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70이레의 의미
주석가들은 70이레의 첫 번째 마디를 장식하는 7이레의 시점까지의 기간을 70이레 안으로 들여와서 장착하게 되면, 그 확실한 역사적 실재성으로 인해 나머지 70이레 전체 의미도 역사적인 반증을 갖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이로서 7이레의 시점까지를 정하는데 여러 가지 이론들이 제시된다. 최만수는 70이레가 시작하는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말씀을 주전 538년 다리오/고레스 칙령을 두고 말한다고 했다. 『Pro Ecclesia』 Vol 7. No.2 (서울: 프로에클레시아신학회, 2008), p.92 崔永憲은 『단 9:24-27 “70이레” 해석』(아세아연합신학대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9)에서 여러 주석가들의 7이레 시점의 견해를 소개해주고 있다. pp.13-20 칼빈은 처음 7이레를 49년으로 여겨서 고레스의 칙령에서부터 다리오 6년까지로 보았다. 그리고 그리스도 세례까지를 62이래로 보았고, 주후 70년 성전 파괴까지를 1이레로 보았다. 카일(C. F . Keil)과, 류폴드 (H. C. Leupold)의 견해는, 주전538년 고레스 칙령에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초림까지를 7이레로 보았으며 신약시대 전체를 62이레로 보았고, 재림 전 환란 때를 1이레로 보았다. 몽고메리(J. A. Montgomery)와 포르튀우스(N. W. Porteous)의 견해는 주전 587/6 예루살렘 멸망부터 시작해서 539/8년의 바벨론멸망 및 고레스 칙령 까지를 7이레로 보고 있는 견해다.(18페이지) 그래서 171/0년 안티오쿠스 아니아스 3세의 살해 까지를 62이레로 보고 있고, 164년 성전 재봉헌을 마지막 1이레로 보고 있다. 헹스텐베르그(E. W. Hengstenberg), 하젤(G. F. Hasel)의 견해는, 주전 457년 아닥사스다의 첫 칙령을 시작해서 408년 예루살렘의 재건까지를 7이레로 보고, 주후 27년 예수님의 세례까지를 62이레로 보고, 주후 34년 스데반 집사의 죽음까지를 1이레로 보고 있는 견해다. 영(E. J. Young)의 견해는, 주전538년 고레스 원년을 기점으로 하여 에스라 느헤미야의 사업의 완성까지를 7이레로 보고, 예수님께서 언약을 굳게 하신 시점까지를 62이레로 보고,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성전에 나타날 때를 1 이레로 보고 있다. 최영헌은 이렇게 해서 70이레의 시작점은 다음 네 가지 설로 압축한다. 첫째, 주전 538/537년 고레스설인데, 약점이 있다면, 고레스 칙령은 예루살렘 중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성전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는, 주전 520년 다리오 1세설인데 중단된 성전이 새로 개시한 시기를 말한다. 약점은 여전히 예루살렘 성읍 재건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세째는, 주전 457년 아닥사스다 1세 7년설이다.(하젤의 견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시기다. 이 계산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신 주후 27년과 490년이라는 태양력 시간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넷째는, 주전 445/444년 아닥사스다 1세 20년 설이다. 느헤미야가 귀환한 시기다.
간하배는 주전 538년 고레스원년을 70이레의 시작점으로 보는 건해를 내어놓았다. 『다니엘서의 메시야 예언』(서울:개혁주의신행협회, 1984), p.201 이희락은, 예레미야 30:18에 근거하여 70이레의 시작은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부터 메시아(기름부음 받은 지도자)가 나타나는 오니아스 3세까지를 7이레 기간으로 보고 있다.『성서주석』,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4), p. 440
이 중에 어떤 견해가 ‘역사적’으로 딱 떨어지는가 하는 것을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이 땅의 역사적 조건을 계시 이해의 바탕으로 삼는 것은, 신의 개입을 일종의 ‘초기 조건’으로 생각한 이신론(理神論)적 전통에서 세계는 정확히 시계태엽의 이미지를 따라가며 파악하는 것과 같다. 지속을 시차적(時差的) 안목으로 잘라내는 것은 사실상 평균치를 일방적으로 추정하여 포괄적으로 접근해 나가는 시도일 뿐이다.22) 흐름의 연속성을 관찰자가 정지시킬 수가 없는데 이럴 경우에 윤곽만 포착된다.23) 윤곽면에 포착되지 않는 유동성은 우리 인간 손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물처럼 사라져버린다. 동사(動詞)로서 포착한 것은 운동 자체가 아니라 바로 그 윤곽이다. 곧 잠정적 계기이다.24) 항상 일치를 고대하게 만든다. 하지만 변화되어지는 주체는 자기가 벌리고 있지 않는 변화 속에서 다른 주체가 벌리는 변화의 정체를 밝히는 것을 시도하면 그 변화에 이미 말려든 셈이 된다. 고정된 주체가 빠져나가는 주체를 포착해낼 수가 없는 동시에 그 변화주체에 의해 도리어 진위를 판단 받게 된다. 곧 계시에 접근하는 순간이 곧 계시로부터 심판받는 순간이다. 마치 교도소의 수형자는 면회시간이 끝나봐야 자신을 면회한 자와 자신이 가야할 길이 각자 다르다는 것을 아는 이치와 같다. 이처럼 예언 자체는 묵시적 사건 후, 역사적 증거로 포착 가능한 사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역사적 사건을 늘 새롭게 유발시키는 묵시적 해석 자체로서 증거되기 때문에 역사적 접근을 단죄한다. 인간들이 자기 시대에 느끼는 역사적 감각을 가지고 이 묵시적 해석을 바로 연결시킬 수가 없다.25) 연결시킬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고 성령은 그 분과 관련된 묵시적 사건임을 증거한다. 70이레에 일어난다는 모든 역사적 내용들 -예루살렘 중건하라는 영 하달, 기름부음 받은 왕의 등장, 기름부음 받은 자 끊어짐, 성읍과 성소 훼파, 언약 굳게 함, 제사와 예물 금지, 종말이 될 때까지 하늘의 진노가 황폐한 자에게 쏟아짐-은 각기 시대 환경에 속한 자들로 하여금 자기 시대의 해당되는 묵시로 해명하게끔 되어서 그 자체가 인간들이 부정적으로 묵시에 접목되는 계기로 작용한다. 곧 인간들이 무슨 견해를 내놓든지 간에 그 견해로 인해 인간이 얼마나 역사적 지평으로 납득이 되는 해석이기를 원하는 그 죄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모든 해석은 자기 주체화 과정과 무관할 수 없는 와중에서 하나님이 다루시는 그 말씀까지 자신의 역사적 주체성 확립을 위해 자료로서 다루려고 애쓰고 있는지를 그대로 노출하는 계기를 말씀이 끊임없이 제공하고 있다.26)
예를 들면,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을 받는 수동적 언질(단 9:25)이 주체의 동일성 지향 작용으로 필히 능동적 기획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수동성은 다음 행위를 위한 주관성 속으로 녹아버리면 그 결과로 나오는 것은 주체의 능동성이다. 이 능동성으로 인해 ‘타인의 자리’는 주관정립을 위한 기억으로만 재생된다. 하지만 ‘타인의 자리’는 주체에 질식당할 자리가 아니다. 도리어 새로운 사건이 돌출의 장소로서 활용되기 위해 구조 잡힌 것이다. 상황의 구조가 상황을 장악하지 못한다. 상황은 불가피하게 움직인다. 초과분이 있었던 것이다. 이로서 이스라엘은 묵시를 견뎌내지 못하고 사라짐과 동시에 이스라엘이 세워놓은 역사적 종말론도 당연히 함께 부정된다.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이처럼 끊임없이 역사층과 묵시층에 관한 아이디어들이 쏟아내고 있다. 이로서 종말론은 모든 시대에 있어 인간의 주체적 삶을 구성하는 본질이 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이런 종말론을 십자가 피로서 부정하시므로서 참으로 종말을 감행하신다. 불결한 몸에서 나오는 종말론도 불결하기 마련이며 거룩한 피를 모독하는 것이 된다. (히 10:29)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롬 3:4) 인간의 몸으로 구성되는 주체의 반발심은 만만치 않아서 인간 몸의 일반성에서 벗어나 자기 몸의 영원한 보편성을 추구하면서 초월적인 타자(신)과 초월론적인 타자(본인의 욕망을 야기시키는 미지의 타자)를 구분하고 간격을 남겨두므로서 유한성 속에 무한성을 안치한다. 그래서 인류는 묵시(=신의 계시)에 근거해서 정당한 역사를 이루어나가기 위해 애쓰면서도 동시에 언젠가 그 역사를 한꺼번에 와해시켜주어도 상관없는 신선하고 거룩한 묵시적 사건을 상상하게 되는데 상상이란 동일시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기대감은 늘 묵시냐 역사냐는 허상적인 양식 사이를 오고가면서 현실과 조율에 나선다. (묵시에는 축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주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주가 자신들에게 임하기를 요청하지는 않는다. 참으로 묵시에 대한 수상한 견해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묵시구조와 와 역사구조의 만남에서 필히 야기되는 ‘죽음’을 떠안을 수 없는 입장이다. (베드로가 자기 목숨을 바쳐도 예수님을 가신 그 죽음의 노선에 들어 설 수 없었다. 요 13:37-38) 인간은, 죽어도 용서될 수 없는 죄를 떠받치며 땅의 존재로 태어난 것이다. 묵시적 인물이신 인자(人子)되시는 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으로서 모든 인간은 구원될 권리가 애초부터 박탈되어 있음이 분명해졌다. 다니엘 시대는 ‘주체 부재(不在)’ 형식으로 묵시화된다. 다니엘은 ‘인자’로 다루어지고 나머지 모든 주변 상황은 장차 인자의 세상을 공격하는 짐승으로 다루어진다. 역사적 해석에서 역사 동력의 주체로서 자부하는 인간은 부재(不在)에 처해진다. 