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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복수의 공격 17090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9. 20. 11:42
공은주 (IP:119.♡.152.148)17-09-07 10:03 
200강-YouTube강의(세례)1700905-이 근호 목사 

제200강, ‘세례’입니다. 요한복음1장25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찐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세례요한이 살았던 그 시대에 세례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면, 새 시대를 표현하는 겁니다. 새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백성 만들기와 관련되어 있지요. 

새 시대에 적합한 백성 만들기에 여기에 누가 세례주시는 권한이 있다고 보느냐 하면, 그 당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 메시아, 그리고 엘리야 그리고 선지자. 이 메시아와 엘리야, 선지자의 특징들은 뭐냐 하면 범상한 인간들이 아니에요. 하나님과 직통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지시를 늘 교류하고 있는 분들, 하늘의 뜻을 받아서 자기 백성에게 알려주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세례를 주는 거지요. 

그럼 세례를 만약에 준다면, 세례 받는 그분들에 의해서 세례 받는 사람들의 지위라는 것, 포지션 이건 완전하게 새로운 인간으로 인정받겠지요. 완전한 새로운 인간으로. 새로운 인간이라 하는 것은 바로 마지막 때 완료된 모든 것이 완성이 된 그 나라에 적합한 인간으로 바꿔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 여기서 몇 가지를 생각해야 돼요. 뭐냐 하면 만약에 메시아도 오지 않고 선지자도 오지 않고 세례를 받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과연 자기 노력으로 자기 행위로 새 나라에 새롭게 들어 닥칠 완성의 나라에 그게 합격하고 들어갈 수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들어가기 곤란하겠지요. 왜냐하면 메시아가 와야 된다니까. 

물론 메시아 오기 전에 말씀대로 살고 저 유대인사회에서 말한 율법대로 사는 사람은 뭔가 어떤 혜택은 있지만, 결국 세례라는 것은 뭐냐 하면 세례 한 번만 받아버리면 모든 의욕이 완전히 해소돼 버리지요. 세례만 받아버리면. 여러 가지 니가 들어간다, 못 간다. 들어간다, 못 간다 할 것도 없이 이런 선지자나 엘리야나 메시아가 와가지고 그분들의 세례를 직접 받아버리면 한방에 그 즉시로 완전한 백성으로서 확인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유대인들이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겠어요. 완전한 나라지요. 완전한 거룩한 나라. 더 이상 악한 것도 없고 괴롭힘을 당하지도 않고 영원한 행복이 보장되는 천국이죠. 영원한 행복이 보장되는 그곳에 가는데 완전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 소망을 가졌던 그 모든 것이 일거에 합격통지서를 받는다는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 바리새인과 유대인들과 사회지도자들이 그걸 알았다면 그들은 항상 노심초사 뭔가 기다렸겠지요. 메시아가 와가지고 또는 선지자가 와가지고 엘리야와 같은 권위를 가진 선지자가 와가지고 그들은 간곡하게 완전한 나라를 원하고 있으니까 어서 세례를 베푸는 날을 기다렸겠지요. 

그런데 그 기다린다는 말은 결국은 그 분이 왔다, 안 왔다를 측정을 누가하고 판정을 누가 내리느냐 하면, 바리새인들이 지도자들이 그들이 내리는 겁니다. 왜, 그들이 백성들을 그 당시 유대사회를 전부다 그런 식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기다려봐! 메시아가 와가지고 세례 베풀면 우리는 그 고생 끝! 행복 시작! 이야.” 이렇게 했다 말이지요. 

그러면 그렇게 크게 장담할 수 있다면 자기들한테 인정을 받고 검증을 맡아야 되겠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자기들이 엘리야를 기다렸으니까 또 선지자를 기다렸으니까 선지자가 왔으면 먼저 누구한테 인정받아야 되겠어요? “혹시 사무실에 계십니까? 저 엘리야인데...” “아, 그래요? 기다렸습니다.” “저 메시아인데.” “아, 그렇습니까? 안 그래도 우리도 당신 오기를 기다렸으니까 세례를 마음껏 베풀어 주셔가지고 우리 백성들을 완전한 백성으로 만들어주세요.” 이렇게 주고받는 게 있어야 되는데 아무런 허가 절차가 없었다 말이죠. 허가 절차가. 

