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22 12:38:27 조회 : 31
한 통속 170122 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한 통속(고린도후서 4:12-15)
음성 동영상
이근호
17-01-22 13:32
한 통속
2017년 1월 22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4:12-15
(4: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4:13) 기록한 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4: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4:15)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생명’이나 ‘죽음’이라는 말은 인간 사회에서는 빈번하게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주로 개인적인 문제나 개인 신상에 대해서 사람들은 주고 받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로울 ‘생명’과 ‘사망’이라는 단어를 섞어 넣는 이유는 ‘우리도 다시 살리사’라는 의미의 환경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즉 인간은 모두 죽어 있다는 겁니다. 살려고 노력하고 살았다고 말들 하지만 실은 몽땅 다 죽은 존재들입니다. 여기서 일반 사람과 예수님을 분리하십니다. ‘인간이 살았다’는 말은 할 수는 없고 오직 ‘예수님만 살아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누가 살고 누가 죽고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환경 조성이 성사되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생물체는 자기 사는 환경이 바뀌면 혼란을 느낍니다. 당황합니다. 예수님의 등장은 소위 인간들이 자신을 산 사람으로 간주한 그 삶의 생태계가 무너져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사람들 본인이 엄연히 살아있다고 자신만만한 그 환경이 실은 죽게 만드는 환경임을 알 때, 충격은 큽니다. 여기서 인간들은 강력하게 반발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들리지 않는 곳으로 도피하려고 합니다. 도망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태도와 행동을 통해서 두려움은 가중됩니다. 사람이 무서워하는 것은 본인이 진리의 자리에 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활고를 걱정하는 것은 진리가 아닌 자리에 서 있다는 표시가 됩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 어느 날 중풍병자를 침상에 누운 채로 병을 낫게 하려는 친구들이 등장합니다. 얼마나 다급하고 간절했든지 남의 집 지둥을 뚫고 병든 친구를 예수님 면전에 도달시켰습니다. 예수님은 그 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친구들이나 중풍병자가 본래 원했던 바가 아닙니다.
곧 “병을 낫겠다는 그 마음”조차도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만 자율적입니다. 그 외 모든 사람은 타율적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중풍병자를 이용하여 자신이 ‘죄 사함’을 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이신 것을 밝힙니다. 곧 벌써 심판을 시작하신 겁니다. 분류를 하고 계시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러한 주님의 일에 방해자로 활동합니다. 독자적인 자기 가치영역을 따로 챙기려고 합니다. 불교가 바로 그런 예 중의 하나입니다. 불교는 이타심을 주장합니다. 자신이 이익말고 남의 이익을 우선해야 한다는 겁니다. 남을 도와주되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말고 도와주라는 겁니다. 이것을 보시(普施)라고 합니다.
이런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자애심에서 나오는 보시는 공덕이 되고, 이 공덕이 쌓여서 자신의 운명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용서를 구하기 전에 이미 용서가 확정되어 있습니다. 이는 인간 자체가 곧 죽음의 혹들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창자에 돋아나있는 융털돌기와 같은 형국입니다.
인간의 토대는 독자적이지 않고 죽음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개별적인 죽음은 그저 ‘표면적 죽음’에 불과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죽음은 ‘전체적 죽음’입니다. 모든 인간이 이 ‘전체적 죽음’의 현상을 보여주는 표현체에 해당됩니다. 복음이 바로 이런 상황을 언약을 가지고 설명하십니다.
언약의 시작은 노아 언약부터입니다.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멋있게 보입니다. 모든 자들이 일괄적으로 물 속에 다 잠겨 죽게 될 때에는 방주라는 언약체 안에 있는 자들만 살았습니다. 하지만 다윗 언약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무엘하 12:20에 보면,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통하여 생긴 그 아이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 살려둘 줄을 알고 열심히, 그리고 간곡히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지없이 그 아이를 죽이십니다. 그리고 난 뒤에 나온 다윗의 반응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원하는 여자를 위해 그 여자의 남편까지 교묘하게 죽인 사람입니다.
즉 자신의 탐욕을 위해, 그 탐욕을 지키기 위해 뭐든지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가 찾아오고, 그리고 밧세바에서 난 아이가 죽고 난 뒤에 다윗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노아는 방주 만드는 일이 언약이라면 자신은 간음과 살인을 저지르는 이것이 곧 언약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친히 장만해주신 그 일괄적 죄로 통해서 통로로 빠지지 아니하면 생명이 보이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주신 생명은 ‘언약 속’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 속’은 언약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사랑하게 된 것은 자신만의 위해서 행동에 나선 자율적 판단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다윗으로 하여금 자꾸만 죄와 죽음 속으로 밀어 넣으신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언약 안’입니다. 새 언약이란 다윗언약의 완성입니다. 죄를 지어놓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해놓으시고 그 다음에 자기 백성에게 확인시키는 작업이 진행되는 환경이 곧 새언약입니다.
즉 다윗은 자신의 구원과 삶을 자신의 판단 하에 구축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살인이란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찾아온 겁니다. 오늘날 성도는 다윗보다 더 완성된 언약에 속해있습니다. 자신이 불신자로 태어나 불신자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불신자는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언약말고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상대하려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성도를 통해서 새삼스럽게 드러나게 되고 증거됩니다.
