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7. 9. 22) 43-1
마가복음 10장 42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이렇게 되어 있지요.
하나님은 사람을 두 종류로 보십니다. 이방인과 유대인. 이방인은 언약이 없는 사람들이고 유대인은 언약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럼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이방인들이 언약을 요청하면 유대인이 될 수 있지 않습니까?’ 이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인간이 언약을 부르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자기 백성을 만듭니다.
언약에 대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하나님이 언약으로 만들어내는 사람은 이스라엘이고, 그 외에는 이방인입니다. 따라서 이방인이냐 이스라엘이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이스라엘은 좋겠다. 언약을 받았으니 구원 받겠네.’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것 또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언약은 그때그때 새로운 결과물을 만듭니다. 만약 언약이 이스라엘에게 왔다면 그 이스라엘 중에 또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나눠져요. 여기 이스라엘에 또 언약이 추가되면 이스라엘 내부가 이스라엘과 이방인으로 분류가 됩니다.
예를 들어, 선을 보는데 ‘상대가 나와 궁합이 잘 맞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웨이터가 주문을 받는데 나는 커피를 상대는 녹차를 주문했어요. 서로 안 맞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과 선을 봤는데 그 때는 둘 다 커피를 시켰어요. ‘아 이 사람과는 잘 맞구나.’ 생각했는데 그 다음에 새로운 주문이 들어옵니다. ‘어떤 커피를 드릴까요?’ 나는 카푸치노를 시켰고 상대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어요. ‘아 또 다르네.’
언약이 추가되면서 구원 받는 사람이라고 여겼던 그 내부가 조각이 납니다. 누구든지 언약이 주어지면 ‘저는 믿습니다.’라고 해서 다 구원 받고 싶어요. 문제는 내가 구원 받고 싶은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시는 그 다음 언약이 나로 하여금 어떤 위치로 보내시는가가 중요합니다. 주도권이 언약에 있어요.
그러면 언약의 끝이 궁금하지요? 언약의 끝은 어떤 것에도 영향 받지 않는 빈 공간을 발생시킵니다. 제 양말에 구멍이 났어요. 아침에 신을 때는 괜찮았는데 이제 보니까 구멍이 있어요. 신제품은 멀쩡한데 자꾸 신으면 낡아서 구멍이 생깁니다. 이 구멍은 어떻게 해서 생긴 거예요? 신다보면 생깁니다.
언약이 인간에게 찾아오면 구멍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 구멍은 기존의 인간들은 이 구멍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왜냐? 구멍이 생기면서 원래의 자리는 구멍에게 내어주고 구멍이 차지했던 자리는 주변으로 밀려가게 됩니다. 밀려가는 것이 세상 권세, 어둠의 권세지요. 그래서 어둠의 권세가 관여할 수 없는 빈 구멍이 발생하고 그 구멍에서 언약이 완성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불 속에 들어가는 것이 그들의 소원입니까? 아니죠. 그들도 나름대로 바라는 것이 있었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이 이들에게 임하니까 그들의 바람은 다 밀려나고 본인들이 예상치도 못한 구멍으로 들어오고 말았어요. 그 구멍은 원래 없던 것인데 갑자기 생겨난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사람 죽이는 것이 취미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다니엘의 세 친구를 불 속에 집어넣었습니까? 화가 났기 때문입니다. 마치 출애굽 때에 바로 왕이 못된 사람이 아닌데 모세가 약을 올리니까 바로의 마음이 강퍅해졌지요. 그래서 과도한 행정 조치를 내립니다. 이것을 누가 유발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유발한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 임하면 그 사람에게 구멍이 생기고, 그 구멍은 기존의 권세자들이 어찌할 수 없는 도피성이 됩니다. 여기에 들어간 사람은 세상의 어떤 환란, 기근, 핍박이 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거지요. 이것이 미리 본 천국입니다. 천국 생활을 미리 해야 합니다.
언약이 오면 구멍이 생기고(이 구멍은 성령입니다), 이 구멍에 든 사람은 천국 생활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북한의 핵문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도 구멍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는 밖에서 예쁜 것만 보면 자기 집으로 가져가요.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플라스틱 통을 버렸는데 그 통이 예뻐서 그것을 주어갑니다. 그러면 집에는 온갖 쓰레기들이 쌓이게 됩니다.
