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02a 울산강의-레위기 1장 : 내재하는 외부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부터 레위기를 하겠습니다. 레위기를 할 때 출애굽기와의 차이성이 뭐냐? 그것부터 알고 있어야 되겠지요. 출애굽기에서 핵심이 있다면, 내가 누군지를 하나님 앞에서 발견하는 겁니다. 모세가 시내 산꼭대기가 올라갑니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꼭대기로 불러내십니다. 시내 산은 2281미터고 위치는 지금 어딘지 확실치 않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 위에 올라갔을 때 남성만 해도 오십만 되는 사람들이 어떤 상태냐 하면, 대기 상태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보시기에 네가 누군지 똑바로 알란 말이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알려주기를 너희는 거룩한 백성이라고 하거든요.
여기서 거룩한 백성이란 개인적으로 거룩하냐, 아니면 환경이 거룩하기 때문에 거룩한지 우리가 분별해야 돼요. 하나님께서 거룩한 백성이라 할 때는 개개인을 거룩하다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게 상당히 중요한 문제고, 복잡한 문제일 수 있는데 개인적인 자질이 우수해서 거룩한 백성으로 쳐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만들어준 환경이 있어요. 그 환경 안에 놓이게 되면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개인적인 노력 같은 것은 의미 없이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조성한 환경 자체가, 하나님은 여기 계시고 백성들은 대기해 있지요. 여러분이 알기 쉽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시내 산에 나타났고 백성들이 대기한 상태, 이것이 바로 거룩한 상태가 되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멋도 모르고 온 거예요. 자기들이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어요. 시내 산에 간다는 것도 하나님과 모세 둘 사이의 이야기지 백성들은 그냥 모세 따라왔을 뿐입니다. 와보니까 이러한 배치가 돼있고 이러한 무대가 형성돼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천국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거룩이다. 그런데 거룩을 누가 마련하느냐는 겁니다. 내가 바르게 살아서 마련할 것이냐, 착실하게 살아서 거룩을 마련할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어떤 환경 속에 집어넣어서 그 환경 속에 있는 자는 자동적으로 거룩해질 것이냐? 둘 중에 하나입니다. 내가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고, 헌금하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선교하고, 목사 말 듣고 교회 착실히 다니고, 성경공부하고, 이렇게 해서 거룩이 될 것 같으면 주님께서 시내 산까지 끌고 오지 않았습니다.
시내 산이 있어요. 가봐야 거룩하지 않습니다. 거룩이란 하나님께서 친히 장만해줘야 돼요. 그 무대를, 그 마당을 주께서 친히 마련해줘야 됩니다. 마련되면 그들은 거룩 속에 들어가는데 거룩 속에 들어갈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개개인은 죄인으로 바뀝니다. 이게 바로 거룩한 백성들이에요.
자녀들에게 아침에 도시락 싸주죠. 요새는 없지만. 옛날 우리 엄마는 도시락 열 개나 쌌어요. 삼촌들, 고모들, 자식들이 많아서 툇마루에 놔두면 큰 삼촌부터 하나씩 들고 가면 다 소비되는데, 예를 들어 부모가 자식에게 도시락 싸준다고 할 때 그 자식들은 들고 가서 먹으면 되겠죠. 그런데 그걸 엄마가 준비하는 거예요.
방금 제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물어봅시다. 어느 가정에서 자식이 도시락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 도시락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그 집의 엄마가 만들었겠지요. 그걸 주체라고 합니다. 도시락 만든 주체는 여기서 엄마가 되는 겁니다. 만약에 엄마 없는 집에 아빠가 도시락을 쌌다면 그 주체는 아빠가 되겠지요.
그러면 우리가 천국 가기 위해서 우리가 거룩한 사람 만드는 주체가 누가 될까요? 오늘 죽어도 낙원에 가려면, 거룩한 백성이 되려면, 도시락을 엄마나 아빠가 준비한다면 거룩은 누가 준비하느냐는 겁니다. 이게 주체문제입니다. 이방민족은 본인이 도시락을 준비해야 돼요. 이게 출애굽기 32장에 나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고 난 뒤에 40일 동안 깜깜 무소식이에요. 올라갈 때 도시락도 물 컵도 안 가져갔어요. 한두 시간 만에 내려올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40일이 되도 안 내려오니까 죽었다고 봐야지요.
