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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강의-언약궤의 폭주 161227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2. 31. 08:55
2016-12-30 19:31:27조회 : 13         
언약궤의 폭주(삼상5장8절-6장9절) 20161227대전강의21강-이 근호이름 : 이미아 (IP:122.43.188.127)

언약궤의 폭주(삼상5장8절-6장9절) 20161227대전강의21강-이 근호

 

자, 사무엘상 5장을 해봅시다. 사무엘상 5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서 패배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이 잘못된 거예요. 하나님의 전쟁이 자기를 위한 전쟁이 아닌데,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그 생각을 못한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 문제를 해결해줄 그런 하나님이라고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진짜 하나님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에요. 하나님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었던 겁니다. 근데 인간들이 그 계획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요. 자기 계획이 너무 심해서, 자기 계획이 너무 강렬해서 그래요.

 

이것은 무슨 문제냐 하면 자기가 사는 토대문제거든요. 자기 토대를 자기가 닦는다든지, 자기가 세워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가 마태복음 7장 마지막 절에 나오죠. 이 토대문제가. 모래위에 세운 집, 반석 위에 지은 집. 남이야 집을 어떻게 짓든, 왜 하나님이 간섭합니까? 모래 위에 지을 수도 있고 반석 위에 지을 수도 있는데, 문제는 하나님이 홍수를 주관한다는 거예요. 홍수를 주관할 때, 집 짓는 것은 지 맘대로 인데, 그 자기마음대로 집 짓는 것을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시편에 이런 말씀이 나오죠. “하나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그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시127:1)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일을 노골적인 불신자들이 막는 것이 아니에요. 방해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믿습니다. 믿습니다.”라고 내뱉는 그 사람이 수상해요. 

하나님을 믿으려는 이유가 불분명해요. 하나님 믿는 이유가 불분명하다고요. 하나님 믿는 이유가 수상하다고요. 

성경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했거든요. 

자기를 포기하기 위해서 하나님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구축하는 내 토대위에서, 평생 구축하는 나라는 성과물을 잃고 싶지 않다. 다치기 싫다. 이 성과물의 대표적인 것이 가정이겠죠. 가정. 그리고 목사한테는 교회가 되겠죠. 교회나 가정, 또는 국가, 일가친척이 다 포함됩니다. 가정에는 자식들이 있잖아요. 사람들은 자식을 놓으면 그 자식이 자기 자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그때부터 자식이라는 토대위에 하나님이 들어갈 일이 없어요. 내 새끼 내 것이라는 겁니다.

 

그걸 성경 마태복음 10장 37절에서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뭐 자식이 멀리 있는 사람은 상관없겠습니다만. 자식이나, 그럼 바꿔야 돼요. 강아지나 내게 합당치 않다. 계속해서 주님께서 물으시는 것이 뭐냐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없어요. 심지어 불교 신자도 신을 믿는데, 계속 오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좋게 보시는 것이 아니고 그 발 딛는 토대를 계속 주목하는 거예요. 시작을 뭐로부터 출발했느냐, 시작을. 너로부터 출발했잖아?

 

근데 너로부터 출발한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인정하지 않는 증거가 뭐냐 하면 오늘 사무엘상 5장이에요. 4장, 5장.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빽을 믿고, 심지어 하나님이 동행한다는 언약궤를 믿고, “적들아! 나오너라! 우리 하나님이 승리케 해주신다.”라고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승리하는 것은 맞아요. 근데 누굴 위해서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이 착오를 일으킨 겁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이거고, 신약에서는 시키는 대로 살아라, 이 말입니다. 시키는 대로 살아라. 시키는 대로 살라고 한다면, 뭐가 밝혀지느냐 하면 인간들의 고집들이 밝혀져요.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그 수상한 의도들이 밝혀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공격한 저기 있는 것이 적이 아니고, 나를 하나님의 것으로 바꾸려고 하는 하나님의 뜻과 내 거니까 내 것을 포기 못하겠다는 나와 맹렬하게 전쟁을 벌입니다. 가정이나 교회 내에서. 누굴 상대로? 하나님을 상대로 맹렬하게 전쟁을 벌이죠.

