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하다는 것
2018년 1월 21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2:6-10
(2:6)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2: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2: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2: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2: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일방적으로 온 인류를 둘로 나누어버립니다. 할례자와 무할례자로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류는 곧 그들의 최후의 운명까지 함유한 내용입니다. 이러한 일방적 분류에 대해서 다른 종교에 속한 사람이나 종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격분할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은, 자신들의 미래는 자기가 하기 나름이라고 우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보기에 이들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들이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는 점입니다. 사도는 최초의 인간과 최후의 인간을 비교합니다. 최초의 인간이란 아담이요 최후의 인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최후의 인간은 결코 최초의 인간군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소속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내면적으로 초월한다는 말입니다. 비록 외형적으로 인간으로 간주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른 인간과 차이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일하게 아버지를 아신다는 겁니다. 이는 예수님의 아버지를 아무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인간은 온전하게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율법을 주신 아버지의 심정을 모른다면 율법지킴은 실패입니다. 이 실패는 곧 저주입니다. 갈라디아서 3:10에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내면적 깊이를 알지 못하고 사도들과 사도들 사이에 외형적으로 판단합니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자’와 ‘안 유명한 자’를 구분짓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유명한 자를 쳐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복음의 표준화를 시도합니다. 사람들에게 유명한 사도로 평가받는 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이들 유명한 자들이 처신을 잘못해서 사도 바울이 유명세를 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 사도를 유명한 자라고 떠받드는 대중들의 요구를 사도 바울은 내치려는 겁니다. 내치는 방법은, 그들 마저 저주 아래 있는 자라는 겁니다. 그리고 특정 인물들을 유명하게 보는 그 대중들의 심보에는 게임 근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존재 근원에는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근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승부에 이기기 위해 자기 존재에 대한 한없는 경의와 충성을 다하려고 합니다. 일단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남에게 이길 수 있는 존재로 부각될 것이 아닌가 하는 정신을 내뿜고 있습니다. 즉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승부에게 밀리지 않고 자신에 대해서 “장하다”는 소리를 하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3을 보세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사는 자기 구원에 가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3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권세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된 것을 또 자랑질하려고 합니다.
남에게 없는 구원을 자신은 낚아챘다는 것에서 승자로 행세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근원적으로 보세요. 개인의 승리가 돌아갈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진정 진실을 아는 자들은 ‘그 어느 것도 예수님 없이는 아무 것도 없음’을 아는 그 자체입니다. 즉 나의 자랑거리로 따로 돌아올 그 어떤 성과도 예수님이 남겨주신 적이 없습니다.
문제는 존재에 대한 집착입니다. 존재하니까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존재로 행세하고 더 나아가 남을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괴물로 변신되고 있습니다. 세상살이가 힘든 것은 목숨 바칠 일이 없어서 그러합니다. 목숨과 바꾸어도 아깝지 아니하는 소리를 말씀을 통해서 들려야 합니다.
그냥 성경 지식 확보해서 남에게 또 이길 생각말고 말입니다. 이 세상은 온통 게임판입니다. 하지만 그 게임판을 우리 주님께서 결국에는 저주로 엎어버리십니다. 지옥에서 성공한 자들을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립니다. 그들로 인해 찌라시들이 남발합니다. 이런 찌라시가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이 세상을 판을 엎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고 그 안에 할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상 다루기 원리는 이러합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죄도 저주도 죽음도 심판도 없다는 원리입니다. 이는 곧 인간을 통해서 죄와 저주와 죽음과 심판이 흘러나오는 것은 율법의 존재가 인간 존재보다 우선한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이방인들은 ‘무율법자’로 사도가 규정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먼저 주어진 그 할례를 통해서 전 인류는 하나의 법으로 묶어내기 위함입니다. 즉 이방나라에 대한 규정은 이방나라 스스로 내리지 못하게 하시는 겁니다. 시편 79:6에 보면, “주를 알지 아니하는 민족들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나라들에게 주의 노를 쏟으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다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저주의 표상입니다. 필히 그들이 저주받아야 참으로 계신 하나님께서 제대로 일하심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입니다. 이들은 할례받아도 그 율법으로 저주받았습니다. 따라서 이방인이든 유대인들은 모두 동일한 아담의 후손이라는 점에다 다같이 저주받는 운명자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역시 이 율법 속에 들어오셨기 그 저주를 본인이 받으셨습니다.(갈 3:13) 하지만 십자가에서 대신 피흘리시므로 서 율법을 완성시켜버렸습니다. 이렇게 되면 죄 아래 있는 영역 말고 따로 죄와 상관없는 영역이 예수님에 의해서 마련되어버렸습니다. 그 영역에서 인간의 손댐과 의지와 상관없이 성령이 이방인들에게도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성령 안에는 ‘법의 완성’이 있어 더 이상 인간들이 따지는 ‘행함과 아니행함’의 차이가 해소되어 버렸습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예수 믿는 행함’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통해서 알려진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되고 의롭게 되는 겁니다. 인간이 법을 행사하게 되면 ‘행할 때’와 ‘아니 행할 때’ 사이에 구분이 생기고 단절됩니다.
