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 15장 1절(없는 분)170919b-이 근호 목사
예,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여기에 15장 2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이를 과실을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제해버린다 이렇게 되어있지요. 분명히 가지라는 것이 가지 끝에 과실 맺어 있고 과실부터 달리진 않고 가지가 먼저 있는데, 가지가 예수님의 포도나무에 나왔으면 이것을 제거할 필요가 있겠어요? 제거 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런데 제거 할 가지가 나온다는 말은 몸통이 문제가 있으니까 제거할게 나온게 된다 이 말이죠. 그렇죠? 가지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몸통에서 나왔죠. 포도나무에 문제가 있으면 문제성 있는 가지가 나온다면 그러면 예수님이 나는 포도나무요 예수님 자신을 포도나무라 했다면 예수님 본인에게 뭐 문제가 있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이렇게 해놓고 열매맺지 않는다는 것은 열매맺지 않을 경우가 없는데, 이것은 가지가 스스로 가지 맺은게 아니잖아요. 주님이라는 몸통에서 나온 가지인데 하자가 있을 리가 없는데 거기에서 제거될 과실이 마치 나올수 있는것처럼 생각할 때 이 대목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것이냐. 난감하죠. 그래서 이 대목이 이게 의외로 어려워요.
이 난감한데 칠판 깨끗이 지워졌겠다 깔끔하게 정답말씀드리겠습니다. 율법은 죄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지적하기 위함이 아니라, 율법은 죄를 만듭니다. 죄를 생산해요. 없던 죄도 율법이 와서 만들어내요. 없던 죄도.
물론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든 인간은 죄지만, 이 율법이 세상에 들어와서는 모든 인간들이 잘나고 잘난 인간들이이예요. 잘나고 잘난 인간들이니까 그 잘나고 잘난 인간들에게 아브라함의 언약이후에 430년후에 율법이 들어온 것은 완전히 그 트렉터로 밭을 갈 듯이 완전히 전부다 뒤집어 버리는 거예요. 율법이.
가인이 맏이지요. 창세기에 보면 가인이 맏이지요. 가인이라는 그 말 자체가 뭐냐?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의 엄마가 누구죠? 하와지요. 하와의 뜻이 뭔지 알아요? 생명입니다. 그래서 하와는 가인을 얻고 난 뒤에 뭐라고 하냐하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가인을 얻었다 해서 이름이 가인이 얻음이 되요. 나 라는 통로를 통해서 누구 자식이다? 하나님의 자식을 통해서 가인을 얻은걸로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이름이 생명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다시 말해서 지금 남편의 이름은 흙이잖아요. 아담은.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된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남편하고 상대하지 않고 남편의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 본인의 자식을 자기 생명되는 생명이라는 자기의 몸을 통해서 태어나는 겁니다. 이 본문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렇게 되있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남편으로 말미암아가 아니라 여호와로 말미암아. 여호와로 말미암아, 여호와로 말미암아 잉태한거예요. 여호와로 말미암아. 이건 자기 자식이 아니고 누구 자식이다? 여호와의 자식이예요. 하나님의 자식인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뭐냐하면 가인이예요.
그런데 자기는 그게 여자의 후손인줄 알았죠. 여자의 후손, 약속의 후손, 여자의 후손, 뱀 후손. 여자의 후손인줄 알았죠. 그런데 또 생겨버렸습니다. 또 생길 때 갑자기 뭘 느꼈냐하면 자기의 논리와 이론이 완전히 혼선이 생깁니다. 혼선이.
‘어! 뭐지 이거? 왜 또 아들이야?’ 아들 또 나왔어요. 그래서 둘째 이름이 뭐냐하면 둘째 이름이 허무입니다. 허무란 이름 누가 지었어요? 부모가 지었겠죠. 허무를 느낀거예요. 모르겠다! 도대체 하나님이 일을 어떻게 하시는지 모르겠다는거예요.
쉽게 말해서 두 아들 가운데서 창세기 3장에서 약속한 여자의 후손이 둘 중에 어느쪽인지를 모르겠다 어느쪽인지를 모르겠다 이말이죠. 처음에 하나있을때는 어땠습니까? 하나만 있으니까 이미 확정된거예요. 얻었다. 뭘 얻었다? 약속의 자식을 하나님이 약속한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할 때 그 메시아를 우리가 얻었다.
얻었는데 또 생겨버리니까 그것도 여호와로 말이암아 또 생겨버리니까 생각의 혼선이 온거예요. 이 혼선이 왔을때는 어떻게 처리해야됩니까? 이것을 본인이 결정해야되요? 안그러면 이것을 하나님께 맡겨야됩니까? 하나님께 그대로 맡겨서 분류를 누가 하느냐하면은 하나님께서 분류하도록 내어놓아야해요.
그러면 누가 빠지느냐? 아빠 엄마는 여기서 빠져버립니다. 아빠 엄마는 빠져버리죠. 이 빠져버린다는 것이 중요해요. 빠져버리면 엄마 아빠가 그 하와와 아벨의 운명에 대해서 개입할수 있다? 없다? 개입할수 없음을 아담과 하와는 자식들 앞에서 고백합니다.
이게 뭐냐하면은 바로 아버지의 자식이 아니고, 바로 자식의 의해서 아버지가 재규정되는 거예요. 다시 내가 누구인지를 규정되는 거예요. 이 자식이 자식이 점점 더 어디까지 가냐하면은 마지막대에 예수그리스도까지 가 버리면 점점 더 이 규정은 새롭게 등장하는 그 후대의 자식을 통해서 더 깊이 있는 깊은 의미가 계속해서 쌓이고 쌓이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자기가 누구냐를 누굴보고 알았냐? 이삭을 보고 알아요. 왜? 이삭은 자기가 예상하지 못한 자식입니다. 이삭이 나올거라는 것은 예상 못했기 때문에 이삭 이름이 뜻이 뭡니까? 참 웃기네 그런 뜻이죠. 있을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삭은 없는데서 생겼잖아요. 이게 모델이예요. 모든 성도는 존재가 없어야되요. 있는 존재는 거절당하고 없는 존재에서 없는 존재에서 나한테 주어짐으로서 현재 있는 존재는 폐기처분의 과정을 밟아갑니다. 평생동안.
