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70811a약1장1절(의도)-이 근호 목사
야고보서1장 봅시다. 야고보서 유명한 구절이 있지요. 야고보서2장에 보면, 믿음으로 신앙 생활하는 것이 아니고 행함으로 신앙 생활한다는 내용이 야고보서2장18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보이리라.’ 요 대목. 그래서 이 대목을 먼저 보게 되면 사람이 하나님에게 보일 것은 딱 2종류밖에 없는데 하나는 행함과 하나는 믿음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믿음을 보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야고보서는 행함을 보이는데. 자, 여기서 약간 복잡해요.
믿음+행함 이러면 아무 문제없는데 믿음이면 믿음이고 행함이면 행함을 보이라는 거죠. 행함도 있고, 믿음도 있고 둘 다를 내보이지 말라는 거예요. 이 말이 상당히 어려운 거잖아요. 쉽게 말해서 행함90%, 믿음10% 이거 안 된다는 겁니다. 반대로 행함10%, 믿음90% 이것도 말이 안 된다는 거예요. 딱 딱 끊으라는 거예요.
행함이면 행함, 믿음이면 믿음. 그러니까 대표적으로 너를 내세울 게 믿음이라고 이야기하던지, 행함이라고 하던지, 둘 중에 하나만 하라. 그런 이야기에요. 좀 전에 시작했습니다. 새로 다시.
야고보서할 차례입니다. 야고보서를 하면서 사람들이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이 뭐냐 하면 다른 로마서에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는데 야고보서는 믿음은 아주 취급도 안하고 행함 내놓으라는 이야기에요. 행함. 믿음은 내놓지 말고 행함 내놔라 이 말이죠.
그러면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꼭 행함이 없는 것들이 믿음을 내놓는다는 겁니다. 야고보에 의하면. 그러면 야고보서가 이렇게 2장에서 믿음과 행함 둘 중에 둘 다 내놓지 말고 둘 중에 하나를 내놓는다면 야고보서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야고보서 앞에 뭘 내놓겠습니까?
야고보서가 이렇게 믿음에 대해서 아주 싫어하고 거부하고 행함만 딱 내놓으라고 할 때 우리는 그러면 야고보 사도 앞에서 우리는 뭘 내놓겠습니까? 야고보가 이렇게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기 믿음 있습니다.” 라고 내놓겠어요? 어떻게 됐겠어요? 뭐라고 하겠어요? 야고보가 앞에 있다면. 그렇게 강조했다면.
야고보가 그렇게 믿음 갖고 오지 말고 행함 갖고 오라고 했으면 지금 그 분이 이 앞에 앉아있다 합시다. 그 분이 또 “자, 한 번 보자. 보자. 뭘 내놓을래?” 할 때 그렇게 신신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이요.” 하고 내놓을 사람 있겠어요? 없겠어요? 뭐라고 했겠습니까? “야고보, 당신이 사도가 좋아하는 행함 가지고 왔습니다.” 이렇게 되겠지요.
그게 야고보서의 주제에요. 쉽지요. 야고보서의 주제가 뭐냐 하면 행함으로 보여주는 믿음이 주제입니다. 그러면 야고보의 모든 명령과 지시는 믿음에 관한 게 아니고 어디와 결부되어야 된다? 행함과 결부되어야 돼요. 여기서부터 어렵습니다. 진짜 어려워요. 제 말 잘 들어보세요. 제 말이 틀리면 중간에 논리가 틀렸다고 이야기하세요.
야고보가 행함을 지금 요구하고 있지요. 그렇잖아요. 그렇다면 이 행함이 여기 나타났으니까 있음입니다. 있음. 여러분한테 이게 어렵기 때문에 묻는 식으로 하겠습니다. 행함이 있을 때, 나타났을 때, 행함이 없을 때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행함을 보이라 할 때 “예, 행함 있습니다.” 라고 가져올 때 이 행함이 없을 때가 있겠습니까? 아니면 없을 때가 없겠습니까?
더 쉽게 합시다. 중국집에서 “자장면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자장면을 내놨을 때에 그 자장면이 없을 때가 있어요? 아니면 내 놔라 할 때 자장면을 만드는 겁니까? 어떻게 되는 겁니까? 중국집에 이만큼 쌓아놓지는 않잖아요. 누가 와서 “뭐 드실 겁니까? 짬뽕? 자장면?” “자장면” “예, 자장면 준비하겠습니다.” 없는 자장면을 달라고 지시하는 동시에 자장면이 새롭게 만들어지지요. 그러면 자장면이 없는 그 순간이 있는 것처럼 행함을 달라할 때는 행함이 없는 그 순간이 있다 말이죠.
이 없음이 어떤 상태냐 하는 겁니다. 이 없음이. 행함이 없던 상태가 어떤 상태냐 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여기서 오해합니다. 행함이 없던 상태는 인간이 있고, 야고보가 또 하나님이 “야, 너의 행함 보자.” “여기 있습니다. 제가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지요.
그런데 야고보는 놀랍게도 행함이 인간에게서 나오는 행함이 아니고 하나님, 또는 주님이 계셔서 나오는 행함이에요. 그러니 로마서하고 똑같은 거예요. 로마서에서는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했지요. 그거 보다가 야고보서 2장을 보고 여기는 니는 믿음 보이느냐, 나는 행함 보이겠다. 이렇게 하니까, ‘야~~ 야고보하고 사도바울하고 만나면 둘이 싸우겠네.’ “이 씨~ 내 말이 맞아.” 같은 예수님의 사도이면서도 내 말이 맞아. 이런 싸움이 되면 안 되지요. 본인들의 사견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명령이기 때문에 같은 주님이기 때문에 싸울 리가 없지 않습니까.
