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움
2018년 2월 4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2:15-18
(2: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2: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2: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인간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나의 것’을 지켜내는 주인공으로서 비로소 ‘나’를 상정합니다. 따라서 더 이상 지킬 게 없다고 기면서 자살을 고려하게 됩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사람들은 성경을 대합니다. 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노림수로부터 출발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일체 이런 사적인 우월을 거부하고 보편적인 사실을 펼칩니다. 이는 하나님세계의 안목을 그대로 나열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특별난 존재로 여기면서 성경을 보지 말라는 겁니다. 모든 인간, 모든 아담의 후손들은 모두 동일한 형편에 있다는 겁니다.
그 형편이라는 것이 바로 ‘법’으로 가동되는 원리, 원칙을 이용해서 ‘자신의 것’들을 지켜내려고 합니다. ‘자기 것’이 곧 ‘자기’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용하려고 하기 이전에 과연 성경 속으로 제대로 들어갔는지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의 세계에 입성할 권리와 능력이 과연 인간에게 있을까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모든 인간으로부터 거부 당하시고 추방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기네들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을 죽음으로 돌려보내었습니다. 이로서 이 세상은 더는 죽은 사람을 위해 내어줄 자리는 없습니다. 그런 자들이 성경을 이해하려고 덤비다 는 것이 언어도단입니다.
즉 인간들이 늘 지키려는 그 ‘자신의 자리’에는 결코 십자가가 합류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의 ‘자기 것’ 지킴은 법으로 조성된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법’ 그 뒤편에 있는 보상을 노리고 자신의 행함을 가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쉴새없이 움직입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움직입니다. 그러면서 인간 배후에 있는 악마의 지시에 따라 추상적인 정신 세계를 법으로 조성합니다. 예를 들면 고대 바벨론 사회에 함무라비법이라는 최초의 성문법이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그 내용에 보면, 여자와 노예 위에 군림하는 사회입니다.
곧 정신적으로 질 떨어진 사람들을 짐승으로 간주하고, 그들 짐승들을 법으로 순치하는 그 과정 자체를 ‘사회 정의’로 간주하므로 서 이 ‘사회 정의’를 담당하는 계급의 통치를 공동체 내에서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미래까지 이어져나가고자 합니다. 쉽게 말해서 갑이 갑질을 위해서 필히 을에 해당되는 쪽에서 ‘을’ 짓을 이어져 나가므로서 공동체의 질서가 잡힌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법이라는 개목줄을 하고 다니게 됩니다. 개목줄이 없는 사람은 그 조직체 내의 최고지도자들 뿐입니다. 그들은 초법적 존재로 자처해주어서 법 집행에 있는 권리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밑의 사람들이 윗 사람들을 보면서 “너희들부터 먼저 똑바로 살아라!”고 나오면 말은 정당해도 법질서 확립에 큰 장애물이 되는 겁니다.
권위가 떨어지면 아니되기에 공동체는 계속해서 법을 초월하는 윗 사람 세우고, 만들기에 열중합니다. 그만큼 인간들의 관심사는 ‘자기 것’ 지켜내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인생이란 실은 이런 권위에 시달리면서 끊임없이 피하고, 숨고, 달아난 세월입니다. 그때부터 ‘굴욕적인 웃음’으로 연명해오고 있습니다.
지나 보면 인생이란 가느다란 굴욕적인 선으로만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의식으로 천국까지 노리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뭔가 무섭고 쫓겨 다니면서 ‘목숨보다 더 귀한 것’과 교환을 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대책은 아예 사적은 ‘자기 것’을 주님의 보편성 앞에서 없애버리는 겁니다. 즉 목숨을 귀하게 지켜 주는 방식이 아니라 목숨을 ‘죽음 목숨’으로 취급하시는 겁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의미’는 숨기고‘ 의의(意義)’는 드러냅니다. 의의란 용도를 말합니다. 즉 인간이란 하나님만이 아시는 숨겨진 진짜 의미를 위하여 ‘용도’차원에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겁니다. 검게 칠하여진 세상에서 아무리 아름답게 색칠해도 그 검은색을 감당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저주의 취지를 계속 지켜려고 하시는 겁니다.
사람들이 부활이나 승천이나 재림에 눈독을 드리는데 이는 여전히 ‘자기 것’을 포기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취하시는 조치는 십자가입니다. 복음을 위한답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답시고,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부폐 음식 담듯이 담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담는 그릇이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구약에서 욥의 한탄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별다른 죄지은 기억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엄청한 징벌을 받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 부당성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는 욥이 ‘자기 것’을 지켜내고자 자기 자신에게 충실히 복무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마지막 친구라는 엘리후가 이렇게 하나님을 대신해서 알려줍니다.
“그대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그대의 악행이 가득한들 하나님께 무슨 상관이 있겠으며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욥 35:6-7)
복음은 십자가로 최종 종결되지 부활로 최종 종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십자가 안에 들어 있는 자에게만 해당됩니다. 예수님 안에 있음을 사도 바울은 ‘믿음’이라고 보는데 그 믿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새삼 뭔가 실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도리어 인간들을 반복해서 죽여 없애는 그 당사자 자신이 바로 예수님 본인임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십자가가 복음인 이유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적하는 인간들의 ‘자기 의’가 근원적으로 차단시키기 때문입니다. 차단시키는 방식은, 법을 계속 지킬 당사자를 없애기 때문입니다.
