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03b 울산강의-레위기 3장 : 화목제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기름부음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기름부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보통 인간과 또 다른 하나님 사이에 끼어들 수 있는 새로운 초월적인 인간 존재를 따로 마련하시고 그것을 사람들이 착안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화목제사라는 법 안에 그 요소를 담아두셨습니다. 담아둔 기름은 제단에서 불태워집니다. 피는 뿌려지고.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지정한 죽음에는 그 누구도 죽을 수 없다는 거예요. 베드로가 예수님 따라 갈 때, 어디로 가십니까? 내가 목숨 내놓겠습니다, 할 때 네 목숨 더럽다. 인간이 내놓은 목숨 더러워요. 안 받습니다. 여러분 순교하지 마세요. 괜히 고물 내놨다가 소용없는 짓하고 있어요.
신약에서 성령에 의해서 순교란 것은 죽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이미 챙겨서 버리는 의미죠. 새 차 주니까 헌 차 버릴 때 이웃이, “아까워라. 그 좋은 차를 버리다니.” 옆 사람은 내용을 몰라서 그렇지 자기는 기분 좋아서 버리는 거예요. 생명이 있기에 버리는 겁니다. 버리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버리는 게 아니에요. 들어온 생명이 기존의 목숨을 버리라고 촉구하고 버리도록 조치합니다. 그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에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건 주님께서 나한테 자꾸 나가라는 거예요. 갖다 버려, 갖다 버려, 갖다 버리란 말이야. 그래서 성도의 평생은 뭐냐 하면,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어디 가서 내 목숨 버리느냐? 그것 찾는 중이에요.
성경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지킵니까?
성경말씀은 어떻게 지키는 게 아니고 어떻게 지켜지느냐 하면
목숨을 버리는 식으로 모든 말씀을 적용시키게 되면
그것이 이미 우리가 생명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성경말씀 지키는 게 됩니다.
내 목숨을 버리는 쪽으로.
예를 들면 에베소서 5장에서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고 돼있죠. 그러면 술을 마시느냐, 안 마시느냐고 대번 이렇게 나가죠. 보통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술이 센지 소주 두 병 먹어도 안 취하니까 두 병까지는 됩니까? 취하지 말라 했으니까 안 취하는 정도로 먹어도 어떤 사람은 되고, 어떤 사람은 냄새만 맡아도 취하는 것 같아. 저처럼. 이런 사람은 술 먹은 사람 근처도 가지 말아야 되고.
어떻게 지킵니까? 하는데 성경말씀은 이렇게 됩니다. 술을 네가 먹고 싶어서 다 먹어도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에 합당한 게 된다는 겁니다. 왜? 죽으려고 술 마신 거니까. 성경말씀은 내가 살기 위해서 이 말씀 어떻게 지킵니까, 하는 것은 질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내가 죽으려면 어떤 말씀을 지키면 죽습니까, 하면 그 말씀 근처에 가지전에 이미 지킨 게 돼요. 이것 지키다가 죽으라는 말이구나. 그래서 술을 됫병으로 먹게 되면 옆 사람이, “너 그러다 죽는다.” “그래 나 죽어 마땅해.” 이게 예수님의 증인 되는 거예요. 오늘 이것 먹고 죽자. 말씀을 지킬 때 항상 죄인으로 나타납니다.
제단에서 기름을 태운다는 말은 기존의 혈육과 인간의 몸은 하나님께서 아예 안 받는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단에서 불에 타 죽고 죽음을 보여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가능하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 화목제물의 정체성이 이 죽음을 통해서 반대로 인간 쪽으로 덮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돼 있습니다.
내가 영생 줄 테니까 받을래, 말래 하는 식으로 주시는 게 아니고, “아버지, 여기 죽은 사람 하나 있는데요?” “생명 줘라.” 이런 방식으로 주시는 거예요. 우린 멀쩡히 살아있는데. 여기 죽은 사람 또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이미 저쪽을 죽은 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마음껏 성령의 충만이 계속 주어지는 거예요. 그것을 화목제물 드리면서 인간 쪽에서 확인하는 겁니다. “그래 나는 죽었어.”