이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천국을 기다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천국의 작업에 관련된 인물이라고 여기면 안 된다는 거예요. 천국을 기다리고 구원을 사모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같은 편으로 인정해 주는 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가 있고 얼마나 많은 교단이 있습니까? 성경을 연구하고 탐구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거든요. 그들이 그렇게 연구하면서 늘 생각하는 건 뭐냐 하면 나는 하나님편이고 나는 예수님과 잘 아는 사이니까 예수님께서 일을 하실 때 분명히 내가 알아채는 방식으로 일을 할 것이다. 라는 선입감이 형성돼 있어요. 

그런데 그 형성돼 있는데 요한복음1장에서 세례요한이 이 땅에 나타났다는 말은, 이게 참 어려운데. 세례요한이 나타났을 때 아무한테도 허락을 안 받았지요. 그러면 허락은 누구한테 받느냐 하면 세례요한이 허락은 누구한테 받았느냐 하면 놀랍게도 자기 뒤에 오실 분에게 허락을 맡았어요. 자기 뒤에 오실 분에게.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게 말이 안 되거든요. 선배한테 배우는 것이 후배의 도리잖아요. 그런데 이 세례요한 후배는 선배가 없어요. 심지어 선배가 후배의 위치에 옵니다. 이게 바로 진짜 선지자의 특징들이에요. 선지자는 안심 놓고 일하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목숨 바치고 일해요. 목숨 바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식으로 하나님의 일이냐, 아니냐를 결정하지를 않아요. 그 선지자가 아는 것은 뒤에 오실 분이 나로 하여금 이 땅에 살면서 나의 모든 것을 강탈하는 식으로 일을 시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선지자입니다. ‘내가 이런 일을 하면 누가 알아줄 거야.’ 그게 아니고 그렇게 되면요, 자기 존재에다가 남들의 인정까지 더 보탬이 되잖아요. 빼앗기는 것이 아니고 추가적으로 인기가 늘어나요. 

그러나 세례요한은 아무도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단독자에요. 단독자지만, 그는 주저 없이 자기의 일생을 오실 분만 생각하면서 갖다 바쳐버리지요. 오실 분만 생각한다는 말은 기존에 자기가 일했던 모든 사람은 오실 분이 아니고 이미 같은 동시대에 같이 사시는 분들이죠. 

같은 시대에 사시는 분들에게 낯설고 인정 못 받고 의아해하고 미쳤느냐, 정신병자냐, 하는 그런 것을 충분히 들을만해도 아주 당당하고 주저 없이 일한다는 것. 이게 바로 세례요한의 위상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례요한이 세례를 줄 때, 그 세례 받은 사람들도 세례요한과 똑같은 인식으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따라서 기존의 엉터리들이 꼭 필요해요. 이 세상에서. 만약에 기존의 엉터리들이 없으면 사람은 남들한테 인정받는 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느냐, 안 하느냐를 측정하기가 쉬워요. 

복음을 외쳤는데 아무도 안 알아준다. 내가 뭐 실수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잘못 전하고 있는가? 이런 흔들림이 있겠지요. 그렇게 흔들릴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주님께서는 세례요한을 일하게 하시고 그리고 세례요한한테 세례 받은 사람 또는 예수님한테 성령 세례 받는 사람은 이 세례요한의 부딪히는 상황을 똑같이 우리도 겪게 되는 겁니다. 

그래야 우리가 진짜 믿음이라는 게 눈으로 보기 때문에 인정  받고 환영을 받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믿음이냐, 아니면 그런 거 신경 쓰지 않고 정말 주님과의 교제 안에서 살아가는가? 