성도는 이미 용서받은 자이기에, “도대체 왜 나에게 용서가 사전에 필요한가”를 새롭게 이해하고 확인하는 세월을 보내는 자입니다. 히브리서 10:34에 보면, “동정하는 자가 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남을 동정하고자 하는 순간, 성도는 자기 안에 살인충동과 탐욕이 같이 작용하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어느새 동정 받는 자에 대해서 갑질하고 있는 주체자로 설치면서 절대적인 신이 되고 싶은 충동과 희열을 지울 길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새언약 속한 자만이 자신이 얼마나 불신자에 충실함을 압니다. 오늘날 예수님은 성도를 날마다 죽이십니다. 그것은 주님의 일에 돌출물로 등장해서 훼방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공통되는 저반 속에서 돌출된 그런 주의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20강-고후 4장 12-15절(한통속)1701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4장 12-15절입니다. 신약성경 289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4:12-15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기록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가운데 죽음, 사망이라는 말을 여기에 집어넣고, 생명이라는 말을 집어넣어서 이야기하는 이유는 방금 보았던 이 문장이 인간사회에서 써먹기 위한 언어가 아니고 그런 대화가 아니에요. 인간사회에서 사망, 생명을 자꾸 거론할 필요가 없거든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사망과 생명을 집어넣는 이유는, 14절에 보면,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생명과 죽음을 집어넣는 겁니다.
죽었다는 이야기에요. 다시 살리사, 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다 죽어 있다는 겁니다. 눈 오면 모든 것이 덮인 눈으로 통일되듯이 인간세상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어떤 역사적 상황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따지고 보면 다 사소한 일입니다. 진짜 중요한 일이 아니에요. 눈이 덮였다면 그 덮인 안에 있는 한 조각 낙엽 같은 그런 것들이에요.
전체적으로 모든 인간은 죽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죽음을 두 종류로 나눕니다.
하나는 표면적 죽음. 인간사회에서 개인적으로 죽어가는 그것, 볼록볼록 공동묘지를 만드는 그런 죽음은 개인적이고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죽음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복음,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비로소 정리된 이것은 전체적 죽음이에요. 모든 인간은 이미 다 죽어 있다는 겁니다.
죽어 있다고 일괄 설명을 해줘야 그 다음에 뭐가 성립되느냐 하면, 다시 살리사, 이것은 앞에 중요한 것이 더 붙어요. 예수님으로 인하여, 예수와 함께 다시 살리사.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일괄적으로 죽은 입장에서, 이미 죽어버린 입장에서 자기 자신의 개체에 대해서 너무 신경 쓰지 말라는 겁니다. 개인적인 모든 의미와 가치는 죽음 안에 다 묻어버리자는 거예요.
정말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하실 일에 관심이 있어야 됩니다. 이미 우리는 눈 밑에 있는 낙엽같이 이미 죽어 있습니다. 죽음 밑에 있으니까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어떤 일도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본인이 신경을 쓰지요.
본인이 신경 쓰지 주님은 거기에 신경 쓰는 바가 없어요.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그 레벨이 보통이 아닙니다. 사적인 인생 상담이나 해주려고 사도바울이 성경을 쓴 게 아니에요. 성경을 통해서 “이렇게 하시면 소원 들어줍니다.” 이렇게 된다면 그것은 점집이지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옛날에 있었던 기쁨이나 또는 개인적인 기쁨에 눈 돌리게 되면 그것은 복음이 주는 기쁨이 아니기에 허무로 끝나버려요. 주님께서 그것을 허무하게 끝내주는 것에 감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가려져 있던 진짜 기쁨을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방식이 그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실패하는 체험만큼 더 좋은 체험이 없다고 했어요. 인생에서 늘 실패하는 체험.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죽음과 사망을 토대로 해서 전체적인 죽음을 설명하면서, 그리고 전체죽음 가운데 ‘다시 살리사’를 끄집어 내는 그 논리방식, 그 사고방식을 우리는 그대로 따라가 주셔야 돼요.
오늘 본문 12절에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말 자체가 상당히 재미 있습니다. 내가 죽는 것이 아니고 사망이 나를 찾아온다는 겁니다. 우리는 날마다 나의 영역 안에서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것을 생물학에서는 ‘나만의 생태계’라고 하는 거예요. 환경이 바뀌면 생태계가 바뀌게 되고 생태계가 바뀌면 우리는 혼란을 일으키는 겁니다.
24시간 내가 나를 살리는 것만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고 사망이 나를 찾아오는 거예요. 꼭 저승사자같이. 이렇게 찾아오게 되면 여기서 우리의 본색이 드러납니다. 강력하게 우리 내부에서 반발을 일으킵니다. 예수님께서 다가오실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그 생각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발을 일으켰잖아요. 똑같은 겁니다.
괜찮은 우리가 살만해서 사는데 왜 우리의 모든 가치를 전면 부정하느냐? 이런 식으로 주님께서 들이대시니까 여기서 강력하게 밀어내는 거예요. 그런 현상을 우리 일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불교에서는 이렇게 가르쳐요. 모든 인간의 행동은 이타심으로 움직여야 된다. 이타심, 남에게 이익이 되도록 이타심으로 움직여야 된다.