제단에서 태우는 기름이 어디서 나온 겁니까? 제물에서 나오지요. 화목제물에서 제물의 용도가 여러 가지인데 서원하거나 자원할 때는 언제든지 드릴 수 있어요. 서원과 자원에 차이가 있어요. 서원은, 내가 반드시 이렇게 하겠다고 맹세하면서 드리는 것이고, 자원은 어떤 목표와 목적 없이 즐거워서 드리는 것입니다. 서원과 자원의 용도로 제물을 바칠 때는 암컷과 수컷이라는 기준은 없습니다. 암컷, 수컷 다 할 수 있어요.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화목제 이전에 번제, 속죄제, 속건제 거쳐서 왔기 때문에 여기선 일종에 파티, 앞에서 이미 제사를 통해서 인간의 죄 문제와 헌신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정리가 돼있기 때문에 서원하다, 자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발성,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유성에 의해서 뭔가 하고 싶다, 뭔가 되고 싶다는 것은 그런 마음이 네 속에 발생되었다는 겁니다. 이것 드릴 테니까 내 뜻대로 해주세요, 가 아니고 네가 하고 싶다는 생각마저도 사실은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해서 그런 마음을 일깨워준 거예요.
예를 들어서 공무원 하다가 때려치우고 촌에 들어가서 돼지 키운다. 그럴 때 돼지 키우면 수입이 얼만지 계산하고 자원하는 것, 이건 화목제 아닙니다. 원인이 자기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래요. 교회 나오는 교인들이 식당내고, 치킨 집 내고, 이발소 하고 할 때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하여튼 목사를 부릅니다. 가게 열었으니까 기도 좀 해달라고. 그게 어떻게 보면 성경에 나오는 자원제, 서원제 쯤 돼 보이는데 그건 아주 얍삽한 짓이에요. 차 샀다고 안수 기도해달라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건 자기 포부가 있어서 문제에요. 포부는 자기의 소망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자기가 죽은 게 아니고 살아도 너무 살았어. 펄펄 살았어.
자원제, 서원제는 뭐냐 하면, 공무원하다 촌에 가서 돼지 치면 전에는 주께서 공무원 일시키다가 이제는 돼지 키우는 일시키니 얼마나 감사한지. 그게 바로 자원제입니다. 돼지 키워서 얼마 남고 수출하고 이게 아니고. 전에는 공무원하다 죽이다가 이제는 남은여생을 돼지 키우다가 죽으라고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죽어도 괜찮으니까. 목숨 둘이면 귀찮잖아요. 하나를 버리는 쪽으로 나가는 거예요. 이미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꿀릴 것 없고, 두려울 것도 무서운 것도 없단 말이죠. 그러니까 갖다 버리는 거예요.
그게 번제였고, 그 다음에 소제, 속죄제, 속건제 되는 겁니다. 자원제, 서원제 드리는 이것이 주님이 구원해주신 결과로 하게 되면 제물에서 기름이 나오는 거죠. 그 기름을 드리게 되는데 그러면 다른 제물과의 차이는 뭐냐 하면, 화목제 드리면서 뭘 아울러 생각하느냐? 제사장 몫을 챙기고 그 다음에 너희도 먹어라. 이 말은 뭐냐? “나도 먹을게.” 하나님 자신도 먹는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파티라고 한 거예요. “내가 주는 음식을 너도 맛보게 해줄게.” 그 전에는 음식을 일반 제물을 화목제물 외에는 일체 맛을 볼 수 없어요. 드리게 되면 제사장이 먹었는데 제사장이 맛있는 것 그냥 먹는 게 아니에요. 제사 드리고 난 뒤에 먹게 돼있어요. 속건제나 속죄제.