이와 같이 묵시적 사건은 인간 주체를 향해 ‘죄’라고 규정하시면서 찾아오신 것이다. 하지만 인간 편에서 볼 때, 묵시세계는 여전히 공백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리어 하나님의 메시지가 환란과 역경 속에서 미래를 소망하는 자들을 위해 견뎌낼 수 있도록 참고 될 만한 흔적을 역사 위에 뿌려준 것이라고 여기고 소위 ‘묵시문학’이라고 분류되는 것들이 유행한다. 이로서 사건과 사건에 필연적 인과관계가 있다고 믿고 그렇게 해서 ‘계시 공백(구멍)’을 메우려한다. 70년 포로 기간은 7일이라는 원래 창조완료 시간과 70이레라는 확정된 종말의 날 시간대 가운데 끼어서 그 창조성을 종말까지 전달하는 매개구실을 하게 되고27) 이 매개구실은 새로운 몸이 필요한데 그 몸은 ‘포로로 잡혀 있는 백성들과 함께 계시는 의로운 인자 같은’ 이를 통해서 가능하다. 창세기 1장에 나열된 창조성은 궁극적으로 한 몸을 지향해서 진행되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몸’의 창조다.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을 피조세계로부터 격리시키고 감추기 위한 창조방안이었다.28)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몸은 창조 속에 포함되고 원 창조의 일관성 있는 노선의 지배를 받는다. 이렇게 되면 창조된 모든 것들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나실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5-17)
시간이란 몸을 따라붙는 그림자 같아서 몸의 속성에 따라 그 시간적 속성을 드러낸다. 몸이 없는 곳에는 시간은 없고, 시간이란 오직 몸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시간을 통해서 숨은 몸이 지상에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간은 날이나 년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레에 따른다. 이레는 인간의 생활세계에 적용되는 7일이나 7년으로 분해될 성질이 아니다. 그렇게 풀이해서도 아니 된다. 왜냐하면 기존의 짐승적 시간의식을 공격하고 붕괴시킬 원창조를 나타내어주는 시간적 형식으로 쓰이는 창조적 단위이기 때문이다. cm 거리단위를 c +m로 나뉘어서는 단위적 기능을 하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 이레와 해(年)의 차이성을 견지해 주어야 ‘이레' 단위로서만 역사를 주도하시는 원래적이고 궁극적인 창조주에로의 귀속성이 부각된다. 창세기 2:1-3에서 이미 하나님은 창조 완성을 선언하셨다. 지상에 떨어지는 묵시성의 내용은 모두 이 완료성을 적용시켜 나가는 내용이다. 인간이 죄지었다고 이 완료성이 무효화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레’라는 창조를 다루는 묵시적 해석단위에 준해서 짐승과 짐승, 뿔과 뿔의 등장의 예와 같이 불연속적 경계면을 묵시적 스케줄에 맞게 조성해나가므로서 유비적으로 대자연의 영속성을 내부적으로 유지시켜 왔음을 보이신다. 아울러 ‘이레’라는 단위를 사용할 수 없는 인간들이 내심 기대하는 인간들의 시간적 연속성에 준해 역사적 해석력에는 편승하지 않고 단절시킨다. 이레란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측정 단위로서 모든 것이 창조주로 귀속되는 진행을 살피는 단위다. 시간을 최소 단위로 나뉘어 사고하는 방식은 BC 4세기∼3세기 경 사람인 에피쿠로스 견해이기도 하다. 시간의 최소 단위 안에서는 그 어떤 운동도 일어나지 않고 정지된다고 본 것이다. 앤소니 A. 롱 Anthony A. Long, 이경직 역 『헬레니즘 철학』, 서광사(서울, 2006), p.89 새로운 운동의 시작은 다른 층에로의 도약이 일어나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시간 단위가 개시되는 것이다. 하지만 에피쿠르스 학파에서는 대자연이 원자단위로 모눈형식(grid)처럼 단절되어 불연속성을 이루는 문제가 일어난다. 이를 ‘빗겨남’으로 운동의 불연속성을 보완하려고 했다. 이준엽, “에피쿠르스 학파에서의 빗겨남의 경로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미발행 문학석사논문, 2009) p. 77. 하지만 성경에서는 처음부터 이 대자연의 구조가 완료적이라서 보완이 필요없다. 문제는 ‘이레’라는 특별한 창조단위를 왜 다니엘이라는 실존에게 적용했느냐는 점이다. 그것은 기존 성전이 완성된 성전이 아님을 보여주는 사건의 증언자가 되기 때문이다. 즉 인간 손으로 지은 성전은 무너지고 다시 지어지고 또 무너지는 사건들이 오직 완성된 성전을 미리 보여주기 위한 사건 유발이지 결코 인류 역사를 더 끌고 가기 위한 조치가 아님을 ‘창조 완성 단위’를 사용해서 알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은 본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에게는 더 이상 ‘돌아갈 본향’이 없다. ‘이레’의 차원이 그를 덮은 것이다. 70이레는 두 개의 관절을29) 가지고 세 구문으로 나누어서 의미를 나타낸다. 즉 70이레=7이레+62이레+1이레 이다. 70이레 계시를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알려주기 전에 먼저 다니엘은 70년 포로 시간의 의미를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있었다. 즉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을 끼고 있는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와 달리 ‘죄’의 의미가 되돌아와서 덮쳐지는 민족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범죄함’이 무엇인지를 유일하게 아는 민족이 바로 다니엘이 속해 있는 이스라엘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특히 다니엘은 ‘죄를 앎’이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유일무이하게 이스라엘에게만 ‘죄에 대한 속죄의 은총’을 아는 민족이 되게 하는데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속죄의 은총은 두 번 다시 죄가 생겨나지 못하게 만드는 장치가 장착된 속죄라는 점에서 ‘영원한 속죄’가 되고 이 의로운 은혜를 입는 자만이 진정 회개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단 9:18-19)
이런 기도 이후에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70이레 계시가 주어진다. 바로 이 70이레란, 어떤 역사적 과정을 경과해서 역사 속에서 영원한 속죄의 은혜가 생산될 수 있느냐를 말해주기 위한 시간적 형식이 된다. 초점은 끝머리 1이레에 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단 9:24) 여기서 영속(永續)이란 영원히 속죄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70이레에 대한 해석은 다니엘의 70년 포로 기간과 보조를 맞추어 이루어져야 한다. 다니엘 9:7에 보면, “주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치는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과 같아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30)거민들과 이스라엘이 가까운 곳에 있는 자들이나 먼 곳에 있는 자들이 다 주께서 쫓아내신 각국에서 수치를 당하였사오니 이는 그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음이니이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바로 1 이레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성읍과 성소가 훼파하려니와” 단 9:26) 무엇이 같은 점이냐 하며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훼파케 하신다는 점에서 다니엘이 기도 가운데 깨달은 것과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부응해서 정리해주신 창조의 단위로서의 70 이레가 보조를 맞추어 연결된다. 그렇다면 가운데 있는 62이레는 별 의미가 없다. 즉 62이레는 7이레와 1이레의 간격을 나타내기 위한 설정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70이레는 두 개의 관절(절단점)을 가진다. 기간을 말하기 위한 절단점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사건의 층이 같은 유(類)로 유지되면서 흐른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창조적 단위를 동원해서 그렇게 합리적으로 배치해 놓은 것이다. 즉 사건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인자라는 호명으로 호출 받은 선지자의 자격으로 기도하는 다니엘의 기도가 응답이 되었는데 그 응답에 맞추어 하나님께서 일하시겠다고 나다나엘 천사를 통해서 통보해 오신 것이다. 이 작업을 위하여 역사는 계속 끌어가야 한다. 즉 왜 예루살렘에서 성전이 파괴되었는지, 무슨 차원에서 볼 때 이스라엘이 죄악이 우상숭배에 해당된 죄인지를 알리기 위해 성전은 다시 재건축되어야 하는데 그 질의 역사가 역시 종말까지 진척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7이레다. 실제로 건축구조물로서의 성전 복구가 포로 귀환민들에 의해서 진행된다. 그런데 그들의 성전은 이미 마감이 확정된 역사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전 건축이 되는데 그 이유가 바로 그 성전건축에 주도적으로 도와주는 배후 나라는 짐승의 나라, 바벨론 정신의 줄기에서 뻗어 나온 메데·바사라는 나라다. 하나님께서는 짐승의 나라의 도움으로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하신다.