주님의 사도가 같이 안 싸운다면 오늘날 일반인들이 야고보서 보고 로마서 보면서 싸우면 돼요? 안돼요? 싸우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뭔가 놓친 게 있어요. 로마서에서는 “야! 너가 행함을 내놓을 거냐? 믿음을 내놓을 거냐?” 할 때 “행함이요.” “그건 안 돼. 구원은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야.” 라고 사도바울이 했을 때, 인간이 먼저 있고 인간에게서 행함도 나올 수 있고, 인간에게서 믿음도 나올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야고보서에서 행함은 믿음이라는 것은 인간에게서 믿음이 나오지만, 행함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인간의 출처가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출처가 오는데 그 출처를 야고보서1장에서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은사’라고 되어있어요. 은사를 다른 말로 하면 ‘선물’입니다. 선물. present. 선물이에요.
아주 알기 쉽게 말해서 야고보가 “야, 너희들 성도야?” “예, 성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받은 행함을 내놔.” 이리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 받은 게 행함이던, 믿음이던 로마서에서는 그걸 통합해서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로마서에서는. 로마서에서는 인간에게서 나온 것은 무조건 그게 믿음이던 행함이던 그건 행함이 되는 거예요. 좀 복잡하긴 하지만, 일단은 정리됐다고 칩시다. 일단은 우격다짐으로 칩시다.
그 다음에 진도 나갑니다. 야고보서2장에서 행함이냐, 믿음이냐 이야기를 누구와 누구보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하나님과 사도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같은 인간들끼리 이야기하겠지요. 같은 인간들끼리. 오늘 내용이 참 복잡해요. 인간들끼리 이야기하잖아요.
인간들끼리 이야기하는데 “야, 너 신앙생활 어떻게 해?” “나, 믿음으로 해.” “아이고, 참, 믿음으로? 야고보서에서 사도가 그런 거 하지 말라 했어.” “그러면 너는?” “나는 행함으로 하지. 그거 야고보 사도가 이야기한 거야.” 라고 둘이 대화를 한다고 했을 때에, 이건 행함과 믿음의 문제가 아니고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 선물로서의 행함은 어떤 인간과 대화하면서 무엇을 가름하느냐 하면, 니는 신자다. 니는 신자 아니다. 가름하는 이야기가 돼요. 니는 신자다. 니는 신자 아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로마서에서 믿음이냐, 행함이냐를 통해서 그 사람이 신자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것처럼 야고보서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냐, 니가 하는 것이냐에 따라서. 그러니까 인간이 행함을 내놓으면 야고보서에서는 그건 믿음이 돼요. 출처가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이기 때문에.
결국 야고보서도 뭐냐 하면 니는 신자다. 신자 아니다. 를 행함 가지고 구분을 짓는다는 것에서 로마서나 야고보서나 같은 겁니다. 그럼 여기서 그 다음 문제. 그걸 왜 구분 지으려 하는가.
권사님한테 물어봅시다. “권사님, 어떤 사람이 있는데 신자냐, 신자 아니냐, 구분 짓고 싶어 하지요? 그런데 그걸 왜 구분 지어야 되지요? 그걸 왜 구분해야 됩니까?” 가게에 손님이 왔는데 옷차림이 보니까 촌스러워. 그러면 옌벤 사람인지 서울 사람이지 이상하게 가게 주인은 구분하고 싶어 해요. 옌벤은 덤탱이로 씌우던지 아니면 우리나라 사람은 깍쟁이라서 조심해야 되던지 이런 고민인지 모르겠지만.
사람은 뭔가 오게 되면 구분을 하는데 신자의 특징은 본인과 같은 신자일까를 가지고 구분을 해요. 본인과 같은 신자일까.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오면 저 사람이 성당 다닌 사람인가. 실례지만 대구의 어느 성당 다니셨습니까? 대구에서 이사 왔다 하면.
그러니까 내가 묻는 것은 왜 그걸 구분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걸 왜 구분하지요? 그게 오늘 1장1절과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묻는 겁니다. 아무 관련 없는 걸 묻는 게 아니에요. 그걸 왜 구분되느냐 하면, 결국은 인간은 자기중심이라는 것을 야고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거예요. 결국은.
그걸 왜 구분하느냐 하면, 하나로 통합의지가 있어요. 그 하나가 누구냐 하면, 나라는 하나에요. 나라는 하나. 투표할 때 문재인 찍었느냐, 홍준표 찍었느냐 이리 묻잖아요. “목사님은 누구 찍었습니까?”라고 묻는 이유가 대구사람 같으면 자기는 이미 홍준표 찍어놓고, 서울 사람 같으면 문재인 찍어놓고 시작하는 거예요. “내편 되세요.” 라는 뜻이에요. 내편 되세요.
나라는 하나. 하나로 통합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요. 그 의지. 이것을 의지라 하는데. 저는 더 알기 쉽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오늘 아마 제목이 될 가능성이 있어요. ‘의도’ 의도라고 명하고 싶네요. 의도라고 표현하고 싶네요.
