 있는가? “네가 뭔데 남을 책망해? 너나 잘하지.” 왜 남을 책망했느냐 그 말이지요.
‘사도바울의 어떤 행동이 책망 받을 일인가?’라고 생각하는 게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보기에는 각자의 사견이거든요. 사도는 지금 사적개념을 공적개념으로 전환시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거예요. 베드로가 식사 잘 하고 있다가 야고보와 그 일행이 온다고 하니까 후딱 “나 이들과 식사 안했어요. 나 식사한 적 없습니다.” 하고 내빼는 거예요.
왜냐하면 야고보쪽에서 하는 말이, 소위 유명하다는 사람이 하는 말이, “너는 어떻게 유대인이면서도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구원될 약속도 주지 않은 사람들인 이방인과 식사를 하면서 형제라고 인정을 하느냐? 형제가 되려면 구약의 말씀처럼, 창세기 17장의 아브라함언약대로 할례를 일단 행하고 난 뒤에 이방인도 형제라고 받아줘야지. 너같이 이렇게 할례를 무시해버리면 율법은 있으나 마나잖아.”라고 핀잔을 들을까봐 그것이 겁나서 “나 할례 없는 이방인과 식사한 적 없습니다.”라고 내빼는데 사도바울이 발목을 잡는 겁니다.
“형님! 미쳤습니까? 그것도 복음이에요? 그게 복음에 합당한 행위입니까?”라고 지적질 하는 거예요. 14절 봅시다.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책망을 했다는 겁니다. 그것도 사람들 보는 앞에서. 사적인 문제가 아니고 공적인 문제로 전환시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베드로님! 당신이 할례와 복음의 연관성을 압니까? 할례의 의미를 아십니까?” 그런 뜻이에요.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저게 나무랄 일인지’라고 생각하는데 제 3자의 입장에서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어요. 사도끼리 틀어진 것이 있더라도 개인적으로 좋게 이야기를 해줘야 다른 사람보기에 교회가 은혜롭다는 거죠.
‘참 교회가 은혜롭다. 은혜로운 교회에 등록해서 천당 가야지.’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는데 교회 내에 이런 다툼이 있어버리면 ‘저렇게 은혜가 안 되는데 은혜로운 교회가 아니니까 다른 은혜로운 교회 찾을까?’ 이러면 교회 장사가 안 될 수가 있잖아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교회가 사도바울처럼 복음이 우선인데, 진리가 우선인데, 그게 아니고 저희끼리 목돈 내서 부동산으로 세워놓은 이 예배당, 의자 채우는 것, 사람 채우는 것, 장사하는 것, 이게 우선이 되어버리면 자동적으로 복음 이야기하는 사도는 오늘날 교회에서 다 쫓겨나게 되어 있어요.
교회 주장하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교회 없이 무슨 천국을 보내느냐는 그 주장이거든요.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천국을 왜 가야 하느냐는 그 주장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할례를 딱 잡아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다시 한 번 설명하고자 하는 이유가 뭐냐?
마치 무슨 뜻이냐 하면, 여러분이 현미경으로 세포를 들여다보려고 하면 세포가 그냥은 안보여요. 염색을 해야 돼요. 시약을 해서 착색을 해줘야 보인다고요. 생전 김장 해본 적 없습니다만, 김장할 때 그냥은 김장이 안 되잖아요. 소금을 뿌려서 배추 힘을 확 빼놓아야 돼요. 그걸 숨죽인다고 해요. 죽여 버린다는 거지요.
맥없이 축 쳐졌을 때 양념이 착착 붙잖아요. 할례의 의미가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을 숨죽여버리는 거예요. 새롭게 염색해 버리는 겁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차이를 없애버리는 겁니다. 사도베드로는 이 숨죽이기, 소금뿌리기가 할례라는 것을 모르고, 베드로와 야고보는 할례를 행했다는 것을 마치 훈장처럼, 너와 나를 구분하는, 나라는 자아와 너라는 자아를 구분시키는 벽으로 여전히 유지보존하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소금을 쳐버려야 되는데, 다 죽은 자가 되어야 되는데. 사도는 이겁니다. 할례를 행했다는 것은 인간이 바르게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에요. 40년, 50년 진짜 오랫동안 교회 다닌 사람들에게 물어보게 되면 항상 나오는 것이 “신앙인이란 바르게 살아야 되는 겁니다.”라는 이야기가 계속 나와요.
