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고린도후서21강-잠간과 영원함(고후4;16-18) 17012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7. 1. 30. 10:48
2017-01-29 12:36:17조회 : 64         
   잠간과 영원함 170129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잠간과 영원함(고린도후서 4: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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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7-01-29 13:17 

잠간과 영원함 

2017년 1월 29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4:16-18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4: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이 세상에 대한 실망감은 꼭 성도가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 모든 인류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굴욕감을 감수하고서라도 교회나 여타의 종교를 찾습니다. 쉽게 말해서 “살고 보자”는 겁니다. 죽어서도 살고 보겠다는 겁니다. 이 땅의 삶이 비록 지저분하더라도 내세에서는 품위를 유지하면서 살고 싶다는 여망을 드러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접하면서 사람들은 이런 오해가 정당화하기 십상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라는 말만 들어도 자신이 그 세례에 합류할 것 같은 생각을 갖기 마련입니다. 즉 “나는 내세의 존재를 인정 한다”는 주장만 내세워도 하나님께서 “너는 내세가 있음을 인정했기에 좋은 내세를 넣어줄게”라고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같은 느낌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인간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관성 있게 복음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의 일관성에 부합되는 내용입니다. 복음이란 바로 ‘우리 자신이 잘되는 것이 내용’이 아니라 ‘아들’ 곧 예수님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람들의 종교습관은 예수님을 상대하기 보다는 예수님보다 더 높다고 여기는 하나님과 직접 상대하고파 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태도는 평소의 행동에서 나온 겁니다. 인간들의 평소의 행동은 전부 ‘자기 이름을 위한 일’로서 나타난 것입니다. 즉 “이 행동이 나에게 어떤 추가적인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까?”를 놓친 적이 없이 나타난 행동들입니다. 남 좋아라고 평생을 사는 이는 없습니다. 남의 이름이 명예를 위하 자기 이름은 형편없이 짓밟히기를 원하는 자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 명예와 자기 이름을 괜찮게 드높이는 쪽’으로 행동합니다. 이러다 보니 이런 태도로 신과 직접 흥정에 나서면서 소위 ‘회개’라는 것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이 ‘회개’마저도 자기 이름의 가치를 드높이는 재료로 되돌아와 투입이 됩니다. 이는 인간들이 평소에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구원받지 않는 자와 구원받은 자의 차이가 외부로 드러나는 그들의 행위로 판단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반드시 중보자를 거쳐서 만나게 되어 있어요. 그 중보자는 거룩한 자가 되는데, 출애굽 이후 거룩한 자는 대제사장입니다. 백성들은 제사장까지만 진출하고, 그 이후 자신의 죄를 씻는 문제에는 손을 떼야 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회개합니다.’라는 식으로 희생 양을 몰고 왔으면 그 다음은 제사 전담반인 제사장에게 넘기고 본인은 빠져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실은 굉장히 고마운 일입니다. 

회개한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반성하고 회개한다고 하지만 이후에 그 ‘회개했음’ 마저도 어느새 자신의 새로운 의로 등장되어 있습니다. 즉 ‘회개했음’을 가지고 새로운 자아상이 구축되고, 바로 이런 자아상이 곧 ‘자기 이름’을 본 내용으로 타인 앞에 나서게 됩니다. “너는 회개 안 했지? 나는 회개했다.”라는 식입니다. 

이는 그 현장에 방금 생겨난 ‘자기 의’입니다. 그래서 이것마저 중보자에게 넘어가면 그 사람이 방금 죄 지은 것이나 혹은 기억난 지난 날의 죄에 대한 ‘죄 사함’이 아니라 ‘그 사람이 근본적으로 내뿜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죄 사함입니다. 이렇게 되면 죄는 사람에게 처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중보자와의 만남에서 제대로 의미 있게 규정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이지 않는 세계’는 이 ‘보이는 세계’ 안에 잠입해 들어와 있습니다. ‘죽어서 천국 간다’는 점에서, 이미 예수님 안에서 죽은 자로 다루어지는 짐을 인정하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개입으로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온통 ‘자기 이름’을 위해 사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주의 이름’에 부합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예수님을 살해했습니다. 

즉 ‘자기 이름들’이 ‘주의 이름’을 죽이신 것입니다. 이는 곧 이 세상은 벌써 두 종류의 ‘내세’가 형성되어 있음이 밝혀집니다. 하나는, ‘인간의 이름’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들어가는 네세와 철저하게 ‘인간의 이름’을 배제하고 오직 ‘주의 이름’의 권한으로서만 들어가는 천국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러한 중첩은 창세기 4장부터 벌어진 일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는 인간들은 선악과 따먹은 일로 ‘영원’이 아니라 ‘잠간’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지 못하게 하려고 에덴에서 추방시켜 버렸습니다. 즉 인간들이 내심 흙으로 돌아갈 운명의 ‘잠간’을 ‘영원한’으로 변질시키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4장에서는 참으로 의미 있는 ‘잠간’이 나옵니다. 아벨이라는 동생이 제 명에 죽지 못하고 형 가인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잠간’을 ‘영원함’을 미리 담아둔 ‘잠간’으로 구상하신 것입니다. 비록 아벨은 죽었지만 아벨은 영원히 살아있는 존재로 확인시켜 주는 증거를 이 지상에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4:25의 말씀입니다.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여기에 보면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가인같은 우리를 대신하여 오신 분이라는 점의 시초를 이 대목에서 찾아볼 수가 있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주의 이름’이 내부적으로 벌써 작동하는 천국 가게 되는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복음적 ‘영원한 징후’를 쏟아내게 하십니다. 또 예를 들면, 창세기 24:6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고 되어 있습니다. 