그것이 응식, 하나님의 음식, 하나님의 식량이란 뜻이에요. 하나님이 먹는 음식의 맛을 동일한 미각으로 먹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런 걸 맛있게 잡수시는구나, 하면서 제사장이 먹었습니다. 그게 뭐냐? 숯불갈비, 불탄 것. 하나님은 죽음의 맛을 기쁘게 잡수시는 거예요. 죽음이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맛있게 먹질 않습니다. 이유가 뭐냐? 인간들이 살아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그렇게 우기는 것은 죄 때문에 착각하고 있거든요. 그 착각, 오류는 안 받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죽었다 치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안 받아요. 죽은 놈이 죽었다고 했다고 새로운 의미가 추가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내려준 흠 없는 아무 죄도 없는 내 아들이 흘린 그 몸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예요. 그걸 먹는 식으로 제사제도의 제물에 규칙으로 조항으로 집어넣은 겁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만 받는다. 또는 레위기 식으로 하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음식만 먹는다. 번제 같으면 숯불로 한 거죠. 하나님이 흠향하는 양식이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것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방식이 드는 제사 거제. 흔드는 제사 요제. 거제, 요제의 특징은 몽땅 다 제사장 몫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너희들은 손대지 마.
그런데 화목제를 드린 그 날 다 먹을 수 있었어요. 그러나 둘째 날, 셋째 날까지 음식을 남겨놓으면 안 됩니다. 그 의미가 있습니다. 화목제 안에 의미가 굉장히 많아요. 암수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파티 의미니까 제사 끝, 제사 완료됨, 그런 뜻이기 때문에 뭐든지 같이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암수 관계없어요. 다 식사용이니까.
그런데 화목제 제물은 7장 15절에 보면,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 희생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그러나 그 희생의 예물이 서원이나 자원의 예물이면 그 희생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그 희생의 고기가 제 삼 일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
18절에 “만일 그 화목제 희생의 고기를 제 삼 일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열납되지 않을 것이라 그린 자에게도 예물답지 못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죄를 당하리라”
그러니까 제사가 언제 끝나느냐 하면 먹은 것까지 제대로 먹어야 제사가 끝난다 이 말입니다. 이게 이런 뜻이 있어요. 그날에 먹는다는 말은, 성경에서 하루와 하루 사이에는 저녁이 끼어있습니다. 이 스케줄은 인간이 정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창조 원리원칙을 이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 가져가겠다는 겁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요, 둘째 날이요 이렇게 되잖아요. 첫째 날, 둘째 날이라 하는 것은 마지막 안식일의 완성까지는 그러한 절차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123456 이 시간은 안식, 또는 완성에 종속된 시간이에요. 123456 이렇게 된 것은 종속된 시간을 1과 2, 2에서 3 이걸 끊어줘야 돼요. 끊어줄 때 7일째 완성이 되지만 첫째 날 되고, 저녁이 되고 하는 이것이 바탕이 같은 원리로 깔려있습니다. 피조물은 일체 창조세계에 대해서 자기 하루치 밖으로 벗어날 권한이나 내일을 기대할 자격이 없어요. 오늘 창조에 인간이 개입하지 못하고, 내일, 모레 창조에 인간이 개입하지 못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완성과 연계돼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날 걱정은 그날에 족하니라. 하나님께서 창조만 한 것이 아니고 창조한 것을 이끄시는데 그 목적이 완성을 향하여 다 필요에 의해서 집결해서 끌어주고 있어요. 지금도 끌어주고 있어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분은 창조주밖에 일 안 합니다.
다른 사람은 일이라는 움직이는 벨트에 얹혀서 이동할 뿐이죠.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 직업을 선택한다, 배우자를 선택한다 하는데 사실은 선택한 게 아닙니다.
인간은 철이 없어 모르는데 주님께서 배우자 선택할 때 몇 명을 내미는 식이에요.
선 볼 때 보자마자 저쪽에서 날 잡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주어진 모든 것이 남들 보기에는 별로라고 하는데 그 사람한테는 저 여자 아니면 안 된다고 설치는 거예요.
모든 것이 짜인 각본대로 움직이는 거예요.
어느 것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무관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심지어 마귀의 활동까지.