 

로마서 5장 10절에서는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된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원수 된 자다. 교회 잘 다녔는데 하나님의 원수 된 자다. 가정주부로서 잘 사는데 하나님의 원수 된 자에요. 그릇을 깨서가 아니라, 세제를 너무 많이 써서 설거지를 해서가 아니라, 해독주스를 남편한테 안 갈아줘서 문제가 아니라, 이 모든 일을 하는 행위가 나를 위해서 나 좋아라고 하는, 내 것을 포기 못하겠다는 그 강력한 자기에 대한 사랑과 집착이, 하나님의 원수 된 자라는 그 개념자체를 모독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이 행동하고 일하면 할수록 기대를 더 크게 하게 되고, 기대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원수 되었다는 그 강도가 더 세지죠. 차라리 어린애 같았으면, 자기 선택도 없고, 자기 선택의 의지도 없고, 주는 대로 사는 어린애 같았으면 차라리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할 텐데, 이 어른들이 문제에요. 누가 높으냐고 하는 어른들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사람들이 언약궤를 가지고 사무엘상 5장에 들어가게 되면, 이스라엘은 패배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직도 자기가 패배한 것이 하나님께 패배했다는 생각을 안 하고 블레셋이라는 이방민족에게 패배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굉장히 당황스럽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나라가 하나님이 없는 나라한테 패배한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교회 있고 앞에 절이 있는데 교회는 번개 맞아 불타버리고 절은 멀쩡하게 잘됐을 때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납득이 안 되겠죠. 앞에 보살 집은 만날 웃음이 넘치는데, 이쪽 교회 다니는 집은 만날 싸울 때, 이게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 이해가 사무엘상 5장, 그 다음에 6장, 7장까지 계속 죽 이어집니다. 5장, 6장, 7장은 한방에 싹 다 줄거리를 그릴 수가 있어요.

 

과연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이겼느냐? 자,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이겼다고 블레셋도 착각하고 이스라엘도 착각했습니다. 그러면 인간집단과 인간집단의 싸움이에요. 근데 인간끼리 싸워서 과연 이 승리라는 것이 인간에게 해당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인간에게 너는 지고 네가 승리했다고 하는 이것을 부여받을 권리자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런 권리자가 없어요. 둘 다에서 승리를 뺏어가 버립니다. 양쪽 다 승리를 뺏어가요.

 

하나의 예를 들면 이웃을 사랑하라 이렇게 했는데, 만약 이웃을 사랑하는 현상이 일어났다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일어났다면 누가 승리자가 되느냐 하면 이웃을 사랑한 자가 승리자가 되고, 사랑받는 자는 그 사랑한 자에게 일종의 종속이 돼야 되죠. 하나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을 준 것은 어느 누구도 사랑했습니다, 라고 나설 위인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준 거예요.

 

하나님이 결국 그 말씀을 줬잖아요. 줬으므로 함께 있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돌판을 들고 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함께 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이 함께 있다. 이래 되는 거예요. 


돌판을 들고 내려왔으니까. 하나님이 직접 내려오면 다 타 죽어요. 다 타 죽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중보자로 내세웁니다. 말씀을 중보자로 내세워서 

이 말씀을 들을 때 사람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라 이 말입니다.

 

근데 그 말씀을 주셨을 때에, 사람들은 그 말씀을 주게 되면 복을 받는다는 인센티브가 주어져요. 복을 받는다는. 그리고 못 지킬 경우에는 저주받는 거예요. 이게 축복받고 저주받는다는 것은 완전히 결정된 사항이 아니죠. 그렇잖아요? 지킬 경우에만 복 받고 못 지키면 저주받기 때문에. 결국 말씀을 줬다는 것은 인간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선택권 자체를 원초적으로 박탈시키는 겁니다. “나 축복받고 싶다.”라는 말을 함부로 입으로 발설하지 말라는 겁니다. 축복 안 받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어요?

 

하지만 축복 주고 안 주고는 하나님이 내세운 기준에 의해서 결정하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미리 짐작하거나 다짐할 권한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의 운명, 우리의 미래를. ‘나 이렇게 해서 내가 잘 되는 쪽으로 살아야지.’ 하는 권한이 우리한테 없어요. ‘나 예수 믿어서 구원받아야지.’ 하는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그러면 뭘 해야 하느냐, 말씀을 줬을 때는, 사실 이스라엘 백성도 이걸 알아야 되는데, 나중에 아는 사람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때 몰랐어요. 몰랐으니까 이스라엘이 망했죠.