죽었다 치고, 모세는 죽었어요. 출애굽기 32장에서 시내 밑에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자기들이 거룩의 도시락을 준비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자하심이란 백성들의 통일된 의견을 제시하기 위해서 금으로 자기가 아는 인자에 가장 가까운 형상을 만들어요. 송아지 형상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름 붙이기를 여호와라 하고 오늘은 여호와의 날이라고 여호와를 섬기는 축제를 벌였습니다. 어디에서? 시내 산 밑에서. 시내 산 위에선 아무 소식이 없어요.
그들이 송아지를 섬길 때 그냥 송아지를 섬기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분명히 그날이 여호와의 축제에요. 요새 같으면 여호와를 위해서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부흥회를 한 거예요. 이것이 스스로 구원받기 위해서 자기가 만들 수 있는 도시락의 한계입니다. 극치고, 전부에요. 그런데 하필 그때에 모세가 내려올 때 딱 맞아떨어진 거예요. 모세는 하나님의 언약을 같고 왔습니다. 돌 판을 약속이라 해서 언약 판이라고 하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는 거룩은 언약을 이루는 거예요. 백성들의 생각은 자기 쪽에서 거룩을 담을 도시락을 자기가 만드는 것, 모든 정성과 성의를 다하여 만든 그것이 거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둘 중에 누가 맞느냐는 거죠. 모세는 돌 판을 깨버렸습니다. 너희들이 하는 짓거리를 내가 올라가보니까 이건 완전히 말짱 가짜였다. 모세가 만약에 하나님과 독대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경건한 것은 다 집합했으니까, 가장 고상하고 거룩한 것은 다 모아놨으니까 하나님이 이 정도 성의를 봤으면 내칠 일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서울 안 가본 사람이 서울 가본 사람을 이긴다는 것. 직접 하나님 만나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숫자 많다고 우기는 거예요. 성의와 정성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섭섭지 않게 복을 주신다는 거예요. 그건 니 생각이고, 직접 독대를 해야 돼요. 모세가 이야기하는 것은 언약과 더불어 왔던 ‘돌 판+제사법’입니다. 돌 판이란 이것 하라, 하지 마라는 명령이죠. 제사법은 네가 했던 모든 것에 대해서 내가 일괄 되게 없애주겠다. 그 죄를 깔끔하게 삭제하겠다. 내 거룩을 걸고 없애주겠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내민 도시락을 집어던지는 그 작업과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모든 것을 거절하는 동시에 다른 방식으로 주님께서 준비한 도시락을 내미는 교체하는 현장이 제사하는 현장입니다.
이야기를 간단하게 가겠습니다. 모세가 없을 때 그들은 정성을 다하여 나름대로 거룩을 만들었지요. 그걸 버리지 말고 그대로 가져오라. 그 앞에 브랜드를 붙여야 돼요. 이것이 바로 죄다. 이것이 바로 거룩이 아닌 것의 절정이다. 그러니까 자기의 행동을 감추지 말고 이런 행동을 하지 말아야 돼, 하지 말고 그대로 가져오되 이런 짓거리가 죄입니다, 라고 가져오란 말이죠.
고물을 가져와야 새 것과 바꿔주지요. 엿을 그냥 줍니까? 신발 가져와야 엿 주잖아요. 주님이 준비하신 천국에 필요한 엿, 자칫하면 엿 같은 이야기인 줄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나름대로 새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가져와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바꿔치기 해야 돼요. 만약에 바꿔치기 안 하고 우리가 뭘 압니까? 그냥 주시옵소서. 이렇게 되면 기존에 있는 신발에 엿을 담는 게 되기 때문에 더러워서 못 먹어요. 내 것, 죄 내놓고 의로 바꿔치기 해야 됩니다. 주님께선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닙니다.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마태복음 9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지가 의인 되겠다고 고난주간 만들고 부족하다고 두드리고 금식했는데 진짜 창조주이신 주님은 사람으로 오셔서 고난기간에 자기 사람들과 함께 술 잡숫고 식사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보다 못해 참지 못한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우리와 같이 금식하는데 너희들 선생은 죄인들과 함께 술 잡수시냐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병든 자라여 내가 의사인 것을 눈이 떠져서 보이지 자칭 자기가 알아서 잘난 기분에 도취되어 그것으로 천국까지 이어보겠다는 자들이 언제 의사가 온 줄 알기나 하겠느냔 말이죠. 지 잘난 맛에 살아가는데, 지가 똑똑한 맛에 자기 경건한 맛에 자기 신앙 좋은 맛에 살아가는데.