그 이타심으로 하는 방법이 있어요. 불교는 행함이니까 방법이 있어요. 보시, 남에게 베풀어주되 대가없는 보시를 해야 된다. 보살들이 그 일을 해야 돼요. 대가없는 보시를 하게 되면 여기에 공덕이 쌓이는 겁니다. 공덕이 쌓이면 그 쌓인 공덕이 자기의 운명으로 정착이 되고 확정이 돼요. 이타심, 나 위주가 아니라 남 위주로 살고, 남을 도와주되 아무런 대가가 없이 그냥 도와주게 되면 그것이 공덕이 되고 그 공덕이 쌓여서 나의 확실한 운명, 해탈이라는 운명이 주어지는 것.
이런 방식이 많이 동감할 수밖에 없는 절차라고 느끼지 않습니까? 교회나 절이나 차이가 나지 않는구나. 하나의 예를 들면, 우리는 예수 믿는다. 예수님은 아무 대가없이 희생하고 사랑을 베풀었다. 따라서 사랑을 받은 우리도 대가없이 남에게 사랑을 베풀게 되면 그것이 구원받았다는 나의 속성이 정착되고 나는 영원한 천국에 들어간다.
이것과 차이가 납니까? 부처를 예수로 바꿨을 뿐 전혀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뭔가 빠졌지요? 그러니 불신자를 연구해야 돼요. 성도가 되어서 불신자를 연구해보면 그래서 그 불신자의 사고방식을 보게 되면, ‘아, 내가 성도라고는 하지만 실생활은 그냥 불신자를 유지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불신자생활을 하는 그 자체에 대해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말아야 돼요. 왜냐하면, 불신자라는 용어자체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얻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가 자신을 불신자라로 보겠습니까? 이 말은 머리 좀 써야 돼요.
최고의 선물은 뭐냐? 내가 불신자로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거예요. 이것보다 더 큰 선물은 없습니다.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무섭고 두려운 이유가 뭐냐? 진리스럽지 않게 때문에, 지금 말하는 이 순간이 진리답지 않다는 것을 말로는 표현하지 않지만 온 몸이 그것을 감지를 해요.
성도라 할지라도 이렇게 모이게 되면, “요새 생활 어떻습니까?” “어렵습니다. 밥 먹고 살기도 힘듭니다. 앞으로 한 달 뒤를 장담 못하겠습니다. 복음은 믿지만 돈도 다 떨어져 가고 사는 것이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할 때 내가 보기에는 무서움이 보이는 거예요.
무서움이 보인다는 것은 그 사람의 두 자리가 지금 진리에 안 섰다는 거예요. 진리에 섰으면 사도바울처럼 사망과 죽음에 대해서 자유롭게 언급을 할 수 있어야 돼요. 사망과 죽음, 예수가 우리를 살리시리라. 이런 것이 툭툭 나와야 되는데 그것은 그것이고 “직장 그만 둔지 벌써 3개월 되었습니다. 이제 쌀도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나온다는 말은 본인이 진리에서 벗어나 있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아요.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자꾸 다른 사람을 동정하려고 하는데 여러분, 동정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은 동정할 가치가 없어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몰라요. 우리는 동정할 권리도 없고 상대방이 나에게 동정 받을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에 대해서 우리가 남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몰라요. 마태복음 9장에 중풍병자를 친구들이 예수님 계신 곳에 지붕 뚫어서 침상채로 달아 내리지요. 새치기 한 거지요. 대기표도 안 뽑고. 나중에 지붕 다 물어줘야 돼요.
지붕 뚫고 내려와서 바로 예수님 앞에 데려왔습니다. 왜 침상채로 예수님 앞에 데려왔느냐 하면, 중풍병 낫기 위해서 온 거예요. 그들은 중풍병 낫기를 기대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하신 말씀이 “네 죄사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정말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면, 예수님 덕분에 중풍병 나아서 걸어갔다고 그 이야기가 나오면 안돼요. 내가 죄사함 받았다고 이야기해야 돼요.
무슨 말이냐 하면, 중풍병 낫기를 원했던 그것도 죄라는 사실을 예수님 만나고 처음 알았다는 거예요. 중풍병 낫는 것, 내가 예수님에게 어떤 도움을 받겠다는 그것도, 내가 열심히 주 앞에 순종하겠다는 그 마음가짐도 내가 누군지를 몰라서 나온 죄에 해당되는 것을 죄 사함 받고 난 뒤에 처음 안 거예요.
복음은요, 회개해서 용서받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의 피 믿고 용서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 뒤늦게 확인하는 겁니다. 내가 이런 짓을 해서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니고 진즉에 용서가 된 거예요. 진즉에 용서가 되었고 그것이 진리입니다.
우리는 용서가 안 된 상태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진리에 서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한테 도움을 요청하러 달려드는 거예요. 내 친구가 중풍병이 걸렸으니까 중풍병 낫게 해 달라고. 죄사함 받으려고 지붕 뚫은 것이 아닙니다. 죄사함 받으려고 지붕 뚫었으면 아마 대기순번표 받아서 줄 섰을 거예요.