 

말씀이 우리의 주도권을 갖고 있다. 내가 누구냐를 하나님 앞에 건의한다든지, “저 이렇게 해주세요.”라고 요청할 때, 우리 입을 막아버리는 거예요. 셧 업Shut up! 어려운 말을 써서 죄송합니다. “Shut up! 입 다물어! 이거 처리해! 서류 던지듯이. 십계명 던지면서 잘하면 축복이고 못하면 저주야.” 이랬다 이 말이죠. 근데 십계명은 우리가 요청한 적이 없어요. 요청한 적이 없는데 그것이 우리에게 덮쳤다는 말은 뭐가 되느냐 하면, 주도권이 이미 이스라엘은 주님에게 넘어 간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승리라는 것이 처음부터 없었어요. 끝까지 주님의 승리가 되어야 돼요. 그럼 자기들이 패배했다는 말도 말이 안 돼요. 자기들이 블레셋에게 패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한테 패배한 거예요. 이거만 알면 결코 블레셋이 승리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에게 “이제 우리가 당한 것을 너희도 이제 한 번 당해봐라.” 이런 식으로 지켜봐야 될 입장에 있지, “아이고, 좋겠다. 우리 언약궤 뺏어가서?” 이런 것은 아니에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있을 때, 함께 있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본질을 몰랐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잠시 이스라엘과 헤어지고, 이스라엘을 쳤던 블레셋과 함께 있음으로써, 그걸 주변에서 지켜봄으로써,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이 전에 우리와 함께 있었던가를 깨닫게 되는 겁니다. 얼마나 겁나는 분이. 근데 우리도 우리와 함께 있을 때 하나님을 우습게보고 존경하지 않았죠. 특히 엘리 제사장 같은 경우도 하나님보다 아들을 더 존중했잖아요. 그래서 블레셋이 쳐들어온 것도 마땅하고, 언약궤 뺏기는 것도 마땅하고, 그들에게 패배당해서 많은 군사가 죽은 것도 사실은 당연한 겁니다.

 

그냥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내 토대, 내 모든 것, 내가 그동안 쌓아올린 모든 업적들이 다 깨어진다 하더라도, 성도의 기쁨이 뭐겠습니까? 성도의 기쁨이라는 것은? 절대 규범을 알게 되었다는 거예요. 내 인생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상관없이 예수님이 주관한다는 이 사실만, 이게 확보되었다면 환난, 곤고, 핍박,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심지어 계란 값이 오른다 할지라도, 그거 무서워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신앙생활 기쁨이 딴 게 아니에요. 그거에요. 천지가 개벽하고 나라가 아무리 어지러워도 진리는 이미 확정되었다는 사실. 확정되었어요.

 

옛날에, 한 50대, 60대는 다 알잖아요. 옛날 아이스케키를. 막대 아이스케키 있죠. 팥 아이스케키. 돌려가지고 찍으면 두 개 주고 세 개 주고 막 하는 것. 두 개짜리 밑에 철판 깔아가지고 야바위꾼들이 하는 것. 아이스케키 특징이 뭐냐 하면 끝까지, 다 먹을 때까지 막대를 못 놓는다는 겁니다. 오늘 제목을 아이스케키라고 할까? 요즘에는 막대하드죠. 아이스케키 그거는 끝까지, 다 먹을 때까지 막대를 못 놓아요. 창세전부터 예정된 성도는 자기 인생 다가도록 그 중앙에 막대기가 나를 이렇게 끌고 왔다는 것. 그게 갈수록 점점 더 드러나죠. 녹아내리니까. 팥 얼음이 막대에 꽂혀 있더라도 녹아내리잖아요. 그래서 아낀다고 하다가 햇빛에 다 녹아가지고 먹지도 못하죠. 먹을 때 빨리 먹어치워야지 안 그러면 다 녹아서 손에 다 묻고 그러죠.

 

우리 인생은 이처럼 빛 앞에서 녹아내리는 양초와 같습니다. 본색이 드러나요. 근데 그게 녹아내릴 때마다 왜 기쁘냐 하면 그동안은 내 인생을 내가 가꾸기 위해서 얼마나 노심초사하며 스트레스 받았습니까? 이 눈치 봐야 되고 저 눈치 봐야 되고, 심지어는 몸 아픈 언니 눈치 봐야 되고, 다 봐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사실은 막대기를 가리는 역할을 하는 것밖에는 안 돼요. 최선을 다해서 살면 살수록 점점 더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약화되고 이걸 찾을 길이 없어요. 왜? 자기가 너무 잘났으니까. 자기가 너무 위대하니까. 자기의 행동거지가 너무 완벽하니까. 진짜 거지같은 인생이에요. 너무 완벽하니까. 남한테 꿇리지 않을 정도로 한 성화했으니까.

