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요한복음14장18절(예수님의 기억)170620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4장 18절부터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이렇게 간단한 말씀인데요, 중요한 것 두 개를 설명하려면 많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2000년 교회사를 통해서 교회가 반대로 이야기한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을 믿게 되면 우리가 달라진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근데 성경은 그게 아니고, 예수님을 믿게 되면 우리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달라져요. 예수님이 달라진다고요. 우리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은 안 바뀝니다. 안 바뀌는데 마치 바뀐 것처럼 자기를 호도하고 있어요. 이것 설명하면 굉장히 길지만 짧게 설명하게 되면, 인간은 본인이 본인을 몰라요.
왜냐하면 기껏 본인이 내가 누구라고 하는 것은 주위에서 알려주니까 내가 그 정도 위치에, 그 정도 자리에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만약에 우리가 다른 부모를 만났다고 한다면 우리는 동일한 다른 평가를 또 받게 돼요. 그러면 또 ‘내가 전에 생각한 그런 존재가 아니었구나. 다른 존재였구나.’라고 그렇게 생각한다고요.
지난 낮 설교 마지막 부분에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것은 해도 되고, 이것은 안 해도 된다고 하는 그 판단을 본인이 내릴 권한이 없고, 내리지도 말라고 했어요.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라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제목이 있잖아요. 근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고 계속 맞는 거예요.
이거는 뭐냐 하면 내가 나에 대해서 판정을 내릴 그런 자격이나 권리가 없어요. 나라는 것이 뭔지 알면 되는데 판정을 내리는 나도, 남들이 “너는 이런 인간이야.”라고 이야기해주니까, 그게 다인 줄 알고 내가 판정을 내리는 겁니다. 그러한 잘못된 결과의 대표적인 것이 자살이잖아요. 자살이 뭡니까? 내가 나를 죽이는 거예요. 셀프살인이잖아요. 내가 나를 죽이는 거예요.
내가 나를 죽일 때에, 나는 나를 죽일 수 있는 권한이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이거든요. 근데 그런 자격이 있다고 누가 그렇게 부여하고 누가 그렇게 알려줬느냐 이 말이죠. 하나님이 그렇게 했어요? 자살하라고? 니 목숨 니가 자르라고 성령께서 그렇게 역사했습니까? 누가 그렇게 했어요. 자꾸 본인이 결정했다는 거예요. 근데 그 본인이, 그 본인이라는 것이, 당신이 생각한 당신이라고 누가 이야기했던가요? 그동안 축적된 외부인식이에요. 외부인식.
“아이고, 나 같으면 죽지. 그래서 어떻게 사나?”라는 그런 소리가 자꾸 박히는 겁니다. “그러려면 우리 헤어져! 그렇게 하려면 집 나가!”라는 식으로. 아니, 기분 좋아서 자살하는 게 있어요? 기분 좋아서 자살하는 그런 자살도 다 있어요? 기분 좋아서 까불다가, 셀카 봉으로 셀카 찍다가 절벽인줄 모르고 떨어져서 죽는 그런 것 말고. 자살을 계획적으로 하는 것 있잖아요. 계획적으로. 꾸며가지고, 각도 맞춰서, 테이프는 잘 붙였는지, 번개탄 위치는 어디에 할 것인지, 이렇게 계획적으로 하는 것 있잖아요.
자기가 자기를 처분할 수 있는 그만한 권한이 있느냐 이 말이죠. 인간은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몰라요. 자기 자신에 모르면서, 어느 날 교회에 가서 예수를 믿었다고 칩시다. 믿고 난 뒤에 목사가 주님은 영원하다고 하니까, 고정된 줄로 알고 있죠. 영원하다고 하니까, 천국은 좋은 나라고 자기는 별 볼일 없는데 예수 믿게 됐으니까 서서히 무슨 작업에 나서야 됩니까? 천국 가도록, 천국에 가는 내 목표가 있잖아요.
천국에 합격되는 그 이미지를 딱 염두에 두고, 지금은 내가 그 정도가 안 되지만, 기도와 말씀으로 거룩해진다는 디모데전서 4장 5절의 말씀도 있기 때문에, 빡세게 기도하고 말씀 읽는 거예요. 두 수레바퀴를 달린다, 이래가지고 열심히 하는 거예요. 성경 보는 시간은 하루에 1시간, 기도는 한 30분. 그거는 유도리가 있어요. 나중에 어렵다 싶으면 바꾸는.
그렇게 자기가 그 행함을 하게 되면 자기가 차츰차츰 바뀐다고 보는 겁니다. 바뀔 때에 주의 형상을 본받고,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다고 여기는 거예요. 근데 오늘 본문보세요. 우리는 그냥 가만히 있어요. 누가 왔다가 갔다가 하십니까? 누가? 고아와 같이 너희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오신다고 했습니다. 누가 이동하고 누가 행위에 나섭니까?
