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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강의-없는 분 17091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9. 22.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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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민희 (IP:221.♡.139.88)17-09-21 16:58 
가락-요한복음 15장 1절(없는 분)170919a-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요한복음 15장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다 이렇게 되어있지요. 이 대목에서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이 대목에서 제일 중요한게 이거예요. “내가” 예요. “내가”. 


왜 ‘내가’가 중요하냐 하면은 부처가 십자가 질수 도 있는 문제고 피 흘릴수 도 있는 문제이거든요. 공자가 그 시대의 권력에 대항하다가 바른 소리 하다가 순교당할수 있다 이 말이죠. 근데 부처가 십자가 지고 공자가 십자가 지고 소크라테스가 십자가 지면 메시아 입니까? 아니죠. 


왜 십자가 당했던 사람들은 그렇게 많고, 그냥 억울하게 정치범으로 몰린사람도 그렇게 많고, 바르게 살다가 모함당해서 죽은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닌데 왜 하필이면 나사렛 예수일까요? 그 문제에 대해서 이천년 신학자들이 머리 계속해서 해도 그걸 해명한 사람은 내가 보기엔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단 한사람도 없어요. 


‘예수님은 억울하게 죽었다. 그 당시에 그 권력에 죽었다. 전부다 십자가는 희생이다.’ 온갖 성경에 있는 것을 다 동원했는데 왜 나사렛 예수만의 희생이, 왜 그분만의 희생이 왜 구원의 능력이 되느냐? 


그것을 설명을 못하니까 십자가를 설명하고 신학자들이 십자가를 설명할때는 ‘억울한 죽음이였다. 세상죄를 지고 갈 때 얼마나 아팟겠는가’ 뭐 이런식으로 ‘참 의인이였지만 죄인을 위해 죽었다.’ 뭐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있잖아요. 그걸 이야기 하는데 왜 예수님만 의인이여야 하는냐 이말이예요. 왜 예수님만. 

뭐냐하면은 왜 공자 맹자 부처 이런 사람은 왜 안되냐이말입니다. 그것을 설명할수 있는 언어적 근거가 인간의 그 정신적 근거가 인간에게는 일체 없어요. 일체 없습니다. 이것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존경을 표할려고 합니다. 참 훌륭하신 분, 대단한 분, 이렇게 존경을 표한 순간 왜 예수만이냐 하는 것은 이제 끝나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바울에게 있어서는 주님을 딱 만났을 때 뭐라고 이야기 했습니까? ‘당신이 누구십니까?’ 이야기 한거예요. ‘당신이 누구십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하고 묻는게 아니예요 지금. 


얼마나 착하십니까? 훌륭하십니까? 그것을 묻는게 아니고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는 거예요. 그 질문은 뭐냐하면은 자기라는 그 존재, 나라는 존재가 같이 연결 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존재가 아니예요. 존재는 존재인데 주님 나타난 계시인데 현재 우리들끼리 인간들끼리 있는 존재한 그것을 예수님한테 갔다 붙일 수 없는 거예요. 예수님은 뭐냐하면은 이게 나타나도 뭐가되느냐하면은 나타나도 없는 분이 되요 없는 분. 나타나도. 


공자는 왜 안되는데? 맹자는 왜? 부처는 왜 안되는데? 하는데 부처, 공자, 맹자 전부 다 뭐냐하면 없는 존재가 아니고 없는 분이 아니고, 다 있는 분이잖아요. 그렇죠?! 간디고 모든게 있잖아요. 


나같은 죄인을 건질 때 누굴 건지지? 오! 저 사람 괜찮네. 내가 여기 있는 것처럼 나를 구원할 자를 나하고 똑같이 있는 분으로서 엮어지고 연결된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의롭게 희생당하고 고생해도 그 사람은 메시아가 아닙니다. 

  
메시아는 우리가 찾고자 해도 없는 분이여야 되요. 없는 분이 되게 되면 없는 분이 우리에게 나타나게 되면 졸지에 우리는 뭘 보게되게 되냐하면 ‘나 (여기) 있음’. ‘나 있음’ 이것을 새롭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 것 고쳐야 되요. 

나 여기 있음이 뭐로 바꿔야되냐하면, 없음으로 바뀌어야되요 없음으로.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있다는 것은 옛날에 내가 생각했을 때 내가 예수를 모를 때 있다로 그 느낌으로 있는 거예요. 그것은 X표예요. 그것은 생각하지말고 인정하지 말아야되요. 

없는 자로서 우리는 여기 있는겁니다. 그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죠.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피조물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있는 내가 상상할수 있는 피조물은  새로운 피조물 아닙니다. 

나처럼 있기 때문에,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려면 예수님이라는 그 분이 이 세상에 없는 존재인 것처럼 내가 여기 있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나에 대한 새로운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는데 나타난 그러한 나 일 경우에만 새로운 피조물 되는 거예요. 

내가 여기있다는 그런 식으로서는 생각 못한 새로운 피조물이 등장해야 됩니다. 그러면 내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여기 있다는 것은 이것은 계속 변해요. 계속 변해갑니다. 이제 머리카락도 희고 외무부장관처럼 여자가 머리 희다고 국회에 나와서 욕 얻어먹고... 모든 것 늙어가고 점점 더 기억력도 떨어지고 손가락도 안 움직이고 눈도 침침하고 자꾸 변해요. 

어디서 어디까지 변할지는 우리는 장담 못하고 예측도 못합니다. 그런데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은 뭐냐? 이미 꽂아놨어요. 확정적입니다. 확정적이예요. 그래서 이것을 저는 오면서 생각한게 뭘 생각했냐하면은 ‘7광구 시추선’ 이라고 생각 했는데, 

7광구 시추선은 뭐냐하면 저 우리나라에 저 전라도 바다에 7광구거든요. 7광구에 석유나온다고 시추하죠. 그 넓은 바다에 얼마나 외롭습니까? 그저 갈매기만 끼룩끼룩 날라갈 뿐이지 접근불가죠. 


그런데 그 시추선을 어디다 꽂았놨습니까? 석유있는데다 막 꽂아 버렸죠. 석유 있는데다 꽂아 버렸죠. 그 국민당이라고 들어본적 있습니까? 국민당. 중국의 국민당. 장개석 그 사람이 세운 국민당 있거든요. 


국민당이 그 일본하고 싸우고 할 때는 잘나갔는데 내란이 일어났어요. 마오쩌둥의 모택동의 공산당에 밀려가지고 어디로 도망갔냐하면은 대만으로 도망을 왔어요. 도망을 오니까 그때 대만은 뭐냐하면 일본이 통치하다가 물러났을 때에요. 일본이 통치하다가. 


그러니까 선진문화를 받았잖아요. 중국 국민당이 와가지고 대화했던거 보니까 수도꼭지를 트니까 물이 나오는 거예요. 세상에 이럴수가! 트니까 물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대만에 피신했던 국민당 대장이 전체 전부 다 자기 가족, 국민당에게 시장가서 수도꼭지 다 사오라했어요. 


수도꼭지 다 사와서 이거 실화입니다. 다 사와서 자기들 집에 다 박아놔라. 다 박아놨거든요. 그런데 수도꼭지 트니까 물 나옵니까? 안나옵니까? 이게 뭐냐하면 보는 것이 문제가 되요. 눈에 보이니까 이게 사단나는 거예요. 눈에 보이니까. 


수도꼭지가 눈에 보였는데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니까 이렇게 틀면 나오니까 그대로 시장가서 사오면 되는 줄 알고, 그러면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뒤에 보이지 않는 그 배수관을 생각해야 되잖아요. 


수원지 물이 있는 저수지부터 해가지고 수도꼭지와 연결되는 그 배수관을,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중요하거든요. 이거 트는건 아무것도 아니예요. 오늘 본문에 뭐라고 되어있냐하면 ‘나는 참 포도나무요’ 라고 되어있죠. 


이것은 우주 한복판에다가 시추선을 꽂아버린겁니다. 일종의 수도꼭지를 꽂아버린거예요. 이것은 흔들림이 없어요. 세월이 얼마나 지나던 숱한 사람이 죽고 살고 죽고 살고 태풍이 불던 뭐던간에 이미 확정적입니다. 확정적이란 말은 시간과 공간에 접촉받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에 일체 접촉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 나는 포도나무요 라고 되어있지요. 나는 포도나무라 했어요. 포도나무인데 이것은 기능이죠 기능. 어떤기능이냐하면 방금 이야기한 확정된 기능, 확정된 기능이니까 어떤 인간이라든지 어떤 권세라도 이건 흔들릴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거예요. 확정된거예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이런 말씀나와요. 그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함이라.’ 아버지 뜻은 뭐냐하면은 내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살리는 이것이죠. 분명히 그렇게 되어있죠? 요한복음에. 


그러면 개척교회나 목회자들이 목회할 때, 교인들이 좀 빠져나간다 또 교인 좀 몰려온다. 그것 신경 쓸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신경쓰면 안되잖아요. 왜냐하면 이미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했으면 그 말씀을 믿어줘야 되잖아요. 적어도 성도라면, 목사나 성도라면 그것을 믿어줘야되겠죠.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했으면 믿어줘야되는데, 몇 명나오고 몇 명 들어온다고 또 좋다고 하다가 또 왔는데 두번 나오다가 나가버리면 또 슬프지요. 희비 뭐 웃다가 웃었다가 울다가 이런일이 벌어진다 이말이죠. 


그러면 그 목회자는 믿는 사람이예요? 안 믿는 사람이예요? 전혀 지금 믿지를 못하죠. 근데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냐하면은 보이니까 이게 사단나는거예요. 보이니까. 뭔가 보이니까. 보이니까 측정할려고 하고 보이니까 누가 보니까? 내가 보니까 가슴 덜컥 내려앉았다가 좋아서 어쩔줄 모르고 이런거예요. 


그렇다면 목회자 나는 결국은 뭐가 문제냐하면 나는 포도나무요 이렇게 되어있으면 그 ‘나’에다가 자기 목회자 나를 여기다가 포기를 해야되요. 이것은 없애버려야 되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나는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 말은 그 말은 결국 목회자로 하여금 뭐냐하면 날마다 이 자신을 부정하라는 말씀이예요. 모든 성경말씀이. 창세기고 뭐 창세기 3장 4장 모든 요한복음. 


성경을 보고 있는 나를 사람 취급도 안한거예요. 사실 실제로 말하자면. 인간으로 생각지도 않는 거예요. ‘진작 죽을 인간이 아직도 살았네.’ 이런식으로 한다이말이죠. 그래서 이 모든 성경말씀은 주일날도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은 사도바울이 그 다른 사도하고 싸울 때 무기가 뭐라고 했습니까? 