즉 미래가 벌써 실시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작용하는 능력입니다. 그 안에서 인간은 본인이 천벌 받아 마땅함을 압니다. 천벌을 성도는 당연히 각오해야 합니다. 천벌 안에서 천국이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무엇에 쫓기고 무엇이 두려운가를 살펴보게 하옵소서. 그게 다 ‘자기 의’라는 괴물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018-02-05 13:49:45 | 조회 : 3 | 275강-갈 2장 15-18절(의로움)180204-이 근호 목사 | 이름 : 오용익 (IP:121.149.112.111) | | 275강-갈 2장 15-18절(의로움)1802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2장 15절-18절입니다. 신약성경 304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2:15-18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일반사람들이 사람이 죽게 되면 어디로 가느냐? 천국 아니면 지옥, 둘중 한 곳에 간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이 몸 가지고 그냥 갈수 있느냐, 할 때 이 몸 가지고 그냥 가지는 못하고 천국 갈만한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은 상식이지요. 그래서 천국 지옥 이야기가 사도바울의 편지에는 잘 나타나지 않아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보일 수 있느냐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뭐냐? 천국 지옥이 있다,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소관이기 때문에 우리가 관여할 수 없고 우리가 관여한다고 해서 이미 있는 것을 폐기처분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천국 지옥 만드는 것은 하나님 소관이거든요.
만들어 주세요, 한다고 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잖아요. 우리 입장에서는, 천국 가는 사람이 누구며, 지옥 가는 사람이 누구냐를 파악을 해야 되는데 그 점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이야기하기를, “하나님이 원하는 의가 있으면 천국 가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지옥 가는 사람입니다.”라고 단정적으로 이야기를 해요.
최종적이지요. 더는 나에게 딴 소리 하지 말라는 것, 이미 확정 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기준을 내세울 때에 사전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의논한 적이 없어요. 의논한 적이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개개인간의 능력차, 자질문제, 인품문제를 하나님께서 고려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천국 가는데 개인적인 자질이나 능력이나 도덕적인 삶, 이런 것은 일체 고려하지 않기로 저쪽에서, 하늘 쪽에서 이미 정해버렸어요. 개인적인 역량의 차이는 어디서 나타나느냐 하면, 어떤 법을 놓고 그 법을 누가 지켰느냐 못 지켰느냐를 가지고 ‘너는 이런 종류다.’ 혹은 ‘너는 저런 종류다. 너는 이것밖에 안 돼.’라는 것이 결정 나는데 그렇게 되면 개인적인 차이가 계속 발생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오늘 본문 읽어보면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모든 개인적인 차이를 불도우자처럼 완전히 뭉개버린다는 겁니다. 개인적인 차이를 뭉개버리면 거기서 보편적인 것이 나와요. 보편적기준이에요. 이것은 개인이 “저는 어때요?” 하는 질문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는 사람도 개인이거든요. 여기서 문제가 틀어지는 거예요. 성경 보면서 “하나님, 착한 저는 지금 성경보고 있습니다.”라고 내세울 때에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에요. 저 사람은 성경 안 보는데 나는 성경 본다. 이것은 사적인 문제로 가기 때문에 뭐가 사단 나느냐 하면, 성경을 보면서 ‘나는 이 성경을 어떻게 써먹을 것인가, 이용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성경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편지를 통해서 “그런 개인적인 노림수를 가지고는 성경에 오지 말라.” 성경을 어떻게 써먹을 것인가의 문제보다도 성경에 어떻게 침투하느냐, 성경에 어떻게 들어가느냐의 문제서부터 딱 막혀버리는 겁니다. 성경 속에 어느 구석을 통해서 들어가야 되는지, 들어가는 구멍이 없어요.
왜냐? 항상 나는 개인적이잖아요. 제가 외손녀를 계속 관찰하고 있는데 외손녀를 관찰해보면 “나는”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 것”부터 이야기를 해요. 내 것, 엄마 것, 이 세상에 딱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요새는 좀 발전해서 ‘아빠 것’도 하나 포함이 되었는데. 항상 ‘나’ 뒤에다 ‘것’을 붙여요. 내 것, 누구 것을 붙여요.
이것은 뭐를 탈각시키는가 하면, 내가 보는 나는 나를 지목해서 나라고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데 그렇게 되어버리면, 나는 나를 못보고 나의 것으로 내가 인수인계 하는 셈이 되어버립니다. 나의 것을 계속 나의 것으로 유지보존하기 위한, 향후 계속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서 우리 외손녀는 쉴 새도 없이 움직입니다.