지금 우리 자신은 괜히 헛바람 들어가지고, 나는 달라졌어! 술 끊고, 담배 끊으니까 달라졌다고 하는데, 술 끊고 담배 끊었으니까 인간 새사람 됐다고 누가 이야기하던가요? 그것도 주위에서 또 이야기한다 이 말이죠. 주위에서 이야기하면 본인도 그런 줄 알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갖다대버리면 두 개의....., 한 번 예를 들어봅시다. 포도주를 검열하고 검사하는 직업을 뭐라고 합니까? 소믈리에라고 하죠. 만약에 어떤 사람이 소믈리에 자격증 시험을 치는데, 두 종류의 포도주만 맛보면 눈감고도 이거는 국산이고 저거는 프랑스산인지를 아는 거예요. 근데 두 종류의 포도주만 달랑 맛보고 시험 친다면 그거 합격이 될까요, 안 될까요? 될 가능성이 없죠. 적어도 30가지, 50가지, 100가지를 맛보고 딱 맞춰야 자격증이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성경보고 난 뒤에, ‘그래. 나는 이 말씀에 죄인이야.’라고, 성경 서너 가지를 보고 나는 죄인이라고 규정한 것과, 계속해서 신앙생활하면서 성경 본 것과, 신앙생활 오래하면 어떻게 됩니까? 가짓수도 많아지고 말씀이 품고 있는 그 깊이도 점점 더 깊어지겠죠. 깊어지게 되면 전에는 한 세 가지, 열 가지 말씀가지고 ‘아, 이거는 지킬 수 있다. 온유와 화평, 그거는 지킬 수 있다,’라고 했는데, 어떤 성경구절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든지, 뭐 이런 것들이 점점 더 나오니까, 자기가 처음에 두 서너 가지 할 때는 자신만만했지요.
이거 지키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되고, 그럼 나는 오늘 죽어도 천국 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많은 성경구절을 대하다보니까 갑자기 어떻게 돼요? 이게 감당이 안 되죠. 거기다가 그 중에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 “하나를 어기면 지금까지 지킨 것 헛방이다.” 이렇게 되게 되면 점점 더 자신감이 떨어지겠죠. 그러니까 포도주 두 병 맛보고 자신만만한 것하고, 점점 더 많아지게 되면 자신감이 없죠.
그렇게 되면 내가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 천국에 도달될 가능성은 점점 더 늘어나겠어요? 점점 더 떨어지겠어요? 떨어지겠죠. 그게 바로 갈라디아서 2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한 거예요. 율법을 안다는 것은 그만큼 나는 처음부터 저주받기에 합당한 입장으로서 이 땅에 출생했다는 겁니다. 이것은 뭘 일체 인정하지 않느냐 하면 자기 의 라는 것이 율법으로는 이게 성사될 수 없다는 겁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2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율법으로는 의인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에요. 율법으로 의인이 될 것 같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지 않았다는 그런 논리입니다. 율법으로 의인이 될 수 없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말하는 교회라는 것이죠. 근데 갈라디아서 2장 4절에는 뭡니까? 주일 낮에도 이야기했지만. 이 자유를 훼방하려고 가만히 엿보고 들어온 마귀가 있다고 했잖아요.
율법으로 자유를 이룰 수 없는 것을 뭘 통해서 주어졌다? 십자가의 피 흘림으로,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그것을, 99살까지 살고 100살까지 살아도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점점 더 희망이 없는, 오히려 점점 더 멀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율법 외에 다른 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제공이 된 이것을 가지고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로 본 거예요. 근데 이 자유를 받은 사람의 그 기쁨을 시기가 나서 훼방하려고 가만히 들어온 형제들이 있더라 이 말이죠. 가만히 들어온 그런 사람들이 있더라 이 말이죠.
요즘에는 이게 반대가 됐죠. 자기 의를 이루는 집단에 진짜 복음을 아는 사람들이 오게 되면, 오히려 복음 아는 이쪽이 수상해요. 그쪽에서는 교회 깨려고 왔느냐? 얼마나 좋은 교회인데, 아름다운 교회를 깨려고 하느냐? 라고 하죠. 이런 식으로 반대가 되지만. 어쨌든 갈라디아서에 보게 되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말씀을 이렇게 보게 되면, 전에는 말씀 보기 전에는 착했는데 말씀 보니까 악했다가 아니라, 나는 처음부터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저주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달라지겠어요, 안 달라지겠어요? 안 달라지죠. 달라질 수가 없죠. 술 끊고 담배 끊어도 그게 의가 아니에요. 술 끊은 죄인 되고 담배 끊은 죄인이 됐죠. 술 먹던 죄인에서 술 끊은 죄인 되죠. 제가 이래 이야기하면 “그럼 목사님 이제 술 먹어도 되네요?”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언제 우리가 행동할 때 할 만 해서 하는 경우가 어디에 있어요.
내가 술을 먹는 것이 아니에요. 술이 나를 보고 먹으라고 호소를 하는 거예요. 나는 딸려갔고.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유혹을 조절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유혹에 끌리게 된 존재에요. 그러면 우리는 왜 말썽이 없습니까? 아직 대단한 유혹이 없어서 그래요.