이것은 그 성전 중심으로 짐승의 나라를 전복시키고 진정한 인자의 나라를 세울 수 없음을 그리고 그 이후에 등장하는 헬라라는 짐승에 의해서 그 성전이 난도질당하도록 하신다. 다니엘 11장 보면, 남, 북 왕들의 자기네들 싸움을 벌이지만 본의 아니게 그 가운데 끼인 성전은 짐승의 성질에 의해 피해를 입게 된다. 포로 이전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역사적 상황을 되풀이하도록 연극 무대를 조성하신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 잘못되었으며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이 거주하신 그 성전을 파멸시켜야만 하는지를 알아야 비로소 죄를 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7이레에 벌어진 성전 건축은 인류 처음부터 망할 때까지 전 역사를 뜻한다. 인류사 전체가 연극무대였던 것이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농락당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었음을 알려주기 위해 일정 역사적 기간 동안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시 포로 생활마치고 귀환해서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재건토록 하신 것이다. 그것도 바벨론 제국의 일부라고 볼 수 있는 짐승의 나라의 후원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70년 포로 생활 마치고 귀환해서 성전 복구에 참여했던 자들은 성전의 세워짐과 무너짐을 한꺼번에 참여되는 기회를 갖게 되고, 그 무너짐을 통해 전에 다니엘이 알아챘던 그 70이레의 의미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즉 7이레가 전체 70이레에 포함되면서도 실은 7이레 자체가 독자적인 층위를 갖는 구조로서 자리 잡고 있고 그 7이레는 인류 전체사를 다 커버하는데 실제 성전 재건립 작업에 소요된 역사적 기간은 사건이 터져 나온 구멍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그 구멍이 소요한 시간이 어느 정도냐 하는 것이 사건 이후에 새롭게 정립된 주체 인식에 따라 각기 달라진다. 최종 주체, 최종 몸은 오직 다니엘 7:13에 나오는 ‘인자人子같은 이’다.
즉 사건을 터뜨리는 층과 사건이 적용되는 층이 다른 것이다. 사건이 터진 기간조차 그 사건을 받아들이는 몸에 따라 얼마든지 천년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단 하루로 이해할 수가 있다. 마태복음 17장에 나오는 변화산 광경에서 엘리야나 모세나 모두 독자적인 수명을 따질 이유가 없는 세계에 살고 있었다. 천국에서 누가 더 오래 살고 있느냐는 것은 부질없는 질의다. 하지만 엘리야가 살았던 역사적 시절이 따로 있고 모세가 살았던 시절이 각기 존재한다. 땅에서 보면 묵시 세계의 현상이 사건으로 보이지만 묵시의 세계에서 보면, 역사적 시간 속의 생활이 한 경점에 지나지 않는 사건에 불과하다.(시 90:4) 주체, 혹은 몸에 따라 사건을 포착시키는 시간대는 각자 다르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역사구조 속에서의 자아라는 주체는 일어난 사건을 차후적으로 해석하는 가운데 차후적으로 시간 속으로 정립되기에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면 거기에 따라 주체, 즉 자아의 몸은 새로운 인식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주체가 아니라 몸이다. 사도 바울의 몸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의해서 땅에 엎드렸다.(행 9:4) 몸과 몸의 만남이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에게 신학적으로 한 수 배운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몸이 육이요 악이 창궐하는 몸인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몸은 주체나 자아가 손을 쓸 수가 없다. 자아나 주체는 그저 자아의 주체성 조절만 수시로 해나갈 뿐이지 결코 죽고 썩을 몸을 썩지 않는 몸으로 변화시킬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자아가 납득이 되는 역사성을 썩을 몸을 가지고 배출하고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묵시적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한 몸의 영광으로 흙에 속한 몸을 공격하는 사건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그 몸으로 조성되는 주체적 구조를 공격한다. 이러한 묵시적 사건에 의해서 논리상 차후에 정립된 주체관에 의해서 역사를 바라보면, 요한계시록 7인, 7나팔, 7대접도 역시 역사 전체를 덮는 시간이 된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 역사적 시간으로 기간을 정할 수 없는 사건들이 가득 담겨 있어 하나하나의 사건들의 시간적 길이를 합산해서 전체 역사적 시간대를 도출해 낼 수는 없다. 이것은 예수님의 종말에 관한 예언을 풀이하고 해석하는데 마찬가지 원리로 작용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며는 묵시적 사건이 인간들이 고정된 주체를 가지고 일으킨 것도 아니요 고정된 주체관을 용납하면서 예수님께서 일으킨 사건도 아니라 사건을 통해서 그 사건을 해석하고자 시도하는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해석관 자체를 ‘육’이라고 부정적으로 규정시키는 작업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영선수가 헤엄치는 것을 속도를 따라잡으면서 동시간대에 움직임을 찍어대는 카메라가 있더라도 수영선수가 수영을 하면서 수시로 그 카메라를 부셔버린다면 그 수영선수가 한 모든 행위는 전혀 그 카메라가 포착할 수 없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인식에 한계를 느끼지 못하는 한계를 갖는다.
70이레 가운데 마지막을 장식하는 1이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1 이레는 자체적으로 또 하나의 절단지점을 가지고 반 이레와 반 이레로 나뉘게 되는데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를 뜻하면서도 그 예수님의 신분이 ‘인자 같은 이’로서 묵시적 존재로서의 ‘인자’이심을 감안한다면 전 인류 역사를 커버하는 1 이레가 된다. 그러면서도 7이레 위에 놓여있는 층위가 되는데 그것은 금신상을 엎어놓으면 역사가 되고 다시 세워놓으면 모든 역사를 커버하는 묵시적 사건으로서의 ‘금신상 만들기 사건’으로 자리 잡는 것처럼, 70이레라는 역사적 형식을, 하나님이 보좌라는 수직적 하는 꼭짓점과 연결시켜 곧추세우면 층이 구분되는 식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 개의 층, 즉 제일 아래층에 자리 잡은 7이레라는 층은 비록 ‘성전 재건축’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품고 있으나 그 역사 자체가 1 이레층의 입장에서 보면 ‘묵시적 사건’이라고 규정할 만한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7이레가 지닌 역사는 인류 전체 역사를 대변해주는 묵시적 의미층으로 작용하게 된다. 바로 그 윗층이라고 할 수 있는 62이레의 층도 ‘7이레’ 묵시적 사건에 대해 역사적 조치로서 자리 잡은 역사기간을 가지지만 제일 윗층인 1 이레의 층에서 보면 그러한 역사적 기간도 하나의 ‘묵시적 사건’으로 응축될 수 있으며 이 ‘묵시적 사건화’로 인하여 아래층인 7 이레층이 전체 역사를 덮고 있는 묵시적 의미를 새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해명해 낼 수는 위치에 있다. 다니엘 시절의 다니엘이 예언해 둔 역사 진행은, 다니엘이 해석했던 그 해석에 대해 다음번에 전개되는 핍절한 유대역사 내에서는 자기 시대에 성취되어서 적용되는 예언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런 해석 자체가 그 시대의 역사를 형성하면서 그 역사 자체가 또다시 나름대로 차기 시대의 해석이 요구되는 선행 묵시적 예언 사건으로 굳어진다. 이것을 일직선분으로 묘사되는 시간관에 비추어보면 한 직선 위에서 ‘완료-미완료’, 혹은 ‘이미- 아직’이라는 모순 관계를 기하학적으로 점을 찍어가도록 만드는데, 이 모순 자체가 시간의 한계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자신의 몸을 구성하는 역사적 시간관을 고수하는 가운데서 예수님의 몸을 위한 시간성을 받아들이는 무리(無理)에서 비롯된 것이다.
네델란드 신학자 헤르만 리델보스를 비롯해서 개혁주의적 성경신학자들이 이해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해석 오류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적 시간관에 준해서 이해해주려고 노력한 점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서울: 엠마오, 1989) 하지만 그 역사관은 최종 묵시성취에 있어 인간들의 이러한 애씀이 죄악된 것으로 가담된 채 이루어짐을 알지 못하고 있다. 즉 자신의 모든 해석이 곧장 자신의 사적인 구원욕구에 일시적으로 자족하면서 ‘자기 구원됨의 -“나도 예수를 증거하는 증인 맞다”를 우기면서- 증빙 자료 외부에 알리는 주체의 본성적 특징을 감하지 않고서는 십자가 사건이 언약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언약과 주체 문제를 연결하지 아니하기에 복음에서 송출되는 ‘죽은 분’의 시간 잠식 능력을 그들은 아직 살아있는 몸을 가진 자신의 몸을 규정하는 용도로 시간을 설정했고 그 시간 위에 ‘하나님 나라’를 실으려고 한 것이다. 이들은 ‘날마다 우리는 죽음 몸’으로 변모 시키는 묵시적 완성도로서의 성령의 능력을 이해 못한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1) 즉 ‘역사적 몸인 우리의 몸도 그리스도 안에서 묵시적 사건의 의미를 품은 몸이다’ 는 해석에 날마다 내어주면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가 다시 묵시화되면서 이동하는 예언 성취의 그 최종 도달층은 선재하시는 몸이신 인자가 상주하시는 그 1 이레 층이 된다.31) 1 이레 층에서 보면 밑의 두 층의 역사이해는 한계를 갖고 있다. 이것을 선분 위에서 통합시켜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자기 시대를 통과하는 주체세력마다 종말됨을 설정하는 임의의 시간들을 세상에 내놓게 되는데 이들 시나리오마다 ‘이미-아직’의 시차적(時差的) 구성을 갖추어놓고 있다. 따라서 종말론적 구상들이 특이성을 가진 사건 중심으로 시간의 판을 짜므로서, 그리스도 몸의 묵시적 현존성을 고려하지 못하게 된다.