먼 곳에 시집가는 누이동생에게 라반이라는 오빠가 덕담을 해주는데 내용이 무쩍 살벌합니다. 꼭 전쟁터에 나서는 느낌이 안겨줍니다. ‘그 원수의 성문’이라는 것이 그 표현입니다. 이는 리브가의 운명이 결코 ‘자기 이름’을 위해 사는 일생으로 방치하지 않으시겠다는 겁니다. 오로지 ‘주의 이름’으로 살게 하겠다는 겁니다. 

‘주의 이름’을 전쟁 치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요소에 리브가는 말려든 겁니다. 이게 바로 오늘 본문이 말씀하시는 ‘고난’입니다. 즉 ‘주의 이름’과 복음을 위한 고난이 발생된 자만이 벌써 천국의 일을 하는 친백성이며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고 꾸준히 ‘자기 이름으로 사는 인생이 정당화된다면’ 이는 성도가 아닌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이 세상에서 고생을 겪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아들의 나라’에 들어갈 조건은 못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만 성공하면 천국 가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그 착오를 제대로 파악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21강-고후 4장 16-18절(잠간과 영원함)1701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후서 4장 16-18절입니다. 신약성경 290페이지입니다.

 

고린도후서 4:16-1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성경에 나오는 이 현실하고 우리가 사는 이 현실하고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의 융합, 보이는 것들의 집합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현실이라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비빔밥, 섞여 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보이는 것은 이 세상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 혹시 있다면 죽고 난 뒤에 비로소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네 상식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보이지 않는 것이 이미 보이는 곳 안에 침투해 들어와 있다는 거예요. 따라서 성도의 특징이 있습니다. 성도가 아닌 사람은, 세상은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데 성도는 보이지 않는 것이 이 보이는 세계 속에 주원인, 주동기로서 움직거리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는 겁니다.

 

같은 인간이라도 예수님하고 유대인하고 차이가 나요. 예수님이 세상 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이 세상에서 주된 원인으로서 작용한다고 보고 있고 예수님 외의 모든 인간들은, 인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인간끼리 얼마나 지혜를 짜내고 얼마나 결단내리고 희생을 하고 결심하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역사와 미래는 만들어진다고 보는 겁니다.

 

거창하게 역사라고 할 것도 없이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지금껏 내가 이만한 인생 살아온 것은 대단치는 않지만, 그나마 이만한 인생이라도 꾸리기 위해서 얼마나 양보를 했고, 고개를 숙이고, 설움당하고, 눈물콧물 많이 흘렸던가, 그런 것에 집착해요.

 

이것은 항상 어디에 매이게 되느냐 하면, 자기영광, 자기찬양, 자기의, 거기에 얽매여 있습니다. 몇 살 때 교회 다녔고, 몇 살 때 은혜 받았고, 몇 살 때 뭘 했다, 이걸 따져보게 되면 그 자체가 전부 다 누구 영광이냐 하면, 자기 이름의 영광에 이바지 하는 거예요.

 

그 성과, 이렇게 내가 고생하고 노력해서 얻은 성과를 무가치한 것, 무의미한 것으로 누구한테 내놓을 의사가 전혀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를 모릅니다. 얼마나 힘들게 살아온 인생인데 왜 이것을 가위표 칩니까? 어떻게 자진해서 그것을 폐기처분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동안 얼마나 애를 썼는데? 이만큼 사는 것도 만만치 않거든요. 힘들었다 이 말이지요. 밤 잠 안자고 신경 써서 시차까지 견뎌가면서 이만한 인생 살았는데? 그래서 오늘 본문 보면서 이렇게 오해를 하게 돼요. ‘그래. 눈에 보이는 세상이 끝나고 나면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날 기다릴 것이다.’

 

뭐가 기다리는데요? 본인 자체를 천국까지 집어넣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쓴다면 그것은 자기 이름이 천국 가는 셈이 되기 때문에 그런 이름 안 넣어줍니다. 천국에서 안 넣어줘요. 여러분, 아실까 모르겠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고, 저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고 알고 있어요.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나의 이름을 폐기하라는 겁니다. 부정하고 부인해야 된다는 거예요. 나의 이름, 너의 인생에 대해서 신경 쓰지 말라는 거예요. 아까워라 내 이름, 이러지 말라는 겁니다. 주의 이름만 영화롭게 된다면 제 이름 누더기 되어도 상관없어요, 이렇게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성경에서 그렇게 이야기해요. 저보고 멱살 쥐고 흔들지 마세요. 성경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주의 이름의 맞은편에 뭐가 있느냐 하면, 평소 인간들의 행세가 내 이름 말고 달리 살아갈 보람이 없는 식으로 평생토록 살아왔다는 겁니다. 다 나 좋으라고 살아온 거예요.