정말 지옥가려고 환장을 한 거예요. 신앙은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서 심판과 저주와 죽음을 내비치는 것이 신앙입니다.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니에요. 바르게 사는 것과 전혀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제 말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에서 하신 말씀이에요. 모든 인간을 할례로 숨죽여버릴 그 때 비로소 거짓선지자들이 어떻게 주장하고, 거짓교인들이, 천국도 안가면서 우기는 사람들이 어떻게 나오는가가 마태복음 7장 22절, 23절에 나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말씀을 줄이면 이렇습니다.
첫째 경우는, 나도 주님을 알고 주님도 나를 아는 경우. 그런 경우 1. 두 번째는, 나는 주님을 모르는데 주님은 나를 아는 경우. 세 번째가 뭐냐? 나는 주님을 아는데 주님은 나를 모르는 경우, 이게 3. 거기서 1번을 제킵니다. 1번은 아무도 없어요.
나도 주님 알고 주님도 나를 아는 경우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1번은 쫙 그어버려야 돼요. 누가 구원받는가? 나는 주님을 모르는데 주님은 날 알 경우만 구원받습니다. 마태복음 7장의 제가 읽은 이 대목은 뭐냐? 나는 주님을 안다고 우기는데 주님은 전혀 그 사람을 몰라요.
그 사람이 나를 아는데 나는 모르는 경우, 사실은 이런 경우가 천국 가는 경우에요. 그런 노래도 있어요. 이문세 노래에 그런 게 있거든요. “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 사람 몰라요” 하는 노래가 있어요. 요한복음 10장 27절에 보면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했거든요.
이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요한복음 10장 15절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이게 나온 거예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그리고 16절에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내가 주님 압니다.” 하면 성도의 행함에 속하기 때문에 이것은 없애야 되요. 나의 죽음과 저주와 심판이 계속 내비치는 사람이 성도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나는 어떻게 만나는가 하면, 주님의 죽음 안에서만 만나기 때문에 그래요.
“주께서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고로 나는 죽어 마땅하다는 그런 뜻이지요?” 라고 하는 사람, “내 자아가 죽고, 내가 죽어버리면 내 행함도 소용이 없잖아요. 내가 주께 행한 이 모든 것도 내가 죽을 수밖에 없고, 내가 주님을 죽일 수 있는 원인으로서 작동해서 지금 이때까지 헌금했고, 전도했고, 교회 나왔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을 살해하는 동기로서 작용했습니다.”라고 인정하는 사람만 비로소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에요.
목사로서 전도하고, 목사로서 강의하고,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을 살해하는데 보탰습니다. 살해하는 동기로 작용했습니다. 왜?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인간의 행함 뒤에 자아를 갖다 붙였기 때문에. 인간은 반드시 행동하고 난 뒤에 자아를 갖다 붙여요. “누가 했노?” “내가 했지롱.”
이게 유기체의 본성입니다. 대자연의 본성이에요. 이거 출애굽 앞에서 작살나야 됩니다. “내가 했습니다.” 어떤 행동도. 어떤 나쁜 행동 같으면, “제가 안했습니다.” 하여튼 어떤 행위를 하고 난 뒤에는 반드시 내가 했다, 내가 안했다, 거기에 자아를 항상 뒤에 붙입니다.
그러니 한 번 상상해 봅시다. 마태복음 7장으로 돌아가서. 하여튼 좋은 것은 다 갖다 붙여요.
