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강-YouTube강의(성도의 모습)170620-이 근호 목사
194강, ‘성도의 모습’입니다. 내가 성도일까? 아니면 성도 아닐까? 사람은 다 한 번 자기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니까 성도라는 기준 같은 것을 맞추고 그 기준에 부합되고 맞추고 싶어 할 거예요. 정형화된 성도의 모습으로 규정화된 그러한 기준을 세운다면 어떤 자들이 성도라고 할 수 있느냐 그걸 4가지로 보겠습니다.
첫째는 복음을 자신보다 더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 바로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자신보다 더 중요시 여기는 사람. 그래서 이게 복음을 자신보다 더 중요시 여기는 것이 성도의 모습이기 때문에 여기서 누가 탈락하느냐 하면 개인 구원을 추구하는 사람은 다 탈락하는 거예요. 개인구원 추구하는 사람.
나 죽어서 천국 가느냐, 마느냐, 이거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리 복음을 이야기해도 복음을 듣고 난 뒤에도 여전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 복음보다 자기 자신을 더 챙기려고 하겠지요. 개인구원은 다 탈락입니다.
복음이 자신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이 복음이 나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니 그게 어디서 나왔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복음이 증거가 되는 성경말씀에 관심을 갖게 되겠지요. 관심을 갖게 됩니다.
말씀에 관심을 갖게 되게 되면 자연적으로 말씀에 관심 갖기 전에 관심 갖은 게 있었을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세상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세상으로부터의 구원 또는 세상에서의 탈출, 애굽에서의 벗어남, 그런 이야기할 때 애굽에서의 벗어남 또는 세상에서의 벗어났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에서 벗어났다 할 때 그게 우리한테 어떤 식으로 정리가 되느냐 하면 관심사가 전에는 말씀보다도 세상에 더 관심이 가있고 머리가 전부 다 세상적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거예요.
세상에서 나는 어떤 존재의 자리를 가질 것인가, 다른 말로 하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대단한 존재로 생각할 것이냐, 거기에 관심가지고 있다가 이제는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복음이 자신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정말 이건 중요한 거예요.
복음이 자신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은 내 구원이 우선이 아니다 이 말이지요. 복음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 복음의 피조물로 우리가 있기 때문에 나보다 더 소중한 것에 있다 보니까 그 소중한 것이 어디서 나왔는가? 말씀에 나와 있다. 그 말씀에 관심 두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요.
첫 번째는 복음이 나보다 더 중요하고, 두 번째는 복음이 나왔던 그 바탕이 되는 이 말씀이 어떻게 해서 여기서 복음이 나왔는지, 나보다 더 중요한 게 나왔는지를 말씀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세 번째는 뭐냐 하면, 그 말씀에서 복음이 나오는 그 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은 뭐가 되느냐 하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게 되요. 이게 자기 부인이라 하는 겁니다. 말씀을 덮어버리면 인간은 절대로 죄인이 아니에요.
왜냐 하면 나는 말씀을 어느 정도 안다. 나도 니한테 못지않아. 남하고 비교해서 기죽지 않으려고 하는 애쓰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관심을 말씀으로 갖게 되게 되면 자기가 죄인이 되어버리지요. 왜냐하면 복음이 나오는, 복음을 만든 분이 성경에서는 내가 아니고 예수님이 이 성경을 가지고 가서 복음을 만들었기 때문에 나는 뭐냐 말이지요.
그러면 예수님 앞에서 나는 죄인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거꾸로 하게 되면 나는 죄인이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말씀에서 복음이 나와서 그 복음이 우리를 건지니까 하나님께서 생각하기를 나보다 더 복음이 우선이 된다. 논리적으로 맞는 겁니다.
자기가 죄인이 되니까 4번째 마지막이 뭐냐 하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이렇게 예수님을 알고, 성경을 알고, 여기에 관심을 두고 천국 백성을 이미 시작하게 하신 거니까 뭐가 되느냐 하면 감사가 되겠지요. 모든 일에 감사가 되겠지요.