 

내 가정, 내 교회, 내 교단, 내 집안, 내 국가, 모든 것이 전부 다 나 좋으라고 살아왔는데 나 좋으라고 살아온 그 보이는 구석구석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서 내 이름은 이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그동안 살아온 겁니다. 그런데 천국은 아들의 나라에요. 이게 굉장히 설명하기도 미안스런 생각이 들어요.

 

그 나라는 인간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습니다. 1도 없어요. 자기 이름으로 들어올 위인이 없습니다. 그들을 한꺼번에 공통적으로 묶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주의 이름으로 들어온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나의 이름으로 기대하는 천국은 뭐냐? 나하고 하나님하고 직접 거래해서 가고자 하는 나라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괜찮은 것을 누구한테 드린다? 신에게 펼쳐 보임으로서 신에게 인정받는 나의 이름이 되어서 신과 합세하고 합류하겠다는 것이 배후에서 마귀가 충동질을 한 겁니다. 그런데 구약부터 보게 되면 중보자가 있습니다. 중보자가 왜 있겠습니까?

 

우리가 직접 하나님을 상상할 수 있고 하나님과 직접 거래가 가능한데, 유대인처럼 하나님에게서 율법이 왔으면 율법을 숙제하듯이 차근차근 지켜 나가면 주님께서 “참 잘했어요.” 하고 도장을 찍어주면 우리는 얼마나 종교 생활하는 뿌듯한 보람이 있겠습니까?

 

10년간 교회 안 나와도 11년째 교회 나와서 “참 잘했어요.” 도장 받으면 얼추 구원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면 교회 생활이 얼마나 재미나겠습니까? 그런데 나의 이름을 충분히 질적으로 괜찮은 존재로 전환시키는 노력은 나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해내는데 왜 그것을 중보자가 가로막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이거예요. 주의 이름 아니면 아무도 천국 못 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의 이름에다가 평소에 하는 행세, 나의 이름의 명예와 가치를 덧붙이기 위해서 하는 그 행세에다 주의 이름, 중보자 예수를 초대해서 덧붙이면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데 그 주의 이름이 누구한테 죽었느냐 하면 사람의 이름, 인간의 이름에게 살해당했어요.

 

이 말은 어느 누구도 주의 이름에 다가섬이 없으면 천국은 물 건너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것 하나밖에 없어요. “여러분, 구원 못 받습니다.” 이거 이야기하라고 교회가 있는 거예요. 이렇게 하시면 구원시켜 줍니다, 가 교회가 아니라 그것은 절이에요.

 

“여러분의 하는 행세를 봐서 당신 같은 사람들을 천국에 넣어줄 리가 없습니다.” 왜? 천국은 주의 이름의 나라인데 평소에 우리가 구축하는 것은 나의 이름의 세상을 구축하는 거예요. 보이는 것들로. ‘보이지 않는 것들은 죽고 난 뒤에나 보이겠지. 지금은 눈이 있으니까 나중에 이 몸이 죽으면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겠지.’ 이렇게 상상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식으로 주석되어 있고 그런 식으로 수천 개 수만 개의 설교가 나와 있어요.

 

주의 이름은 날라 가버렸어요. “고생 좀 하세요. 고생하다 견디면 나중에 좋은 나라 올 겁니다.” 그 이야기는 교회에서 굳이 안 해도 절에서 다 하고 있고 갓바위에서 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살다보면 죽을 때가 있고 죽고 나면 처소가 마련되어 있고 그 맨션아파트로 갈 겁니다.” 이게 장례식 때마다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뭘 잘했다고 천국에 넣어줍니까? 그런 천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도 다 알고 있는 것이고 유대인뿐만 아니고 모든 종교, 아니 모든 인간이 다 짐작하고 예상하고 있는 바에요. ‘땅에서 설움당한 것 죽어서는 보상해 주겠지.’ 젊을 때 일찍 자식 저 세상으로 보내놓고 부모가 힘들게 살아가는 중에 희망이 있다면 ‘내가 힘들게 살아서 나중에 죽게 되면 일찍 먼저 떠나보낸 자식 얼굴 보겠지.’

 

그것은 TV에 보면 많이 나와요. “내 가슴에 묻었습니다.” 이러면서 다시 본다는 거예요. 어디서? 아마 지옥에서 볼 거예요. 둘 다 지옥 가서 서로 볼 겁니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고 그 다음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럴 것 같으면 성경 덮어도 괜찮아요. 보지 맙시다. 그런 상식 같으면 성경 보지도 맙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에요.

 

예수님이 잡아당긴 천국이 천국인데 그 예수님의 천국으로 인해서 보이지 않는 세계가 두 종류가 되고 말았어요. 예수님이 안 나타났으면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동의하는 오직 하나의 미래의 세계인데 예수님이 딱 등장해서 말썽을 일으킨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예수 이야기를 안해야 목회가 돼요.