관찰해 보면, 잠에서 깨나서 그 때부터 두리번거리면서 쉴 새 없이 움직여요. 그게 애들만 그렇겠습니까? 그 애가 그대로 어른 되잖아요. 어른들도 쉴 새 없이 움직이는데 그 움직이는 모든 것이 내 것, 내 것, 내 것 확보하는 것, 내 것을 얻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내 것 얻기 위한 그 성질 그대로 가지고 성경을 본다고요.
성경을 보면서 성경에서 마주쳐 들어오는 주님의 보편적인 것은 아예 신경도 안 쓰고, 내가 이 성경을 어떻게 이용해 먹을 것인가만 생각하면서 성경을 파고들어가는 겁니다. 그런 논리로 사람들이 그동안 율법을 지켰어요. 나는 지켰는데 너는 안 지켰다. 이런 식으로 지켜왔고 그 사고방식이 보편성이라는 것을 놓쳐버리고,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성경에 들락날락, 자기 맘대로 큐티할 수 있는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 나는 내 것이니까. 내 것 아닌 네 것 같은 나, 그런 것은 없어요. 내 것 아닌 나는 소용없어요. 자기 잘되기 위해서. 그러니까 여기서 사도바울은 율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의 의미를 찾을 생각하지 말고 율법의 의의를 찾으라고. 율법의 의미와 의의를 구분할 수 있어야 돼요.
율법의 의미는 뭐냐 하면, 내 것 되기 위해서 나한테 필요한 것인가, 필요치 않은 것인가를 분석하는 것이 들어가거든요. 저는 그것을 해석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십자가 마을에 글 하나 올려놓았더니만 스물 두개나 댓글이 달렸어요. 댓글 제일 마지막에 이런 글을 올려놨어요.
“定意(정의)된 활동과 해석된 활동이 차이가 나는데 그걸 합체시키려고 한다면 이것은 정신병자” 됩니다. “나는 나폴레옹이다.” 한다면 그것은 미친 거잖아요. 정신병자가 “나는 나폴레옹이다.”하고 돌아다닐 때 혹은 “나는 대통령이다.”하고 돌아다닐 때 그것은 뭐냐? 내가 되고 싶은, 내 것으로 유지하고 싶은 그 의미를 마치 남들도 인정해줘야 될 용도, 의의인 것처럼 요구하는 셈이 되는 겁니다.
나는 나폴레옹이니까 남들도 나를 나폴레옹으로 대우해 달라는 식밖에는 안돼요. 나는 성도니까 남들도 내가 성도라는 것을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정신병자입니다. 우리는 그 차이가 계속 유지돼 줘야 돼요. 그래서 댓글 제일 마지막에 이렇게 했습니다. 인간은 이미 망가진 거예요.
망가지게 되면 반납하면 돼요. 살만큼 살다가 “주님, 내 솜씨로서는 주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안 나오네요.”하고 망가진 채로 반납하라고 주신 인생이에요. 이걸 끙끙대면서 자기보고 수리해서 될 것이 아니에요. 문방구에 가면 애들 조립용 키트가 있다고요. 플라스틱 재료 잘라서 풀로 붙여가면서 장난감 완성하는 것인데 우리는 나의 것을 갖고 싶으니까 나의 것이 우선이고 나는 그 뒤에 갖다 붙는 거예요.
나의 것이 없으면 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살하는 사람은 나의 것이 망가졌으니까 자살하잖아요. 그동안 자살하기 직전까지 줄곧 뭘 해왔는가 하면, 내 것 만들기 위해서, 나의 것 만들기 위해서 줄곧 살다가 그게 실패로 끝나니까 ‘에이 죽어버리자.’ 하는 거예요.
내 것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데 성경을 백독 천 독 해가면서 열심내서 했는데 사도가 바울 보기에……, 사도바울은 자기가 그냥 아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계시를 받은 거니까. 예수님의 계시를 받고 보니까 어떤 인간도 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천국에 갈 만큼의 온전한 의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게 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로마서 7장에 보면 법에는 문제가 없어요. 법은 거룩한 거예요. 로마서 7장에서 법은 문제가 없는데 인간이 분열돼서 그래요. 법이 싫어서가 아니라 법은 좋은데 그 법을 위반하는 식으로 나는 움직이고 있다는 것, 그것을 성령 받은 사도바울은 아는 거예요.
내가 나라고 정의내리는 것과 해석차이가 늘 죽을 때까지 벌어진다는 사실, 이게 합치되지 않아요. 일치되지 않는다고요. 망가진 거예요. 안됨을 받아들여야 돼요. 성경을 봐서 거기서 중요한 것을 내가 이용하겠다고, 내가 천당가는 데 보탬 되겠다고요? 그걸 붙이는 자체가 사적인 개인용도에요. 개인의 구원을 위해서 하는 겁니다.
길거리에서 “도를 아십니까?”하는 그것과 똑같은 식으로. “구원을 언제 받았습니까?” 하는 구원파의 방식과 똑같은 사고방식이에요. 구원파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한국교회에서 나왔잖아요. 한국교회가 사람들 끌어 모아서 교회 몸집 키우는 방법이 뭡니까? “당신 어떻게 구원받는지 알아요? 구원시켜 주겠습니다.”