마지막 때는 믿음을 보겠느냐, 그 예를 세례요한이 우리에게 미리 보여준 겁니다.

 공은주 (IP:119.♡.152.148)17-09-07 10:04 
201강-YouTube강의(복수와 공격)1700905-이 근호 목사 

제201강, 제목은 ‘복수와 공격’입니다. 이 땅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복수의 대상입니다. 특히 마지막 때는 인간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다 유황불로 불쏘시개로 다 완전히 불로 태워져버립니다. 옛날에 노아 때 하늘에서 물이 내린 것처럼 이제는 물이 내리는 것이 아니고, 그 하늘에서 불이 내려서 인간이 애써서 가꾸어 놓은 모든 문화와 문명, 가치, 의미 한 순간에 다 불로 태워지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하는 방식은 기습입니다. 여기서 기습이라 하는 것은 예상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공격당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특징이 뭐냐, 항상 기습이에요. 예상 못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이 예상하는 것을 왜 그리 싫어하느냐 하면 인간이 그냥 예상만 하는 게 아니고 그 예상을 통해서 자기 방어에 나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정당성이지요. 그것을 세자로 자기 의라고 하는 겁니다. 

기습으로 해서 기습하고 공격하는 이 모든 절차가 큰 범위로 이야기하면 구원이라는 큰 개념 안에 그게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요. 구원에는 반드시 기습, 공격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심판도 포함되어 있고. 그러면 이것이 포함되어있으면 무엇도 포함되느냐 하면 구원의 모든 과정은 예상 못함이 항상 거기에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예상 못했다. 하는 것은 일어난 그 결과에 대해서 내 쪽에서 미리 사전에 원인을 제시하고 제공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 원인 제공을 두 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행함이라고 이야기해요. 행함. 우리가 아는 로마서에 보면 많이 듣던 이야기지요. 행함으로는 구원받지 못 한다 이야기죠. 그걸 풀이하게 되면 우리가 어떤 원인으로 제공된 것은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구원 절차에 넣어주지를 않습니다. 왜냐 하면 기습해야 되니까. 예상 못하게 하기 때문에. 

기습이라고 해서 마지막 때에 이 땅이 불태워지는 것. 그것만이 기습이 아니고 그 기습이전에 계속해서 기습이 우리 성도 인생이나 그리고 기존의 세상 사람들 인생에 계속 주입이 되는 겁니다. 정신 못 차리지요. 

그렇게 기습을 당하고 우연적으로 이렇게 일을 치르다 보면 갈수록 성도는 뭘 느끼느냐 하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하나의 몸체를 갖고 있는 이 모든 것이 이것이 내가 인생을 이렇게 의도해서 만드는 게 아니다 라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나라는 인생이. 내 솜씨를 부려서 내가 이렇게 온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내가 요령을 잘 부려서 이만큼 온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더 알기 쉽게 말하면 이 세상 사람들의 사는 형태는 딱 한 줄로 정리될 수 있어요. 열심히 일하고 거기에 대한 보상 받고. 그게 전부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보상받고. 그게 유지되기 때문에 아직도 이 세상에는 희망을 가져요. 왜냐 하면 내가 미처 내가 이루지 못한 일이 있으면 지금 열심히 일하면 되잖아요. 

열심히 일한다는 말은 결국은 하나의 원인으로 제공하는 거죠. 행함이 되지요. 그럼 그 결과가 자기의 상당히 만족스러운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을 기대할 때에, 그것은 바로 그게 바로 사람 사는 즐거움이고 보람이 되는 거예요. 이 즐거움 때문에 자기가 한 일의 결과의 즐거움 때문에 어떤 즐거움이 탈락이 되느냐 하면 주님께서 이 땅을 방문한다는 즐거움이 이건 저 멀리 치워버려진 거예요. 심지어 교회 다녀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해서 기대하는 결과에 본인이 아주 매료되었어요. 누구한테 유혹받느냐 하면 본인이 본인한테 유혹을 받아버린 거예요. 사실은 본인이 아니고 본인의 욕심이지만. 본인의 욕망에 자기가 정신을 못 차려요. 그야말로 거기에 푹 빠져 버렸어요. 자기의 성공에 대한 희망에 자기가 푹 빠져 버렸어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뭐냐 하면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 때에 갑작스레 오지요. 갑작스럽게. 따라서 이 세상에서 자기 즐거움과 자기의 노동에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 그게 현실의 전부라고 여기는 사람 같으면 그 사람은 신자아닙니다. 