 

이게 바로 주님의 일을 점점 더 욕되게 하는 거예요. 이건 뭐 겸손 티를 내면서 모든 게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뭐 말은 잘해. 차라리 말이나 못했으면.....,“은혜입니다. 다 주의 은혜입니다.” 해놓고 실제로는 건드리면 와락 하고 달려들어요. 강아지보다 더해. 와락 달려들죠. 내 의로움을 왜 건드리냐고 하면서. “니는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어.” 이런 것처럼.

 

남한테 모욕 받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노심초사하면서 살아갑니까? 이거는 결코 성도의 자유가 아닙니다. 뭔가 윤리적으로 승리하고 싶은 의도가 강렬해요. 평소에 자기밖에 모르는 그 성질을 교회에 가서라도, 나는 교회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요. 절에 가서라도, 교회라는 이름의 절에 가서라도 그게 그대로 바뀔 생각이 없어요.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 그걸 유대인들이 했던 겁니다. 주님께서는 아주 수치를 줘버려요. 심지어 이스라엘로 하여금 살맛이 없이, 하나님 믿더니 꼬락서니 좋다. 이렇게 만들어버려요. 자기가 믿는 하나님한테 자기가 버림받게 만들어버려요.

 

온 민족들이 얼마나 씹을 겁니까? “니가 믿는 하나님은 별 효과도 없네? 차라리 미신 믿어라. 다곤 신 믿어라. 우리가 승리했잖아.” 실제로 아하스 같은 경우에는 앗수르 신이 자기 신보다 더 세다고 생각해가지고 그쪽 신이 있는 신전을 그대로 벤치마킹해서, 자기 나라에 신전 그대로 만들고 그 식대로 제사를 드리게 했어요. 정성이 지극하면 신의 감동도 크다고 해서, 심지어 자기 아들까지 불에 태우고 하는 그런 것을 진두지휘하면서 했습니다. 우리 동네에 갑바위 있는데, 갑바위에 절하는 사람들 한 번 보세요. 얼마나 나름 경건한지. 나름대로 경건해요. 저 같으면 거기에 있는 동전 다 줍고 싶지만 절도행위에 해당돼서 법적으로 곤란해요. 동전 다 넣어가지고,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쳐들어가지고 절하고, 내려오면서 절에서 비빔밥 한 그릇 먹고 내려오죠. 그런 식으로.

 

사무엘상 4장, 5장, 이 모습은 어느 성경을 봐도 예외가 없습니다마는, 오늘날 우리 현주소를 그대로 적나라하게 다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제는 블레셋이 승리한 게 아니다. 왜? 블레셋은 신의 승리로 봤거든요. 그래서 진짜 하나님한테 고마운 것은, 아이스케키가 이렇게 있으면 우리가 강조하는 거예요. 이것 때문에 나는 누구한테 꿇리지 않는다는 그 대목에 대해서 내가 실패작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들추어내는, 주께서 공격하는 지점이 되는 겁니다. 폭격지점이 그거에요. 이것 때문에 나는 사는 보람이 있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이삭 놓고 사는 보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 가정이 이삭을 놓고 사는 보람이? 무엇 때문에 사는 겁니까? 그 사랑하는 90, 100살 되어 낳은 이삭 때문에 살죠. 그게 보람이었어요. 얼마나 기쁨이었겠어요. 근데 하나님께서는 뭘 내놓으라고 합니까? 아들을 내놓으라. 그 아들을. 한껏 키워놓고, 기쁨과 보람을 다 주고, 내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기존 교회에서 주일 낮 설교 시간에 이런 설교를 한다면 벌써 이쪽, 저쪽에서 설교 듣지도 않고 나갑니다. 뭐 이런 교회가 다 있어? 슬슬 나가기 시작해요. 내 것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께 복 받아 지키기 위해서 왔는데, 내 것 하나님께서 공격한다고 하니까, 그 소리 듣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없잖아요.