내 신앙은 신앙도 아닙니다. 내 경건은 거지같습니다, 라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되 전혀 안 먹힌다는 것을 수긍한 사람만 주님을 모든 병을 고치시는 의사로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잘난 바리새인보다 못난 막달라 마리아를 받아주시는 주님, 그 원칙은 구약에 이미 밑그림을 다 깔아놨어요. 구약은 그냥 그림이에요. 얇은 판이에요. 신약은 까는 게 없고 수직적인 사다리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말씀 지키면 부자 되고 못 지키면 거지 된다는 말씀이 신약에 와서 서버리면 천국 간 사람이 부자고 지상에서 재벌도 하늘나라에서 보기에는 거지꼴이라는 겁니다. 수평으로 있던 이미지가 수직으로 서버리면 우리의 생명을 하늘에 있고 땅에선 이미 죽은 자로다. 골로새서 3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통으로 본다는 것은 구약에 평지로 돼있는 그림 안에 수직적인 신약이 어떤 식으로 무늬가 깔려있는지 채취하는 거예요. 무늬를 그려볼 수 있는 안목이 있을 때 성경을 통으로 보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키면 네가 장수하고 부자 되고 못 지키면 네가 거지 되고 졸지에 저주받아 죽는다고 돼있는 것이 구약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선 오히려 진짜 맞아죽었어요. 그리고 예수님은 가난하게 오셨잖아요.
이러한 판 속에서 인간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인간이 되기를 원하느냐에 대해서 구약은 테스트하는 환경으로 주신 것이고 그건 모형이고, 실제는 신약에 와서 예수님을 통해서 다 실체가 드러나는 겁니다.
늦게 오신 분이 있어서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거룩이냐, 아니면 거룩한 사람이냐? 이 문제를 이야기했어요. 거룩한 사람과 거룩이 달라요. 거룩은 관계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이 관계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시내 산꼭대기에 하나님이 오시지 않으면 거룩과 거룩한 사람 모두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들이었어요. 시내 산 밑에서 15개월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 동안의 기록이 레위기에요.
그전에는 거룩과 거룩한 사람의 등장을 이야기한 것이 출애굽기입니다. 출애굽기와 레위기 차이점을 이야기했지요. 출애굽기는 거룩한 사람이 생뚱맞게 등장한 것이고, 레위기는 거룩한 내용에 대해서 설명한 겁니다. 없는데 생긴 것이 거룩이고 레위기는 그 생긴 내용이 뭐냐를 들춰보는 거예요.
민수기는 뭐냐? 그 거룩에 합당치 않는 것을 잘라내는 작업, 숫자로 탈락시키는 작업을 하는 게 민수기입니다. 그 방법은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의 위력에 대해서 겁먹고 있는 사람들을 다 잘라내요. 특히 광야에서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나요. 우리가 물도 없고 고기도 없고 고생하고 죽겠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럼 돌아가라고 잘라내는 작업. 잘라내면 숫자가 줄잖아요. 그럼 숫자 다시 헤아려요. 그래서 숫자 세는 민수기에요.