복음, 십자가복음, 줄창 피 이야기하고, 성령 이야기, 오직 행함으로는 안 되고 믿음으로만 된다고 하고, 한국교회 다 썩었다고, 진짜 십자가 복음으로 돌아와야 된다고, 언약만이 관통하는 진리다, 온갖 이야기를 다 했는데 마지막에 주님께서 “누구고? 너 누구지? 나 너 모른다. 저리 꺼져라. 나 너 몰라.”
“제가 십자가 피만 이야기했잖아요.” “그거는 네가 했잖아, 네가. 나 너한테 시킨 적 없어.” “그 때 성령 줬잖아요.” “너는 성령 받았다고 네가 우겼잖아. 너 혼자 우겼지.” 이 문제 여러분 어떻게 해결할 겁니까? 설교 여기서 끝내고 싶다 정말. 당황하도록. 어떻게 할 거예요, 이 문제를?
그 문제 해결을 위해서 오늘 베드로가 있는 겁니다. 참 예쁘기 짝이 없는 베드로. 베드로가 할례 행했다는 것 때문에 식사를 같이 안하고 뛰쳐나갔어요. 그 때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이 외형만 찾는, (그걸 외식이라 하는데) 이 외형만 찾는 인간아! 그게 복음이야?”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복음이라는 것은 어디서 등장하는가? 복음을 외친다고 복음이 아니고……, 행위 뒤에 자아를 붙이지 말라고 하니 “나는 자아를 뒤에 안 붙이겠습니다.”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뭔가 복음 아닌 상황 속에 우리를 휘말려 들어가야 돼요. 혼자 지리산에서 도 닦는다고 복음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꾸 섞여야 돼요. 설쳐야 돼요. 지난 수요일에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풍선 이야기 했거든요. 훅훅, 살아가면서 자기 죄를 몽땅 풍선에 불어넣어줘야 돼요. 그래서 풍선이 부풀어져야, 그래서 그게 십자가의 뾰족한 모서리에 찔려봐야 뻥, 하고 터지지요. 사도베드로가 그렇게 한다는 것은,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나는 할례를 행한 채로 예수 믿었기에 나는 괜찮다는 자아의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티를 그대로 드러낸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행하고 난 뒤에 자아를 뺐다 이 말이지요. “댁의 아들은 왜 그리 공부를 잘합니까?” “애한테 직접 물어보지요?” “너는 왜 그렇게 공부를 잘해?”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그냥 놀아도 백점인데 뭘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굉장히 겸손한 것 같지만 우리는 ‘자아’가 뒤에 붙어 있다는 것을 알잖아요.
어떤 인간도 뒤에 자아가 안 붙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자아가 붙게 되면 반드시 분류작업에 나서게 되는 겁니다. 지금 베드로가 왜 복음을 드러내는데 귀한 요건으로서 이 사건이 있어야 되느냐 하면, 어느 인간도 나름대로 항상 분류를 하게 되어 있어요.
모든 분류. 그 분류는 항상 선과 악, 추하고 아름다움, 진리와 비진리, 이런 쪽으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이루어질 때 자기는 어디에 속하는가? 항상 진선미, 옳고 바르고 참되고 아름답고, 항상 그쪽에 들어가 있습니다. 정치논객들이라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직업은 없고 뭔가 씹는 재미로 생계유지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정치논객들.
그 사람들의 결론이 뭐냐 하면, 나는 그쪽이 아니고,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이야기, 그 바리새인하고 똑같은 거예요. 분류를 계속하는 겁니다. 분류의 극치가 어디냐? 그 극치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너는 보기만 해도 재수 없어.” 이게 분류의 극치입니다. “너는 보기만 해도 재수 없어.”
이런 소리 들었던 사람 많지요? “이유 없이 무조건 재수 없어. 꼴도 보기 싫어.” 여러분들도 드라마 같은 것, 물론 우리 교회는 복음만 대하지 드라마는 안보잖아요, 드라마를 보게 되면 ‘저 인간 왜 나왔지? 저게 왜 저 역할을 맡았지? 난 저거 보기만 해도 싫어.’ 심지어 누가 나오면 그 드라마 내용과 관계없이 아예 안보는 사람도 있어요.
