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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강의-마음절개 17092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10. 17.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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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 (IP:175.♡.232.195)17-10-09 15:44 

광주 강의(2017. 9. 22) 43-1 

마가복음 10장 42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이렇게 되어 있지요. 

하나님은 사람을 두 종류로 보십니다. 이방인과 유대인. 이방인은 언약이 없는 사람들이고 유대인은 언약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럼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이방인들이 언약을 요청하면 유대인이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이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간이 언약을 부르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자기 백성을 만듭니다. 

언약에 대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하나님이 언약으로 만들어내는 사람은 이스라엘이고, 그 외에는 이방인입니다. 따라서 이방인이냐 이스라엘이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이스라엘은 좋겠다. 언약을 받았으니 구원 받겠네.’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것 또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언약은 그때그때 새로운 결과물을 만듭니다. 만약 언약이 이스라엘에게 왔다면 그 이스라엘 중에 또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나눠져요. 여기 이스라엘에 또 언약이 추가되면 이스라엘 내부가 이스라엘과 이방인으로 분류가 됩니다. 

예를 들어, 선을 보는데 ‘상대가 나와 궁합이 잘 맞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웨이터가 주문을 받는데 나는 커피를 상대는 녹차를 주문했어요. 서로 안 맞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과 선을 봤는데 그 때는 둘 다 커피를 시켰어요. ‘아 이 사람과는 잘 맞구나.’ 생각했는데 그 다음에 새로운 주문이 들어옵니다. ‘어떤 커피를 드릴까요?’ 나는 카푸치노를 시켰고 상대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어요. ‘아 또 다르네.’ 

언약이 추가되면서 구원 받는 사람이라고 여겼던 그 내부가 조각이 납니다. 누구든지 언약이 주어지면 ‘저는 믿습니다.’라고 해서 다 구원 받고 싶어요. 문제는 내가 구원 받고 싶은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시는 그 다음 언약이 나로 하여금 어떤 위치로 보내시는가가 중요합니다. 주도권이 언약에 있어요. 

그러면 언약의 끝이 궁금하지요? 언약의 끝은 어떤 것에도 영향 받지 않는 빈 공간을 발생시킵니다. 제 양말에 구멍이 났어요. 아침에 신을 때는 괜찮았는데 이제 보니까 구멍이 있어요. 신제품은 멀쩡한데 자꾸 신으면 낡아서 구멍이 생깁니다. 이 구멍은 어떻게 해서 생긴 거예요? 신다보면 생깁니다. 

언약이 인간에게 찾아오면 구멍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 구멍은 기존의 인간들은 이 구멍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왜냐? 구멍이 생기면서 원래의 자리는 구멍에게 내어주고 구멍이 차지했던 자리는 주변으로 밀려가게 됩니다. 밀려가는 것이 세상 권세, 어둠의 권세지요. 그래서 어둠의 권세가 관여할 수 없는 빈 구멍이 발생하고 그 구멍에서 언약이 완성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불 속에 들어가는 것이 그들의 소원입니까? 아니죠. 그들도 나름대로 바라는 것이 있었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이 이들에게 임하니까 그들의 바람은 다 밀려나고 본인들이 예상치도 못한 구멍으로 들어오고 말았어요. 그 구멍은 원래 없던 것인데 갑자기 생겨난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사람 죽이는 것이 취미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다니엘의 세 친구를 불 속에 집어넣었습니까? 화가 났기 때문입니다. 마치 출애굽 때에 바로 왕이 못된 사람이 아닌데 모세가 약을 올리니까 바로의 마음이 강퍅해졌지요. 그래서 과도한 행정 조치를 내립니다. 이것을 누가 유발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유발한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 임하면 그 사람에게 구멍이 생기고, 그 구멍은 기존의 권세자들이 어찌할 수 없는 도피성이 됩니다. 여기에 들어간 사람은 세상의 어떤 환란, 기근, 핍박이 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거지요. 이것이 미리 본 천국입니다. 천국 생활을 미리 해야 합니다. 

언약이 오면 구멍이 생기고(이 구멍은 성령입니다), 이 구멍에 든 사람은 천국 생활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북한의 핵문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도 구멍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밖에서 예쁜 것만 보면 자기 집으로 가져가요.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플라스틱 통을 버렸는데 그 통이 예뻐서 그것을 주어갑니다. 그러면 집에는 온갖 쓰레기들이 쌓이게 됩니다. 

자식들이 집에 오면 쓰레기를 치울 생각을 먼저 합니다. 그런데 이 집에 천사가 왔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천사의 광채가 집안을 가득 메우니까 쓰레기에는 관심도 없어요. 쓰레기가 있어도 거기에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양 치는 목동이 들판에 있을 때 천사가 와서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면서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했을 때 목자가 양들에게 신경을 쓸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동안 심각하고 중요하게 여겼던 문제도 복음의 광채가 비치게 되면 사소하고 별 볼일 없는 문제가 됩니다. 이 광채가 아까 이야기한 구멍입니다. 세상 권세에 눌린 사람들은 모든 일이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인생을 오래 살아도 요령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의 광채가 비치면 다 끝나는 문제입니다. 이 복음의 광채를 누가 막습니까? 이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방해하지요. 광채만 보면 세상 일은 문제가 되지 않는데 광채를 보지 못하면 세상 일이 심각하게 느껴집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사단의 역할이 그리스도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하는 일입니다. 북한의 핵문제, 자식의 취직 걱정, 비가 내리지 않아서 곡식이 말라죽는 등등의 일을 사단이 일으켜서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기도를 해도 ‘핵문제 해결해 주시고, 자식 취직되게 하시고, 비를 내려 주시고 --’ 이런 쓰레기들을 요청하겠지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닌데 복음의 광채가 가려지는 순간 아주 심각한 문제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1) 주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사는 자. 2) 선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자. 

