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강의

6강a-화목제a 17030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3. 7. 18:06
2017-03-07 15:17:42조회 : 8         
20170303a 울산강의-레위기 3장 : 화목제이름 : 한윤범 (IP:119.192.174.190)

20170303a 울산강의-레위기 3장 : 화목제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레위기 3장에 화목제라는 나옵니다. 제사가 무엇이냐 할 때 제일 먼저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제사를 드리는 그 자체가 자신이 제사를 드려도 소용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첫걸음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뭘 하라 하잖아요. 그 하라는 것에 말려들어서 하게 되면, 자기가 한 것이 하나님 앞에 전혀 영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첫 번째 계기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말씀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라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성경말씀을 또 따로 실시하거든요. 성경말씀을 두고 인간 쪽에도 실시하고 하나님께서도 성경말씀을 지켰을 때 서로 나온 결과를 대조를 해봐요. 그래서 한쪽은 버리고 한쪽은 채택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경말씀을 이룬 것은 채택이 되고 인간이 한 것은 채택되지 않아요.

 

그러면 성경말씀은 결국 우리한테 뭘 주느냐 하면, 우리가 버림받아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성경이 아예 없었더라면 우리는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하나님 거기 계세요. 추수해서 추수감사절 드리고 우리가 죄 지은 것 있으면 제물을 바칠 테니까 하나님께선 흠향하시고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 그리고 거기에 해당되는 방식이나 방법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우리가 정성을 다할 테니까 정성을 어떤 식으로 할 것인지는 우리한테 일임했으면 좋겠습니다. 정화수를 떠놓는다든지 신실한 양을 바친다든지 소를 바친다든지 인간들 사이에서 성의를 다했다는 어떤 방식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상대방을 감동시킬 방식이라면 하나님도 충분히 감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한 인간의 마음을 그냥 하나님 받으시면 될 텐데 그런 방식을 제치고 이것대로 하라고 법을 제시하면, 레위기 3장에서 화목제를 보게 된단 말이죠. 그러면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제사를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왜 다섯 가지로 나눠야 되는지 인간은 알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법은 인간들이 의논해서 만든 게 아니기 때문에. 신라 화백제도처럼 좋은 의견이 있거든 내놓아보세요. 이 정도 하면 신도 감동할 것이다. 이렇게 자기들이 생각해서 의논해서 만든 법령이 아니고 모세가 하나님 앞에 불려가서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지시대로 와버렸으니까 인간들의 생각은 여기에 전혀 들어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려는 레위기 3장에 화목제에 인간들의 생각이 조금도 들어있지 않아요.

 

이 말은 평소에 인간들의 마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안 받아준다는 선언, 또는 결정 그런 내용이 성경책 안에 담겨있는 겁니다.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예를 들어 내가 화목제 제사를 주는 것은, 너희들 마음에 들어있지 않은 의견을 여기에 담았으니까 네가 이것을 지켜봤자 하나님의 본 취지와 틀어진다는 거예요. 인간 쪽에서 만든 게 아니기 때문에.

 

화가가 그림을 그렸는데 자기가 그렸으면 여기에 소나무가 삐져나온 것은 이런 의미고, 태양을 그린 것은 이런 의미고. 자기가 그린 것이면 하나하나 의미를 담아서 설명할 텐데 남이 그린, 어디 강아지가 있는가? 내가 그런 소리 낸 것 아닙니다. 내 휴대폰 아니죠. 내가 한 게 아니라니까. 내가 그리지 않았으니까 모르지요. 내가 그린 그림 아니에요. 나는 그 의미를 모른다고 할 거란 말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안다고 자부했는데 막상 하나님 쪽에서 내려온 조건들을 보니까 그 조건들이 어디서부터 어떤 취지로 줬는지 알아야 그 조건에 맞춰서 이것 때문에 이것 했지요. 드리겠습니다, 라고 착착 합이 맞아서 드려야 되는데 하라는 것만 있고, 왜 이렇게 해야 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요.

