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 14장 25절(처벌 없음)170905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4장 25절 보혜사 이야기입니다. 보혜사 이야기 할 때 제일 먼저 중점이 뭐냐하면 예수님 오셨는데, 예수님 오셨는데 또 왜 오셔야 하는가 그 문제입니다. 보혜사. 예수님이 보혜사거든요. 예수님 가시고 난 뒤 다른 보혜사 오시거든요. 왜 들락거리냔 말이죠. 왜 왔다갔다 해요? 구원에 뭐 미비한 점이 있는지, 구원에 뭐 실패한 적이 있는지...
자기 백성이 있단 이 말이죠. 자기 백성 있으면 예수님 목자이고 자기 백성 양이라면 와서 손목잡고 데려가면 되잖아요. 뭐 그리 뭐 복잡합니까? 왜 주님의 하는 일을 Touch 하죠? 다시 릴레리 하듯이, 주님 가시고 그분 오시고.
여기서 이런 문제에서 문제 될 것이 굉장히 여러 가지되요. 같이 일하시면 왜 안되느냐? 왜 한 분은 빠지시고 빠져야만 다른 보혜사가 와야되냔 말이냐. 같이 오실거 같으면 예수님 계시고 보혜사 더불어 일하면 협력이 잘 될건데, 왜 한분은 빠져줘야 가셔줘야 왜 다른분이 와야되고, 그보다 더 우선적인 문제는 왜 예수님이 구원을 시작했으며 줄 곧 본인이 마무리 짖고 손잡고 가자! 하고 가면 될텐데 다른 보혜사가 왜 필요로 하느냐 하는 그 문제. 여러 가지 문제 있지요.
그 다음 이런 그 저 문제가 이런 의문점이 발생될 때에 그 해결점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 평소에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구원이라는 것이 하나의 상상이였다는 것에 불과하다. 상상이였다하는 것입니다. 상상.
자 봅시다. 상상은 결핍된 것을 보충한다. 상상은 결핍된 것을 보충하죠. 결핍을 알아서 상상을 하는 것이 아니고, 상상이 뭔가 자꾸 된다는 것은 그 상상함으로 말미암아 무엇이 결핍된지가 다 계속해서 만들어 지는 거예요. 상상하게되면...
어린이들은 상상할까요? 어린이들은 상상안하죠. 왜냐하면 자족하니까. ‘젖이 먹고싶다. 젖줬다. 잔다.’ 그게 자족이잖아요. 스스로 충족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회사하는데 50억 버렸다. 그만할래? 이렇게 됩니까? 아니죠. 황제같은 마음이 고민되겠어요? 아~뭐 50억 그다음부턴 100억을 그냥 황소같이 들소같이 밀어붙이는 거죠. 갈때까지 무조건 들이미는 거죠.
상상하는 순가 ‘아 50억이 비는구나.’ 100억앞에서 50억이 아주 모자란다는 것을 알게되죠. 그럼 거기서 뭐냐하면 그것을 상상으로 보충하게 되는 겁니다. 상상으로 보충하게 되죠. 왜 이런이야기 하냐하면 인간은 이미 자기 구원에 대해서 이제부터 어려워요.
인간은 자기 구원에 대해서, 자기 삶에 대해서 굉장히 미흡하고 있어요. 만족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은. 몸 아픈것도 그렇고 뭐 모든 상황이 ‘애걔 이게 다야?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게 다가 아닐텐데’
인간속에 마귀가 들어오거든요. 마귀가 아담한테 들어왔는데, 대구 강의한걸 잠깐하게 되면 그 저 악마가 아담하고 이렇게 처음에 아담하고, 아담의 뜻에 복종했잖아요. 그때부터 인간은 아담밖에 없어요. 그 뒤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아담안에서 움직입니다. 아담안에서.
악마는 아담만 상대하면 되요. 그 뒤쪽은 상대할 필요도 없어요. 아담만 상대하게 되면 아담이 계속 자식을 놓으니까, 새끼를 까니까, 새끼를 까게되면 아담과 악마하고만 있던 관계가 자식들이 본인의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그대로 아담과 악마의 관계를 그대로 물려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대로 물려받아요.
이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개인이 없어요. 결국 인간은 개인이 없습니다. 인간에게 개인이 있다면 대표적 개인 아담밖에 없습니다. 아담은 인간이고, 나머지는 그 아담의 기능일뿐이예요. 그러니까 그 다음부터 뭐냐하면 아담이 뭘 생각했겠는가? 아담이 악마와 결탁하고 난뒤에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 그것은 바로 에덴동산에 대한 돌아감. 에덴동산에 대한 그리움이예요.
좀 어렵더라도 참으세요. 여러분들이 그만한 능력된다 싶어서... 그리움에는 두가지가 있어요. 그리움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뭐냐하면 이미 경험했던 것을 그리워하는 것이 있어요. 행복, 경험된 것을 그리워하는 건데, 이것은 괜찮아요. 그리워한다. 경험했으니까. ‘아 그때 좋았어 그때 여고시절 좋았어.’
문제는 뭐냐하면 이 두 번째가 정신병되요. 뭐냐하면 무엇을 그리워하는지를 모르고 그리워하는 거예요. 뭔가 그리워 해야되는데 당췌 뭘 그리워해야, 뭔가 자꾸 뭘 그리워 하고 싶은데 뭘 그리워해야되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이거는 정말 우울증 걸려도 걸릴만하지요?