하지만 십자가 피는 모든 것을 해소한 흐름과 지속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하기 나름’을 능가한다는 말입니다. 에베소서 1: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게 믿어지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살 명분 찾지 마시고 죽어도 여한이 없는 죽을 명분 찾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관점이 소멸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73강-갈 2장 6-10절(유명하다는 것)1801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2장 6절-10절입니다. 신약성경 303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2:6-10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본래 어떤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사도바울과 열 두 제자들이 다 사도가 되거든요. 열 두 제자에서 사도된 그 사람들 간의 이야기를 오늘 본문이 하고 있는데 우리가 제 3자의 입장이라고 생각해 볼 때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자기들끼리 다 해먹는다는 생각이 들지요. 일방적인 업무할당. 누구 허락도 없이, “이것은 네가 담당해라. 이것은 내가 담당할게.”
지금 사도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눈에 뵈지도 않는 모양이라. 이 말씀을 불교나 이슬람교에서 들었다면 얼마나 건방진 생각이라고 하겠어요? 얼마나 건방떠는 이야기겠습니까? 마치 이 세상이 사도들 자기 손아귀에 다 일임된 것 같은 느낌을 주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의 운명이, 내가 개척하고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사도를 만나지 아니하면 너는 일 없어, 너는 끝났어, 라는 감을 굉장히 줍니다.
쉽게 말해서 “네가 사도를 한 번이라도 만나봤어? 사도의 말을 들어본 적이 있어? 없어? 그러면 네가 아무리 애써도 소용없는 인생이야.”라고 단정짓는 듯한 인상으로 이 말씀을 주는 겁니다.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도끼리 다 해먹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도가 와서 우리에게 뭐라고 이야기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운명은 결정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사도들의 이야기 가운데서 약간 엿듣듯이 들어보게 되면 세상은 딱 둘로 나눠져요. 하나는 할례자, 그리고 무할례자. 이것도 자기들끼리의 일방적이라. 독단적이고 일방적입니다. 우리보고 물어보지도 않고요. 사도 빼놓고 다른 사람은 아예 제켜놓은 인간이에요. 피동적이고 수동적으로만 존재하는 인물이지 자기가 자기 인생을 해결한다는 것은 성경자체가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기분이 좋습니까? 우리는 이런 맛 때문에 성경 보는 거예요. 우리가 누구를 아예 조져놓고 박살을 내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하는 이 모든 것이 전혀 내 인생의 운명과 관련 없다는 것을 누가 좀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뭐든지 해보면서 ‘뭐가 되겠지. 조금만 더 노력하면 그래도 뭔가 되겠지.’라고 무작정의 희망만 만들어내면서 살아가잖아요.
결론도 없지요. 정답도 없지요. 세월 보내면서 70되고 80되니 무슨 소용 있습니까? 아무 의미 없거든요. 누가 초반에 “이게 정답이야.”라고 도장을 꽉 찍어 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만한 말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게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옵니다.
한 장만 넘기면 나옵니다. 10절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방인에게 사도된 바울의 편지를 우리가 알기 전에는 내가 이렇게 저주받는 것은 내가 행동을 잘못해서 저주받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저주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기 나름이다. 제대로 살면 저주 안 받고 죄 많이 지으면 벌 받고 저주 받는다.’ 우리가 이렇게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에 의해서 파견된 사도의 편지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보니까 모든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에 전혀 상관없이 전부 다 저주받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내 행동에 따라서 저주받고 안 받고 가 아니라 아예 저주 받아요. 어떤 분이 어제 저녁에 중요한 질문을 했어요. “<욥 안의 그리스도>를 보고 있는데 십자가 안에서의 자기저주가 무슨 뜻입니까?”라고 했어요. 십자가 안에서 스스로, 자발적으로 저주한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고 질문한 거예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0절과 그리스도를 가지고 설명을 해드렸습니다. 모든 인간은 첫 번째 아담으로부터 나왔어요. 저주꺼리를 계속 대물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주꺼리를 대물림하는데 그 저주를 대물림한다고 하면 기분 나쁘잖아요. 그런데 저주받을만한 것을 대물림할 때 그 저주받을만한 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일반교인이나 공부 좀 하는 사람들도 모르는 것이 있어요. 율법이 없이는 저주도 없고, 죽음도 없고, 심판도 없어요. 참 이게 말하기도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법이라 하는 것은, 괜찮은 내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법이 있어서 그 법을 내가 지키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괜찮은 내가 더욱더 잘 되고, 훌륭하게 되고, 법을 못 지키면 교도소 가듯이 나중에 지옥 불에 떨어진다.