자식들이 집에 오면 쓰레기를 치울 생각을 먼저 합니다. 그런데 이 집에 천사가 왔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천사의 광채가 집안을 가득 메우니까 쓰레기에는 관심도 없어요. 쓰레기가 있어도 거기에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양 치는 목동이 들판에 있을 때 천사가 와서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면서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했을 때 목자가 양들에게 신경을 쓸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동안 심각하고 중요하게 여겼던 문제도 복음의 광채가 비치게 되면 사소하고 별 볼일 없는 문제가 됩니다. 이 광채가 아까 이야기한 구멍입니다. 세상 권세에 눌린 사람들은 모든 일이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인생을 오래 살아도 요령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의 광채가 비치면 다 끝나는 문제입니다. 이 복음의 광채를 누가 막습니까? 이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방해하지요. 광채만 보면 세상 일은 문제가 되지 않는데 광채를 보지 못하면 세상 일이 심각하게 느껴집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사단의 역할이 그리스도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하는 일입니다. 북한의 핵문제, 자식의 취직 걱정, 비가 내리지 않아서 곡식이 말라죽는 등등의 일을 사단이 일으켜서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기도를 해도 ‘핵문제 해결해 주시고, 자식 취직되게 하시고, 비를 내려 주시고 --’ 이런 쓰레기들을 요청하겠지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닌데 복음의 광채가 가려지는 순간 아주 심각한 문제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1) 주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사는 자. 2) 선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자.
주님이 인도하시면 목적이 있어요. ‘복음만 알면 돼.’라는 겁니다.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보다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했지요. 그러면 성도는 생명책을 증거하겠지요. 1번은 성령 세례 받은 사람이고, 성령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은 그 대안으로 2번이 될 수밖에 없어요.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선하고 바르게 살면 보상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을 해서 그렇게 살려 합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의 인생책을 쓰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합니다. 성령 세례 안 받은 사람은 교회에 와도 1번, 주께서 인도하시는 것이 없기 때문에 2번이 해답입니다. 2번은 구원이 아닙니다.
자기 양말에 구멍이 생기지 않도록 해서 자기 인생을 자랑합니다. 자기 인생을 증거하는 거지요. 이 세상 신은 인간을 이쪽으로 몰아갑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한 자는 자기 인생책을 쓸 필요가 없어요.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생명책이 아닌 다른 책도 있어요. 다른 책은 행위의 책이지요. 책은 이 두 권이 전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분류하시는가? 이스라엘과 이방인으로 분류합니다. 제 3지역은 없어요. 왜냐?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지난 대구강의에서 지혜로운 다섯 처녀를 잠시 언급했습니다. 어리석은 처녀는 신랑을 본인이 결정합니다. 본인이 알고 있는 조건을 신랑에게 대입시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신랑이 제기한 조건을 갖춘 자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따로 조건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기름 준비하는 것은 신랑의 요구사항입니다. 바르고 착하게 살면 구원 받는다고요? 이런 말은 많이 유포되면 유포될수록 주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더욱 귀해집니다.
문제인 정권에서 자사고(자립형 사립 고등학교)를 없앤다고 합니다. 이것 없애면 안 됩니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공부해야 합니다. 그곳에 가서 자부심을 갖도록 해줘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부하는 재미가 없어집니다. 일류대학교가 왜 있습니까? 있어야 열심히 노력할 동기가 생깁니다. 선악과 따먹은 인간이기에.
그런데 인간의 능력으로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주께서 열어주셔야 갈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있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오셔서 없던 공간을 언약으로 새롭게 만드십니다.
주님이 인도하시면 특별반이 됩니다. 어느 정도 특별반인지 구원 받은 본인도 예상 못합니다. 이 정도까지 특별한 존재인지 상상도 못했어요. 처음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 남들보다 더 훌륭한 인간이 되었다고 여겼어요. 남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인줄 모르는데 자신들은 알고, 남들은 선한 일을 많이 못하는데 자신들은 많이 하는 정도로 차이가 있는 줄 알았어요. 같은 사람이지만 자신들은 보통 사람들보다는 수준이 높은 자 인줄 알았어요.