누가 탈락했는가? 쉽게 말해서 누가 남은 자냐? 기준은 출애굽기에 기준이 왔어요. 거룩이 와서 거룩한 사람이 만들어지는가? 그건 레위기에서 소개할 거예요. 레위기는 제사에 대한 것이거든요. 제사가 들어가면 거룩이 구체화, 인격화 되면 거룩한 사람으로 전환이 됩니다. 그럼 이 사람들을 어디서 모집하는가? 죄인에서 모집해요. 이 말은
하나님의 의는 죄에서 나온 겁니다. 하나님의 천국은 지옥에서 나와요.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지옥 삶을 살면 돼요. 죄 지으면 되는 거예요. 자꾸 착해지려고 하지 마시고. 천국에선 착한 사람 한 사람도 못 들어갑니다. 천국에 간 사람 중에 착한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열두 제자? 그 사람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우리 가운데 누가 높은지 시합한 사람들이에요. 베드로는 배신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배신까지는 안 하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여분의 죄 지을 게 많이 남아있어요. 베드로가 지은 죄 수준까지 내려가지 않았으니까. 아직도 우리는 대단히 착한 사람에 해당됩니다. 써먹을 쿠폰이 많이 남아있다고 보시면 돼요.
없는 거룩이 생겼고 없는 거룩한 사람 등장하고, 이것이 출애굽기고. 레위기는 어떻게 죄인이 거룩한 사람으로 전환되는지 그 관계에 대해서 레위기에서는 제사법으로 그걸 바꾼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 아는 것 같지요? 맞아요. 이게 정답이에요. 결론인데 상세히 들어가면 죄인이 어떻게 거룩한 사람이 되는지 그 과정까지 아셔야 됩니다. 이런 순서, 이런 순서, 이런 순서, 땡, 드디어 거룩.
그림으로 그려볼까요? 어렵게 할 필요 없다고 생각되거든요. 어떤 사람이 죄졌다. 시커멓다고 봅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거룩하다. 하얗다고 보는 거예요. 그럼 그 사람을 데리고 어떤 장치 또는 시스템 속을 통과하는 겁니다. 이걸 주유소에 가면 있어요. 세차하는 것. 그냥 가만 앉아 계시면 둥그런 걸레가 돌고, 안에선 뭘 하는지 몰라, 물 붓고 세차하잖아요. 이 시스템이 레위기입니다. 그냥 가만있어서 통과했을 뿐인데 거룩한 백성이 생산되는 겁니다. 그럼 이 장치를 어떻게 꾸미느냐 하는 거예요. 현대건설에 부탁해야 되겠어요? 그 꾸미는 장치에 대해서 레위기에서 상세하게 잘 나왔습니다.
레위기의 전체적인 구조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레위기는 거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마지막에는 거룩한 사람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사람은 인격체거든요. 거룩을 인격체에 담으려면 처음부터 담는 게 아니고 거룩한 동물이 먼저 등장하고 사람으로 단계를 바뀌어서 나갑니다. 동물이 등장하는 것은 수소, 암소, 염소 종류도 괜찮고. 양 종류, 그리고 새 종류도 괜찮아요.
새 종류는 그냥 드리는 게 아니고 한 쌍, 두 마리를 잡아서 한 마리는 피 흘리고 죽고, 또 한 마리는 피 전혀 흘리지 않고 창공으로 훨훨 날아가 버립니다. 아무 거리낄 것 없이, 어떤 것도 구애받지 않고. 염소도 마찬가지에요. 한 마리는 죽고, 또 한 마리는 아사셀 양이라 해서 광야로 내보지요. 염소는 문둥병이 등장할 때.
그러면 이렇게 동물부터 출발했다면 나중에 사람 입장에서 가만있으면 안 되겠지요. 뭔가 마중 나오는 식으로 등장하는 사람이 문둥병자에요. 문둥병자는 사람 취급 받지 못했어요. 너는 나가 죽으라고 해서 공동체에서 추방시켜버렸습니다. 그 당시 공동체에서 추방시킨다는 말은 가장 끊기 힘든 것에서 나간다는.