신앙생활 죽 하면서 본인이 신앙생활 잘하고 있느냐, 못하느냐, 다른 사람이 잘하고 있느냐, 못하느냐를 싶게 판정하는 방법은 교회 다니는 의도가 뭐냐? 자기 의도를 늘 수상히 여기고 분석해 보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는 의도가 뭐냐? 이건 일부러 물어야 돼요. 이거 안 물으면요, 지금 잘하고 있는 짓이라고 착각한다니까요.
교회 다닌다면, 교회 왜 갔지? 의도가 뭔데? intention이라고 하는데. 의도. 그 의도가 뭔데? 그 의도가 야고보서에서는 우리의 의도는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이 환경에 우리 의도보다도 먼저 뭐가 주가 되느냐 하면 주님이 이 지상에 대한 의도가 더 강렬하기 때문에 신자라면 내 의도가 있더라도 주님의 의도로 바뀌어져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내가 만약에 자석에서 내가 만약에 성향이 S극이라면, 주님이 와버리면 주님은 나의 S극을 N극으로 강력하게 의도를 바꾸면 우리 내부에서는 S극과 N극이 날마다 우리 속에서 투쟁하고 싸우게 되는 겁니다. 투쟁하고 싸우게 돼요. 나, 태국에 놀러간다. 태국에 놀러간다 하니까 친구들이 좋겠다. 신나겠다. 바람 쐬고 온나 이렇게 하겠지요.
그런데 친구한테 태국에 놀러간다. 자랑 질하면서 한 번 생각해 보는 거예요. 내가 태국에 놀러가는 것이 의도가 뭐냐는 거예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태국에 가야 주님이 계십니까? 아니면 내가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성지 순례하는 건 이해되는데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태국 가서 부처한테 빌면 영광 돌리겠어요?
그러니까 모든 의도는 인간에게는 태어날 때 갖고 있던 자기 중심. 그 의도가 강렬한 거예요. 강렬한데 그 의도가 태국 가는 것뿐만이 아니고 모든 주변의 만나는 사람마다 무조건적이에요. 무조건, 무조건이에요. 무조건 내 의도에 맞추라고 상대방에게 무언적인 강요를 하는 거예요. “수련회 참석하실 겁니까?” 무언중에 “아이고, 청심원.” 아이고~ 뒷골 댕겨. 무언중에 뭐야? 갑이야? 무언중에 충격. 무언중에 어떤 강한 의도를 느끼는 거예요. 강한 의도를. 모든 게 다 그래요.
심지어 부부사이도 마찬가지에요. “여보, 백화점 나와. 당신 이 가방 찾았지?” 가방을 샀다. 일단 아내는 감사하다 하고 챙기고. 일단 챙겨야 돼요. 어떤 군소리하면 마음이 또 바뀌기 때문에 일단 챙겨 놓고. 다 챙기고 “기분 좋지?” 하고 약 한 16분45초간 기분 좋아요. “그런데 여보! 의도가 뭐야? 뭐? 뭐? 뭐 일이 있었지? 응? 나한테 숨겨놓은 일이 있지? 의도가 뭐야?” 다시 말해서 “내가 요구하지 않은 것을 당신이 나한테 먼저 어떤 행세를 할 수 있어?” 이러거든요.
그러면 인간에게는 뭐가 있습니까? 행함이 있지요. 그런데 “주님이여, 의도가 뭡니까?” 그 의도를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라고 합니다. 내 의도는 주님에 의해서 박살나는 그 의도를 야고보서는 말합니다. 내놔라. 야고보서의 말을 지키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이 어려운 거예요.
야고보서에 “보자~ 뭐 하지 마라.” ‘지키지.’ 지키는 게 아니고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자기 의도가 있어요. 이 모든 야고보서에 나온 말씀은 지금 그 의도가 성도라면 내 의도와 정면 충돌한다는 거예요. 충돌하고 누가 이긴다? 주님의 의도가 내 의도를 이긴 그 증거물의 행함을 가져오라는 겁니다.
‘목사님, 과도하게 해석하는 게 아닙니까?’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진짜 요 본문 보게 되면 절대로 과도하게 한 게 아님을 아시게 됩니다. 어디를 보느냐 하면 바로 야고보서2장 23절 봅시다.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그렇지요. 23절에 행함이 나오잖아요. 그 행함이 21절에 나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무엇을 제단에 받쳤습니까? 이삭 받쳤지요. 이삭 바친 것이 아브라함의 본인 의도입니까? 하나님의 의도입니까? 하나님의 의도잖아요. 이제 야고보서 전체가 납득이 되십니까? 이해되십니까?
다시 할게요. 우리가 성경이 이리 하면 우리는 자신의 의도가 마치 없는 것처럼 본인의 의도가 없는 것처럼 순수가 그 자체인 것처럼 “말씀만 하이소. 지키겠나이다.” 이러는데. 그러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하던 것을 달라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바치는 것이 아브라함이 평소에 하던 상식이에요? 평소에 하던 행세였습니까? 평소에 아버지가 아들을 못 죽여서 환장한 분이에요? 아니잖아요. 그게 해답이라니까요. 그게. 우리가 평소에 하는 그거 아니에요.