 

가만히 있어보자, 내가 내 놓을 게 뭐가 있을까? 지난 토요일이 곗돈 받은 것 있는데, 그거 도둑맞는 것은 아닌지, 자기 귀한 것을 하나님께서 공격한다고 하니까 그저 겁이 나는 거예요. 차라리 그 설교를 안 듣고 말지. 그 설교를 끝까지 들을 하등의 이유가 없잖아요. 이만큼 교회 다니려고 온 것도 노동인데, 노동했으면 대가가 있어야 하는데, 대가는커녕 완전히 다 박살날 판인데 그 공포심을 어떻게 견딥니까? 슬슬 털고 나가죠. 또 용기 있는 사람은 한 번 째려보고 나가죠. 그런 경우가 한두 번 있는 것이 아니에요. 다 듣고 나가지, 벌써 중간에 나갑니다. 얼마나 교회가 절입니까? 절간이 아니고 점집이에요. 점집. 플라스틱으로 만든 대나무를 달아야 해요. 십자가를 달지 않고 대나무를 달아야 돼요. 바람이 흔들리도록. 점집이에요. 무당집이에요.

 

근데 무당집인지 알면서 왜 다니느냐, 그래도 혹시나 백 개 중에서 한 개라도 행운이 올지 모르니까, 한 개 보고 계속 다니는 거예요. 교인들도 교회가 이렇게 점집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용감하게 또 어려운 가운데서 말을 하겠죠. 주의 종이니까 주께서 알아서 하겠지만, 그래도 도저히 못 참아서 하게 되면 목사가 어떻게 나옵니까? 버럭 화를 내죠. 버락 오바마에요. 버럭 화를 내죠. “니 같은 것이 아는 체하고 교회를 어지럽힌다고.” 빨리 가서 장부를 조사해봐야 해요. 십일조 얼마 내는 사람인지, 잘라야 하는 사람인지, 그냥 돈도 안 내고 절밥만 먹고 가는 사람인지, 보내버리는 거예요. 이제는 하나의 팁Tip을 드릴게요. 목사한테 장사 안 되게 방해하지 마시고 그냥 딱 하나만 하라고요. 이 이야기를 처음부터 공개했어요. 돈만 내면 돼요. 결국 그만 못 두는 이유는 그동안 낸 돈이 아까워서 그래요. 돈이. 그러니까 비난할 것 없어요. 목사나 교인이나 똑같아요.

 

이 블레셋에 대해서, 여기에 언약궤가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이 어떻게 승리하는지를 보겠는데, 지중해가 있고 이쪽에 사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인데, 이 간격이 한 100킬로미터가 안 돼요. 일단 100킬로미터 잡고, 사해 옆으로 예루살렘 있고 그 밑에 베들레헴이 있어요. 예루살렘 위에 벧엘이 있고, 벧엘 옆으로 길갈이 있고, 길갈이라는 것은 처음에 요단에서 건너왔을 때 열두 돌을 세운 곳. 에벤에셀에서 언약궤가 빼앗겼습니다. 블레셋이 이만큼 쳐들어왔습니다. 블레셋이 지중해쪽으로, 팔레스타인거든요. 처음에 실로에 있다가, 실로에서, 에벤에셀로 빼앗겨가지고 블레셋으로 이동해요. 이게 한 25킬로미터가 됩니다. 에벤에셀에서 아스돗으로, 아스돗이 사실은 블레셋의 본부, 아지트라고 보면 됩니다. 이게 한 45킬로미터. 그 다음에 가드로 갑니다.

 

이렇게 이동하는 것은, 블레셋이 사실은 이게 너무나 위험한 상자가 되어가지고 “엄마야! 엄마야!” 겁내가지고 이동하다가 나중에는 돌려주는 방향이, 자기 쪽, 블레셋으로 갔다가 다시 이스라엘 쪽으로 돌려주는 방향이 돼요. 아스돗에서 가드가 15킬로미터, 가드에서 에글론까지 5킬로미터, 에글론에서 여기 유명한 벧세메스, 6장 9절에 보면 있죠. 에글론에서 벧세메스가 10킬로미터, 벧세메스에서 암소 잡고 그 다음에 벧세메스에서 기럇여아림까지 15킬로미터, 여기에 다윗이 올 때까지 있는 겁니다. 실로에서 에벤에셀, 에벤에셀에서 아스돗, 아스돗에서 가드, 가드에서 에글론, 에글론에서 벧세메스, 벧세메스에서 기럇여아림까지, 이렇게 이동합니다. 이동하면서 블레셋 점령지역을 완전히, 이걸 열차로 이야기하면 폭주하는 거예요. 브레이크 없는 고장 난 열차. 막 달려버립니다.