인간 입장에서 가장 끊기 힘든 게 뭐냐 하면, 직장에서 잘리는 게 아니에요. 가족에서 잘리는 게 제일 힘들어요. 너는 내 아들, 내 딸 아니야. 오죽 했으면 그게 끊어지겠어요. 사람의 한계가 뭐냐 하면, 기어이 가족만큼은 자기가 끌어안는 것이 인간의 인정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내가 심지어 지옥 가는 한이 있더라도 딸이 지옥 간다면 천국 간 내 권리를 딸의 입장료로 바꿔치기할 정도로 엄마는 자식 사랑이 지극해요. 이건 혈육적인 관계입니다. 이건 인간의 힘으로 못 끊어내지요. 못 끊어내기 때문에 인간은 죄인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믿음 있다, 없다는 마지막 판정받은 테스트가 뭐냐 하면, 양을 천 마리 드린 게 아니에요. 기도를 40일 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원한 게 아니에요. 네 자식을 바쳐라. 그것도 그냥 자식이 아니에요. 사랑하는 자식입니다. 미워서 나가 죽든지 말든지 나는 몰라, 이런 자식이 아니고 네가 있음에 내가 살 이유가 있다고 하는 그 자식을 그것도 아버지 손으로 바치라 해요. 아버지 손으로 자식을 바치라는 것이 뭔 뜻이냐 하면, 인간이 이 땅에서 만들어지기 이전에 성부와 성자가 계셨잖아요. 물론 성령도 계시지만. 창조 이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관계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늘나라에 합류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죽어서 천국 간다고 하니까 그냥 막 들어가는 줄 알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알려면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돼요. 하나님의 심정도 모른 채 그 나라에 가도 심심해서 못 살아요. 당구장이 있습니까, 탁구장이 있습니까? 월드컵 예선전을 벌입니까? 거기 붉은 악마가 올 일이 없어요. 올림픽이 열립니까, 골프장이 있겠어요? 술집이 있어요, 노래방이 있습니까? 이 땅에서 재미나는 걸 기대했다간 자진해서 퇴학하고 싶을 거예요. 도저히 여기 있다가는 미칠 것 같아.
지옥에 다 있잖아요. 술친구, 노름친구, 바람 피웠던 여자도 거기 있고. 거기선 날 알아주거든요. 천국은 아무도 안 알아줘요. 예수님만 찬양 드리니까 자기는 홀대 받는 느낌 아닙니까. 주님만 쳐다보고 사는데 자기 쳐다보는 사람 없다니까요.
천국 가서 장가 한 번 더 가지. 그런 마지막 희망마저 주님께서 마태복음 22장에서 끝장내버려요. 천국에서 장가간다고? 천국엔 시집도 안 가고 장가도 안 간다. 그 이야기 듣고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놀랬어요. 무슨 낙으로 사노? 장가도 안 가고 시집도 안 가면 자식도 없을 것 아니냐? 사는 재미가 뭐냐?
결국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고 있는 것은 내 중심, 내 욕구 중심으로 통일적인 나의 세계관으로 천국을 만들려고 헛짓했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날 수 없어서 자꾸 천국을 나로 인하여 즐거운 행복을 아마 그대로 보장해주는 나라가 천국일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 사람은 창세전의 아버지와 아들의 마음을 몰라서 그래요. 우리가 태어나고 난 뒤에 엄마, 아빠, 형제가 있으니까 우리끼리 살게 되면 이게 천국이고, 행복이라고 생각했단 말이죠.
그것은 주님의 창세전의 의견과 전혀 달라요. 내가 여기 있음에 행복이잖아요. 지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첫째는 그냥 살아보자. 이유도 없어요. 살고 싶어요. 이유가 뭔데? 몰라요. 두 번째가 이왕 사는 것 잘 살아보자. 세 번째가 행복하게 잘 살아보자. 이 세 개 빼놓고 울산바닥에 사는 목적이 없잖아요. 교회 오는 목적이 전부 이것 때문에 그래요.
교회 왜 오느냐? 인생 만회하기 위해서. 뭔가 결핍된 걸 채워 보상 받기 위해서. 그건 본인만의 천국이에요. 육적인 천국이라니까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하늘나라 갈 수 없어요. 주께서 마련한 도시락은 영적 세계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던 사랑, 그 사랑을 알면 그 나라에 합류할 수 있고, 그 사랑 모르면 합류될 수 없어요.