따라서 유혹에 끌렸다고 해서 별나게 더 나쁜 사람이 된 게 아니에요. 유혹에 안 끌렸을 때는 곧 유혹에 끌릴 잠재적인, 예비군이죠. 잠재적인 예비상태에 있을 뿐이고, 아직 호출을 못 받았어요. 나이가 80이고 50이고 간에, 나이를 묻지 마세요. 인간의 모든 유혹은 나이를 초월합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 와요.
제가 몇 년 전보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여자들은 보편적으로 착합니다. 여성들은 착해요. 힘이 없어서 누구를 때리고 하는, 폭력적이지 않잖아요. 그리고 아쉬우면, 여자들 싸우는 것 보세요. 꼬집고 머리 잡아 땡기고 하는 그 정도지, 총 들고 설치는 것은 악녀 김옥빈이나 하지 그렇게 하지 않잖아요. 보편적으로 어지간하면 혼자 눈물 흘리고 혼자 삼키고 이러지, 그걸 이렇게 과격하게 안 한다는 이 말이죠.
그래서 그 착한 여자들이 왜 지옥 가느냐? 착한데 왜 지옥 가느냐? 거센 남자들이나 지옥 가는 거야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착하디착한 순한 양 같은 여자들이 왜 지옥 가느냐? 하는 그게 느낌이 와 닿지를 안 했어요. 한 십년 전만 해도. 근데 그 뒤에 제가 알았어요. 뭐냐 하면 복음을 전하다보니까 혼자 살아서 그래요. 천국은 누가 동행을 해줘야 하는데 혼자 천사라.
이 천사가 나의 자존심이 되거든요. 착함이, 남들보다 착하다, 착하다 하면 그게 누적이 돼버려요. 그러니까 자기기 지옥 간다는 것에 대해서 점점 더 감이 떨어지는 겁니다. 감이. 곶감 떨어지는 것 말고. 필링feeling, 감각이 떨어지는 것. 나 같은 천사가 어디에 있느냐 이 말이죠. 나 같은 천사가.
지옥 간다면 못된 남자들, 날 버리고 바람난 남편이나 이런 것들이 지옥가야지, 그저 자식 거둬가지고, 자식 서이나 너이(3-4명)되는 것 혼자 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 다 하고, 옛날 여자들은 다 그랬어요. 시장에 가서 장사하고, 애는 줄로 묶어가지고 키우고, 그 장면을 보고 얼마나 제가 울었는지 몰라요. 그런 영화가 있어요. 남편은 광부로 갔는데 얼마 안 돼서 죽었다고 통보가 오고, 하얀나비를 불렀던 김정호 노래가 나오는 그 영화가 있어요. 나이 80먹은 할머니가 20대로 돌아가서 가수가 되는 거 있잖아요. 수상한 그녀라고.
하여튼 여자들이 고생한다 이 말이죠. 그렇게 고생하는데 이 땅에서 고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지옥 가서 영원히 고생해요. 왜냐하면 혼자 살아서 그래요. 혼자 살아서. 요새는 혼자 안 살아요. 뭐하고 사느냐 하면 요새는 개하고 고양이하고 살아요. 개하고 고양이하고. 주님하고 살지 개하고 고양이하고 맨날 인형 키우듯이 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땅에서 여자라고 해서 천국가기 쉽고 남자라고 해서 지옥가기 쉬운 것이 아니고 인간은 절대로 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해요.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고 교회 가서 말씀 지키고 한다고 해서 인간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내가 이쯤 신앙생활 하면 제 신앙생활이 정상이에요?” 라고 묻지를 마세요. 신앙생활 정상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 신앙생활 정상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그게 더 미워요. 뭔가 지금 말고 향상된 나를, 나의 대체물을 내 앞에 앞장세우는 그것이 더 못됐어요. 영원히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변동되지 않는, 변함이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뭐냐 나는 안 달라지는데 누가 달라져요? 주님 쪽에서 바빠요. 나는 전혀 안 바빠요. 주님 쪽에서 바쁘다고요. 그래서 우리가 답답해야 할 일은 없어요. 답답해도 누가 답답해요? 주님이 답답해요.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14장 18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보세요,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는다 이 말이죠. 고아와 같이.
고아, 지가 자수성가해서 재벌 돼야 합니까? 그러면 버려두지 않는 겁니까? 아니에요. 계속 고아이어야 해요. 고아. 주님 보시기에 아무리 친구들 많고, 늘 얼싸안고 친구들이 많다고 할지라도, 자기 부모가 있다 할지라도, 주님보시기에는 우리를 뭐로 보느냐 하면 고아, 이걸로 규정시켜놓고 찾아오시는 겁니다. 그래야 말씀의 형식에 부합이 돼요. ☐은 ☐를 찾는다. 앞에 ☐는 주님, 뒤에 ☐는 고아. 주님은 고아를 찾는다.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 자신의 자리를 버리고 뭐 안에 들어와야 해요? I am 고아. 나는 고아라고 할 경우에 이미 여기서 문장이 형성돼요. 문장이. 주님은 고아를 찾는다는 요한복음 14장 18절의 문장이 세트set화 되어서 성취가 돼버려요. 성취가 되면 이게 누가 좋을까요? 주님이 좋은 거죠. 주님이 좋으면 하나님 아버지가 좋죠. 그럼 됐잖아요. 우리는 그냥 지남철에 딸려오 듯이 주님의 자기 숙제에 딸려온 거예요.