 

그냥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이야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다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를 해 버리면 천국이 두 종류가 되어버립니다. 질이 달라요. 왜 질이 다를 수밖에 없느냐 하면, 예수님이 와서 소개한 천국이 우리가 익히 아는, 인간이라는 이름 때문에 익히 상식으로 아는 그 천국과 대치가 되기에 문제가 돼요.

 

십자가죽음이 그걸 증명하는 겁니다. 십자가 없는 훌륭한 스승님 같은, 공자님이나 부처님 같은 예수 같으면 예수님 생각이나 우리 생각이나 동일한데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람 손에 의해서 살해를 당하고 미움을 당했다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 모든 인간 앞에서 다른 소리를 내고 있는 겁니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다른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 진실 때문에 예수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주의 이름을 믿는다는 말은, 그 진실이 찾아옴으로 말미암아 나는 순 엉터리라는 것을 고백하는 거예요. 살아가는 하루하루 생애가 순 엉터리에요. 거짓과 거짓으로 점철, 중첩된 겁니다.

 

하루를 더 살면 거짓말이 하루 더 늘어나고 일 년을 살면 거짓말이 일 년 더 늘어나는 거예요. 이번에 또 설이라고 해서 얼마나 덕담들을 나눴습니까? 그저 오래 사시고. 그 말을 다른 말로 하면, “그저 오랫동안 거짓말을 많이 하시라고. 순 엉터리로 사는 세월을 길게 이으시기 바랍니다.” 하는 이야기밖에 안돼요.

 

사람이 수명이 연장된다고 해서 졸지에 자기 이름으로 살다가 주의 이름으로 바뀔 리가 없습니다. 하던 가락이 있거든요. 그걸 브레이크 없는 벤츠라 하는데 브레이크 고장 난 벤츠가 그냥 중력에 이끌려서 하던 행세 그대로, 마귀가 떠미는 대로 그냥 쫙 내려가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초점은 이거예요.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데 그 안에 어떤 식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삽입되어 있는가, 그걸 찾아내야 돼요. 18절에 보게 되면,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라고 되어 있으니까 여기에서 저기로 간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평범하게 보고 있는 것 속에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데 거기서 뭔가 미흡한 것을 보이지 않는 세계라고 어떤 영역, 공간을 따로 만들고, ‘지금 이 땅에서는 고생했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나를 손짓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을 합해서 지금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정작 보이지 않는 것은 보고 있는 그 세계에서 시선을 돌려서 뒤를 돌아봐야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 보이지 않는 세계라는 겁니다. 그만큼 오늘 본문은 뭐냐? 압박을 가한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이라든지, 더 나아가서 너 자신에 대한 기대, 상상, 이것에 대해서 복음이 압박을 가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압박을 가하는 복음의 내용은 뭐냐? 복음의 내용은 로마서 1장 2절에 나옵니다. 복음의 내용은 곧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복음을 네 자로 풀이하면 기쁜 소식이거든요. 인간적으로 말해서 기쁜 소식은 이거 하나밖에 없어요. “고생 좀 됩니까? 좀 기다리면 죽고 나면 천국이 기다립니다.” 이게 기쁜 소식의 주 내용이 되어야 할 텐데 로마서 1장 2절에서는 뭐가 기쁜 소식이냐 하면, 아들이, 다윗의 자손에서 난 아들이 복음이라는 거예요.

 

내가 아니고 나 말고 저쪽의 아들이. 내가 오래살고 내가 행복한 것은 복의 내용에 끼워넣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성공했다, 나는 출세했다, 나는 똑똑하다, 나는 뭘 잘한다, 목회를 어떻게 했다, 이런 것을 복음에 집어넣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교회 부흥되었다는 식의 이런 이야기들을 집어넣지 말라는 거예요.

 

내 인생이 편하고, 행복하고, 자식이 잘되고, 나라가 부강하고, 박근혜가 빨리 하야하고, 그걸 복음으로 집어넣지 말라는 거예요. 복음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에요.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소속한 영역이 내 뜻대로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거예요.

 

그만큼 이 복음은 사람들 귀에 들어올 수가 없는 거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멀쩡한 거울 속에 내가 들어가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거울 안에 어떻게 들어갑니까? 유리에 튕겨 나오는데요? 거울속의 세계에 어떻게 들어갑니까? 거울에 비추인 모습은 나의 반영에 불과하고 새로운 것이 없는데. 불가능한 거지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불가능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가능치 않다는 겁니다. 어느 누구도 아들이 복음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자격자, 그런 덕후, 그런 능력자가 이 땅에 없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저질러 놓은 일들이 복음에서 파생된 일들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세계에 예수님에 의해서 마련되고 벌어진 일과 우리가 지독하고 우리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해놓은 일이 비빔밥처럼 섞여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자신이 숨어 있는 하나님아버지를 대신해서……, 숨어 있는 하나님 자체가 이사야 45장에 나오는 그 말씀 자체가 인간이 알고 있는 신은 악마라는 뜻이고, 인간이 보통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악마고 진짜 하나님은 숨어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누구한테도 들킬 수가 없는 아버지에요. 예수님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그 누구도 모르게 되어 있는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고 그 외 모든 하나님은 가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돼요.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부터 출발해서 예수님을 옵션으로, 숟가락 하나 얹어놓듯이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온통 처음부터 잘못되었으니까 어디서부터 이걸………. 이게 수정이 되어야 되거든요. 구약에서 중보자라는 개념이 뭐냐? 구약에서 신 앞에 회개를 한다고 해서 신 앞에 갈 수가 없어요. 어디서 스톱이 되어야 합니다. 어디서? 대제사장 앞에서 스톱이 되어야 돼요.