이게 우리가 아는 상식입니다. 내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법이 나중에 있고. 법이 나보고 이야기하기를, “지켜봐라. 지키면 네게 복이 올 것이다. 못 지키면 네게 저주가 있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데 인간이 살다보면 힘 빠져서 보통 늙어 죽는다 하잖아요.
그런데 늙어서 죽는 것이 아니에요. 율법의 저주를 실효성 있게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은 율법의 종으로서, 내가 여기 있는 것보다 율법이 더 우선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들러리로서, 율법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죽어줘야 돼요. 죽어 줄때 그냥 죽어주면 안되고 저주받아 죽어줘야 됩니다.
그래야 율법이 값을 해요. 그 율법으로 죄가 형성되고, 죄가 있게 되면 필연적으로 저주와 심판이 따르게 되어 있고, 따라서 율법 없이는 저주도 없고, 죄도 없고, 심판도 없는 겁니다. 나 잘되기 위해서 법을 준 게 아니고, 또 나 못되기 위해서 법을 준 것이 아니고 법이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겁니다.
더 알기 쉽게 말하면, 어항에 사료 주게 되면 사료가 밑에 가라앉지요. 물고기들이 유유자적하게 헤엄치고 있고. 작대기를 가지고 어항속의 사료를 휘저어보는 거예요. 작대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고요와 적막입니다. 마치 뭐와 같으냐하면, 교회 안 나가도 하는 일이 고요하게 적막하게 모든 것이 말썽 없이 평온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살림살이입니다.
가끔은 미세먼지 때문에 신경이 쓰이지만 그것은 잠간이고 또 밖에 안 나가면 그만이니까요. 마스크 쓰면 되니까 별 문제 없는데 작대기 가지고 휘저어버리면 와류가 생기지요. 그러면 난리도 아니지요. 율법이라는 작대기를 가지고 휘저어버리면 어항 속에 갇혀 있는 인간은 쓰레기에 지나지 않고, 율법의 존재가 이렇게 설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쓰레기 같은 생활을 해야 된다는 것이 와야 되는 겁니다.
제가 쓰레기라는 기분 나쁜 이야기를 했지만 더 알기 쉽게 해서 우리는 먼지의 조립체, 먼지가 조립된 것이 인간이에요. 툴툴 털어보세요. 털어보면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어요. 한평생 산 것 털게 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집에 어른 돌아가고 나면 자손들은 후딱 어른들이 쓰던 것들 전부 다 불태워 없애버리죠.
흔적이라는 흔적은 싸그리 날라 가 버립니다. 그 다음 차례는 우리지요. 살아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지 덩어리죠.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인간들의 모든 삶이나 에너지를 그 먼저 조립하는데 다 몰두합니다. 사실은 우리의 에너지를 감사하는데 다 쏟아야 되는데 그 에너지를 떨어진 먼지 주워 모아서 본드 붙이는데 다 소모하고 있어요.
그거 해서 뭐할 건데요? 남에게 안 지려고 하는 겁니다. 인간에게 마지막 남은 암세포 같은 것이 있어요. 그것은 지지 않고 살아보려고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지요. 6절에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유명하다는 이들의 이름이 9절에 나와요.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
이 사람들이 제자출신으로 사도가 되었으니 유명한 자들이지요. 그런데 유명하다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 본인들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유명하게 보는 그러한 의식자체에 대해서 문제 삼고 있습니다. “유명한 것 좋아하네. 어디서 온 황사야?” 유명하다는 말의 그 근저, 바닥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사람들이 게임하고 있는 겁니다.
누가 앞섰느냐? 누가 승자냐? 누가 뒤떨어졌느냐? 사람들은 어떤 승자를 우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본인들이 그 승자가 되고 싶어 하는 심보가 작렬하기에 그렇습니다. 나도 이 땅에 살면서 남에게 지지 말고 이기면서 살아보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세상살이가 스트레스 받는 이유가 뭐냐 하면, 목숨 바칠 일이 없어서 그래요.
내가 왜 자꾸 살아야 되겠느냐 하면, 살아 있는 이 덩어리하고 남과 게임해서 안지겠다는 그 더러운 심보가 끝까지 암세포로 남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진짜 헤치고 그거 끄집어내고 싶어요, 정말. 핀셋으로 수술해서 그거 끄집어내고 싶어요. 설교를 하나 듣더라도 말씀을 보더라도 목숨과 바꿔도 아깝지 않은 숨어 있는 그 소리만 들어야 돼요.