뭐 라면 끓인다고요. “그래, 행함으로 보이라.” 하니까 “예, 라면 끓여드리겠습니다. 나는 진라면 좋아합니다.” 이래 가지고 그거 끓여 준다고 이게 행함이 아니고. 도저히 나의 의도에서는 애초에 애시 당초에 없던 거. 그걸 하나님의 의도가 침범했거든요. 침범해버리면 그건 성도에요.
성도는 혼자 사는 게 성도가 아니고 낯선 분의 침투 침범을 받는 겁니다. 낯선 분이 내 허락도 없이 나와 함께 동행을 하는 거예요. 최성수의 동행.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동행입니다. 동행.
그러니까 성도는 뭐냐 하면 나를 내보이는 게 아니에요. 나 야고보 시킨 대로 이렇게 착하다. 이걸 보이는 게 아니고 나와 함께 하신 분이 함께 했음을 확인하고 증명해주는 거기서 나온 그 행함인데 그 행함은 낯설고 나에게도 낯설고 특이하고 기이하고 이것은 내가 원래 늘 주특기로 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고 주께서 함께 있는 경우에만 나올 수 있는 그 특이성을 나한테 보여라, 입니다. 그게 2장입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가 1장 내용에도 있겠어요? 없겠어요? 당연히 1장에도 있어요. 1장, 2장, 3장, 4장, 5장 전부다 하나님이 함께 있기 때문에 나오는 특이한 행함을 두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런데 거기에다가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니까 야고보가 화가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에이고 그런 믿음은 귀신도 믿겠다. 내 좋아라고 하나님 믿는 거 누가 못 믿어요. 야고보는 그런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이제 야고보 2장의 행함과 믿음 차이를 아시겠지요. 출발점이 나로부터 출발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부터 출발하느냐, 아니면 나로부터 출발하느냐,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그게 행함이 됐든 믿음이 됐든 그건 행함이 야고보서가 원하는 게 아니에요.
그럼 1장에 보게 되면, 1장 16절, 오늘 여러분들이 컨디션이 안 좋기 때문에 내가 그냥 읽을게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속지 말라 했어요. 속지 말라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평소에 이런 식으로 속아져 왔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속지 말라 한 거예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은 다 어디서부터 옵니까? 위로부터 오지요.
그러면 평소에 이 말씀 이전에 사람들이 속아온 것은 뭐냐 하면, 위로부터 오지 않더라도 내게 기본적인 양심과 인격과 품격에서 얼마든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라는 말에 절대로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거예요.
그 다음에 내가 진짜 중요한 거 오늘 강의 때 제일 중요한 거 묻습니다. 그러면 내게 없는 것을 내놓는 게 행함이라 했지요. 하나님께 선물로 받았으니까. 그러면 내게 있는 걸 내놓을 경우에는 그것은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훈련과 교육으로 성립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내게 있는 걸 내놓을 때는 고도의 훈련과 반복적인 성찬이나 아니면 그러한 학습으로 내놓겠어요? 안 내놓겠어요? 내게 있거든 내놓는다면. 내놓겠지요. 왜냐, 평소에 하던 거니까. 라면 잘 끓이지요. 중국집에 가가지고 자장면 됩니까? 우리는 자장면 없습니다. 하면 이건 이상하잖아요. 평소에 하던 게 자장면이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약에 내놔라 할 때는 평소에 훈련된 거예요? 훈련 안 된 거예요? 훈련 안 된 거죠. 그러면 훈련 안 된 것을 내놓으라 했으니까 훈련 안 된 것을 내놓으면 뭐가 방해되느냐 하면 평소에 내가 잘한 짓. 잘하는 것이 방해되겠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내놓으려면 무엇을 부인해야 하느냐 하면 평소에 내 잘한 것을 내놓고 이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내가 나한테 속이는 그 속임에 내가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오늘 내가 가만히 생각해도 참 어렵다. 정말 어려워요.
교회 가서 새벽기도를 하는데 시계를 딱 봐요. 오늘은 마침 무슨 일이 있기 때문에 오늘은 새벽기도를 전에는 2시간 했는데 오늘은 30분만 한다. 30분하더라도 2시간 하면서 기도제목에 평소에 집어넣었던 모든 인물과 일가친척과 기도 대상들은 2시간해야 다 채워지는데 오늘은 시간이 30분밖에 없기 때문에 빨리 빨리 해가지고 2시간에 했던 항목을 30분에 압축해서 테이프를 빨리 감듯이 빨리 해서 해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했는데 과연 그렇게 될까? 하고 시계를 봤는데 시계 보면 타이밍이 있잖아요. 찰칵 찰칵 있잖아요. .....아멘. 딱 끝나니까 30분 딱 됐어요. 그러면 그건 은사에요? 훈련된 거예요? 훈련된 거죠.
또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님께 십자가 은혜를 알아서 다 이루었다. 이제 행함 필요 없이 주께서 행함으로 다 구원받았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행함으로 주께서 해 놓은 거니까. 그걸 성령으로 수용하면 우리가 다 이룬 거예요. 세상에 이걸 이론은 알았는데 오늘 아침에 생각나기를 이렇게 실제하다는 것을 몰랐다. 너무 감사하다. 라고 해서 이런 복음을 전해준 우리 담임목사님한테 헌금을 만원 드리겠다. 하고 봉투에 했을 때, 그 헌금은 평소에 늘 만원씩 했던 헌금입니까? 아니면 헌금을 하더라도 그것과 다른 취지의 헌금이겠어요? 다른 취지의 헌금이지요. 그걸 가지고 과부의 두렙돈이라 하는 겁니다.