피조물은 혼자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창조주와 관련돼 움직이게 돼있어요.
그런데 마귀는 창조주와 관련성을 극구 부인하고 너의 미래는 네가 하기 나름이라고 자꾸 우기는 겁니다.
과거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면 너의 미래는 찬란하게 펼쳐진다. 이런 식으로 학교에서 교육받아 온 거예요.
양육 받았고. 이번엔 제대로 하란 말이야, 라고 꾸중을 듣고.
공무원 시험 두 번 실패했는데 세 번째 됐다.
떨어졌을 때 기분과 세 번째 공무원 합격했을 때 기분이 전혀 달라요.
공무원만 되면 하늘을 날 것 같지요. 막상 돼보세요.
주어진 업무 때문에 이것 말고 개인 사업하면 안 될까?
합격 된지 육 개월도 안 돼서 공무원 월급 얼마 안 되는데 다른 것 해서 돈 벌면 안 되나.
그러지 말고 진득하니 붙어있으라고 이야기하고 그렇지요.
그런데 그 지점에 도달하지 않으면 미리 예상한 것은 전부 헛방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항상 이틀, 사흘을 예상하는데 막상 그때 되면 예상 못한 예상을 하게 돼요. 그래서 시간, 날짜는 끊어집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화목제에서 하루, 이틀, 사흘이라는 구분된 시간까지 화목제에 개입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거예요.
하루는 사건입니다.
하루치 산다는 것,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하루를 산다는 것은 주께서 하루치 사건을 일으킨 겁니다. 폭이 좁아요.
서원은 자기 목표가 있어요. 하루치를 늘입니다. 그럼 이틀이 돼요. 오늘 서원하지 않잖아요. 내일, 미래는 이렇게 하겠다고 서원해서 제사 드려요. 그러면 하루를 더 늘여줍니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에요. 그 다음에 사흘째 한다는 것은 김치냉장고입니다. 두고두고 먹어야지, 이것은 광야에서 용납되지 않습니다. 광야에서 만나가 딱 이틀 치만 허락됐어요. 평시에는 그날 먹어야 되고 안식일 앞에 두고서는 이틀 치 줘서 먹게 하고 그 외에는 없습니다.
철저하게 광야에서 양육 받는 것은 일용할 양식이에요.
하루만 살다가 죽으란 말이 아니고,
네가 사는 것은
너를 위해서 생명이 부지되고 있는 게 아니고
창조주를 위해서 오늘도 하루 꾸역꾸역
너의 원함과 상관없이 계속 살려가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하루하루 이어져가는 것은 우리의 소원입니까? 주님이 스스로 결정한 자기 목표와 목적을 위해서 우리가 원치 않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겁니다. 그걸 화목제 드리면서 그 취지를 사전에 파악하고 드려야 돼요. 그냥 시키는 대로 안 먹었습니다. 잘했지요. 이건 화목제와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지어 이야기해야 되는 겁니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는 게 아니에요.
레위기 3장을 다시 봅시다. 화목제물 머리에 안수하게 돼있습니다. 2절에.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누가 안수하느냐? 여기서 안수하는 것은 드리는 사람이 안수하게 돼있지요. 제사장은 잡는 건데. 여기서 내가 양에 안수한다. 이걸 요새 실습하려면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나 강아지 붙들고 하면 돼요. 그것도 사랑하는 강아지, 비실비실한 강아지 말고 침대에서 같이 자는 강아지에 안수하는 거예요. 안수하면서 나의 운명을 너한테 넘기니 네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그것은 주님께 맡겨진 나의 운명과 동일하다. 이렇게 안수하는 거예요.
안수한 제물을 제사장한테 가져가지요. 그러면 이 강아지 예쁘네. 하고 키워야지, 하는 게 아니고 제사장은 킬러지요. 죽인단 말이죠. 요새 힐링이라 하잖아요. 최고의 힐링은 킬링입니다. 내 정신을 치료해야 되겠다. 최고의 치료방법은 자기 생각 안 하는 게 최고에요. 내가 ○○하겠다는 생각을 안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려면 존재에서 사건으로 넘겨져야 돼요. 안수는 존재를 평생 붙들던 내가 드디어 주께서 일으킨 사건 속으로 나를 넘겨버린 겁니다.