자족을 해야하는데 자족은 안되요. 자족은 안하고 이렇게 됬으면 좋겠는데 그 구체적인 것을 찾을수가 없어서, 상상이 이 그리움이라는 빈칸에다가 상상이 오늘은 이것으로 채워봤다가 다음에는 이것으로 한번 채워봤다가 계속 채우는 거예요.
골프 한번 쳐봤다가 이건 소질없는거 같아 치워버리고, 등산 한번 가봤다가 아이고 허리아파라. 치워버리고 계속 뭔가 그리움에 대한 것을 충족시켜야 되는데, 그 내용을 본인이 채우지 아니하면 아무도 채울사람이 없어요.
끊임없이 이제 그 빈칸을 채워나가는 겁니다. 빈칸을. 취미생활도 바꿔봤다가 뭐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그리움이라는 것을 다 주워 모은 사람이 있어요. 칼 구스타프 융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원형적 무의식이라는 것을 생각했어요. 원형적 무의식.
원형적 무의식이라는 것이 뭐냐하면은 프로이드라는 그 두 사람이 친구인데요. 프로이드는 뭐냐하면 개인의 안에 어떤 무의식이 있느냐? 왜냐 이 사람은 정신과 의사이기 때문에 치료해야 되지 않습니까. 개인 붙들고 환자 붙들고 도대체 무슨 괴물이 들었는가 그것 찾아보자 이렇게 그걸 들추어 낸 거예요.
프로이드가 들추어 낸 것은 뭐냐하면 인간은 원래 딱 하나의 본능이 작용하는데, 그것이 뭐냐하면 동물이예요. 생식. 날 닮은 DNA 퍼트리는 것. 그 때는 DNA가 없었지만 날 닮은 자식을 계속해서 퍼트리는 그것 본능이죠.
왜냐하면 남자여자 둘다 갖고 있는 사람은 없잖아요. 남자는 여자를 그리워하고, 여자는 남자를 그리워하는 것은 뭐냐하면 궁극적으로 자식을 번성하는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 자연의 이치가 리비도라는 이름으로 우리안에 들어있으면 우리는 모든 목적이 이게 생식을 하기, 자식을 퍼트리기 위한 용도로 활용해야 되는데 원숭이 같은 동물아닙니까?
인간들은 고상하잖아요. 고상하니까 정치하고, 사업하고, 골프치고, 뭐 야구하고, 공부하고 철학공부하고 활동하는 거예요. 그 모든 활동 문화, 경제, 예술, 과학, 종교 그 모든 그 활동은 무엇을 억누르기 위한 작용이냐 하면은 내 새끼 낳고 싶다, 내 자식 놓고싶다 하는 그 동물적인 본성을 순화한다 할까요? 부드럽게 하기위한 용도로 그렇게 합니다.
그러니까 암수니까 사람이 결국은 암수니까 아들은 누구를 차지하겠어요? 제일 가까운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엄마! 엄마를 차지하려고 하는데 그 라이벌이 있어요. 라이벌이 누구냐하면 아빠예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하는 겁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아버지를 라이벌로 삼으니까 아버지를 죽여야 엄마를 차지할수 있잖아요.
아버지를 죽이려고 하니까 아버지가 먼저 그 점을 알고 나를 거세하려고 덤벼드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이 사회적으로 발달하게 되면 뭐냐하면은 항상 아버지가 의식되는 겁니다. 그 아버지 자리에 나중에 뭐가 들어가냐 하면은 학교 교사가 들어가고, 교회가면 목사가 들어가고 그리고 정신적으로 신이 들어가요.
이것을 초월적인, 그것을 가지고 윤리와 도덕이라고 하는거예요. ‘너는 이렇게 살아야 인간답게 사는거야.’ 하는 그 잔소리가 자신의 윤리 도덕성을 형성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자식은 어디를 가도 함부로 행도을 못해요. 왜? 이렇게 행동했을 때 아버지의 화를 돋을수 있다는 의식이 드는 것입니다.
엄마는 왜 안드느냐? 엄마는 괜찮습니다. 잔소리 해봐야 엄마의 잔소리는 아버지의 잔소리가 대변되기 때문에 엄마의 잔소리는 없어요. 그래서 어딜가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명예를 이름을 먹칠하지 않기 위해서.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 살아간다. 그것을 아주 정교하게 만든게 뭐냐하면 바로 기독교라는거예요. 프로이드가. 기독교, 종교라는 겁니다. 종교라는 것은 자식들이 아버지를 죽여놓고 그 죽은 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였으면 죄잖아요. 그 죄책감에 아버지가 나무랄거고 우리를 저주할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서 죽은 아버지의 그 살을 먹는 것, 성만찬이예요.
그리고 그 아버지의 명령을 듣는 것, 이게 바로 신구약 성경이예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라는 것이 이게 의식이 아니고 무의식 속에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니 기독교라 하는 것은 누가 만든 것이 아니고, 서로가 서로의 본성이 그대로 자연스럽게 엮어지면 그것이 기독교라는 거예요.
신은 뭐가 되겠어요? 신은 바로 절대적 아버지가 되겠죠. 서로의 공통적인 아버지, 보편적인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하니까 아버지 위에 아버지 또 누가 있나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 모든 것을 창조하신 아버지가 바로 영원한 하늘에 계신우리 아버지여 이렇게 되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게 프로이드입니다. 오늘 강의 왜이리 잘되는지. 이게 왜 잘되냐하면 납득이 되니까 납득이. 하나도 과학적으로 흐트러짐이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원숭이에서 갈라져서 그 호모 에렉투스 뭐 호모 이런데서 오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이 원숭이과예요. 인간이. 프로이드에 의하면. 오늘날 애들, 학생들 다 배우는 거예요.
