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강-YouTube강의(판단근거)170919-이 근호 목사
제202강, 제목은 ‘판단유보’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주변의 상황 속에서 자기가 생존해야 되기 때문에 쉴 새 없이 판단하고, 분석하고, 결정하고, 선택하고, 추진하고, 결과 기대하고, 그리고 그러한 상황이 지나가면 또 다시 그런 일을 반복하지요. 그렇게 행동하는 그러한 모습을 보이는 근거가 뭐냐 하면, 내가 살아야겠다는 거죠.
왜 죽으면 안 되는데? 하는 그 답변은 자기가 몰라요. 이유도 없이 무조건 살아 남다보니까 판단을 하게 되고, 분석하게 되고, 평가하게 되고, 내 생존에 무엇이 유리한지를 또 모색하고 자꾸 연구하게 되는 겁니다. 모든 행동은 바탕에 자기가 무조건 적이죠. 무조건 적으로 맹목적으로 무조건 살아남아야겠다는 거예요.
왜 존재하는가? 살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죠. 왜 살아야 되는가? 그건 존재하는 목적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왜 살아야 되는가, 하는 답변은 없어요. 있으니까 살고, 왜 있느냐하는 그것에 대한 답변은 없지요.
그래서 인간이 뭔가 판단하고 분석하면서 그것을 자기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진리라고 이야기해요. 옳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옳은 것이 일방적이에요. 왜냐하면 일단 나는 살고보자가 바탕이 되어있기 때문에 자기의 어떤 사람이 “내가 니 죽여 줄 테니까 어떻게 내 뜻대로 하겠느냐?” 하면 그것은 거부해 버립니다. 그게 진리라 할지라도.
그래서 인간 자체가 자기의 의지와 현재 자기 상황을 비교하지 말고 같은 인간들과 비교하지 말고 예수님과 비교해봐야 돼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진리라고 했잖아요.
예수님이 진리라는 말은 본인들은 진리가 아닌 겁니다. 예수님이 진리라고 한 근거가 있어요. 그것은 인간들이 모르고 있는 하나님 아버지를 유일하게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내가 곧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다.
예수님이 길이란 말은 다른 것은 길이 막혀있다는 뜻이고, 예수님이 생명이라 하는 것은 너희들은 다 죽어있다는 뜻이고, 예수님이 진리라는 것은 모든 인간들은 악마 편에 서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요한복음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것을 이제 마태복음 산상설교 같은 경우에는 그러한 취지를 다른 여러 가지 표현으로 나타낸 겁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마태복음5장37절에 보면,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 말씀은 뭐냐 하면 너희들은 니가 어떻게 살아남느냐를 위해서 니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고 무엇이 악이냐, 더 쉽게 말해서 이미 이 세상 전체가 악인데, 사람은 그 악으로서 안 나타나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내가지고 “거봐, 이미 니가 악의 구덩이 속에 이미 일부로 니가 여기 들어 있잖아.” 라는 것을 티내기 위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나름대로의 어떤 분석이나 평가, 의지, 행위를 하게 만들어요.
그러면 그건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의 모든 행동은 자기 살기 위해서 행동하잖아요. 살기 위해서 행동하기 때문에 항상 자기 위주입니다. 자기가 우선이지요. 그러다 보니까 주변에 있는 상황 속에서 자꾸 거기다가 희망과 기대를 걸게 되어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자꾸 맹세를 하는 겁니다.
이게 마태복음5장 37절 말씀은 제가 언급했지만, 앞에 말은 뭐냐 하면 맹세를 자꾸 하는데 그 맹세를 할 때에, 확보된 것이 확실하고 요 확보된 확실한 것 속에서 나는 거기에 같이 놓여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맹세하는 것은 아마 유효하고 효과 있을 것이라는 식으로 맹세를 하게 돼있습니다. 인간들이.