정미소나 방앗간에 가면 파쇄기 있지요. 고추를 고춧가루 만들 때 고추를 집어넣으면 다 부셔지잖아요. 앞으론 그렇게 하지 말고 고추에 안수해서 파쇄해서 가루로 되어 나오는 걸 목격해보세요. 그 방앗간이 성막이에요. 그게 바로 제사입니다.
내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은, 내가 사건 속에 들어가면 그 사건의 주인공은 딱 한 분밖에 없어요. 예수님이지 더 이상 내가 주인공 되는 건 끝나 버립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이 굉장히 궁금한 게 있을 거예요. 교회 다닌 지 육 개월 뒤에 합니까, 일 년 뒤에 하면 됩니까? 이것은 제가 방금 이야기한 사건의 취지를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사건은 늘 터지게 돼있어요. 서원제나 자원제는 필요할 때마다 사건화 되어 나타나는 거죠.
그러면 오늘날 우리에게 언제 화목제 같은 취지가 일어납니까? 그것은 화목제다운 사건이 우리 인생에 일어납니다. 터지게 돼있어요. 소제도 번제도 마찬가지지만. 나라는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이다. 자식은 어떻고, 남편은 어떻고, 아내는 어떻고, 내 인생을 어떻게 살지, 라고 하다가 어느 순간 내 존재가 어떻게 되는 게 아니고 내가 지금 방앗간에 와 있잖아? 주님이 주도한 사건에 말려들었잖아. 하는 순간 그 사람은 화목제라는 기계에 걸려들어서 주님과 함께 돌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양식이 돼요. 주님의 산 제물이 됐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갖다 바치기만 했는데 산 제물이 되게 하시는 모든 과정과 절차는 주님에 의해서 그걸 사건화 시킵니다. 그렇게 되면 그게 만약에 2017년 2월 6일이라 합시다. 2월 6일에 이런 사건을 경험하게 되면, 2월 7일부터 3월 2일, 3일 걱정 하나도 안 됩니다. 왜냐? 이미 사건에 들어가기 때문에.
이때 되면 내일 일은 난 몰라요~, 돼요. 3월 3일에 곗돈 타는 것도 몰라요. 3월 10일에 새마을금고 적금만기 된 것도 몰라요. 그런데 만약에 2월 6일에 사건 됐다고 하는데 갑자기 3월 5일에 새마을금고 적금만기가 걱정이 된다면 그 날까지 안 죽은 나의 존재의 시간이 돼버려요. 그러면 사건 속에 들어가다가 발 빼고 존재의 바다에 다시 나온 게 됩니다. 곗돈 타고 3월 10일에 사건 해야지, 그렇게 되는 거예요. 사건이라는 게 인력으로 안 되는 겁니다.
제가 이런 예를 드는 것은 성도는 이런 사건이 수시로 터집니다. 예를 들어서 4월에 공무원 시험 치는 아들이 있는데 되면 좋겠는데 안 될 경우에 학원비 계속 대줘야 되나? 낙담해서 죽겠다고 이불 뒤집어쓰게 되면 가게라도 하나 차려줘야 되나? 또 됐다고 치면 원서를 서울로 내서 방을 얻어줘야 되는데 방값 걱정이 되고. 이런 걱정하는 것은 자기가 주도적인 존재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이 와서 사건이 되면 아들이 시험 되고 주께서 일으킨 사건이고, 떨어져도 사건이고. 그건 되고, 안 되고 발걸음 세시는 게 내가 아니라 공무원시험이 문제가 아니고 내일까지 내 딸이 목숨이 부지되는지 안 되는지 오늘밤에 잠자기 바쁜데 그건 내 선에서 떠난 일이 돼버려요. 만약에 내 선에서 떠난 일이 안 되면 범사에 감사가 안 됩니다. 걱정만 누적이 돼요. 수학에서 적분처럼 쌓이고 쌓여버려요.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까?