다른 사도들은 내세우는게 사람을 뭐한다고 했어요? 사람을 기쁘게 하지만, 사도바울의 모든 말은 무기가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을 모독한다고 했지요.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거든요. 진짜 사도와 가짜 사도의 특징이 뭐냐하면은 진짜 사도는 인간을 모욕하는 겁니다. ‘너 아직도 너한테 기대걸어?!!! 너 아직도 너한테 기대거느냐? 니가 보기에 니가 인간으로 보여?’ 이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꾸 변하거든요. 변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을 안해줘요. 그럼 나를 포기하면 나는 어떻게 살지? 라고 하면 니가 말하는 나 대신에 주님이 하나님이 내세운 나가 있잖아요. 나는 무슨 나무요? 나는 포도나무 잖아요. 이 자체가 우리에 대한 모욕이고 모독이예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우리는 내가 있게 되면 항상 우리는 불신앙으로 작용해요. 불신앙으로. 우리항상 여기 있으면. 믿음도 아닌데 자꾸 갖고 있다 이 말이죠. 근데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우리가 눈에 보는 데로 판단해서 생겨해버리는 그 믿음이거든요. 


대구 강의에서 이런이야기 했습니다만은 우리의 믿음이 주의 믿음을 계속 가리고 있다고 했어요. 우리의 믿음이 주님의 믿음을 가리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하면은 나를 믿지 않는게 신앙생활이예요. 


예수 믿는게 신앙생활이 아니고, 아주 주저없이 내 믿음을 내가 미워하는 것, 내 믿음에 대해서 나를 짓밟아 버리는 것, 이것이 신앙이예요. 얼마나 자신감이 있었으면 얼마나 확정된 이 안에 있었으면 그까짓것 대충 


나 같은 인생은 이렇게 살아도 저렇게 살아도 그 어차피 쓰레기에 갖다 버릴 인생이기 때문에 자기한테 전혀 신경을 안쓰는 것, 안 쓰는 그런 태도, 이것이 신앙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볍게 버릴 수 있는 것. 나 자신에 대해서 가볍게 툭 던지듯이. 양말 엄지에 구멍나면 그거 옛날같으면 기우겠지만 요새는 안하잖아요. 가볍게 둘둘말아 버리죠. 가볍게. 속옷 드러우면 가볍게 버리잖아요. 남자들 어디가 멀리가서 빨 생각 안하고 그냥 던지잖아요. 


그것처럼 더러운 것 가볍게 버리는 세월이 바로 우리네 인생입니다. 주께서는 빨리 분리수거 해서 버리라고 하는데 ‘이걸 왜 버려요?’ 이러고 있다 이말이죠. ‘버리라니까~’ ‘이걸 왜 버려요. 이게 얼마나 중요한데. 이게 얼마나 중요한건데.’ ‘니가 지금 중요한게 뭔지 모르는 구나. 그게 왜 중요해?’ ‘눈에 보이잖아요. 제 몸이 눈에 보인다고요.’ 보이니까 사단난거예요. 보이니까. 보이니까 진짜 그리스도가 안보이는 거예요. 내가 너무 가까이 느껴지니까.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있어요. 나와 내 자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있습니까? 보이니까 이게 바로 주님의 믿음을 내 믿음을 그걸 완전히 도배를 해버리고 그것을 자꾸 안보이도록 해버리는 거예요. 


대구강의의 끝 부분에 그런이야기 했거든요. 복음의 광채가, 이야기 했다고요. 온통 쓰레기 더미로 온통 치매 환자도 아닌데 하여튼 온통 모든 것 집안에 들어있으면 ‘이거 언제 치우지?’ 걱정되죠. 


그런데 거기에 천사가 왔다. 베들레헴의 목자처럼 양치는데 갑자기 천사가 나타났죠. 천사가 오게되면 뭐도 같이 오죠? 하늘의 영광도 함께 딱 비춰버리면 내가 해야될 일이 그 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이런일도 있었어? 이거 뭐 소소한 일이네.’ 이게 소소한 일이 되고 그 하늘의 영광 있잖아요 광채. 그게 그 복음의 광채가 확 와닿아 버리면 ‘내가 해야되나? 억지로 해야되나?’ 하는 일들은 이제 가벼운 일이 되어버려요. 그것처럼 우리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온갖 잡티같은 것들이 다 끼어 들어요. 


이것 해야되고 이거하나 터지면 저것 터지고 이거 해야되고 주차위반해거지고 한 5만원 이거하게되면 또 애기 아프다 하고 온 인생산다는게 걱정거리 따라가면서 뒤치다꺼리 하다가 볼일 보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복음의 광채를 비추어 버리면 ‘뭐 그럴수 도 있지 뭐 그게 중요해.’ 이런단 말이죠. 


그런데 그 복음의 광채를 누가 방해하느냐?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누가 방해하죠? ‘이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비취지 못하게’ 그렇게 되어있어요. 오늘 제목을 노골적으로 한다면 이것입니다. 


워워~~가 되겠습니다. 어어~~워~~어~~ 복음의 광채를 못 비취도록 세상에 전부 이렇게 만드는거 어어~~~어어~~계속해서 이 일에 대해서 걱정하게 만들고 근심하게 만들고 ‘너 큰일났어, 큰일났어. 끝났어, 끝났어. 인생 끝났어, 인생조져놨어. 이제는 돈 나가게 생겼어. 이제 어떻게 살래? 아이구 차리리 죽어라.’ 이런식으로 자꾸 사탄이 우리로 하여금 복음의 광채를 비취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남편이 사고쳤어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이혼하면 되지 뭐. 왜요? 사소한 일이니까. 이혼이 사소한 일이예요. 막내아들이 죽었어요. 죽은거 데려가셨겠지. 그걸 어떻게 사소한 일이니까. 


자기 자식 죽은 게 사소한 일이고, 자기 이혼하는게 사소한 일이고, 사고쳐서 교도소 가는게 사소한 일이고, 갑자기 차사고 나서 앉은뱅이 된 것이 사소한 일이고, 지가 졸음운전 했는데 깨고보니까 정신차리고 보니까 벌써 한 일가족 한 4명이 다 몰살 자기 차에 받아 다 죽어버리고 그런데 그것이 사소한 일이고.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목사님 언제 믿음 키워서 그정도 믿음 됩니까?’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지금 제 이야기를 근원적으로 지금 이해 못한 사람이예요. 근원적으로. 왜냐하면 좋은믿음 이라고 할 때 계속해서 우리는 뭘 고집하냐하면은 지금 이 나를 어디에 넣는다? 나를 지금 나를 천국에 넣어볼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계속 지속되면서 천국가는 내가 되고 싶어서 계속 노력하다 보니까 일곱귀신이 일곱귀신 정도가 아니예요. 한 일만귀신 군대귀신 다 달라붙어요. 군대귀신 다 달라붙어요. 


주님께서 다시이야기할께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니가 제대로 신앙생활 해가지고 너를 천국에 넣으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고 내가 버린 너인데 왜 너는 내가 버린 쓰레기를 왜 자꾸 니가 아직도 그게 아까워서 손에 꽉 쥐고 있느냐 이말입니다. 


그 군대귀신 다 갖다 붙어 땡벌들 다 달라붙도록 왜 자꾸 그토록 귀신 달라붙도록 왜 쥐고 있느냐 이말이죠. 그걸 왜? ‘아니 지금은 이 모양이지만 나는 천국가야되지 않습니까?’ 지금은 이 모양과 천국 가는 이 모양 변해야되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이야기 하는 성도는 변하는게 없어요. 우리는 나는 지금 신자 조금될거 같은데, 조금 조금씩 변해가지고 천로역정처럼 조금씩 노력하다가 인내하다가 고생하다가 나중에 천국간다. 


나의 변화의 조짐에 대해서 기대하면서 바짝 믿음에다가 힘 부어줄라고 독수리처럼 올라가든 내려가든 모르겠다 하여튼 그렇게 키울려고 하는데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하는 이 순간 모든 변화 자체가 우리는 지금 헛꿈 꾸고 있는거예요. 헛꿈꾸는 거. ‘너 지금 다른거 생각하고 있어 다른거!!’ 


여러분 포도나무가 먼저입니까? 가지가 먼저입니까? 묻는 내가 나쁜 인간이예요. 포도나무 그 둥지가 먼저예요? 가지가 먼저입니까? 등치가 먼저이고 가지는 거기서 나오잖아요. 즉  예수님 뭐라고 하냐면 ‘내가 포도나무요’ 하는 순간 우리는 드디어 변화될 것도 없고, 달라질 것도 없고 이미 확정적입니다. 


너희가 워낙 믿음이 없어노니까 그렇게 생각 않하지 나 따로 챙기고 예수님 포도나무 챙겨가지고 어떻게든 접붙여 가지고 가지되어 볼려고 백날 하게되면 여기 똥파리 마귀똥파리 마귀귀신 똥파리 다 달려들어가지고 괜찮은 충고들 다 합니다. ‘기도하세요.’ 뭐 충고하는거 있잖아요. ‘열심히 노력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는 참 포도나무요 하는 순간 니가 있다고 하는 인간은 절대로 이 포도나무 가지가 될수가 없다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포도나무와 전혀 무관한 것이다. 


그러면 가지는 뭐냐? 없으면서 같이 동질로 퀄리티 같이요. 없음의 퀄리티에서 같이 없음이 나올때만 그 포도나무가 숭숭숭숭 뽑아낸, 포도나무에서 쫙쫙 잡아당기면 거기서 뭐가 나오냐? 가지가 거기서 나오죠. 


예수그리스도가 쫙쫙 그 엿가락 당기듯이 나올 때, 그때 가지가 되면 그 원둥치와 가지 사이에 어떤 이음새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몸체가 늘어진것이기 때문에 그 몸체가 늘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러면 나는 참 포도나무요 하는 순간 이것은 뭐냐하면 바로 모독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다른말로 하면은 고발이 되요 “고발” 나는 참 포도나무요 하는 순간 나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을 고발하는 겁니다. 


고발하는데요, 그 고발하는 것을 다른 말로 양날의 칼이라고 볼 수 있는데 율법같은 경우에 지키면 뭐 받는다고 했어요? 복 받지요. 그쵸? 지키면 복받지요. 안지키면 뭐 받습니까? 예, 안지키면 자주받지요. 율법이.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는 말씀도 결국은 뭐냐하면 예수님의 이 말씀이 고발용이죠. 고발용 같으면 이 고발했다는 말은 이 굉장히 저주를 이야기 하는 것이고 그러면서도 고발당하게 되면 이것이 축복이 되는 고발당함을 아는 자는 이미 축복을 받은 구원을 받은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율법의 기능처럼. 

여기서 이 문제를 더 나아가기 위해서 문제를 하나 내겠어요.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신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은것입니까? 아니면 택한 백성을 위해 죽은거예요?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은거예요? 택한자들만을 위해 죽으신겁니까? 


모든사람이냐? 아니면 택한백성이냐? 이것 때문에 침례교 장로교 뭐 싸우고 있는데, 둘다 정답을 몰라요 둘다. 하여간 기독교 이천년 역사가 다 그렇지만.. 둘다 정답을 몰라요. 그게 뭐냐하면 이거예요. 


예수님의 죽으심 예시용(用)입니다. 예를 들어 준거예요 예를 들어 준 것.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은 노량진에 가면은 경찰공무원, 공무원 학원들 있죠. 선전물에 보면은 우리학원에 이번에 7급 수석 나왔습니다. 라고 합시다. 그러면 이 학원 다니면 전부다 공무원 합격하는겁니까? 아니죠. 