그러나 주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구원하신 것은 인간들은 상상도 못한 낯선 세계로 초청하신 것입니다. 이 세계는 십자가 복음 중심이기 때문에 주님이 이들을 도와주는 경우는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할 때는 기뻐하시고 도와주십니다. 그런데 남보다 뛰어난 인간이 되기 위해 움직이면 주님은 절대 도와주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처음 출발할 때는 빈공간은 없어요. 제자들도 처음에는 선하고 바르게 살면 선하신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라고 여겼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지요. 부름 받은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기에 다른 사람들 보다는 좀 더 나은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을 실패자로 만들었습니다.
실패자가 되면 상처를 받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만 실패했습니까? 다 실패했지요. 가룟 유다는 결국 자살했습니다. 성공했다고 자살하는 사람 봤습니까? 없지요. 자살하는 이유는 내가 사랑할 대상이 없을 때, 내가 지킬 것이 없을 때 자살을 합니다.
내가 지킬 것, 내가 사랑할만한 것은 어디에서 가져오는가? 본인이 만들어요. 인간은 자기를 사랑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기가 되고 싶은 자기를 사랑해요. 현재의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원하는 나를 상상해서 그 나를 사랑해요. 따라서 이것이 남아있는 사람은 자살하지 않습니다.
마라톤 총 42Km인데 30Km정도 가면 굉장히 힘이 든답니다. 그런데 그곳을 넘어서면 갑자기 엔돌핀이 나와서 남은 거리는 쉽게 간답니다. 극한 상황에 이르면 그 때는 자기 힘이 아니고 초인적인 힘이 나온답니다. 왜냐? 아직 자기 사랑에 일치된 자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현재 모습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내가 있는 이 자리는 상처요 실패자입니다. 자기 상처와 실패를 사랑하는 자는 없습니다. 성공지점을 설정해 놓고 그곳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도 목표점을 생각하면 힘이 생깁니다. 자신이 원하는 그 자리, 그 인간(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것이 인간은 마귀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도록 외부에서 계속 힘을 받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없었는데 배후에서 계속 힘을 제공해 줍니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이 그런 인간이죠. 사단이 어떻게 속삭이는가 하면, ‘네가 살인을 했다고 해서 마냥 주어앉아 있으면 안 돼. 언젠가는 승리할거야.’ 이렇게 용기를 줍니다. 최초로 상처받은 사람이 가인입니다. 자신의 제사를 하나님이 거절하셨거든요.
그럼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은 뭡니까? 가인의 제사를 가치 없게 만든 아벨이 있었지요. 만약 아벨이 없으면 가인의 가치는 생기겠지요. 그래서 사단이 가인을 덮쳐서 아벨을 죽이게 됩니다. 그리고 가인의 자손이 온 세상에 퍼졌습니다. 모든 인간은 가인의 자손입니다. 이게 창세기 4장 이야기인데, 창세기 6장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이 나옵니다. 모두가 멸망당해야 할 자들입니다.
그 안에는 ‘실패와 상처는 나에게 적절치 않다.’ 이유도 모른 채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는가 하면, 제자들에게 상처를 냅니다. 실패자가 되게 합니다. 문제는 상처를 낼 때 이 상처가 자신의 내부를 똑바로 보게 하는 최초의 입구가 되게 해요.
맨날 하늘만 쳐다보다가 맨홀 뚜껑이 열려 어둠 속에 빠지게 만듭니다. 상처가 있을 때 상처가 내 마음을 쪼개는 절개 지점으로 만들어요. 내가 누구냐고 물을 때 건성으로 잘났다고 하면 안 돼요. 지난 대구 강의의 제목을 ‘시티커’로 붙였어요. 시티커의 특징은 내부는 그대로 있고 외부만 화려하게 보입니다.
성경 얼마나 읽었고, 교회에서 어떻게 봉사했고, 언제 장로가 되었고 이런 것이 스티커인데 이건 떼면 다 떨어집니다. 속에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속이 달라지려면 하나님에 의해서 내 마음에 상처가 나서 절개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효과가 생기는가?