 

그 다음부터 이 죄를 가지고 대제사장과 하나님과의 따로 만남에 의해서 처리 되는 것이지 내가 반성하고 회개했다고 해서 회개한 내가 반성한 자체로 하나님까지 진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중보자가 막아 버립니다. 어느 나라 법에 그런 법이 있느냐고 따진다면, 주께서 없는데서 새로 만든 이스라엘에게만 그런 법이 있어요.

 

그러면 그 외에는? 다른 나라 법은 그냥 정성으로 바치면 복 받게 되어 있지요. 불교니까, 순박과 순진과, 순수함으로 바치면 신은 받게 되어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빼놓고, 성경 덮고 상식에 의해서 하는 거예요. 정화수 떠넣고 빌면 그 정성 봐서 어떤 복이라도 받게 되어 있다는 이것은 기본적으로 누가 가르쳐주지 않더라도 선악과 따먹은 행세가 어디로 가겠어요? 이것은 그대로 나오는 겁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들어가면, 중보자가 가로막습니다. “스톱! 여기까지.” 그렇다면 회개한다는 것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그 회개함으로 가져온 죄와 주님의 용서가 합체가 되어서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 있어요. 그게 인간의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이에요.

 

그 언약의 완성을 통해서 꽃봉오리처럼 피어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주의 이름의 영광, 주의 이름의 찬양이 거기서 나오게 되어 있어요. 죄를 회개한다고 할 때 아직도 우리는 어떤 미련을 갖고 있느냐 하면, 지금은 내가 잘못했지만 용서받고 난 그 다음에 나는 용서받은 나이기에 괜찮아진 나, 아주 값나가는 나, 의미 있는 나가 될 것이라는 것을 은근히 노리고 들어가는 겁니다.

 

이것은 그대로 나의 이름의 연속성이에요. 절대로 주의 이름으로 바뀐 것이 아닙니다. ‘회개했더니, 반성했더니 하나님께서 용서해줬다. 따라서 용서받은 나는 이 정도야.’라고 점점 더 업그레이드된 나의 이름을 내가 신봉할 뿐이에요. 이걸 두자로 종교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종교는 항상 가능성이 있어요. 나를 질좋은 나로 바꾸는 가능성을 희망으로 걸고 종교생활 하게 되는 겁니다. 시키는 대로 하면 나는 천국갈 수 있는 질 좋은 나로 변모시킬 수가 있다는 그 야무진 희망,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교회 나오는 거예요. 담배 두 갑 피우다 한 갑으로 줄이고, 소주 두병 먹다가 한 병으로 줄이고, 돈 내기 화투 치다가 그것도 줄이고, 그것 자체가 이미 나는 질적으로 천국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스토리를 자기가 보는 즐거움이 있다는 말이지요. 종교생활 하는 보람이기도 하고.

 

하지만 제가 설교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그것조차 뭐라고 했습니까? 나의 이름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성경은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나의 이름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해서 우리를 구원해주는 분이 아니에요. 우리 죄하고 예수님의 용서하심이 합체되어서 이제는 더 이상 나의 이름의 존재자체를 주님의 언약완성에서 죽여 버립니다.

 

두 번 다시 네 이름에 대해서 기대하지 말라. 다른 말로 하면, 네 이름의 개선, 네가 질적으로 나아진다는 것에 대해서 네가 책임질 것은 전혀 없다. 네가 행세 더럽다고 끙끙 앓지 마라. 그것 자체가 아주 수상한 짓이에요. 엉큼한 짓입니다. 뭔가 노리는 바가 있어요.

 

네 이름은 지옥가지만 내 이름은 천국 간다는, 자기 이름이 있기에 남의 이름과 대비를 시키고 비교하고 어떤 우월감을 가지고 사람 사는 보람 같은 것을 챙기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전혀 무가치해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왜? 천국가도 나 잘났다는 소리를 입 밖에 내놓을 위인들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천국에 영원토록 살 수가 있는 겁니다. 신약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는 의미에 대해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면 그 의미는 이미 구약에서 예고된 바 있습니다. 구약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자기가 잠간인 것을 알아요.

 

잠간인 자기를 영원함으로 전환시키는 노림수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것을 눈치 채고 선악과 따먹었다는 이유 때문에 생명나무를 못 따먹도록 생명나무 있는 곳에서 추방시키고 말았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일관된 취지입니다. 너의 이름은 영생을 얻을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단호하게 이야기했어요.

 

성경 창세기 3장을 안 봤으면 ‘이상한 하나님이다.’ 이렇게 하겠는데 창세기 3장을 한 번이라도 봤으면, 그것도 졸지 않고 봤으면, 그것도 건성으로 보지 않았으면, 제대로 봤으면, 진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라는 정도는 눈치 채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얼마나 눈치가 무딘지 신앙생활 50년을 해도 이런 눈치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겁이 납니다.