그러면 신자라 하는 것은 마냥 노느냐, 그게 아니에요. 신자도 열심히 일하지요. 나름대로 보상을 기대하지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우선되는 게 뭐냐 하면 기습이에요. ‘이러다가 내가 너무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수시로 갖게 만들어요. ‘이게 다가 아닌데.’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의 떠돌이인데 내가 왜 이렇게 정착하려고 애를 쓰지?’ 

‘무엇으로 정착하지? 무슨 낙이 있다고 정착하지? 무슨 보람이 있다고 정착하지? 내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 라는 생각이 성도는 자꾸 들어요. 성도라고 뾰족한 수  없어요. 이 세상에 일 안하고 못 사는 성도라 해가지고 별 묘책 없습니다. 그냥 떠밀리는 대로 떠밀릴 수밖에 없고 태풍 오면 성도라도 태풍이 오면 봐주고 그런 거 없어요. 태풍과 해일 성도라고 비성도 낯가리지 않아요. 다 쳐버려요. 

성도는 뭐냐 하면 제일 바닥을, 궁극적인 늘 바닥을 생각하지요. 어차피 여기에 있는 이 세상은 불로 없어진다는 겁니다. 다 없어지기 때문에 그다지 이 세상에 대해서 실패에 대해서, 낙오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 절망하거나 슬퍼하거나 스스로에게 노하지 않겠지요. 뭐가 소중한가를 알기 때문에. 

이 세상은 결국은 화투에서 버릴 패에요. 피살이하던가. 어차피 이걸 버릴 패라고요. 그 버릴 패에 본인도 같이 담아서 버리는 식으로 살아가야 돼요. 이걸 쥐고 있으면 너무 힘이 들어가요. 근육에 힘이 들어간다니까요. 이걸 스트레스라 하는데. 삶의 스트레스. 이게 적응이 안 되면 우울증 걸려 자살해요. 자꾸 붙들면 안된다고요. 

왜냐하면 어차피 총공격할거니까요. 천사들이 총공격할거니까요. 피하면 되지 않겠느냐, 피할 특정 장소를 허락하지 않아요. 벙커 속에 들어가도 소용없어요. 그래서 요한복음16장33절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세상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데 니는 뭐하냐 이 말입니다. 
나는 세상을 향하여 승리했는데 너희는 무슨 승리를 기대하고 있느냐, 이 말입니다. 무슨 승리? 이 땅에서 자기 자리 잡는 게 승리입니까? 그래서 저는 이 본문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세상이 구멍 뚫렸다.” 세상이 구멍이 뚫린 거예요. 

요새 하는 드라마 보니까  조선에 갔다가 한국에 왔다가 왔다, 갔다 하는 게 있어요. 그런 드라마가 있어요. 한의사가 조선에 갔다가 이리 왔다가, 덩달아서 여자 양의사도 왔다 갔다 하는 드라마가 있어요. 구멍 뚫린 거예요. 성령의 바람이 불어야 돼요. 아주 시원한 바람. 답답할 때 시원한 바람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복음은 이 세상에 답답한 이에게 복음은 구멍을 늘 뚫어줍니다. 그 드라마의 침쟁이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침쟁이가 되어야 돼요. 침쟁이가 사람을 살립니다. 복음의 침을 놓으시면 막힌 코가 시원하게 뚫릴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