존재가 돼버리면 이렇게 돼요. 우리 딸 공무원시험 합격하면 그때 감사드릴게요.
그게 무슨 서원이고 자원입니까? 그렇게 되면 그 자식은 주님의 자식이 아니고
내 딸이 되면서 딸자식이란 나를 기쁘게 만드는 정신적인 양식이 돼요.
주님의 양식이 아니고 나를 위한 딸이 된다니까요.
나의 행복을 위해서 내 인생 보람을 채우기 위해서 존재하는 딸이 되니까
그 딸의 주인은 내가 되고 창조주도 아닌 내가 딸의 창조주 역할을 해버린단 말이죠.
그러니까 화목제 드리면서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사건화 되지 못하고 존재화 되어서 하나님, 서원제 드렸으니까 제 소원 뭔지 아시지요? 속히 이뤄주옵소서. 이런 식으로 제사 드릴 경우가 얼마나 많았겠어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하나님 앞에 시키는 대로 했다고 해서 은근히 자기 원하는 것을 알아서 채워주시면 좋겠다. 받은 게 있으면 주는 게 있어야지, 하면서 제사 드렸겠습니까.
제가 오늘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던가요? 하나님이 법을 주는 이유는 우리가 얼마나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기 때문에 죄를 발각시키기 위해서. 성경말씀을 자기 행복을 위해서 준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걸 다 지키고 우리는 못 지킨 죄인인 걸 깨닫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줬다고 전제를 깔았잖아요. 이제 좀 감이 오지요.
사람이 행동하게 되면 반드시 보상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그것은 여전히 존재 차원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화목제 드릴 테니까 복 주세요. 이런 건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내 말에 순종하면 복을 주겠다. 이렇게 돼있지요. 순종하고 안 하고는 본인이 검사하고 본인이 측정하고 본인이 심사하고 본인이 채점해요. 그런데 그 결과가 이스라엘 멸망이었습니다. 어디가 잘못됐는가? 바로 무서운 불 앞에서 살고자 한 게 문제였습니다. 존재를 불에 태우면 사건이 되거든요.
그럼 불에 태우려면 보일러실이나 사우나 들어가든지 해야 됩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십자가가 있잖아요. 성령께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알려주게 되면 우리가 까부는 것도 우리다움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처리해주십니다. 까불어봐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장가가고 사고팔고를 주께서 십자가 앞에서 모든 것이 제자리 뛰게 한 까불기, 촐랑대기가 돼버려요. 십자가를 위한 촐랑대기, 그것도 많이 촐랑대기, 정신없이 촐랑대기. 눈만 뜨면 오늘 계획은, 내일 계획은, 오늘 목표는, 내일 목표는, 오늘 이것 달성하기, 내일은 저것 달성하기. 눈만 뜨면 그 생각합니다. 밑바닥에는 화목제의 사건이 있는데 그걸 모르고 그 위에서 내가 잘되는 쪽으로 하나님과 협상에 나서고 타협에 나서죠.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마지막에 홍수가 난다 하지요. 그 이야기 들어보세요. 홍수에 나매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이 확연히 차이가 난다 하지요. 홍수가 언제 나지요? 오늘 강의 중에 제일 길게 뜸을 들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모습을 주시하고 있다는 말은, 항상 홍수를 전제로 하고 그 모습을 본다는 거예요. 그 모습이 바위 위에 있는지, 모래 위에 있는지 늘 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시간 요소를 빼라 했지요. 하나님께서 홍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은, 네가 어떻게 인생을 살든지 간에 홍수가 일어났다고 치고, 이것도 사건이거든요. 이건 하나님만 알고 있는 거예요. 그 홍수 사건에서 너는 어떻게 참여되고 있는지 보는 식으로 너의 촐랑대는 인생을 내가 두고 볼 거야.