인간의 마음 을 통칭해서 자아라 합니다. 이것이 상처가 생겨 찢어지면, 자아 이전은 혼돈이기 때문에 이 안은 자아가 없어요. 어둠의 충동들의 집합소. 정화조.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더러운 배설물이 모이는 곳. 이곳에서 우리는 잉태됩니다. 인간은 출생하면서 이 더러운 것들을 씻어내고 자아의 렛델을,자아의 스티커를 붙입니다. 그 자아 앞에 붙는 것이 있어요. 천상천하 유아독존.
자아가 붙는 순간 부모도 형제도 자식도 없어요. 이제는 영원히 내가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마귀는 좋다고 박수를 치지요. 마귀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스스로 신이 되려는 마음을 인간에게 부추깁니다. 인간은 마귀를 닮아서 태어나면서부터 자기밖에 몰라요. 제 외손녀(생후 21개월 됨)를 처음 본 소감이 뭔지 말씀드릴게요. 제 아내가 한 말입니다. ‘강적이다.’
제 아내에게는 강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강적이 생겼습니다. 그 아이가 자기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저희들이 얼마나 깨어질지 모르겠어요. 겨우 하루 같이 지냈는데 학을 뗐습니다. 나는 지금 광주로 피신 온 기분입니다. 오늘 밤 이곳에서 자고 내일 집으로 돌아가는데 하루는 피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정화조에서 자아가 나오면서 자아의 표면은 매끈합니다. 매끈하지 않아도 매끈하게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매끈해야 타인을 대상으로 볼 수 있는 권리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매끈하다는 말은 ‘너는 너고, 나는 나다.’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이 훈련을 합니다. 죽을 때까지. 내가 매끈하면 매끈할수록 맺고 끊는 것이 성립됩니다.
이건 엄마 꺼, 요건 내꺼. 맺고 끊는 것이 성립됩니다. 그러면 점점 타인이 분명해 지면서 나도 선명해 집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같이 살아야지 혼자 살면 안 돼요. 같이 살면서 경쟁이 있어야 남의 것과 자기의 것을 구분합니다. 자기의 것이 형성되면 남은 나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는 대상으로 관계를 맺습니다.
인간의 소망과 사랑과 믿음은 결국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나 자신이죠. 마귀를 구체적으로 닮은 나. 요한은 이것을 ‘육’이라고 했어요. 인간은 절대 육에서 못 벗어나요. 사도의 할 일은 육의 자리에서 영의 자리로 옮기도록 하는 겁니다. 크레인이 와서 옮겨줘야 옮길 수 있습니다.
육에서 영으로 옮길 때는 반드시 통로가 있습니다. 육과 영에는 다리가 없는데 예수님이 다리를 만들어 놓았어요.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고 죽었어요. 버림 받았잖아요. 하나님께 버림받은 분이 사흘 만에 사랑하는 분의 아들로 위상이 바뀌었어요. 그러면 옮겨 오는 다리가 있을 것 아닙니까.
분명히 육인데 부활하신 후에는 영의 영광으로 나타났지요. 문이 닫혀 있는데 들어오시고 했잖아요. 육에서 영으로 옮겨오는 연결고리가 뭔가? 예수님이 제자들 속에 칩처럼 장착한 것이 있어요. 예수님 자신의 ‘살과 피’입니다. 제자들 속에 예수님의 살과 피를 집어넣었다는 것은 육 속에 예수님의 죽으심을 심었다고 보면 돼요.
내가 살고자 하는 것 때문에 주님이 죽으신 것을 느낀다면 그는 성도요, 내가 죽었다면 내 안에 계신 분이 살았다는 말이기에 나에 관한 모든 일들은 사소한 것이 됩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신 것이 중요하지 내가 이사하고, 딸 결혼시키고 이런 일들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광채가 비치면 세상 모든 것은 사소한 일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늘 그렇습니까? 갑자기 “나도 저 사람처럼 돈 많이 벌어서 폼 나게 살아야지.” 그러면 나로 인하여 예수님의 십자가가 밟히고 모독 받는 거예요. 내가 세상에 신경 쓸 때 주님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돼요.