인간이 원숭이 과예요. 그럼 원숭이 속성이 남아있을까요? 안남았을까요? 남아있지요. 어디가겠습니까. 제일 마음 제일 깊숙한 곳에 원숭이 들어가 있습니다. 짐승들어가있죠. 짐승.
그럼 짐승은 두뇌도 그렇지만 파충류 두뇌있잖아요. 이것은 그냥 자연의 습도와 온도만 느끼는 두뇌. 그러면 그 위에 충동을 느끼는, 배고프면 먹고, 화나면 주먹질하고 이것이 무슨 수준이냐 하면 원숭이 수준이예요. 잘해주면 바나나 주면 좋다고 까불고 하지만 주인도 못 알아보고 달려들고, 그 개도 사료주고 건드리면 개도 주인 순간적으로 욱하면서 주인한테 달려들죠.
그것이 인간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인간들은 왜 그렇게 교육을 받고 위에 그 저 그런 가정교육을 받아서 누르고 누르는데 이것이 언제 튀어나오느냐? 밤에. 밤에 뭔가 흐트러짐이 있을 때, 긴장이 안될 때, 예비군복 입을 때 그 때 마구 나오죠.
이 프로이드의 강점은 단점이라고 지적하면서 친구인 칼 구스타프 융은 그렇게 무의식 본 것은 잘 봤는데 그렇게 보면 개인적인 정신과에만 관련됬잖아요. 그러지 말고 전인류가 보편적으로 예술작품있잖아요. 예술작품. 뭐 옛날 신화라든지 전설이라든지 실제도 그림이라든지 거기에 보편적으로 공통점을 끄집어 내보면 그것은 뭐냐하면 바로 ‘낙원에 대한 희구’
낙원에 대한 희구. 간절히 희망하고 간절히 원하는 것. 낙원에 대한 희구예요. 낙원에 대한 희구가 될려면 여기에 가야되잖아요. 낙원에. 그러면 낙원에 가는 것을 뭐냐하면 회복. 인간의 모든 학문은 그 주제가 테마가 뭐라구요? 회복하는 것. 회복.
고생스러운 이 땅을 떠나서 다시 원상복귀하자. 방법은 뭐냐? 열심히 노력하고 일하면 충분한 보상이 온다. 그 방법이예요. 이 세상에서 정신과적으로 정상이다 하는 것은 일하면 보상이 온다가 정상적이고, 보상이 안올까봐 걱정하는 것은 정신병자고. 아주 구분이 깔끔하지요? 깔끔하잖아요.
성실히 일하고 보상안올까봐 믿지못하고 걱정하는 것, 정신병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막 사장한테 대들고 ‘너 내 월급 다 떼어 먹었지?’ 그건 정신병이죠? 그리고 보상 너무 기대해가지고 보상 크게 잡아놓고, 그에 대한 일은 안하고 맨날 걱정만 하는 사람. 이건 뭐 우울증 환자이죠.
‘우리 애가 성적이 좋아야하는데, 성적이 안오르고...어떻하지’ 집에서 혼자 술 먹고 있을 때, 우울증 걸리잖아요. 열심히 일하면서 일하는 동기부여, Motivation이라고 하는데 경영학에서. 사람이 어떻게 동기를 부여한다는 것은 뭐 때문에 동기부여 합니까? 반드시 기대치가 연결되어 있을때는 이건 뭐 야근 하지 말라고 해도 자기가 알아서 야근해놓고 나중에 야근비 안줬다고 막 대모하고 하잖아요.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예요. 자기가 알아서. ‘사장님, 저 하고 싶어요!’ 해놓고는 나중에 월급안주면 ‘사장님, 미워요.’
예술하는 사람 보세요. 예술하는 사람은 하루 종일 일합니다. 어떤 60대 넘은, 60대 김환기라는 작가는 미국에서 60세 넘었는데 하루에 열몇시간 씩 십만점, 점 찍는 그림이 있어요. 십만개의 점을 찍어요. 그런식으로 했는데 그 사람 결국은 과로로 죽었어요. 그 죽고 난뒤에 그 사람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그 작품은 우리나라 미술작품 사상 최고가를 받습니다. 김환기가.
옛날엔 김수근인가? 홍콩에서 많이 팔렸지만 그것보다 액수가 많아요. 일등했어요. 그 만큼 예술이라는 것은 자기 하고 싶은 데로 그렇게 열심히 하는거예요. 예술이 뭐냐하면은 뭔가 나올거라는 희구예요. 그렇게 하게되면 그것이 자기가 가고싶은 낙원을 미리 앞당겨서 체험하고 있는겁니다.
첫 번째 봅시다. 그리움이라는 것은 옛날에 했던 체험을 다시 그리워하는 것이고, 두 번째 더 무서운 것은 체험하지도 않는데 뭐가 있다고 여기고 그냥 거기에다가 열심히 뭔가 해보는 거예요. 그것을 융은 낙원이라고 한거예요. 낙원.