주님이 인도하시면 목적이 있어요. ‘복음만 알면 돼.’라는 겁니다.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보다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했지요. 그러면 성도는 생명책을 증거하겠지요. 1번은 성령 세례 받은 사람이고, 성령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은 그 대안으로 2번이 될 수밖에 없어요.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선하고 바르게 살면 보상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 그렇게 살려 합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의 인생책을 쓰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합니다. 성령 세례 안 받은 사람은 교회에 와도 1번, 주께서 인도하시는 것이 없기 때문에 2번이 해답입니다. 2번은 구원이 아닙니다. 

자기 양말에 구멍이 생기지 않도록 해서 자기 인생을 자랑합니다. 자기 인생을 증거하는 거지요. 이 세상 신은 인간을 이쪽으로 몰아갑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한 자는 자기 인생책을 쓸 필요가 없어요.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생명책이 아닌 다른 책도 있어요. 다른 책은 행위의 책이지요. 책은 이 두 권이 전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분류하시는가? 이스라엘과 이방인으로 분류합니다. 제 3지역은 없어요. 왜냐?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지난 대구강의에서 지혜로운 다섯 처녀를 잠시 언급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는 신랑을 본인이 결정합니다. 본인이 알고 있는 조건을 신랑에게 대입시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신랑이 제기한 조건을 갖춘 자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따로 조건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기름 준비하는 것은 신랑의 요구사항입니다. 바르고 착하게 살면 구원 받는다고요? 이런 말은 많이 유포되면 유포될수록 주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더욱 귀해집니다. 

문제인 정권에서 자사고(자립형 사립 고등학교)를 없앤다고 합니다. 이것 없애면 안 됩니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공부해야 합니다. 그곳에 가서 자부심을 갖도록 해줘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부하는 재미가 없어집니다. 일류대학교가 왜 있습니까? 있어야 열심히 노력할 동기가 생깁니다. 선악과 따먹은 인간이기에. 

그런데 인간의 능력으로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주께서 열어주셔야 갈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있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오셔서 없던 공간을 언약으로 새롭게 만드십니다

주님이 인도하시면 특별반이 됩니다. 어느 정도 특별반인지 구원 받은 본인도 예상 못합니다. 이 정도까지 특별한 존재인지 상상도 못했어요. 처음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 남들보다 더 훌륭한 인간이 되었다고 여겼어요. 남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인줄 모르는데 자신들은 알고, 남들은 선한 일을 많이 못하는데 자신들은 많이 하는 정도로 차이가 있는 줄 알았어요. 같은 사람이지만 자신들은 보통 사람들보다는 수준이 높은 자 인줄 알았어요. 

그러나 주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구원하신 것은 인간들은 상상도 못한 낯선 세계로 초청하신 것입니다. 이 세계는 십자가 복음 중심이기 때문에 주님이 이들을 도와주는 경우는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할 때는 기뻐하시고 도와주십니다. 그런데 남보다 뛰어난 인간이 되기 위해 움직이면 주님은 절대 도와주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처음 출발할 때는 빈공간은 없어요. 제자들도 처음에는 선하고 바르게 살면 선하신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라고 여겼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지요. 부름 받은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기에 다른 사람들 보다는 좀 더 나은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을 실패자로 만들었습니다. 

실패자가 되면 상처를 받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만 실패했습니까? 다 실패했지요. 가룟 유다는 결국 자살했습니다. 성공했다고 자살하는 사람 봤습니까? 없지요. 자살하는 이유는 내가 사랑할 대상이 없을 때, 내가 지킬 것이 없을 때 자살을 합니다. 

내가 지킬 것, 내가 사랑할만한 것은 어디에서 가져오는가? 본인이 만들어요. 인간은 자기를 사랑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기가 되고 싶은 자기를 사랑해요. 현재의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원하는 나를 상상해서 그 나를 사랑해요. 따라서 이것이 남아있는 사람은 자살하지 않습니다. 

마라톤 총 42Km인데 30Km정도 가면 굉장히 힘이 든답니다. 그런데 그곳을 넘어서면 갑자기 엔돌핀이 나와서 남은 거리는 쉽게 간답니다. 극한 상황에 이르면 그 때는 자기 힘이 아니고 초인적인 힘이 나온답니다. 왜냐? 아직 자기 사랑에 일치된 자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현재 모습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내가 있는 이 자리는 상처요 실패자입니다. 자기 상처와 실패를 사랑하는 자는 없습니다. 성공지점을 설정해 놓고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도 목표점을 생각하면 힘이 생깁니다. 자신이 원하는 그 자리, 그 인간(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것이 인간은 마귀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도록 외부에서 계속 힘을 받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없었는데 배후에서 계속 힘을 제공해 줍니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이 그런 인간이죠. 사단이 어떻게 속삭이는가 하면, ‘네가 살인을 했다고 해서 마냥 주어앉아 있으면 안 돼. 언젠가는 승리할거야.’ 이렇게 용기를 줍니다. 최초로 상처받은 사람이 가인입니다. 자신의 제사를 하나님이 거절하셨거든요. 

그럼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은 뭡니까? 가인의 제사를 가치 없게 만든 아벨이 있었지요. 만약 아벨이 없으면 가인의 가치는 생기겠지요. 그래서 사단이 가인을 덮쳐서 아벨을 죽이게 됩니다. 그리고 가인의 자손이 온 세상에 퍼졌습니다. 모든 인간은 가인의 자손입니다. 이게 창세기 4장 이야기인데,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이 나옵니다. 모두가 멸망당해야 할 자들입니다. 

그 안에는 ‘실패와 상처는 나에게 적절치 않다.’ 이유도 모른 채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는가 하면, 제자들에게 상처를 냅니다. 실패자가 되게 합니다. 문제는 상처를 낼 때 이 상처가 자신의 내부를 똑바로 보게 하는 최초의 입구가 되게 해요. 