지붕 뚫고 왔다는 것은 그만큼 급하다는 뜻입니다. 누구에게 급한가? 본인들에게 급해요. 본인 친구들에게 급하고.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는 전혀 몰라요. 자기 살길 밖에 없어요. 인간은 자기 사는 그 영역밖에 몰라요. 표면적죽음만 겁내고 있습니다. 전체적 죽음이 이미 실시된다는 것은 몰라요.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게 되면, “기록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12절에 보게 되면,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여기서 너희와 우리가 구분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원래 인간 대 인간은 서로 결합이 안돼요. 통합이 안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라는 것은 사도바울과 디모데를 말하고 너희라는 것은 이 편지를 받는 고린도교회를 이야기하거든요. 분명히 대화 할 때는 서로 다른데 내용상 보게 되면 우리나 너희가 다 한통속이에요. 오늘 설교제목처럼 한통속,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너와 나와 통합되려면 어떻게 하는가? 먼저 통합이 안 되는 이유를 찾아야 돼요. 통합이 안 되는 이유가, 나는 나대로 살고 너는 너대로 살고, 너는 너대로 살기 위해서 너에게 적당한 환경을 네가 따로 평생 조성했고, 나는 내가 살기 위해서 평생 내가 사는 환경을 조성한 거예요. 쉽게 해서 너는 농사짓고 나는 직장생활하고, 그런 뜻이에요.
나는 직장생활해서 월급타서 먹고 살고 너는 농사지어서 먹고 살고, 그런 거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둘이 통합이 안 되는 이유가,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고, 살고, 살고, 살고가 있기 때문에 통합이 안 되는데 주님께서는 전체적인 죽음을 통해서 한 죽음 안에 일괄적으로 만들어버리니까 ‘살고’가 완전히 무색해져 버렸어요.
사는 것이 어디 있어요? 누가 사는데? 아무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없어요. 이미 전부 다 죽어져 있는 거예요.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고, 가 아니에요. 너는 네 종교 믿고 나는 내 종교 믿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죽음의 혹입니다. 죽음의 융털돌기? 작은창자에 미세한 혹처럼 튀어나온 것들이 있어서 음식물에서 영양분을 뽑아낸답니다.
죽음의 표면이 요동치면서 매일같이 발작을 일으키는 거예요. 그 토대가 죽음이라는 판대기에요. 그런데 우리는 사는데 신경 쓰다 보니 내가 죽음이라는 토대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태어나서 따로 산다고 생각한 겁니다. 세상이 모든 것을 그렇게 가르쳤고 그렇게 양육 받았고 눈으로 확인해보니 다들 그런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창자에 튀어나온 돌기니까 그 전체의 토대를 이야기해 버린 겁니다. 피부에서 나온 혹처럼 너희들은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각자의 자리에서 표현해주기위해서 나는 그런 인생을 살고 너는 그런 인생을 사는 거예요.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은 죽음충동 그 사이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했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 최초의 범죄는 살인행위였어요.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데 사람 죽이는 것이 가인의 취미가 아니에요. 사람 못 죽여서 환장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자기 살기 바쁜 사람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악마라는 그 셰퍼드를 길어서 “물어, 쉭!” 하니까, 실제로 창세기 4장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는데 그 개가 문에 엎드려서, 그 셰퍼드가 와락 하고 가인의 등허리에 덮친 거예요.
가인이 등허리에 덮치니까 가인 마음에, 나는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아무리 많은 농사를 지어도 네가 내 눈앞에 있는 이상은 내가 못살겠다는 거예요. 이유를 물어봅시다. “엠비시에서 나왔는데 가인 인터뷰 됩니까? 동생이 있다는 것이 당신 사는데 왜 그렇게 힘이 듭니까? 세끼 밥이 있고 농사 잘 지어도 동생 살아 있는 한 왜 그렇게 힘듭니까?”
답변은 간단해요. 몰라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에 대해서 몰라요. 알 수가 없다니까요? 이걸 파고 판 학자도 있어요. 프로이트같은 사람도 있는데. 그냥 동생이 죽어야 되겠어요. 그래도 형인데 동생을 죽일 수가 있겠어요? 계속 참지요. 그러나 참는다는 것은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계속 기회를 다음으로 지연시키고 미룬다는 거예요.
결국 가인은 동생을 죽여야 되는 거예요. 이게 덮쳐짐의 성질인데 이 성질을 제가 광주강의에서 이야기했는데 이게 모든 인간에게 다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아담의 속성의 일부를 할당받았기에 그렇습니다. 하나의 아담의 속성, 아담의 속성은 다른 것이 아니고 악마의 속성이지요. 인간은 마귀의 속성의 일부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마귀의 속성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절대적 존재가 되는데 꼭 필요한 것이 뭐냐? 내가 너를 죽여야 되겠다는 거예요. 나 빼놓고 다 죽이고 싶은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게 되면 일단 일을 저지르고 봐요. 악마의 속성대로 저질러 놓고 그 다음에 거기에 뭐가 붙어오는가 하면, 거기에 선악판단체제가 뒤따라옵니다.