주님이 원인으로 유발되어서 나온 것. 또는 성령이 원인이 되어서 나오는 헌금. 액수가 문제가 아니에요. 그 안에 돈으로 희생하지 않고 그러니까 주여 이제 내 영혼을 거두어도 저는 OK. 자기 목숨을 만원에다가 얹어서 주는 거예요. 만원에다가. 또는 오만원에 얹어주는 거예요. 오만원 얹으면 거기에 방해자가 있어요. 신사임당이 방해해요. 어쨌든 방해하든 그 신사임당의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고 그 돈을 내면서 주님 이건 정성 정도가 아니고 이참에 저를 데려간다 할지라도 저는 조금도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은혜 받아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게 뭐 몇 초 몇 분 안가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그야말로 성령에 의해서 한 거예요.
언젠가 제가 그런 설교를 했는데, 아나니아 삽비라 헌금 있잖아요.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그 사람이 헌금의 반을 냈기 때문에 죽은 겁니까? 아니면 하나도 안 냈기 때문에 죽은 겁니까? 아니면 다 내어도 죽을 겁니까? 어떻게 됩니까? 헌금을 반만 내는 게 아니고 다 내어도 죽겠어요? 안 죽겠어요? 다 내어도 죽을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내가 살아있어 내 돈을 저쪽에 전달하기 때문에 그런 헌금은 아닙니다. 헌금은 뭐냐 하면 헌금은 돈을 주고받는 게 아니고 소속을 확인하는 거예요. 돈을 내나 안 내나 이 몸의 소속은 주님 겁니다. 그 기쁨으로 확인해 주는 거예요. 헌금도 마찬가지고. 봉사도 마찬가지고. 자기가 살아서 봉사하게 되면 반드시 말썽이 생겨요. 살아서.
지가 살아서 처리하려 하면 문제 있어요. “그 봐! 연습 안했잖아. 틀렸잖아. 나 이렇게 연습했는데.” 그런데 못난 테크닉이지만 나는 못 났지만, 주의 피로 구원받음에 감사, 이리 되면 아름다운 선율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5초 내지 15초가면 많이 갑니다. 아예 처음부터 생기지 않을 수 있어요. 더운데 빨리 하고 가자. 이럴 수도 있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보면서 사람들이 자꾸 지키려고 하는 거니까 이런 게 다 빠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잔소리한다고요? 예, 지킬게요. 됐지요? 지키자! 이게 바로 행함 없는 믿음이에요. 왜, 자기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말씀을 준 것은 내 자신이 깨어지라고 준 거예요. 내 자신이 박살나라고 준 거예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교회 오는 것은 뭔가 더 알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고 깨어지기 위해서 오는 거예요. 그 과정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자,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지요. 예수님부터 아버지한테 깨어졌지요. 저주받고 죽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 앞장세워서 성령이 오시게 되면 예수님께서 뭐했느냐 하면 다 이루었다 했거든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할 때 말씀을 다 이루었잖아요. 이 말씀이 있는데, 이 성경책이 있는데 이 성경책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 이룬 입장이지요. 예수님이 다 이루어서 우리 대신 죄를 용서한다는 말은 이 성경 말씀대로 우리가 다 지킨다? 못 지킨다? 어설픈 우리는 못 지키지요.
그러면 성령께서 오신다는 것은 우리보고 못 지키는 걸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깨어지라는 거예요. 깨어지는 동시에 뭐가 삽입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여기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이 만원을 헌금했다. 이건 자기 돈 내는 게 아니고 주님이 주신 돈을 주님의 십자가에 담아서 주님 앞에 도로 드리는 겁니다. 내놓는 겁니다. 그걸 돈을 내놓는 게 아니고, 더러운 내 몸 자체도 주님의 의를 위해서 쓰여 지도록 제가 내놓습니다. 그런 뜻이다 말이죠. 이게 바로 행함이란 말이죠. 이게 행함.
아브라함이 누굴 바쳤어요? 이삭을 바쳤지요. 이삭은 원래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하나 있었어요. 이스마엘이지요. 아브라함 자식은 저주 받아요. 이스마엘이 저주 받는 게 성경에 어디 나옵니까? 또 어떤 사람은 환장하는데. 갈라디아서4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처가 있는데 아들 하나 있고 또 하나가 있는데. 하나는 하갈에게서 낳은 아들은 육체로 난 아들이에요. 그 말 자체가 무진장 어려운 말인데, 원래 자식은 아버지하고 육체적 관계에요.
육체로 난 자식이라는 말은 뭔 뜻입니까? 니 눈에는 자식은 그게 그런 식으로 자식이라고 다 생각하지? 아니야! 아니야! 육체로 나지 않은 자식이 있어. 라고 나온 말이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이 나옵니다. 이 이야기 안 믿는 사람한테 이야기하게 되면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안 믿는 사람이 듣게 되면 발칵 화를 냅니다. “당신이 나하고 이야기하면서 예의를 지켜야지. 왜 나 모르는 이야기를 하느냐.”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예의를 지켜야지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이해 안 되는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이해되는 이야기를 할게요. 당신, 쓰레기야! 이제 이해되십니까? 당신, 하나님이 보시기에 쓰레기야! 왜? 육으로 났기 때문에.” “당신, 아버지 계시지요?” “예” “모친 계시지요?” “예” “쓰레기입니다.” “그 아버지 엄마 말고 따로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하늘의 어머니가 없기 때문에 쓰레기입니다.”