맨날 하늘만 쳐다보다가 맨홀 뚜껑이 열려 어둠 속에 빠지게 만듭니다. 상처가 있을 때 상처가 내 마음을 쪼개는 절개 지점으로 만들어요. 내가 누구냐고 물을 때 건성으로 잘났다고 하면 안 돼요. 지난 대구 강의의 제목을 ‘시티커’로 붙였어요. 시티커의 특징은 내부는 그대로 있고 외부만 화려하게 보입니다. 

성경 얼마나 읽었고, 교회에서 어떻게 봉사했고, 언제 장로가 되었고 이런 것이 스티커인데 이건 떼면 다 떨어집니다. 속에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속이 달라지려면 하나님에 의해서 내 마음에 상처가 나서 절개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효과가 생기는가? 

인간의 마음 을 통칭해서 자아라 합니다. 이것이 상처가 생겨 찢어지면, 자아 이전은 혼돈이기 때문에 이 안은 자아가 없어요. 어둠의 충동들의 집합소. 정화조.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더러운 배설물이 모이는 곳. 이곳에서 우리는 잉태됩니다. 인간은 출생하면서 이 더러운 것들을 씻어내고 자아의 렛델을,자아의 스티커를 붙입니다. 그 자아 앞에 붙는 것이 있어요. 천상천하 유아독존. 

자아가 붙는 순간 부모도 형제도 자식도 없어요. 이제는 영원히 내가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마귀는 좋다고 박수를 치지요. 마귀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스스로 신이 되려는 마음을 인간에게 부추깁니다. 인간은 마귀를 닮아서 태어나면서부터 자기밖에 몰라요. 제 외손녀(생후 21개월 됨)를 처음 본 소감이 뭔지 말씀드릴게요. 제 아내가 한 말입니다. ‘강적이다.’ 

제 아내에게는 강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강적이 생겼습니다. 그 아이가 자기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저희들이 얼마나 깨어질지 모르겠어요. 겨우 하루 같이 지냈는데 학을 뗐습니다. 나는 지금 광주로 피신 온 기분입니다. 오늘 밤 이곳에서 자고 내일 집으로 돌아가는데 하루는 피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정화조에서 자아가 나오면서 자아의 표면은 매끈합니다. 매끈하지 않아도 매끈하게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매끈해야 타인을 대상으로 볼 수 있는 권리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매끈하다는 말은 ‘너는 너고, 나는 나다.’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이 훈련을 합니다. 죽을 때까지. 내가 매끈하면 매끈할수록 맺고 끊는 것이 성립됩니다. 

이건 엄마 꺼, 요건 내꺼. 맺고 끊는 것이 성립됩니다. 그러면 점점 타인이 분명해 지면서 나도 선명해 집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같이 살아야지 혼자 살면 안 돼요. 같이 살면서 경쟁이 있어야 남의 것과 자기의 것을 구분합니다. 자기의 것이 형성되면 남은 나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는 대상으로 관계를 맺습니다. 

인간의 소망과 사랑과 믿음은 결국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나 자신이죠. 마귀를 구체적으로 닮은 나. 요한은 이것을 ‘육’이라고 했어요. 인간은 절대 육에서 못 벗어나요. 사도의 할 일은 육의 자리에서 영의 자리로 옮기도록 하는 겁니다. 크레인이 와서 옮겨줘야 옮길 수 있습니다. 

육에서 영으로 옮길 때는 반드시 통로가 있습니다. 육과 영에는 다리가 없는데 예수님이 다리를 만들어 놓았어요.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고 죽었어요. 버림 받았잖아요. 하나님께 버림받은 분이 사흘 만에 사랑하는 분의 아들로 위상이 바뀌었어요. 그러면 옮겨 오는 다리가 있을 것 아닙니까. 

분명히 육인데 부활하신 후에는 영의 영광으로 나타났지요. 문이 닫혀 있는데 들어오시고 했잖아요. 육에서 영으로 옮겨오는 연결고리가 뭔가? 예수님이 제자들 속에 칩처럼 장착한 것이 있어요. 예수님 자신의 ‘살과 피’입니다. 제자들 속에 예수님의 살과 피를 집어넣었다는 것은 육 속에 예수님의 죽으심을 심었다고 보면 돼요. 

내가 살고자 하는 것 때문에 주님이 죽으신 것을 느낀다면 그는 성도요, 내가 죽었다면 내 안에 계신 분이 살았다는 말이기에 나에 관한 모든 일들은 사소한 것이 됩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신 것이 중요하지 내가 이사하고, 딸 결혼시키고 이런 일들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광채가 비치면 세상 모든 것은 사소한 일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늘 그렇습니까? 갑자기 “나도 저 사람처럼 돈 많이 벌어서 폼 나게 살아야지.” 그러면 나로 인하여 예수님의 십자가가 밟히고 모독 받는 거예요. 내가 세상에 신경 쓸 때 주님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돼요. 

불신자는 나와 남이 따로 있는데, 성도는 나 안에 너란 분이 오셨고, 너 속에 나가 있어서 너와 나가 하나가 되고 말았어요. 마치 부부처럼. 두 몸이 한 몸이 되었어요. 인간이 주님을 섬기면 주님은 환란과 핍박을 주시면서 “힘들지?” 라고 하시면, 성도는 “주님이 함께 계시는데 이게 뭐 힘들어요?”하면, 주님은 “요 예쁜 것.”하면서 기뻐하신단 말이죠. 

주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복음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주시지만 복음 외에는 일체 도와주지 않습니다. 인간을 존재케 하신 목적이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함이기에 우리 소원은 안 들어주십니다. 우리의 소원은 내가 신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소원을 주님은 일체 들어주지 않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해서 일하는데 왜 주님이 안 도와주십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방식이 달라서 그래요. 주님이 제자들을 육의 자리에서 영의 자리로 옮기실 때 제자들과 협의했습니까, 예수님 혼자 다 하셨습니까? 예수님 혼자 일방적으로 이끄셨죠. 