그러면 이 학원이 거짓말 하는 거예요? 거짓말 아니죠. 그러면 이 학원 간 사람중에 7급 공무원 수석한 사람 있긴 있죠. 이게 바로 예시용입니다 예시용. 모든 사람을 위해서 다 보여주려고 다 십자가 모든 사람이 죄로 다 죽었는데 그 효과에 대해서는 뭡니까? 택한 자에게만 효과가 가는 거예요. 예시용이란 말 한마디로 다 끝났다 이말이죠. 


모든 사람이 죄인인 것을 고발하죠. 그런데 구원받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절대로 아닙니다. 왜? 믿는사람은 모든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중에서 보여주기는 다 보여주고 구원받는 사람은 다 가 아니고. 그래서 그것은 예를 보여줬다. 예를 시. 보이다. 예시용이 되는 겁니다 예시용. 


그렇게 예시용이 되게되면 사람들은 어떤 효과가 일어나냐하면 사람들은 어떤 공문에 노량진에 가면 붙여놨잖아요. 우리학원에서 이번에 7급 20명나왔습니다. 9급 이번에 50명나왔습니다 하게 되면은 그 학원에 등록하는 사람들은 보고 어느 학원가고 싶어요? 그쪽 학원 가고싶어하죠. 이왕이면 저쪽은 12명됬다하고 여기는 50명 됬다하면 이왕이면 이 학원에서 잘 가르쳐서 합격했다 해서 그쪽에 가겠지요? 


성경에도 마찬가지예요. 내 십자가 내가 택한 백성으로 인해서 은혜줄자가 있느니라 이렇게 하게되면 사람은 자기가 어느걸 선택하게 됩니까? ‘나 예수 십자가 믿고 은혜로 구원받고 싶어.’ 라고 그쪽에 나오겠죠. 반드시 그렇게 하겠죠. 


이게바로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함께 하니까 이스라엘 전체를 함께 하는 줄 알았죠. 그래서 관점이 뭐냐하면은 포도나무 관점이 아니고, 자기가 가지가 된다는 관점에서 시작하는 겁니다. 


포도나무가 있는데 나는 포도나무 했잖아요. 그러면 가지는 어디서 나옵니까? 포도나무에서 나오는데 사람들 들어보니까 가지가 어떤 특정 예시된 사람들이 가지가 되는 거예요. 7급공무원 7급 합격한사람있으니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포도나무를 거치지 않고 가지자리에다가 자기를 딱 밀어 상상을해요. ‘나 가지할래. 예수님 가지할래.’ 이렇게 되어버리면 뭐를 안 거쳤어요. 예수님의 나라고 하는 것을 거쳤어요? 안거쳤어요? 이것을 안 거친거예요. 


이것을 안 거치고 이 ‘나’ 대신 어떤 ‘나’를 붙들고 있느냐하면 지금 내가 살아있다고 했잖아요. 이 나를 붙들고 나를 구원하는 그러한 수단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이용할려고 한겁니다. 이용할려고. 


그러면 ‘목사님 말씀대로 하면 나부터 출발하지 말고 포도나무로부터 출발하면 되겠네요.’ 이렇게 나오죠. 예 포도나무로 출발하면 되요. 그 말은 맞는데, 나에서 포도나무 갈 때 어떻게 갈수 가 있느냐는 하는 겁니다. 


나는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이 땅에 어떤 인간도 찾아볼수 없는 없는 존재거든요.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은 필히 내가 있는 이상은 그 예수님을 떠밀고 배반하고 배척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있음이 갖고 있는 속성이예요. 


우리 있음은 예수님 보시기에 전부 다 변하고 쓰레기이기 때문에 이게 맞을 리가 없어요. 코드가 전혀 안 맞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코드 안 맞다는 생각 못하고, 이렇게 내가 착실하고 바르게 살면 주님과 같이 연결되겠지 라고 생각해가지고 예수님은 포도나무입니다 하고 믿고자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믿음 뭘 가린다? 그 믿음이 예수님이 주신 믿음을 가리는 거예요.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하는가? 여기서 오늘 본문에서 요한복음15장 보면 어떻게 하는냐 하면 이렇게 정리하면 제일 편합니다. 


예수님의 모노드라마 라고 생각해봅시다. 모노 드라마가 뭡니까? 주연 본인이고 감독 본인이고 연출 본인이고 딱, 모든 것이 딱 누구? 예수님 자기 하나 밖에 없어요. 그것은 그러한 권한이 있는 이유가 천지창조 하실때에 그 모든 천지창조는 누구의 모노드라마를 보여주려고 하는 하나의 설치냐 하면 예수님을 말하기 위한 설치물이예요. 세상의 모든 것이. 

  
코스모스나 뭐 기린이나 코끼리나 인간부터 전부 다. 그 말이 어디나오냐하면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오죠. 세상의 모든 만물은 심지어 악한 마귀든 간에 모든 만물은 누구의 위해서? 예수그리스도에 위해서 예수그리스도의 모노 드라마예요 모노드라마. 


혼자를 위한 모노드라마에 모노드마라 있다 이 말이죠. 이 혼자서 모노드라마 있는데 현재 그렇게 된 모든 피조물이 인간들이 마귀가 뭐로 만들었습니까? 인간은 인간나름대로의 자기를 위한 모노드라마로 세상의 모든 변화와 지금 연결시키고 있어요. 


세상이 돌아가는 모든 것을 다 자기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 자동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생각이 들게마련입니다. 예수님도 나를 위하여 하나님도 나를 위하여, 그래서 제가 주일날 하나님 영광 주권사상 하는 것들 때려죽이고 싶다 그런 말 했잖아요. 


뭐 예수중심 십자가 중심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 소리를 내게 될 때 다 누구를 위해서? 자기 자신의 모노드라마 위해서 내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드라마를 쓸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어떤 문제가 있느냐 하면은. 


나한테 필요있는것과 없는 것을 자꾸 갈라버려요. 걷어낸다고 했는데 대구강의에서. 이것을 자꾸 걷어내요. 이것은 나한테 필요없는거고, 이것도 나한테 필요없는것이고. 자꾸걷어내는 거예요. 


욥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니가 황무지에 비가 오는 이유를 아느냐’? 물었죠. 욥이 자기 고난 받는데 황무지에 비오는 것과 관련있다고 욥이 생각 했어요? 못했어요? 생각을 못했지요. 


지금 내 온몸이 종기나서 아픈데 창문열고 ‘황무지에 비가오네. 저것과 나와 무슨 관련성이 있을거야.’ 그런 생각을 했겠어요? 안했겠어요? 안했지요. 했습니까? 할 리가 있습니까? 할 리가 있어요? 


그래서 엘리후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 엘리후가 네 번째 친구 마지막친구가 뭐라고 하냐하면은 욥보고 하는 이야기가 ‘욥아 니가 뭔데 하나님을 심문하느냐?’ 심문. 심문이라고 하는 것은 따지는 거예요. 

마치 판사가 죄인에게 따지듯이 욥이 자기의 순수함과 결백을 이야기하다 보니까 누가 피고석에 앉았냐하면 하나님이 피고석에 앉아있고, 자기가 판사가 되어가지고 ‘내가 무엇이 잘못됬는데 저 사람보다 뭐가 못낫다고 저사람에게 나오지 않는 고난을 왜 저한테 주십니까?’ 라는 식으로 ‘욥아 너는 왜 하나님을 심문하느냐?’ 이말입니다. 엘리후가 네 번째 친구는 하나님께 책망받지 않았어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책망받았지 네 번째는 책망 안 받았거든요. 이 말이 왜 중요하냐하면은 인간이 속으로도 잠시 잠깐이라도 자기 인생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다든지 자기 인생에 일어난 일로 짜증을 부리게 되면 이것은 뭘 의미하냐하면, 하나님을 자기 앞에 소환시켜서 거기다가 따지고 심문하는 식이 된다는 사실을 욥이 대표해서 우리를 대표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을 아까 오늘 한 강의와 결부시키게 되면 욥이 그렇게 고난 받는다고 하나님을 심문하는 이유는 결국 뭡니까? 나의 존재가 나에게 전부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여기 있잖아요. 여기 있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세상 모두 하나님마저 다 나를 위해서 이 존재를 위해서 이렇게 도와주고 돌아가야 이것이 자기 보기에는 자기 눈에는 이것이 정상인겁니다. 


이게 정의고, 이것이 진리고, 이게 생명이고 그렇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은 이것은 욥의 자기의 대한 그 믿음이 결국 무얼 가리고 무엇과 적이 되었죠? 순간적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죠. 원수가. 적이되었잖아요. 


강의를 쭉 했지만 그 문제점이 어디 있습니까? 어디에 문제점이 있어요? 나한테 문제가 있지요. 나에게 문제가 있다 없다를 내가 생각할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절대로 생각못해요. 


물 묻은 손으로 전기선을 만졌다 그럼 찌릿하잖아요. 찌릿하면 뭐라고 합니까? ‘아이고 내가 실수했구나. 물 묻은 손을 닦고 깨끗한 손으로 만져야되는데 물 묻은 손으로 해서 잠시 감전됬구나.’ 하잖아요. 


그러면 이미 자기 자신의 문제점을 알았죠? 자기 자신의 문제점을 안 그 자아를 본인이 포기하겠습니까? 아니면 귀하게 받아들이겠습니까? 귀하게 받아들이죠. 왜? 이제는 수정이 되었으니까 이제는 물 묻은 손으로 가서는 안된다는 그 점을 알았으니까. 


전에보다 더 향상된 내가 되었으니까 이 아까워서라도 이런 나를 그동안 공들인게 얼만데 못버리죠. 버릴 수가 없잖아요. 그러면 제 말은 결국은 뭐냐하면 어떤 경우라도 인간은 자기를 버릴 수 있다? 없다? 못 버립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했을 때, 그것은 바로 제자들과 듣는 모든 우리들에 대해서 고발하는 모습입니다. 고발이란 결국 뭐와 이어진다? 저주로 이어지는 겁니다. 고발하고 정죄하고 결국은 이것은 저주로 이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할때에 확정적인것과 그리고 계속 달라질 여지가 있는 것과 어느 존재가 이 우주의 중심적인 존재인지를 한번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이미 시추선이 박혀있는것과 내가 어디로 튈지도 모르고 있는 우왕좌왕하는 내 모습과 한번 비교를 해보세요. 


비교해보면 아 우리는 나 밖에 모르는 그러면서도 내가 어떻게 될지도 우왕좌왕 아무것도 모르는 지금 어디로 튀면 어디로 튈지도 몰라요 우리는. 이런 불안정한 우리를 아직도 아까워 하면서 기껏 쥘 것은 나 밖에 없으니까 나 밖에 없으니까 나만 쥐고 그냥 세상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이것이 처음에 이야기 한, 지금까지 강의 내용 한번 정리해보면은, 주님의 그 죽으심은 모두를 위한 행위가 아니고, 모두에 대한 아까 뭐라고 했죠? 예시죠. 그런데 이 예시는 누구를 위한겁니까? 예수님의 모노드라마예요. 예수님의 모노드라마. 