수요일에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교회는 구원 팔아서 자기 몸집 키우고 개인은 구원 얻어서 좋다고 하고. 둘 다 보편적인 것은 안 나오고 개인적인 것만 나오는 거예요. “나 구원 받았다. 알아 줘.” 그것만 나와요. 나의 것을 포기 못하니까 나의 것을 주변에서 인정해주기를 기대하면서 교회를 따로 만들어요.
그래서 교회를 계속 따로 만들어요. 참 얼마나 외로웠으면 그런 짓까지 다 하겠습니까? 망가진 존재가 외로워야지요. 계속 이 땅에서 살려고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이렇게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개인적인 이익 때문에, ‘내가 죽어서 천국가면 나에게 이익’이라는 것, 나의 것이 그대로 천국에서도 나의 것으로 계속 연속된다고 한다면, 17절의 말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참 무서운 말이에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이걸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내가 의롭게 되려고 시도를 하다가 내가 해석하기에도 ‘이런 오류가 생기고 자꾸 고장 나네. 이 죄가 왜 문제지? 욱하는 성질이 왜 나타나지?’ 이렇게 된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그 의미가 없어진다는 거예요.
그것은 네가 그리스도마저 평소의 사적인 습관, ‘그리스도마저 내 것을 내 것으로 계속 지켜내기 위해서 당신이 내게 잠시 필요해서 사용하겠습니다.’라는 자기의미를 구축하고, 예수님을 그런 용도로 사용하는 사고방식이라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율법적 안목으로 보고자 하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인간이 개인적으로 구원받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어떻게 믿을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먼저 보편적인 하나님의 안목에서 하나님께서 이런 계시를 어떻게 전했는가, 하나님의 시선에서 볼 줄 알아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 시선에서 볼 줄 알려면 이 하나님의 의가 절대로 나의 행함, 나의 것에서 나오지 않는 의에요.
그러면 인간은 나의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나에게서 의가 나오지 않는다면 이것은 뭐냐? 이 세상에 있지도 않은 의며 내가 존재하는 한 절대로 내가 믿을 수 없는 의가 되는 겁니다. 내가 존재하는 한 나는 나의 것으로 존재하고, 나의 것으로 존재를 견지하고 지탱하기 위해서 우리는 뭐든지 설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설치는 것을 행함이라고 합니다. 뭐든지 해요. 예수 믿으라면 예수 믿고, 십자가 믿으라면 십자가 믿고, 자꾸 뭔가 설쳐요. 나의 것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이걸 포기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 오면 꼭 뷔페 같아요. 김밥, 중국음식, 회, 이렇게 쟁반에 담듯이 십자가도 담고, 부활도 담고, 승천도 담고, 예수님의 재림도 담아서 나의 것으로 삼켜버려요. 이걸 흡수하려고 시도합니다.
이 생각이 뭐냐? 법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그 사고방식의 연속, 연장입니다. 결론은 뭐냐? 나 이래서 구원 받았다. 이런 행함을 해서 구원받았다. 이게 결론이에요. “어떻게 구원받았는데?” “나는 믿는다는 행함으로 구원받았어.” 또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오늘 본문 준 이것이 사적인 모든 사고방식을 전부 다 포기하게 하는 것을 전제로 해서 이 말씀을 주셨거든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을 잠간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여기에 하나님의 법과 인간 사이에 사적인 욕구와 욕망, 구원에 대한 노림수가 있는 사람은 나 여기 있고 하나님이 주신 법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거예요. 제 3자가 개입할 여지가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3장 2절에 보니까 성령이 개입해 버립니다. 왜 개입하느냐? 법과 나 사이의 관계에서 일체 하나님이 원하는 의가 나올 수 없고 영광이 되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성령은 어디에 관계되느냐 하면, 3장 1절,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이 말은, 사적인 사람이 ‘십자가? 그거 괜찮네.’ 하고 뷔페에서 음식 담듯이 십자가를 담아서 내 것으로 가져올 수가 없어요. 왜냐? 십자가사건이 뭐냐 하면, 모든 인간, 하나도 예외 없이 보편적인 아담의 후손들인 모든 인간에게 밀쳐서 버림받은 사건이 십자가사건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알아봐요?
십자가를 내 것으로 섞어 넣는다는 그 말입니까?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요. 이 세상에서 추방된 사람, 그것도 죽어서 추방된 사람, 쓸데없다고 판정 나서 추방된 사람을 다시 모셔올 수 있는 자리를 세상이 스스로 마련한다 그 말입니까? 추방시킬 때는 언제고 다시 그동안 개과천선했어요?
나라는 인간이 아담의 후손인데, 그 아담이 나인데. 그 아담의 족속이 합세해서 예수님을 메시아도 아니라고 사탄의 괴수라고 쫓아냈는데 다시 우리가 알아서 행함으로서, 괜찮은 시건머리로 다시 모셔온다는 그 말 입니까? 거짓말이에요. 십자가는 뷔페음식처럼 내 것이라는 쟁반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게 걸림돌이기 때문에 그래요. 걸림돌을 우회해서 천국 가는 법은 없다는 것이 사도바울의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건 하지만 하나님, 이것은 못하겠습니다.”라고 한다고요? 그것은 자진해서 걸림돌을 빼버리는 거예요. 뭘 못하고 하는 것이 어디 있어요? 모든 것이 복음전파를 위해서 벌어진 일인데.