 

누가요? 언약궤가 자체적으로. 이걸 달린다고 하니까 언약궤가 바퀴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시는데, 바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들이 감당을 못하는 거예요. 감당을. 그러니까 블레셋이 감당을 못해가지고 마치 뜨거운 쇳덩어리를 장갑도 없이 쥐려고 하다가 “아이구 뜨거워라!” 해가지고 남한테 인계하니까 “이걸 나한테 왜 줘?” 또 인계하고, “이 무서운 것을 왜 나한테 줘?” 이렇게 되는 거예요. 5장 1절에 봅시다.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실로에 있던 이 언약궤가 빼앗겨서 에벤에셀에 있다가 아스돗으로 이동하는 거예요. 아스돗에서 다곤 신상의 손모가지가 다 날아가잖아요. 다곤 신이 하체는 물고기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뜨거운 쇳덩어리를 감당을 못해서 떠넘기는 것처럼, “엄마야! 엄마야!” 하면서 떠넘기는 겁니다. 그 무서운 언약궤가 전에 어디에 있었어요? 이스라엘과 함께 있었죠. 왜, 이스라엘은 고요했을까요? 왜, 이러한 무서움이 들지 않았을까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고 하면서도, 자기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감당할만한 그러한 괜찮은 존재인줄 알고 착각한 거예요. 그것이 니가 괜찮아서 언약궤가 지금 벌을 안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말고 블레셋을 이렇게, 종합병원에서 의사들이 회진하듯이 한 바퀴 획 돌아오니까, “저렇게 무서운 언약궤를 우리는 그냥 곱게 가지고 있었구나! 그러면 뭐지? 이런 혜택은?” 이걸 오늘날 우리한테 적용시켜보면, 십자가의 은혜로 죄인을 용서해준다는 말이 굉장히 간단한 문장이에요. 센텐스sentence,문장으로서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무슨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처럼 꼭 등신 같아요. 죄져도 히히 웃는 바보. 바보처럼 느껴진다고요. 바보처럼. 죄져도 “나 안 봤다. 까꿍!” 이런 것.

 

인간들은 자기 주제를 모르는 거예요. 아이스케키가 너무 두꺼워요. 이게 좀 녹아줘야, 막대기에는 피가 묻어있거든요. 피가 묻어있다고 하는 것은 죽음이다 이 말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 아이스케키, 죽음을 지고 나를 따르라, 이래야 되는데, 이 죽음을 우리는 자꾸 기피해요. 죽음은 재수 없다고. 공동묘지 생각나서 재수 없다고. 우리는 그냥 즐겁게 사는 삶이 충만한 모습을 띠는 곳에 계속 가고자 하는 거예요. 이십대 애들은 젊음으로 충만해서 클럽에 가잖아요. 막 흔들고 뛰고. 아줌마들이 주로 사는 맛이 어디냐 하면 미장원. 남자들은 노래방, 술집. 어떻게 하면 죽음이 주는 이 살벌함과 저 멀리 떨어져 볼까?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크리스마스 때 늘 회자되는, 늘 거론되는 성냥팔이 소녀가 있잖아요. 그 성냥팔이 소녀가 행복해 보이는 그 모습을 보면서, 케이크 앞에 놓고 가족들이 다 둘러앉아서 있는 그 모습, 자기는 엄마도 없잖아요. 죽었으니까. 그 성에 낀 창문을 입김으로 불어서 그 안에 있는 행복한 모습을 볼 때에, 과연 어느 쪽이 행복하냐 이 말입니다. 마지막 성냥 세 개를 가지고 추워서 하나 피우고 또 하나 피우고, 세 번째 피웠는데 꺼지고 난 뒤에 하늘나라에서 엄마를 만나는 것이 끝 장면이잖아요. 아침에 보니까 그 소녀는 죽어 있고.

 

세상 행복이란 그런 가식에 우리가 스스로 말려들면 안 돼요. 

그쪽으로 발걸음을 한다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되어가지고 

상대적으로 무엇과 멀어지느냐 하면 하나님의 고통, 하나님의 눈물, 피, 이것과 점점 더 아스라이 멀어져요. ‘

그냥 내가 편하면 되지. 이렇게 편하게 살다 부르실 때 가면 되지.’ 이렇게 생각하는데, 

평소에 이 편안함과 이 행복이 어떤 아픔과 신음소리의 토대위에서 공짜로 준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는데, 

이 행복을 위해서 노력한 이 대가를 내가 누구한테 빼앗기기 싫다. 이렇게 돼버려요. 

이 빼앗기기 싫다가 뭐냐, 자기 의로 이게 마일리지가 쌓이는 겁니다.