딸려갈 때, 우리는 무슨 입장으로? 고아라는 입장으로. 고아 아닌데 고아 된 게 아니라, 처음부터 고아였습니다. 우리는 전혀 달라질 게 없습니다. 이 고아 속에 주께서 집어넣어 줄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을 알아요. ‘주님이 분주했구나. 나 같은 죄인 살리기 위해서 주께서 되게 바쁘게 일하셨네. 지금도 일하시고.’ 자, 이거 이해됐죠. 우리는 팽팽거리며 노는데, 우리는 양 같아서 제각기 제 갈 길로 다 가요. 지하고 싶은 대로 다 해요.
그런데 주께서는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거룩을 형성하는 조건들을 주님 혼자 다 이루었습니다. 이루고 났으면 끝났습니까? 본문 보니까 오겠다는 거예요. 오실 때는 어떻게 와요? 오시고 난 뒤에는 새삼스럽게 니 이거하라, 저거 하라고 이야기하겠어요? 아니면 오실 때는 어떻게 하겠어요? 시키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고 니는 할 것 없다. 전혀 할 게 남아있지 않음을 그냥 통보하는 겁니다. 그냥 데리고 가는 거예요.
십년 만에 집 나간 자식을 어떤 재벌이 사람 풀어서 찾았다고 칩시다. 그러면 자기 아들 찾았는데 조건을 겁니까? 니 우리 집에 살려면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영어를 포함해서 외국어를 한 후에 우리 집에 오라고 이렇게 합니까? 여러분 누가복음 15장 탕자가 집에 올 때 조건이 있었어요? 탕자인 채 왔죠. 그 아버지가 탕자보고 집에 들어올 때 “술 먹고 들어오기만 해봐라!” 라고 이렇게 따졌습니까? “어디 보자. 아버지 집에 들어 올 조건이 되나 보자.” 이러면서 따졌습니까? 그냥 상거가 먼데 달려와서 껴안았어요.
미안하기는 누가 미안합니까? 오히려 탕자가 미안한 거예요.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에 대해서 나오잖아요. 어느 날 제가 잠도 안 오고해서 전에 했었던 고린도전서 13장 설교를 들었어요. 들어보니까 이런 내용이 나와요.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없어 진다는 거예요. 내가 안 없어지면 내가 주님을 사랑하려고 해요.
그러면 이거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오게 되면, 사랑이라는 큰 덩치가 덮치면 나는 갑자기 그냥 없어져버려요. 그냥 그 자리에 뭐가 남는가, 사랑만 남아요. 사랑을 받아준 내가 같이 남는 것이 아니고 사랑만 남아요. 그럼 나는 사랑에 편입되고,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조차, 죄 짓고 산다는 것조차 사랑의 일부가 돼버립니다. 죄 짓는 것이 사랑의 일부가 돼버려요.
우리가 사랑하기에 죄 짓자는 이야기가 아니고, 무슨 짓거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걸 사랑의 일부로 편입시켜주는 거예요.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너는 그런 행동을 했었어야만 했다.” 이래 돼버려요. 의미가. 세상에! 저와 여러분들이 이런 혜택을 받을 자격이 되십니까? 이거 엄청난 혜택이잖아요.
예수님 태어나셨을 때, 목자가 밤에 양을 쳤습니다. 목자가 양을 쳤는데,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가지고 광채가 비추면서 그들을 구원했잖아요. 구원했을 때, 그럼 목자가 그동안 타이밍 맞춰서 목자가 된 이유가 뭡니까? 목자가 된 것조차도 주님의 구원의 스케줄 안에 포함이 된 거예요.
그 포함된 목자 자체를 주께서는 본문에서 뭐라고 보느냐, 고아의 일종으로 보는 거예요. 니가 목자라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너는 언제까지나 혼자 있으면 고아였다는 겁니다. 고아였다고, 고아라고, 그런 말을 누가 붙일 수 있어요? 고아를 건지려 오신 분만 고아라는 명칭을, 호칭을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예요. “너 고아야!”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너 이미 구원받았어!”라는 그런 뜻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저, 고아 되기 위해서 집 나왔어요.”라고 해요. 집 나오면 고아입니까? 집 안 나오고 고아이어야 하고, 친구들 한 백 명 있으면서 고아여야 하고, 아버지 백 명은 곤란하고, 엄마 백 명도 곤란하지만. 그냥 가족 많은데서 웃으면서도 그 자체가 고아여야 한다 이 말이죠.