몰트만J?rgen Moltman은, 기존의 묵시문학에 대한 해석을 거부하면서 나름대로 종말론을 우주론과의 자리바꿈으로 풀어내려 한다. ‘신화에서 나온 고대의 우주론적 도식을 이스라엘 역사에 적용한 것이 묵시문학’이라고 주장하는 폰 라드G. von Rad나 코흐K. Koch나 판넨베르그W. Pannenberg의 설을 인정치 않고-종말론적 역사의 우주론적 해석이 아니고- 우주에 관한 종말론적 해석에 따른 역사적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몰트만, 『希望의 神學』,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87), pp. 178-180. 이 말은 곧, 묵시문학에서는 종말론이 우주론적으로 마감될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우주론이 종말론적이 되고, 우주(kosmos)가 역사적으로 종말의 과정 속에 끌려 들여질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묵시문학에서는 개별 실존적 종말론과 우주론 사이에 다툼으로 표현되고, 이 와중에서 우주론이 종말론을 대신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특정 민족이나 개인의 ‘종말’이 종말론의 마지막 내용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적 종말론’이 진정한 종말론의 시작을 알리면서 본격적으로 우주론을 개방하는 시점으로 본다. 하지만 몰트만의 이러한 주장도, 몸의 의식 활동으로 나타나는 주체적인 시-공간 이미지에서 나온 아이디어다. 시간-이미지를 공간-이미지로 바뀌고, 공간-이미지를 시간-이미지로 바꾸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인간은 주체의식을 지닌 유기체라서 외부적인 상황이 주체적으로 작용하는 잠재적인 시-공간 이미지에서 벗어난 형식을 취할 수 없다. 잠재적 이미지와 현실적 이미지 사이의 차이만 드러낼 뿐이다. 즉 인간은 자기 내부의 시간 의식을 거치지 않고서는 시간을 말할 수 없는 몸이다. 이런 몸은 당연히 그리스도의 묵시적 몸의 작용에 따라 부정적 평가의 대상이다. 후설Hussrl의 현상학에 있어 시간이란 의식의 자기 촉발의 산물이다, 하지만 레비나스Levinas는 ‘근원 인상’을 ‘자기 촉발의 구조’ 안에서가 아니라 ‘이질적인 것(타인)으로부터의 촉발’의 구조 안에서 사유해보고자 했다. 서동욱, 『차이와 타자』,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8), p 20. 하지만 묵시적 몸이신 예수님께서 발휘해주시는 주체형성의 장은 십자가 중심(보편적인 타인의 고통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한 새언약 달성만의 고통)으로 진행되기에 성도의 신체성도 증거용으로 유지될 뿐이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함이니라”(고후 4:11) 즉 ‘성도’라는 주체는 묵시적 주체이신 예수님께서 ‘창세 전’에 이미 선택해놓은 주체로서(엡 1:4) 기존의 철학적 사유에 의해 주체관과 판이하다. 하나님의 세상 창조나 인간 창조보다 논리적으로 ‘예수 안에서의 예정하심’이 선행된다.(엡1:9-10/롬 9:11-12) 즉 아담의 창조나 성도의 창조보다 성도의 주체성이 우선인 것이다. 이로서 최종적 비밀은 ‘어린양이 보좌’에서 뿜어져 나온다. 7인을 떼어서 역사적 내막을 묵시적으로 해석할 자격자는 다윗의 뿌리인 예수님뿐이다.(계 5;1-5) 1 이레층도 예수님의 공생애라는 역사적 사건을 품고 있으나 그 묵시적 신분으로 인해 ‘처음이요 나중’으로서의 몸으로(계 1:8) 전체 역사까지 연장시킬 수 있는 그림으로 묘사될 수 있다. 그 가운데 있는 62이레는 제일 밑바닥에 있는 7이레라는 역사적 사건과 1 이레라는 예수님의 사역 사건을 역사적 시간 형식으로 묘사한 그 층과의 간격을 독자적인 역사적 시간대를 가지고 흘러갔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로서 70년 포로 시간에 합류한 인자(人子)의 다니엘은 ‘70⇒1’로 나아가는 것을 깨달았다. 즉 70년 포로 잡혀간 그들이지만 그 시간적 의미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한 분, 인자 같은 분에게 종속된 ‘인자의 나라’의 백성으로 자리 잡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였음을 알았던 것이다.
Ⅲ 결론
다니엘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은, 무너져 내리는 역사적 베일의 현장에 서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나름대로 삶의 형식을 창조해 오고 있다. 그저 ‘자기 보존’에만 멈추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힘을 확장하려 한다. 여기에 조형력이 발동하면서 주변을 해석한다. 살아있는 유기체의 본능이며 생명력의 분출이다. 이런 인간의 시선에 성경문자가 들어오면 주체적 해석이 발동한다. ‘70이레에 대한 비역사적 해석’이란 결국, 해석될 수 없는 대상을 향해 인간이 해석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자기 주체화 정립과 더불어 나타나는 ‘역사/묵시’의 시차적 관점을 다니엘의 70이레 계시를 통해서 분석하는 내용이다. 인간의 신체는 외부와 접촉하면 자체적으로 위기의 시점과 구원의 시점을 지정하여 ‘시작-종말’이라는 내부 시간 시스템 안에 장착시키고 자기 몸에 와 닿는 사태의 와 견주어가면서 구원 사나리오를 작성해나간다. 그리고 외부 추이와 견준다. 여기에 시간성이 요청된다. 시간이 언젠가는 모든 것을 정화시키게 된다는 일념에서 미래는 항상 ‘희망의 홀컵’으로 삼는다. 시간이란,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가는 자체적인 방향성을 지닌다는 것이32)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틀이 되었다. 결국 인간들이 생각하는 구원이란, 번잡한 신학적 논의들을 ‘탁탁’ 털어버리고 나면 남는 것은 ‘지나감’과 ‘소망’의 선로 위에 자기 몸을 누이는 구조가 되고 만다. 그런데 이런 아이디어는 끈질기게 악마 쪽에서 유입되어 온 근성이었다.
성전이 훼파되고 난 뒤, 유대나라에는 나름대로 조상과의 연속성을 지탱하고자 에스라나 느헤미야가 했던 바를 모방하면서 (“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 느 8:8) 말씀 중심의 유대주의로 구원에 대한 소망을 쌓아나갔다. 하지만 시간의 뿌리는 여전하다. 세례 요한의 말대로, 그 나무뿌리는 도끼에 잘려나가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회개의 합당한 열매란 어림도 없다.(눅 3:7-8) 자신의 몸을 담을 여분의 ‘내일 것’을 잘라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심판주의 등장으로 벌어진 묵시적 상황에 어쩔 수 없이 휩쓸리는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서 유대인들은 언약의 노선을 잘못 읽은 것으로 판정 났다. 자신들이 ‘독사의 자식’인 줄 몰랐다. ‘아브라함 자손’인 줄 알았다. 시간적 수평선만 쳐다보고 있었고 그들의 묵시 생각한 그 시간적 지평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 같은 것이다. 자신들이 구축한 역사적 해석의 난맥을 해결해 줄 그 묵시적 인물을 고대하면서 계속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여긴다. 그러나 끝은 벌써 그들 머리 위에 있었다. “하늘에게 주신바 되지 아니하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요 3:27)는 세례 요한의 외침은 기존의 역사적 바탕을 근거로 수립된 모든 신학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는 말이다. 만약 인간이 자아를 미래로 끌고 가기 위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실적으로 쌓는다면 ‘끝’은 그들을 저주하게 된다. ‘전통 고수’라는 차원에서 선조의 신학적 성과에 권위의 옷을 입힐 수밖에 없었던 유대인들은 ‘인간 행위의 전면 단죄’이라는 묵시적 상황을 감지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점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마태복음 23:41-46에서 예수님께서 먼저 바리새인에게 시비거신 내용이 나온다. ‘다윗의 자손’에 관한 해석 문제였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한 말도 대꾸하지 못했다. 역사적인 해석이 교착에 빠진 것을 드러내신 것이다.