그 사람은 계속 하고 내 안에 들어온 새로운 존재는 예수그리스도와 관련된 것이 있기 때문에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주께서 주신 것만 회수한다고요. 주께서 심어준 새로운 피조물이 자라나게 되면 그 여파로 인하여 내가 생각했던 나는 점점 더 폐기처분되어가는 겁니다. 우리 인생 한 평생을 통해서.
그 폐기처분 된 나, 내가 그렇게 쥐고 싶은 나 안에는 뭐가 들었느냐하면은 내가 경험한 것들이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내가 경험한 기억들이. 제가 지난 오후설교하면서 뒤에 찬송하면서 내가 애를 먹었습니다. 오후 끝나고 찬송할 때. 웃음이 터질라해가지고 억지로 참았어요.
그 ‘저분’이라는 말을 저분. 무슨뜻인지 모르죠? 저분 젓가락을 저분이라고 합니다. 저분이라는 말을 봉화골짜기에서 듣고 난 뒤에 저분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내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부터 해가지고 한꺼번에 다 밀려온거예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병행한거예요. 마들렌 그 냄새맡고 어릴 때 기억난 것처럼. 그 저분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어릴 때부터 그 파노라마처럼 추억들 연결되가지고 그 모든 드라마처럼 쫘~악 한꺼번에 다 터져나오는 거예요. 이게 폐기처분되어야할 나예요. 나예요.
인간은 평소에 예수를 믿는다 하지만 절대로 우리는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를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준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믿게 하기 때문이예요. 예수님이 우리를 믿게 하기 때문에 내가 예수 믿는 것을 날마다 폐기처분해야해요.
왜? 믿는 것도 하나의 기억이고 추억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예수 믿게 되면 5년전에 믿었다. 아니 15년전에 믿었습니다. 이것을 계속 내안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소설의 주인공이예요. 드라마의 주인공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왜 문제로 이야기했지요. 모든 세상 돌아가는 것이 누구 중심으로 돌아가야한다? 결국은? 결국은 내 아름다운 일기장 아름다운 소설 드라마 쓰기 위해서 필요한 것만 뽑다 보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만들기 위해서 온 우주를 함께 연동시켰고 함께 다 동원시켰는데 우리는 내 중심으로 살게되면 이것은 필요없고 이거는 잘라내고 이거는 필요하고 이것을 임의로 내가 필요한 체험과 필요한 기억들만 모아가지고 ‘이것이 나입니다.’ 라고 제시하는 거예요. 누가복음 12장인지 아 정말 갈수록 이제는 내 기억의 손가락이 안 움직여져요. 누가복음 12장. 아 맞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두 가지의 기억을 가지고 등장합니다. 하나는 뭐냐하면 ‘형이 내 아버지 돌아가셨는데 모든 유산을 형이 다 차지해가지고 나한테 아버지가 나한테 남은 유산까지 형이 몽땅 다 차지했습니다. 공의로우시고 정의로우신 예수님, 내 재산 유산 좀 찾아주세요.’ 라고 했을 때 예수님 뭐라고 했냐하면은 방금 했던 제 식대로 하면 예수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니가 지금 관심사가 뭐냐하면은 아버지가 나한테 유산 남긴다는 그 기억을 그 기억에 관심있어요. 왜? 그 유산을 받게 되었을 때 내 재산 이만큼 불어나게 되면 나의 스토리 나의 드라마는 멋질 것 이라는 것을 잔뜩 기대했는데 형이 도둑놈이 되어서 다 가져갔잖아요. 그러면 어떻습니까? 내 드라마가 내 뜻대로 내 원대로 이게 안짜여지죠.
아버지 유산 보태서 뭘사고 나무 한 몇만그루 사고 이런게 있는데, 그게 안되어 버리니까 내 인생 드라마가 이게 조화가 잘 안 꾸며지잖아요. 그래서 그것을 누구한테 찾아오는가? 예수님한테 찾아오는거예요.
지금 이런이야기 하면 ‘야 참 그사람도 믿음 없다. 나 같은면 예수님 안 찾아오고 자기혼자 해결하겠다.’ 이렇게 하는데 나 혼자 해결하는 것이 예수님한테 가져오는거예요. 그게. 왜? 결국 예수님께 따져야되니까 왜 내뜻대로 안됩니까? 분명히 나와요.
세상 왜 일을 그런식으로 하십니까? 분명히 아까 욥처럼 하나님 불러다가 내앞에 지금 심문하고 싶은거예요. 억울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솔직하지요. 예수님한테 갖고 나오니까.
그럴 때 예수님 뭐라고 했습니까? 관심사가 니가 엉뚱한데 가 있다. 너를 살릴수 없는 너를 죽이는데 관심두는 거예요. 결국은 예수님 말씀이 뭐냐하면 니가 그런데 관심두는 것이 그게 너를 살리는게 아니고 너를 죽인다는 말은 생명없다는 그런 뜻, 니가 죽인다는 말은 무슨뜻이냐하면 니가 그 너의 드라마를 생각하는 그 자체가 그것이 너로 하여금 점점 더 죽음의 길로 저주의 길로 지옥으로 가고 있는 힘이 되는 거예요.