그래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제자들 앞에서 달라지는 거예요. 이 땅에 계신 주님하고, 다신 오신 주님하고, 아, 달라도 너무 다르죠. 주님 쪽에서 달라졌어요. 전에는 하늘에 영광으로 계시다가 그 영광을 포기하시고 죄인과 같이 되셨잖아요. 벌써 달라졌잖아요. 달라지고 난 뒤에 또 달라져 버렸잖아요. 모든 일을 다 이루시고 영광 중에 계셨잖아요.
자, 그렇다면 이 주님의 달라짐으로 이제 우리는 주님 덕분에 구원받았다. 그럼 문제없잖아요? 더 이상 이야기할 거 없네요? 이제 끝났으니까 집에 가면 되겠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가 거기서 시작이 돼요. 어떤 문제냐 하면 주님께서는 고아를 건지러 온다. 주어+목적어해서, 주님은 고아를 데리러 오신다. 그러면 우리를 뭐로 만드는 작업을 하면 됩니까?
우리가 왜 주님 앞에서 고아일 수밖에 없는가, 라는 작업을 하시죠. 하시는데, 우리 인간 속에, 우리 인간이 혼자서 가만히 있으면 이게 문제가 안 되는데, 인간은 집단적인 게 화근이에요. 집단적으로 뭔가 구름을 형성하고 있어요. 구름을. 우리 인간이 뭐냐, 라고 물으면 이렇게 답변하시면 정답이 되겠어요. “당신 누구요?”라고 하면 아담의 축소(판), 아담의 응축된 것으로 보시면 되는 겁니다. 아담의 응축.
그런데 아담하고 하나님하고 이미 약속을 주고받은 사이잖아요. 그럼 아담이 축소가 된다는 말은 아담에게 있었던 그 사건이 우리 안에 응축이 되어서 그 응축된 것이 우리 안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오셨잖아요.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오셔서 아담을 구원하듯이, 주님도 우리한테 찾아올 때, 찾아오는 지점이 있을 거예요. 지점이. 그 지점이 뭐냐 하면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는 그 지점은, 하나님이 아담을 찾아왔던 그 동일한 지점으로 찾아와요.
그게 뭐냐 하면 오늘 제목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주님의 기억이라고 제가 말하고 싶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항상 누구의 기억이 있느냐 하면 나의 기억이 있잖아요. 우리의 현재라고 하는 것은 내 기억이 중첩이 되고, 내 기억이 응어리져서, 그 중에서 나라는 것이 누구라고 자기가 파악을 하는데, 이거는 어디까지나 내 기억 속에 내가 담겨있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내 기억에서 벗어나서, 빼내서 주님의 기억 속에, 아담을 찾아왔던 그 하나님의 기억 속에 우리를 집어넣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억은 뭐가 되느냐 하면 허구가 돼요. 판타지에요. 판타지Fantasy(공상 혹은 상상, 상상의 산물을 뜻하는 단어). 우리는 지금 착각과 곡해와 오인과 오류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아까 언급한 것처럼,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남들이 알려줬는데, 그들이 나를 누구라고 할 때는 그들 나름대로의 기억이 있어가지고 거기에 맞춰서 나를 생각한다고요. 거기에 맞춰서. 예를 들면 아들을 장가보내기 위해서 엄마가 먼저 그 아가씨를 봤다 이 말이죠. 보고 아들한테 이야기를 해요. “야야, 너 요즘에 참 바쁘더라도 저 호텔커피숍에 가서 꼭 만나 보래이. 엄마 소원이다.” 아들이 있다가 “엄마, 이뻐요, 안 이뻐요?” “야야, 너무너무 이뻐!”
근데 엄마가 그 색시가 이쁘다고 한 말은 엄마 기억의 일방적인 주장이라니까요. 엄마 기억속의 일방적인 주장이라는 것. 자기기억 속에. 그런데 엄마가 이쁘다고 하니까 효도한답시고 한 번 만났다 이 말이죠. 딱 보니까 영 자기 타입이 아닌 거예요. 그래도 미안하니까 “우리 자장면이나 먹을까요?” 커피는 그쪽이 내고 자장면은 내가 낸다고 하면 튕긴 거죠.
스테이크나 썰러가자고 하면 모를까, 자장면 먹으러 가자고 하면 이거는 아니잖아요. 안 그래도 못생겼는데 시커먼 거 묻잖아요. 그래서 와가지고 “엄마는 소개를 해도...엄마 정말 인물 볼 줄 모른다.” “야야, 그런 애가 나중에 애도 순풍, 순풍 놓고 살림도 잘하고, 얼마나 손이 큰지, 엉덩이도 크고, 애도 잘 놓고 한다.” 자기 기억과 엄마의 기억이 다르니까 맞지를 않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주님에 대해서 왜 오해를 하느냐 하면 내가 나부터 오해를 하고 있으니까. 그럼 나의 오해는 뭐냐 하면 이미 범죄 한 아담의 축소판이에요. 범죄 한 이후의 축소판이니까, 우리는 나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아담이 범죄 한 이후에 어떤 성격과 성질을 갖고 있는가를 추적을 해야 돼요.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담을 그냥 압력프레스로 눌러버린 그게 바로 우리에요. 아담을 납작하게 눌러버렸으니까 아담이 갖고 있던 시간관, 공간관, 세계관, 그게 함께 눌려서 짜부라져서 오늘날 우리가 된 거라 이 말이죠. 인간들끼리 만나면 서로서로가 개성이 있다고 하지만, 성경에서 보면 모든 인간은 동일해요. 모든 인간이 동일한 이유가 모든 인간 속에 악마가 심어준 것이 있잖아요.