그러면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가 뭡니까? 주께서 ‘복음을 위해서’라는 목적만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제자들을 이끄셨던 그 방식대로 주님 홀로 우리의 이야기로 목적과 연결된 그 유일한 방법을 사용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세상적인 방법을 사용하기에 주님은 그 일에 도와주지 않습니다. 방법까지도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해야 그것이 주님께 영광이 되고 주님만 드러내는 일이 됩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자아가 있기 전에는 혼돈이었습니다. 범죄한 아담은 사단에게 지배를 받기 때문에 혼돈뿐입니다. 이 혼돈에서 독자적으로 빠져나오면 자아라는 이름이 붙어요. 그래서 자기 이름을 위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1번과 2번을 분간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과연 내가 1번을 따라 가는지, 2번을 따라 가는지는 사랑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랑했는데 잊어지거나 멀어진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2번이었습니다. 

그러나 잊을 수가 없다면 이건 자기뜻이 아니고 1번입니다. 

당연히 짧은 순간을 봐서는 모르고 전 일생을 봐야 압니다. 


10장 44절을 봅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했지요.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으뜸이 되고 싶은 생각에 다른 사람의 종이 되려고 노력할 거예요. 

 ‘내가 순종하고 바르게 살아야지.’ 이것은 2번입니다.

이런 차원이 아니고,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내가 어떻게 하겠다는 차원을 넘어서요. 

주께서 사도들을 이 말씀대로 이 원칙에 의해서 이끄시는 겁니다. 이게 1번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도가 하는 일을 전부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 됩니다. 


‘내가 말씀에 순종해서 바르게 살아야지.’ 이런 생각으로 44절을 보면, 내가 천국 가기 위해서 남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천국이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종이 되는 원인을 집어넣습니다. 이건 순수한 것이 아니고 노림수가 있어요. 꼼수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꼼수인줄 알면서도 우리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으뜸’이 되고 싶은 마음이 모든 인간들에게 다 있어요. 이게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네가 잔치나 회당의 상석에 앉지 말라. 만약 다른 사람이 와서 네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면 네가 얼마나 수치스럽겠느냐?’ 어떤 목사가 식사에 초대를 받았는데 이 말씀이 생각나서 말석에 앉습니다. 

이런 태도는 본인이 몸소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지요. 타인을 의식하면서. 

여기에 행동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자기지요. 내가 돋보이는 순간 예수님은 밟히게 됩니다. 

십자가가 모독 받게 됩니다. 이게 마귀 짓이에요. 

이러면 이 말씀은 어떻게 지킵니까? 

인도함을 받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지키느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미장원에 갔는데 미용사가 ‘어떤 스타일로 할까요?’ 라고 물으면, 

‘미용사께서 알아서 해 주세요.’ 이러면 됩니다. 다 맡기면 됩니다. 

이렇게 모두 주님께 맡기면 모든 것이 주님의 작품이 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나는 이렇게 살았습니다.’가 아니라 ‘주님이 날 이렇게 만들었습니다.’가 됩니다. 

그게 어딜 통해서 나온다? 절개지! 상처를 통해서 우리에게 담겨요,실패를 통해서 담겨요,

그래서 한번만이 아니고 계속해서 실패하면 실패할수록 우리는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주님의 증인입니다. 

10분 쉽시다. 

(2017. 10. 9. 09:37 녹취 마침)

 서경수 (IP:14.♡.77.172)17-10-17 09:09 
광주 강의(2017. 9. 22) 43-2 

복음을 위한 방법조차도 우리가 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아가 있고, 이 자아가 하나님의 일에 마중 나와서 자신이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아가 있기 전으로 되돌아가야 해요. 그 되돌리는 방법이 바로 주님 주시는 방법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합니까?”라고 물으면, 주님은 “누가 전한다고?”라면서 되묻고,  우리는 “제가 전하지요.”라고 답합니다. “제가 주님을 위해 목숨 바치겠습니다.”라는 말을 베드로가 했지요. 이 때 주님은 베드로가 있는 세계와 주님이 계신 세계가 달라서 올 수 없다고 하셨지요. 

그럼 일은 어디에서 해야 하는가? 베드로가 올 수 없는 세계에서 제공된 힘이 따로 있어야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베드로는 무능력자가 되는 겁니다. 앉은뱅이가 구걸하기 위해 성전 미문에 앉아 있지요. 그런데 베드로가 성전으로 올라가다가 만났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앉은뱅이에 대해 무능력자입니다. 

무능력자이기 때문에 주의 일에 목격자가 돼요.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네가 원하는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했지요. 주님이 동행하신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분과 보이는 내가 같이 있지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베드로와 앉은뱅이를 봅니다. 그럼 나는 ‘아니오’라고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그럼 내가 ‘아니오’라고 하면 주께서 일하십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일을 벌이게 되면 자동적으로 ‘아니오’라는 방식으로 주를 증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현장에 주님이 할 일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당신이 요구하는 은과 금은 없지만 예수의 이름이 당신을 일으킬 것입니다. 우리는 비켜나 있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베드로와 요한의 이런 태도가 마가복음 10장에 의하면 종이 되는 겁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종이 되는 현장에서 으뜸이 된 것입니다. 으뜸이 되고 종이 되고 할 원인과 결과는 일이 벌어질 때 같이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 받은 후에 자신들이 할 일이 없어요. 그러니까 인도함을 받는 거예요. 

주님께 인도 받는 자는, 인도받는 그 순간 소급해서 ‘내가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겠다.’는 생각마저 이것은 내 뜻이 아니었고 주께서 인도하는 작업 중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제 일어난 일도 주님께 인도를 받아서 ‘어제는 그 일이 일어나야만 했다’는 것을 소급해서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겁니다. 완전히 땡잡은 거지요. 