그리고 내가 생각한 현실이라 하는 것이 전에는 내가 만든 현실이라 생각했는데, 성경에서 유발된 성경이 성경답게 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형성되어왔던 환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제 취직했다면서요?(옆 목사님에게) 바로 취직했다는 것은 모든 게 감사하는 거예요. 지난 낮 설교에서 했지만, 주어진 것에 겁내지 마라 했지요.
공익된 것에 대해서 겁내지 말아야 되는데, 힘든 일에 대해서 겁내지 말아야 되는데 겁을 낸다는 것은 자기가 죄인 아니라는 뜻이고 죄인 아니라는 말은 뭐냐 하면 나는 나를 가장 더 소중하게 여기고 모든 관심사가 나한테 쏠려있다는 그걸 반증해주는 거예요.
모든 일에 감사하니까 모든 일에 두려움이 없지요. 내가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목표를 정해 놓고 하는 게 아니고 나한테 다가오는 것은 나로 하여금 죄인 되게 만들기 위해서 다가오는 상황이니까, 내가 죄인 되게 하신 상황에 대해서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 나오는 특히 신약성경의 사도바울의 편지에 나오는 성도의 모습이에요.
그러면 이래가지고는 잘 몰라요. 성도 아닌 게 뭐냐를 알아야 되지요. 성도 아닌 것을 4가지로 한 번 뽑아봤어요. 복음보다 구원받은 자기 자신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바로 성도 아닌 자지요. 그런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교회가면 찾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 목사가 복음을 사랑하겠습니까? 교회를 사랑하겠습니까? 교회를 사랑하지요. 그러니까 성도가 아닌 거예요. 교회가게 되면 복음 아닌 것을 확실히 알 수가 있는 겁니다. 다들 가봤다가 나왔겠지만.
그러면 두 번째, 말씀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교회 운영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거예요. 교회 운영에 대해서 관심 있다 보니까 교회 운영이라 하는 것은 누가 와야 되느냐 하면 사람들이 몰려와야 되겠지요. 그러면 사람들이 뭘 좋아하느냐를 성경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겠지요. 사람들이 뭘 좋아하는가.
예레미야44장17절에서18절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정녕히 실행하여 우리의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방백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대로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대저 그 때에는 우리가 식물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니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핍절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정녕히 실행하여 우리의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방백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방식이 뭐냐,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린 것을 다 그렇게 해왔어요. 예레미야 당시에 이스라엘이. 선조들도 그랬고 왕들도 그랬고 했는데, 그 때는 우리가 식물이 풍부하고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않았어요.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제사를 드릴 때는 모든 것이 만사형통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핍절하고 칼과 기근으로 멸망을 당했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교회가 복음을 전하게 되면 무엇이 그리워지느냐 하면 복음 없어도 너무 잘 먹고 잘살고 아주 매주 십일조가 더 증가했던 그 시절이 좋았던 거예요.
그런데 복음을 전해가지고 사람들이 훅 가버리고 교회 운영 어려우면 예레미야44장에 나오는 이 저주받을 인간하고 똑같은 고백을 하게 되는 겁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을 때는 그렇게 교회가 재미있더니만 복음을 전하고 난 뒤에는 다 가고난 뒤에 교회 운영도 안 된다. 누가 책임질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게 바로 평소의 관심사가 자기 자신. 복음에는 관심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거예요.
세 번째가 뭐냐 하면 경쟁에서 남을 이기려고 해요. 신자 아닌 사람은. 이 교회가 다른 옆에 있는 교회보다 빨리 성장하고 부흥되기를 원해요.
네 번째는 감사가 없고 항상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불안, 불안하고 걱정, 근심이 늘어나는 겁니다. 늘 불안하지요. 늘 불안하니까 늘 철야해야 되고 늘 돈을 많이 바쳐야 되고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특히 신약성경에서 사도바울의 편지에는 성도 아닌 자들을 천국가기 전에 실컷 구경하세요. 교회에서만 아니라 이런 회사에서도 실컷 구경하세요.
또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지요. 복음이라는 신자의 모습은 자기보다 복음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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