복음전파는, “내가 복음전파의 훼방자요 방해자니까 복음전파 이전에 나부터 이겨주시고 짓밟아주세요.”라고 수용돼야 됩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홀로 등장하는 게 아니에요. 반드시 짝을 이루는데 하나님의 의와 짝을 이루는 것이 뭐냐? 자기의 입니다. 자기 의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와 일부러 마주치게 해서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에게 추방되었다는 사건이 지난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걸 계속해서 멸망할 때까지 이끄시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존속을 이끌고, 나의 것을 이끌고, 주님은 뭘 이끄느냐 하면, 십자가의 사건의 그 의의, 의의란 용도거든요, 그 용도를 이끎으로서 우리에게 없었던 새로운 의미를 이 땅에서 보편적으로 깔아버립니다. 보편적으로 깐다는 말은, 미술에서 스크래치로 하는 것이 있어요.
옛날에 저도 해봤습니다. 여러 가지 색을 먼저 칠해 놓고 그 위에 검은색으로 덮어요. 그 다음에 칼로 긁든지 돌려버리면 검은 색 사이사이에 아름다운 색깔이 나오잖아요. 주님은 그것을 반대로 해요. 검은색부터 먼저 좍 칠해 놓고 그 다음에 거기에 인간이 사적으로 천당 가려고, 말씀대로 살려고 십계명 다 지키고,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하려고 착한 일 해봤자 이게 누더기 돼요. 이게 온전함이 아니에요.
주님의 속죄라는 것은 저주를 없애는 것이 아니고 저주를 계속해서 지켜내는 거예요. 저주를 지켜냄으로 말미암아 검은색 바탕이죠, 아무리 네가 덕지덕지 너의 착함으로, 윤리도덕으로 덮는다 할지라도 이미 주어진 저주의 힘, 죄의 힘을 이길 수가 없다는 거예요. 온전히 하나님이 원하는 천국작품이 안 되는 겁니다.
보편적인 이야기, 사적인 것을 초월해서 보편적인 것을 이야기할 때 어떤 사람은 이런 시비를 걸어요. “네가 날 알아?” 이 말을 다른 버전으로 바꾸면 “너만 목사냐? 너만 복음 아냐?” 그 소리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답변할 것이 있어요. “내가 너를 알아. 너 죽잖아.”
만약에 “당신이 이 문대통령을 압니까?” 하면 “알지요. 죽잖아요. 왜 죽는지 알아요? 죄 값으로 죽어요. 로마서 6장에. 당신 죄인이야.” 사람 알기 굉장히 쉽지요. 지난 금요일 울산강의에서 이야기했지만, 네 식구가 모여서 “생일축하 합니다.” 이러면 전부 다 죽으려고 태어난 인간 네 명이 모여서 생일축하하고 있는 거예요.
“겨울에 태어난……” 겨울에 태어나서 죽는 거예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저주를 지켜내는 겁니다. 인간이 아무리 악을 쓰고, 교회 가서 발악을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냥 발악일 뿐이고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살아보면 이래요. 그저 굴욕적인 웃음만 날리면서 살아온 거예요. 자기 인생이라는 것이 돌아보면 거창한 것 같지만 매순간 피했고, 도망쳤고, 그리고 달아났고. 그 달아난 경로, 그 절편, 잘려진 면, 그런 연결선만이 자기인생이에요. 그래놓고 거기에 비겁한 변명들을 덕지덕지 갖다 붙이는데 그게 블록체인이에요.
자기들끼리의 폐쇄적인 암호화된 사회성. 그걸 속물이라 합니다. 그게 바로 속물입니다. 도망쳐서 이 모임에 왔고 어디로 또 도망쳐서 튈지 대기상태에 있어요. 우습지도 않은데 웃어가면서 굴욕적인 웃음을 남발하는데 그 굴육 적인 웃음을 공유하는 것을 사회라고 해요. 속에서 더러우면서도 웃어주는 거예요.
끊임없이 비겁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이 세상. 왜 그렇게 살아야 되는가? 인간은 자기가 아니라 자기 것을, 소유가 없는 존재는 없어요,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어떤 전략을 수립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자꾸 전략을 수립해서 어떤 인위적인 시뮬레이션을 만들어요.
1년 뒤에는 내 모습이 어떤 모습일까를 미리 시뮬레이션 한다고요. 그것도 젊을 때나 하는 것이지 나이 70넘어서 나올 것이 있습니까? 지금 중력에 의해서 골조가 다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 시뮬레이션 할 것도 없어요. 힘이 있어야 다방에 가서 쌍화차라도 시키지요. 힘도 없는데.