 

나 잘되기 위한 하나님은 없다는 것을 연 초부터 꼭 제 입으로 말씀을 드려야 됩니까? 나 잘되기 위한 하나님은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일만 잘되면 오케이가 되어야 되지 내가 구태여 잘 될 이유는 없습니다. 이론상은 그런데 실제로서는 ‘이왕이면 나도’라는 말을 자꾸 뒤에 붙이고 싶은 것은 우리가 어떻게 숨길 수 없는 본심이에요.

 

그래서 지난 수련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인간은 자연을 이길 수 없다고. 그리고 인간은 자연의 일부다. 인간은 자연을 이길 수가 없어요. 자연의 일부가 어떻게 자연을 벗어납니까? 내 속의 충동을 어떻게 이겨요? 잘 지어놓은 어떤 성이 있잖아요. 그거 지을 때 그 지역 주민들이 얼마나 땀을 흘리면서 노역으로 그 성을 지어놓았겠습니까?

 

지금 보면 그냥 숲의 일부입니다. 인류의 찬란한 문화, 문명, 모든 것은 자연을 이기지 못하고 자연에 삼켜집니다. 찬란했던 우리의 지난 역사도 따지고 보면 자연의 일부로서 소멸될 것들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세상을 넓게 보지 못하고 자기중심으로 보면서 살아남는 것이 승리라고 착각하면서 살아보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자연은 눈에 보이는 것이고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일부고 그것이 기본이 되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상상해보는데 그 상상은 망상에 불과하고요. 진짜 보이지 않는 세계의 주인공은 직접 이 세계를 방문해 본 적이 있습니다. 와도 못 알아보는 어떻게 합니까? 와도 못 알아보고요, 그 분의 소식을 교회에서 전해도 못 알아듣는데 어떻게 합니까? 무슨 수가 있어야지요. 못 알아듣는데요?

 

“목사님 그런 것 들으려고 교회 온 것이 아닙니다.” 이러고 있는데 어떻게 하냐고요? “가정이 어려운데 어떤 대책이 없겠습니까?” 이러고 오는데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진짜 보이지 않는 주인공으로 온 거예요. 그게 뭐냐?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창세기 3장에서는 인간 쪽에서 시작해서 영원함을 삼키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추방시켰거든요.

 

그래서 인간은 이 땅에서 고생하면서 ‘잠간’ 그야말로 땀 뻘뻘 흘리면서 이 땅에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요. 잠간인데 창세기 4장에 들어오게 되면 그 잠간이 뭘 공격하는가? 영원함을 공격해요. 거기에 아벨이 나옵니다. 아벨은 이 땅에서 살다가 형에게 맞아죽었어요. 잠간 살았어요. 잠간 살았지만 영원한 원리원칙이 그 안에 들어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벨이 꼭 그리스도 같아요. 그리스도는 서른세 살밖에 살지 않았는데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어요. 영원함을 건드린 겁니다. 그것도 잠간일 뿐인 존재가 영원함을 건드린 거예요. 쉽게 말해서 교회 부흥에 대한 욕구가 십자가복음을 건드린 거예요. 모든 것이 거꾸로 된 세상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성도 같으면 어지러워야 돼요.

 

정말 어지럽습니다. 내 문제 해결하려고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교회라는 것은 중보자의 뜻과 그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뜻이 얼마나 대치되고 충돌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벨을 그렇게 이 땅에서 죽이게 해놓고 그 죽은 아벨에서 영원함이 개시가 돼요.

 

참, 하나님이 하는 일이 곱게, 좋은 게 좋지 않으냐, 이런 식으로 되는 법이 없어요. 아벨을 죽여 놓고 그 다음에 아벨의 자손이 나오는데 그게 창세기 4장 25절입니다.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이라고 했어요. 이 말을 요즘 말로 번역하면 ‘나 대신 예수님’이에요. 꼭 가인을 이렇게 언급해야 될 이유가 있어요. 영원함이라 하는 것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눈에 보이는 것에서 숨어 있고 그 눈에 보이는 것이 이 땅에 이미 벌어지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핍박이라는 형식, 핍박이라는 작업을 통해서만 보이지 않는 세계가 핍박받는 양상으로 이 땅에 자기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주의 이름이에요. 제가 이쯤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들은 또 오해를 할 수가 있어요. 여기는 없을 테지만 이 방송 듣는 사람은 오해할 수가 있어요. “목사님, 이제부터는 내 이름 믿지 않고 주의 이름만 믿겠습니다.”라는 오해. “이제부터는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각오하는 오해.

 

제발 그런 오해를 제가 말리고 싶어요. 성경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던 행세대로 우리 자신의 명예와 가치만 붙들고 본격적으로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주시기 바랍니다. 진짜 아멘 나와야 돼요. 제가 1월 첫주 설교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올해 표어는 제발 교만하자고 했지요.