 

예를 들면 레위기 3장 17절에 보면,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 모든 처소에서 대대로 영원한 규례니라”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고 돼있습니다. 이유 나옵니까? 이유가 안 나와 있어요. 피를 먹지 말라. 인간 쪽에선 왜요, 왜 먹으면 안 되는 돼요? 모른단 말이죠. 그 취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기름과 피를 안 먹었으니까 구원해주세요. 이건 엉터리지요.

 

디모데전서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돈 좀 사랑하면 어떻습니까? 왜 안 되는 데요? 이유를 몰라요. 그러면 돈을 사랑하지 말자. 이게 말이 되겠어요? 십 원짜리가 길에 떨어졌어요. 돈을 사랑하지 말자. 안 줍겠어요. 그럼 하나님께서 천 원짜리를 둡니다. 천 원 얼마나 한다고 돈을 사랑하지 않겠어. 1억짜리 수표 3장, 3억이 있어. 부도수표는 안 줍겠어요. 현찰 50억 놔둔다. 이건 남이 가져가면 안 돼. 내가 가져가서 주의 영광을 위해서 선교하는데 쓴다고 달랑 가져간단 말이죠. 왜 천 원짜리, 십 원짜리는 안 됩니까?

 

성경을 주신 이유는 네가 지킨 것으로 네가 구원되지 않는다. 네가 성경에 대해서 이 정도는 순종했다는 것으론 절대로 천국에 못 간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왜 성경 주십니까? 너 말고 다른 분이 다 지켰다. 누구 말입니까? 장차오실 분이 있어. 그럼 우리가 기다리겠습니다. 그냥 기다리면 안 돼. 네가 망한 상태에서 기다려야 돼. 그것은 죄인임을 인정하지 아니하면 메시아가 백 번 왔다 갔다 해도 의미 모릅니다.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언제 알았는가? 그들의 예수님께 맛있는 음식 대접할 때 안 게 아니에요. 그들의 바닥났을 때, 그들의 믿음이 몽땅 믿음이 아니라고 폭로될 때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그때가 멀쩡한 오빠가 죽을 때에요. 그때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님 왔을 때 멱살 쥐었습니다. “죽기 전에 오라고 제가 전갈 보냈어요, 안 보냈어요?” 보냈거든요. 그런데 죽고 난 뒤에 오게 되면 이제 와서 어쩌란 말입니까?

 

예수님 뜻은 그거에요. 네가 나한테 백날 대접해봐야 네가 진짜 나보다 더 사랑한 것 없어지면 멱살 쥘 수 있는 그런 본성이이미 네 속에 있느니라. 그것이 발각될 그때 믿음이 뭔지 처음으로 아는 겁니다


믿음이란 나와 무관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방식에 의해서 

아직 안 죽은 나도 주께서는 죽은 자로 간주하고 

옆에 계셔서 계속 살려내고 있다는 이 관계성

이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내가 만약에 멀쩡하게 살아있으면 우리는 어떤 버릇이 있느냐 하면 내 쪽에서 자꾸 다가가는 버릇이 있어요. 주님 조금만 기다리세요. 50미터, 40미터, 30미터 점점 접근해서 주님과 더 가까운 관계가 되려고 내 쪽에서 움직이게 돼요. [작은 권력]이란 제가 쓴 책 첫머리가 그런 게 나오지요. 태양이 멈춰있고 지구가 그 주위를 돈다 했지요. 별이 왔을 때 우리는 지구가 여기 있고 동방박사가 찾아온 것처럼 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고 주님이 영원토록 움직이지 않는 중심이었고 우리 인간들은 주님한테 끌려가듯이 뺑뺑 돌고 있었던 겁니다. 주님한테 끌려간 거예요.