‘가만 있어봐. 내가 잘했나, 못했나? 세상에 동생을 내가 죽이다니. 이런 나쁜 놈이 다 있을까? 선악판단을 내가 적용을 시켜 보니까 나는 죽어 마땅하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산상설교라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을 예수님 앞에서 죄인으로 만드는 말씀이거든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죄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속에서 이유도 없이 그냥 미운 사람이 있어요. 이유를 끄집어내면 끄집어낼 수는 있어요. 그러나 보기만 해도 미운 사람이 있어요. 요즘 그런 사람이 있잖아요. 최순실이라고. 재판이 뭐가 필요하다고. 그냥 광장에 세워놓고 돌로 쳐 죽이지 특검이 뭐가 필요할까, 하는 생각이 들지요.
그러니까 이 시대상이 가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가인이에요. 그러면 저걸 죽였다고 칩시다. 최순실을 죽였다고 칩시다. 죽여 놓고 가만 생각하니 ‘내가 뭔데, 내가 뭔데 아무도 모르는 아줌마를 두고 촛불 들고 왜 나가는데?’ 진짜 죽였다고 칩시다. 돌을 던졌다고 칩시다.
그 다음에 ‘나는 돌로 칠 자격이 있나?’ 없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가 값도 안 되는데 과연 나쁜 짓을 했구나.’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뭐냐? “나는 죽어야 해.”라고 나오는 거예요. 남 죽여 놓고 자기도 죽어야 된다는 거예요. 인간은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죽음의 높낮이 안에서 매일 왔다 갔다 해요.
내가 죽어야 될 정도로 내 자신의 죄를 아니까 세상에 이런 희열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가 장렬하게 죽음으로서, 또는 예수를 위해서 순교함으로서 오는 그 희열, 그 희열의 주인공은 본인입니다. “내가 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나이다.” 베드로가 이야기했어요. 주님은 이야기하십니다. “네가 그럴 자격이 못된다. 너는 여전히 네 생각 하는구나. 예수님 생각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네가 보기에 이렇게 하는 것이 착한 일이다, 라고 생각하지? 그게 바로 죄다.” 그 말이지요.
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못된 짓을 해도 죽어야 되고, 착한 일을 해도 그것 역시 죽음이고, 죽음 사이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 해결책은 다윗이 보여줍니다. 사무엘하 12장 20절에 이런 대목이 나오는데 그 대목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대목만 봐서는 무슨 뜻이니 모릅니다.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 이 대목입니다. 목욕하고, 기름 바르고, 옷 갈아입고, 성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에 들어가서 맛있는 음식 먹고.
그러면 그 전에는 무슨 짓을 했느냐는 거지요. 그 전에는 몸 안 씻고, 기름 안 바르고, 옷도 안 갈아입고, 금식했고, 그런 일을 한 거예요. 그런 일을 왜 했는가? 우리아의 부인과 동침해서 낳은 아기가 살아 있었는데 그 애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해서 다윗이 “다 저 때문입니다. 내가 잘못했으니 아이의 생명 거두지 마시고 나를 봐서라도 살려주세요.”
금식해가면서 기도했는데 일주일 만에 애가 죽었어요. 죽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이렇게 깨닫게 했으니까 설마 내 죄를 보고 저 아이를 살려주겠지.’라고 은근히 기대하면서 금식했는데 기도해도 소용없었어요. 죽었어요. 죽고 난 뒤의 이야기가 아까 읽어드린 그 대목입니다.
헤헤거리면서 얼굴 말끔하게 씻고 정상생활로 돌아온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다윗은 여자 하나 얻기 위해서 어떤 남자를 죽였어요. 여자 하나를 얻는다는 것, 곧 자기의 쾌락을 얻기 위해서 그 여자와 동침을 한 것은 본인이 계산한 것이 아닙니다. 우발적인 거예요.
가인이 마치 아벨을 죽인 것처럼. 자기가 법에 어긋나는 것을 알아요. 밧세바의 남편이 우리아라는 것을 알아요. 알지만 자기 몸이 자기 몸이 아니에요. 그냥 끌린 겁니다. 끌렸으면 그 다음에는 “미안합니다.” 그래야 되는데 끝까지 자기의 기쁨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을 제거해버립니다.
지금 이 다윗의 모습을 다윗이라고 보지 말고 오늘날 우리 모습으로 보세요. 왜 주님께서 날마다 우리를 죽이느냐 하면, 우리는 날마다 살아서 하는 모든 것이 주의 일에 방해가 되기에 그런 겁니다. 날마다 죽이는 이유가 주님께서 그걸 제거하는 거예요. 다윗은 자기 기쁨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 여자와 살기 위해서 그 여인의 남편 우리아를 죽였습니다.
자기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죽인 거지요. 그런데 애가 태어나서 하나님이 용서한 줄로 알았다가 애까지 죽였을 때에 다윗은 거기서 느낀 점이 뭐냐? 이 모든 상황이 내가 원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나로 하여금 간음하게 하고 살인하게 하는 이것이 주께서 유발한 일이라는 말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이 다윗의 죄에 가담을 해줘야 돼요. 왜냐하면 다윗의 자손이 메시아기 때문에. 다윗의 자식이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이 죄안에서 태어나는 거예요. 다윗이 알게 된 것은 딱 하나입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가 의도한 일이 아니라는 것. 이 세상에 자율적인 분은 예수님밖에 없고 모든 인간은 타율적이라는 사실, 그 한 가지 알게 된 거예요.