오늘날 설교단에서, 진리와 복음에 관해서 확답을 자꾸만 미루는 이유는 확정지을 만한 근거가 여전히 모자라지 않을까 라는 기우와 교회 주변의 싸늘한 반응을 예상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세상이 십자가 피 복음을 거부한다면 -십자가 피 복음은 인간의 지혜가 알 수 없다고 성경이 단정내리고 있는 판에 (고전 1:21)- 교회 운영이 어려움에 봉착할 것은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70이레에 관한 비역사적 해석은 오늘날 복음 전도자 자신들의 신앙적 정체성을 명백하게 드러내는 계기로 작용할 수가 있다. 즉 관심사가 자신의 생존문제나 구원문제로 되돌아오는지 아니면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 되고(딤후 2:26) 예수님의 생명이 덮친 바 되어 자신의 거취 문제조차 문제가 안 될 지경인지를 묻게 한다. 즉 묵시를 아는 복음 전도자는 묵시 아래서의 세상 배치를 받아들이게 된다. 묵시적 관점에서 보면, 악마의 종들도 복음이 아닌 것을 복음이라고 우겨서 강력하게 증거하는 것조차 예수님께서 열심히 자기 일을 하신 결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바로 그런 시선을 날릴 수 있는 자리가 예수님께서 성도에게 마련한 자리다. 곧 ‘쓰레기 자리’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10-13) 사도 바울을 묵시33)로 인해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고 고백한다.(고후 12:2) 성도가,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요,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기에 비로소 ‘안개’라는 성경상 표현이(약 4:14) 적절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미 예수님의 “말씀대로 다 이루심”이란(요 19:30) 완료적 구조 속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이런 완성에 합류된 시선으로 다니엘의 70이레라는 계시를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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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들뢰즈는 이러한 잠재성을 ‘이념’이라고 하는 그리스 철학의 형이상학적 전통에 연관되는 단어(이데아)와 연결시킨다. 이는 이데아를 새로운 틀에서 차이의 문제로서 위치 짓고자 하는 것이다. 전개체적인 차이가 ‘문제’를 제출한다고 한다면, 개체로서 현실화되는 차이는 그 문제에 ‘답’을 제출하는 형태로 보는 것이다. 이 출현은 미분(微分)적 관계로서 출한다. 무한히 작다고 말해지는 dy, dx란 과연 실재인가 아니면 허구인가? 그것은 실재로 허구도 아니며 ‘이념’이 된다. 양적으로 무규정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dy,dx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dy/dx로 규정된다. 이념이란 사고의 미분이지만 또 존재의 미분이기도 아니기에 사회와 정신과 언어의 구조의 발생적 차이를 이룬다. 우노 구니이치 저 이정우· 김동선 역,u『들뢰즈, 유동의 철학 』, 그린비(서울:2008), pp.123-124.
2) 권력이란 구체적 상황에 상응하여 속이 채워진 권력체의 부각된다. 70이레의 진정한 계시적 의도를 지상의 인간들은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는 알지 못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 시대마다 70이레 게시를 빙자해서 자기 시대의 주체의 속을 채워는 중심핵으로 도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들을 재료(질료)로 삼아 도리어 70이레 계시의 틀을 세우고 내용을 채우신다. 70이레를 가지고 주체 형성을 도입하는 그 세력들은 반복적으로 짐승의 아류다. 70이레 해석에 있어 짐승의 존재와 연계시켜야 되는 이유는 권력체들이 계시들을 뽑아서 자기 주체화를 시도하는 작업틀로 삼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는 영적 전쟁에 있어 전략적으로 도용된다. 십자가 복음은 바로 그러한 시도를 배경으로 해서 일어난 일이기에 모든 역사 안에서 권력의 핵을 직접 공격한다. 그리고 중앙을 빈 곳으로 부정해버린다. 하지만 짐승의 권력도 끝까지 이 십자가 복음에 맞서서 싸운다. 바다로부터 늘 새로운 권력이 유입되면서 그 곳에 메워 새로운 형태의 주체자로 대체시킨다. 이 영적 싸움은 역사 끝날까지 계속된다. 70이레에 대해서는 이러한 짐승의 전략적 활동과 관련을 지어 해석하는 것이 옳다.
3) 다니엘 드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에서 크루소는 무인도에서 원주민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이름 없는 그 원주민에게 ‘Friday 금요일’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그것은 크루소가 그 원주민을 만난 요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금요일’이라는 의미는 원주민 주체입장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이름을 붙여준 크루소에게만은 의미가 새로이 발생되는 관계다. 이처럼 호명을 당한 자는 호명하면서 다가온 분에 의해서 비로소 주체가 발생되는 것이다. ‘베드로’나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같은 이치다(시 135:4)
4) 다니엘 70이레 해석에서 기본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은, 인간의 주체성 정립에 있어서 독아적(獨我的)인 성격을 지닌다. 여기서 독아적이란 자기 혼자 밖에 없다는 의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타당한 것은 만인에게 타당하다는 생각을 말한다. 그러나 타자는 늘 홀연히 주변에 나타난다. 이 타자는 순간적으로 내면화될 수 없는데 여기서 주체는 시차적(視差的적) 관점을 나타낸다. 지시와 명령과 법이 주체에게 주어지면 주체는 시차적(視差的)으로 자신을 대상으로 삼아 재관리에 나선다. 그런데 그 인간이 괴물이라면? 시간 의식을 지니고 있는 주체는 시차(時差)에 의해서 영원히 이 시차(視差)적 관점을 극복 못하고 틈을 드러나는 주체상으로 계속 이어진다. 따라서 질적 차이를 허용하면서 시차(視差)의 공존을 인정하는 새로운 주체관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질적으로 불가능한 것들 사이의 공존을 허용하는 공간으로 주체를 이해하는 것이다. “시차적 시각이란 동일한 공간 속에 공존하는 것이 불가능한 대극들이 하나의 공간, 같은 윤곽 속에 공존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관점이다.” 슬라보예 지젝 Slavoj ?i?ek, 『시차적 관점』, (서울: 마티, 2009), p.827. 즉 ‘나 구원을 위한 구원관’ 입장에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다루어지면서 드러나는 구원관을 수립하는 것이다.
5) 옐름슬레브에 의하면, 기호는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고 기능으로 작용하면서 의미가 발생된다고 보았다. 기호 기능의 작동은 이로서 ‘내용’과 ‘표현’면으로 드러내면서 진행된다. 이럴 경우에만 기호는 실체와 연관된 채 제구실을 할 수 있다. 실체와 연관되지 아니하는 기호라면 실제성이 상실되고 허무맹랑한 무의미한 기호로 전락된다. 따라서 내용면에서든지 표현면에서든지 모두 실체와 연관된 형식으로 갖추어지게 된다. 들뢰즈는 이 방식을 도입하여 실체와 형식이라는 두 개의 의미층을 상정하고 각각의 충에 내용-표현의 관계를 구성시켰다. 기본적인 구성단위를 ‘실체’라고 하고, 그 실체를 결합화는 규칙을 ‘형식’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의미는 인간의 주관성에서 벗어나 물질 자체가 뿜어내는 의미에 합류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피’라는 것을 단순히 ‘거룩한 희생’, 혹은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이라는 대체 의미로만 풀이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왜냐하면 왜 하나님께서는 꼭 ‘예수님의 피’ 중심으로 일하시는 이유가 온전히 밝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새언약은 피언약이다. 피라는 실체성이 없이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진정한 의의가 아니다. 옐름슬레브는 전(前)물리적인 자유로운 특이성들을 질료라고 불렀다. 그리고 형식화된 질료를 내용으로 보았다. 이 형식화된 질료(=내용)은 두 관점에서 고려되는데, 하나는 그러한 질료들이 ‘선별된다’는 점에서 실체의 관점이요, 다른 하나는 그것이 특정한 질서에 따라 선별된다는 점에서 ‘형식’이 된다. 이렇게 되면 내용의 실체와 내용의 형식이라는 분절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는 기능적 구조를 ‘표현’이라고 불렀는데 이 역시 두 가지, 즉 실체와 형식의 관점에서 고려된다. 이진경, 『노마디즘 1』, (서울:휴머니스트,2004), pp.186-248. 이 이중분절(분절이란, 분활하는 것과 분할되는 것의 결합관계)에 의해서 ‘피’의 의미를 탐색하면, 내용의 실체면에서는 새빨갛고 물컹물컹한 물질의 ‘피’가 되고, 내용의 형식면으로서는 ‘죽어나가는 제물’이 된다. 그리고 표현의 실체면에서는 ‘예수님의 희생’이 되겠고, 표현의 형식면으로서는 복음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언약 안에서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결속상황’이 된다.
6)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그리스도 안에서 따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엡 1:4, 9 하반절)
7) ‘발생적’이라는 말의 취지는, 대상과 개념의 일치가 자동적으로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일방적인 선(先)이해적이고 우월한 의미결정권의 방해를 받은 않는 채, 숨겨진 의미가 비로소 드러나는 상황을 표현한 말.
8) 인간은 교회를 발생시키는 원인-결과의 합리적 논리성을 요청할 입장에 있지 않다. 교회란, ‘희생양 표지를 가진 집합체’이기에 ‘희생양 사건’의 결과로서만 발생된다. 희생양 사건은 원인은 하늘에 있으며 눈에 보이는 인간 세상의 부정적 성격으로 야기된 사태이기 때문에 교회란 결국 ‘보이지 않는 세상’을 위해 종사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보이는 세상에 대한 책임은 전혀 없다. 이로서 역사적 교회의 개선을 겨냥하고 펼쳐지는 성경 독해는 그 어떤 견해가 되었던 오류다.