혼자도 화투치는 거예요. 혼자서 피 내놓고 혼자 노는 게임이예요. 혼자 노는 게임 예수님 혼자. 물론 배후엔 아버지 계시지만.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이 세상에 천지창조 된거라고. 거기서 주께서 혼자 마귀도 주께서 마음대로 가지고 활동하시면서. 


뭐 주님이 혼자 다 혼자하는 즐기는 게임이니까 뭐 불만있어요? 왜 혼자하십니까? 예수님만이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에 유일한 존재. 그러면 우리는 뭐냐? 기능이죠. 우리는 기능이예요. 


예수님은 그냥 유일한 영원한 존재인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면서 예수님도 존재이지만 예수님은 뭐로 나타나냐하면은 기능으로 나타나요. 기능이 뭐냐하면은 확정된 기능. ‘나는 포도나무요 아버지는 농부요.’ 이것이 바로 복음의 광채입니다. 


복음의 광채라는 것은 그것을 아는 순간 그 무겁던 내가 그 무게 한 200t 나가던 내가, 아무튼 엄청나게 나가던 내가 무게가 새털처럼 제로가 되는 거예요. 그 전에 어떤 아저씨는 60살먹은 아저씨가 90kg들었다가 깔려 죽었어요. 바벨에.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죠 제가. 깔려죽었다고요. 


지금 우리가 그래요 우리가. 우리가 지금 온 우주보다 더 무거운걸 들려고 하고 있어요. 이 우주가 내 맘대로 되야되고 내 뜻대로 되야된다고 지금 낑낑 드는 겁니다. 들어봤자 이 우주는 누굴 위해 있는거예요? 나를 위해서 있는겁니까? 나를 위해서 있는게 아니죠. 


그럼 누굴 위해서? 예수님! 확정된 예수님의 존재를 위해서 있지요. 그럼 우리는 뭐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나를 위해서 애쓰는 것은 결국은 지금 예수님하고 지금 한바탕 붙자는 이야기예요. 결국은. 마귀짓을 하고 있는거예요. 우리가 마귀짓을 하고 있는거예요. 매일같이. 



집에서 자식 키우는 엄마가 애 초등학교 5학년쯤 돼서 학원에 뭐 무슨학원을 2개 3개 4개막 돌린다고요. 돈도 없는데. 막 억지로 해가지고. 막 남편하고 싸워가면서. ‘아 그렇게 시켜도 되나?’ ‘아니야 시켜야되. 요새는 다 시켜야되.’ 그래서 다 시켰는데 그런데 애가 갈수록 성적이 내려간다다 분통이 터지겠어요? 안터지겠어요? 


돈 문제보다 애가 성적이 바보병신되는거 아닌가? 나중에 취직도 못해 굶어 죽는거 아닌가? 이런다고요. 그러면 그 순간 그 사람은 그 자식이 90kg 가는 바벨이예요 바벨. 90kg. 90kg짜리 되는 거예요. 아침에 눈만 뜨면 먼저 오늘 또 뭐 밤새 게임안했나? 이거 쳐다보는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자식에 짓눌려가지고 갈수록 안그래도 갱년기 오는데 갱년기 일찍 왔어. 자식만 보면 ‘나 너 때문에 못살겠다.’ 자식은 있다가 ‘엄마는 엄마 인생살고 나는 내 인생 살면 안됩니까?’ ‘야 니가 엄마되바라. 그 소리가 나오는가.’ 그러면 자식이 ‘나 엄마 될려면 멀었는데 나 결혼안할건데.’ ‘아이고 속터져! 속터져!’ 이렇게 하지요. 결혼해도 속터지지만... 


어느날 배낭메고 ‘나 유럽여행 갔다올게.’ ‘너 그 나이에 시집가야지!!’ ‘남자도 싫고 다 싫어 나 혼자 살거야.’ ‘아이구 철딱서니 없이~’  ‘엄마도 만만치 않거든~’ 이 세상에 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철광석하는 그 사람 철 있어요?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세상이 중심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모르고, 그냥 악마의 기능만 발작일으키듯이 악마의 기능만 아침에 눈만뜨면 이렇게 기침하듯이 계속 악마의 모습만 계속 기능적으로 발산합니다. 계속 발산합니다. 
나는 어떻게 되고...? 맨날 앞에 내가 붙어요 나는 어떻게 되고? 나는 어떻게 되고? 나는 믿는 자 일까? 안믿는 자 일까? 그 믿는다는 것이 90kg짜리예요. 왜 믿어야되요? 그래서 자기 자신을 믿음을 놓아버리세요. 자기 자신의. 


자기 자신의 믿음을 찟어 버리면 비로서 주의 은혜가 보입니다. 그동안 주의 은혜를 내 믿음이 너무나 가렸으니까 내가 주님 믿는다고 하다보니까 전혀 은혜를 못 느끼고 하지도 감사하지도 못했어요. 


내 믿음 포기 나 안 믿습니다 이러니까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니까 갑자기 바벨이 0.5g, 인생이 0.5g 전혀 무겁지 않아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다 날라가버렸어요. 


남편이 애먹인다. 이혼하면 되잖아요. 그건 사소한 일이니까. 그게 뭐 문제예요? 그럼 이혼안한다하면, 안하면 되지. 뭐가 문제예요. 헤어졌는데 또 합치자 한다, 합치면 되는거예요. 어차피 너나 나나 다 기능이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 포도나무죠. 단일성입니다. 그런데 가지는 다양성이예요. 가지는 다양성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똑같은게 아무것도 없어요. 지금 보니 똑같은 옷 하나도 없어요. 똑같은 옷 하나도 없어요. 분홍색에다가 청색에다가. 똑같은 옷 없잖아요. 얼굴도 다 달라요. 지문도 다 달라요. 그게 다양성입니다. 


이 다양성이 됨으로서 우리는 본인을 그 다양성중에 핵심요소로 내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반칙적인 요소인가를 우리로 깨닫게 하는 거예요. 다양성이기 때문에 그 다양함에 일부라는 그 생각이 절대로 나는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서서 중심역할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우리한테 더욱더 확신시키는 거예요. 


무슨말이냐 로마서 14장에 그런말씀나오는데 니가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했죠. 그 왜 그런 이야기 합니까? 니가 비판할수 있는 자격이 없다. 이것을 요한복음8장 같으면 죄없는 자가 돌로치라 와 같은 거예요. 


‘너는 왜 나처럼 안되?’ 때문에 비판하는거거든요. ‘너는 왜 나처럼 안되?’ 때문에 비판한다고요. 내가 기준입니까? 내가 중심이예요? 내가 포도나무입니까? 포도나무가 이렇게 있다면 가지는 짧을수도 있고 길수 도 있고 말라 비틀어질수도 이것은 가지는 다 달라요. 


나라는 가지가 표준이 될 수 없다 이말이죠. 여러분 다리에 털 있잖아요. 그 중에 어느털이 표준이예요? 그냥 몸체 우리 다리에 있으니까 그냥 털이 숭숭 나온겁니다. 우리는 주님의 다리에서 나온 털이예요. ‘내 털처럼 되라!’ 이건 말이 안되요. 머리 노랗게 물들일수도 있고 거멓게 물 안들이고 갈수도 있고. 


이게 90kg 나가는 바벨이 되면 안된다 이말이예요 90kg. 남들이 부러운 것이 그것이 100kg바벨 되면 안되요. ‘너는 100kg하던지 나는 이것만 들게.’ 이러면 된다 이말이죠. 인생을. 어떤 사람을 결혼을 세 번, 세 번하든 4번하든 나는 안하면 되고 뭐 그것은 주께서 기능적으로 허락을 그렇게 하신거예요. 


다른 사람은 교인이 이천명이고 이천명하든말든. 나는 두명, 두명 하든말든. 분명히 주님께서는 택한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찾으리라 하면 우리는 가지가 가지를 믿으면 안되잖아요. 


가지의 믿음, 그것은 흔들리는 믿음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믿음. 가지가 맨날 흔들리니까 자기가 어지러우니까 자기 믿음 아닌 줄 알고. 흔들리니까 가지지 안 흔들리면 몸체이지요. 우리는 가지란 말은 제발 좀 세파에 흔들려라 이말이예요. 흔들리고 이랬든 저랬든 간에 흔들리는 이유가요 우리는 내가 나를 믿을 대상이 아니다. 믿을 대상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흔들리는 흔들리는~ 이런 노래 있잖아요. 그런 노래 있어요. 그냥 주께서 기능대로 살면되는 겁니다. 그것의 모든 출발점은 뭐냐하면은 나라는 존재는 이미 주님의 존재가 등장한 이상 나라는 존재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이 창조를 끄집어 내면서 창조아닌 것은 우리를 주께서는 폐기처분하는 그 과정속에 우리가 있는 겁니다. 


내가 늙어죽는다 그러면 그 안에는 몸에 붙어있는 가지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 기능이 있거든요. 그 기능이 뭐냐하면 바로 주께서 심어준 기능이예요. 


이것하고 첫째시간 마칩시다. 예수님께서 떡을 뗄 때에 자기 떡 먹으라고 하지 않았어요. 주님 떡 떼어 줬잖아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잔을 나눌 때 각자 잔 먹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잔을 부어줬죠. 


이것은 뭐냐하면 내가 준 것 그것 회수하는 거예요. 주님의 모노드라마예요. 내가 준 그 떡, 내가 준 그 잔, 그것이 중요한거예요. 그것이 흔들리지 않는 포도나무에서 나온 액체예요. 포도나무에 나온 액체고 나머지 모양새에서는 다 달라요. 


왜 다른가? 어느누구도 우리의 표준은 이 세상에 예수그리스도 빼놓고는 표준이 없다. 그것을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런겁니다. 


10분 쉽시다.

 홍민희 (IP:221.♡.139.88)17-09-21 16:58 
가락-요한복음 15장 1절(없는 분)170919b-이 근호 목사 



예,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여기에 15장 2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이를 과실을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제해버린다 이렇게 되어있지요. 분명히 가지라는 것이 가지 끝에 과실 맺어 있고 과실부터 달리진 않고 가지가 먼저 있는데, 가지가 예수님의 포도나무에 나왔으면 이것을 제거할 필요가 있겠어요? 제거 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런데 제거 할 가지가 나온다는 말은 몸통이 문제가 있으니까 제거할게 나온게 된다 이 말이죠. 그렇죠? 가지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몸통에서 나왔죠. 포도나무에 문제가 있으면 문제성 있는 가지가 나온다면 그러면 예수님이 나는 포도나무요 예수님 자신을 포도나무라 했다면 예수님 본인에게 뭐 문제가 있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이렇게 해놓고 열매맺지 않는다는 것은 열매맺지 않을 경우가 없는데, 이것은 가지가 스스로 가지 맺은게 아니잖아요. 주님이라는 몸통에서 나온 가지인데 하자가 있을 리가 없는데 거기에서 제거될 과실이 마치 나올수 있는것처럼 생각할 때 이 대목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것이냐. 난감하죠. 그래서 이 대목이 이게 의외로 어려워요. 


이 난감한데 칠판 깨끗이 지워졌겠다 깔끔하게 정답말씀드리겠습니다. 율법은 죄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지적하기 위함이 아니라, 율법은 죄를 만듭니다. 죄를 생산해요. 없던 죄도 율법이 와서 만들어내요. 없던 죄도. 