예루살렘의 어머니, 성령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용하셔요. 충분히 사용하시되 “그건 아니거든” 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충분히 사용하셔서 “그건 아니거든.” 이리 되는 겁니다. 그럼 야고보서에서 믿음으로 구원 받겠다 하는 것은 아까 이야기했던 나로부터 출발하는 그건 하나님 뜻이 아니거든. 그럼 뭐냐, 은사로서 받은 행함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거예요.
그럼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나? 받은 적 없는데.” 받은 게 없으면 여기 1절에 나오는데 이제부터 할 건데요. 흩어진 12지파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12지파는 특징이 에서의 자식들이 아니고 야곱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서의 자식은 자식을 육으로 낳을 수 있어요. 그런데 야곱의 자식은 육으로 못 낳습니다. 약속으로만 낳아요. 약속으로만. 왜? 두 여자가 다 불임여성이기 때문에 애기를 못 낳아요.
처음부터 12아들을 준 게 아니고 애기를 못 낳게 만들었어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것은 에서와 야곱도 마찬가지고. 리브가가 애기를 못 낳는다니까요. 애기를 못 낳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육의 자식이 있다? 없다? 없다는 뜻이에요. 육의 자식은 없고 한 박자 쉬고 자식을 주거든요. 그럼 한 박자 쉰다는 것은 뭐냐, 육의 자식은 끊어졌다는 거예요. 요번 수련회 때 이야기하면 절연. 끊어진 거. 다른 말로 하면 누전. 끊어진 거예요. 전선이 이렇게 흘러야 되는데 엉뚱하게 흘러버린 거예요.
이쪽은 우리는 육을 가지고 행함을 가지고 아까 한 로마서의 행함, 야고보서에서는 믿음이지요. 내거 가지고 충당하겠다고 열심히 유대인처럼 구약성경 달달 외우고 예배드리고 있는데 그럼 주님의 전기가 이렇게 와야 되는데 이렇게 오는 거 같은데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의 십자가의 뚝 끊어짐이거든요. 어느 누구도 십자가를 자진해서 급구할 수 없기 때문에 저렇게 가버려요.
저렇게 가면서 여기서 만약에 이삭이 태어나고 이쪽은 뭐가 태어나고? 이스마엘을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그리고 난 뒤에 ‘뭐 둘 다 아버지가 아브라함이니까 괜찮겠지.’ 괜찮은 게 아니에요. 저쪽은 끝은 뭐냐, 저쪽의 끝은 천국이고, 이쪽의 끝은 지옥이에요. 인간은 딱 두 종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가 믿게 되게 되면 그때부터 우리네 가정에 대해서 다른 주님의 안목가지고 가정을 살피는 셈이 됩니다. 보자~ 저 자식은 둘 중에 어느 쪽이야? 상당히 심각한 문제되지요. 저 남편은 어느 쪽이야? 보나마나지요. 저 외숙모는 어느 쪽이야? 올케는 어느 쪽이야? 이렇게 살피게 되지요.
고 살피는 시선이 성령이 주신 시선이기 때문에 성령의 시선이라 하는 것은 이건 그림으로 해야 돼요. 성령의 시선이 궁금하지요? 철판으로 로봇 비슷한 얼굴을 만든다 칩시다. 철판으로 용접해서 안에는 텅텅 비었어요. 요 안에 사람이 들어와 가지고 두 눈을 이렇게 해가지고 이쪽의 시선으로 내놓는다면 이건 철판이 보는 겁니까? 안에 들어있는 분이 사람이 보는 거예요? 안에 들어있는 사람의 시선이지요. 그리고 요 철판은 우리라면 하나의 들어있는 분은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의 안목으로 볼 때는 이삭이야? 이스마엘이야? 이리 본다 말이죠. 그럼 우리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요걸 가지고 아바타라고 합니다. 아바타. 오늘 제목도 또 있다. 아바타.
아바타에요. 이게 성령 받은 특징입니다. 아바타기 때문에 이 아바타 되는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이 행함으로 신앙생활을 보이고 있는 겁니다. 그 아바타 중에서 유명한 사람이 아까 말한 아브라함이다 말이죠.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니에요. 자기 아들을 그것도 죽어서 바친 게 아니고 생 아들을 바친다는 말은 죽이는 그 모습을 보겠다는 거예요. 잔인하지요. 아들을 정육점에 가가지고 다 처리하고 고기를 바치는 게 아니고 죽이는 그 모습을 보겠다는 거예요. 이건 뭐냐 십자가 사건을 보겠다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을.
십자가는 지나가고 우리는 효과 보자. 이게 아니고 날마다 십자가에요. 날마다. 반복되는 십자가. 그걸 보겠다는 겁니다. 바이올린을 켜든, 첼로를 켜든 나팔을 불던 그 자체가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기를 원한다 이 말이에요. “니 아바타냐?” “예” 그러면 십자가고. “아바타냐?”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건 철판 속에 아무것도 안 들어있는 사람이지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애가 중학생입니다. 애를 많이 먹이지요. 북한에서 전쟁 일어날 때는 우리나라에 있는 중2를 보내면 승리하게 되어있습니다. 하도 사가지가 없어서. 북한의 괴뢰군들 다 쳐부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중2가 있어서 북한의 핵폭탄 미사일 무섭지 않습니다. 그 중2 애가 할 때, 엄마는 소위 교회 다니는 엄마였는데 기도해요. 주여, 성령으로 저 애를 온화하게 성깔을 다스리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한다 말이죠.