9)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1-24)
10)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에로 와서 마려고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7-38)
11) 의미의 표현차원에서는(내용차원과는 달리) 시니피앙(기표)의 원환으로 이루어지는 ‘기표화’의 체제와는 달리 주체화하는 기호체제가 전개된다. 주체는 신을 배신하고 신으로부터 자기를 구별함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명령하는 자가 되고 자신이 명령받는 자가 되는데, 요나는 자기가 자기에게 배신하고 자기가 자기에게 명령하게 되는 것이다. 우노 구니이치, 『같은 책』, pp.203-205. 이처럼 외부의 권력으로부터 일탈하고 자기를 구별하려는 시도는 선악과를 따먹으려고 부추긴 악마의 속성에서 유래한 것이다.
12) 김세윤은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인물이 또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와 일치된다고 보았다. 그렇게 해서 신약에서의 ‘인자’라는 예수님 호칭을 구약의 메시아관과 연계할 수 있다는 근거로 삼고자 하였다. 김세윤, 『“그 ‘사람의 아들”(人子)-하나님의 아들』,(서울:엠마오, 1992), p 46. 하지만 신약에서의 ‘메시아 은닉성’을 염두에 둔다면 다니엘에서의 인자(人子) 개념을 존재론적으로 천상의 인물과 연결하기 보다는 육적인 허약성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는 다니엘의 역사적 실존성에 초점을 두고서 ‘하나님의 이름’과 ‘사람의 이름’의 대비 구조를 통해서 나타나는 ‘메사야로서의 불가피한 은닉적 기능면’을 말하기 위한 인자(人子)개념이 바람직 할 것이다.
13) 장문정, 『살의 기호학』,(파주:한국학술정보, 2005), p 238.
14)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이상한 교착을 통해서 하나의 전체처럼 느껴지는 일종의 동일성을 메를로-뽕띠Maurice Merleau-Ponty 가 ‘신체’나 ‘살’로 칭했던 것이다." 장문정, 같은책, pp. 177-178.
15) 들뢰즈 Gilles Deleuze,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서울:이학사, 2008), pp. 298-318.
16) 신체가 발휘하는 의식의 의미 작용에서 현상학자 후설은 감각을 넘어서는 어떤 ‘잉여’가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밀랍 인형을 보고 한번은 인형으로, 한번은 사람으로 지각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때, 신체 감각이 자율적은 조직화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즉 신체의 감각이란 맹목적이고 물리적인 질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더불어 사태를 파악하는데 있어 상관자(相關者)로서 관여한다는 것이다. 신호재, “후설과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에서 감각의 지향성 문제”, (서울대학교 대학원 문학석사 학위 논문, 2009), pp17-19.
17) 한스 발터 볼프 Han Walter Wolff는 『구약성서의 인간학』이라는 책에서 “그러므로 바사르는 구약성서 안에서 이미 몰락할 운명을 지닌 피조물로서의 무력(無力)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대한 진실함과 순종에 있어서도 허약함을 노정시키고 있다. 피조물과 함께 몰락하는 것은 윤리다”고 언급해주고 있다. Wolff, 『구약성서의 인간학』, (칠곡: 분도출판사, 1981), p 66. 하지만 이러한 비윤리성이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지 못하고 선지자들에게만 예외적으로 영웅의 자태를 부여하려고 한다. 서인석은 『오늘의 구약성서 연구 5』에서 구약 선지자가 겪는 애환과 고통과 그 현존 양식을 다루면서 ‘예언자들은 충절이 넘치고 타협을 모르는 강직함을 근거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비록 예언자의 시대는 악하지만 그 어두움 사회상 가운데서도 일전을 마다하지 않고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쓰라린 고독과 실패 속에서도 결연한 사명감을 끝까지 놓지 않고 인간적인 약점까지 회개를 통해서 극복하면서 기어이 ‘인간의 길’ 보다는 ‘하나님의 길’을 간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서인석, 『오늘의 구약성서 연구』, (서울: 성바오로출판사, 1986), pp. 117-122. 즉 선지자의 자의식은 남다른데서 있었다고 보는 관점이며 이런 선지자의 자의식을 이끌어낸 하나님의 말씀을 주는 긍정적인 면이 오늘날 암울한 이 시대에서도 교회개혁의 희망을 시사하는 교훈으로 적절하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인간의 신체(=살, 바사르)란 외부에서 벌어진 사태에 의해서 반복적으로 그 신체의 허약성을 드러내게 된다는 사실을 회피하고 있다. ‘반복적인 죄’는 곧 신약에서 ‘개가 토했던 것을 도로 먹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 도로 눕는 양상’이 되어 한 번 은혜를 받고 다시 타락해버린 자의 전형적인 배도자를 연상해주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모든 성도에게 적용되는 사항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벧전 2:22/히 6:6) 이런 왜곡은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 되었음’에 관한 증빙자료를 소지하고픈 유혹으로 작용하게 된다. 선지자의 긍정적인 자의식을 본인들이 재현하므로서 그 시대에서 선지자와 같은 위상을 갖추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 반복적인 죄가 아닐까? 참으로 ‘반복적인 죄’에서 벗어난 자들은, 반복적으로 작용하시는 말씀의 위력으로 인해 자신의 내부에서 올라오는 죄악이 반복적으로 지적받는 양상으로 진행된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하시는 기능 앞에서 ‘인간의 이름’이 지닌 기능이 실체가 죽을 때까지 더 깊게 파헤치는 반복이다. 그래서 승리는 ‘말씀의 승리’가 된다. (요일 2:14) 이런 점에서 선지자라고 해서 예외가 없을 때, 선지자는 오로지 묵시의 구조가 보여주는 위력만 증거할 수 있다. 18) 이미 천국에 들어온 작은 아이보다 선지자들은 더 아는 것이 없다.(마 11:11)
19) 묵시란, 종말을 품고 다가선 먹구름 같다. 이 종말성으로 인해, 과거를 답습하는 것으로 계시의 효과를 줄곧 소장하고 싶어하는 의식은 도리어 자신의 근원은 결코 최종 묵시에 노출된 적이 없었다는 근거로 작용한다. 즉 주체와 묵시와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주체의 지속적인 긍정을 포기하지 않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말씀이 지닌 묵시성(고발성=종말성)을 떨어져나가고 말씀을 시간의 순차적 용도로만 사용하게 된다. 이 지점이 바로 왜곡된 해석이 피어나는 지점이다. ‘역사적 필연성’을 위해 ‘말씀의 필연성’을 거절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니 은혜로 순응하라”는 식이다. 묵시란 여기에서 역사의 결여 상태로 취급받는다. 이런 해석은, 가공의 허구로서 묵시 앞에 노출되어야 될 그 주체를 도리어 과도하게 변호하기 위해 과잉된 해석들을 동원시켜서 주변에 배치시키게 된다. 즉 복음을 선택할 자율권이 구원받을 주체에게 있기에 압박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다른 복음으로 인하여 역사 안에서 묵시는 핍박받게 된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소문나게 유명하고 눈에 잘 뜨이는 묵시적 사건이라도 숨겨진 상태가 된다.
20)몸의 불멸을 보장하기 위한 방안으로 인간들은 ‘영혼론’을 창안했다. 몸은 비록 죽어도 자아의 동일성을 영원까지 실어서 보장받을 수 있는 하는 그릇으로 영혼의 존재를 상정한다. 문제는 물질과 영혼과의 관계였다. 과연 물질과 영혼은 어떤 식으로 영속성을 가질 수 있을까? 물질을 미세하게 자르고 또 자르면 과연 영혼화될 수 있을까? 물질의 끝자락에서 영혼으로 건너뛰기 위해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는 각기 다른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신의 존재와 그 능력에 기대를 거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냉철하고 합리적으로 파악하되 우리가 모르는 대목은 신의 몫으로 넘기자. 신은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면 된다”는 식이다. 스피노자는 “우리 자체가 신의 영원한 모양새로서 존재하고 변화하면 된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물질이 아무리 작아도 계속해서 쪼갤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물질마저 영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과거를 등에 업고 미래를 품에 안음으로써 스스로 확장된 지평을 지니는 개별적 자아 자체를 완전한 신의 창조물로 보면 아무 문제가 없다. 내가 나를 만드는 일이나 신이 나를 만드는 일이나 결국 같은 일이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런 일을 하도록 신께서 이미 예정하시고 조화롭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나처럼 영원히 살아간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되면 신을 배제하고 나만 남아도 상관없는 셈이 된다. 이처럼 신의 존재를 배제하고 현재 몸을 가지고서도 몸의 영원함을 보장받는 아이디어가 제3시기 불교라고 할 수 있는 유식(唯識)불교에서도 나온다. 고통과 번민의 원인이 자아의식에 있음을 발견하게 자아를 없애서 무아(無我)로 전환하면서도 윤회설로서 자아의 영원성도 더불어 보장받을 수 있는 견해를 함께 수용하기 위한 설이 바로 종자(種字)설이다. 보다 고품질의 자아로서 영원히 윤회하기 위해서 종자라는 영혼의 씨앗에 선행이라는 업(행위)을 가미해서 빠른 시간 내에 윤회를 멈추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야 완성이라는 주장이다. 일종의 불교적 성화론인데, 수행의 단계는 41단계에 이른다. 이경호, 『〈成唯識論〉에서 본 유식사상과 화이트헤드의 과정 사상의 비교 연구』, 2007년도 감리교신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51 칸트에 있어서 자아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 체계의 제 1원리를 점검하면서 제시된다. 즉 “나는 존재한다”라는 무규정 사태를 “나는 생각한다”라고 하는 ‘규정’에 곧바로 연결시키고 있지만, 두 가지가 연결되기 위해서는 무규정적인 것이 규정 가능하게 되는 형식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무규정적인 존재가 “나는 생각한다”에 의해서 규정 가능하게 되는 형식이란 시간의 형식이다. 시간 속에서만 규정된다. 그것이 수동적 또는 수용적이며, 시간 속에서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무전제로 자발적이로 실체적이지만, 칸트에게 있어서 ‘나’란 어디까지나 수동적이고 시간속에서 마치 ‘타자처럼’ 출현하는 현상에 불과하다. 여기서 칸트는 ‘초월론적인 것’(초월적이 아니라)을 발견하는데 이는 것이 인간을 넘어서 지고의 통일성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험 불가능함이라는 의미에서 선험적인 차원을 가리킨다. 이로 인하여 자아는 금이 간 ‘나’를 시간 속에서 응시하게 된다. 이로서 인간은 자기 죽음에 미리 입회할 수 미리없게 된다. 시간의 순수하고 공허한 형식은 경험론적 차원을 넘어서 있다. 단지 비신체적인 사건이 반복을 맞이할 뿐이다. 우노 구도이치, 『같은 책』, pp.111-120.