물론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든 인간은 죄지만, 이 율법이 세상에 들어와서는 모든 인간들이 잘나고 잘난 인간들이이예요. 잘나고 잘난 인간들이니까 그 잘나고 잘난 인간들에게 아브라함의 언약이후에 430년후에 율법이 들어온 것은 완전히 그 트렉터로 밭을 갈 듯이 완전히 전부다 뒤집어 버리는 거예요. 율법이. 


가인이 맏이지요. 창세기에 보면 가인이 맏이지요. 가인이라는 그 말 자체가 뭐냐?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의 엄마가 누구죠? 하와지요. 하와의 뜻이 뭔지 알아요? 생명입니다. 그래서 하와는 가인을 얻고 난 뒤에 뭐라고 하냐하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가인을 얻었다 해서 이름이 가인이 얻음이 되요. 나 라는 통로를 통해서 누구 자식이다? 하나님의 자식을 통해서 가인을 얻은걸로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이름이 생명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다시 말해서 지금 남편의 이름은 흙이잖아요. 아담은.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된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남편하고 상대하지 않고 남편의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 본인의 자식을 자기 생명되는 생명이라는 자기의 몸을 통해서 태어나는 겁니다. 이 본문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렇게 되있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남편으로 말미암아가 아니라 여호와로 말미암아. 여호와로 말미암아, 여호와로 말미암아 잉태한거예요. 여호와로 말미암아. 이건 자기 자식이 아니고 누구 자식이다? 여호와의 자식이예요. 하나님의 자식인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뭐냐하면 가인이예요. 


그런데 자기는 그게 여자의 후손인줄 알았죠. 여자의 후손, 약속의 후손, 여자의 후손, 뱀 후손. 여자의 후손인줄 알았죠. 그런데 또 생겨버렸습니다. 또 생길 때 갑자기 뭘 느꼈냐하면 자기의 논리와 이론이 완전히 혼선이 생깁니다. 혼선이. 


‘어! 뭐지 이거? 왜 또 아들이야?’ 아들 또 나왔어요. 그래서 둘째 이름이 뭐냐하면 둘째 이름이 허무입니다. 허무란 이름 누가 지었어요? 부모가 지었겠죠. 허무를 느낀거예요. 모르겠다! 도대체 하나님이 일을 어떻게 하시는지 모르겠다는거예요. 


쉽게 말해서 두 아들 가운데서 창세기 3장에서 약속한 여자의 후손이 둘 중에 어느쪽인지를 모르겠다 어느쪽인지를 모르겠다 이말이죠. 처음에 하나있을때는 어땠습니까? 하나만 있으니까 이미 확정된거예요. 얻었다. 뭘 얻었다? 약속의 자식을 하나님이 약속한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할 때 그 메시아를 우리가 얻었다. 


얻었는데 또 생겨버리니까 그것도 여호와로 말이암아 또 생겨버리니까 생각의 혼선이 온거예요. 이 혼선이 왔을때는 어떻게 처리해야됩니까? 이것을 본인이 결정해야되요? 안그러면 이것을 하나님께 맡겨야됩니까? 하나님께 그대로 맡겨서 분류를 누가 하느냐하면은 하나님께서 분류하도록 내어놓아야해요. 


그러면 누가 빠지느냐? 아빠 엄마는 여기서 빠져버립니다. 아빠 엄마는 빠져버리죠. 이 빠져버린다는 것이 중요해요. 빠져버리면 엄마 아빠가 그 하와와 아벨의 운명에 대해서 개입할수 있다? 없다? 개입할수 없음을 아담과 하와는 자식들 앞에서 고백합니다. 


이게 뭐냐하면은 바로 아버지의 자식이 아니고, 바로 자식의 의해서 아버지가 재규정되는 거예요. 다시 내가 누구인지를 규정되는 거예요. 이 자식이 자식이 점점 더 어디까지 가냐하면은 마지막대에 예수그리스도까지 가 버리면 점점 더 이 규정은 새롭게 등장하는 그 후대의 자식을 통해서 더 깊이 있는 깊은 의미가 계속해서 쌓이고 쌓이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자기가 누구냐를 누굴보고 알았냐? 이삭을 보고 알아요. 왜? 이삭은 자기가 예상하지 못한 자식입니다. 이삭이 나올거라는 것은 예상 못했기 때문에 이삭 이름이 뜻이 뭡니까? 참 웃기네 그런 뜻이죠. 있을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삭은 없는데서 생겼잖아요. 이게 모델이예요. 
모든 성도는 존재가 없어야되요. 있는 존재는 거절당하고 없는 존재에서 없는 존재에서 나한테 주어짐으로서 현재 있는 존재는 폐기처분의 과정을 밟아갑니다. 평생동안. 


그 사람은 계속 하고 내 안에 들어온 새로운 존재는 예수그리스도와 관련된 것이 있기 때문에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주께서 주신 것만 회수한다고요. 주께서 심어준 새로운 피조물이 자라나게 되면 그 여파로 인하여 내가 생각했던 나는 점점 더 폐기처분되어가는 겁니다. 우리 인생 한 평생을 통해서. 



그 폐기처분 된 나, 내가 그렇게 쥐고 싶은 나 안에는 뭐가 들었느냐하면은 내가 경험한 것들이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내가 경험한 기억들이. 제가 지난 오후설교하면서 뒤에 찬송하면서 내가 애를 먹었습니다. 오후 끝나고 찬송할 때. 웃음이 터질라해가지고 억지로 참았어요. 


그 ‘저분’이라는 말을 저분. 무슨뜻인지 모르죠? 저분 젓가락을 저분이라고 합니다. 저분이라는 말을 봉화골짜기에서 듣고 난 뒤에 저분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내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부터 해가지고 한꺼번에 다 밀려온거예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병행한거예요. 마들렌 그 냄새맡고 어릴 때 기억난 것처럼. 그 저분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어릴 때부터 그 파노라마처럼 추억들 연결되가지고 그 모든 드라마처럼 쫘~악 한꺼번에 다 터져나오는 거예요. 이게 폐기처분되어야할 나예요. 나예요. 


인간은 평소에 예수를 믿는다 하지만 절대로 우리는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를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준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믿게 하기 때문이예요. 예수님이 우리를 믿게 하기 때문에 내가 예수 믿는 것을 날마다 폐기처분해야해요. 


왜? 믿는 것도 하나의 기억이고 추억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예수 믿게 되면 5년전에 믿었다. 아니 15년전에 믿었습니다. 이것을 계속 내안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소설의 주인공이예요. 드라마의 주인공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왜 문제로 이야기했지요. 모든 세상 돌아가는 것이 누구 중심으로 돌아가야한다? 결국은? 결국은 내 아름다운 일기장 아름다운 소설 드라마 쓰기 위해서 필요한 것만 뽑다 보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만들기 위해서 온 우주를 함께 연동시켰고 함께 다 동원시켰는데 우리는 내 중심으로 살게되면 이것은 필요없고 이거는 잘라내고 이거는 필요하고 이것을 임의로 내가 필요한 체험과 필요한 기억들만 모아가지고 ‘이것이 나입니다.’ 라고 제시하는 거예요. 
누가복음 12장인지 아 정말 갈수록 이제는 내 기억의 손가락이 안 움직여져요. 누가복음 12장. 아 맞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두 가지의 기억을 가지고 등장합니다. 하나는 뭐냐하면 ‘형이 내 아버지 돌아가셨는데 모든 유산을 형이 다 차지해가지고 나한테 아버지가 나한테 남은 유산까지 형이 몽땅 다 차지했습니다. 공의로우시고 정의로우신 예수님, 내 재산 유산 좀 찾아주세요.’ 라고 했을 때 예수님 뭐라고 했냐하면은 방금 했던 제 식대로 하면 예수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니가 지금 관심사가 뭐냐하면은 아버지가 나한테 유산 남긴다는 그 기억을 그 기억에 관심있어요. 왜? 그 유산을 받게 되었을 때 내 재산 이만큼 불어나게 되면 나의 스토리 나의 드라마는 멋질 것 이라는 것을 잔뜩 기대했는데 형이 도둑놈이 되어서 다 가져갔잖아요. 그러면 어떻습니까? 내 드라마가 내 뜻대로 내 원대로 이게 안짜여지죠. 


아버지 유산 보태서 뭘사고 나무 한 몇만그루 사고 이런게 있는데, 그게 안되어 버리니까 내 인생 드라마가 이게 조화가 잘 안 꾸며지잖아요. 그래서 그것을 누구한테 찾아오는가? 예수님한테 찾아오는거예요. 


지금 이런이야기 하면 ‘야 참 그사람도 믿음 없다. 나 같은면 예수님 안 찾아오고 자기혼자 해결하겠다.’ 이렇게 하는데 나 혼자 해결하는 것이 예수님한테 가져오는거예요. 그게. 왜? 결국 예수님께 따져야되니까 왜 내뜻대로 안됩니까? 분명히 나와요. 


세상 왜 일을 그런식으로 하십니까? 분명히 아까 욥처럼 하나님 불러다가 내앞에 지금 심문하고 싶은거예요. 억울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솔직하지요. 예수님한테 갖고 나오니까. 


그럴 때 예수님 뭐라고 했습니까? 관심사가 니가 엉뚱한데 가 있다. 너를 살릴수 없는 너를 죽이는데 관심두는 거예요. 결국은 예수님 말씀이 뭐냐하면 니가 그런데 관심두는 것이 그게 너를 살리는게 아니고 너를 죽인다는 말은 생명없다는 그런 뜻, 니가 죽인다는 말은 무슨뜻이냐하면 니가 그 너의 드라마를 생각하는 그 자체가 그것이 너로 하여금 점점 더 죽음의 길로 저주의 길로 지옥으로 가고 있는 힘이 되는 거예요. 


평소에 아침에 눈 만뜨면 내 생각하는거 있잖아요. 그게 오늘도 나를 죽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이말입니다. 예수님하신 말씀에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했죠. 그러면 그 청년의 동생이 말하는 소유라하는 것은 결국은 아버지의 유산이 내 몫이 됬을 때 그것이 소유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남의 몫입니까? 아니 형의 것을 뺏을려고 하는거예요? 아니잖아요. 


반드시 나한테 와야될 정당한 내것이 여기있는데 그 소유마저 그 소유에 관심을 두고 인생을 살아간다는 그 자체가 그걸 너로 하여금 저주의 나락에 빠지는 지금 그런 자리다 이말이죠. 그런 가는 코스다 이말입니다. 내 소유에 관심있다는 자체가.


또 한가지 예가 나오지요. 그 뒤에 이야기가 뭐냐하면 어떤 농부 농사꾼이 있는데 그해 농사가 너무 잘됐어요. 쌓을대가 없어서 창고를 만들었습니다. 창고에 쌓아도 창고가 가득해요. 기분이 얼마나 좋던지 스스로 자기에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걱정하지 말아라 평생 먹을거 있다.’ 이렇게 자기 영혼 자기 스스로 자기 영혼한테 뭘하느냐하면은 자기한테 위로를 하는 거예요. 위로를 하고 자기를 감사하고 이것을 가지고 경축이예요. 누구 경축? 자기경축을 가지고 줄여서 자축이라고 자축. 스스로 자기한테 축하하는 거예요. 