그게 뭐냐 하면 나는 하늘로부터 맹세하고, 땅으로부터 맹세하고, 예루살렘으로부터 맹세하고, 내 아는 들은 지식으로도 맹세하고 그렇게들 해오는 거예요. 든든한 토대와 근거만 있으면 그 토대 위에서 내가 존재하게 되면 내가 그 토대가 내가 기대하는 맹세나 기도에 대해서 원하는 대로 소원을 들어줄 것이다. 그런 토대를 자꾸 쥐려고 하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하나님은 내 소원을 들어 줄 거야.’ ‘나는 이 거룩한 땅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 거룩한 땅의 일부이기 때문에 땅이 거룩하기 때문에 이 땅에 살고 있는 나도 같이 거룩하니까 내 소원은 들어줄 거야.’
또 ‘나는 집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늘 특별히 마음먹어서 예루살렘 성전에, 예루살렘 성에, 예루살렘 도성에 와 있으니까 이 도성은 아주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도성이니까 거기서 내가 맹세하게 되면 덩달아 같이 내 맹세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리 생각하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교회 앞자리에 떡~ 앉아있으면 앞자리는 은혜의 자리잖아요. 흔히들 그렇게 이야기하잖아요. 내가 앞자리에 왔으니까 내가 하는 기도나 맹세에 대해서 효험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뭐냐 하면 하늘로부터는 말라. 그건 하나님의 보좌다. 그건 니가 거기에 같이 끼어 들 위치가 안 된다, 입장이 안 된다. 이 말이지요.
땅으로는 말라. 이건 하나님의 발등상이다. 이 땅이라는 것이 니 소원 들어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움직이는 하나님의 구체화된 그런 본부인데 니가 거기다가 니 소원 들어 줄 그런 여유는 없다는 거죠.
예루살렘으로 말하기는 큰 임금님의 성이요. 주님의 계시는 성인데, 예루살렘을 니가 이름 빌려가지고 니 소원 들어주려 하지 마라. 니 머리, 니가 들었던 그동안 지식과 니가 경험이나 체험담, 그것가지고 요번 기도와 요번 내 소원은 아마 성취가 될 걸. 보상이 될 것이다. 그런 생각도 하지 마라.
왜냐하면 너의 머리는 너의 머리카락 한 터럭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다. 이 말은 결국은 뭡니까?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내 입장에서 뭔가 시도를 할 수 있는 어떤 건덕지도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허락한 적이 없다. 이 말이에요. 일체.
그럼 뭐냐 그러면 하나님이 주는 대로 니는 존재할 뿐이라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너희 말이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그것만 해라. 그거 더 나아가면 악이 된다. 현재 주어진 것에 대해서, ‘아,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구나!’ ‘이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구나!’ 라고 이미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너희 입장이 된다. 수동적으로.
수동적이라 하는 것은 니가 설치기 전에 주님이 너보다 더 설치고 그 설침의 설친 결과로 니가 여기에 존재해서 있는 겁니다. 여기서 더 넘치는 것은 전부 다 뭐가 된다? 악이 된다 했어요. 그러니 이 말씀은 아까 이야기했지만, 처음부터 인간은 이미 악 속에 있는 거예요. 악 속에.
악 속에 있으면서 내가 이 악 속에 있다는 것이 안 들어오는 이유는 자기 사는데 급급해서 그래요. 내 존재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악의 일부로서 같은 악이다. 라는 생각을 추호도 안하게 되지요. 할 마음도 없고 안하게 된다. 이 말이에요.
니는 악 속에 태어났다는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만들어진 거예요. 수동적으로 살아야 된다. 그리고 감사해야 된다. 이게 주의 뜻이다. 라고 하고 싶어도 어느새 우리는 내가 능동적이 되어가지고 소원이 있습니다. 이거 들어주세요. 하나님 나 살고 싶습니다. 내가 하나님 이름으로 맹세하겠습니다.
자꾸 이런 것이 툭툭 튀어나올 때, 우리는 처음부터 악에 속했다는 것이 오히려 편이 되는 그러한 도구가 되는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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