그 사랑을 알려면 어떻게 하느냐? 이 세상에 어느 교회도 성부, 성자가 했던 사랑을 설치한 교회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하면, 기존에 나밖에 모르는 자기 위주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가져오는 거예요. 이건 고물이고 말도 안 되는 줄 아시고 그 다음에 교회에서 십자가 복음을 전하게 되면, 예수님의 사랑이 준비돼있어요. 그게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바치라는 그 사랑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잡아죽을 때 그것이 하나님이 아들 예수를 아낌없이 이 땅에 우리를 위해서 내보내신 사랑과 일치된 사랑이 돼요. 그게 바로 관계라는 겁니다. 관계는 우리가 어떻게 만들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이미 다 만들어놨어요.
제가 어릴 때 경산에 삼성동이 있어요. 외갓집인데 방학 때에 가게 되면 이모가 별명이 천심이라. 마음이 너무 착해요. 대구에 사는 조카들 오게 되면 온종일 놀다 저녁 쯤 되면 소나무 가지로 수제비를 만들어주면 그 냄새하며 그렇게 맛있어요. 우리가 수제비를 만든 게 아니에요. 이모다 다 만들어놨어요. 아직도 살아계십니다. 95세인가.
창세전에 아버지가 다 만들어놨어요. 창세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기로 이미 작정하셨고 아버지는 십자가 지도록 명령을 하셨고. 그 십자가 안에는 십계명이 다 들어있어요. 모든 율법, 모든 제사가 들어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일점일획이라도 어기는 사람은 지옥 불에 간다고 했거든요. 하나라도 어기지 않고 다 이루어야 돼요. 다 이루었다는 말은 이미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이야기가 다 끝난 상태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들의 한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산상설교를 함으로 말미암아 바리새인들을 기절초풍하게 만들었지요. 자기 딴에 최고로 앞장섰다고 나처럼 잘 지킨 사람이 있는지 보라고 으스대는 그 인간을 향하여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아무도 못 간다 하니까 이건 바리새인들이 큰일 날 판이에요. 어떤 분은 산상설교를 어떻게 지키느냐고 하는데 그건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인간은 지킬 수 없다고 분명히 하기 위해서 전시한 거예요.
어떤 분이 그런 질문을 하느냐 하면, 구하라 구할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이걸 어떻게 지킵니까? 자기는 성의대로 금요철야하고 두드려봤다는 겁니다. 그래서 뭘 구했냐고 하니까 이것저것 구했다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한테 좋은 것만 생각하지 하나님이 원하는 좋은 것은 예수님만 알지 다른 사람은 몰라요.
누가복음 11장 13절에 보면 나오지요. 좋은 것은 성령이 좋은 것이에요. 누가 고기를 달라는데 뱀을 주겠는가,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겠는가? 이 말은, 너희들이 기껏 구하는 것은 전갈이고, 뱀이고, 돌덩어리 달라고 한 거예요. 천국에 어울리지 않고 부합되지 않는 것, 그냥 이 땅에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잘 살고 행복한 것, 그런 것들만 실컷 구하고 두드리고 했지요. 이건 지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8장에 들어가면 문둥병자를 그냥 용서해버려요. 앞에서 산상설교에서 이야기한 것은 모든 인간은 문둥병자고 저주받은 자고 하나님의 진 밖에서 거룩한 백성 밖에서 문둥병자는 무조건 쫓아내야 돼요.
성경 하나 찾아봅시다. 출애굽기 4장 6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흰지라”
모세가 손을 자기 품에 넣었습니다. 품에 넣기 전에 멀쩡하지요. 멀쩡한 손을 분명히 확인하고 난 뒤에 어디에 넣느냐? 물속에, 시냇가 속에, 대수대야 속에? 아니에요. 멀쩡한 자기 품에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빼보니까 문둥병이에요. 문둥병은 저주받은 자의 표상입니다. 거룩한 진 밖으로 내놔야 될 인간이죠. 옛날에 문둥병은 주님의 저주받지 않으면 생기지 않을 병이에요.
모세가 자기 주제파악을 해야 됩니다. 남들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위에서 보면 문둥병 환자, 저주받은 자에요. 모세가 이스라엘 대표해서 그런 거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문둥병 환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주받는 이유를 몰라요. 그래서 일 년 뒤에 저주받아야 될 이유에 대해서 시내 산에서 십계명과 율법을 통해서 이래도 저주받을 자 아니야, 라고 엑스레이 찍듯이 CT촬영하듯이 단체로 촬영했어요.
