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강-YouTube강의(복음과 관련된 삶)170718-이 근호 목사
198강, 제목은 ‘복음과 관련된 삶’입니다. 복음에 대해서 언급이 된 것은 이사야에도 나오고 예언되어 있습니다마는, 이사야, 예레미야 같은 데는 그냥 예언만 했지요. 하나님께서 그냥 말씀만 한 거예요. 그런데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말씀만 해가지고서는 영~ 성에 안 차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로 성취가 되어야 되고 우리 앞에 나타나야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 하신 것이 그대로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되면 그 복음뿐만 아니고 그전에 이야기한 것, 천지창조 했다는 그 이야기가 복음 안에서 다 증빙이 되는 겁니다.
복음의 내용만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것만 맞고 나머지는 또 확인하여야 된다. 그 말이 아니고 이 복음이 나타나게 되면 모든 주님의 하나님의 모든 구약의 말씀이 복음 중심으로 다 엉기게 되어있고 뭉치게 되어있어요.
만약에 복음이 정말로 나타났다면 그러면 창세기1장, 2장, 3장 해석에 대해서는 그 때는 굉장히 간단해요. 복음이 완성이기 때문에 그 복음 중심으로 다시 재해석하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이 실현이 됐다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실현 안 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 말씀에 실현을 언급하느냐 하면,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이 나타났다. 복음이다. 그럼 그걸 건성으로 이야기해요. 건성으로 여기고 그 다음에 요한계시록을 이렇게 펼쳐봅시다. “이건 아직 안 이루어졌네.” 이래요.
예수님 복음은 이루어졌는데 아직 요한계시록 내용은 아직 안 이루어졌으니까 우리가 탐색해야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펴봐야 되고 다시 증거를 모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구약의 여리고성이 무너졌다.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땅을 파서 고고학적으로 확인해 보자는 겁니다. 크로마뇽인은 어디 있느냐, 거인족은 어디 있느냐, 이것은 우리가 고고학적 기다려서 아직 과학이 덜 발달해가지고 그 유인원들, 거인들이 공용 뼈처럼 이렇게 전시가 되어야 우리가 손으로 믿겠다는 거예요.
그런 발상이 왜 생겼느냐 하면 복음에 대해서 전혀 복음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발상이 생기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마는, 복음이 나타났으면 신.구약 요한계시록이 다 창세기부터 모든 것이 복음 안에 이미 완료가 되었어요.
그때부터 복음을 가지고 풀어서 이것 봐라! 이래서 완성된 거야! 완료된 거야! 끝났어. 더 이상 우리가 믿을 것은 복음 밖에 없어. 라고 우리가 다가올 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해석이 종결된 거예요. 모든 해석은 이미 확정된 겁니다. 그 해석 말고 다른 해석 들어가면 전부 다 그것은 거짓말이고 이단이고 악마가 그렇게 의도적으로 사주한 거예요.
그런데 복음에 대해서 마가복음1장에 보면 복음 이야기 나와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되어있거든요. 그래서 이 마가복음1장 1절을 보면 그 복음이 뭐냐, 사람들은 신학자이던 일반 보통 사람들은 첫 성경을 보는 사람은 복음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1장에 보면 복음이 뭐냐 하면 ‘십자가’가 복음이에요. 말이 다르잖아요. 마가복음1장에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로마서1장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복음, 이리 돼요.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복음이 나타난다. 복음은 나타난다. 천번만번 이야기 해봐야 소용없어요. 실제로 나타나야 돼요. 우리가 사는 동네에 실제로 나타나야 돼요. 그런데 그 복음이 예수님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예수님이 나타났다고 하면 예수님 살던 그 제자들은 좋겠지요. 왜? 복음을 눈으로 목격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눈으로 예수님을 못 보잖아요. 그것도 부활하고 난 뒤에는 제자들에게 깜짝 보여주고 빠져버려요. 예수님께서 부활하고 세 번 나타났는가, 그 정도 자주 빈번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윗에게도, 솔로몬에게도 하나님이 두 번밖에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솔로몬 초장에는 하나님 말씀 잘 듣거든요. 자주 나타나서 잘 듣습니까? 한 번 나타날 때마다 그 안에 모든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제가 옛날 젊을 때 군에서나 명절에 주는 선물이 해태종합선물이라는 게 있었어요. 단계로 구입할 수 있는 게 그 안에 다 들어있어요. 복음 안에는 우리가 궁금한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구원 받기에 필요한 건 다 들어있어요.