주님께서는 나의 것과 주님의 것을 계속 경쟁붙이는 겁니다. 경쟁 붙여서 저주를 계속 살려내는 거예요. 이러한 저주는 결국은 그냥 숨 끊어져 죽는 죽음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어떤 죽음이 되느냐를 보여주는 것이 사도행전 5장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나오는데 여러분이 잘 아시지요.
땅 판 값을 주님께 드린다고 해놓고 반만 내고 반은 숨겼더니만 그 부부가 하여튼 사이도 좋아서 죽을 때도 같이 죽었어요. 아나니아가 먼저 죽고 그 다음에 아내 삽비라, 그렇게 하루에 둘 다 죽었습니다. 이 본문이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성령 앞에서’에요. 베드로가 이야기하기를 “네가 나를 속인 것이 아니고 성령을 속였다.” 하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뭔가 헌금을 할 때 헌금이 성립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헌금을 할 때 비로소 헌금이라는 것이 성립된다고 본 거예요. 그러나 헌금이라는 의미는 인간이 행해서 만들 수가 없어요. 다만 모든 의미는 보편적으로 하나님 쪽에서 알고 있고 우리 인간은 하나님 쪽에서 알고 있는 그 의미를 보여주는 하나의 의의, 용도로서 헌금하도록 하는 거예요.
헌금하도록 했을 때에 그 작전에 말려든 것이 뭐냐? 헌금하겠다는 마음이고 헌금하면서 자신의 결정과 자신의 판단이 헌금이라는 의미를 뭔가 구성하는데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헌금뿐만이 아니겠지요. 선교, 전도, 예배출석, 다 마찬가지지요.
“목사님, 예배는 어떻게 드립니까?”라고 질문한 사람이 지금까지 수백 명이 넘어요. 예배를 어떻게 드립니까, 라고 한다는 말이 뭐냐 하면, 예배라는 그 의미를 구성하는데 나는 어떤 식으로 구성하면 됩니까, 하는 그 소리거든요.
그것은 결국은 “나는 예배 잘 드렸다.”라는 그것으로 “내 것에 손대지 마세요.”라는, 다시 말해서 “저주가 내 것에까지는 침투하지 마세요.”라는 평소의 적극적인 자기시뮬레이션, 자기 것 지키기의 시도에 불과한 겁니다. 누가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자극과 반응뿐이라고요.
어떤 생물학자가 이야기했는데 그 말이 맞아요. 인간은 자극과 반응뿐입니다. 식물인간 된 사람의 눈을 의사가 손전등으로 비추지요. 아직까지 살아 있나, 하고 비추는 자국을 주잖아요. 눈동자가 움직이면서 반응을 나타내지요. 인간은 짐승과 마찬가지로 자극과 반응밖에 없어요.
자극과 반응밖에 없는데 이상하게 인간은 그 이상의 것이 나온다는 말은, 인간을 뒤에서 배후조종하는 영적세력, 세계가 있는 거예요. 영적세계, 악마지요, 사탄이지요. 그 사탄이 인간으로 하여금 의미도 없는데, 자극과 반응뿐이고, 보이지 않는 의미를 위해서 움직이는 용도일 뿐인 그 인간에게 추상적인 사고방식을 줘요.
추상적인 의식을 준다고요. 거기서 등장한 것이 뭐냐? 법이라는 겁니다. 바벨론이 두 개 있어요. 구바벨론이 있고 신바벨론이 있는데 신바벨론은 bc 500 년경이고, bc 1200년경의 구바벨론에 6대왕 함무라비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 때 세계 최초로 성문화로 굳혀진 법이 등장했습니다. 그 법은 노예와 여자위에 군림한 거예요.
아까 제가 굴욕 적인 웃음의 덩어리가 그게 알 수 없는 공포로부터의 도피인데 그 도피가 자기들끼리 공유된 그것이 사회라고 했지요. 거기서 반드시 법이 등장하는데 그 법은 법을 제정 받는 쪽이 순치되어야 됩니다. 순치라는 말은 순하게 완화된다는 뜻이에요.
‘메이즈런너’에요. 법을 주면 그 법 안에서 무조건 뛰어야 돼요. 그런 영화가 있어요. 젊은 애들이 무조건 뛰는 거예요. 무조건 뛰어야 돼요. 이 말은 뭐냐? 쌍놈 위에 양반이 순치하는 사회가 조선사회입니다. 짐승으로 보는 거예요. 짐승으로 봐서 법을 줘버립니다. 개 목줄이에요.
레비스트로스라는 학자가 이야기했습니다. 부락과 부락사이에 물품을 교환하는 듯 보이나 사실은 물품을 교환하는 것이 아니고 상징을 교환한다. 다시 말해서 법적인 질서를 교환하는 것이다. 네 부족은 내 부족 앞에 항상 을이 되어야 해, 라는 것을 강요하는 쪽으로 상징을 교환한다고 해요.
결혼을 해도 레벨을 맞춰서 결혼해라, 그 말이에요. 어딜 목공 하는 아가씨가 재벌 집 도경이하고 결혼하려고. 결혼도 죽이 맞아야 돼요. 그래서 결혼 안 할 테니 연애라도 하자고 하잖아요. 개목줄, 모든 인간은 개목줄이 있는데 그 법질서를 주고받음으로서 “나는 당신의 영원한 종입니다. 딸랑딸랑!” 하는 거지요. 굴욕 적인 웃음을 띄고.