평소에 아침에 눈 만뜨면 내 생각하는거 있잖아요. 그게 오늘도 나를 죽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이말입니다. 예수님하신 말씀에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했죠. 그러면 그 청년의 동생이 말하는 소유라하는 것은 결국은 아버지의 유산이 내 몫이 됬을 때 그것이 소유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남의 몫입니까? 아니 형의 것을 뺏을려고 하는거예요? 아니잖아요.
반드시 나한테 와야될 정당한 내것이 여기있는데 그 소유마저 그 소유에 관심을 두고 인생을 살아간다는 그 자체가 그걸 너로 하여금 저주의 나락에 빠지는 지금 그런 자리다 이말이죠. 그런 가는 코스다 이말입니다. 내 소유에 관심있다는 자체가.
또 한가지 예가 나오지요. 그 뒤에 이야기가 뭐냐하면 어떤 농부 농사꾼이 있는데 그해 농사가 너무 잘됐어요. 쌓을대가 없어서 창고를 만들었습니다. 창고에 쌓아도 창고가 가득해요. 기분이 얼마나 좋던지 스스로 자기에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걱정하지 말아라 평생 먹을거 있다.’ 이렇게 자기 영혼 자기 스스로 자기 영혼한테 뭘하느냐하면은 자기한테 위로를 하는 거예요. 위로를 하고 자기를 감사하고 이것을 가지고 경축이예요. 누구 경축? 자기경축을 가지고 줄여서 자축이라고 자축. 스스로 자기한테 축하하는 거예요.
사람사는 보람 이것 때문에 사는거 아니예요? 북한 핵 계발 때문에 삽니까? 그거 좋아서? 수소폭탄 실험하고 난뒤에 김정은이 막 자축하데요. 우리도 같이 자축했습니까? 정의당 빼놓고 자축안하잖아요. 심상정이 빼놓고 아무도 자축안하지요.
만약에 김정은이가 그 핵폭탄 만지다가 터져서 김정은이 즉사했다. 누가 자축합니까? 이쪽에서 자축하지요. 탈북자연합회에서 자축하지요. 이제 북한 안올라가도 되니까. 결국은 모든 인간은 관심사가 뭡니까? 사는 쪽으로 하는 게 아니고 모든 인간은 죽는, 보약 먹으면서 까지 죽는 쪽으로 가는 거예요. 인간은. 심각하지요 심각한겁니다.
그래서 오늘 밤 니 영혼 데려가면 저것은 누구것이 되겠느냐? 이렇게 했잖아요. 그러면 생각해보세요. 그런 말 할거 같으면 하나님께서 농사 안되게 해주든지, 농사를 농사가 너무 잘되니까 자연적으로 up 될 수밖에 없는거예요. up 사이다. 7up. 자연적으로 up 될 수밖에 없잖아요. 그게 뭐냐하면 바로 율법적 기능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은, 오후에도 그런이야기 했지만 하나님의 모든 일은 율법을 통해서 일해요. 율법을 통해서 일해야 그 일에 대해서 처벌이 가능합니다. 저주도 축복도 반드시 뭐로 온다? 율법에 준해서 율법이라는 조항에 준해서 처벌하고 복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문제성이 있으니까 이 문제성 있는 것을 더욱더 융기, 드러내게 마음껏 드러내게 하는거예요. 점잖게 살고 싶은데 갑자기 지리산에서 그냥 산나물 캐고 그냥 겸손하게 살라하는데 지리산에 바람 많이 불거든요.
어떤 지리산 등산객이 주머니에 뭐 복권넣고 다니다가 바람불어 날라가가지고 공중에서 세바퀴 반돌고 그 사람 면상을 딱 때렸단 말이죠. 보니까 복권이예요. 아직 토요일까지 한 이틀남았어. 버리기도 뭐해서 그냥 있었더니만 그게 70억.
있었던 이야기 아니고 제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있을 때, ‘아 70억 버리고 난 산나물 캐자 이럽니까?’ 갑자기 up 되지요. up 되지요! 그게 바로 지리산 들어가서 기도하나 너는 지리산에서 지옥 갈 사람이예요. 그사람.
본인이 몰랐지요. 몰랐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키워준거예요. 하나님께서 너 주제파악하라고. 잘 되게 하신거예요. 이 소리 들으면 참 지옥가도 좋으니 한번 잘되봤으면, 이왕지옥갈거 한번 잘됬다는 소리듣고 그런 아름다운 추억한번 겪어보고싶지요. 이게 율법적 기능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요한복음 한번 봅시다. 본문 들어가 봅시다. 요한복음15장에서 지키라는게 아니예요. 이게 지키라는게 아니고 헛갈리게 만드는겁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제자들로 하여금 헛갈리게 만들어요.
예수님 본인이 포도나무라 해놓고 그리고 너희는 가지라 해놓고 그 다음 뭐라고요? 열매 없으면 짤라낸다. 이게 우리 가지 입장에선 도저히 납득이 안되요. 납득이 안되. 본인의 가지를 본인이 잘라낸다는게 이게 납득이 안되잖아요.
처음부터 열매를 맺도록 해주면 될 문제 아닙니까? 간단한 문제거든요. 제하여 버린다는 것은 이런뜻입니다. 나의 제자가 그리고 나의 열매가 되고 나의 가지가 된다는 것은 필히 제하여 버림, 제하여 버림을 이것을 수용을 해주는 사람만이 주님의 가지가 될 수가 있어요. 제하여 버림을.
제하여 버릴 때 내 안의 제하여 버리때 할 때, 그 뒤에 3절에 너희는 이미 뭐했다? 이미 깨끗하여졌죠. 이미 란 말은 시간이 계속 흘러가는 겁니까? 시간이 이미 종결된 것을 말해요? 이미 종결되었죠? 이미 종결되었죠.