이 보영 나오면 무조건 안보는 사람도 있어요. 희한하지요. 보기만 해도 짜증나. 분류하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합니까? “분류하지 마. 네가 분류할 주인공이 아니야. 네가 열 가지 재앙을 내릴 입장이 안 돼. 너는 하나님이 아니야.”라고 아무리 옆에서 무슨 소리를 해도 분류하고 싶은데 어떡합니까, 분류하고 싶은데.
편당은 육의 열매라고요? 백날 저주받고 지옥가도 지옥 가는 이곳까지 계속 나는 내 쪽과 내 쪽 아닌 쪽과 분류하고 싶은 이것을 어떻게 말립니까? 말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분류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유도해요. 분류하라고.
처음에는 분류할 이유를 들어요. 뭐가 어떻고, 성격이 어떻고. 하지만 그 마지막 분류의 극치는 뭐냐 하면, “몰라! 무조건 너는 보기만 해도 재수 없어.” 미움과 사랑, 이것이 이유가 없어요.
조건보고 결혼한다고요? 아닙니다. 재수 없어서 결혼 안하고요, 재수 없어서 이혼하고, 재수 좋으면 이유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사랑하고, 나중에 이혼할지라도 무조건 사랑해요. 인간은 그렇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유도하는가? 이게 복음을 복음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성령의 분류하고 대조하라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분류할 때 뭐로 분류하는가? 할례로 분류한다는 겁니다. 이게 사도바울의 복음이에요. 할례라는 것은 인간의 몸에 집어넣은 사인이거든요.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너는 거룩한 백성, 너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천국백성.” 그 사인이 할례인 거예요. 요즘 교회에서 세례 받는 것과 똑같아요. 세례 받으면 무조건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줄로 알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어떤 사인을 줬을 때 유대인은 자부심을 가졌고 자긍심을 가졌어요.
이제 이방인들은 작살난다. 지옥 간다. 우리는 천국 간다. 그게 함정이었습니다. 그게 하나님이 던져준 함정이에요. 인간은 유기체기 때문에 무조건 자기를 중심으로 잡고 분류작업이 나서는데 할례가지 집어넣어주니까 얼마나 신바람이 났겠습니까? 자부심을 가지고. 하나님은 인간을 속이시는 분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악마의 편에 서서 하나님을 속이고 있는 중이기에 속임은 속임으로 상대를 해서 결국 무슨 승리인가? 속임수의 승리입니다. 십자가 피로 구원받는다는 이것은 속임수 중에서 왕 속임수, 최고의 속임수입니다. 아무도 그 속임수를 받아들일 인간이 없기 때문에.
‘네가 죽어야 산다.’는 것을 누가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무도 못 받아들이잖아요. 나와 함께 죽어야 네가 산다는 것을 누가 받아들여요? 못 받아들이지요. 인간은 항상 자기중심으로 분류하니까. 그래서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하는 그 분류와 너의 타고난 분류방법, 내가 이런 방법으로 안하고 싶어도 자동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나 위주의 분류방법을 대조를 시킵니다.
대조를 시켜서 그 할례를 통해서 예수님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도 여전히 이 세상 모든 분위기는 예수님을 강력하게 차버리고 밀어내는, 유기체가 자기에게 손대려고 하면 밀어내지요, 밀어내는 본성이 쫙 뽑혀 나오도록, 주사기로 그 사람의 더러운 피를 뽑아내듯이 인간 쪽에서 인간 속에 자기도 처분 못하는 나 위주가 쪽 뽑혀 나오도록 하는 겁니다.
그걸 잡아당겨요. 그게 마태복음 7장, 마태복음 7장을 하니까 너무 신난다. 주여,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노릇 했고, 실제로 했어요, 주의 이름으로 귀신 쫓아냈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고, 이렇게 분류를 하면서 자부심을 갖는 그런 사람들이나 교회의 특징이 뭐냐? 우리는 복음대로 살기에 잘못이 없다는 식으로 나와요.