나는 영원히 너의 갑이다, 해서 월급을 주고받잖아요. 그냥 돈이나 주고받는 것이 아니에요. 노동의 대가로 돈 준다는 이것이 아주 순진한 생각입니다. 네 자리에 맞는 노릇을 하라는 그 말이지요. 그게 법이에요. 인간이 그 법을 더러워도 지키는 이유가, 나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
나의 것을 지켜야 우리가 생존이 되고 생존하는 이것을 나의 착함에 대한 주님의 적절한 보상이라고 여기고 계속해서 나의 것 지키는 방법은 유일하게 법 지키는 것, 법을 행함으로 지키는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이미 사회가 악마로부터 완전히 굳혀진 상태에 있습니다.
개목줄이 유일하게 없는 자는 왕밖에 없어요. 왕은 뭘 해도 괜찮아요. 직장 내 성추행 안 된다고 법을 정했는데 그 법 집행하는 검사끼리는 괜찮아요. 왜? 이유가 있는 게 검사들 세계가 법의 저촉을 받아버리면 갑이 되는 권위가 떨어져서 밑의 지저분한 인간들이 순치를 안 해요. 순하게 통치 당하지를 않잖아요.
따라서 법을 집행하는 쪽에 대해서만큼은 밑에 있는 하수들이 입을 다물어야 돼요. 왜? 대를 위해서 소가 희생되어야 돼요. 그래야 나라 질서가 잡혀요. 그렇게 해서 이 법의 세계가 지켜내려는 의미가 뭐냐? 그것은 공동체사상이라는 겁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 직장이라는 공동체, 그리고 국가라는 공동체.
이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희생해야 된다는 것, 공동체가 없으면 우리는 죽는다는 것. 그 공동체를 유지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법입니다. 이 교회라는 공동체, 교회가 얼마나 십자가의 원수인지 아시겠지요? 내 것 지키기 위해서 교회라는 공동체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힘들게 헌금해서 예배당 지어 올려야 된다는 거예요. 공동체 없는 나는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왜? 내 것이 달아나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잘못한 것은, 헌금이라는 것은 본인이 헌금할 때 헌금이 아니고 헌금하기 전에 너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법 말고……, 네가 행한 것은 법이거든요, 행해야 법을 지켰거나 안 지킨 것이 판정이 나니까.
그 판정 이전에 이미 우리는 저주받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음을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몰랐던 거예요. 성령님은 이미 이 눈에 보이는 세상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이후의 세상까지 관장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에요. 성령님은 인간이 죽고 난 뒤에 삶을 떠나서 죽은 세상의 원리를 이 세상 원리에 보편적으로 덮어버린 겁니다.
덮어버리니까 이 세상은 뭐가 되느냐 하면, 오직 행함으로 내 것 지키기 위해서, 내 공동체를 향후 미래까지 이어가기 위해서 내가 무슨 굴욕 적인 짓도 다 한다는 것이 들통이 났고 그게 바로 저주인 거예요. 무슨 당? 미래당? 미래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닙니다.
미래는 우리가 저주받아야 될 의미 때문에 태어났다는 그것을 아는 게 일찍 미래를 아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고자 하는 그 시도 자체가 어디서 나온 거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부활, 재림, 승천, 십자가, 이런 것을 자꾸 주워 담으려고 하는데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에서 말하는 것은, 부활 믿고 승천 믿고 재림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믿어야 돼요. 십자가를 믿어야 될 이유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스스로 해보려고, 달아나려고 하면서도 아직도 뭘 모르는가 하면, 목숨과 바꿀만한 일을 우리가 찾지를 못하고 있어요. 사람이 왜 자꾸 쫓기고 비겁한 변명이나 해야 되는 이유가 이 목숨과 바꿀만한 것,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을 찾지를 못해서, 만나지를 못해서 그래요.
그런데 만난들 소용이 없어요. 만난들 또 나 살기 위해서 그것을 이용하려고 설쳐대기 때문에. 안 되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의 대책은 이겁니다. “목숨 걸고 내가 살 수 있도록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사도바울의 대답은 아주 간단해요. 아예 네 목숨은 없다는 거예요.
지킬만한 목숨 자체를 주께서 십자가에서 없애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면 모든 시도가 다 쓸데없고 소용없는 짓거리에요. 십자가라는 것은 예수님이 법이 있는 세상공동체에서 추방된 거잖아요. 그러면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은 뭐냐 하면, “저도 추방될래요.”하는 것이 십자가 믿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돌아보면서 “너 훌륭하잖아. 남보다 뛰어나잖아.” “주여, 아닙니다. 현재로서는 내가 뛰어나지만 미래의 관점에서 보면 저는 저주가 견지되어야 될 그런 존재입니다. 저는 망가졌어요. 반품하렵니다.” 그렇게 다가올 때 그 사람은 더 이상 내가 새삼스럽게 사적인 나의 의를 챙기려고 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의 능력으로 되지 않지요. 십자가로서 아예 같이 우리를 죽여 버리는 겁니다. 믿음은 뭐냐? 법적 지키는 행함으로서의 믿음이 아니라면 그러면 믿음은 뭐냐?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다시 말해서 믿음이라는 것은 행할 당사자를 없애버리는 거예요.