처음에는 배운 게 있어가지고 온유와 화평과 들은 게 있어가지고 나름 온유, 화평대로 한다고요. 그런데 애가 성질을 솔솔 돋우는데 온유, 화평 다 날아가 버렸어요. 오늘부터 온유 화평 안 되겠다. 끝내겠다. 이렇게 하는데 그럼 애가 얼마나 얄미운지 몰라요. “엄마가 이렇게 때리면서도 교회 다닌다고 하는 거야! 그러려면 교회 가지 마. 이게 무슨 예수님의 정신이야. 내가 아는 예수님의 정신은 서로 이웃을 사랑하라 하는데 이게 사랑이야?” 이렇게 약을 올리고 내빼네. 완전히 엄마 신앙까지 완전히 정면으로 싸 발라 버려요. 엄마 정신세계까지 완전히 개무시한다고요.
그럴 때 십자가 사건은 뭐냐 하면 십자가 사건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그 앞에서 나의 어떤 행동도 주께서 영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인정하는 겁니다. 내가 온유하게 해도 영광이 아니고 성질을 내도 영광이 안 되고 영광은 내가 누굴 믿느냐는 거예요. 내가 말씀을 지키지 못한 것을 누가 대신 했느냐 가지고 들이내야 영광이 돼요.
구약의 모세언약에서는요, 하나님께서 일반백성들 독대가 안돼요. 안 만나 줍니다. 누굴 만나느냐, 일 년에 한 번 누굴 만나느냐 하면 대제사장 만나요. 그걸 가지고 제사장 나라라고 합니다. 제사장 나라라고 하는 것은 “니들은 그냥 가만히 있어. 대표자만 나와!” 이게 제사장 나라에요. 제가 지금 진도 안 나가고 뜸 들이는 이유가 있어요. 그만큼 1장 1절이 어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이어갑시다.
12지파라 하는 것은 이건 이삭과 마찬가지로 약속으로서 난 사람들이에요. 야~ 여기서 또 오해하지 맙시다. “약속으로 낳기 때문에 이삭은 약속으로 낳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처럼 이 12지파도 그 약속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다 구원받았습니까?” 라고 묻지 마세요. 그렇게 물어버리면 그건 성경적인 질문이 아니에요. “12지파를 통해서 예수님을 증거 합니까?” 요게 성경적인 질문이에요. 질문 자체부터 달라야 돼요.
“12지파는 다 구원받았겠지요? 그러면 마귀들린 사울도 구원받고, 아간도 구원받았겠지요?” 이리 나오게 되면 거짓 선지자도 구원 받고 미가야를 뺨을 때렸던 시드기야 라는 그 거짓 선지자도 구원 받고 그렇게 했어요? 구약에 나오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단지 이스라엘이라는 그 이유 때문에 다 구원받았겠습니까?
어떤 국민이 어떤 나라에 속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원칙을 갖고 있어요. 현대 법에서는. 속인주의와 속지주의라는 게 있습니다. 속지주의라 하는 것은 애가 태어날 때 그 나라에서 태어나게 되면 무조건 그 나라 국민으로 등록이 되는 걸 속지주의고, 그 다음에 부모가 그 나라 국민일 경우에 태어난 자식은 그 나라 국민으로 봐주는 걸 속인주의라 하는 겁니다. 보통 두 가지를 다 섞기도 하고.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자가 이게 백성이에요. 예수님을 증거 하는 자가. 하늘로부터 행함의 은사를 받은 자만 흩어진 12지파입니다. 이제 야고보서 12지파 아시겠지요?
나는 가나안 땅 출신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이 구원받을 거 같으면 예수님 십자가 죽인 사람 다 구원받겠네요. 그럼 현재 육적인 이스라엘은 무조건 구원받는다는 것이 전천년주의라는 게 있어요. 3년반 후3년반 그 주장하는 사람은 하나님은 약속했기 때문에 무조건 이스라엘은 일단 무조건 다 구원받는다. 비록 예수를 안 믿더라도 기어이 환란 받으면 예수 믿게 되도록 주께서 조치하신다.
첫 번째는 성도들이 하늘로 휴거 올라가고 땅에 있는 사람들이 유대인들인데 유대인들이 그렇게 예수를 안 믿더라도 악마가 와가지고 요한계시록 내용 따라 아주 막 몽둥이질하고 고난을 많이 주니까 그제서 우리가 잘못 하였나이다. 주여! 예수님을 안 믿는 게 탈이었어. 그때는 하나도 없이 다 믿어서 그 이스라엘과 그리고 이방 중에서 합쳐서 그래서 통합해서 천국의 숫자로 채워진다. 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면 물어봅시다. 그 예수님 죽인 자들이 누구지요? 유대인이지요. 그러면 그 다음 다 구원받습니까? 가룟유다가 이방인이에요? 가룟유다가 아프리카 사람입니까?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이지요. 가룟유다 구원받았겠네요? 그리고 십자가 옆의 강도. 예수님을 조롱했던 강도는 유대인 아닙니까? 유대인이잖아요.