십자가마을에서 여러분이 죽 있어보니 그런 광경, 현상 많이 봤지요? 우리 교회는 복음만 전하기 때문에 우리는 건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는 오직 피 복음만 전하기 때문에 구원받는다. 지방교회도 아니고 말이지요.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래가지고 그들이 공격하기를 뭘 공격하느냐 하면, 교회사를 무시한다, 무형교회만 인정하고 유형교회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결국은 자기의 분류작업을 자기가 정당화하고 거기서 자기의가 생기는 겁니다. 사도바울 보기에 복음의 대척점에, 반대지점에 있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출애굽에서 모든 사람을 다 쳐요. 모든 사람을 다 치는데 “그래도 히브리인들의 맏이는 죽지 않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살았잖아요.” 하는데 그게 오해입니다.
출애굽기 12장 47절에 보면, “이스라엘 회중이 다 이것을 지킬찌니라.”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지키고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본토인에게나 너희 중에 우거한 이방인에게나 이 법이 동일하니라.” 모든 인간을 똑같은 색깔로, 전부 다 똑같은 소금으로 숨을 죽여 버린 거예요.
할례라는 것은 네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할례를 누가 지키는가? 피 흘리고 죽은 어린양과 관련된 할례에요. 어린양이 할례의 실체입니다. 구원의 실체는, 할례는, 율법은 인간이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율법을 주신 분이 지키는 거예요. 그분이 다 지킴으로서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천국 가는 거예요.
따라서 그 아무것도 할 필요도 없이 “다 이루었다.” 하기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아무렇지도 않은 우리를 들쑤셔 놓는 겁니다. “너한테 이런 요소가 있잖아. 너는 네 중심으로 살잖아. 그래서 무조건 너 잘되는 쪽으로 분류했잖아.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고 그렇게 했잖아.” 그렇게 들쑤실 때 사도바울이 베드로보고 “형님, 그렇게 나오시면 안 되지요.” 할 때 베드로가 취할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옳다구나. 네가 맞구나. 내가 잠시 정신이 돌았나보다. 율법의 행함으로서는 의롭다 함이 없는 것을 내가 알면서도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율법 없는 이방인에게도 성령세례가 온다는 것을 경험했거든요. 고넬료와 사도베드로가 만나면서 사도행전 10장 끝에 보면 “어?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오네.” 했다 이 말이지요.
그래서 내가 주님을 안다고 해서 주님이 나를 알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백프로 자기혼자의 생각이에요. 안다, 그 뒤에 나를 붙이면 안돼요. “주께서 주를 알게 하셨잖아요. 왜 자꾸 내가 뭐 잘난 인간인 것처럼 내가 알았다고 합니까? 주께서 알게 해놓고는.” 잠자는 자, 죽은 자를 깨워놓고 깨보니까 있는 거예요.
“주여, 누구십니까?” 바울이 이야기한 겁니다. 살려주니까 바울이 깨가지고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다시 말해서 “나는 너의 구원자니라.” “그러면 제가 지금까지 한 짓은?” “네가 한 짓이 아니고 내가 너를 그렇게 유도했느니라. 이끌고 왔느니라. 이것을 복음으로 전해라.”
이런 복음의 가장 저해되는 것은, 내가 있다는 이 교회라는 덩어리, 교회가 천국을 막는 단체입니다. 그래서 교회 나와야 돼요. 왜? 그래서 교회 안 나오면 그것은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주여, 제가 교회도 안 나가고 그들과는 더러워서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합니다.” 이렇게 나와요.
교회 나와서 같이 망하면 망해야 돼요. 망하는 것을 통해서, ‘아, 안 망하는 것으로 주셨구나. 십자가만큼은 이게 구심점이구나.’ 내가 하는 행동은, 내가 덧붙인 모든 행동은, 내가 예수 믿는 모든 행동은 치매 걸려서 요양병원에 가 봐야, 아, 내가 뭘 믿는다는 것이 치매현상의 연장이고 일종이라는 말이지요.