자, 이것은 모든인간에게 다 있다고 했어요. 그것이 무의식인데 그냥 무의식이 아니고 원형적 무의식이라는 융은 자기 이론을 했습니다. 원형적 무의식. 제가 왜 성경이야기 하다가 왜 구스타프 이야기를 왜 하냐 하면은 지금 인간들이 왜 보혜사가 와야 되는지를 오면 이유가 있어야되지 않겠습니까? 인간쪽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제가 언급하는 거예요. 이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자, 그럼 이제 인간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제가 지적할 순서가 됬죠. 자 이런 이야기 원형적 무의식, 모든 전설이나 민족을 초월해서 전부 다 낙원을 그려내요. 낙원을. 뭐 한민족이든, 북유럽의 신화든 관계없이 저 남태평양 추장들 보게되면 항상 마지막은 낙원이예요. 낙원.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런 고갱의 작품도 있어요. 그것도 낙원이예요. 그 유럽사람들이 그리워 하는 것이 남태평양이라든지 또는 서인도제도에 있는 도미니카 공화국있잖아요. 옛날 섬들 거기에 낭만적인 꿈. 모든 골치 아픈 것 다 버리고 그냥 옷 입지 않아도 누구 탓하지 않는 그런 세계.
몰라요. 여성들이 결혼을 할 때 이런 낙원을 염두해 두고 결혼을 하지 않겠어요? 왜? 모든 사람들의 원형적 무의식이니까. 그런데 이것이 겁난다? 그럼 아예 결혼을 포기하겠죠. 결혼을 포기하겠죠. 그건 어디 해당되나? 2번에 해당되는 거예요. 왜? 한번 해보고 해보니 뭐.. 이렇게 되버렸지만, 안 해봤기 때문에 자꾸 꿈만 꾸는 거예요.
보다 완벽한 남자. 보다 완벽한 여자. 집에서는 계속 시집가라 장가가라 하는데 안가요. 보다 완벽한 보다 완벽하다는 것은 체험하지 않는데 낙원에 대한 그리움, 이것이 너무 강렬해가지고 계속 그런쪽을 찾잖아요. 그러면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은 결국 인간에게 문제 있어요? 없어요? 문제가 많지! 인간에게 문제가 많죠. 자 어디서 문제가 있느냐. 그것은 창세기 3장을 공부하시는 집사님 이야기 할 차례인데.
이 낙원을 염원하는 인간에게 뭐가 문제냐하면은 그들은 갈 것만 생각해요. 그들이 나오면서, 나오면서 하나님 계획에 어떠한 계획에 어떤 차질을 줬느냐는 전혀 생각 못해요. 하나님이 이렇게 만들어 놓은 장치가 있어요. 선악과 장치, 생명장치, 에덴동산 있는데 왜 그런 장치가 거기에 배치되어 있는지 그 의미를 알아요? 전혀 몰라요. 전혀 모릅니다.
그 어덴동산에 있는 그 장치 하나하나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 관련되어 있어요.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 잠시 보겠습니다. 여자의 후손할 때 여자의 이름이 뭐냐하면 하와이지요. 예, 생명입니다. 근데 둘다 다 생명나무에서 쫓겨난 셈이예요. 그럼 생명이 있어요? 없어요? 생명이 없어요.
그러면 여자의 생명이 없고 남자는 흙이니까 죽음이 정당하고 하와에게 생명이란 이름을 붙이는 것은 후손이 여자의 후손이예요. 그러면 후손이 생명이 될거 같으면 소급해서, 그것과 관련 소급해서 여자가 생명을 얻는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어떻게 구원받았느냐 하면은 약속 때문에 구원받아요. 약속. 아담과 하와 부부는 약속이 주어지게 되면 구원받는 거예요. 본인이 구원을 소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은 그것을 원하지만 그건 안되요. 소지하는 것이 아니고, 장차 올 여자의 후손에 의해서 소급해서 그 효과를 얻게되요. 같은 노선이라고.
여러분들 계곡이 있는데 계곡에 안개가 자욱해. 계곡이 두 개있는데 산이 있는데 그 사이에 안개가 주욱~끼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여기는 다리가 있었어요. 다리가 있는데, 옛날 다리가 있고 새로 지은 다리가 있는데 안개가 너무 끼어가지고 어느 것이 새것인지 분간이 안되요.
그런데 옛날 다리는 끊어져 있어요. 그래서 새 다리는 놓은 거예요. 자 여기 있는 등산객이 이 산으로 건너갈려고 합니다. 안개가 끼었어요. 그런데 보니까 나무로 만든 다리가 딱 두 개입니다. 잘 골라 잡아야 되요.
지금 우리 인간입장에서는요 어느 다리든 디뎌야 되는데, 예수그리스도가 관련된 다리같은면 이 사람은 살아요. 요한복음 3장에 보면 그리스도가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그리스도가 없는자는 요한복음 3장 마지막에 나와요. 그리스도가 없는 자는 저주가 있지요.
이 말은 인간이 다리에서 까불든 안까불든 춤을 추든 뭐 여기서 라면 끓여먹어도 상관없어요. 어느 다리인가가 중요해요. 내가 이 다리 건너면서 교도소 7번 갔다오든 관계없어요. 관계없어요. 예, 뭐 거짓말하든 살인하든 관계없다 이 말이예요.
하나님이 인간의 행위보고 행동보고 구원하고 말고를 결정 안합니다. 그런데 보세요. 아까도 정신분석 이야기 한 것이 헛말이 아니죠. 프로이드는 어디다 관심둡니까? 니 안에 무의식있다. 이렇게 이야기 했지요. 마귀아닙니까?! 그래!
지금 하나님의 뜻은 무엇을 봅니까? 여자의 후손인가? 뱀의 후손인가를 보잖아요. 그런데 이미 이왕 마귀와 결탁된 아담한테 마귀가 계속해서 무슨 이야기 합니까? ‘니 안에 무의식있다. 그래서 너 정신병 걸렸어. 그러니까 너 정신병 나을려면 상징적인 것을 자꾸 해가지고 너 속에 있는 그 무의식을 조금씩 조금씩 터트리고 뽑아내는 식으로 해야해. 안그러면 너무 스트레스 받아 너 미쳐버려.’ 이것이 프로이드 식이고.