고린도전서 3장에 하나님의 상급이야기 나올 때 그리스도 의로 짓지 않은 것은 다 불에 태운다 하지요. 우리 같으면 불에 태우지 말고 짓지 말라고 할 텐데 불에 태운다고 하시면서 계속 그걸 방치하시고 그냥 지켜보시잖아요. 그건 거기에 의미를 둔 게 아니라 그것을 불에 태움으로 반석의 위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목사님, 마지막 때에 그렇게 됩니까? 마지막 때에 그런 게 아니고 2050년까지 살아도 만약에 2월 6일에 그런 사건이 있었다면 걱정이 안 된다니까요. 그럼 2월 7일 되면 걱정 없네요. 2월 6일까지는 그래요. 2월 7일 돼서 아침에 눈을 떴잖아요. 또 촐랑대기 시작하는 겁니다. 오늘은 뭘 해야 되고, 또 촐랑대요.
촐랑대봤자 노을 지고 해 넘어가면 본의 아니게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티비 보다가 사망에 이릅니다. 잠이라는 사망에 이르면 의식을 잃어버리죠. 아침 여섯 시 쯤 되면 다시 깨납니다. 또 촐랑대고. 하루하루 그날 걱정은 그날 하도록 주께서 하루 단위로 끊어놓으신 거예요. 하루하루가 우리 보기에는 인생이지만 사건입니다. 그 사건과 사건의 구슬을 이으면 그게 주께서 만든 내 인생이 돼요. 주께서 인도하신 내 인생, 주께서 피 묻은 밧줄로 잡아당긴 내 인생. 내가 주님을 찾아가는 게 아니고.
그러면 어떻게 살까요? 그냥 사세요. 그냥. 어차피 내가 원해서 내가 결정한 것은 주께서 몇 가지 골라잡아 내민 거예요. 이것 할래? 이걸 할래? 울산에 사는 소시민에게 내일 3월 4일에 목성 위성 언제 만들 거야? 이런 계획 안 줍니다. 그건 미국 나사 기술자한테 주께서 맡긴 거예요. 사드 문제 어떻게? 사드 문제를 여기 사는 평범한 교사한데 그런 문제를 냅니까. 우리는 주께서 맡긴 일종의 주님의 서원제, 자원제가 되니까 맡겨진 대로 그냥 살면 돼요. 살면서 촐랑대고 까불면 돼요.
촐랑대고 까불다가 성령이 안 와서 사건화 안 되면 어떻게 해요? 사건화 안 되면 지옥 가는 것도 사건이니까 결국 사건화 돼요.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네가 죽는다는 자체가 이미 사건이 된 상태에서 우린 죽음이란 사건을 향하여 지금도 질주하고 있어요. 돌진하고 있어요. 머리 처박고 있어요. 브레이크 없는 벤츠 타고 시속 200킬로로 죽음을 향하여 다가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자기 연출에 몰입하다보니까 자기는 마치 50년 더 살고 미래가 더 살아야 될 시간이 남아있는 것처럼 착각하지요. 그러다 음주 운전하던 차에 받혀서 역주행하는 차에 받혀서 집안에 부모 자식 다 있는데 지는 먼저 하늘나라 가고. 그제야 사건이다, 이럴래요? 이번 사건은 불행한 사건이다. 인간에게 불행이란 말을 붙이지 마세요. 태어난 것 자체가 불행이에요. 오히려 구원받을 것만 다행이지 나머진 불행입니다.
오죽했으면 범사에 감사하라 했습니다. 우리는 바쳐야 될 제물입니다. 이 말은 늘 죽음으로 주 앞에 드려야 마땅한 죄 많은 제물이에요. 내 존재밖에 모르는 것을 화목제물 되신 주님께서 안 거둬도 되는데 거둬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모든 말씀을 다 지켰음을 알려주지요. 그러면 우리는 주님과의 간격이 그 순간에는 좁혀집니다. 같은 사건 안이니까.