치매 걸리기 전에도 이미 우리는 잠재적 환자들이거든요. 치매환자가 정상일 때도 이미 치매환자였습니다. 잠복되어 있어요. 그 인간이 치매 걸린 거예요. 그 때가서 치매 걸려서 모른다고 하나, 지금 안다고 하나 똑같이 모르는 겁니다. 계산법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주께서 알게 하셨잖아요. 오늘 하는 일을 통해서. 오늘 비가 안와야 되는데 비가 왔다. “에이 씨, 또 비가 오고 ……, 아하, 이런 못돼먹은 내 분류작업이 내 중심인데 주께서 내가 이렇게 못돼 처먹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하셨잖아요.” 자기에게서 죄와 심판과 저주에 합당한 요소만 내비치면 그게 바로 살아 있는 성도입니다. 그게 예수님의 증인이에요.
성령 받으면 사랑을 행하라고요? 사랑이라는 것은 내 것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사랑이에요. 사랑은 미리 죽는 죽음이 사랑이에요. 왜? 다 줘버리니까. 나를 갖고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맘대로 하시옵소서, 이게 사랑이라는 말이지요. 죽는 게 기뻐요. 그분을 위해서 죽는 게 이상하게 기뻐요.
보통 유기체는 내 것이 더욱더 공고히 되는 본능이 있습니다. 박테리아부터 모든 생물체, 심지어 호랑이나 사자나 기린도 마찬가지에요. 전부 다 자기 것 지키는 것이 본능인데 사랑이라 하는 것, 인간에게 주어진 성령의 사랑은 희한하게 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도 즐겁다니까요.
이게 희한한 일이라니까요. 그래서 요한일서 3장 1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사랑을 알아? 알면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걸 내 중심으로 한다면 그것은 하지 마세요.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마태복음 7장의 산상설교의 내용은 뭐냐 하면, 우리가 “저는 죄인이라서 고개도 못 듭니다.” 하는 세리의 마음으로 돌아오라는 말이지요. “제가 뭘 한 것이 있습니까? 그저 주께서 하게 하시고 나는 그저 죄지은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가라고 하면 가고, 까라면 까고, 오라면 오나이다.” 이렇게 살면 되잖아요.
그게 사랑받은 사람의 특징 아닙니까? 사랑하시는 품 안에서, 시편에 나오듯이, 젖을 먹고 엄마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처럼, 사랑하는 엄마 품에 같이 있고 내가 엄마를 알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엄마가 나를 알면 그것으로 끝나는 거지요. 내가 꼭 알아야 됩니까? 알다가 치매 걸려서 모른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주께서 날마다 알아서 “주님이 너 때문에 죽었다.” 하면 “맞습니다. 저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맞습니다.” 왜 이런 고백을 속 시원하게 못하느냐 그 말입니다. 복음으로 교회 하나 해보려고. 그게 무슨 마귀 짓, 사탄의 짓이에요? 그거 사탄입니다. 무슨 복음으로 교회를 합니까? 복음으로 그냥 살면 되지 뭘 교회를 해요?
교회는 한군데 밖에 없어요. 주님의 몸 밖에 없어요. 스스로 징징대지 마시고요. 우리 애가 어떻고, 우리 남편이 어떻고, 자꾸 이렇게 징징대지 마세요. 숨이 덜 죽었어요. 소금을 확 쳐버려야 돼요. “귀신아, 물러가라!” 한 바탕 놀듯이 소금을 더 치세요. 소금 치시고 인간의 본성대로 투기하고 뭐라도 그냥 해놓고, “주여, 또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물론 얍삽한 짓이지만.
늘 성령으로 소금 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진짜 마음대로 살게 하옵소서. 정말로 마음대로 살게 하시고 정말로 하고 싶은 대로 다 살게 해주시되 그 어떤 것도 의가 아니고 죄인 것을 십자가 앞에서 놀랍게 기적적으로 고백할 수 있는 성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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