이번 수련회에서 이야기했잖아요. 자기 일에 대해서 절대로 책임지지 말라고요. 자기 살아온 것에 대해서 본인이 책임지지 마세요.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다윗은 이 쪽의 평면적인 미로에서 도약하는 것, 이 육신의 세계에서 영적 세계로, 구원의 세계로 도약하는데 그 도약하는 방법, 하나님께서 죄의 맨홀을 만들어요.
하수구로 빠지는 어떤 맨홀을 만들어서 거기에 빠지게 만들었어요. 거기에 빠져보니까 비로소 내가 생각한 내가 잘못되게 구성된 생태계의 잘못된 나라는 것을 알았어요. 나는 남들이 사니까 나도 따라서 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이 이미 죽음으로 점령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몰랐어요.
표면적인 죽음만 연속으로 눈에 보이지 살아 있어도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죄 속에 안 들어가면 모르는 거예요. 죽음의 혹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다윗은 자기에게 살인이나 간음이 일어난 이유를 나중에는 알게 됩니다. 나단이 왔을 때 알게 되지요. 그게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겁니다.
루소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근대사회는 사회계약으로 되어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계약되어 있기에 하나님을 찾지 말고 인간끼리 서로 계약으로 해서 협동하게 되면 이상적인 나라를 건설하고 발달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 루소의 근대사상이 오늘날 전 세계 2백 4십여 개의 나라에 다 퍼졌습니다.
예외적인 나라는 한 나라도 없어요. 모든 나라는 다 공화국이에요. 극소수의 왕이 있는 나라 말고는 다 공화국인데 심지어 북한도 인민공화국이에요. 그런데 생각해 봅시다. 애가 태어나서 언제 사인했습니까? 사인한 적이 없어요. 인간은 인습과 기억과 습관에 의해서 그냥 하던 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이미 주어진 틀 속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못 빠져 나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생명이란 어디에 있는가? 생명은 다른 세계에 있어요. 예수님이 아버지와 맺었던 그 세계가 생명의 세계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기 때문에. 생명나무 못 따먹도록 차단했기 때문에 영생이란 우리 인간세계에는 없어요.
자기들끼리 사회계약을 하든 말든 영생은 없어요. 그냥 표면적죽음의 반복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그것이 이 땅에 들어올 때는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져요. 노아언약이 그런 겁니다. 다 홍수로 일반화시켜놓고 방주를 만들어서 그 방주에 탄 사람만 살게 하는 이것이 언약이에요.
방주 만든다 하면 굉장히 거창해 보입니다. 뚝딱뚝딱, 목수질을 해서 배를 만드니까. 그러나 다윗의 언약은 뭘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원치 않는 죄 속에 들어가야 됩니다. 죄 속에 들어가는 이것이 언약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새언약인데 이것은 들어갈 필요도 없어요.
이미 용서받은 상태로 다가오게 되면 이제는 우리가 뭘 해야 되는가가 아니라, 예수님의 용서가 그 결과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짊어졌던 그 죄 속에 우리가 이런 저런 식으로 놓여서 살고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나타내고 표현하는 그 일만 우리에게 추후적으로 주어질 뿐이에요. 그걸 새언약관계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 우리보고 뭘 하라고 요구한 적이 없어요. 주님께서 알아서 어떤 사람은 배제하고 어떤 사람은 포함시키지요.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가 나오거든요. 거기 11절에 보게 되면,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고 했어요.
기름 준비한 다섯 처녀는 신랑과 결혼했고 기름준비 못한 어리석은 처녀는 하는 이야기가 이겁니다. 이걸 가지고 문밖의 여자라고 합니다. 박강성이 부른 노래, 문밖에 있는 그대. 문밖의 여자라는 것은 개인의 역량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랑이 와서 일괄적으로 구획, 영역을 나눠버린 거예요.
‘문밖에 있는 그대’라는 가사에 이런 것이 있어요. “한 번 떠난 사랑은 내 마음에 없어요. 추억도 내겐 없어요.” 집에 가서 한 번 들어보세요. 한 번 떠난 사랑은 내 마음에 없고 추억도 내겐 없습니다. 네 추억, 네 교회 잘 다닌 추억이 내겐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타율적이기에.
성도의 입장에서 이걸 느끼게 되면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지 간에 하나님의 새언약, 주께서 짊어진 그 죄에 이미 매몰된 입장입니다. 이미 살 처분된 입장이에요. 우리가 한 마리의 오리라고 생각한다면 이미 흙으로 덮여 있어요. 3천 2백만 마리로 이미 덮여 있는 겁니다. 이 세상은 돔 같아요. 거대한 무덤, 네 무덤 내 무덤 할 것도 없이 다 같은 동일한 무덤 속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 무덤 속에서 무덤에 들어왔는지 아닌지를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요한계시록이 그걸 말해줍니다. 요한계시록을 보게 되면 거기서 뭘 느끼느냐 하면, 천사들의 냉혹한 공무집행 태도를 보게 됩니다. 천사들은 공무원들이에요. 냉정해요. 아주 비정합니다. 시킨 대로만 합니다. 그 태도를 우리가 받아야 돼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절대로 남을 동정하지 마세요. 로마서에 보면 동정하는 자가 되라고 한 것이 있지요. 그 말은 동정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왜? 우리는 청개구리니까. 예를 들어서 “주께서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해봐라 되나.” 그런 뜻이에요.