 

우리는 늘 내가 내 행동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주님이 찾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주님이 밧줄로 주님 쪽으로 당기고 있다고 생각해야 돼요. 그 역할을 성령이 하십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예수님이 크게 보이고, 충만하지 않으면 잡음이 끼는 거예요. mbc 듣고 싶은데 채널을 잘못 맞추면 잡음 들리죠. 또렷하게 안 들리잖아요.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하면 온갖 게 다 걱정 근심으로 다가와요. 사드 배치문제, 중국이 롯데상품 불매 운동도 걱정근심이 되고 롯데와 관계없으면서도. 촛불집회, 태극기집회, 온갖 뉴스 보고 다 걱정되고. 별 게 다 걱정되잖아요. 젊은 사람들 돈 번다고 바쁜데 나이 육십 넘어서 퇴직한 사람들 맨날 뉴스 보면서 태극기가 이기나, 촛불이 이기는지 온갖 것 걱정되고. 할 일 없으니까.

 

화목제물의 취지를 나와 연계하지 말고 장차오실 메시아와 연결시켜야 돼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면 화목제물 안에 어떤 취지가 담겨있는가? 

우리는 제사 드려도 구원되지 못하는구나. 

오히려 제사 드림으로 말미암아 아직 발각되지 않은 죄가 발각되는구나, 

라는 것을 알고 죄인의 입장에서 화목제물의 뜻에 따라서 오실 메시아를 기다려야 될 입장에 있는 것이 

바로 화목제 제사를 받은 이스라엘의 처지입니다.

 

그림을 하나 그려보겠습니다. 시내 산이 있고 높이는 2206미터 정도. 이게 거룩한 곳과 지상에 있는 백성들과 분리가 돼있어요. 이것을 소속이라 합니다. 네가 지상에 소속돼 있느냐, 아니면 거룩한 곳에 소속돼 있느냐? 지금은 떨어져있지요. 고맙게도 거룩한 곳에 소속된 모세가 다리를 놓게 돼있습니다. 내려와요. 거룩한 곳에서 모세가 받은 율법, 계명이 모세와 같이 오게 되면 이스라엘 한 가운데 자리를 따로 마련해야 돼요. 이 중심자리가 성막, 성소가 있는 자리가 돼요. 위, 아래로 구분된 것이 모세가 내려옴으로 말미암아 평지에서 중심 공간과 주변 공간으로 분리가 되는 겁니다.

 

분리가 되면서 여기에 지키는 경비가 필요하지요. 이걸 레위지파가 합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레위기에서 레위지파가 경비를 선다는 말은, 하나님의 거룩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경계선상을 위해서 화목제, 속죄제, 번제가 들어있는 겁니다. 인간이 그냥 넘어오면 안 되고 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소제를 거쳐야 이 안에 있는 하나님과 소통이 되는 거예요. 연결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두 다리 있겠다, 차로 몇 분 안 걸리거든요. 그냥 걸어서 이 구역을 침범해서 가면,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하면 될 것 같은데 그게 안 된다는 거예요. 인간이 걸어서 가지 못한다는 말은, 인간이 성의를 다해서 만난다는 말은, 인간의 그 몸은 소용없다 이 말이에요. 주님 만나는 데 소용없어요. 소용없는 정도가 아니고 훼방하고 방해가 됩니다. 왜? 인간은 자기 육이 마지막 사랑의 대상입니다.

 

인간들이 가장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성경적으로 답변할 수 있어요. 그게 육이라고 답변 돼요. 그럼 네 육 말고 사랑하는 게 뭐냐? 자식입니다. 그게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청한 게 있지요. 그게 제사의 원형입니다. 양 바쳤습니까, 소 바쳤습니까? 사람 바쳤습니다. 이 말은 네가 진짜 네 자식을 좋아하면서 양 바쳐서 때울 생각 말라는 뜻입니다. 내 자식 지켜야 되는데 하나님 앞에 드리기는 싫고, 양이나 바쳐서 이것 먹고 떨어지세요. 이럴 수는 없단 말이죠. 그게 인간들이 천국에 오지 못하는 이유가 되는 거예요.