악마가 심어준 그 욕구, 그 욕망은 모든 인간에게 다 들어있고, 남녀노소 할 것이 없이 다 들어있어요. 사람이 먹고 살려면 우선 떡이 있어야 된다는 것. 사람은 떡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남들이 인정을 해줘야 한다는 것. 인정. 인간의 모든 경쟁과 투쟁은 딴 게 아니고, 남한테 인정받기 위한 투쟁이라는 겁니다. 이게 헤겔의 철학이에요. 남에게 인정받기 위한 투쟁이다. 이게 간단한 네 글자에요. 네 글자. 인정받기.
배고플 때는 밥 때문에 살지만 배부르고 난 뒤에 그 다음은 뭐다? 남한테 인정받는 거예요. 사람으로 대우받는 거예요. 나를 한 사람으로 넣어달라는 거예요. 인정투쟁.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주는 것을, 그걸 사람들은 평화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마태복음에서 악마의 두 번째 시험이에요. “당신이 만약에 하나님의 아들이어거든 아들답게 놀라운 기적을 보여라. 그러면 당신이 하고자 하는 그 목회, 복음전파, 주의 말씀성취.....,”
기적 딱 한 가지만 행하면 그 교회 소문나가지고 그 교회 부흥이 되는 거예요. 저 교회는 초대교회의 놀라운 능력이 임하더라. 신사도운동. 초대교회의 놀라운 성령의 운동이 아직도 살아있더라. 그 교회는 초대교회 같아. 또 제 것을 제 것이라고 하지 않고 서로 나누고. 기도해서 병들이 낫고. 그래서 사람들이 몰리니까 초대교회의 모습이 보이고. 심지어 성령 받아서 랄랄랄라~방언까지 하고. 완전히 사도행전 판박이더라. 그게 바로 악마의 두 번째 시험입니다. 인정받는 거예요.
세 번째 시험은 멈추지 않는 욕망, 욕망의 끝은 어디냐? 뭐 없죠. 세상 모두를 가져야 해요. 누가? only me~오직 나만. 나만 다 가져야 해요. 내가 다 가져야 해요. 내가. 도박은 돈 벌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오직 그 판에서 자기가 최종적인 승자가 되는 것이 도박의 묘미입니다. 판돈 전부 다 걸었는데 마지막에 몽땅 자기 것으로 할 때, 돈의 문제가 아니고 이거는 마약 이상의 엔도르핀이 나오는 겁니다. 마약 할 때처럼 그대로 엔도르핀이 나오는 거예요.
도박 할 때는 밤새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해도 밤새서 하죠. 게임 할 때 밤새도록 하죠. 컴퓨터 게임 할 때 시간가는 줄 몰라요. 뭐 여러분들은 안 해봤으니까, 해본 사람이 없잖아요. 새사람 되었으니까 경건해서 안 해봤죠.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요, 끝도 없어요. 어떤 청년이 그런 질문들을 해요. 자기가 얼마나 고민이 되었으면, 그런 질문들을 하겠죠. 뭐, 야동을 못 끊겠습니다. 뭐, 자위를 못 끊겠습니다. 그런 질문들을 해요.
그 사람이 잘못된 것은 뭐냐 하면 본인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뭐 하나 숙제를 했잖아요. 끝났다. 끝나면 숙제 끝입니까? “또 이거 한 번 해볼래?” 이래 나와요. 그래서 화투에 빠지는 그 욕망과 구제에 빠지는 욕망하고 똑같은 욕망이에요. 둘 다 악마적이에요. 어떤 가수는 콘서트해서 구제하잖아요. 김장훈이 하잖아요. 비행기 타서 담배 한 대 피워서 걸려가지고. 담배나 피우지 말지 구제 백날 해야 뭐. 지 주차한다고 경찰관하고 싸우고 해서 노무현 행사 다 버려놓고.