 

그런데 거기에 붙인 것이 있어요. 작년에도 교만했지만 올해는 더욱더 교만하자. 어디 앞에서? 성경 앞에서. 어디 앞에서? 이 주의 이름 앞에서. 그게 바로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자의 모습이에요. 늘 주의 이름 앞에서 자신의 진상과 본질을 노출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새로운 관계성입니까? 얼마나 감사할 일이에요?

 

주님은 우리를 죽은 자로 본다는 것은, 네가 어떤 행세를 하고 어떤 나쁜 짓을 해도 내가 묻거나 따지지 않겠다는 거예요. 죽은 놈이 죽은 행세를 하지 산 놈이 죽은 행세 합니까? 죽을 놈이 죽을 짓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노출시켜 준다는 그것은 그런 죄가 재료가 되고 거기에 주님의 십자가가 섞여서 언약을 이루면 그것이 주님의 하는 모든 일의 달성이고 언약의 완성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말려든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사고방식이 지금 어디에 가 있습니까? 설교 들으면 ‘내가 이제부터 개선해야지. 이제까지 나의 이름으로 살았는데 이제는 주의 이름으로 살아야지.’ 이런 되지도 않는 위선자 쪽으로 가시면 안돼요. 사람이 그렇게 주의 이름으로 나는 죽었다고 해도 막상 자기를 죽은 자로 규정해 버리면 갑자기 정신이 허, 하니 나가버립니다.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인데요. 대구 수성로 근처에 사는 어떤 분이 자기 동네에서 장례식을 한 거예요. 아주 유명한 집이 장례식을 하니까 조화를 들어가는 골목까지 좍 깔아놓은 거예요. 그 근처에 사는 어떤 분이 아버지가 계신데 그 아버지는 국민백수가 되어서 맨날 프로 야구 중계방송 보는 것과 일본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는 그것밖에 몰라요.

 

그래서 일본 마라톤 대회에 서른 몇 번을 다녀왔어요. 그래서 마라톤 대회에 갔는데 갔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까 세상에, 자기 집에 조화가 좍 서 있는 거예요. 고백하는데 우리 친구 집입니다. 우리 친구 아버지가 자기가 죽은 줄 알고 깜짝 놀랐어요. 자기 집에 조화가 서 있으니까. 죽을 사람은 자기밖에 없어요.

 

이처럼 여러분 예배 마치기 전에 여러분 죽었다고 방 한 번 붙여볼까요? 깜짝 놀라요. 설교할 때는 “주여, 나를 늘 죽여주옵소서.” 해놓고는 막상 내가 진짜 죽었다고 한다면 자기에 대한 모독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왜? 평소에 인간의 자연스런 본성은 내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더 살고 싶은 것이 자연의 본성이고 충동인데 이걸 누가 말립니까?

 

우리는 자연의 일부인데. 말릴 수가 없어요. 주의 이름, 주의 이름, 하지만 그렇게 해놓고 돌아서면 내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거예요. 주께서는 이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쳐주십니다. 힘들게 그렇게 애쓰지 말라고. 그래서 뭐냐? 주의 이름을 믿으라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를 아시겠지요. 그게 주의 이름을 믿으라는 겁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라고 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진짜 감추어진 영원함이 이미 이 땅에서 네가 사는 보이는 세상 속에 일을 실시를 했다는 겁니다. 이미 실시를 하고 감행이 되었잖아요. 그러면 이미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자기 자신의 주의 이름밖에 모르고 그저 죄만 짓는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여기서 주의 이름과 우리 사이에 뭐가 성립이 되느냐?

 

여기서 예수님만을 증거 하면서 발생되는 고난이 주어지는 겁니다. 오늘 16절을 설교하려고 이렇게 길게 했어요.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속에 성령이 와서 이미 영원함이 들어왔어요. 겉으로는 나의 이름인데 속은 주의 이름이 왔어요.

 

17절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결국 주의 이름이 함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본의 아니게 낯선 고난을 받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고난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회개하고 죄 사함 받는다고 하는데 우리는 회개한 것에 대해서 죄사함 받는 것이 아니고 그 죄를 유발시킨 나의 원천적인 나 자신에 대해서 몽땅 주의 의로 죄사함을 받는 거예요.

 

그래서 죄용서를 받은 상태에서 계속해서 용서받을만한 이유가 어떤 이유인지가 죽을 때까지 계속 나오고 또 나오고 또 나오는 겁니다. 성도의 특징은 뭐냐?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이야기에요. 지금 설교 시작한지 오래되었는데요. 방금 제가 한 문장,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습니다.” 하는 짧은 문장인데 이것은 다들 들었던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이 긴긴 이야기가 준비되어 있어야 되는 겁니다.