 

자, 좀 더 구체적으로 해봅시다. 길갈 건너와서 실로에서 언약궤 있으니까 제사를 드렸어요. 아직 성전이 있을 때가 아니고, 예루살렘도 그때는 다른 민족이 있었으니까. 실로, 에벤에셀, 아스돗, 가드, 에글론, 벧세메스, 기럇여아림. 예루살렘은 점령당했다가, 안 당했다가 왔다 갔다 했으니까. 이렇게 해서 중간에 뭘 유발시켰느냐 하면 재앙을 내리는데 이 재앙이 저주입니다. 재앙이 저주에요. 그래서 여기는 우리가 좀 더 어렵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분명히 이스라엘은 말씀을 안 지키면 저주받죠. 그죠? 

그런데 언약궤가 이방나라에 갔을 때는 그냥 저주에요.

 

왜냐하면 이방나라는 십계명이 없어요. 율법도 없어요. 율법도 받은 적이 없고 제사법도 모르는데, 그 모르는 데에 언약궤가 합류가 되니까, 그냥 저주라. 그냥 저주에요. 이거는 요한복음 3장을 보게 되면 제가 하는 말의 취지를 알게 됩니다. 요한복음 3장 36절 한 번 봅시다.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아멘.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않는 자는 진노가 머물러 있다고 했죠.

 

그럼 이 기준이 뭡니까? 아들을 믿는 자가 기준이 되겠죠. 그러면 청문회를 보면서 그 동네가 전부 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그럼 저주가 어디에 있어요? 그쪽에 있는 거예요. 만약에 선을 보는데 저쪽 집안에서 의사가 나왔다, 우리 딸은 복음을 안다, 그럼 이것은 선보는 자리가 아니고 무엇과 무엇의 만남의 자리에요? 저주 아래 있다고 하니까 그 사람이 길을 가면 갈수록 저주가 따라가는 거예요. 저주를 머리에 쓰고 사는 사람과 영생을 머리에 쓰고 사는 사람과 선을 보고 있는 거예요.

 

근데 그쪽은 복음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데, 키가 186에다 성격 너무 좋아 보이고 인물 너무 좋아서 2세까지 완전히 보장되고, DNA가 괜찮으니까, 특히 집안이 배운 집안이고 나중에 자기아들한테 병원 하나는 차려줄 수 있는 여력이 되고. 특히 중요한 것은 아들이 하나밖에 없어. 유산은 완전히 독식하게 되어 있고. 그리고 사돈도 가만히 보니까 곧 죽을 것 같아. 살날도 날짜가 얼마 안 남은 것 같아. 단지 있다면, “나는 결혼해도 예수 안 믿겠습니다. 종교는 안 믿겠습니다.” 이것 외에는 딴 것은 없다.

 

자, 문제 나갑니다. 결혼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해야 됩니다. 딩동댕~전국노래자랑 딩동댕~당연히 해야 되죠. 해야 내 쪽 아이스케키 묻은 것이 좀 빨리 녹죠. 막대기를 너무 감추고 있었어요. 막대기를. 저쪽을 해가지고 좀 녹아내려야 돼요. 결혼 해야된다가 아니라 아예 적극적으로 그런 사람을 찾고 있죠. 결혼 할 사람을 적극적으로 찾고 있을 걸요. 예수 믿는 사람끼리 한다는 것은, 그거는 잘못된 생각이에요. 왜냐하면 예수 믿는다는 것, 그게 12월 25일에 예수 믿었더라도 26일에 안 믿을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예수 안 믿었던 의사가 복음을 알고, 복음을 안다는 그 부인이 안 믿는, 역전될 가능성도 거의 완전히 50대 50이에요. 50:50 아직 애를 안 낳아봤으니까. 애 낳고는 완전히 예수고 뭐고 애한테 환장하는 그럴 가능성도 농후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는 곳마다 재앙을 유발시켰습니다. 재앙을 유발시켰을 때, 이것은 이유 없는 재앙이에요. 그들이 잘못 한 것이 아니에요. 이유 없는 재앙. 자기 딴에는 최선을 다합니다. 여기 5장, 6장, 7장, 죽 보게 되면 거기서 뭐가 드러나게 되느냐 하면 우상의 본질이 다 드러나요. 자, 재앙이 왔을 때 그들은 평소에 그들이 했던 매뉴얼대로 해요. 자기 나라에 재앙이 왔을 때 다곤 신에게는 어떻게 했는지, 그것을 그대로 하는 겁니다. 언약궤로 말미암아 재앙이 왔다는 것을, 그것은 알았거든요. 기껏 그들은 자기들이 아는 식으로 커버하는 거예요. 빨리 냄새나는 수채 구멍을 막아야 하니까. 어떻게 그걸 빨리 일처리하려고 나오는데, 그 나오는 양상들이 이스라엘이 여호와 섬기면서 했던 양상들과 어찌 그리 닮았는지.