사람사는 보람 이것 때문에 사는거 아니예요? 북한 핵 계발 때문에 삽니까? 그거 좋아서? 수소폭탄 실험하고 난뒤에 김정은이 막 자축하데요. 우리도 같이 자축했습니까? 정의당 빼놓고 자축안하잖아요. 심상정이 빼놓고 아무도 자축안하지요. 


만약에 김정은이가 그 핵폭탄 만지다가 터져서 김정은이 즉사했다. 누가 자축합니까? 이쪽에서 자축하지요. 탈북자연합회에서 자축하지요. 이제 북한 안올라가도 되니까. 결국은 모든 인간은 관심사가 뭡니까? 사는 쪽으로 하는 게 아니고 모든 인간은 죽는, 보약 먹으면서 까지 죽는 쪽으로 가는 거예요. 인간은. 심각하지요 심각한겁니다. 


그래서 오늘 밤 니 영혼 데려가면 저것은 누구것이 되겠느냐? 이렇게 했잖아요. 그러면 생각해보세요. 그런 말 할거 같으면 하나님께서 농사 안되게 해주든지, 농사를 농사가 너무 잘되니까 자연적으로 up 될 수밖에 없는거예요. up 사이다. 7up. 자연적으로 up 될 수밖에 없잖아요. 그게 뭐냐하면 바로 율법적 기능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은, 오후에도 그런이야기 했지만 하나님의 모든 일은 율법을 통해서 일해요. 율법을 통해서 일해야 그 일에 대해서 처벌이 가능합니다. 저주도 축복도 반드시 뭐로 온다? 율법에 준해서 율법이라는 조항에 준해서 처벌하고 복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문제성이 있으니까 이 문제성 있는 것을 더욱더 융기, 드러내게 마음껏 드러내게 하는거예요. 점잖게 살고 싶은데 갑자기 지리산에서 그냥 산나물 캐고 그냥 겸손하게 살라하는데 지리산에 바람 많이 불거든요. 


어떤 지리산 등산객이 주머니에 뭐 복권넣고 다니다가 바람불어 날라가가지고 공중에서 세바퀴 반돌고 그 사람 면상을 딱 때렸단 말이죠. 보니까 복권이예요. 아직 토요일까지 한 이틀남았어. 버리기도 뭐해서 그냥 있었더니만 그게 70억. 


있었던 이야기 아니고 제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있을 때, ‘아 70억 버리고 난 산나물 캐자 이럽니까?’ 갑자기 up 되지요. up 되지요! 그게 바로 지리산 들어가서 기도하나 너는 지리산에서 지옥 갈 사람이예요. 그사람. 


본인이 몰랐지요. 몰랐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키워준거예요. 하나님께서 너 주제파악하라고. 잘 되게 하신거예요. 이 소리 들으면 참 지옥가도 좋으니 한번 잘되봤으면, 이왕지옥갈거 한번 잘됬다는 소리듣고 그런 아름다운 추억한번 겪어보고싶지요. 이게 율법적 기능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요한복음 한번 봅시다. 본문 들어가 봅시다. 요한복음15장에서 지키라는게 아니예요. 이게 지키라는게 아니고 헛갈리게 만드는겁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제자들로 하여금 헛갈리게 만들어요. 


예수님 본인이 포도나무라 해놓고 그리고 너희는 가지라 해놓고 그 다음 뭐라고요? 열매 없으면 짤라낸다. 이게 우리 가지 입장에선 도저히 납득이 안되요. 납득이 안되. 본인의 가지를 본인이 잘라낸다는게 이게 납득이 안되잖아요. 


처음부터 열매를 맺도록 해주면 될 문제 아닙니까? 간단한 문제거든요. 제하여 버린다는 것은 이런뜻입니다. 나의 제자가 그리고 나의 열매가 되고 나의 가지가 된다는 것은 필히 제하여 버림, 제하여 버림을 이것을 수용을 해주는 사람만이 주님의 가지가 될 수가 있어요. 제하여 버림을. 


제하여 버릴 때 내 안의 제하여 버리때 할 때, 그 뒤에 3절에 너희는 이미 뭐했다? 이미 깨끗하여졌죠. 이미 란 말은 시간이 계속 흘러가는 겁니까? 시간이 이미 종결된 것을 말해요? 이미 종결되었죠? 이미 종결되었죠. 


그러면 인간의 시간은 어떻게 느끼냐하면은 자기의 행동의 의해서 계속 느끼기 마련이거든요. 매직을 여기에 놓았을 때 그리고 여기 놓은 매직을 내가 이리로 이동할 때. 뭘 느낍니까? 시간의 전후가 나오죠. 처음에 이렇게 나왔다 이렇게 나오죠. 시간의 전후가 나오게 되면 이것은 종결된거예요? 종결안된거예요? 종결된게 아니예요. 


여기있는 것을 다시 끄집어 낼수 있거든요. 종결 안되었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주님은 이미 깨끗하여졌다고했지요. 결국 이것은 내가 알고 있는 체험하고 추억과 기억하는 것과 주님의 기억사이에 뭐가되요? 싸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투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는 나는 포도나무요가 율법적 기능을 하는 거예요. 율법적 기능을. 계속 투쟁을 해야 내가 몰랐던 나의 본성의 어떤 괴물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깨끗하여 졌느니라 하는 그 소식앞에서 내가 얼마나 주님 아니면 계속 죽음의 길로 지옥갈 수 밖에 없는 행동만 내어 놓는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우리는 들추어 지는 겁니다. 반복적으로 들추어 지는 거예요.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이 뭐냐하면 이미 깨끗하여졌느니라 이유가 나와요. 그것은 너희가 어디안에 있다? 너희가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내가 포도나무이기 때문에 이미 깨끗해졌다고 이야기 해요. 이것이 아까뭐냐 율법적 기능이라고 했지요. 자 이것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로마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믿음이나 영생이나 이것을 뭘로 보냐하면 은혜로 보죠, 선물로 보죠. 자 선물 봅시다 선물. 선물이란 A가 B란 사람에게 C라는 선물을 줍니다. A란사람이 B라는 사람에게 C라는 선물을 줍니다. 같은 뭐 선물 주고 받고 그다음에 보따리 주고 받으면될 것을 ABC 하니까 갑자기 어려워졌지요. 이게 어려운 거예요. 이렇게 일부러 어렵게 한거예요. 


왜냐하면은 세상에서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는 뭐냐하면은 선물이란 있을수 없어요. 선물이라는 것이 생산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은 A가 B에게 B가 C에게 C라고 하면 안되겠다. 이거는 혼동되니까 C를 α(알파)라고합시다. A가 B에게 B⇒C에게, C⇒D, D⇒E, E⇒F, F⇒A에게 줬다하면은 사람이 누구한테 주게되게 되면 이것은 교환의 순환구조가 일어납니다. 구조, 순환구조. 

뭐냐하면은 내가 돈 50불을 주었다 할 때, 50불 주고 B로부터 B는 그걸 받고 주전자를 주게되면 이게 시장경제예요. 이 세상은 전부 다 주고 받는 순환구조로 되어있다니까. 순환구조요. 


(A가B에게)50불주고 (B가A에게)주전자 받고, 이 사람은(B는) 50불가지고 (C에게)신발을 구입하고 (C는B에게)신발을 제공하고 모든게 순환구조이지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하면은 안주면 뭐가 되요? 빚이 되죠. 빚이되요 안주면. 채무자 된다고요. 


채무자 되기 싫어서 전부 다 뭔가 해요. 자 어떤경우에는 (A가B에게)50불 주었는데 (B가)주전자 줄려고 하니까 A가 ‘아 저 그런거 안받아도 되요.’ 이렇게 되어버리면 ‘목사님 이거는 순환구조가 그냥 증여, 순환구조가 안됬잖아요.’ 이렇게 또 반박할수 있겠죠. 하지만 A가 B에게 거저준게 되죠. 거저줬다는 말은 너그러운 감정을 돈 주고 구입한게 되요. 너그러운 감정을. 


내가 저 사람이 너무나 불쌍해서 50불을 주었다. 그 말은 뭐냐하면은 그 사람은 나에게 선물을 받은 사람으로서의 그 사람에게 줌으로서 나는 내게 없는게 생겼어요. 그게 뭐냐하면은 나는 참 자애롭고 너그럽고 배려심 많은 인간이라는 새로운 것으로 50불 주고 내가 구입한 셈이 된다니까요. 


근데 성경에서는 뭐냐하면은 성경은 갚음이 불가능한 선물이 와요. 성령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십자가 피줬기 때문에 우리는 십일조로 갚자.’ 이것은 이단입니다. 그렇게 되면 왜 그런 발상을 하게되냐하면 평소에 인간들이 사는 이 구조가 자기가 채무자가 되기 싫어하는 구조로 짜여져 있거든요. 


그러다보니까 하나님이 거저 주었으니 우리도 거저 줘버릴 때 하나님과 내가 같이 노는 동창생처럼 같이 노는 자가 되어버려요. 같이 노는 자가. 어떤 인간도 불가능에 대해서는 굉장히 싫어해요. 불가능이 있으면 우리는 가능성으로 도전하고 싶어하는 심보가 발휘됩니다. 


주께서 거저 받았으니까 조금이라도 주님께 찬양하며 감사함으로서 보답해 드리면 되겠다라는 그 생각이 사실은 주님앞에 받은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아직도 불가능 속으로 넘어간게 아니고, 가능성 테두리 안에서 돌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교회 헌금하지요. 한번도 헌금한 적이, 헌금 할 수도 없고 그 헌금해 본적도 없어요. 왜냐하면 헌금한 그 교회에서 나가라고 하면 기분 나빠해요. 그렇잖아요. 헌금한게 아니고 그 교회에 투자한거예요. 지분산거예요 지분. 주식을 산거예요. 


피아노를 기증했다, 뭘 했다 하면 자기의 몫을 잊지를 못합니다. 그게 아까 뭐라고 했어요? 그게 바로 추억이고 그게 기억이고 그 기억이 나란 인간을 구성한다했지요. 


아까 배운 것 우리가 응용해 봅시다. 나란 인간을 내가 못 버리는 이유가 망하는 추억과 망하는 그 체험들이 그게 하나의 나를 만들기 때문에 그것을 쓰레기에 버려버리면 나는 나한테 아무것도 없이되버려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그게 있으면 이것은 90kg짜리 바벨되요. 그러면 그런 모든 것을 몽땅 볼수 있다는 말은 이미 불가능한 것을 선물로 받은 사람한테는 내 인생이 어떻게 쪼그라지고 어떻게 째지고 어떻게 박살나도 관계없이 그 선물에 비하면 그건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예요. 그건 가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나온 노래가 뭐냐하면은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근데 주일 오후에 제가 이야기 했잖아요. 자식이, 그럼 자식하고 예수님하고 누가  귀해요? 그야~주님이 귀하죠. 