여기 융의 식은 ‘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인류가 동일한 무의식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 예술활동을 해가지고 예술활동을 하든 학문을 하든 사업을 하든 스포츠를 하든간에 그 자체가 너에게 낙원을 그것을 통해 낙원에 대한 그리움과 회복과 긍정적 의식을 소망을 키워야해 너의 조상 우리조상 다 그랬어.’
그래서 둘다 이야기 하는 것은, 융은 이야기 하는 것은 무엇이 구원이냐 하면은 희망자체가 구원이예요. 희망자체가. 아까 무슨 희구라 했습니까? 낙원에 대한 희구, 희망이예요. 희망이 답이다. 7번 넘어지고 아무리 어려움이 있더라도 희망만 있으면 숨쉰다. 이게 바로 융이 보는 인간에 대한 복음입니다. 희망이 있으면.
그런데 희망거리가 있어야되겠죠? 남편이 구박해서 이혼해가지고 자식 셋 놓고 넷 놓고 가버렸다. 그러면 그 여자의 희망은 뭡니까? 남아있는 자식을 잘 키우면 키울 때 그 Motivation, 동기부여.
‘나 이렇게 사는 이유가 뭐냐? 애가 영어를 못하고, 공부를 못한다 애 불러놓고 회초리 들고 딱 때리면서 내가 이렇게 밤 늦도록 시장바닦에서 고생하는 이유가 뭔데! 나 너 하나보고 이렇게 산다! 너 하나보고.’ 신사임당이죠. 너 하나 보고 이렇게 산다! 신사임당 아세요?
너 하나 보고 산다! 그러면 아이안에 프로이드식의 뭐가 들어갑니까? 어딜가도 나 혼자 고생해서 키워준 어머니의 명예와 그 어머니의 명예와 성의에 보답하기 위해서 눈물 콧물 다 쏟아가면서 공부할거예요.
우리 친척가운데 그런 사람있어요. 아빠가 자식버리고 도망갔을 때 엄마가 울면서 ‘너 공부 이렇게해서 되겠냐. 맏이인데 너 우리사정 알잖아 너 우리 가정환경 알잖아. 이렇게 해도 되겠냐.’ 그 소리에 막 눈물을 훌려가지고 막 짜장면 먹으면서 눈물을 흘렸답니다.
그래가지고 공부해가지고 경대 어디 들어가가지고 의사되서 너무 과로사로 죽었어요. 내 사촌이예요. 사촌. 나하고 동갑, 나하고 같은나이인데. 너무 과로해가지고 뭐 걸려가지고 회 잘못 먹어가지고 죽었어요. 일찍이 죽었어요. 일찍이. 무리하게 공부한거예요.
공부할 때 어머니 은혜 못잊어. 어머니 은혜 못잊어. 찬송가 가사 어머니 기도 못잊어 비슷하죠. 어머님 은혜 못잊어. 이 말은 프로이드가 맞고, 엄마는 모든 인간이 희망없으면 못산다. 이건 누구 말이 맞고? 구스타프 융말이 맞고.
그래서 이 사람이 유명한 사람이 된거예요. 유명하다는 것은 먹히는 거예요. 어디에 먹힌다? 인간은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데 나한테 먹히는 소리를 할 때, 자신이 지금 안개 낀 장충당 공원 앞에서 내가 지금 어디 다리에 서 있는가가 판정나는 겁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납득이 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은 지금 벌써 영생을 얻은거예요. 하와 자식이 여자의 후손이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생명으로 오게 되면 그 생명의 여파 때문에 같은 다리, 같은 bridge, 다리이기 때문에 그 다리에 놓여있는 사람은 전부 다 예수님의 효과를 보면서 다 구원받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누구를 보기 원했습니까? 아브라함은 예수님 보기를 원했어요. 왜? 그때 못 봤으니까 안개가 끼어 있었으니까. 죽고난뒤 걷어지고 보니까 예수님께서 자기죄를 위해서 해결자로 오신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 사실을 자기가 이삭을 바치는 그것을 통해서 그것을 주께서 하나님께서 대신해서 양을 잡는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이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해도 아브라함이 얼마나 기뻣겠어요. 천하를 얻은겁니다. 천하. 그 뭐 황제될 필요 없어요. 천하를 얻은거예요. 예수그리스도와 아는 사이 됬다는 것은 천하를 얻은겁니다. 지금 여기서 사업이 되든 말든 망하든 말든 부도나도 관계없어요.
여기서 재주를 넘든지 안넘든지 망해도 관계없이 이미 이 다리는 예수님의 복음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된다라는 것은 이것은 기적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기적 때문에 망했거든요. 한국의 기적이 뭐냐하면 바로 희구. 우리교회 크게 해주세요. 이것을 가지고 기적이라고 봐요.
아까 상상을 뭐라고 했습니까? 결핍된 것을 보충하지요. 상상에서 결핍된 것을 보충하는 사이에 사람들은 교회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이것을 가지고 기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기적. 기적이라고 해요. 그런데 예수님의 기적은 뭐라고 했습니까? 무슨기적? 요나의 기적이죠.