그러면 인간의 시간은 어떻게 느끼냐하면은 자기의 행동의 의해서 계속 느끼기 마련이거든요. 매직을 여기에 놓았을 때 그리고 여기 놓은 매직을 내가 이리로 이동할 때. 뭘 느낍니까? 시간의 전후가 나오죠. 처음에 이렇게 나왔다 이렇게 나오죠. 시간의 전후가 나오게 되면 이것은 종결된거예요? 종결안된거예요? 종결된게 아니예요.
여기있는 것을 다시 끄집어 낼수 있거든요. 종결 안되었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주님은 이미 깨끗하여졌다고했지요. 결국 이것은 내가 알고 있는 체험하고 추억과 기억하는 것과 주님의 기억사이에 뭐가되요? 싸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투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는 나는 포도나무요가 율법적 기능을 하는 거예요. 율법적 기능을. 계속 투쟁을 해야 내가 몰랐던 나의 본성의 어떤 괴물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깨끗하여 졌느니라 하는 그 소식앞에서 내가 얼마나 주님 아니면 계속 죽음의 길로 지옥갈 수 밖에 없는 행동만 내어 놓는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우리는 들추어 지는 겁니다. 반복적으로 들추어 지는 거예요.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이 뭐냐하면 이미 깨끗하여졌느니라 이유가 나와요. 그것은 너희가 어디안에 있다? 너희가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내가 포도나무이기 때문에 이미 깨끗해졌다고 이야기 해요. 이것이 아까뭐냐 율법적 기능이라고 했지요. 자 이것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로마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믿음이나 영생이나 이것을 뭘로 보냐하면 은혜로 보죠, 선물로 보죠. 자 선물 봅시다 선물. 선물이란 A가 B란 사람에게 C라는 선물을 줍니다. A란사람이 B라는 사람에게 C라는 선물을 줍니다. 같은 뭐 선물 주고 받고 그다음에 보따리 주고 받으면될 것을 ABC 하니까 갑자기 어려워졌지요. 이게 어려운 거예요. 이렇게 일부러 어렵게 한거예요.
왜냐하면은 세상에서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는 뭐냐하면은 선물이란 있을수 없어요. 선물이라는 것이 생산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은 A가 B에게 B가 C에게 C라고 하면 안되겠다. 이거는 혼동되니까 C를 α(알파)라고합시다. A가 B에게 B⇒C에게, C⇒D, D⇒E, E⇒F, F⇒A에게 줬다하면은 사람이 누구한테 주게되게 되면 이것은 교환의 순환구조가 일어납니다. 구조, 순환구조.
뭐냐하면은 내가 돈 50불을 주었다 할 때, 50불 주고 B로부터 B는 그걸 받고 주전자를 주게되면 이게 시장경제예요. 이 세상은 전부 다 주고 받는 순환구조로 되어있다니까. 순환구조요.
(A가B에게)50불주고 (B가A에게)주전자 받고, 이 사람은(B는) 50불가지고 (C에게)신발을 구입하고 (C는B에게)신발을 제공하고 모든게 순환구조이지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하면은 안주면 뭐가 되요? 빚이 되죠. 빚이되요 안주면. 채무자 된다고요.
채무자 되기 싫어서 전부 다 뭔가 해요. 자 어떤경우에는 (A가B에게)50불 주었는데 (B가)주전자 줄려고 하니까 A가 ‘아 저 그런거 안받아도 되요.’ 이렇게 되어버리면 ‘목사님 이거는 순환구조가 그냥 증여, 순환구조가 안됬잖아요.’ 이렇게 또 반박할수 있겠죠. 하지만 A가 B에게 거저준게 되죠. 거저줬다는 말은 너그러운 감정을 돈 주고 구입한게 되요. 너그러운 감정을.
내가 저 사람이 너무나 불쌍해서 50불을 주었다. 그 말은 뭐냐하면은 그 사람은 나에게 선물을 받은 사람으로서의 그 사람에게 줌으로서 나는 내게 없는게 생겼어요. 그게 뭐냐하면은 나는 참 자애롭고 너그럽고 배려심 많은 인간이라는 새로운 것으로 50불 주고 내가 구입한 셈이 된다니까요.
근데 성경에서는 뭐냐하면은 성경은 갚음이 불가능한 선물이 와요. 성령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십자가 피줬기 때문에 우리는 십일조로 갚자.’ 이것은 이단입니다. 그렇게 되면 왜 그런 발상을 하게되냐하면 평소에 인간들이 사는 이 구조가 자기가 채무자가 되기 싫어하는 구조로 짜여져 있거든요.
그러다보니까 하나님이 거저 주었으니 우리도 거저 줘버릴 때 하나님과 내가 같이 노는 동창생처럼 같이 노는 자가 되어버려요. 같이 노는 자가. 어떤 인간도 불가능에 대해서는 굉장히 싫어해요. 불가능이 있으면 우리는 가능성으로 도전하고 싶어하는 심보가 발휘됩니다.
주께서 거저 받았으니까 조금이라도 주님께 찬양하며 감사함으로서 보답해 드리면 되겠다라는 그 생각이 사실은 주님앞에 받은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아직도 불가능 속으로 넘어간게 아니고, 가능성 테두리 안에서 돌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교회 헌금하지요. 한번도 헌금한 적이, 헌금 할 수도 없고 그 헌금해 본적도 없어요. 왜냐하면 헌금한 그 교회에서 나가라고 하면 기분 나빠해요. 그렇잖아요. 헌금한게 아니고 그 교회에 투자한거예요. 지분산거예요 지분. 주식을 산거예요.
피아노를 기증했다, 뭘 했다 하면 자기의 몫을 잊지를 못합니다. 그게 아까 뭐라고 했어요? 그게 바로 추억이고 그게 기억이고 그 기억이 나란 인간을 구성한다했지요.