10년간 쉬지 않고 복권을 샀는데 한 번도 당첨된 적이 없는데 오늘 산 복권이 10억 당첨되었다면,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10년간 투자한 것으로 새롭게 의미가 부가됩니다. 미래에 확정된 것으로부터 자기의 과거가 새롭게 깔리는 겁니다. 과거를 새로 포장합니다. 어떤 포장인가? 이미 구원 받았다는 증거들의 타일로 이어집니다. 

정리해 보시다. 1번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2번이 있고 난 뒤에 1번이 나옵니다. 그래야 이방인과 이스라엘이 분류가 됩니다. 1번은 이스라엘이에요. 확정된 이스라엘이죠. 더 이상 나눠지지 않아요. 그럼 우리는 1번에서 출발하면 안 됩니다. 나 자신은 2번입니다. 

나는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출생하는 순간부터 2번입니다. 2번이 되면 어떤 사태가 일어나는가? 인간이 피폐해 집니다. 선과 악 사이에 살면 영혼이 피폐해집니다. 왜냐? 갈수록 점점 예민해지기 때문이죠. 선과 악의 경계선을 나중에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아야 할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내가 어떤 판정을 내릴 때는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기준이 먼저 있고 그 후에 판정을 내립니다. ‘누구든지 내 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딸을 시집보내겠는데 개를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절대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개를 싫어하기 때문에 판단 기준에서 ‘개를 좋아하는 사람은 싫다’는 것이 일방적으로 성립되지요.  

인간이 ‘바르게 한다. 착하게 산다. 성실하게 산다.’ 이것이 순수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자기가 되기 위한 조건들입니다. 내가 개를 싫어하면 개 좋아하는 사람은 내 평가에서는 감점의 요소가 됩니다. 그리고 본인이 담배를 안 피우면 ‘나는 담배 피우는 사람이 싫어.’라는 말이 서슴없이 나옵니다. 

자신이 담배를 안 피우니까 담배 냄새를 굉장히 싫어합니다. 그런 자신은 깨끗하고 담배 피우는 사람은 더럽다고 규정합니다. 이유가 굉장히 많습니다. 니코틴이 몸에 들어가면 폐와 내장이 더러워지고 등등. 담배 안 피워서 자신은 깨끗하다고 하는 사람이 외출하고 집에 들어와서 손발을 씻지도 않고 그냥 잠자리에 듭니다. 그래도 자신은 담배를 안 피우기 때문에 깨끗하다고 우깁니다. 

인간은 변합니다. 예전에 자신이 좋아했던 것이 나이가 들면 별로 좋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반대로 예전에는 싫었는데 나이가 들어서 좋아지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자인지 혼돈스럽습니다. 그러면서도 계속 옳고 그름을 판정합니다. 사람들이 왜 타인을 평가하는가 하면 혼란한 자신을 안정시키기 위함입니다. 

아침에 지인에게 전화를 했는데, 꼭 필요한 말만 하면 되는데 쓸데없는 말을 덧붙여서 그 사람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온갖 염려를 다 하면서 점점 피폐해져 갑니다. 그런 마음으로 성경공부를 한다면 성경공부가 율법적으로 내 마음에 들어옵니다. 율법 조항이 들어올 때 지키는 기준까지 들어와요.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기는 것이다.’ 

그럼 이 피폐된 나를 어떻게 할 것인가? 걱정할 것 없습니다. 2번이 있다는 말은 1번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이야기했지요. 상처입고 실패자가 되는 겁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되었지요. 제자들이 갔던 그 길이 오늘날 성도들에게 그대로 되풀이해서 주어집니다. 

그럼 성도 아닌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자기 위신과 체면을 위해서 평생을 살아가지요. 그렇다면 이들은 상처가 없는가? 있어요. 하지만 앞으로 더 착하게 살면 상처는 보상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계산 장부가 있는데, 죄도 짓고, 선도 행할 때가 있는데 결국 이익을 남기면 장사 잘 한 것이 됩니다. 인간들은 이런 행함의 장부가 있어요. 선악과 따먹고 사단으로부터 선과 악을 저울질 하는 것을 배웠기에 늘 이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떤가? 로마서 3장 5절에 보면 ‘인간의 불의함이 하나님의 의로움을 손상시킬 수 있는가?’라고 질문을 해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불의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의로움이 취소되거나 소멸될 수 있는지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물었어요. 묻는다는 말은 정답이 뻔하다는 거예요. 

우리의 불의함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손상됩니까? 손상되지 않아요. 바울은 여기에서 더 나갑니다. ‘하나님의 의가 인간에 의해 절대 손상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너희들은 율법에 의해서 불의해야 된다.’는 거예요.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논리를 로마서에서 펼칩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잖아요. 하늘에 별이 떠 있는데 지상에 있는 인간이 하늘을 쳐다보면서 “별아 사라져라.”고 말하면 별이 소멸됩니까? 아니지요. 하나님의 의는 별처럼 우리에게 통보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등장했어요. 로마서 1장에서는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약속하신 것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바울은 나타난 것을 ‘나타났다’고 이야기할 뿐입니다. 마치 동방박사처럼. 동방박사는 별을 따라 예루살렘까지 왔지요. 별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어요. 박사들은 별이 인도하는 대로 움직였어요. 이것이 1번입니다. 그런데 어떤 인간도 항상 1번부터 갈 수가 없어요. 그것은 예수님 몫이니까. 

인간들은 2번으로 살아요.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1번을 가지고 오시니까 성령 받은 성도는 1번 입장에서 2번 세계 속에서 살아가요. 그러면 우리가 불의하다는 사실을 체험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불의함 중에 가장 불의한 것이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의 요소입니다. 