모세 누나가 모세가 하나님의 종이 되는데 큰 공로자에요. 모세에겐 남자 형이 있어요. 누나가 있었는데 누나가 미리암이에요. 엄마가 모세 못 키운다고 갖다 버릴 때 끝까지 따라가서 갈대를 엮어서 역청을 발라서 나일 강에 띄었지요. 그때는 이름도 없었어요. 그때 애굽의 공주 아니었으면 그냥 죽었어요. 그때 누나가 가서 유모를 소개했지요. 그래서 친엄마가 유모로 해서 모세를 키우잖아요. 막장 드라마도 이런 드라마가 없어요. mbc 아침드라마보다 훨씬 더 재미있어요.
그 정도 공로라면 보상해야 될 텐데 모세가 흑인 여자와 결혼한다고 하니까 니 취향이 그것밖에 안 되냐? 그 한 마디 했다고. 그동안 누나가 그만큼 키워줬는데. 그리고 홍해 건널 때 여자 성가대 대장했어요. 그 정도로 했는데 저주받았어요. 문둥병자 됐어요.
그건 출애굽기는 가족의 틀을 벗어날래, 안 할래? 그걸 묻는 겁니다. 가족이란 육의 절정이에요. 아무리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자기 자식 아프면 하나님 앞에 삿대질 할 인간이 우리들입니다. 이 정도 성의 보였으면 됐지 더 이상 어쩌란 말입니까? 이 정도 하나님 섬기고 봉사하면 됐지, 더는 못합니다. 더 이상 어떻게 헌신하란 말입니까? 치려면 저를 치지 아무 죄 없는 갓난아이를 왜 치십니까?
제가 이런 이야기하니까 혹시 성경 보신 분들은 이런 장면이 기억납니까? 다윗과 밧세바와 관계해서 태어난 아기가 있지요. 이름도 없어요. 태어나자마자 시름시름 앓습니다. 다윗이 통곡하면서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잘못은 저한테 있는데 하나님은 저 얘를 죽입니까? 기도하면 응답받는다고요? 응답은커녕 그 얘는 죽었어요. 그때 비로소 다윗은 응답을 받았어요. 나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은 나를 치지 않고 내 대신 자식을 쳤구나. 이것이 시편 51편에 나오지요. 내 죄를 사하기 위해서 우슬초로 정결케 하시고,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셨지요. 내 몸에 난 가장 귀한 자식을 죽음으로써, 본인이 죽인 거예요, 내가 살았다. 그 증거로 주신 것이 밧세바가 낳은 자식을 여디디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뜻의 솔로몬이 태어납니다.
그래서 다윗에서 정실부인은 자기 죄를 품고 있는 밧세바입니다. 밧세바를 안으로 내밂으로써 내가 의인된 것은 주님의 약속이지 내가 아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나의 구원은 없었습니다.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지점에 와있습니다. 성경 어딜 봐도 처음부터 나 자신의 구원은 없습니다. 약속 사람의 구원, 이것만 성경에 있습니다. 창세전에 주께서 예정된 사람만 구원이지 혈육으로 얽힌 나의 구원은 없습니다. 그래서 나의 구원은 포기하시고 우리 안에서 살아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써의 나를 주께서는 구원하시는 겁니다.