아까 배운 것 우리가 응용해 봅시다. 나란 인간을 내가 못 버리는 이유가 망하는 추억과 망하는 그 체험들이 그게 하나의 나를 만들기 때문에 그것을 쓰레기에 버려버리면 나는 나한테 아무것도 없이되버려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그게 있으면 이것은 90kg짜리 바벨되요. 그러면 그런 모든 것을 몽땅 볼수 있다는 말은 이미 불가능한 것을 선물로 받은 사람한테는 내 인생이 어떻게 쪼그라지고 어떻게 째지고 어떻게 박살나도 관계없이 그 선물에 비하면 그건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예요. 그건 가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나온 노래가 뭐냐하면은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근데 주일 오후에 제가 이야기 했잖아요. 자식이, 그럼 자식하고 예수님하고 누가 귀해요? 그야~주님이 귀하죠.
당신 자식 내가 꿀밤 한번 줘볼까? 이론하고 우리의 육이란 몸하고는 완전히 대척관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포도나무라는 것은 주님께서 있지만, 이 세상에서 포도나무는 없는 거예요. 없는 것에서 나타나는거예요.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나 하나 일대일 다 대조를 해요. 니 자식이 귀하나? 내가 귀하나? 니 카드 통장에 든 돈이 귀하나? 내가 귀하나? 니가 가지고 있는 빌딩이 귀하나? 내가 귀하나? 니가 교회 나오고 니가 목사인데 니 교회가 귀하나? 내가 귀하나? 계속해서 비교합니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비교해요. 그러면 비교하게 되면 결국 뭘 합니까?
내 자식보다, 주님보다 자식 귀합니다. 솔직하게 고백할 수 밖에 없어요. 이게 율법적 기능이예요. 율법적 기능입니다. 율법적 기능은 뭘 만든다? 기억하세요. 율법적 기능은 뭘 만든다? 없는 죄를 만들어 내요. 고마운줄 아시기 바랍니다.
율법이 말씀을 안보게 되면 우리는 괜찮은 사람이 되요. 이미 깨끗하여졌느니라 라는 그 말씀이 오기 때문에 내가 깨끗할려고 하는 이 모든 일들이 얼마나 지저분한 더러운것인가가 티가 나게되어있어요.
왜 깨끗해질려고 합니까? 깨끗한 주인공이 누구예요? 여러분입니까? 내가 깨끗해지면 주인공이 누구예요? 나잖아요. 그러면 내가 누구 보다 귀하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거예요. 주 예수 보다 더.
그러면 결국 주께서 깨끗하다는 그 말씀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는 그 말씀 자체가 결국 율법적 기능을 발휘해서 나로 하여금 거룩해지려는 이런 죄를 짓게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내 죄를 짓게 만드는 거예요 죄를.
아까 누구하고 이야기 했더라? ‘결혼도 죄입니다.’ 라는 것을 주례하면 어떨까요? 누구하고 이야기 했더라? 토요일날 주례 있는데 주례사 하시면서 결혼도 죄입니다라고 어떤 말씀한다했지요.
결혼도 죄입니다라고 이야기하면 안되고, 행복한 결혼하세요 라고 하는 순간 드디어 결혼이 죄로 드러납니다. 평소에 바로 주 예수 보다 더 내 이 결혼이 내 가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노골화 시켜줘야되요. 노골화.
그게 바로 포도나무, 다시 이야기할께요. 포도나무는 있다 없다? 없습니다. 없는데 기능이죠. 기능이니까 이 포도나무가 기능적으로 나타납니다. 어디 나타나는가? 율법적 기능을 적용시키는 그 현장에 나타납니다. 포도나무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죄인들을 통해서 나타나요. 죄인들의 죄안에서 태어나요. 이미 깨끗해졌느니라 라는 그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깨끗해질려고 하는 누가 그렇게 되죠? 남이 깨끗해져요? 아니요 누가 깨끗해져요?
내가 단독적으로 깨끗해질려고 하는 아까 털 하나, 깨끗해질려고 하는 그 노림수를 통해서 뭐가 박살나느냐 하면은 이미 깨끗해졌느니라가 완전히 개무시당해버리는 거예요.
이미 깨끗해졌느니라가 소중한 것이 아니고, 내 노력으로 행하여 이 만큼이라도 내가 깨끗해졌다는 그것이 주님의 깨끗해졌다는 소식보다도 이 체험이 나에겐 더 소중한 90kg짜리 바벨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인생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어요. 지금. 눈만 뜨면 그렇게 살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정말 우리에게 납득이 안되는 이야기를 해요. 뭐냐하면은 이미 주님께서 포도나무이고 우리가 가지가 되었으면 더 이상 제거되어야될 가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가지가 실제 나타나요.
그럼 뭐가 오해가 된거예요? 주님은 포도나무입니다 라는 우리의 그 생각 자체에 뭐가 섞여 들어간거예요? 나는 주님이 포도나무입니다 라는 고백을 했기 때문에 저 신자 맞지요? 라는 신자된 자기 자신을 예수님 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그 죄가 들통이 난 겁니다. 틀통이 난거예요.
자 틀통났으니까 지옥갑니까? 아니면 이미 천국백성이예요? 이미 천국 백성이기 때문에 들통난거예요. 천국 백성이기 때문에. 천국 백성이기 때문에 자기가 구원받는 다는 뜻이 아니고 자기 안에 뭐가 작용하느냐 하면은,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제하여 버린다는 것이 성경책에 그 활자로 되어있는 이 활자가 이 안에 어디까지 들어왔어요?
드디어 실감나게 내 안에 들어있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내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아! 제하여 버린다는 것. 아 제하여 버리는데 안 제하여 버려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내 구원이 우선이 아니고 내 구원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니고 뭐가 중요합니까? 주님이 내뱉은 그 말씀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주님의 모노드라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기 드라마가 되요. 그러면 그 앞에서 음흉하게 내 모노드라마를 꿈꾸던 나는 그 주님의 모노드라마 앞에서 박살나는거죠. ‘니가 중요해? 내가 중요해?’ 우리는 정답은 알죠. 주님이 더 중요하죠. 그러면서도 주님을 더 중요히 여기는 나는 얼마나 소중할까? 이렇게 되어버린다니까 인간은.