이미 용서가 확정된 입장에서 우리가 주님 앞에 반성을 하잖아요? 반성을 하면 할수록 느껴지는 것이 뭐냐 하면, 가인의 본성이 튀어나온 겁니다. 반성하면 할수록. “주여 잘못했습니다. 회개합니다.” 수련회에서도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남편이 예수 믿고 난 뒤에 아침에 성경 펴놓고 큐티하면서 ‘주여, 오늘도 이 말씀 앞에 반성합니다.’ 이러고 있는데 눈치도 없는 부인이 하는 말이 “여보! 리모컨 어디 뒀어?” “시끄럽다! 내가 지금 도닦는 것 안보이나?”
이게 바로 큐티를 해봐야만 느끼는 살인충동입니다. 큐티를 안 해보면 안 나타나는 살인충동입니다. 큐티를 해야만 나타나는 살인충동이에요. 우리는 매일같이 하수구, 죽음이라는 한 돔 안에서 너나 할 것이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가 되어서 사랑하자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나만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네가 내 앞에 존재한다는 겁니다.
네가 자식에 대해서 ‘부모한테 이정도 혜택을 입었으면 네가 나한테 그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지.’ 라는 생각이 든다는 말은, 네가 네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식이라면 언제든지 ‘하나님께 기도해서 너 죽일 수도 있어.’ 하는 그런 속내를 드러내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리입니다.
저는 그것을 죽음의 꽃밭이라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온 세상을 죽음을 피워내는 꽃밭으로 다 만들어놓았어요. 그 꽃이 피어나다 하나같이 다 죽음으로 변해버립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그런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 우리가 예수 믿고 이렇게 살기가 힘든데 어떻게 합니까?” “참새를 주께서 키우십니다. 그리고 들풀도 키우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의 경우에는 인간을 그냥 키우는 것이 아니에요.
참새는 날라 다니면 참새 몫은 다 한 거예요.
들풀은 그냥 피어나면 그 몫은 다한 거예요.
인간의 몫은 살아있는 것이 목적이 아니에요.
그 나라와 그 의를 뽑아내기 위해서 인간을 죽이는데 그냥 죽이지 않습니다.
그 나라 의를 뽑아내기 위해서
인간은 자기 죄를 알면서 그 죄 값으로 죽어가도록 주께서 작용하게 되면
하나님이 참새에게 작용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의미있는 일입니다.
그 의미를 성도만 누리게 되고 알게 되어 있어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라. 그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주께서 그렇게 다루지를 않습니다. 왜? 그것은 문밖의 여자니까. 맨 문만 두드리고 있어요. “열어주소서.” 안 열어줍니다. 주께서 그 경계를 쳐버렸으니까.
“주님이여! 그 기름을 나눠주면 안 되겠습니까? 제 친구가 저기 있습니다. 여고동창생이 지금 못 들어오고 있는데 제 기름을 나눠줘서 문 열어주면 안되겠습니까?” 이렇게 할 수 있는 권한이 문 안에 있는 여자에게는 없어요. 왜 그걸 모르는지. 우리가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여력이나 그런 능력자가 안 됩니다. 문 밖의 여자나 문 안의 여자가 똑같은 입장인데 주께서 타이밍 맞춰서 딱 들어온 거예요.
조금 늦었으면 우리도 계속 잘 뻔 했어요. 편지를 전하는 사도와 편지 보는 우리와 하나가 된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있던 그 관계, 그 언약관계에 의해서 예수님과 사도바울과 관계했어요. “아버지와 예수님의 언약관계가 그대로 물에 비치는 것처럼 예수님과 사도의 관계로 연장이 되고, 그 예수님과 사도의 관계처럼 똑같은 관계가 고린도교회 너희에게도 똑같이 있지?”라고 묻는 것이 오늘 본문 이야기에요.
“우리 둘 다 사망 안에서 역사하는 것이 맞지?” 이런 말이에요. “우리가 이렇게 죽어가도 괜찮아. 왜? 진리의 장소 안에 서 있기에 우리는 죽어도 괜찮아. 우리가 죽을 때 너희에게는 생명이 피어나는 것을 우리가 목격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용어사용 자체가 생태계가 “나는 어떻게 사느냐?” 그 생태계가 아니에요.
이미 진리의 안정성 속에서 ‘아, 우리가 원하는 것과 상관없이 이미 용서받았구나.’ 하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는 이런 활동을 계속 하는 겁니다. 서커스 하는 원숭이가 재주가 많지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참, 원숭이가 재주가 많다.’ 하는데 그것은 원숭이의 재주가 아닙니다. 원숭이를 훈련시킨 조련사의 재주지요.