 

왜 내 자식을 사랑하느냐? 내 몸의 확대거든요. 내 몸을 잡아당겨 보세요. 인간의 불멸은 자식 생산에서 나오는 겁니다. 자식이 많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요새 생물학에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의 이론에 의하면 자신의 dna를 이미 다 할당하고 장렬하게 죽으면 되니까. 자식한테 자기 dna를 퍼뜨리고 죽으면 나는 자식 속에 살아있으니까.

 

생식세포 안에 염색체가 있고 염색체는 세포핵 안에 들어있습니다. 세포핵 안에서 이중 분열해서 생식세포는 두 번 분열로 끝나고 모든 체세포는 계속해서 어른 될 때까지 성장한다고 생물학에서는 그렇게 밝혀내고 있어요. 그 염색체를 뜯어보면 dna가 꼬여있어요. 복제가 준비돼있습니다. 복제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원판은 없다는 뜻이에요. 그저 베긴 걸 베끼고 베긴 걸 베끼는 겁니다. 그 최초의 dna, 과학은 찾아내지 못합니다. 기껏 찾아낸 게 원숭이? 아니에요.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담입니다. 아담의 dna니까 주님께선 뭘 보느냐 하면, 인간은 숫자로 단 한 명밖에 없어요. 한 명의 가지들, 한 명에서 새끼 친 거예요. 하나님께서 여러 명을 상대하는 게 아니고 딱 한 명이에요. 너 못 온다. 생명나무 못 따먹는다. 그렇게 상대하는 취지가 처음에 창세기 3장에서 아담에게 한 이야기가, 레위기에서는 모세한테 이야기하고, 모세가 알아들었던 창세기 이야기를 모세가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 속에 집어넣어버려요.

 

그럼 이스라엘 백성은, 아 그 이야기. 뭔 뜻인지 알겠습니다. 우리 조상 아담이 죄 지어서 우리도 죽게 되는 그 이야기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생명나무 따먹을 수 없다는 이야기죠, 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식적으로 알아들어도 그건 알아들은 게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추방시킨 인간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은 인간 구원하려고 온 게 아니에요.

 

여러분들 그런 경험 없겠지만, 어떤 남자 둘이 친구로 갑니다. 뒤에서 경찰이 따라오고 있어요. 경찰이 거기 서세요, 하고 호루라기 부니까 겁나서 둘 다 도망갔어요. 그런데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은 경찰이 자길 잡으러 온 줄 아는 거예요. 그런데 자길 잡으러 온 게 아니고 사기 친 친구를 잡으러 온 거예요.

 

하나님 말씀은 인간을 구원하러 온 게 아니고 말씀은 미래의 아담이 있어요. 지금 구닥다리 아담 말고 마지막 아담, 새 아담, 두 번째 아담, 그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구성하기 위해서 과거로부터 창세기, 레위기 이야기를 그분을 향하여 주신 거예요.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주신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오해하기를 말씀이 내가 새삼 지켜서 원한 맺힌 생명나무를 따먹는 방법으로 성경말씀 줬다고 엉뚱하게 인간들이 생각하는 거예요. 교회란 게 전부 오해덩어리에요. 거룩한 강단에 올라가지 마라. 거룩한 강단이라고 누가 지어냈습니까? 여기는 거룩한 성전이다. 그것 누가 지어낸 거예요? 전부 다 오햅니다. 마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복 받고 구원받고 기본적으로 이 땅에서 살면서 복을 받는 줄 사람들은 오해하는 거예요.

 

그 오해를 퍼뜨리는 교회가 크게 되는 이유가, 전부 다 똑같은 정신병자, 전부 다 착각 속에 있는 사람들이기에 착각적인 말을 해줘야 그 사람들의 설득이 되고 납득이 된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에 맞춰 설교하면 성령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그 교회에 가보면 그런 교회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횡 해요.