그러니까 그것을 차단하는 방법은 뭐냐하면은 우리가 주님을 믿습니다라는 믿음을 우리가 손을 놔버려야 믿음을 놔줘버려야되요. ‘저는 주님을 믿을 수 없고 믿은 적도 없고 믿을 필요도 없고 그렇습니다.’ 라는 고백을 주님보고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하면은 내안의 주님이 아니고 주님 안에 우리가 들어있으면 더 이상 내가 볼 필요가 없지요. 주님의 광채 때문에. 복음의 광채 때문에. 나한테 시답지 않은 나의 어설픈 나의 죄에대서 그다지 큰 키로수를 그렇게 느끼지 않아요. 90kg, 100kg 그런 것을 느끼지 않는다니까요.
내가 따로 내가 있으니까 90kg바벨이 무겁지만, 주님안에 있으면 내게 주어진 이 것이 내가 감당할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인생의 짐으로 느껴지지 않는 겁니다. 진짜 느껴지지 않습니까? 참 원리가 이런거예요.
자 그다음 진도 나가봅시다. 그렇다면 이미 아까 나는 참 포도나무요 했죠. 오늘 많은 것을 했는데 한번 대충하면 이렇습니다. 나는이란 말을 집어넣음으로 말이암아 이 세상에 공자도 십자가 질수 있고 맹자도 십자가를 질수 있고 뭐 소크라테스도 질수 있는데, 왜 하필은 나사렛 예수냐? 그 이야기 했지요.
그 답변이 뭐라고 했습니까? 왜 다른 사람 십자가 지면 메시아 아니고 왜 목수의 아들 그 나사렛 예수 그분이 져야 십자가 구원의 십자가가 되는지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다른 사람이 꼭 세상 대들다가 뭐 억울하게 죽을수도 있는데. 다 잊어버렸죠?
모든 인간들은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다 같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는 이삭처럼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없는 존재가 십자가를 져야되요. 있는 존재는 소용없어요. 없는 존재가 십자가 져야되요.
그래야 모든 그 분앞에서 모든 있음은 자동적으로 죄가 되고 저주가 되겠죠. 죄인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참 우리의 기억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제가 물으니까 또 답이 잘 안되지요?
그렇게 해서 나는 포도나무요 했는데, 나는 포도나무요 이미 확정적이라고 했죠? 확정적. 확정적이라는 것은 시간공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이미 변동이 없어요. 변동이 없다는 말 하면서 예를 든 것이 뭐냐하면은 요한복음 6장 이야기 했죠. 이미 아버지께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살리신다 했는데, 우리는 변동이 우리는 우리감정에 휘말리는 거예요.
이 가을 되었잖아요. 가을되면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슬퍼요. 가을이 되면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서 받아주세요. 이게 고은이라는 사람이 지은 시인데, 그 누가? 어떤 여자가 이쁘다고 한줄 알아요? 얼마나 예리한지, 모르는 여자. 모르는 여자가 아름답다. 왜? 다른건 다 손봤기 때문에 재미없다.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이 가을에는 전부 다 로맨티스트가 되고 낭만이 되고 그런거예요. 오늘도 제가 하나 뭐 제 아내가 올리라고 해서 하나 올린게 있는데 봉화척곡교회라고 올렸죠. 그 배경음악이 뭐냐하면은 autumn leaves예요. 가을 낙엽. 한번 들어가 보시면 음악이 참 좋아요.
이 가을에는 이렇게 전부 다 변동이 된다 이 말이죠. 되면서 특징이 뭐냐하면은 자기가 불쌍해. 세상에 자기보다 불쌍한 사람이 없어요. 너무 불쌍해요. 그말은 인간은 이 추억과 기억 이 테두리를 뚫고 나갈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렇다면 가을을 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주님이잖아요. 그럼 가을을 왜 줬습니까? 가을을 준 이유는 무슨 드라마? 모노드라마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자기 법을 활용시키죠. ‘가을아 가을되라.’
가을되니까 전부 다 자기 생각하고 있는거예요. 신자든 김신자든 박신자든 관계없어요. 전부 다 자기 생각하고 있는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예수님을 더 소중히 한다 그때는 더울때고 수련회 끝나고 다시 가을되니까 다 날라가 버렸어요 이제는.
자기가 가장 불쌍하고 모르는 여자가 그립고 이렇단 말이죠. 아름답고 편지하고 싶고. 얼마나 보세요. 인간은 회까닥 다시 계속해서 자기 쪽으로 옵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힘으로 믿는다든지 주님을 따른다는 말은 이것은 애초부터 성사가 성립이 안되죠. 누가 그렇게했습니까? 주께서 율법적 기능을 발휘해서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죄인되게 하시는 겁니다.
자, 그렇게 하시는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는 이거예요. 그렇게 하게하게되면 모든 것이 확정이 되고 주께서 그렇게 하게되면 이것은 결국 뭐냐하면 이미 계시된 천국입니다. 제가 그 저 10년전부터 꾸준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그거예요. 죽어서 천국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철저하게 천국생활 합니다.
이미 이땅에 눈 부릅뜨고 살아있을 때 천국생활 못한 사람은 죽어서도 어림도 없습니다. 못갑니다. 제가 이렇게 계속해서 이야기 했거든요. 왜냐하면 성령이 산 사람한테 오지 성령이 죽은 사람한테 옵니까? 안오잖아요. 희한하죠. 죽은 사람한테 안가요.