우리가 보여주는 것은 남보다 더 뛰어난 성품, 착한 마음, 이게 아니에요. 우리를 이런 식으로 훈련시킨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의 솜씨를 드러내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다윗의 언약이라 하는 것은 다윗이 죄짓는 것이 언약이에요. 그런데 본인이 의도한 것이 아니고 본인은 그것을 감추려고 한 겁니다.
‘내가 착해야지. 왕인데 모범을 보여야지.’ 이렇게 착했는데 착해봤자 입니다. 기어이 다윗으로 하여금 밧세바와 간음하게 만들었어요. 아마 밧세바가 아니라면 다른 부인과 했을 거예요. 제 손에 장을 지집니다. 그리고 다윗은 반드시 살인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간음하게 하고 살인하게 하느냐 하면, 그게 사는 길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착각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것밖에 없어요. 자기가 책임질 죄 같으면 자기가 책임지고 나갈 겁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께서 성도 본인이 알아서 책임질 죄를 절대로 주지 않고 책임 못질 죄로 계속 밀어 넣고 몰아넣습니다.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네가 언제까지 네 죄에 대해서 책임질래?” 막 밀어붙여요.
나중에 “내 죄에 대해서 책임 못 지겠습니다.” “진즉 그러지. 진즉에 그렇게 나왔으면 네 인생 편하고 안 좋았겠나?” ‘주여, 나쁜 짓 한 것을 회개하고 반성합니다.’라는 마귀적인 공덕을 쌓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미래라는 것이 없어요. 우리에게는 운명이라는 것이 없어요. 우리는 타율적입니다. 우리는 자율적 존재가 아니에요.
제가 새벽에 운동하는 코스가 있는데 돼지 대가리가 놓여 있는 거예요. 돼지대가리 놓인 것은 평소에 여러 번 봤는데 과일도 있어요. 배가 네 개, 사과와 대추와 밤도 있어요. 마침, 그걸 성경의 용어로 순적하게, 순적하게 마침 비닐봉지가 옆에 있었어요. 거기에 담아서 돌아서다 보니까 돼지 입에 돈이 꽂혀 있는 거예요.
돈을 빼는데 날이 추워서 이게 안 빠지는 거예요. 돼지가 입을 꽉 다물고 있는데 기어이 뺐어요. 많지는 않고 천원인데 한 푼이라도 아껴야지요. 놓치면 안 되잖아요. 이걸 빼내면서 생각하기를, 도대체 이 고사를 지낸 인간은 무엇을 지키려고 했느냐는 거지요. 무엇을 지키려고? 자기 나와바리 아닙니까? 자기 살 길 찾기 위해서 한 거잖아요.
이렇게 신에게 드림으로서 뭔가 보상을 받겠다는 것, 이것이 바로 마귀가 만든 종교, 마귀의 언약입니다. 마귀가 심어준 약속, 언약이에요. 예수님 빼놓고, 십자가 빼놓고, 십자가를 우회해서 신과 직접 거래하고, 직접 통하고, 직접 흥정하겠다는 생각이에요. 그런 사람은 예수, 십자가, 백날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습니다.
“예수 믿어줄게.”라고 해요. “예수의 피 믿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예수 피 믿고, 예수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 아무도 없어요. 예수 피 믿고, 예수 믿어준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알 때 그 사람은 이미 새언약속에 들어온 사람이에요. 그래서 전도서속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인생 고민하지 마라. 공부해도 소용없고 공부 안해도 소용없고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라. 재미있게 살고, 멋있게 살고, 신나게 살아라. 어차피 세상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기 때문에.”
자꾸 추억과 과거를 들먹이지 마세요. 한번 떠난 사랑은 내 마음에 없어요. 문 밖에서 두드려도 소용없습니다. 자기인생에 책임지지 마시고. 우리는 돌아서면 또 자기 살길 위주로 해서 싫은 사람 죽이고, 죽였다고 또 회개하고, 이런 짓거리를 하는 그 인간자체를 주께서 매일같이 죽여 버립니다.
왜? 주의 새언약에 방해되기 때문에. “여기 또 먼지 하나 끼었네.”하고 그냥 지워버립니다. 그냥 살려주는데 그 근거가 뭐냐? 십자가의 용서에 준해서 살려주는 겁니다. 여러분, 성경 보면서 우리가 이런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앙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종교 티를 냈습니다. 이 정도까지 낮아지고, 희생하고, 경건하고, 순수하면 주께서 알아줄 줄 알았습니다. 그게 죄라는 사실을 우리가 몰랐습니다. 주여, 다윗을 본받게 하여 주옵소서. 꼭 죄 짓지 않더라도 하루하루 우리는 미운 사람, 저주하고 싶은 사람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주일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린도후서22강-무너질 집(고후5;1-3) 170205 이근호 (0) | 2017.02.06 |
---|---|
고린도후서21강-잠간과 영원함(고후4;16-18) 170129 이근호 (0) | 2017.01.30 |
고린도후서19강-예수 죽인 것(고후4;10-11) 170115 이근호 (0) | 2017.01.15 |
고린도후서18강-보배와 질그릇(고후4;7-9) 170108 이근호 (0) | 2017.01.15 |
고린도후서17강-어두움과 빛(고후4;6) 170101 이근호 (0) | 2017.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