나의 구원이라면 내 열심과 행함과 십일조, 선교하기, 봉사하기, 교회 충성하기, 청소하기, 이런 게 내가 만든 도시락이지만 예정된 사람의 구원은 오직 십자가 피만 있으면 돼요. 십자가 피+행함은 일체 없습니다. 피에 행함을 보탠다면 그건 피에 대한 모독이에요. 그건 은연중에 나의 구원을 못 버렸다는 성령이 안 왔다는 증거입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 옛사람은 뱀의 허물처럼 미련두지 말고 벌거벗어야 돼요. 우리 힘으로 우리 자신을 못 벗깁니다. 그런데 고마우신 우리 주님께서 매일같이 우리를 죽여주십니다. 죽을 때까지. 랍스타 뜯으면서 죽여주시고, 뷔페 먹으면서 죽여주시고, 지중해 크루즈 여행하면 죽여주시고, 경치 좋다고 죽여주시고, 울산 앞바다에서 낚시하면서 죽여주시고, 부동산 열 배 뛰게 하면서 죽여주시고, 아이 공부 대상 받게 하시면서 죽여주시고.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죽어가는 방향으로 바꿔치기, 껍데기를 벗기는 방향으로 죽여주시고. 어떤 분은 치매 걸려서 죽는 사람도 있고, 어떤 분은 멀쩡하게 까불다가 그 날 밤에 죽는 수도 있고. 죽는 방법은 주님이 알아서 죽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 할래요. 그렇게 하지 마세요. 어차피 껍데기는 주께서 알아서 처리하기 때문에 우리가 골라잡아서 죽을 때 이렇게 죽을래, 그렇게 하지 마세요. 자식들 애먹이고 죽든지, 유산 10억 있는데 자식들 자기들 것이라고 좋다고 까불다가 다 쓰고 죽던지 그건 주님 마음대로기 때문에.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내가 가야 될 고향으로 가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성령 받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특징입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어떤 죄를 짓고 과속하다 걸리시거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죽이는구나. 천국은 돈 사랑하지 말라고. 과속하다 걸린 게 돈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걸린다는 게 돈 문제거든요. 살아야 된다. 그 다음에 잘 살아야 된다. 두 번째 항목에 걸려서 그런 거예요.
그래서 죽이시는 것은 뭐냐 하면, 이 땅에서 우리가 자신의 허물, 껍데기가 어떤 죄로 층층이 죄들이 더덕더덕 붙어있기에 다른 것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십자가 피로만 구원되는지를 살아가면서 죽을 때까지 확인하시면 되는 겁니다. 다른 것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어떤 분이 십일조 문제로 질문하기에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십일조는 십 퍼센트를 내는 게 십일조가 아니고 나중에 레위기 할 때 하겠습니다만 민수기, 신명기에도 나와요. 그 약속의 땅에서 생산된 것은 그 몸까지 주님의 것이에요. 몽땅 다 드리고 90%를 되돌려 받는 거예요. 10% 차이나서 십일조라 하는 거예요.
다시 진도 나가봅시다. 여기 동물에서부터 사람으로 가는데 사람 취급 못 받는 것이 마중 나오지요. 동물과 문둥병자와 먼저 만나요. 문둥병자는 다른 말로 저주를 뒤집어쓴 사람인 거예요. 그런데 나쁜 짓해서 저주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저주를 위해서 저주받는 사람이에요. 이 말이 어려운데요. 문둥병은 약이 없습니다. 제사장은 폼으로 있느냐?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준 저주가 언제 그 저주가 축복으로 풀리는지 목격자 역할 하라고 제사장이 있는 겁니다. 제사장이 안수해서 병 낫는 게 아니에요. 문둥병은 사람이 개입해서 나을 병이 아니고 직접 하나님이 개입했어요.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 만나서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했지요. 레위기, 민수기 말이 맞습니다. 불쌍히 여겨줄 때 하나님 주신 저주가 하나님이 개입하셔야 그 저주가 풀리면서, 다른 말로 불쌍히 여김 받을 때 문둥병이 언제 없어졌지? 없어질 때 진 밖에 나갔던 사람이 진 안으로 들어오게 돼있어요. 그때 그냥 들어오는 게 아니고 새를 잡는 거예요. 하나는 죽어야 되고 하나는 공중으로 날려 보내고.
그걸 마태복음 8장에서 문둥병 낫게 하면서 예수님께서 그 제안을 한 거예요. 내가 공짜로 용서해줄 테니까 네가 누구 덕분인지 알라고 제시한 겁니다. 저주와 동물의 희생이 만날 때 이 장치가 뭐냐? 바로 제사장입니다. 제사장 안에서 이게 다뤄지지요. 그럼 제사장이 무슨 재주가 있어서 이 사람을 바꾸느냐, 그건 10분 뒤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