그래서 갈라디아서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나니, 했지요.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세상은 내게서 못 박히고. 이게 뭐냐 하면, 그냥 나는 매일같이 그리스도 사건 안에 놓여있다. 내가 하는 것이 내 일로 보이나? 주님이 일으킨 사건이야. 이것이 바로 예수님 증거하라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겁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그렇다면 화목제물에서 어떤 말씀이 나오느냐 하면, 레위기 7장 21절에 보면, 부정한 사람은 화목제물을 먹을 수 없다고 돼있어요. “만일 누구든지 부정한 것 곧 사람의 부정이나 부정한 짐승이나 부정하고 가증한 아무 물건이든지 만지고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 희생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도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지라라”
자기 백성에서 끊어진다 했는데 다시 설명 드리겠습니다. 인간은 항상 육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로운 혈통을 그리스도와 연계해서 만들어냅니다. 이게 언약적 혈통인데 만약에 부정한 것을 먹으면 언약에서 끊어진다는 말입니다. 내 자식 아니란 뜻이에요.
그렇다면 이 말씀을 하려면 부정한 짓을 하지 말아야 하지요. 부정한 짓이다, 아니다. 이걸 누구한테 검사 받아야 되지요? 자기 행동의 최종 검사를 본인이 하잖아요. 부정한 인간이 자기 행동을 부정하다고 나쁘게 하던, 좋게 하던, 회개하던, 까불던 관계없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합니다. 인간은 화목제물을 드릴 수 없어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 다 죽었네요? 천만에 말씀. 인간은 뭘 해도 부정하다며? 부정하지 않은 사람이 있어요. 제사장들.
제사장은 사건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에요. 보통 사람은 농사지으면서 무슨 짓을 해도 자기 죄 알고 양 들고 와서 바치면 돼요. 그러나 제사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사장은 행동만 삐끗해도 즉사에요. 그냥 죽어요. 그 자체가 사건화 됐기 때문에.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사실은 다 죽어야 되는데 누구 때문에 사느냐 하면, 거룩한 제사장 나라에요. 제사장이 계속해서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줍니다. 아침저녁마다. 일 년 단위로 용서해줘요.
그렇게 용서해줄 것 같으면 부정한 자는 왜 있느냐? 오히려 반대로 제가 묻고 싶은 거예요. 이 말씀이 있어줘야 평소에 내가 하는 행동이 제사장 없어도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는 시건방진 생각을 안 하게 되는 거예요. 성경말씀을 보고 성경을 읽음으로써 나는 이제 예수 없이도 나름대로 의롭다는 소리를 안 하게 되는 거예요. 성경말씀을 듣고 복음을 알면 알수록 예수 외에는 이 세상에 귀한 분은 없네, 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사건화에서는 늘 유지돼야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사건을 사건화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것을 늘 생각하는 게 아니고 엉망진창, 엉망진창이라고 해서 자꾸 나쁘다고 생각하지 말고 막 살라고 해서 교도소 가는 것 생각하지 말고 그냥 내 중심으로 사는 것, 모든 걸 자기 좋으라고 사는 본성, 이게 막 사는 거예요. 기도를 해도 자기 좋으라고 하는 것이 막 사는 거고, 헌금을 해도 30배, 60배 은근히 기대하면서 하는, 내 가정 잘 되기 바라는 이게 막 사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막 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이제 화목제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결국 화목제는 주께서 파티를 열어서 내가 준 음식 먹어보니 맛있지? 맛있습니다. 사건 안에서 먹어보니 어때? 사건 되니 이렇게 맛있을 줄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것을 유지하는 게 화목제에요.
요한일서 4장 10절에 보면 화목제를 언급합니다. 신약성경 392페이지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라고 돼있지요. 이게 뭐냐? 그 뒤에 보면,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 됐다 했잖아요. 아들을 보냈다고 했잖아요. 화목제물 되려면 필수코스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게 아니요, 이것이 항상 전제돼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뿐이에요.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화목제물이 아니고 주님이 화목제물인 것을 주님의 취지가 이제는 우리의 취지가 되고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뜻이 되어서 매일같이 주님의 사건 안에 놓여 사는 그 감사를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