당신 자식 내가 꿀밤 한번 줘볼까? 이론하고 우리의 육이란 몸하고는 완전히 대척관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포도나무라는 것은 주님께서 있지만, 이 세상에서 포도나무는 없는 거예요. 없는 것에서 나타나는거예요.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나 하나 일대일 다 대조를 해요. 니 자식이 귀하나? 내가 귀하나? 니 카드 통장에 든 돈이 귀하나? 내가 귀하나? 니가 가지고 있는 빌딩이 귀하나? 내가 귀하나? 니가 교회 나오고 니가 목사인데 니 교회가 귀하나? 내가 귀하나? 계속해서 비교합니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비교해요. 그러면 비교하게 되면 결국 뭘 합니까? 


내 자식보다, 주님보다 자식 귀합니다. 솔직하게 고백할 수 밖에 없어요. 이게 율법적 기능이예요. 율법적 기능입니다. 율법적 기능은 뭘 만든다? 기억하세요. 율법적 기능은 뭘 만든다? 없는 죄를 만들어 내요. 고마운줄 아시기 바랍니다. 


율법이 말씀을 안보게 되면 우리는 괜찮은 사람이 되요. 이미 깨끗하여졌느니라 라는 그 말씀이 오기 때문에 내가 깨끗할려고 하는 이 모든 일들이 얼마나 지저분한 더러운것인가가 티가 나게되어있어요. 


왜 깨끗해질려고 합니까? 깨끗한 주인공이 누구예요? 여러분입니까? 내가 깨끗해지면 주인공이 누구예요? 나잖아요. 그러면 내가 누구 보다 귀하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거예요. 주 예수 보다 더. 


그러면 결국 주께서 깨끗하다는 그 말씀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는 그 말씀 자체가 결국 율법적 기능을 발휘해서 나로 하여금 거룩해지려는 이런 죄를 짓게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내 죄를 짓게 만드는 거예요 죄를. 


아까 누구하고 이야기 했더라? ‘결혼도 죄입니다.’ 라는 것을 주례하면 어떨까요? 누구하고 이야기 했더라? 토요일날 주례 있는데 주례사 하시면서 결혼도 죄입니다라고 어떤 말씀한다했지요. 


결혼도 죄입니다라고 이야기하면 안되고, 행복한 결혼하세요 라고 하는 순간 드디어 결혼이 죄로 드러납니다. 평소에 바로 주 예수 보다 더 내 이 결혼이 내 가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노골화 시켜줘야되요. 노골화. 


그게 바로 포도나무, 다시 이야기할께요. 포도나무는 있다 없다? 없습니다. 없는데 기능이죠. 기능이니까 이 포도나무가 기능적으로 나타납니다. 어디 나타나는가? 율법적 기능을 적용시키는 그 현장에 나타납니다. 
포도나무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죄인들을 통해서 나타나요. 죄인들의 죄안에서 태어나요. 이미 깨끗해졌느니라 라는 그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깨끗해질려고 하는 누가 그렇게 되죠? 남이 깨끗해져요? 아니요 누가 깨끗해져요? 


내가 단독적으로 깨끗해질려고 하는 아까 털 하나, 깨끗해질려고 하는 그 노림수를 통해서 뭐가 박살나느냐 하면은 이미 깨끗해졌느니라가 완전히 개무시당해버리는 거예요. 


이미 깨끗해졌느니라가 소중한 것이 아니고, 내 노력으로 행하여 이 만큼이라도 내가 깨끗해졌다는 그것이 주님의 깨끗해졌다는 소식보다도 이 체험이 나에겐 더 소중한 90kg짜리 바벨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인생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어요. 지금. 눈만 뜨면 그렇게 살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정말 우리에게 납득이 안되는 이야기를 해요. 뭐냐하면은 이미 주님께서 포도나무이고 우리가 가지가 되었으면 더 이상 제거되어야될 가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가지가 실제 나타나요. 


그럼 뭐가 오해가 된거예요? 주님은 포도나무입니다 라는 우리의 그 생각 자체에 뭐가 섞여 들어간거예요? 나는 주님이 포도나무입니다 라는 고백을 했기 때문에 저 신자 맞지요? 라는 신자된 자기 자신을 예수님 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그 죄가 들통이 난 겁니다. 틀통이 난거예요. 


자 틀통났으니까 지옥갑니까? 아니면 이미 천국백성이예요? 이미 천국 백성이기 때문에 들통난거예요. 천국 백성이기 때문에. 천국 백성이기 때문에 자기가 구원받는 다는 뜻이 아니고 자기 안에 뭐가 작용하느냐 하면은,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제하여 버린다는 것이 성경책에 그 활자로 되어있는 이 활자가 이 안에 어디까지 들어왔어요? 


드디어 실감나게 내 안에 들어있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내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아! 제하여 버린다는 것. 아 제하여 버리는데 안 제하여 버려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내 구원이 우선이 아니고 내 구원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니고 뭐가 중요합니까? 주님이 내뱉은 그 말씀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주님의 모노드라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기 드라마가 되요. 그러면 그 앞에서 음흉하게 내 모노드라마를 꿈꾸던 나는 그 주님의 모노드라마 앞에서 박살나는거죠. ‘니가 중요해? 내가 중요해?’ 우리는 정답은 알죠. 주님이 더 중요하죠. 그러면서도 주님을 더 중요히 여기는 나는 얼마나 소중할까? 이렇게 되어버린다니까 인간은. 


그러니까 그것을 차단하는 방법은 뭐냐하면은 우리가 주님을 믿습니다라는 믿음을 우리가 손을 놔버려야 믿음을 놔줘버려야되요. ‘저는 주님을 믿을 수 없고 믿은 적도 없고 믿을 필요도 없고 그렇습니다.’ 라는 고백을 주님보고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하면은 내안의 주님이 아니고 주님 안에 우리가 들어있으면 더 이상 내가 볼 필요가 없지요. 주님의 광채 때문에. 복음의 광채 때문에. 나한테 시답지 않은 나의 어설픈 나의 죄에대서 그다지 큰 키로수를 그렇게 느끼지 않아요. 90kg, 100kg 그런 것을 느끼지 않는다니까요. 


내가 따로 내가 있으니까 90kg바벨이 무겁지만, 주님안에 있으면 내게 주어진 이 것이 내가 감당할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인생의 짐으로 느껴지지 않는 겁니다. 진짜 느껴지지 않습니까? 참 원리가 이런거예요. 


자 그다음 진도 나가봅시다. 그렇다면 이미 아까 나는 참 포도나무요 했죠. 오늘 많은 것을 했는데 한번 대충하면 이렇습니다. 나는이란 말을 집어넣음으로 말이암아 이 세상에 공자도 십자가 질수 있고 맹자도 십자가를 질수 있고 뭐 소크라테스도 질수 있는데, 왜 하필은 나사렛 예수냐? 그 이야기 했지요. 


그 답변이 뭐라고 했습니까? 왜 다른 사람 십자가 지면 메시아 아니고 왜 목수의 아들 그 나사렛 예수 그분이 져야 십자가 구원의 십자가가 되는지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다른 사람이 꼭 세상 대들다가 뭐 억울하게 죽을수도 있는데. 다 잊어버렸죠? 


모든 인간들은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다 같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는 이삭처럼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없는 존재가 십자가를 져야되요. 있는 존재는 소용없어요. 없는 존재가 십자가 져야되요. 


그래야 모든 그 분앞에서 모든 있음은 자동적으로 죄가 되고 저주가 되겠죠. 죄인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참 우리의 기억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제가 물으니까 또 답이 잘 안되지요? 


그렇게 해서 나는 포도나무요 했는데, 나는 포도나무요 이미 확정적이라고 했죠? 확정적. 확정적이라는 것은 시간공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이미 변동이 없어요. 변동이 없다는 말 하면서 예를 든 것이 뭐냐하면은 요한복음 6장 이야기 했죠. 이미 아버지께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살리신다 했는데, 우리는 변동이 우리는 우리감정에 휘말리는 거예요. 


이 가을 되었잖아요. 가을되면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슬퍼요. 가을이 되면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서 받아주세요. 이게 고은이라는 사람이 지은 시인데, 그 누가? 어떤 여자가 이쁘다고 한줄 알아요? 얼마나 예리한지, 모르는 여자. 모르는 여자가 아름답다. 왜? 다른건 다 손봤기 때문에 재미없다.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이 가을에는 전부 다 로맨티스트가 되고 낭만이 되고 그런거예요. 오늘도 제가 하나 뭐 제 아내가 올리라고 해서 하나 올린게 있는데 봉화척곡교회라고 올렸죠. 그 배경음악이 뭐냐하면은 autumn leaves예요. 가을 낙엽. 한번 들어가 보시면 음악이 참 좋아요. 


이 가을에는 이렇게 전부 다 변동이 된다 이 말이죠. 되면서 특징이 뭐냐하면은 자기가 불쌍해. 세상에 자기보다 불쌍한 사람이 없어요. 너무 불쌍해요. 그말은 인간은 이 추억과 기억 이 테두리를 뚫고 나갈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렇다면 가을을 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주님이잖아요. 그럼 가을을 왜 줬습니까? 가을을 준 이유는 무슨 드라마? 모노드라마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자기 법을 활용시키죠. ‘가을아 가을되라.’ 


가을되니까 전부 다 자기 생각하고 있는거예요. 신자든 김신자든 박신자든 관계없어요. 전부 다 자기 생각하고 있는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예수님을 더 소중히 한다 그때는 더울때고 수련회 끝나고 다시 가을되니까 다 날라가 버렸어요 이제는. 


자기가 가장 불쌍하고 모르는 여자가 그립고 이렇단 말이죠. 아름답고 편지하고 싶고. 얼마나 보세요. 인간은 회까닥 다시 계속해서 자기 쪽으로 옵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힘으로 믿는다든지 주님을 따른다는 말은 이것은 애초부터 성사가 성립이 안되죠. 누가 그렇게했습니까? 주께서 율법적 기능을 발휘해서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죄인되게 하시는 겁니다. 


자, 그렇게 하시는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는 이거예요. 그렇게 하게하게되면 모든 것이 확정이 되고 주께서 그렇게 하게되면 이것은 결국 뭐냐하면 이미 계시된 천국입니다. 제가 그 저 10년전부터 꾸준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그거예요. 죽어서 천국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철저하게 천국생활 합니다. 


이미 이땅에 눈 부릅뜨고 살아있을 때 천국생활 못한 사람은 죽어서도 어림도 없습니다. 못갑니다. 제가 이렇게 계속해서 이야기 했거든요. 왜냐하면 성령이 산 사람한테 오지 성령이 죽은 사람한테 옵니까? 안오잖아요. 희한하죠. 죽은 사람한테 안가요. 


왜냐하면 성령이 온다는 것은 주님의 율법적 기능 때문에 분류작용을 해요. 분류작용. 너는 아니고, 한쪽을 이렇게 따로 분류를 해버리면 자동적으로 저쪽은 저쪽으로 빠져요. 청군만 따로 모아놓으면 백군은 따로 정해져있다니까요. 


그래서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우리 구원함이 아니예요. 지옥보내는 작업으로서 우리를 구원한겁니다. 똑같은 인간인데 한쪽을 내사람 해버리면 저쪽은 자동적으로 니사람 되어버려요 이거는. 저것은 딴 사람이 된다고요 딴 사람. 