 

떡만두 국이 떡에다가 만두를 넣는 겁니까, 만두에다 떡을 넣는 겁니까? 아, 오늘 아침에 되게 고민했어요. 인간의 출발점은 보이는 것이 출발점이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 기본이고 보이는 것을 구원하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것이 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저는 그것을 진정한 떡만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계획에 의하면 이 세상에 피조물로 태어난 것 자체가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하여 보이는 모양새로 우리 인간을 만들었다. 제가 아는 성경은 이렇습니다. 그 보이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그 보이는 것이 분탕질을 일으켜야 돼요. 선악과를 따먹어야 되고, 마귀한테 놀아나야 되고, 형이 되어서 동생을 쳐죽어야 되고, 그 분탕질을 해야 돼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양심이라는 것이 있는데 어떻게 분탕질을 합니까?” 하는데 지금 본인이 보기에 분탕질인 것과 아닌 것을 따로 구분했어요. 그것은 잘못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자기가 착한 일을 한 것도 분탕질에 불과한 것, 모든 것이 나 좋으라고, 내 이름을 위한 마귀의 시험에 빠진 것이 들통 날 때 그 때 또다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괜찮은 것 따로 분리해서 ‘이것은 내 것으로 챙겨야.’ 하고 괜찮은 것 챙기려고 하는 그 짓거리 자체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짓이 되는 겁니다. 성경을 이런 눈으로 보게 되면 무엇도 밝혀지느냐 하면, 창세기 24장의 이상한 대목도 이해 될 겁니다. 이상한 대목이라고 제가 일방적으로 이야기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시집가는 리브가 보고 오빠 라반이 이렇게 이야기해요.

 

창세기 24장 60절에 보면,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찌어다.” 이 대목이 어떻게 시십가는 누이동생에게 할 소리냐는 그 말이지요. 싸움하러 가요? 전쟁하러 갑니가? 다시 읽어볼게요.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시집가는)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찌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리브가라는 여인은 그 때 이게 무슨 소리인지를 모르지요. 이삭의 부인이 되면서부터 본의 아니게 그 보이는 것이,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그 땅에 삽입된 보이지 않는 진짜 숨어 있는 천국과 연결되어 있는 연결케이블선, 그 케이블 선에 이미 합세된 거예요.

 

자기가 예상한 미래, 다시 말해서 ‘나는 우리 남편과 행복하게 살 거야.’ 그 미래가 아니고 전사의 모습으로, 악마와 싸우는 모습으로 그 운명, 내가 선택하지 않은 운명, 내가 기대하지 않은 운명 속에, 그 주의 이름으로 벌이는 전쟁터 속에 나의 이름이 섞여 들어가는 겁니다.

 

어떻게? 죄지음으로서. 그러니 죄짓는다는 것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고 필연적인 이야기에요. 이 쯤 되면 어떤 사람은 “그러면 앞으로 우리가 더 죄를 지을까요?” 그냥 가만히 살아요. 그냥 살아도 우리는 자연의 일부기 때문에 변명과 핑계에 둘러싸인 되지도 않는 자기변명의 이름으로 죄가 또 나올 거예요.

 

이러한 주의 벌려놓은 일, 그 사람은 자기 이름으로 꾸준히 살지만 뭔가 포대기 속에 있는 주의 이름으로 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의 이름에 의해서 우리에게 예상 못할 환란이 나오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의 결론을 내려 보라고 한다면, ‘죽어서 천국 가야지.’가 아니라 이미 천국에 와 있어야 돼요.

 

이미 낯선 환란, 그것도 십자가 때문에 받는 환란이 우리 속에서 그 징후를, 증상을 보여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은 오늘 죽어도 지옥 갑니다. 죄 짓지 말라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죄를 짓되 이것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유발시킨 죄라고 보라는 거예요.

 

007영화에 007이 나오거든요. 그 사람 특징이 있어요. 007은 가는 곳 마다 바람 피우거든요. 괜찮다 싶으면 흑인이든 백인이든 가리지 않고 바람피우고 돈이든 차든 필요하면 빼앗는 것이 예사인데 그 사람 특징이 그런 것들이 다 용납이 되는 이유가 한 가지 일에 매진한다는 거예요.

 

007은 모든 것이 용납이 돼요. 심지어 사람 죽이는 것도 용납이 돼요. 그래서 007일 살인면허잖아요. 영국정보부에서 살인허가권을 준거잖아요. 진짜에요. 성도가 가는 길에 ‘이것은 나의 실수야.’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지 마세요. 여러분, 성도는 007입니다. 006, 007, 008…….

 

주께서 주의 이름을 드러내서 지금부터 천국은 어떤 생활을 할 것인가를 죽기 전에 이미 실시하는 사명자에요.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자기의 새롭게 느껴진 그 죄책감은 주께서 의도했다는 사실입니다. 남들 앞에서는 죄 되지도 않는 것을 주께서는 “이것은 네 이름으로 네 영광을 위해서 했잖아.”라고 꾸짖어왔을 때, 아, 내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어지니까 이것이 바로 복음 때문에 주신 고난이고 그 고난을 기쁨으로 맞이하기 때문에 그것이 축복이 되는 겁니다. 군만두 먹는 고난, 돈 많이 버는 고난, 애 공부 잘하는 고난, 모든 것이 그리스도 때문에 유발된 고난이라고 여기셔도 괜찮습니다.

 

왜냐? 어차피 우리 이름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주님 때문에 그리스도와 결혼한 신부의 자격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이제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상 밖에 주님의 신부가 되었기에 예상 밖의 사태가 오더라도 주님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한 계기인 것을 저희들이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