그것이 뭔가 하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나의 행함을 총동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요소들이 성도에게도 있어요. 그러나 성도는 압니다. 이것이 바로 최고의 사단적인 요소란 사실을. 사단으로부터 벗어나고 난 후에 본격적으로 사단이 이끄는 대로 우리를 맡기는 거예요. 제가 지금 굉장히 위험한 발언을 했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인간은 사단의 자궁 속에 들어 있고 사단이 엄마라면, 주님은 아빠입니다. 주님께서 사단으로 하여금 지금도 활동하게 해서 우리가 마음껏 불의를 체험토록 하십니다. 여기에 적당한 노래가 있어요. 윤종신이 작사했는데, 제목이 ‘팥빙수’입니다. 들어봤어요? 

팥 넣고 푹 끓인다 설탕은 은근한 불 서서히 졸인다 졸인다 
빙수용 위생 얼음 냉동실 안에 꽁꽁 단단히 얼린다 얼린다 
프루츠 칵테일의 국물은 따라 내고 과일만 건진다 건진다 
체리는 꼭지체리 체리는 꼭지체리 깨끗이 씻는다 씻는다 
팥빙수 팥빙수 난 좋아 열라 좋아 
팥빙수 팥빙수 여름엔 왔다야 
빙수기 얼음 넣고 밑에는 예쁜 그릇 얼음이 갈린다 갈린다 
얼음에 팥 얹히고 프루츠 칵테일에 체리로 장식해 장식해 
팥빙수 팥빙수 난 좋아 열라 좋아 
팥빙수 팥빙수 여름엔 이게 왔다야 
주의사항 팥 조릴 때 설탕은 충분히 
찰떡 젤리 크림 연유 빠지면 섭섭해 
빙수기 얼음 넣고 밑에는 예쁜 그릇 얼음이 갈린다 갈린다 
얼음에 팥 얹히고 프루츠 칵테일에 체리로 장식해 장식해 
팥빙수 팥빙수 난 좋아 열라 좋아 
팥빙수 팥빙수 여름엔 이게 왔다야 
빙수야 팥빙수야 싸랑해 싸랑해 
빙수야 팥빙수야 녹지마 녹지마 
야! 빙수야 팥빙수야 싸랑해 싸랑해 
빙수야 팥빙수야 녹지마 녹지마 
나나나 나나나 
빙수야 팥빙수야 싸랑해 싸랑해 
빙수야 팥빙수야 녹지마 녹지마 
야! 빙수야 팥빙수야 싸랑해 싸랑해 
빙수야 팥빙수야 녹지마 녹지마 
나나나 나나나 
빙수야 팥빙수야 싸랑해 싸랑해 
빙수야 팥빙수야 녹지마 녹지마 

마귀 체험을 하는 거예요. ‘아, 사단이 모든 인간을 이렇게 피폐케 했구나. 아무것도 아닌 일에 목숨 걸게 만들고, 사는 것이 괴로워서 인터넷으로 모의해서 만나 번개탄 피워놓고 자살하게 만드는 이것이 사단의 장난이구나.’ 인간을 힘들게 하고, 근심하고, 불안에 떨고, 죽게 만들고 이 모든 일들이 종합해보면, 주어진 자아가 감당이 안 돼요.  

자아가 주어지면 자아의 위신과 체면이 덩달아 주어지니까 사소한 행동을 해도 남을 의식하게 되니까 힘들고 어려워요. 조직사회에서 상관이 지시를 내리면 눈물이 핑 돌아요. 왜냐하면 ‘내가 이런 소리까지 감수해야 되고 이런 일까지 해야 하는가?’라는 것 때문에 자괴감이 들지요. ‘내가 이런 일을 하려고 대학까지 공부하고 회사에 취직을 했나?’ 이런 탄식이 나옵니다. 

당장 사표를 던지고 싶은 생각이 한 두 번이 아닌데 가족들 먹여 살려야 하니 사표를 낼 수도 없어요. 그러면서 회사를 욕하고 상관을 욕하지요. 왜 욕을 합니까? 자꾸 나를 괴롭히니까. 내가 괴롭다는 것은 아직도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1번이 아니고 2번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우리가 고통스럽고 힘들고 어려운 나날을 보내지만 이 모든 일은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은혜의 내용은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가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상도 못하고 우리 머리에는 존재하지 않는 천국이 성령이 임하니 보게 됩니다. 이 말을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합니다. 

그들이 성령 받았을 때 비로소 이 말씀이 깨달아 집니다. 우리에게 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마귀 체험 하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말씀입니다. 45절을 봅시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44절 말씀은 우리에게 행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45절 말씀,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나와 함께 있음을 증거하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왜냐? 성령 받은 사도는 상석에 앉아서 ‘나를 섬기라’ 할지라도 그것은 종의 고백입니다. 2번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으뜸의 자리에 앉아서 잘 난 척하고 있는데’ 이렇게 보이지요.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는 그 모습이 바로 종의 모습입니다.  

A집사님이 오늘 저녁 샤브샤브를 사줬어요. 집사님이 차로 식당까지 태우고 가서 B집사님과 제가 맛있게 먹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B집사님이 식당 입구에 내리면서 “오늘 A집사님이 맛있는 저녁을 사주시네. 고마워요.”라고 했어요. 그 때는 아직 A집사님이 밥값 낸다고 말하기 전인데. 

B집사님의 이런 모습이 바로 섬기는 자세입니다. 사랑을 받아주는 것이 섬기는 겁니다. 성령 받은 자의 특징은 항상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가 나옵니다. 사단에 사로잡힌 사람은 염려하고, 불평하고, 남을 원망합니다. 