예수님이 만약에 복음이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존재도 믿어야 되고, 예수님의 오병이어도 따로 믿어야 되고, 예수님의 주기도문도 실행에 옮겨야 되고, 산상설교 하나, 하나 다 지켜야 되고, 이건 뭐 복음이라고 왔는데 너무 많아요. 그럼 어떤 건 지키고, 어떤 건 안 지키면 탈락이 돼버리지요. 그렇죠? 복음이.
예수님이 지시를 한 두 가지 한 게 아니잖아요. 굉장히 많이 했잖아요. 금식할 때는 이렇게 하고, 기도할 때는 이렇게 하고, 무엇이 살인죄며, 맹세하지 말라, 이것도 지켜야 되고 남을 판단하지 말라, 이것도 해야 되고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냈는데 우리도 귀신을 쫓아내야 되는 그 문제도 생기고, 베드로 같은 경우는 물위를 걸었는데 우리도 가끔 물 위를 걷는지 시험도 해봐야 되고 여러 가지 할 게 많다 말이죠.
예수님한테 제자들은 떡을 얻어먹었는데 우리는 돈 주고 사야 되고 뭔가 뭘 더해야 되는지 아직도 모자라는지 그래서 어떤 이상한 교단에서는 초대교회와 같은 기적이 없으면 그건 성경의 역사가 아니다. 이렇게 되어버려요. 그들은 복음을 몰라요. 초대교회처럼 그걸 판박이처럼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복음에 대해서 예수님이 활동했다. 이리 되어버리면 우리가 예수님의 활동을 몇% 흉내 내야 되는지 몇% 그걸 실천에 옮겨야 되는지 10%? 15%?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1장에 보면 십자가가 딱 나와 버려요. 십자가가 딱 나와 버리고 또 로마서에 보면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믿어야 된다. 로마서4장에 보면 믿음에 대해서 뭐라고 되어있는가 하면 믿음의 내용이 죄 때문에 죽었고 의 때문에 살아났다. 그걸 주께서 죽었다가 살아났다. 함축해보면 그게 십자가가 되어버려요. 십자가 또는 십자가 부활.
십자가로 모아진 게 좋아요. 왜냐하면 갈라디아서3장1절에서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했으니까. 부활의 몸에 보이지 않는다고 했어요. 십자가가 눈에 보인다 이 말이죠. 십자가를 눈에 보이도록 하는 그 배경을 가지고 부활의 장이 돼요. 부활은 부활을 보여주는 게 아니고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보여준 게 부활의 장, 부활의 현재성이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십자가는 뭐냐 하면 십자가는 행함의 뚝! 이에요. 행함은 받지 않는 겁니다. 일체 우리의 행함을 받지 않는 게 십자가에요. 그럼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는 뒤에서 십자가가 밀지요. 십자가가 미는 걸 십자가 안이라고 갈라디아서 6장에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무엇을 먹던지 무엇을 마시든지 오늘 간짜장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상관없어요. 탕수육 중 하나를 시킬까요? 대 자 시키던지 그건 아무 상관없어요. 여기올 때 지하철 타고 올까? 버스타고 올까? 아무 상관없다. 이 말이죠.
민소매로 입고 오느냐, 반바지 입고 오느냐, 아무 소용없어요. 평생 바람을 10번 피웠느냐, 한 번도 안 피웠느냐, 아무 상관없어요. 교회를 2번 다녔느냐, 10년 다녔느냐, 아무 소용없습니다. 십일조 했느냐, 안 했느냐, 관계없어요.
복음은 십자가로 나타나요. 십자가. 왜? 십자가 자체가 “나는 너희에게 아무것도 안 받는다.” 받아서 구원 받을 것 같으면 내가 십자가 지지를 않았다. 십자가가 새 언약인데, 새 언약은 완성을 의미하는 겁니다.
더는 필요 없다. 복음과 관련된 삶이라 하는 것은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내가 주를 위해서 뭔가를 열심히 했는데 그게 아무 소용없습니다.” 를 보여줄 때 그게 복음과 연결된 관련된 엮여진 상황.
그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뭘 하지만, 이것은 이것 모아서 구원되는 게 아니고 이미 십자가로서 다 이루었다는 그 말씀에 실현태. 실현된 상태.
그 다 이루었다. 의 증거물이 “지금 아무것도 내가 하는 것은 보탬이 안 됩니다.” 라고 고백하는 그것이 지금 십자가로 작용하는 유일한 증거입니다. 이게 복음과 관련된 삶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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