돈이 문제가 아니고 남한테 인정받는 거예요. 인정받는 이걸 가지고 연예계에서는 인기라고 하죠. 인기의 끝이 있던가요?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떨어질 나락의 높이가 점점 더 높아지죠. 조금 인기 있다가, 포맨 하다가 푹 떨어져버리고, 이거는 뭐 아프지도 않아. 올라간 적도 없는데 뭐. 그냥 철퍼덕해가지고 엎어진 거죠. 근데 나중에 올라가서 자빠지게 되면 이건 엄청난 겁니다. 엄청난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가 인기가 있어버리면, 인기는 인정이거든요. 그만큼 타인이 인정을 해준다는 거잖아요. 그럼 인정한 것을 계속해서 유지를 해야 되니까, 그럼 돈이 얼마나 들어와야 인기가 계속 유지가 되는 겁니까? 그 품위가 유지가 되겠어요?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만큼 갈수록 더 힘들다는 거예요. 갈수록 더 힘들어요.
그래서 차라리 포기하지 말고 그냥 살면서 주 앞에 부름 받는 것이 최고지, 포기한다고 해서, 포기한 그것도 악마가 시킨 욕망입니다. 뭘 안 보고, 뭘 끊는 거, 나는 야동 안 보고, 자위도 안 하는 그것, 그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이 있는 한, 계속해서 다른 모습으로 악마한테 놀아나고 있는 거예요.
근데 제가 아까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이 뭐라고 했던가요? 사랑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잊는 거예요. 이거는 할 만한 일이고, 이거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 하는 그 자체가 이게 의미가 없는 거예요. 사랑 앞에서는. 이거는 나쁜 짓이고, 이거는 옳은 짓이고, 라고 하는 그 판단 자체를 할 이유가 없다니까요. 계속 악마가 와서 그 판단을 하라는 거예요. 그럼 사람이 점점 더 예민해져요.
꼭 일기장을 쓸 때, “오늘은 어디에 가면서 개미 여섯 마리를 죽였다. 내일은 다섯 마리로 줄여야지. 내가 이 귀한 생명을 죽여 버렸다. 어떤 차를 탔는데 할머니가 탔다. 나는 뒷자리에 있어서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뒷자리에서 일어나서 할머니를 모셔서 앉게 했어야 되는데, 내가 왜 그 행동을 못하고...이 비겁한 인간아! 성령 받았으면서도 그것밖에 안 돼! 라고 나는 후회한다. 앞으로 그런 할머니가 있으면 잘 모셔야지.”라고 이렇게 써요. 버스 탔는데 그 생각했다 간에는 지가 어디로 가는지 다 잊어버려요.
사람의 기력이라는 것은 하나의 일에 몰두해버리면 다른 일은 잊어버린다고요. 차 탔는데 할머니 모실 생각하다가는 지가 해야 될 일까지 안 해버리면 남한테 피해를 줍니다. 남한테 피해를 준다고요. 나이가 좀 들고, 이제 60이 좀 넘어가게 되면 본의 아니게 남한테 피해를 줘요. 기도 5분 동안 한 뒤에 가스 불을 꺼야지, 라고 했는데, 기도하다가 10분이 지나서 가스 불을 꺼가지고 다 타서 남편 밥도 못해주고 빵만 발라주고.
“뭐 한다고 그랬노?” “요새 내가 정신이 없다.” 정신이 없다고 한다고 해서 정신이 생깁니까? 냉장고에 다 넣어놨는데, 나중에 보니까 냉장고 문을 안 닫아서 다 녹아가지고 성에가 다 끼어 있는 그런 것. 이건 실생활에서 해 본 사람은 다 알아요. 살림 살아본 사람은 다 압니다. 사람이 한 가지 일만 하고 있어도 다른 일은 못하게 되어 있어요. 다른 일은 바보가 돼요. 바보가. 어설프게 된다고요.
근데 아까 두 번째가 뭐라고요? 인정이죠. 한 가지 일은 했는데 다른 일은 못하니까, 회사에서 인정받고 집구석에 들어왔는데, 아내한테는 인정 못 받는 거예요. 욕심이 한도 끝도 없어요. 인간이 뭐 도사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느냐 하면, 우리가 왜 자꾸 마귀한테 속아 넘어가느냐 하면, 처음 아담이, 죄 짓기 전에 아담과 죄 짓고 난 후에 아담의 차이점이, 다시 말해서 마귀한테 시험 들고 난 뒤에 아담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그걸 말씀을 통해서 보면 되는데, 자꾸 그걸 안 보고 자기가 스스로 착해지려고 하는 거예요.
자, 그러면 물어봅시다. 아담이 죄 짓고 난 뒤에 달라진 게 뭡니까? 바로 선과 악에 대해서 민감해졌다는 것. 선과 악에 대해서 민감해졌던 사람들이 예수님 당시에 많이 있었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 선과 악 가지고 굉장히 민감한 거예요. 그래서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남에게 비판하지 말라고 했죠. 왜 그렇습니까? 니나 잘하세요.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니가 비판받는다고 했잖아요.
흔히 교인들이나 성도들이 그런 실수가 많은데, 자꾸 전도한답시고 하는데요. 전도할 때는 반드시 비판을 앞장세워서 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 뒤에 뭐가 있느냐 하면, 개돼지한테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그쪽에서 요청하는 모습이 안 보일 때는 귀한 복음 전하지 마세요.