그게 사도고 그게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물론 성령 받은 제자들이었어요. 교회에서 뭘 듣습니까? 교회 와서도 남에게 안 지려고 신학적 지식, 어떤 성경적 지식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확보해봤자 먼지 조립품이기 때문에 걸 데가 없어요. 먼지 무너지면 내가 알던 신학박사도 같이 다 먼지가 되는 겁니다. “먼지가 되어……” 그런 노래도 있잖아요.
왜 자꾸 소지하려고 하고 왜 자꾸 자기 몸에다가 훈장처럼 걸치려고 합니까? 어디에 써먹으려고 하는 거예요? “무시하지 말라. 난 너에게 안 진다.” 그거잖아요. 그러다 보니 인간은 평소에 자기 생각에 너무 치밀합니다. 우울증이 뭐예요? 너무 치밀해서 우울증이 생겨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 치밀해요.
자기를 향하여 바둑 두는 것 같아요. 여기에 놓으면 여기 놓고, 여기 놓으면 여기 놓고. 주께서 바둑판 자체를 확 엎어버립니다. 평생 살면서 놓던 바둑판을 다 엎어버리면 돼요. 내기장기 할 때 제일 화나는 것은 “장군!” 불러서 마지막 이기고 돈 만원 따려고 하는 그 순간에 외손녀가 와서 확 엎을 때, 두 시간 공들인 것 다 날아가 버리지요.
워드작업을 실컷 해서 이제는 만족스럽다 하는데 외손녀가 옆에 붙어서 클릭을 잘못하는 바람에 다 날라 가버린 거예요. 외손녀가 천사입니다. 주의 성령이에요. 우리가 주님을 생각할 때 너무 오해되는 것 중 하나가 주님의 일에는 내가 잘되는 것은 주님의 계획에 애초부터 들어있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의 찌라시에 현혹되지 마세요.
돌아다니는 것이 전부 다 찌라시입니다. 증권가 찌라시처럼 전부 다 그 내용을 보면 지옥에서 승자가 되었다는 그 이야기거든요. 난 지옥에서 이렇게 승리했다는 그 이야기인데 지옥 갈 것도 아닌데 왜 거기에 그렇게 신경을 쓰십니까? 얼마나 지기 싫었으면 끝까지 뭐 상상암? <황금빛 내 인생>에서 상상암이라고요?
얼마나 신경을 썼으면. 자식 잘 키웠다는 아버지 모습, 괜찮은 가장, 이것도 승부라. 다른 가장보다 더 괜찮게 살았다는 아버지상을 구축하려는 이것도 승부 아닙니까? 그거 암입니다. 상상암이 아니라 실제로 정신적 암이에요. 왜 남에게 이기려고 합니까? 그것을 수술해서 핀셋으로 집어내면 되는데.
지옥 가는 인간들과 경쟁해서 무슨 소득이 있습니까? 유명하다는 것은요, 그만큼 이 세상에 더럽게 게임하고 있고 지금 판을 벌이고 있다는 것, 쓸데없는 경쟁마당을 형성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아이고 부러워라. 대단하다.” 해서 유명한 겁니다.
사도바울은 이걸 쳐내는 거예요. 유명한 것을 쳐내버립니다. 쳐내는 방법은 저주입니다. “그 유명하다는 인간들, 다 저주아래 있다.” 그렇게 해서 사도바울은 표준화를 만듭니다. 모든 인간들의 표준화를 만드는데 방법은 뭐냐? 첫째 인간과 마지막 아담, 최초의 것과 최후의 것을 대비하는 거예요.
최초의 것은 아담이고 우리는 최초의 것에서 벗어난 적 없어요. 이 몸은 아담의 몸입니다. 그리고 최후의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두 개를 사도가 비교해야 될 이유는 실제로 다른 몸, 다른 몸이 되어버린 하늘에 계신 분이 이 땅에 찾아왔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그분은 부활의 몸으로 이미 달라져 있어요. 우리 몸하고 달라요.
비교 시키는 방법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어렵지만 제가 그냥 밀어붙이겠습니다.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라고 되어 있어요. 이 대목이 어려운 대목인데요.
첫 번째 아담에서 난 모든 인간을 다 양동이에 담아놓고 일방적으로 할례자와 무할례자 두 부류로 나눠버려요.