불신자는 나와 남이 따로 있는데, 성도는 나 안에 너란 분이 오셨고, 너 속에 나가 있어서 너와 나가 하나가 되고 말았어요. 마치 부부처럼. 두 몸이 한 몸이 되었어요. 인간이 주님을 섬기면 주님은 환란과 핍박을 주시면서 “힘들지?” 라고 하시면, 성도는 “주님이 함께 계시는데 이게 뭐 힘들어요?”하면, 주님은 “요 예쁜 것.”하면서 기뻐하신단 말이죠.
주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복음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주시지만 복음 외에는 일체 도와주지 않습니다. 인간을 존재케 하신 목적이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함이기에 우리 소원은 안 들어주십니다. 우리의 소원은 내가 신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소원을 주님은 일체 들어주지 않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해서 일하는데 왜 주님이 안 도와주십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방식이 달라서 그래요. 주님이 제자들을 육의 자리에서 영의 자리로 옮기실 때 제자들과 협의했습니까, 예수님 혼자 다 하셨습니까? 예수님 혼자 일방적으로 이끄셨죠.
그러면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가 뭡니까? 주께서 ‘복음을 위해서’라는 목적만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제자들을 이끄셨던 그 방식대로 주님 홀로 우리의 이야기로 목적과 연결된 그 유일한 방법을 사용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세상적인 방법을 사용하기에 주님은 그 일에 도와주지 않습니다. 방법까지도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해야 그것이 주님께 영광이 되고 주님만 드러내는 일이 됩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자아가 있기 전에는 혼돈이었습니다. 범죄한 아담은 사단에게 지배를 받기 때문에 혼돈뿐입니다. 이 혼돈에서 독자적으로 빠져나오면 자아라는 이름이 붙어요. 그래서 자기 이름을 위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1번과 2번을 분간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과연 내가 1번을 따라 가는지, 2번을 따라 가는지는 사랑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랑했는데 잊어지거나 멀어진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2번이었습니다. 그러나 잊을 수가 없다면 이건 자기뜻이 아니고 1번입니다. 당연히 짧은 순간을 봐서는 모르고 전 일생을 봐야 압니다. 10장 44절을 봅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했지요.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으뜸이 되고 싶은 생각에 다른 사람의 종이 되려고 노력할 거예요. ‘내가 순종하고 바르게 살아야지.’ 이것은 2번입니다.
이런 차원이 아니고,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내가 어떻게 하겠다는 차원을 넘어서요. 주께서 사도들을 이 말씀대로 이 원칙에 의해서 이끄시는 겁니다. 이게 1번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도가 하는 일을 전부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 됩니다.
‘내가 말씀에 순종해서 바르게 살아야지.’ 이런 생각으로 44절을 보면, 내가 천국 가기 위해서 남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천국이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종이 되는 원인을 집어넣습니다. 이건 순수한 것이 아니고 노림수가 있어요. 꼼수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꼼수인줄 알면서도 우리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으뜸’이 되고 싶은 마음이 모든 인간들에게 다 있어요. 이게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네가 잔치나 회당의 상석에 앉지 말라. 만약 다른 사람이 와서 네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면 네가 얼마나 수치스럽겠느냐?’ 어떤 목사가 식사에 초대를 받았는데 이 말씀이 생각나서 말석에 앉습니다.
이런 태도는 본인이 몸소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지요. 타인을 의식하면서.
여기에 행동의 주체는 누구입니까? 자기지요. 내가 돋보이는 순간 예수님은 밟히게 됩니다. 십자가가 모독 받게 됩니다. 이게 마귀 짓이에요.
이러면 이 말씀은 어떻게 지킵니까? 인도함을 받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지키느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미장원에 갔는데 미용사가 ‘어떤 스타일로 할까요?’ 라고 물으면, ‘미용사께서 알아서 해 주세요.’ 이러면 됩니다. 다 맡기면 됩니다. 이렇게 모두 주님께 맡기면 모든 것이 주님의 작품이 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나는 이렇게 살았습니다.’가 아니라 ‘주님이 날 이렇게 만들었습니다.’가 됩니다. 그게 어딜 통해서 나온다? 절개지! 상처를 통해서 우리에게 담겨요,실패를 통해서 담겨요, 그래서 한번만이 아니고 계속해서 실패하면 실패할수록 우리는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주님의 증인입니다.
10분 쉽시다.
(2017. 10. 9. 09:37 녹취 마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