 

요즘 우리교회 수요일에 저와 제 아내 둘이서 예배드립니다. 오랫동안 생중계 본 사람 중에 눈치 챈 사람 있어요. 한 눈치 하는 광주에 계신 분은 교인 하나도 없지요 하고. 처음에 아무도 없을 때 평소처럼 한다는 게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연기력이 안 받쳐주니까. 한양대 연극영화과 정도 아니면 안 되거든요. 그것도 혼자 하는데 심지어 제 아내가 어디 가면 혼자 했거든요. 그게 편하고 이제 누가 올까 겁이 나는 거예요. 아무도 없으면 콤비 입어도 괜찮거든요. 아래위 따로따로 입고. 누가 오게 되면 차려 입고.

 

사람들이 레위기를 보면서도 인간의 육,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는 최후의 조건이 된다는 사실을 이해를 못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내가 행동해서 누굴 건져야 돼요? 나를 건져야 되잖아요. 그런데 주께서는 네 몸 필요 없다고 하니까 필요 없는데 말씀을 왜 줬습니까? 히브리서 10장 말씀처럼 네 몸 말고 주께서 따로 준비한 그 몸, 이렇게 되니까 그럼 날 구원할 것도 아닌데 성경 볼 이유가 없잖아요.

 

사람이 자기 일 같으면 관심 갖고 신경 쓸 텐데 이게 내가 지킬 말씀이 아니고 예수님이 지킬 말씀이라면, 그럼 나는? 나는 안 하련다. 나한테 이익이 안 돌아오는데 왜 하느냐. 주님께서 네가 이걸 지키고 난 뒤에 이익이고 손해고 논하지 말씀 자체 취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지킨다는 말은 성립이 안 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레위기 3장 17절에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고 하는 것, 라고 하는 그 이유를 모르는데 그 이유의 힌트가 나와요. 레위기 7장 11절부터 봅시다. 35절까지 화목제물에 대해서 언급해놨어요. 화목제물이 이중이에요. 3장 전체와 7장 11절에서 35절까지 화목제물입니다. 오늘 강의에서 다 할 겁니다.

 

레위기 7장 25절에 보면, “사람이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는 희생의 기름을 먹으면 그 먹는 자는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여러분, 뭔가 혈육이 중간에 끊어진다는 것은 위에서 내려오면서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끝부분이 단절됐다는 것은 막다른 골목이란 뜻이에요. 끊어진 것을 화목제물에서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는 취지를 알고 제사를 드릴 수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화목제물에서 제사 드리는 당사자마저 제사 드려서 구원되지 못할 인간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네가 드리는 제사가 오히려 너한테 호소하는 그걸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네가 받아들이겠느냐는 말입니다.

 

더 쉽게 말해서 결혼식 하는데 주례자가 말합니다. “이게 선언하노니, 신랑한테 묻습니다. 신랑은 이 여자를 몇 년 살고 버릴 겁니까?” 이렇게 묻는단 말이죠. “신부는 잘 들으세요. 이 남자를 몇 년 살고 갈라설 겁니까?” 그건 결혼식에서 할 소리가 아니지요. 그저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아플 때나 괴로울 때 이 남자를 버리지 않고, 이렇게 하잖아요. 부부 사이에서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고문입니다. 버릴 만하면 버려야지. 그건 지옥 같은 거죠. 버려야 될 시점에선 버려야지 왜 안 버리지 말라고 해요. 네가 전에 결혼식 할 때 안 버리겠다고 했잖아. 바로 그것이 이혼사유가 되는 거예요.

 

왜 이 화목제물을 예수님이 가져가야 될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백날 해봐라. 언젠가는 이 화목제물을 예수님이 가져가는 거예요. 로마서 3장에. 너희가 율법 지키는 것 외에 다른 코스를 준비해봤으니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사 너희로 하여금 믿는 자에게 의롭다함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게 화목제물 안에 들어있다는 생각으로 화목제를 볼 수 있느냐는 거예요. 그럼 사람들은 고집이 있어서 저는 그렇게 봤다고 하거든요. 그러면 화목제물 드리는 당사자가 화목제물을 통해서 보게 되면 나는 드려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취지로 드렸느냐 이 말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제사를 백날 드려봐야 가다가 제사가 하늘나라 가다가 거부당하고, 가다가 거부당해요. 제사장은 늘 죽습니다. 죽고 그 다음 차례 바통 넘겨봐야 또 실패하고 실패의 연속이에요. 실패의 연속이 예수님의 십자가까지 이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하지요.