이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뭐가 어려운가 하면, 이방인을 향하여 “이제는 더 이상 이방인이라고 하지 마라. 무할례자로 이야기하라.”라고 이방인을 무할례자라고 조건을 붙이는 그 근거가 할례에 있다는 이 사실입니다. 유대인의 할례를 근거로 해서 이방인이 무할례자가 되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로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외의 나라, 모든 이스라엘 외의 이방민족을 규정할 때 하나님께서는 필히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표준으로 해서 그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이방인을 규정하는 거예요. 그렇게 규정을 해줘야 하나님의 언약이 이스라엘만 적용되는 원칙이 아니라 이스라엘 바깥의 모든 민족에게도 공히 적용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공히 적용되면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합체가 첫 번째 아담의 세계가 돼요. 그 영역에 언약이 뚜껑을 덮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영역에 속하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해당되는 예수님의 새로운 영역이 이쪽과 별개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전달할 수가 있어요. 어떤 인간도 아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걸 하나의 법칙으로 완전히 규정짓는 거예요.
어떤 인간이나,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나 관계없이 전부 다 ‘네가 인간이라면 아담에 속했어.’라고 이야기하는 이런 규정은 부처나, 불교신자 같으면 “같은 인간인데 네가 왜 규정하는데?” 이렇게 나올 거예요. 하나님은 규정할만해서 규정합니다. 왜냐하면 아담에 속한 그 외부의 인물이 따로 설정되어 있기에 규정이 가능하다 그 말입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라고 되어 있거든요. 우린 이걸 보고 ‘아, 예수님이 구원하시는구나.’ 알잖아요. 그거 이전에 예수님으로부터 난 사람만 구원되어야 될 근거가 또 있어야 돼요.
그 근거가 요한복음 1장 3절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그 다음이 중요해요.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불교신자든, 무슬림이든 뭐든 간에, 북한의 김정은이든 어느 누구도 그가 없이는, 그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 없이는 하나도 된 것이 없다. 출생한 것도, 존재하는 것도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이 잘한 짓이 아니고 당연한 짓이에요.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것을 큰 일 한다고 복 내놓으라고 땡 깡 부리는데 안하는 것이 이상해요. 예수 안 믿는 것이 이상하다니까요. 예수 믿는 착한 자녀들이라 하잖아요. “교회 나가줄테니까 얼마 줄래?” 이런 거. “엄마 따라 교회 나가줄테니까 용돈 얼마 줄래?”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러면 엄마 아빠가 이렇게 해야 돼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렇게 해야 돼요. 들어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세상의 모든 것이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생긴 것이 없습니다, 하기에 누가 구원되고 구원 안 되고의 권리는 예수님 일방적입니다.”라는 말이 순차적으로 성사되는 거예요. 연결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어렵지 않지요. 지금 우리의 자존심, 내 승부욕, 남에게 안 지려는 그 마음, 독자적으로 뭘 하나 남보다 더 알아서 남에게 이겼다, 그런 짓 하기에 이게 귀에 안 들어오는 거예요. 독자적으로 타인을 이길 때 우리가 사는 어떤 보람을 느끼려고 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순서를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께서 없는 나라를, 이스라엘을 만들지요. 만들고 난 뒤에 그 이스라엘을 광야에 몰아세우기 전에 애굽에서 할례를 행합니다. 할례가 뭐냐? 외국영화에 저격수가 총 가지고 쏠 때 표적에 레이저빔을 쏘죠. 그러면 그 사람은 죽기 전부터 기분 나빠요. 심장 이 부분에 빨간 점이 비추고 있어요.
이마에 쏠 거면 이마에 점이 있고 총알이 거기에 박힌다는 거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세상을 만들 때 같이 겸해서 만든 그 법, 율법이지요, 율법이 레이저빔이 되어서 모든 세상, 모든 움직임이 할례가 있는 그쪽을 향하여 빨간 점을 쏘는 거예요. 그러면 세상 모든 움직임이 할례 쪽에 집중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많은 율법 중에 왜 할례에 그렇게 집중되어 초점을 맞춰야 되느냐? 모든 율법 중에 몸에 새기는 법이 할례 하나밖에 없어요. 몸에 직접 새겨서 몸이 움직이면 그 법도 같이 움직이는 법은 할례언약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율법은 기존의 최초의 몸을 가진 아담의 몸 가지고는 율법을 성사시킬 수 없고, 없다면 우리는 무슨 몸을 갖고 있느냐?
율법 아래서 뭘 해도 저주받아야 돼요. 착해도 저주받고, 고아원방문해도 저주받고, 예수 믿어도 저주받고, 뭘 해도 저주받을 이 몸을 갖고 있는 겁니다. 이 몸 자체를 율법화 시킨 거예요. 그게 할례에요. 이런 깊은 의미를 저 이방민족은 모릅니다. 이방민족은 모르기 때문에 저 유대인들은 이방민족을 개같이 여긴 거예요.