왜냐하면 성령이 온다는 것은 주님의 율법적 기능 때문에 분류작용을 해요. 분류작용. 너는 아니고, 한쪽을 이렇게 따로 분류를 해버리면 자동적으로 저쪽은 저쪽으로 빠져요. 청군만 따로 모아놓으면 백군은 따로 정해져있다니까요.
그래서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우리 구원함이 아니예요. 지옥보내는 작업으로서 우리를 구원한겁니다. 똑같은 인간인데 한쪽을 내사람 해버리면 저쪽은 자동적으로 니사람 되어버려요 이거는. 저것은 딴 사람이 된다고요 딴 사람.
부부싸움하는데 하도 싸우다 싸우다 나중에 말장난까지 나오거든요. 여자 쪽에서 화가나서 오죽했으면 남편을 남이라고 했겠는가 이렇게 하잖아요. 화나면. ‘남이니까 남편이지!’ 하잖아요. 그러니까 남자가 하는 말이 여자할 때 여자가 한자로 남이라는 말이예요. ‘남이니까 여자이지!’ 둘다. 결국 부부싸움할 때 전부 따로 떨어져 있지요.
그런데 인간은 인간도 마찬가지로 나에게 신경쓰게되면 자동적으로 모든 나 빼놓고 전부 다 나 배제하고 전부 남이 되요. 그 남속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도 계시고 하나님도 다 남이 된다니까요. 그렇지요?
그게 바로 주일낮에도 이야기했지만 목사의 사도의 할 일은 뭐냐? 육의 자리에서 어디로 이동시킨다? 영의 자리로 이동시키는 거예요. 그럼 육의 자리로 이동된 사람은 이게 분류자체가 우리가 스스로 해버리면 내가 천당가고 나는 천당가고 내가 미워하는 것은 다 지옥가는 거예요.
그러나 십자가의 영이신 예수님이 분류를 해버리면 예수님 빼놓고는 전부 다 전부 다 다 지옥가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 빼놓고는. 그러면 성도는 어디있느냐? 오늘 본문 나오잖아요. 예수가 내안에 예수님의 안에 있어요.
그러면 주님께서 성도에게 계속해서 무슨 작용을 하느냐하면은 니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확인 시키는 일들만 우주를 요동시켜서 우주와 모든 우주의 연동이 되어가지고 북한 핵문제 부터해가지고 연동되어서 우리에게 찾아오겠지요?
북한에서 수소폭탄 개발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교회 어떤분이 ‘아효, 기도를 안해서 그렇다.’ 새로오신 분인데 우리교회 장로님. 그러니까 문제다 라고 지적하고 하는데 제가 그랬어요.
장로님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가진 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가진게 있으면요, 북한 핵문제하고 바로 뭐로 연결시킵니까? 내가 가진 것과 연결시켜가지고 만약에 내가 서울에 있다. 북한핵 서울 터트리면, 뾰족한 건물이 어디있어요? 서울에 제일 높은 건물이? 잠실에 있죠? 여기도 잠실하고 가까우니까 여기도 제일 먼저 핵폭탄 날라올수가 있어요. 저 멀리 있는 저쪽에 의존교회 신월동 그런데는 안터지고 여기 잠실 터질 가능성이 있어요.
사람은 걱정하는 것이 무슨 뜻이냐하면 소유할게 있다는 거예요. 세상 돌아가는 것은 자기 소유가 소유시키기위해서 하는 거잖아요. 그러면 결국은 나는 내 소유안에 있고 나는 내 안에 내 소유에 들어있는겁니다.
주님께서 북한의 핵 폭탄을 성공케하는 것은 누가 그렇게했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겠죠.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니가 니 소유안에 있는지? 아니면 니가 소유를 안고서 주님안에 있는지? 소유를 버리고 주님안에 있는건 없어요. 전부 다 자기것을 챙길거 챙기면서 주님 안에 있어요.
그럼 주님안에 있으면, 우리 걱정은 뭐냐? 내 안에 있으니까 내 재산 지킬려고 하겠지요. 그것을 바깥에 누가 그걸 아느냐하면 바깥에 우리는 태안에 있는 아이처럼 안에 있어요. 자궁안에 있어요. 그럼 이 더 큰 안에 누가 있느냐하면 예수님이 계신거예요. 예수님이 계셔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율법적 기능을 해가지고 율법적 기능이 뭐라고 했습니까? 죄를 어떻게 한다? 만들어 내는 거예요.
이 안에서 북한이 핵폭탄 실험 성공하게 만들었어요. 성공하는 순간 ‘고맙습니다!’ 하고 찬양하는 그 어느 당밖에 없다? 종북세력밖에 없죠? 종북세력 잘한다 김일성 하지요. 그것 빼 놓고 전부 다 걱정을 하지요. 왜 걱정을 합니까?
각자 소유한게 있어서 걱정하는거예요 소유한 것. 걱정안하는 사람은 누구밖에 없냐하면은 지금 시험에 성공한 뒤에 2시간뒤에 자살하려는 한강 마포대교에 뛰어내릴 작정한 사람. ‘잘됬다. 이 세상아 잘 꺼져라. 신난다. 나 죽는다.’ 이 사람은 걱정 안해요. 왜? 자기는 죽을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죽고자 하는 사람한테는요 북한 핵문제가 별로 의미없다니까요. 지금 당장 5분뒤에 죽을 사람인데 뭐. 번개탄 피워놓고 죽을려고 하는데 소식: 북한에서 성공했습니다. ‘어후 끄자! 빨리 군인나가야되.’ 이러지 않는단 이 말이죠. ‘아이고 세상 잘됬다! 같이 폭파해버리자.’ 이런다 이말이죠.
그러니까 주의 모든 말씀을 지키는게 아니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버리면 주께서 핵폭탄을 성공했다는 그 소식이 우리안에 들어와야되요. 그러면 내 소유에다가 북한 핵문제 들어오면서 누가 그렇게 하셨는가? 누가? 부처가 했습니까? 공자가 했습니까? 누가 했습니까? 주님이 하셨잖아요.