이 땅에서 행할 당사자. “나는 이것 어겼습니다.” 혹은 “나는 이것을 지켰습니다.”라고 할 당사자, 주체자체를 계속해서 삭제시키는 거예요. 삭제시키기 위해서 주께서는 계속 주체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아나니아 삽비라에요. 그리고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욥기에 보면 욥이 자꾸 불평을 해요. “제가 뭐가 문제며 뭐가 잘못됐습니까?” 이렇게 하니까 욥의 마지막 친구 엘리후가 하는 말이 있어요. 욥기 35장 6절에서 “네가 범죄한 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제가 스물두 번째 댓글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주님은 우리 상대하지 않고 하나님은 주님만 상대하는데 왜 우리가 사적으로 초조감을 가눌 길이 없어서, 부들부들 떨면서 왜 그렇게 쫓기는 사람처럼 쫓기면서 지키려고 하는 것이 있어요. 쫓기면서 ‘이거라도 건져야지. 이거라도 지켜야지.’
자꾸 지키려고 하는데 지키려고 하면 자꾸 십자가와 멀어져요. 행함의 자기의 보따리를 안고, 마지막 남은 나의 것을 가지고 도망치거든요. 그래서 이런 노래가 있어요.
【아 그럴꺼야 나를 아낄려고 굳이 내게 말 안하고 멀리 떠나갔던가 ---------------- 진실한 사랑의 의미 의미 도대체가 도대체가 찾을 수가 없어 쉽게 찾을 수가 있는데 내 마음속에 있는데 조용하게 눈을 감고 생각하면 알 수 있어. ------------------------------- 언제라도 넌 내가 원한 것을 다 줄듯 보였고 변덕스러운 내 기분 맞추려 고민도 하고 하지만 너의 고마웠던 사랑을 난 당연한 듯 생각했었던 거야 나 이제 알아 혼자된 기분을 그건 착각이었어 느낄 수 있니 사랑의 시작은 외로움의 끝인걸】
이걸 몰랐다는 거예요. 이게 <날개 잃은 천사>라고 룰라가 부른 노래에요. “천사를 찾아 샤바샤바샤바” 하고 나오지요. 옛날 노래입니다. “아 그럴꺼야 나를 아낄려고 굳이 내게 말 안하고 멀리 떠나갔던가.” 이게 랩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가사내용이 하나도 안 들어와요.
“쉽게 찾을 수가 있는데 내 마음속에 있는데 조용하게 눈을 감고 생각하면 알 수 있어. 천사를 찾아 방황하는 나의 예전의 그 모습 찾아 샤바……” 우리는 지키려고 하니까 두려움이 더 커지고 자살충동 느끼고, 우울증 걸리고. 내 공동체, 내 새끼 공동체, 그걸 가정이라 하잖아요.
자꾸 내 새끼 공동체, 내가 착하게 되면 내 자식 잘되겠지. 아줌마는 평생을 교회 놀이하고. 평생 돈도 안 벌고 교회 놀이 하고. “교회 놀이 왜 하십니까?” “내 자식 혹시 복 받을까 싶어서. 잘 풀릴까 싶어서.” 잘 풀리는 게 뭡니까? 제가 울산강의에서 했는데요. 돈과 명예와 권력과 건강 아닙니까?
잘 풀려서 지옥 가겠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주께서 지키고자 하는 것은, 나의 의가 아니고 나의 저주를 지켜줘야 속죄의 의미가 생겨요. 저주라는 용도, 의의가 있어줘야 숨겨진 속죄라는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계속 우리에게는 “너는 왜 저주받아야 합당한가?”
결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천벌을 받으세요. 천벌을 피할 생각으로 교회 오지 마세요. 천벌 피하면 천국도 없습니다. 천벌 속에 천국이 있어요. 천벌 받을 각오로 교회 나와야 돼요. 천벌이 어떤 것이 천벌이냐? 추운 날 창 넓은 아파트에서 보일러 안 올려도 따뜻한 햇빛이 쫙 비추는 거실에서 방금 데운 커피 향이 모락모락 올라오는데 강의를 들으면서 자는 것인지 듣는 것인지 분간도 안 되는 것, 끄덕끄덕 조는 것, 이것 천벌입니다.
이 추운 날 따뜻한 햇빛 들어와 보세요. 천벌 치고는 괜찮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범사에 감사해야 돼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의의를 모르고, 주님의 의미를 모르고 내 것 지키기 의미를 위해서 마귀한테 참으로 많이 쫓겼고 또 시달려 왔습니다. 이제 마귀에게 그만 시달리고, 그만 놀아나고, 반납하는 의미로 저주받아 망가진 이 제품을 주 앞에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군소리 말고 그냥 드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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