부부싸움하는데 하도 싸우다 싸우다 나중에 말장난까지 나오거든요. 여자 쪽에서 화가나서 오죽했으면 남편을 남이라고 했겠는가 이렇게 하잖아요. 화나면. ‘남이니까 남편이지!’ 하잖아요. 그러니까 남자가 하는 말이 여자할 때 여자가 한자로 남이라는 말이예요. ‘남이니까 여자이지!’ 둘다. 결국 부부싸움할 때 전부 따로 떨어져 있지요. 


그런데 인간은 인간도 마찬가지로 나에게 신경쓰게되면 자동적으로 모든 나 빼놓고 전부 다 나 배제하고 전부 남이 되요. 그 남속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도 계시고 하나님도 다 남이 된다니까요. 그렇지요? 


그게 바로 주일낮에도 이야기했지만 목사의 사도의 할 일은 뭐냐? 육의 자리에서 어디로 이동시킨다? 영의 자리로 이동시키는 거예요. 그럼 육의 자리로 이동된 사람은 이게 분류자체가 우리가 스스로 해버리면 내가 천당가고 나는 천당가고 내가 미워하는 것은 다 지옥가는 거예요. 


그러나 십자가의 영이신 예수님이 분류를 해버리면 예수님 빼놓고는 전부 다 전부 다 다 지옥가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 빼놓고는. 그러면 성도는 어디있느냐? 오늘 본문 나오잖아요. 예수가 내안에 예수님의 안에 있어요. 


그러면 주님께서 성도에게 계속해서 무슨 작용을 하느냐하면은 니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확인 시키는 일들만 우주를 요동시켜서 우주와 모든 우주의 연동이 되어가지고 북한 핵문제 부터해가지고 연동되어서 우리에게 찾아오겠지요? 


북한에서 수소폭탄 개발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교회 어떤분이 ‘아효, 기도를 안해서 그렇다.’ 새로오신 분인데 우리교회 장로님. 그러니까 문제다 라고 지적하고 하는데 제가 그랬어요. 


장로님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가진 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가진게 있으면요, 북한 핵문제하고 바로 뭐로 연결시킵니까? 내가 가진 것과 연결시켜가지고 만약에 내가 서울에 있다. 북한핵 서울 터트리면, 뾰족한 건물이 어디있어요? 서울에 제일 높은 건물이? 잠실에 있죠? 여기도 잠실하고 가까우니까 여기도 제일 먼저 핵폭탄 날라올수가 있어요. 저 멀리 있는 저쪽에 의존교회 신월동 그런데는 안터지고 여기 잠실 터질 가능성이 있어요. 


사람은 걱정하는 것이 무슨 뜻이냐하면 소유할게 있다는 거예요. 세상 돌아가는 것은 자기 소유가 소유시키기위해서 하는 거잖아요. 그러면 결국은 나는 내 소유안에 있고 나는 내 안에 내 소유에 들어있는겁니다. 


주님께서 북한의 핵 폭탄을 성공케하는 것은 누가 그렇게했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겠죠.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니가 니 소유안에 있는지? 아니면 니가 소유를 안고서 주님안에 있는지? 소유를 버리고 주님안에 있는건 없어요. 전부 다 자기것을 챙길거 챙기면서 주님 안에 있어요. 


그럼 주님안에 있으면, 우리 걱정은 뭐냐? 내 안에 있으니까 내 재산 지킬려고 하겠지요. 그것을 바깥에 누가 그걸 아느냐하면 바깥에 우리는 태안에 있는 아이처럼 안에 있어요. 자궁안에 있어요. 그럼 이 더 큰 안에 누가 있느냐하면 예수님이 계신거예요. 예수님이 계셔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율법적 기능을 해가지고 율법적 기능이 뭐라고 했습니까? 죄를 어떻게 한다? 만들어 내는 거예요. 


이 안에서 북한이 핵폭탄 실험 성공하게 만들었어요. 성공하는 순간 ‘고맙습니다!’ 하고 찬양하는 그 어느 당밖에 없다? 종북세력밖에 없죠? 종북세력 잘한다 김일성 하지요. 그것 빼 놓고 전부 다 걱정을 하지요. 왜 걱정을 합니까? 


각자 소유한게 있어서 걱정하는거예요 소유한 것. 걱정안하는 사람은 누구밖에 없냐하면은 지금 시험에 성공한 뒤에 2시간뒤에 자살하려는 한강 마포대교에 뛰어내릴 작정한 사람. ‘잘됬다. 이 세상아 잘 꺼져라. 신난다. 나 죽는다.’ 이 사람은 걱정 안해요. 왜? 자기는 죽을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죽고자 하는 사람한테는요 북한 핵문제가 별로 의미없다니까요. 지금 당장 5분뒤에 죽을 사람인데 뭐. 번개탄 피워놓고 죽을려고 하는데 소식: 북한에서 성공했습니다. ‘어후 끄자! 빨리 군인나가야되.’ 이러지 않는단 이 말이죠. ‘아이고 세상 잘됬다! 같이 폭파해버리자.’ 이런다 이말이죠. 


그러니까 주의 모든 말씀을 지키는게 아니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버리면 주께서 핵폭탄을 성공했다는 그 소식이 우리안에 들어와야되요. 그러면 내 소유에다가 북한 핵문제 들어오면서 누가 그렇게 하셨는가? 누가? 부처가 했습니까? 공자가 했습니까? 누가 했습니까? 주님이 하셨잖아요. 

주님이 왜 그렇게 했겠어요? 바로 니가 내안에 있기 때문에. 세상은 누구 중심? 누구 드라마다? 북한에서 뭘 하든지간에 중국에서 뭘 하든지 간에 모든 것, 롯데가 뭐 물러가고 중국에서, 모든일은 누구 누구의 솜씨입니까? 주께서 그렇게 하신거예요. 


예수님이 내가 소중하냐? 아니면 니가 그리던 니 드라마가 소중하냐를 다시한번 그 순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를 구원시키는게 아니고 이미 우리를 주님의 구원안에 들어가게 하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제는 이 말씀이 말씀만이 주께서 벌이시는 기준이 되고 표준이 된다라는 것을 알게 되요. 


우리가 드라마 하게 되면 이것 빼고 저것 빼고 차 빼고 내 필요한 것만 끄집어 내지만 주님은 세상 모든 것을 다 같이 총 동원해서 이 말씀 지키는 데에다가 모든 개미새끼 움직이는 것까지 전부 다 여기에 다 집어 넣은 것입니다. 발걸음 세는 것까지 모든게. 


그러면 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시간이나 공간의 변동 이동사항 같은 것이 그다지 그렇게 아주 절대적인 사건이 아니죠. 나한테 느껴지는 모든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 그다지 충격이 안된다니까요.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죽었다는 그것만이 fact라고 했잖아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었다 그게 사실인거같으면 내가 존재한다는 이 사실이 이것은 무의미한 사실이기 때문에 있으나마나 내 존재아니여도 그만이예요. 


만약에 그런 신앙인이 교회 출석했다. 목사는 또 사람 꼬실려고 ‘여러분 복 받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면 ‘저건 무슨 개소리야. 무슨 저런말이 다 있나? 왜 복받아야되요?아니 목사님, 왜 내가 복받아야 됩니까?’ ‘복받아야 행복하거든요.’ ‘왜 행복해야됩니까?’ ‘이단이네, 이단이네.’ 


아니 모든일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거든요. 아까 순환구조, 경제순환구조했죠. 경제순환구조에서 우리는 벗어나야되는데 벗어날려면 그 말씀이 로마서 11장에 나와요 11장 35절. 누가 주께서 드려서 갚음이 되었느냐 ? 누가 구원받기 위해서 먼저 뇌물 준 사람있겠느냐? 이말입니다. 


구원을 얻었다? 구원은 아무런 댓가 없이 그냥 하나님의 뭡니까? 선물로 준거예요. 이런 순환구조가 아닙니다. 은혜받았으니까 은혜받은데로 값을 하는게 아니고, 이것은 이 바깥에서 그냥 무상으로 그냥 준거예요. 


누구한테? 나한테? 아니죠. 예수안에 예수님이 예수님한테 준거예요. 모노드라마. 주님이 주님의 영광위해서 준것이고, 우리는 거기에 참여됬을뿐이예요 거기에. 


강도가 와가지고 납치를 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쁜사람 다 이쁘지만, 말 조심해야해요.  다 이쁘지만 이쁘다해서 여러분들 보쌈해가지고 마적대 아지트로 갔다 합시다. 그런 상상해 보세요. 벌벌 떨고있죠. 마적 옛날 아닙니까? 


지금 드라마에 드라마 잘 안보는데 명불허전이라는 드라마있어요. 이 드라마 시청자들은 굉장히 신나요. 왜? 안죽어요. 안죽는다니까. 조선에서 죽으면 다시 현세로 오고, 현세에서 칼에 찔려 죽으면 다시 조선으로 가고 김남길이 나오는 그거죠? 명불허전. 


얼마나 신나는지. 이 세계도 안죽도 저 세계도 안죽어요. 만약에 조선에서 쫓긴다. 그럼 자기가 죽어요. 자기가 찔러버려요. 그럼 현대로 피신해버려요. 시간을 떠나서. 어쨌든 간에 우리가 마적대 이야기 마적대에 붙잡혀 있다면, 계속해서 마적대가 이쁘다고 계속 떡 주고 식혜주고 식혜아시죠? 단술. 식혜주고 맛있는거 준다 이말이죠. 


그럼 누구안에 있기 때문에? 누구안에? 마적 소굴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잖아요. 마적소굴안에. 그럼 마적 대장이 나에게 왜줍니까? 자기 소유이기 때문에 자기 색시이기 때문에 주잖아요. 


주님의 모노드라마니까 처음부터 천지창조는 주님 좋아라고 만든거예요. 나 좋으라고 영생주고 나 좋으라고 천당보내준게 아니고, 주님 좋으라고 우리에게 색시하나 보쌈해가지고 잡아놓고 계속해서 주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런데 그 안에서 뭐냐 뜨개질하고있어요. 마적대가 뜨개질 확 빼앗고 보더니 ‘이거 별로 안이뻐.’ 가져가고. 뜨개질 대신 이 옷입어라 해서 옷도 해주고, 우리는 아직까지 마적대가 얼마나 좋은지 모르고 ‘나는 내 인생, 개성있는 내 인생 따로 살고 싶은데.’ 맨날 이러고 있단 말이죠. 


하지만 그런다 한다 할지라고 마적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벗어나요. ‘에험~!!!’ 두목이 또 시커멓게 또 쳐들어 오거든요. 


오늘 강의가 이상하게 끝나버리는데 하여튼 여러분들은 성령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이 이 말씀이 그대로 우리 안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생 참 힘들게 살아가는데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주님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그런 거짓말 남발하면서 내 가진 것 내 과거와 내 소유를 더 좋아하고 체면과 위신과 명예를 더 소중히 여기는 이 못난 우리에게 아무 댓가 없이 그냥 영생을 주시니 이제는 영생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