주님이 왜 그렇게 했겠어요? 바로 니가 내안에 있기 때문에. 세상은 누구 중심? 누구 드라마다? 북한에서 뭘 하든지간에 중국에서 뭘 하든지 간에 모든 것, 롯데가 뭐 물러가고 중국에서, 모든일은 누구 누구의 솜씨입니까? 주께서 그렇게 하신거예요.
예수님이 내가 소중하냐? 아니면 니가 그리던 니 드라마가 소중하냐를 다시한번 그 순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를 구원시키는게 아니고 이미 우리를 주님의 구원안에 들어가게 하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제는 이 말씀이 말씀만이 주께서 벌이시는 기준이 되고 표준이 된다라는 것을 알게 되요.
우리가 드라마 하게 되면 이것 빼고 저것 빼고 차 빼고 내 필요한 것만 끄집어 내지만 주님은 세상 모든 것을 다 같이 총 동원해서 이 말씀 지키는 데에다가 모든 개미새끼 움직이는 것까지 전부 다 여기에 다 집어 넣은 것입니다. 발걸음 세는 것까지 모든게.
그러면 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시간이나 공간의 변동 이동사항 같은 것이 그다지 그렇게 아주 절대적인 사건이 아니죠. 나한테 느껴지는 모든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 그다지 충격이 안된다니까요.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죽었다는 그것만이 fact라고 했잖아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었다 그게 사실인거같으면 내가 존재한다는 이 사실이 이것은 무의미한 사실이기 때문에 있으나마나 내 존재아니여도 그만이예요.
만약에 그런 신앙인이 교회 출석했다. 목사는 또 사람 꼬실려고 ‘여러분 복 받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면 ‘저건 무슨 개소리야. 무슨 저런말이 다 있나? 왜 복받아야되요?아니 목사님, 왜 내가 복받아야 됩니까?’ ‘복받아야 행복하거든요.’ ‘왜 행복해야됩니까?’ ‘이단이네, 이단이네.’
아니 모든일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거든요. 아까 순환구조, 경제순환구조했죠. 경제순환구조에서 우리는 벗어나야되는데 벗어날려면 그 말씀이 로마서 11장에 나와요 11장 35절. 누가 주께서 드려서 갚음이 되었느냐 ? 누가 구원받기 위해서 먼저 뇌물 준 사람있겠느냐? 이말입니다.
구원을 얻었다? 구원은 아무런 댓가 없이 그냥 하나님의 뭡니까? 선물로 준거예요. 이런 순환구조가 아닙니다. 은혜받았으니까 은혜받은데로 값을 하는게 아니고, 이것은 이 바깥에서 그냥 무상으로 그냥 준거예요.
누구한테? 나한테? 아니죠. 예수안에 예수님이 예수님한테 준거예요. 모노드라마. 주님이 주님의 영광위해서 준것이고, 우리는 거기에 참여됬을뿐이예요 거기에.
강도가 와가지고 납치를 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쁜사람 다 이쁘지만, 말 조심해야해요. 다 이쁘지만 이쁘다해서 여러분들 보쌈해가지고 마적대 아지트로 갔다 합시다. 그런 상상해 보세요. 벌벌 떨고있죠. 마적 옛날 아닙니까?
지금 드라마에 드라마 잘 안보는데 명불허전이라는 드라마있어요. 이 드라마 시청자들은 굉장히 신나요. 왜? 안죽어요. 안죽는다니까. 조선에서 죽으면 다시 현세로 오고, 현세에서 칼에 찔려 죽으면 다시 조선으로 가고 김남길이 나오는 그거죠? 명불허전.
얼마나 신나는지. 이 세계도 안죽도 저 세계도 안죽어요. 만약에 조선에서 쫓긴다. 그럼 자기가 죽어요. 자기가 찔러버려요. 그럼 현대로 피신해버려요. 시간을 떠나서. 어쨌든 간에 우리가 마적대 이야기 마적대에 붙잡혀 있다면, 계속해서 마적대가 이쁘다고 계속 떡 주고 식혜주고 식혜아시죠? 단술. 식혜주고 맛있는거 준다 이말이죠.
그럼 누구안에 있기 때문에? 누구안에? 마적 소굴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잖아요. 마적소굴안에. 그럼 마적 대장이 나에게 왜줍니까? 자기 소유이기 때문에 자기 색시이기 때문에 주잖아요.
주님의 모노드라마니까 처음부터 천지창조는 주님 좋아라고 만든거예요. 나 좋으라고 영생주고 나 좋으라고 천당보내준게 아니고, 주님 좋으라고 우리에게 색시하나 보쌈해가지고 잡아놓고 계속해서 주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런데 그 안에서 뭐냐 뜨개질하고있어요. 마적대가 뜨개질 확 빼앗고 보더니 ‘이거 별로 안이뻐.’ 가져가고. 뜨개질 대신 이 옷입어라 해서 옷도 해주고, 우리는 아직까지 마적대가 얼마나 좋은지 모르고 ‘나는 내 인생, 개성있는 내 인생 따로 살고 싶은데.’ 맨날 이러고 있단 말이죠.
하지만 그런다 한다 할지라고 마적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벗어나요. ‘에험~!!!’ 두목이 또 시커멓게 또 쳐들어 오거든요.
오늘 강의가 이상하게 끝나버리는데 하여튼 여러분들은 성령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이 이 말씀이 그대로 우리 안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인생 참 힘들게 살아가는데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주님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그런 거짓말 남발하면서 내 가진 것 내 과거와 내 소유를 더 좋아하고 체면과 위신과 명예를 더 소중히 여기는 이 못난 우리에게 아무 댓가 없이 그냥 영생을 주시니 이제는 영생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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