 

지금까지 한 걸 간단하게 하면 이렇습니다. 인간들이 자기가 존재한다고 하니까 존재하는 인간의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라 명령, 또는 하지 말라는 법령이 주어집니다. 인간은 그 법령을 통해서 자기 존재로 돌아옵니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이 자기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존재가 진짜 살아있는 인정받는 존재라면 그것을 통해서 거룩한 곳에 들어올 수 있어야 되는데 레위인들이 하는 일이 뭡니까? 들어오지 말라 하거든요. 너희는 이곳까지 오고 성막에 들어오는 것은 레위인에게 넘겨야 돼요. 더 이상 못 들어와요.

 

이 말은 비존재입니다. 존재가 감히 들어올 수 없는 이 안에 영역을 설치한 거예요. 그 안에서 일하는 제사장은 살아 있잖아요. 존재하고 있잖아요. 레위인들 있잖아. 그 사람들은 왜 봐주는데? 그 사람들은 바로 기름과 피를 자기 몸에 범벅이 되게 만들어요. 오른쪽 귀뿌리, 오른쪽 발목, 오른쪽은 인간이 행하는 거예요. 옛날 사람들은 왼손잡이를 장애자로 봤어요. 왼손잡이는 안 좋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오른쪽을 치중하는 이유가, 나중에 예수님이 제사장이기 때문에 하나님 오른편에서 일하는 그것과 연계시키기 위해서 제사장 오른쪽에 피와 기름을 바릅니다.

 

이건 뭐냐 하면, 내 육을 위해서 내가 스스로 나를 구분하기 위해서 하는 일은 끝난 문제입니다. 이건 내 일이 아니올시다. 장차오실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일할 것을 우리는 그냥 미리 앞당겨서 피와 기름을 처발라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들은 거기에 해당사항이 없어요. 감히 죽어도 갈 수 없는 이 자리가 오히려 살아있다고 우기는 너희에게 생명을 주는 그 자리에 합류하면서 동행하고 있는 겁니다.

 

아까 요한복음 11장에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님한테 개기고 달려들고 원망한 것은 자기가 살았다고 여긴 거예요. 

죽은 건 오빠지 자긴 안 죽었다고 생각하거든요. 

반대로 뒤집어야 됩니다. 

오빠는 죽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이고 

마르다, 마리아는 아직 안 죽었기 때문에 죽어 있는 상태에요. 


예수님께서는 방향이 있어요. 죽은 자로 하여금 나사로처럼 산 자로 만드는 방향이 있는데 마르다, 마리아는 방향을 모르고 자기 존재 쪽으로 예수님과 손잡고 악수하고 주님 내 편 돼달라고 바짓가랑이 붙잡는 식이에요. 그게 마음에 안 드니까 원망하고 그런 거예요. 신앙이란 예수님과 같은 방향을 쳐다보는 거죠. 

사람이 죽어있다는 것은 예수님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 있지요. 어떤 제자가 예수님 따르려고 했는데, 요즘 같으면 그때 전화가 온 거예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요? 예수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데 장례 치루고 가겠습니다.” 예수님 하신 말씀이, “그래 네가 효자 노릇하고 빛과 소금 역할 해야 복음이 잘 전달되지.” 이런 이야기한 게 아니에요. 세상에 그렇게 섭섭한 말씀을 하실 수 없어요. 상상도 못했습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장례식 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장례식 할 사람 있잖아. 너는 죽은 자 속에 안 속하잖아요. 너는 나와 방향을 같이 한다는 말은, 산 자와 관계 맺었다면 왜 죽은 자를 신경 쓰고 하느냐 말이죠.