성도들끼리는 체면, 위신, 자존심 이런 것은 버려야 합니다. 2번은 지옥 갑니다. 그런데 1번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2번 된 사람이 굉장히 많아요. 십자가 마을에도 많아요. 이런 분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막 살아라.’고 하니까 ‘영혼이 피폐해 진다’고 합니다. 이 말은 곧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주신 이유가 내가 지키라고 준 말씀이니까 지켜야지.’ 옳은 말입니다. 성경은 지키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말씀 앞에서 내가 얼마나 마귀 짓을 하고 있는지, 이미 구원 받은 입장에서 소급해서 육적인 내 모습을 보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백을 한 번만 하는 것이 아니고 늘 하게 됩니다. 왜냐? 성경 말씀은 누구도 순종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모든 행동에서 ‘나’가 나오게 되어 있고, 내가 말씀을 지키면 내가 기준이 되고 나와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합니다. 만약 길에서 돈을 100만원 주워 파출소에 갖다 줘서 주인을 찾아줬다면, 돈을 잃게 한 분이 주님이고, 돈을 습득하게 한 분도 주님입니다. 파출소에 갖다 주게 한 분도 주님입니다. 

주님이 인도하실 때 나는 기능으로 그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선한 시민이라고 상을 받았어요. 그러면 갑자기 기능이 존재가 됩니다. 존재가 되면 여기서 기준이 나옵니다. ‘나처럼 돈 습득하고 파출소에 갖다 주지 않은 사람은 죄인이다.’ 이렇게 나옵니다. 이처럼 기능이 수시로 존재로 바뀝니다. 

존재를 다시 주님의 기능으로 바꾸는 것은 성령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꾸는 것은 존재를 분해하는 것입니다. 사모님도 이런 경험 많이 하셨지요? ‘이 아이들은 내가 키운 것이 아니고 주님이 키웠잖아요. 주님께 다 맡깁니다.’ 흔히 믿는 사람들이 무책임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믿음 있는 척 포장을 해서 주님께 다 미뤄요. 

딸은 어려운 임용고시에 합격했고, 염려했던 아들도 무사히 대학 졸업하고 군 복무도 좋은 곳에 배치되어 잘 하고 있고, 온 집안이 평안하니까 갑자기 ‘저 예쁜 자식은 내 자식이다.’ 이렇게 돼요. 내 위신과 체면을 세워줄 소품으로 자식들이 편입되고 말았어요.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계속 가겠는데 성령이 임한 사람은 이런 내가 해체됩니다. 

나의 체면을 세워주던 딸이 결혼하겠다고 남자를 데려왔는데 몸에 담배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저 아이가 또 나를 실망시키는구나.” 자식이 실망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원래의 상태로 되돌려 놓은 거예요. 기능으로. 잠시 착각에 빠졌다가(존재로 머물려고 하다가) 원래의 모습(기능)으로 돌아오니까 어지럽고 혼란이 생깁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해놓고는 존재로 굳히다가 다시 실망스런 일이 생기니까 이 때 존재의 상처와 실패를 맛봅니다. ‘이런 인생은 내가 원한 것이 아닌데 왜 일어났지?’ 불평하고 원망하지만 그 절개지를 살펴보면 ‘내가 어떤 자리에서 구원되었는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일관성 있는 법칙이 있어요. 막 사는 겁니다. 왜냐? 인도함을 받는데 있어서 일관성을 가지면 나는 기능에서 존재로 바뀝니다. 나는 길에서 돈을 주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것이 기준이 되면 내 조건에 맞지 않는 사람은 내가 심판하고 판단해 버립니다. ‘나처럼 되지 않으면 지옥 가!’ 이렇게 된다니까요. 

천국과 지옥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자는 구원 받아요. 로마서 1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교회에 편지할 때에 이방인과 성도를 자신이 구분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자’는 성도이고 아니면 이방인입니다. 

바울이 성도와 성도 아닌 자를 자기가 구분하지 않아요. 구분하면 존재가 됩니다. 예를 들면, ‘이 사람은 옛날에 십자가 마을에서 봉사를 했습니다.’라고 하면, ‘구원 받은 사람이네요.’라고 하지 않지요. 옛날에 봉사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어떤 존재냐가 아닙니다. 지금 어떤 기능을 발산하고 있느냐가 중요하지요. 

“나는 죄인입니다. 지금도 막 살고 있습니다.” 이게 왜 받아들이기 힘든 말입니까? 대전에서 강의 듣는 어떤 성도님은 제 강의 중에서 ‘막 살아라.’는 말이 제일 마음에 든답니다. 이분은 고신측 계열에 계셨던 분입니다. 그쪽 주장은 ‘성령 받았으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열심히 말씀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영혼이 피폐해졌겠어요. 자기의 건사함을 자신이 관리하기 위해서 돋보기로 자신을 들여다보고 그리고 남을 들어다보겠지요. 그런데 이 성도는 ‘막 살아라.’는 말을 듣고 옳은 말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왜냐?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이 ‘막 살아라.’는 말을 듣고 ‘그렇게 하면 영혼이 피폐해진다.’고 하는 이유는 자기가 막 살면 점점 자신이 깨져버려요. 

‘막 살아라.’는 말을 듣고 화를 낸다는 자체가 그 사람은 지금 2번에 속해 있음을 자인함 셈이 됩니다. 그런데 1번에 속한 사람은 일관성이 없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지요. 제가 지난주일 그런 설교를 했어요. 상사가 부하 직원에서 “해 주세요.”라고 하니까 “아니요.”라고 했어요. 지시가 오면 “예” 또는 “아니요.”를 해야 하잖아요. “아니요.”라고 하는 순간 없어야 될 내가 “아니요.”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예”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예’를 했으니까 보상해 주세요.”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이 마귀를 보내주신 것을 감사해야 돼요. 마귀를 보내주셨기에 우리가 결코 그리스도가 아님이 확실해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만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로 그리스도에게 합세한 거예요. 

1번은 일관된 원칙이 있어요. 매일 성경 3장 읽고, 기도 30분 하고 이런 것이 있어요. 각자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어요. 그리고 규칙들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이미 구원 받은 자로 불신자의 체험을 하고 있는 겁니다. 불신자에게는 신자들이 얌체입니다. 