21) 태고적 합리성이다. 이것이 창조의 내막을 밝히는 암호로 사용되어진다. 연속성을 지닌 현에다 마디를 눌러주면 질서가 발생되는 것처럼 낮의 밝음을 어두운 저녁이 눌러주면 그것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윤곽을 갖추게 된다. 시간은 운동의 수치요 척도이다. ‘이레’란 안식의 차원의 표기라서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시간이다. 곧 은닉된 다른 주체에 의해 조성된 질서 척도다. 시간과 더불어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주체적 질서와 더불어 운동해서 그 주체를 지향한다. 이 시간적 단락으로 인해 인간의 시간 해석에 의한 의미의 자리는 파괴당한다. 다니엘 때에 와서 주체자는 ‘인자의 몸’으로 등장되므로서 그 응징의 상대자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 된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인간의 역사 단위로 사용하는 1년의 단위로서는 역사의 배경을 드러낼 수 없게 된다. 역사가 짐승에 의해서 어떤 식으로 멸망하는지 밝혀지지 않는다. 역사의 질이란 인자의 몸과 짐승의 몸과의 상관성 안에는 묵시적 질서를 나타내는 시간적 단위, 즉 이레가 작용하는데 그 이레가 반으로 나뉘어져 ‘3년 반’이라는 수난 과정을 거치면서 저주받는 이유가 밝혀진다. (약 5:17/왕하 8:1)
22)사건과 사건 사이에는 무한히 매개하는 사건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 사건들의 평균치를 추정하는 것으로 진리로 삼을 수는 없다. 등질성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주체 인식을 확립하기 위한 농간이요 전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3) 이정우,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 한길사(서울, 2008), p. 239.
24) 출애굽기 33:21-22에 보면,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고 되어 있다. 하나님은 모세를 한 지점(반석)에 고정시킨다. 변화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을 고정적으로 붙잡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일 후에 언약이 주어지는데 원판 십계명을 대신하여 인간의 손으로 만든 깨진 복사판 십계명을 언약궤 상자에 담아서 그 언약궤 위에 하나님의 이름이 임재하신다. 이는 이스라엘이 이미 언약을 깨뜨린 장본인 입장에서 언약에 관여된다는 말이다. 이로서 인간의 하나님과의 만남이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드러내는 상대자로서 ‘목이 곧은 백성’의 자격으로 이루어진다. (출 34:1-9)
25) 사건과 주체와의 관계성에 대해서 알랭 바디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알랭 바디우, 『들뢰즈- 존재의 함성』, 이학사(서울, 2001). pp 316-320. 사건이란 한 상황을 벗어나서 이러저러한 원소를 분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분간되도록 놔두지 않는 것이다. 사실 분간이라는 것은 상황과 상황의 상태가 보여 주는 셈과 부분들의 과정 아래 놓이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건은 정확하게 말해서 하나의 상황을 이러한 정규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 그리하여 그것을 분간 불가능한 것이 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결과를 볼 때, 벗어남이란 상황 또는 질서를 벗어나서 어떤 형식으로든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상황 또는 질서의 그 어떤 분간 불가능한 진리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벗어남, 즉 산출적인 사유의 독창성이란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산출적인 사유는 우리를 바디우 고유의 주체의 개념으로 안내한다. 왜냐하면 바디우가 말하는 주체는 산출적인 사유의 측을 이루는 개념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분명하게 말한다. “오로지 산출적인 공정의 개념만이, 대상이 배제된 후 -사건적 진리의 단순하고 유한한 단편으로서의 주체를 드러나게 하면서 진리의 탈대상화와 주체의 탈대상화를 포섭한다”. 또는 “주체는 산출적인 공정의 유한한 순간이다.” 그렇다면 바디우가 말하는 주체란 무엇인가? 하나의 산출적인 공정이 있을 때, 우리는 이 공정에 의거해서 이러저러한 공정의 생산물인 유한한 국지적인 짜임새 하나하나가 곧 하나의 주체인 것이다. 이것은 ‘주체’라는 이름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그 어떤 절차, 말하자면 분간하는, 긁어모으는, 재취합하는 등의 절차, 즉 산출적인 공정이기도 하다. 정리하면, 주체는 충실성에 바탕하여 검열을 행하는 공정, 따라서 사건을 보장하며 진리를 고려하는 공정이기도(산출적인 공정) 하지만, 이와 동시에 주체는 충실성에 바탕한 검열에 의거하여서 사건의 이름에 연결된 항들 중 이러저러한 항들로 짜여진 하나의 유한집합, 따라서 진리의 유한한 한 부분(산출적인 공적의 생산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같은 정의와 해석으로부터 바디우가 말하는 주체의 성격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점들을 추출해 낼 수 있다. 첫째 주체는 대상이 배제된 주체이다. 왜냐하면 주체는 검열을 행하는 공정이자 그 공정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또는 달리 표현하자면 주체는 작용이지 작용의 결과요, 생산이자 생산물이기 때문이다. 주체는 둘의 시각에서 보자면 갈라진 간격에 대한 사유의 실행이자 그 실행의 결과인 것, 충실성과 검열의 시각에서 보자면 충실성에 바탕한 검열을 행하는 공정이자 그 공정의 결과인 것, 진리의 시각에서 보자면 진리의 실존이 매번 동반하는 것으로서 진리의 생산이자 그 생산의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바디우의 주체는 주체-대상이라는 상관관계 안에서 거론되는 대상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대상이 배제된 주체인 것이다. 둘째, 주체는 언제나 사건 또는 진리의 조건 아래에 있는 주체이다. 주체는 미래의 어떤 순간에 그와 더불어서 어떤 사건이나 진리가 있게 된다고 할 때의 바로 그것이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주체는 사건 또는 진리의 부분이기도 한 것, 따라서 사건 또는 진리에 의존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체는 결코 홀로 존재하는 그 무엇도, 사건이나 진리에 앞서서 미리 존재하는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사건 또는 진리의 조건 아래에서만 존재한다. 셋째, 주체는 분간이 불가능하다. 또는 주체는 분간이 불가능한 것을 행한다. 왜냐하면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진리는 그 자체가 분간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결국 진리의 유한한 한 부분으로서의 주체, 또는 진리의 조건 아래에 있는 주체 역시 당연히 분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넷째, 주체는 그 정의상 국지적이다. 왜냐하면 주체란 충실성에 바탕한 검열에 의거하여서 사건의 이름에 연결된 항들 중 이러저러한 항들로 짜여진 하나의 ‘유한집합’. 따라서 진리의‘유한한 한 부분’을 말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주체는 그 자체가 우연하며 희소하다. 바디우에 따르면 라캉은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주체를 우리가 필히 가정해야만 하는 비어 있는 어떤 점으로 사유한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라캉에게 있어서의 주체는 보편적으로 가정된 주체가 되고 만다. 하지만 만약 주체가 사건 또는 진리의 조건 아래에 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주체 역시 사건 또는 진리와 마찬가지로 우연하며 희소할 수 밖에 없다. 여섯째, 주체는 언제나 전미래적이다. 왜냐하면 주체는 미래의 어떤 순간에 일어날 그 어떤 사건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또는 바디우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주체는 하나의 산출적인 공정이 미래에 성취한다는 조건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주체에 대한 약식 정의 안에 있었던 표현 ‘후- 사건적’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주체의 성격이 남아 있다. 존재론을 근본적으로 개혁한 이후, 그리고 사건의 가치를 드높인 이후, 이제 마지막으로 사건적 진리가 새로운 상황 안에서 자리 잡는 것을 결정하는, 그리하여 사건적 진리를 존재론 안으로 들여오는 산출적인 주체의 이론을 전개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존재와 사건 사이의 내재적인 통합을 성취하겠다는 것이다. 