예수님은 반대로 이야기해요. 나라의 본자손들은 천국에서 다 쫓겨나고 오히려 이방인,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하는 백부장이 그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그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유대인 있는데다가 보탠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유대인은 일단 다 넣어주고 그 다음에 보태는 게 아니고 본자손은 이를 갈며 쫓겨서 이를 갊이 있으리라. 왜 내가 안 믿어서... 이렇게 통곡한다. 통곡.
사람이 후회할 것은요, 이 세상에 남자로 태어나서 울어야 될 것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지옥 가서 우는 것밖에 없어요. 뭐 조국을 잃었을 때, 부모가 죽었을 때,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예수 안 믿어서 지옥 가서 실컷 평생 동안 울어라. 지옥 가서.
주님의 인생관, 주님의 가치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안 믿는 자는 뭐가 없다? 영생이 없고 그 위에 저주가 있는 거예요. 저주가. 자기 행동에 그렇게 책임지려 하지 마세요. 그게 기준이 아닙니다. 중2 팼다고 해가지고 “주여, 저는 지옥 가야 할 엄마입니다.” 하지 마세요. 그게 기준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기준이에요. 영생이냐, 아니냐,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이삭이냐, 이스마엘이냐, 그걸로 끝나는 겁니다.
그리고 이삭은 내가 이스마엘이 이삭 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이삭은 약속이 먼저고 그 다음에 약속에 의해서 조성된 새롭게 만들어진 자가 약속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약속이 먼저 있고 이삭이 태어난 거예요. 그러나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라는 육이 먼저 있고 그 하갈하고 동침하니까 이스마엘이 태어난 겁니다. 덥다고 이제는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에어컨 팍 틀어버려요.
세상이 그냥 막 돌아가니까 같이 탁류에 토사에 같이 휩쓸려 가지고 정신도 못 차리고 가는데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기준은 뭐냐 하면 예수 십자가 믿으면 무조건 영생이고 교도소 몇 번이고 들락날락해도 관계없어요. 무조건 영생이고. 예수 믿지 않는 국회의원 전부 다 저주에요. 죽어서 저주가 아니에요. 지금 하고 있는 자체가 저주라니까요. 전부 다. 제가 이렇게 고함지르면 7분가고 안 지르면 15초가고. 세상을 부러워하거나 그러지 마세요. 세상을 부러워하게 되면 자기 인생에 대해서 슬퍼하거나 노합니다.
자, 그 다음에 1절 봅시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12지파인데 그게 뭐냐, 어떤 12지파이냐 그 앞에 3자 붙었지요. 어떤 12지파? 흩어져 있는 12지파. 이것 때문에 첫 번째 강의할 때 나 중심으로 나 의도적으로 뭉치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나가 안 되도록 흩어버려요.
우리는 누굴 만나면 내 생각에 동의해줘! 나 요번에 짬뽕 먹는데 너도 짬뽕 먹어줘. 하고 강요를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강요하는 게 아니고 누구를 특정인간을 절대로 중심 되는 인물로 쳐주지를 않습니다. 이 땅에서는. 이미 은사가 온 중심이 어디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서 거기서 모든 행함은 그 은사에서부터 나와서 각양 좋은 것은 어디서 나온다? 하늘로부터 나오잖아요. 내가 행함을 보여줬는데 하늘로부터 오는 은사가 아니라면 하늘로부터 행함이 아니라면 아무리 행함 있는 믿음이라도 그건 좋은 게 아니에요. 왜? 하늘로부터 오지 않았기 때문에. 말의 논리가 그리되는 겁니다. 이제 아구가 맞아 떨어집니까?
로마서하고 똑같은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나부터 출발하는 행함은 행함으로 안 받아줍니다. 왜? 나부터 출발하는 행함은 내가 평소에 훈련하고 일상적으로 했던 거지만 주께서 요구했던 행함은 나부터 출발해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행함입니다. 니 자식을 죽여라. 이건 평소에 자식 죽이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아무도 없잖아요.
그리고 기생 라합한테 뭐라고 합니까? 거짓말하게 했지요. 그래서 거짓말을 할 줄 모르면 신자가 아니에요. 새로운 또 명제가 튀어나옵니다. 거짓말을 기쁨으로 하지 않으면 그건 신자가 아닙니다. 왜 거짓말을 안 하는 이유가 뭐냐 자기중심 때문에. “하나님이여, 나 거짓말 안했습니다.” 자기중심. 이거에 대한 행함은 자기 행함이 되어버려요. 자기 은사가 돼요. 하늘로부터 오는 게 아니면 그것은 가장 좋은 게 아니에요. 나쁜 거예요.
왜 나쁘냐 하면 야고보서4장4절 보고 10분 쉽시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세상과 벗된 것 자체가 뭐다? 하나님의 원수된 거죠. 그럼 세상 자체가 뭡니까?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죠. 간음은 뭐가 간음이에요? 세상과 짝하는 게 간음이에요.
이게 개인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으로 갔기 때문에 예수님은 세상을 떠났잖아요. 그것도 그냥 떠났습니까? 죽어서 떠났지요. 죽어서 떠난 그 주님과 이 세상 관계가 원수 관계, 이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 앞에 사랑에 대한 반대기 때문에 간음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 이러한 인식은 근본적으로 12지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만 지금 야고보서를 얼추 이해하고 감사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드리면서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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