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강-YouTube강의(세례)1700905-이 근호 목사
제200강, ‘세례’입니다. 요한복음1장25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찐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세례요한이 살았던 그 시대에 세례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면, 새 시대를 표현하는 겁니다. 새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백성 만들기와 관련되어 있지요.
새 시대에 적합한 백성 만들기에 여기에 누가 세례주시는 권한이 있다고 보느냐 하면, 그 당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 메시아, 그리고 엘리야 그리고 선지자. 이 메시아와 엘리야, 선지자의 특징들은 뭐냐 하면 범상한 인간들이 아니에요. 하나님과 직통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지시를 늘 교류하고 있는 분들, 하늘의 뜻을 받아서 자기 백성에게 알려주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세례를 주는 거지요.
그럼 세례를 만약에 준다면, 세례 받는 그분들에 의해서 세례 받는 사람들의 지위라는 것, 포지션 이건 완전하게 새로운 인간으로 인정받겠지요. 완전한 새로운 인간으로. 새로운 인간이라 하는 것은 바로 마지막 때 완료된 모든 것이 완성이 된 그 나라에 적합한 인간으로 바꿔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야 돼요. 뭐냐 하면 만약에 메시아도 오지 않고 선지자도 오지 않고 세례를 받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과연 자기 노력으로 자기 행위로 새 나라에 새롭게 들어 닥칠 완성의 나라에 그게 합격하고 들어갈 수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들어가기 곤란하겠지요. 왜냐하면 메시아가 와야 된다니까.
물론 메시아 오기 전에 말씀대로 살고 저 유대인사회에서 말한 율법대로 사는 사람은 뭔가 어떤 혜택은 있지만, 결국 세례라는 것은 뭐냐 하면 세례 한 번만 받아버리면 모든 의욕이 완전히 해소돼 버리지요. 세례만 받아버리면. 여러 가지 니가 들어간다, 못 간다. 들어간다, 못 간다 할 것도 없이 이런 선지자나 엘리야나 메시아가 와가지고 그분들의 세례를 직접 받아버리면 한방에 그 즉시로 완전한 백성으로서 확인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유대인들이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겠어요. 완전한 나라지요. 완전한 거룩한 나라. 더 이상 악한 것도 없고 괴롭힘을 당하지도 않고 영원한 행복이 보장되는 천국이죠. 영원한 행복이 보장되는 그곳에 가는데 완전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 소망을 가졌던 그 모든 것이 일거에 합격통지서를 받는다는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 바리새인과 유대인들과 사회지도자들이 그걸 알았다면 그들은 항상 노심초사 뭔가 기다렸겠지요. 메시아가 와가지고 또는 선지자가 와가지고 엘리야와 같은 권위를 가진 선지자가 와가지고 그들은 간곡하게 완전한 나라를 원하고 있으니까 어서 세례를 베푸는 날을 기다렸겠지요.
그런데 그 기다린다는 말은 결국은 그 분이 왔다, 안 왔다를 측정을 누가하고 판정을 누가 내리느냐 하면, 바리새인들이 지도자들이 그들이 내리는 겁니다. 왜, 그들이 백성들을 그 당시 유대사회를 전부다 그런 식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기다려봐! 메시아가 와가지고 세례 베풀면 우리는 그 고생 끝! 행복 시작! 이야.” 이렇게 했다 말이지요.
그러면 그렇게 크게 장담할 수 있다면 자기들한테 인정을 받고 검증을 맡아야 되겠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자기들이 엘리야를 기다렸으니까 또 선지자를 기다렸으니까 선지자가 왔으면 먼저 누구한테 인정받아야 되겠어요? “혹시 사무실에 계십니까? 저 엘리야인데...” “아, 그래요? 기다렸습니다.” “저 메시아인데.” “아, 그렇습니까? 안 그래도 우리도 당신 오기를 기다렸으니까 세례를 마음껏 베풀어 주셔가지고 우리 백성들을 완전한 백성으로 만들어주세요.” 이렇게 주고받는 게 있어야 되는데 아무런 허가 절차가 없었다 말이죠. 허가 절차가.