분간 불가능한 진리가 새로운 상황 안에서 자리 잡는 것을 주체는 과연 어떻게 결정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주체의 일곱 번째 성격이라 할 수 있는 언어적인 성격을 미리 숙지할 필요가 있다. 주체는 이름들을 산출하며 더 나아가 진술들을 산출하는 주체이다. 왜냐하면 주체가 진리를 산출한다고 할 때의 산출은 언제나 개입을 동반한 산출이기 때문이다. 개입이란 사건을 지칭하거나 자격 짓기 위해서 사건적 장소의 현시되지 않는 어떤 원소에 대해 이름을 부여하는 일임을 상기하자. 그리고 주체가 이름들과 진술들을 산출하는 주체라는 사실은 곧 주체는 동시에 언어-주체이기도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러한 이유에서 바디우는 주체와 더불어서 언어-주체를 언급한다. 바디우는 우선 비록 사건적 진리는 분간이 불가능하며 질서를 벗어나고 있다 할지라도 어쨌든 그것은 그 정의상 상황의 한 부분에 해당한다는 사실로부터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즉 지식에 의해서 확인이 가능한다(또는 백과사전 안에 등록되어 있는 )그 어떤 고정 관계를 지탱하고 있는 항(또는 항들)이 사건적 진리에 (즉, 충실성에 바탕한 긍정적인 검열을 통해서 모여진 항들에) 귀속해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런데 바디우에 따르면, 만약 우리가 보게 되는 경우가 전자일 경우에는, 주체 사건의 분간 불가능한 진리를 새로운 상황 안에서 자리 잡도록 결정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왜냐하면 지식에 의해서 확인이 가능한 그 어떤 고정 관계를 지탱하고 있는 항이 애초의 상황과 사건적 진리에 동시에 귀속해 있는 경우에는, 양쪽에 공통적으로 귀속해 있는 이 항이 주체로 하여금 언어-주체의 진술을 위해서 진실성의 결정을 하도록 강제를 행하게 되고, 따라서 이제 그 결과로서 언어-주체의 진술이 새로운 상황 안에서 진실한 것으로서 자리를 잡게 되기 때문이다. 사건의 분간 불가능한 진리가 새로운 상황 안에서 자리 잡는 것을 주체가 결정한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정은 애초의 상황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성이나 예측이 완전히 불가능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주체에게 진실성의 결정을 강제하는 항, 즉 지식에 의해서 확인이 가능한 그 어떤 고정 관계를 지탱하고 있는 항이 애초의 상황에 귀속은 오로지 그 자체가 벗어남을 가리키는 산출적인 공정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언어-주체의 진술이 그 안에서 진실한 것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상황 또는 사건의 분간 불가능한 진리가 그 안에서 자리를 잡게 되는 상황을 애초의 상황과 비교해서 새로운 상황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한편 위의 말을 뒤집어서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된다. 만약 언어-주체의 진술이 새로운 상황 안에서 진실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면, 이것은 곧 지식에 의해서 확인이 가능한 그 어떤 고정 관계를 지탱하고 있는 항이 애초의 상황과 사건적 진리에 동시에 귀속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26) 예수님의 언어와 행동 뒤에는 인간으로서 도저히 파악될 수 없는 예수님이 겹쳐져 있다. 인간이 해석에 있어 주체적 입지를 작렬해서 그 예수님을 파악하고자 하는 순간, 인간으로서의 주체는 깨어진다. 말씀 안에서 예수님의 주체와의 만나게 되면 인간의 주체성을 버텨낼 수가 없다. 이로서 성도의 주체성은 ‘도저히 못 버팀’을 그대로 보여주는 주체이게 된다. 인간의 주체는 악마가 장악하고 있는 권력이 장에서 인간은 그 실천성을 나타내는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형식의 양상이나 제도를 붙들고 실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룩한 말씀이 이 진리성에 구멍을 낸다. 보태기(합산)로 일관하는 인간 세계에 뺄셈(공백)이 관여해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무한의 부분집합의 안목에서 추상적인 무한의 세계마저 현실 속에의 유한의 양인 것처럼 다룰 수 있다. 단 이 과정에서 그것을 다루는 인간의 근원은 텅 빈 공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러난다. 즉 인간의 허무한 존재로서 세상을 허무의 세계로 인식하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27) 매개란, 오직 자발적인 운동을 통해서 얻어지는 자기 동일성을 말한다.
28) 성도가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것은 반복되는 십자가 사건의 능력 안에서 육적 상상력이 늘 부정당하면서 그 묵시적 동일성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갈 5:24) 즉 ‘하나님의 형상’ 뒤로 하나님을 숨기고서는 인간의 접근을 차단하는 틀 안에 인간이 갇히게 하신다.
29) 관절은 ‘단절’과 ‘절단(=분절)’의 의미를 지닌다. ‘절단’은 역사의식을 쪼개어서 느부갓네살왕의 경우처럼 도저히 예상 못할 돌발적인 사건이 그 쪼개진 틈을 통해 역사 지평 위로 실체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분절’이란 그 방출된 계시가 역사적 의미들을 벼랑까지 밀어붙이므로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마음이 있어도 깨닫지 못하는’ 상황들을 확대시켜 나가는 시도를 의미한다. 즉 음성 언어의 조건인 분절은 그 자체 비음성적인 것, 곧 문자언어가 지닌 의미의 한계를 말한다. 이렇게 해서 절단된 조각들은 전체가 묵시가 만들어낸 공명 효과에 모두 참여하게 된다. 음성 언어가 내뱉는 로고스는 문자 언어라는 흔적의 개입을 통해서 숨어버리면서도 또한 그 흔적의 개입 덕분에 그 동질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레비나스는 이 흔적이 연결하는 시간성 덕분에 ‘메시아적 구조’를 드러낸다고 한다. 서동욱, 『차이와 타자』, (서울:문학과 지성사, 2008), pp.22-23. 그래서 복음은, 복음을 접수하는 주체 내부에 역사적 구조계열과 묵시적 구조 계열이 공존함을 노출시킨다. 그러면서도 그 차이를 드러내는 자체로서 새 계열을 열어준다. 따라서 늘 낯설고, 인간의 주체화 작업에 대립적이다.
30) 70이레 예언을 알려주시는 하나님은 일단 다니엘의 몸에게 주셨다. 이 몸에 우리의 현재 몸을 대체시켜 버리면 다른 해석이 나오는데 그 이유는, 다니엘 몸과 우리 몸 사이에 지속적으로 개입해 온 70이레 해당되는 예언의 능력으로 인해 신약시대의 성도의 몸을 계시의 결과물로 되게 하시는 예언적 변화를 누락시키는 바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몸을 70이레 계시를 최초로 받은 다니엘 몸과 관련시키려면 우리의 몸의 자리에 예수님의 몸이 침범해서 탐색당해야 하고 해체당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으로서 어떻게 처치 곤란한 아담의 몸이 품고 온 근원적인 과오로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폭로당해야 한다.
31) 1이레층은 한 인물에 집중되는데 이를 위하여 7이레와 62이레층이 있다.
32) 역사란 순서를 갖추고 정렬된다. 그러나 이 역사적 관점을 바탕으로 하여 묵시를 파악하려고 하면 역사적 인과관계로 환원되기에 묵시적 사건으로 순식간에 소멸되어 역사적 사건으로 흡수되어버린다. 즉 역사 밖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역사로 환원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묵시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 뭐든지 일어날 수 있는 현장이다. 역사의 순서와 정렬을 따르지 아니한다. 따라서 묵시적 관점이란 주체가 역사를 부정하고 부순다고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묵시적 사건 안에 도리어 장악당할 때 드러난다.(고후 12:2 “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이 자체가 완료다.
33) 묵시는 에덴동산에서 이미 역사와 더불어 출발하였다. 선악과는 일종의 문제(과제)였는데 그 문제를 인간이 건드려주므로 말미암아 문제 자체가 인간 면전에서 사라져 격리되고, 그 문제는 생명나무가 받아내어 생명나무가 곧 그 문제의 그 답으로 등장하는 식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러한 ‘생명나무 의미로의 귀속’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역사적 개념의 해석하는 절차에 대한 실마리가 된다. 즉 모든 성경의 개념의 배후에는 여전히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세트가 기반으로 깔려있다는 말이다. 계시가 역사 위에 흔적을 남기면서 지나가면 그 상징성에 대해서 오류 있는 인간들이 건드려주므로서 배후에 숨겨진 답이 튀어나는 식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인간들은 수시로 문제(과제)를 부여받게 되고 그 해답은 추적해내는 절차에 가담하게 되는데 해답이란 인간이 죄인임(선악과 따먹은)을 폭로시켜내는 생명나무의 효과의 장(場)이기도 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