무슨말인지 못알아들어요. 요나의 기적하면 사람들이 무슨말인지 못알아 들어요. ‘목사님만 만나면 부정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요구한 것이 뭡니까? 당신이 메시야이거든 우리가 원하는 기적을 우리한테 좀 베풀어 주게 되면, 믿지말라고 해도 믿겠습니다. 라고 나올때에 그때 예수님이 유명한 말을 던졌어요.
이 악하고 음란하고 이 악한 그 다음에 세대. 통째로 악하고 음란한 이 세대가, 음란하다고 하는 것은 항상 악마와 관련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했지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기적을 원하니 이 세대에 내가 삽입되어 들어왔잖아요. 이미 들어왔잖아요. 내가 이미 들어온 나에게서 보여줄 생명의 기적은 요나의 기적. 죽음. 죽는 것.
요나의 기적이 뭐냐하면 그 큰 고기속에 요나가 들어온게예요. 이것이 죽음이예요. 죽음. 죽음의 구체화. 또렷하게 죽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고귀한 죽음이 있을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이것이 천하보다 귀한 것이 고귀한 죽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그것이 기적입니다.
그러면 요나의 기적이 되어버리면 이것은 모든 인간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겠어요? 단절이 되겠지요. 단절되겠지요. 자 여기서 보혜사가 왜 와야하는지를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이 떠남으로 말미암아 단절을 의도해서 유발시켜버려요. 제자들과 예수님이 헤어져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버려요. 제자들은.
그러면 제자들 입장에서는 융이 말이 맞아요. 제자들은 예수를 만나고 뭘 하겠습니까? 꿈을 꾸죠. 꿈 꿔요. Dream. 꿈을 꾸는 거예요 꿈을. 그 꿈인데 꿈을 얼마나 꿨으면 하늘나라 갔을 때 나는 왼쪽에 쟤는 오른쪽에 하죠. 그리고 심지어 가롯유다까지 꿈을 꿨잖아요. 가롯유다까지.
베드로는 말할 것도 없고요. 내가 죽는다 하니까 ‘아니~그럴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나서서 막겠습니다. 우리가 왜 있는데요. 보디가드가 왜 있겠습니까? 제가 가서 막겠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이는 하나님의 일을 망치는 악마의 일이다.’
악마는 주일날도 이야기 했지만 악마는 복음을, 십자가 복음을 이야기 하지 않으면 절대로 악마는 자기의 정체를 노출하지 않습니다. 악마가 없어요. 악마는 없는 거예요. 복음이 등장할 때 만 그 자리에 악마가 나타나요.
그래서 제가 주일 낮 설교하면서 구원의 문은 누가 만든다고 했어요? 악마가 만들어요. 구원의 문은 악마가 만듭니다. 왜냐 악마가 성도에게 교만하게 할 때 그 때가 성도가 구원받는 순간이예요. 왜냐하면 다시 한번 십자가가 왜 필요한지가 그 현장에 다시 등장하기 때문에.
그래서 대구강의 때 제가 대구강의 때 단지를, 단지라는 제목을 했거든요. 단지를 두 개 그렸죠 단지를. 단지 하나 그려놓고 그 위에 더 큰 단지 했죠. 작은 단지가 뭐냐? 악마이고, 큰 단지는 예수님이고. 작은 단지 안에 누가 들어있어요? 인간이 들어 있어요.
그래서 악마를 이기고 주님께서 구원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악마안에도 얼마든지 성도가 지낼수 있도록 조치를 해놓은 겁니다. 그래야 성도를 통해서 이 소자를 통해서 십자가 복음이 전파되지요. 전부 다 지리산에 다 가버리면 복음은 누가 전합니까?
성도가 이 세상에서 그 한 몫을 담당해야하는 되는 거예요. 그래서 뭐라고 남들이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이야기를 해줘야 되지요. ‘나는 무엇을 열심히 해도 구원받는거 아니다. 예수님의 은혜줄자에게 은혜줘가지고 그냥 은혜 공짜로 얻어서 구원받았다.’ 라는 이야기.
‘그 증거가 피에 있다. 모든 인간은 버렸으나 그 버린인간을 주께서 공짜로 자비로 구원했다. 그 증거가 피다.’ 라고 이야기를 함으로써 모든 악마가 모든 권세는 다 이겼는데 ‘그 입 다물라!!’ 이거는 아예 안되는 거예요. 이거는 안되는 거예요. 심지어 보복이 들어오죠. 사드 보복. 환란과 핍박과 곤고와 적신이 어떤 공격이 들어와도 내게 나한테 주신 영생을 뺏어갈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목자가 양을 쥐었는데, 꽉 쥐고 있는데 어떤 권세가 손가락 펴 가지고 뺏어갈 예수님 보다 더 쎈 권세는 없습니다. 왜? 부활했기 때문에. 악마가 마지막 보복으로 죽음을 딱 죽음의 협박을 취했는데 죽음의 힘이 있는데 그 죽음의 힘에서 뚫어 보니까 하늘에 구멍이 뚫린거예요. 그 뚫린 구멍 사이에서 주께서 보혜사를 줬습니다. 그것을 요한복음 1장에서는 그것을 성령의 세례라고 하지요. 성령의 세례
진도를 좀 천천히 나가 봅시다. 다리가 두 개가 있는데, 다리가 두 개 있잖아요. 안개 끼었잖아요. 다리가 두 개있다 이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한 쪽 다리를 건널 때 계속 가는 이유가 뭐냐? 나한테 납득되는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 쪽으로 그 사람의 본성을 드러내게 되어있어요.