예수님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나는 개한테는 생명의 떡을 주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그 이방여인이 뭐라고 합니까? “옳소이다. 제가 개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나는 개”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자기가 이스라엘의 관점으로 이미 관점이 바뀐 거예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율법 있는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율법이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쓰레기 같은 존재다, 라고 이미 그 이스라엘 인식을 가지고 율법의 완성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었던 겁니다.
복잡하지요? 시편 79편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 이방인 입장에서는 이 시편 79편 6절을 놓칠 수가 없지요. 잊을 수가 없어요. 이스라엘이다. 정말 이스라엘다우려면 팔레스타인 난민들 있잖아요, 원자폭탄으로 확 쓸어버려야 돼요.
왜냐하면 자기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니까. 시편 79편 6절을 실천에 옮겨야 될 것이 아닙니까? 다시 읽어볼게요.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 이게 주님이 일관된 원칙이에요. 변함없는 원칙입니다.
따라서 이방인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이스라엘 관점에서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할례가 없는데 무슨 구원을 받아요? 율법이 없는데 무슨 구원을 받아요? 있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 전한다 하니까 원로들, 여기서 말하는 유명한 자들이 그렇게 화를 낸 겁니다.
“저거 사기 아니야? 왜 우리가 알고 있던 예수 그리스도의 원칙과 구약의 율법의 원칙, 계시의 원칙과 다른 짓을 하는데? 이거 탈선 아니야? 사이비 아니야?” 이런 식으로 할 때 베드로가 말렸고 그리고 다른 사람도 말렸어요. 그게 아닙니다. 사도행전 10장 45절에서 47절에 보면……, 이번 여름수련회는 사도행전 한다고 했지요? 미리 광고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 44절에 보면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그리고 45절에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제가 목사 면직당할 때 재판 받았거든요. 생전 처음 재판 받아봤어요.
재판 받을 때 나는 변호사도 없고 검사들 밖에 없어요. “왜 당신은 주일 성수와 십일조를 거부하느냐?” 이것 가지고 고소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사도행전의 이 대목을 이야기했지요. “이방인에게도 율법 없이 하나님의 의가 되었잖아요. 하나님의 의로 구원받으면 되는데 왜 아직도 율법을 주장합니까?” 하니까 재판장 되시는 분의 입이 쑥 들어가 버렸어요.
이게 뭐냐 하면, 지금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본인은 구원받았다고 자부하는 거예요. 구원받았으면 자부심이 있고 그 자부심 뒤에는 뭐가 있느냐? 유대인들에게는 이래서 구원받았다, 가 있어요. 오신 메시아로 인하여 구원받는데 주님은 약속대로 착착 진행하다 보니까 할례를 행했고 율법을 행한 우리들에게 성령까지 주셔서 구원했다, 까지 그들은 알았는데 사도바울이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할례 받지 않은 사람에게도 성령이 오신다 하니까 그들은 신학을 다시 정립해야 돼요.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렇게 정립되는 거예요. 그들이 할례 받은 것은 할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 할례로 말미암아 우리의 몸이 깊숙이 저주가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을 몸에다 새기는 하나의 사인, 표적이 되는 거예요. 다른 민족들은 바보같이 ‘내가 저주 받나 안 받나.’ 몰랐는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례가 박혀 있다는 말은, 딱 집어서 “그러니까 이 할례에 준해서 네 최초의 몸은 저주받아 합당해.” 라는 표적을 몸에 지니고 있었던 겁니다.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할례 해석 자체가 이미 해석이 끝나고 모든 것이 정점을 찍은 상태에서 다시 반환점을 돌아서 완성단계에서 다시 거꾸로 역주행해서 해석하는 것과, 할례 가지고 천당 가려고 하는 유대인의 해석과 마찰을 일으키고 그 마찰 속에서 십자가사건이라는 것이 성립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유대인들은, ‘할례 행했다, 안 행했다.’를 단절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십자가는 그 단절을, 둘 다 하나님의 원수인데 그 막혔던 단절을 십자가로서 해소시켜 버렸어요. 그게 에베소서 2장 12절에서 16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도 참 어려워요.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십자가지요.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라고 에베소서 2장에 죽 나와요.
평소에 성경말씀을 파악하게 되면 딱딱 교류가 되는데, 된다고 믿고요. 방금 제가 이렇게 했을 때 “그러면 우리는 십자가 믿으면 되겠네요.”라고 이방인들이 생각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십자가 믿으면 되겠네요, 하는 사고방식이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리는 할례 믿으면 되겠네.’ 하고 똑같은 사고방식입니다.