 

지난 수요일에 기도제목을 낸 게 뭐냐 하면, 사람에게 대우 받으려고 하지 말라. 인생을 살아가면서 마음속에 있는 모든 괴로움, 근심걱정 다 어디서 나온 겁니까? 남의 시선이 나를 주시하고 있어요. 그게 너무 힘들어요. 우리의 모든 행동은 남의 요구에 맞춰서 살아간다고 스트레스 받는 겁니다. 암 걸리고. 뭐 차키 차 안에 넣을 수도 있는 문제지. 내 찬데 니가 와. 자식이 농땡이 부릴 수도 있지, 뭐. 참 이게 안 되지요. 이게 참 힘들어요.

 

왜 남에게 의지하지 말라하냐 하면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존재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비존재를 의식해야 되는데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우리를 반기고 끌어당기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분은 없어. 이미 돌아가신 분이야, 라고 하신 분이 우리의 있음보다 더 확실하게 있는 분이거든요. 

우리의 있음이라 해봐야 집안이나 치우고 돈이나 벌 뿐이지 

그분은 우리한테 없는 분이지만 지금도 해와 달, 별을 운행하시고 우리 발걸음을 세시잖아요. 

우리 머리카락을 세시고 키를 한 자나 자라게 하시고 참새도 키우시고 들풀도 키우시잖아요.

 

여러분 들풀을 보면서 아빠, 저 들풀은 왜 저렇게 크는데? 의미가 뭐야? 그러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공부나 해라. 시험에 안 나오는 걸 왜 묻는데. 우리는 모르지요. 내가 있기 전에 해가 왜 있고 별은 왜 먼저 떠 있느냐? 별이 그 자리에 뜨는 이유를 아십니까? 우리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그러면서도 나름대로 잘 살았다고 우기는 겁니다. 빵점 맞았으면서 지는 지한테 백 점이라는 거예요. 주께서 시험문제 낼 때 제76번, 해와 달과 별이 존재하는 이유를 대라. 그건 풀 수가 없지요. 삼각함수, 미적분은 잘 풀어도 김정남 아니 김철이란 사람이 죽은 이유를 대라. 압니까?

 

모르는 게 있다는 말은 나한테 일어난 일에 대해서 우리가 몇 발자국 걸어가게 되면 모르는 것 천지라는 뜻이에요.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 만큼 살아왔습니다. 누가 살려줬게요?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신 겁니다. 우리는 누가 살려주신지 모르잖아요. 성령께서 밧줄로 꽁꽁 묶어서 잡아당기면 주님이 살려주고 있구나. 그것도 피 묻은 밧줄이죠. 주께서 계속 용서하시면서 살려주는 거예요. 그 용서하심을 분해해보니까 그 안에 화목제물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 화목제물이 레위기 3장과 7장에 있어요. 우린 지금 그걸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지키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성경 덮어도 그만이네요, 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지키는 이것을 우리가 앎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자기 증인되지 아니하고 주의 증인되도록 주께서 취하신 조치의 일환으로 거기에 가담하게 되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면 예수의 증인이 되리라는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은, 사실은 네 존재의 증인이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루하루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잖아요.

 

그래서 저는 여기서 이야기합니다. 제사법에서 시간 요소를 뺍시다. 그러면 제사법은 영원한 정지가 되는 겁니다. 이걸 수요일에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자성어로 ‘동작 그만’이죠. 천사 둘이 소돔과 고모라에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소돔과 고모라가 아무리 분주하게 움직여도 천사가 보기에는 동결된 동작들이에요. 뭘 해도 동작 그만이에요. <별에서 온 그대>란 드라마를 보면 남자주인공의 행동을 돋보이기 위해서 다른 동작들은 스톱이 되지요. 요새 카메라 기법에 그런 게 있잖아요. 주인공만 부각시키고 나머진 스톱시키는 게 있어요.