그럼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인간의 행동함에 따라서 구원이 된다는 말을 하는게 아니고, 자기가 품고 있는 본성에 따라서 인간은 행동하게 되어있고 그 행동을 정당화 하면서 들려오는 소리가 각자 다르다 이 말입니다.
지옥가는 것이 본인의 의사에 따라 지옥가는 것이 아니고, 본인의 본성에 어울리고 납득이 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면서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면 여자의 후손이 있잖아요. 아담,하와. 그러면 또 다른 다리가 무슨 다리입니까? 여자의 후손하고 누가 싸웠습니까? 뱀의 후손과 싸웠지요.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이니까 여자,뱀의 역할을 누가 해야 되느냐? 그건 사람이 해야되는 거예요. 뱀의 후손은 악마 사탄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이 사람을 통해 나타나듯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잖아요. 뱀도 기존에 있는 인간을 통해서 계속 반복음, 복음에 반대되는 것을 계속 이야기해야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그게 바로 융과 프로이드가 잘 이야기를 해주니 마귀가 얼마나 고마워요. 융은 뭐라고 했다구요? 뭘 보고 살아라? 희망보고 살아라. 너 노력한만큼 뭐가 주어진다? 보상 줄 것이다.
성경전체 내용을 통해서 교회 목사들이 설교할 때 그 설교 주제가 뭡니까? 제대로 살면 제대로 천국도 가고 이 땅에서 복 받습니다. 여러분들이 제대로 안살아서 그렇다는 거예요. 그것이 납득이 되거든 그 교회 계속 다니세요.
그것이 납득이 되면. ‘아~ 나는 이제 이해되네. 성경이 풀리네.’ 그렇게 풀리거든 그대로 가세요. 그런데 성경전체는 성경전체가 단절!단절! 왜 우리가 왜 주님은 우리를 떠날 수 밖에 없었는가? 근데 그 떠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중에 누가 있다? 우리가 포함되있다는 사실을 언급해요.
자 이제 성경이야기 본문이야기 들어갑니다. 이래놓고 알았다 치고, 예수님이 성령님 다 같이 두 분이 오셔서 일하지 않고 한 분이 떠나야 되는 이유는 아까 이야기 했지요. 인간들이 지금 문제가 있어요. 인간들이 오해를 하고 있다니까요. 인간들이 오해를 하고 있어요. 희망을 갖는게 문제예요.
소망이라하는 것은 로마서 8장에 보면 소망은 보이지 않는 소망은, 소망 자체가 항상 중첩되어 있고 항상 이것이 나중에 항상 곁에 모든 개념에 중첩되어 있어요. 모든 개념에. 소망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그 소망은 소망을 하나 떼어 낼 때, 소망이라는 말을 언어를 떼어낼 때 두가지가 있어요. 문자로 보는냐? 아니면 영으로 보느냐? 두 가지가 있다 이 말이예요. 문자냐 영이냐 하는 이것은 고린도후서 3장에 나오죠.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내가 이른말은 문자가 아니요, 기호가 아니요, 그냥 글자가 아니라 뭐다? 내가 영으로 이른말이라 하죠? 한번 찾아 볼까요? 고린도후서 3장. 3장에 6절에 보면 저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3장 6절에, 고린도 3장 6절에 그렇게 되어있지요?
그러면 여기 새일꾼이라고 하는 것이 언약의 일꾼이니까 새 언약은 언제 완성됩니까? 십자가 되야 완성될게 아닙니까? 그러면 십자가 이후에, 십자가 이후에 성령 오게 되어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임무교체 되야되요? 안되야 되요? 교체가 되야될게 아닙니까! 십자가 사건이 예수님 혼자 자살한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까? 아니잖아요.
십자가는 무슨 뜻이냐하면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알아주고 하나님과 일 할 분은 아담이라는 대표밑에 있는 그 새끼 친 자식들에는 아무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함께 일 할 유일한 적합자예요. 적임자란 말이예요. 적임자.
다른이름은 안되요. 오직 예수이름외에는 다른이름으로 구원을 받을 이름이 없어요. 우리 이름이 끼어들면 안되요. 왜? 프로이드에 의하면 우리 이름이 끼어들면 우리이름이 딸려나오는게 아니고 우리 이름안에 누가 들어있습니까? 우리 이름 누가 줬어요? 우리 부모님이 지어줬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럼 무얼 생각합니까? ‘이러면 부모님 위신이 깍이는데. 이러면 가문에 먹칠해. 행동 조심해야되. 이러면 우리 아빠가 얼마나 슬퍼하겠어. 이러면 날 키운 엄마가 얼마나 화내겠어.’ 우리안에 중첩되어 있어요. 어디까지? 우리 아버지만 중첩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까지. 아담에서 우리 아버지까지 내려와서 모든 것이 시루떡처럼 꽉꽉 눌렸어요. 중첩되어서 나와요. 중첩되어서
목사님 너무 과장된거 아닙니까?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과장된거 아니예요. 오늘 저녁에 12시에 뭐합니까? 축구하지요. 평소에 전라도, 경상도 그렇게 싸우다가 갑자기 축구하게 되면 아~~전라도 이렇게 합니까? 아~대한민국 하지요.
대한민국의 그 이미지와 위신이 각자에 중첩되어 있다니까요. 그럼 대한민국을 무슨 자손이라고 합니까? 아브라함 자손입니까? 대한민국이 무슨 자손이예요? 예? 단군의 자손이잖아요. 한국 와서 단군 욕하면 되요? 안되요? 외국사람 한국사람 시험칠 때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단군신화 나오잖아요. 태극기 나오고, 그 시험 치잖아요. 애국가 불를 줄 아느냐 묻고.