이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천국을 기다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천국의 작업에 관련된 인물이라고 여기면 안 된다는 거예요. 천국을 기다리고 구원을 사모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같은 편으로 인정해 주는 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가 있고 얼마나 많은 교단이 있습니까? 성경을 연구하고 탐구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거든요. 그들이 그렇게 연구하면서 늘 생각하는 건 뭐냐 하면 나는 하나님편이고 나는 예수님과 잘 아는 사이니까 예수님께서 일을 하실 때 분명히 내가 알아채는 방식으로 일을 할 것이다. 라는 선입감이 형성돼 있어요.
그런데 그 형성돼 있는데 요한복음1장에서 세례요한이 이 땅에 나타났다는 말은, 이게 참 어려운데. 세례요한이 나타났을 때 아무한테도 허락을 안 받았지요. 그러면 허락은 누구한테 받느냐 하면 세례요한이 허락은 누구한테 받았느냐 하면 놀랍게도 자기 뒤에 오실 분에게 허락을 맡았어요. 자기 뒤에 오실 분에게.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게 말이 안 되거든요. 선배한테 배우는 것이 후배의 도리잖아요. 그런데 이 세례요한 후배는 선배가 없어요. 심지어 선배가 후배의 위치에 옵니다. 이게 바로 진짜 선지자의 특징들이에요. 선지자는 안심 놓고 일하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목숨 바치고 일해요. 목숨 바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식으로 하나님의 일이냐, 아니냐를 결정하지를 않아요. 그 선지자가 아는 것은 뒤에 오실 분이 나로 하여금 이 땅에 살면서 나의 모든 것을 강탈하는 식으로 일을 시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선지자입니다. ‘내가 이런 일을 하면 누가 알아줄 거야.’ 그게 아니고 그렇게 되면요, 자기 존재에다가 남들의 인정까지 더 보탬이 되잖아요. 빼앗기는 것이 아니고 추가적으로 인기가 늘어나요.
그러나 세례요한은 아무도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단독자에요. 단독자지만, 그는 주저 없이 자기의 일생을 오실 분만 생각하면서 갖다 바쳐버리지요. 오실 분만 생각한다는 말은 기존에 자기가 일했던 모든 사람은 오실 분이 아니고 이미 같은 동시대에 같이 사시는 분들이죠.
같은 시대에 사시는 분들에게 낯설고 인정 못 받고 의아해하고 미쳤느냐, 정신병자냐, 하는 그런 것을 충분히 들을만해도 아주 당당하고 주저 없이 일한다는 것. 이게 바로 세례요한의 위상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례요한이 세례를 줄 때, 그 세례 받은 사람들도 세례요한과 똑같은 인식으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따라서 기존의 엉터리들이 꼭 필요해요. 이 세상에서. 만약에 기존의 엉터리들이 없으면 사람은 남들한테 인정받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느냐, 안 하느냐를 측정하기가 쉬워요.
복음을 외쳤는데 아무도 안 알아준다. 내가 뭐 실수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잘못 전하고 있는가? 이런 흔들림이 있겠지요. 그렇게 흔들릴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주님께서는 세례요한을 일하게 하시고 그리고 세례요한한테 세례 받은 사람 또는 예수님한테 성령 세례 받는 사람은 이 세례요한의 부딪히는 상황을 똑같이 우리도 겪게 되는 겁니다.
그래야 우리가 진짜 믿음이라는 게 눈으로 보기 때문에 인정 받고 환영을 받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믿음이냐, 아니면 그런 거 신경 쓰지 않고 정말 주님과의 교제 안에서 살아가는가?
마지막 때는 믿음을 보겠느냐, 그 예를 세례요한이 우리에게 미리 보여준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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