십자가 믿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하게 되면 똑같이 승부욕에 들어갑니다. ‘난 십자가 믿었다. 너는 안 믿었지.’ 이러면 믿은 것과 안 믿은 것이 똑 끊어져요. 단절된다고요. 쇤베르크라는 작곡가가 있습니다. 그전까지는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8음계를 가지고 모든 음악을 정리했던 역사가 있었는데 쇤베르크라는 현대음악가가 등장해서 12음계로 화성도 없는 작곡을 했습니다.
난해하기 짝이 없지요. 그 사람의 제자의 제자가 윤이상이에요. 이 사람이 천재적인 발상을 해서 도와 도, 레와 레의 사이에 마이크로 음이 있다는 겁니다. 도와 도, 그리고 샵 사이에도 분명히 자연세계에 음이 있는데 그 음을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서양의 기법으로서는 도는 도, 레는 레, 미는 미, 법적으로 딱딱 끊어서 이성적 법체제로 해버리면 음악이 인간의 근원적으로 나오는 감성을 충분히 포용할 수가 없다는 생각에서 윤이상은 동양적인 아악을 동원시켜서 마이크로 음 사이를 흐름으로 바꾼 거예요.
흐름으로 바꿔버리면 단절이 아니고 연속적인 흐름이 되겠지요. 이방인에게 성령세례가 왔다는 말은, 이것 지키고, 예수 믿는 것도 법으로 믿고, 예수 안 믿는 것도 법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자체가 예수 믿음에 대한 오해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이 인간들에게서 ‘나 믿겠어.’라고 나오면 안돼요.
예수님께서 모든 법을 헐어버렸던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영을 부어주게 되면 끊어짐이 없어요. 나는 착했다, 구원받겠네. 나는 예수가 안 믿어진다, 지옥 가겠네. 이런 자체적인 끊어짐이 없어요. 이미 주님의 흐름에 흡수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성령 안에서 최종적인 정점을 찍고 사도바울처럼 다시 반환점을 돌아와야 돼요.
나는 사라져버려야 돼요. 나는 이 땅에 먼지 같이 부서져서 나에게, 내 행함에 아예 기대 걸 것이 없어야 돼요. 사라져야 된다는 이 말, 누가복음 마지막에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나타났는데 처음에는 누군지를 몰랐어요. 나중에 저녁 먹다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고 안 순간 예수님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람에게 잠시 보여주고 사라졌습니다. 사라지고 난 뒤에 두 제자가 다른 제자에게 가서, “나는 예수님을 보았다.” 제자들이 물을 것 아니겠습니까? “어디 있는데?” “사라졌어.”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내가 보았다.”가 되면 ‘내가 보았다’와 ‘못 보았다.’가 구분됩니다. 이게 또 끊어진다고요.
내가 볼 때는 보고 안 볼 때는 안 본 것이 돼요. 그러나 과연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볼 때만 주님이 나타나고 안 볼 때는 주님이 없는 겁니까? 그 두 제자에게는 더 이상 보고 안보고가 없이 주님이 나보다 더 위에서, 윗선에서 계속 살아 있어서 나의 흔적이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흔적으로 내가 지속적인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겁니다.
주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나타났다가 사라진 분이에요.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성령도 똑같이 나타났다가 사람에게 포착되지 않고, 붙잡힌바 되지 않고, 소유화되지 않고, 또 사라져 버려요. 자꾸 사라져 버립니다. 이 말은, 인간들 자체가 모든 것이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이 몸이 살아 있는 한 계속해서 온 몸으로 찌릿하게 느끼고 또 느끼게 만드는 거예요.
에베소서 1장 5절에 보면,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다시 읽어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지금 주체가 이미 어디로 넘어갔는가? 이다, 아니다, 만 따지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거기서 벗어난 예수님에게 벌써 넘어가 있지요.
그 예수님이 우리를 예정하사 아들 되게 하셨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할 것이 아직도 따로 남아 있을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없지요. 없는 겁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율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죄인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기준에 의해서 무율법자, 율법에 준해서 “너희는 율법이 없는 자, 그래서 너희는 약속 밖이고 저주 받아야 돼.”라고 하는 그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율법이 있어서 죄지은 것이나 율법이 없어서 애초부터 율법 밖의 저주가운데 있는 자나 모두 다 최초의 인간 아담에 속해서 저주 아래 있음을 율법이 있음으로서 비로소 마땅히 저주받아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마땅히 저주받는다는 이런 소식을 우리가 안다는 것은 아까 본 에베소서 1장 5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한 그 넉넉함, 그 흐름, 지속, 더 이상 내 인생에 대해서 손댈 것이 없는, 그런 느긋한 입장에서는 마음 놓고 이 저주에 대해서 입을 뗄 수가 있어요.