공무원 및 각종 시험 준비를 위해 노량진에 상주하는 사람이 5만, 다른 곳에서 노량진 학원으로 오가는 사람이 50만 정도 된답니다. 강의실에는 각 지역에서 모인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강의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데 이 사람은 지난 7급 공무원 시험에서 수석 합격한 사람입니다. 그럼 이 사람은 얌체겠지요. 이미 시험에 합격했는데 왜 그 자리에 앉아 있습니까? 

이런 얌체 짓을 주님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속아 넘어간 거예요. 예수님도 자신들처럼 구원 받으려고 애쓰는 자 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의 체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속이고 하나님은 인간을 속이고. 

그 속임에 속아 넘어가야 구원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평소에 늘 나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발각당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 언약의 효과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일관된 원칙은 없습니다. 법칙 세우지 마세요. 법칙을 세우면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45절을 봅시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기에서 질문합니다. ‘일부 지역의 특성이 구원을 방해합니까?’ 대구에 살았기 때문에 구원 받고, 북한에 살았기 때문에 구원 못 받는 일이 일어날까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실 때는 모든 생명을 구원하기 위함입니까, 택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함입니까? 둘 다 맞습니다. 

왜냐하면, 예시적으로 ‘이런 사람은 구원 받습니다.’라고 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구원 받을 필요는 없어요. 공무원 학원에서 ‘이번에 우리 학원 출신이 수석 합격했습니다.’라고 해서 그 학원 출신은 모두 수석 합격한다는 의미가 아니고 예시를 한 거예요. 예수님은 누구를 예시했습니까? 본인만 예시했어요.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구원 받을 사람이 없다는 식으로 예시한 거예요. 

‘나처럼 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못 간다.’를 예시했기 때문에 그 예시 앞에서 어느 누구도 구원 받으려 하는 손을 내려야지요. 45절에서 “인자의 온 것은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했는데, 여기서 구원 받을 자가 ‘나’라고 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능이 와 닿으면 마가복음 10장 45절의 기능이 들어 있지요. 

그러면 구원 문제가 나의 문제입니까, 주님의 숙제입니까? 주님의 숙제지요. 그렇다면 내 구원에 대해 내가 걱정해야 됩니까? 아니죠. 주님의 문제이기에 우리와 의논하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주님 혼자 모든 것을 다 하십니다. 출장 뷔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조리기구, 음식 재료, 그릇 전부 알아서 다 해줍니다. 

음식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지 간섭할 필요 없습니다. 출장 뷔페에서 다 알아서 합니다. 그것이 믿어진다면 우리는 주님의 작업자가 됩니다. 이게 1번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작업자가 되면 2번으로 가지 말고 곧바로 1번으로 가고 싶지요? 아닙니다. 2번을 거쳐 1번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대속물이 의미를 갖게 돼요. 

대속물은 구제불능의 인간을 위해서 대속물이 있는 겁니다. 대속물이 되려면 형편없는 인간의 역할을 해줘야 됩니다. 그 기능은 성도가 오늘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형편없는 짓들을 해줘야 합니다. ‘바르게 살자. 정결하자 살자.’ 이러면 안 돼요. 대속물이 대속물답게 되려면 더러운 존재인 것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럼 어떤 것이 대속물다운 더러운 짓인가? 더러운 짓은 제자들이 했던 짓입니다. 해답은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주를 위해서 목숨 바치겠습니다.” 이런 소리 하면서 사는 것. 우리는 이런 더러운 짓을 하려면 아직 멀었어요.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려는 더러운 짓의 수준으로 가려면 아직 멀었어요. 

주님을 위해 자식을 버리고 부모를 버리고 직업을 버리는 일. 이게 바로 더러운 짓입니다. 도마의 더러운 짓은 ‘내가 보지 않고는 못 믿겠습니다.’ 이런 것이 있지요. 우리는 이런 정도까지는 가지 않겠다고 하는 분이 있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보지 않고는 안 믿겠다.’ 이것은 말로 할 필요 없어요. 우리는 눈만 떴다하면 이런 짓을 합니다. 

아들이 성적표를 가져왔습니다. “엄마, 나는 열심히 공부했어요.” 말은 필요 없어요. 성적표를 보지 않고는 아들의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했다고 해도 성적표가 엉망이면 공부 안 한 것입니다. “다음 성적표에서는 평균 85점으로 올려.” 눈으로 보지 않고는 못 믿는 거예요. 

우리의 모든 짓거리는 보는 순간 감정이 흔들립니다. 내 기분을 흔들어놔요. 눈으로 보는 것 때문에. 왜 우리들은 눈에 보이는 사소한 일에 화를 내고 염려하고 혼란이 오고 이런 겁니까? 죽음을 통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패의 결과인 죽음을 통과하고 있는 중입니다. 

김 집사님이 제게 한 말이 “나는 이제 터널을 빠져나왔습니다.”라고 했어요. 지금껏 어두운 터널을 걸어왔는데 이제는 터널을 빠져나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박하사탕입니다.”라고 했어요. 영화 보셨지요. 설경구가 마지막에 “나 돌아갈래!”하고 외치는 장면이 압권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죽음의 터널 속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웃으며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 다른 사람들은 천국에 가려고 시험을 치고 있는데 우리는 이미 합격 통지서를 받았기에, 남들 천국 가려고 안간힘을 써는 장면을 보면서 “그건 시험에 안 나온다.”라고 약 올리면서 여유를 즐기는 겁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고 했지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남들 앞에 기죽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살았습니까. 주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얼마나 헛짓을 했습니까. 감사한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열심히 하면 주께서 보상해 주실 것이란 생각 때문에 힘들어하면서 열심히 했습니다. 다 헛된 짓이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이끌림을 받으며 자유를 누리는 기쁨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7. 10. 17. 08:35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