중첩되어 있다니까요. 중첩. 부부가 싸울 때 남이 말리면 둘이 합쳐서 왜 말리냐고 싸운다구요. 둘이 아무리 싸워도 저기 외부인이 간섭하게 되면 우리가정 알아서 할테니까 저리가소. 이렇게 된다니까.
그래서 우리 몸은 제가 그렇잖아요. 우리 몸은, 우리 마음은 사건의 다발이라고. 지금껏 살아왔던 모든사건들 경험했던것이 꽉꽉 이렇게 농축되어 있는거예요. 우리의 모든 사고 방식이.
농축되어 있으니까 사도바울의 그 명령과 지시가 항상 우리의 뼈를 바르고 살을 발라서 살, 뼈 전부다 도려 내면서 우리 안에 들어있는 악마의 아담과 결탁했던 그 악마의 수환, 수법, 사고방식을 말씀으로 드러내서 우리로 하여금 벌거벗게 만들어 냅니다. 말씀이라는게.
‘너 죄인 맞잖아. 죄인 맞잖아. 어디서 끼어들 자리 구분도 못하고 하나님과 의논한다고?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은 대표적 단독자로 의논하는 거야.’ 아무도 의논 못해요. 이번 주일날 그런 설교 했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구원할 때 7식구 8식구 있다면 누구와 의논했겠어요? 인간하고 상대안해요. 누구하고 상대하겠습니까? 양 하고 상대한다고 양 하고.
어떤 양? 세상죄를 지고가는 양 만 상대해요. 그게 하나님이예요. 왜 우리가 왜 끼어듭니까? 분수도 모르게. 그러니까 12제자부터 전부다 헤어져야 되요. 떠나야되요. 그래서 여기보면 뭐라했냐하면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뭐라? 떠나는 것이 유익이라.
여기 그 저 14장 26절 봅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평안을 끼친다는 말은 무슨뜻이냐하면은 이거예요. 여러분 그 애들이 재롱을 부릴 때 언제부립니까? 재롱. 오늘 제목을 이미 정했는데요. 애들이 재롱부릴 때 언제 부립니까?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재롱부리고 형제가 가족들에게 재롱부릴 때 언제입니까? 어떤 경우에 하냐하면 ‘처벌없음’ 이것이 오늘 강의 제목입니다.
처벌이 없는 공간에서 재롱을 부립니다. 어떻게? 마음놓고 부리죠. 마음놓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 뭐라해요? 예? 기신 꿍 꼬또~ 하죠. 말도 제대로 못하고. 일종의 재롱이잖아요. 그렇게 해도 이게 어디서 칠칠맞게 이런 소리 안하잖아요. 모든게 용납이 되고 너 그렇게 나한테 약올렸으니까 매 맞아라 이런거 없어요. 처벌이 없어요. 처벌이.
그게 뭐냐? 평안함이예요. 평안함. 성령이 왔다. 새로운 공간이 주어집니다. 새로운 공간. 이게 뭐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가 못한 아버지가 인간들의 관계를 한나님께서 다 청산하시고 쟤 한테는 일체 처벌이 없도록 다 해 논 그 공간을 처소라고 하거든요. 그 처소가 그냥 우리에게 오십니다.
오시게되면 우리는 거기서 뭐만 부리면 되요? 재롱부리고 까불기만 하면되요. 왜? 다리는 그 다리는 이미 다리 자체가 주님이 누워있기 때문에. 그 다리 자체가 주님이 건설했기 때문에 죄인줄 알고 죄인줄 알고 ‘앞으로 잘해라.’ 이게 아니고 이미 죄인줄 알고 거기서 뛰든지 말든지 마음껏 거기서 너 하고 싶은데로, 막 막 살면서 너 하고 싶은데로 어떤 짓도 내가 죄를 묻지 아니하노니 묻지 아니하노니 거기로 가는 겁니다.
영생으로 가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하면은 사는 게 꼭 남의 일 처럼 관람하듯이 사는 것. 자기 인생에 대해서도. 내가 요런 짓도 할줄 아네 이렇게. 마치 남의 일처럼 그렇게 느껴지죠. 남일처럼.
그러면 어떻게되요? 심각한게 있어요? 없어요? 심각함이 없어요. 악마는 반대로 행동 하나하나가 심각해요. 해야되나? 말아야되나? 딴딴 따딴딴 결심했어! 맨날 결심해 맨날 결심해. 저 앞에 차를 타나? 뒤에 차를 타나? 뭘 해야되나? 맨날 심각해요. 왜? 맨날 심각하고 사소하지 않아. 벌써 이것이 마귀가 준 치명적인 병에 걸렸어요.
그런데 성도는 뭡니까? 모든게 사소하고 모든게 심각하지 않습니다. 사무실을 내 가지고 되든 말든. 일단 늘여 보고, 또 뭐 안되면 저리로 이사가면 되니까. 아무것도 심각하지 않아요. 하나도 이게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소중한 것은 뭐만 소중해요? 예수그리스도의 피만이 소중해요. 피 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일 낮에 이것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피의 얼굴이라고 했어요. 피의 얼굴. 피의 얼굴이란 말은 얼굴이란 말은 표정에 나타나요. 현재 우리 속에 피가 어떤식으로 효과를 보느냐를 우리의 모든 행동과 우리 표정에서 나타날 때 성도는 어떤 짓거리를 해도 그것이 피의 효과를 보여주는 표정이 된다 이말입니다.
10분 쉽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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