 

스톱워치처럼 시간 요소를 빼버리면 영원한 화목제가 됩니다. 그럼 우린 뭐냐? 제단에 불타는 화목제물 앞에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도, 축구를 하든 기차를 타든 영화를 보든 잠을 자든 일을 하든 농사를 짓든 간에 우린 스톱이 돼버려요. 그 자체가 화목제물과 아무 상관없는 그런 일들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방주 안에는 시간이 정지돼있지만 바깥에서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장가가고 사고팔고, 나름대로 되게 바빠요. 노아 입장에서는 그들의 아무리 분주하고 바빠도 동일한 속성이에요. 제자리 뛰기란 말이 있지요. 전혀 자기한테 보탬이 되지 못하고 그 안에 갇혀있는 모습이잖아요. 제자리에서 뛰는 거예요.

 

북에 물을 뿌리고 북을 쳐보세요. 그러면 물방울들은 북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할 뿐이죠.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은 해와 달, 별 아는 것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지 돈벌이하는 것밖에 없어요. 여러분이 여행을 가보세요. 백날 가봤자 같은 북 위에서 물방울 튀는 것밖에 안 돼요. 그리스 지중해 가서 햇빛과 하얀 지붕 구경해도 갈 곳이 없어요. 최백호가 불렀잖아요.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백날 다녀보세요. 갈 곳 없어요. 거기가 거기에요. 갇혀있는 겁니다. 시간이 동결된 거예요. 우리 인생이란 따로 자기 인생의 역사와 여정, 그거 의미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화목제는 우리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자칫하면 화목제 드리는 우리 이야기로 돌아오면 안 됩니다.

 

첫 번째 3장 3절을 봅시다. “그는 또 그 화목제의 희생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과 곧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과 콩팥과 함께 취할 것이요”

 

7장 30절도 봅시다. “여호와의 화제는 그 사람이 자기 손으로 가져올지니 곧 그 제물의 기름과 가슴을 가져올 것이요 제사장은 그 가슴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고”

 

제가 이렇게 의도적으로 이 대목을 찾으라 했는데 공통점이 있어요. 두 개의 단어, 기름이죠. 

화목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기름으로 표시하는 거예요. 

기름은 먹지 말라. 기름은 단 위에서 태워버려요. 

그러면 뭐냐 하면, 희생 짐승을 응축해버리는 겁니다. 

희생 가축과 예수 그리스도의 연관성에서 응축해서 뽑아내는 거예요. 

뽑아내면 기름이 나온다는 말이죠. 너희들이 눌러 봐. 기름 나오지? 

그런 뜻이 아니고 화목제물 누가 내리는 겁니까? 

하나님의 취지에 맞도록 거기에 특수한 단어를 삽입해서 지시했잖아요. 

하나님이 지정해준 단어가 가축 중에서 기름을 부각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 기름과 예수님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그것이 바로 히브리서 1장 9절에 보면, 신약성경 353페이지. 우리가 많이 알잖아요. 그리스도는 기름 부은 자라는 것, 왜 기름 부어야 되느냐? 우리는 모르죠. 그런데 성경에서 그걸 알려준다는 거죠.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기름의 의미가 뭐냐 하면, 동류보다 같은 인간이지만 인간보다 더 월등하게 튀게 했다. 차원을 달리 하셨다. 차원을 달리하게 되면 여타의 인간은 차원이 다른 기름 부은 자에 종속됩니다. 소속이 돼요. 이것은 장차오실 예수님을 가리켜요. 히브리서에서는 이미 오신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을 하나님께선 중보자로 보지요. 중보자는 하나님과 새로운 인간과 결합시키기 위해서 하나님 쪽에서 파견된 아들이 중보자에요.

 

제가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란 말을 의도적으로 안 합니다. 

하나님새롭게 만들어진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서 메시아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 같으면 모든 인간이 다 구원받아요.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다 죽여 버리고 

죽음 속에서 그리스도와 관련된 사람만 따로 뽑아내는 그 작업을 

화목제물에 담아서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