다시 말해서 이제는 내가 살 명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을 명분이 있는 거예요. 우리는 살 명분 찾으려고 살지 마시고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는 죽을 명분을 위해서 이 땅에 살아가야 되는 겁니다. 죽어도 괜찮아요, 를 위해서 살아가야 돼요. 살게 되면 우리는 남하고 또 시합하려고 한다니까요.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이걸 어찌할꼬, 이걸 어떻게 할까요? 이런 오류는 옛날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기 4장에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드디어 자기 백성들을 데리러 애굽으로 갑니다. 가는 도중에 숙소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고 합니다. 지금 자기 동업자가 가고 있는데, 키워줘야 마땅한 대상을 가지고 오히려 죽여 버리려고 한 거예요.
그런데 출애굽기 4장 25절에 모세의 부인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피가 묻어 있는 것, 피가 묻어 있는 그 몸이 결국 마지막에 네가 구원해야 될 사람들의 조건이 되는 겁니다.
가정마다 전부 다 어린양의 피로 묻혀야 돼요.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묻힌다는 말은 이제는 주님 앞에서 따로 이걸 행하고 저걸 행하고 할 여지는 아예 생각하지 말아야 된다는 그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어요. 이 땅에서 저주받는 것은 새삼스럽게 나쁜 짓해서 저주받는 것이 아니고, 나 하기 나름에서 저주받고 복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옛날 구약 때 이스라엘이 그런 짓 하다가 저주받은 거예요. 멸망당한 겁니다. 우리는 먼지에요. 왜 이 몸이 파괴되어야 되는가? 왜 행함이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는가? 그것은 율법이 와서 우리에게 재깍재깍 알려줍니다. 네가 아무리 애써봐야 율법의 뜻을 이룰 수 없어요. 이룰 수 없다면 의가 되지 못하고, 의가 되지 못하면 죄고, 죄가 되면 인생 필히 괴롭게 되는 것, 망하게 되는 것은 주님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하고, 당연하고, 당연한 거예요.
그걸 이미 구원받은 입장에서 왜 느긋하게 볼 줄 모르는가 말이지요. 윤이상이한테 배우세요. 빈틈이 없어요. 끊어짐이 없어요. 단절이 없습니다. 지속입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사람, 하나님의 아들 되어버렸어요. 무슨 말을 더 하리오, 제가? 그 느긋함.
설치고, 까불고, 선교사로 보내고, 십일조하고, 충성봉사하고, 난리 부르스, 그게 무슨 …,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운명이나 미래하고 아무 연관성이 없어요. 사람이 자기에게 기대를 걸면 큰일 납니다. 자기한테 기대 걸지 마세요. 사람이 자기한테 기대를 걸게 되면 어떤 대상자를 보고 자꾸 상상하게 되는데 사람들의 심리가 이상해요.
자기가 상상 했잖아요. 상상한 사람을 직접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가 상상한 사람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이에요. 혼자 밤새도록 상상했어요. 막상 만나보게 되면 완전히 엉뚱한 사람이에요. 그걸 복음적으로 설명하면, 주님은 그 사람을 따로 다루고 나는 내가 상상한 사람이라고 오류해서 따로 다루고, 그래서 만나서 이야기해 보게 되면 내가 상상한 예상문제집은 전혀 못써먹습니다.
왜냐? 그 순간에 같이 개입해서 주께서 또 작용하기 때문에. 그러면 성도의 만남은 어때야 됩니까? 나는 이런 실수 했다? 나는 이런 착각들 했다? 이게 성도의 교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악수 먹었다고 한 거예요. 오늘 본문에 나오지요. “교제의 악수를 하였”다고요. “우리 둘 다 이 몸은 저주받을 몸이잖아. 먼지 같은 몸이잖아.”라고 악수 먹은 겁니다.
“그래도 우리는 ‘예정하사’ 구원 받았잖아.”라고 악수 먹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승부욕을 내부에서 발휘하지 마세요. 인생은 이기려고 사는 것이 아니고 죽어도 괜찮은 그 명분을 이미 주께서 주신 것에 대해서 모든 에너지를 감사하는데 다 소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해야 될 우리가 남에게 안 지려고, 나도 멋있다는 그것 내세우려고 마귀한테 속아서 부질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내 행동 여하에 따라서 구원 받는다 안 받는다, 쓸데없는 걱정근심으로 마귀한테 쫓기면서 벌벌 떨면서 우울증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제는 어떤 게임도 하지 않게 해주시고 게임조차 초연한, 초월한 그런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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