괜히 헛수고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복음을 너무 값싸게 파는 것이 돼요. 전도에 대해서 너무 초조해하지 마시라 이 말입니다. 남편이 교회 안 간다고 너무 초조해하지 마시고, 아내가 복음을 모른다고 해서 너무 초조해하지 마세요. 주께서 택한 백성은 때가 되면 궁금해서라도 물을 때가 있을 거예요. 자칫하면 우리가 그 사람을 평가하게 돼요. 평가할 때 선과 악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이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담이 범죄 한 이후에 뭐가 생겼다? 선과 악이 생겼죠. 그러면 선과 악에 대해서 4장에 보면, 거기에 가인은 누구의 자식입니까? 아담, 하와의 자식이죠. 누가 낳았어요? 아담, 하와가 낳았죠. 그럼 그 성격을 누구한테 그대로 인수받은 겁니까? 아담, 하와의 성격을 50퍼센트씩 DNA로 인수받은 겁니다.
그런데 아담 자체가 범죄하고 난 뒤에 악마의 지배를 받는다는 증거가 가인에게 그대로 주어진 거예요. 가인의 이름이 뜻이 뭐냐 하면 ‘얻었다’거든요. 누구로부터 얻었어요? 성경에 보면 “여호와로 말미암아”라고 되어 있죠. 하나님으로부터 자식 가인을 얻은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얻었는데 아담과 하와는 착각을 한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주셨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약속을 위해서 가인을 이 가정에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태어나게. 결과적으로 같아 보이지만 완전히 그 생각이 다르죠. 얻었다가 돼버리면 이게 소유가 돼버리고, 넣어주었다는 말은 뭐냐 하면 가인을 가지고 누구를 다룬다? 주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버리지 않고 계속 다루시는 거예요. 가인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죄를 짓는 것이 가인의 특징이 아니에요.
가인의 특징은, 가인이 동생을 죽일 때 자기가 죽이고 싶어서 죽였어요? 아니면 다른 외부세력이 들어왔습니까? 외부세력이 들어왔죠. 악이 덮쳤잖아요. 따라서 모든 인간은 악이 덮친 채로 행동한다. 그걸 바로 가인이 아담의 자식으로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상대하겠어요? 우리를 갖고 노는 악마와 상대하겠어요? 악마와 상대하죠.
그래서 주께서 이겼다, 승리했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것은 누굴 말하는 겁니까? 그동안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악마에 대해서 이 예수님이 이겼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알아서 빌빌 기어 나오면 되는 겁니까? 아니에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컵이라면 악마가 덮고 있잖아요. 악마가 덮고 있으면, 우리는 이동하지 않아요. 우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악마의 손가락을 싹 제키고, 주님의 손이 와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데려갑니다. 데려갈 때에 뭐가 달라지느냐 하면, 우리 인간은 안 달라져요. 안 달라지고, 우리를 위하여 적용되었던 주의 말씀이 실현됩니다. “내가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데리러 온다고 했잖아.”하면서 데려가죠. 그 데려가는 그 느낌을 두 글자로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주께서 하셨네요.” 그것도 슬로우비디오로 해야 돼요. 빨리 하면 안 되고. “주~께~서~하~셨~네~요~”라고 할 때, 우리 자신을 잊어버려요.
내가 하는 내 행위를 잊어버리게 돼요. 내 판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 판단을. 내가 쫓아가서 예수님 붙들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쫓아가면 테이프가 빨리 돌아가지만, 주님이 하시면, “주~~께~~서~~하~~셨~~네~~요~~”라고 테이프가 늘어났어요. “주~~께~~서~~가~져~~가~~셨~~네~~요~~” 완전히 충청도 말이라. “완전히 좋구먼유~ 기분 좋구먼유~ 주께서 일방적으로 다 하셨네유~” 주께서 다 하셨다 이 말이죠.
그런 입장에서 성경을 보게 되면 찬미와 감사밖에 안 나오죠. “주께서 하셨습니다.” 니가 고아고 다시 온다는 것을 억지로 믿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믿으라는 말이 아니고, 믿음은 결과에요. 아! 믿어지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악마가 시키는 대로 살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있어야 돼요. 악마의 손가락을 제키는 것은 주님 소관이지, 우리가 “악마야! 물러가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라고 하면 악마가 “요케요? 저케요? 이케 물러가면 되겠어요?”라고 약 올리죠.
“착하게 살아야 물러가지? 헌금 더 해야 물러간다. 전도 한 열 명씩 해야 물러간다. 기도 빡세게 해야 물러간다. 성경으로 도배를 다 하면 물러갈게.” 이런 식으로 놀리는 거예요. 근데 지금도 기도하고 난리라. 마귀 물러가라고. 마귀가 시켜서 그런 짓 하고 있는 거예요. 마귀가 시켜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마귀가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고, 성경말씀 보니까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진다고 해서 시키는 대로 한다는 거예요.
말씀은 주님께서 하셔서 성취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것이 말씀이에요. 내가 하지 못하고 주께서 하셨다는 것.
10분 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