 

앞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멸망할 때, 그 다곤 신을 섬겼던 블레셋 사람들과 똑같은 인식과 의식을 가지고 여호와를 위해서 제사를 드린 일종의 점집이 되죠. 제사 드린 것이 판명 나게 되어 있습니다. 언약궤 때문에 블레셋이 망했다면 이스라엘도 아무리 제사를 드려도 의식 자체가 바뀌지 않는 한, 여호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제사를 드려도 블레셋 꼴이 난다는 것을 이스라엘이 앞으로 각오를 해야 될 거예요. 각오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여기서 뭘 생각해야 돼요? 저렇게 기관차가 폭주하듯이 하는데, 블레셋이 여기에 온 정성을 다하죠. 다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됐는데, 왜 언약궤가 우리한테는 그동안 평온했던가? 저렇게 위험한 물건을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가? 그것은, 축복과 저주의 권한은 인간의 하기 나름이 아니고, 언약궤 하기 나름이에요. 언약궤가 나름 목적이 있었어요. 언약궤의 나름 목적이.

 

그걸 제가 첫 시간 강의하면서 제일 먼저 이야기했어요. 제일 초반에 이야기한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의해서 다루어지고 초청된 거죠. 근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내 소원을 들어달라고 교회 나오고 이렇게 하죠.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그걸 이제 성경말씀을 통해서 바꾸어주는 거예요. 바꾸어준다는 이야기해도, 초반에 그런 이야기만 해도 벌써 몇 명 나간다고 했죠? 이야기를 다 들어봐야 하는데, 초반에 “여러분의 귀한 것을 주께서는 다 뺏어버립니다.” 안 빼앗기려고, 그 소리 안 들으면 안 빼앗깁니까? 그 소리 안 들으면 괜찮은 거예요?

 

타조가 저쪽에 있는데, 짐승이 오는데도 타조는 도망갈 생각 안하고 땅을 파가지고 지 얼굴만 땅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안 봤다~ 영구 없다~ 자기가 저쪽을 응시했잖아요. 그럼 자기 응시를 자기가 없애버리면, 자기 응시, 자기화면 속에는 자기를 잡아먹을 짐승이 없기 때문에, 자기의 적들이 없으니까 그걸 현실로 보는 거예요. 궁뎅이(엉덩이를 뜻하는 강원도 사투리)를 확 밀어 버릴까보다. 그래서 복음이야기를 이래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도망칠 준비부터 해요. 수련회 하면 도망칠 준비부터 한다고요. 돈 십 만 원이 아깝다느니, 뭐 어쨌다느니, 할 것 다하고 지 먹을 것 다 사먹으면서. 그러지 말고 수련회를 위해 한 달에 만원씩 저축하는 성의를 그렇게 할 수 있잖아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사람이 영생을 얻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정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심어준 거예요. 그리고 이것은 변동이 없어요. 이 세상에서 변동 없는 기준을, 규범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그것은 집에 불이 나도 괜찮아요. 세상에 천하보다 더 귀한 것을 얻었습니다.

 

그러면 정서적으로, 심리적으로 흔들릴 이유가 없어요. 흔들릴 이유가 없다고요. 주께서 하는 일이 분명하기 때문에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될 문제지, 주의 뜻이 무엇입니까? 주여 뜻이 무엇입니까? 만날 주의 뜻을 이야기해도 아직도 주의 뜻을 못 받았어. 그저 이 여자만 주신다면 신이시여 뭐든지 하겠습니다. 어찌 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뭐 어떻게 하라고? 지가 지 맘대로 해놓고 이 여자만 주신다면 뭐든지 제가 다 해드리겠다고 해요. 임재범이가 고해에서 그런 노래 불렀어요. 꿇어 앉아가지고.

 

자, 5장, 6장, 후딱 다 지나가버렸어요. 이야기하는 가운데서. 5장 8절에 보면, “어찌할꼬” 가 나와요. 감당이 안 돼요. 임재범 노래에도 어찌 할까요?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여호와의 궤를 우리가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해야 보내느냐, 보내는 것을 확정해도 어떻게 보내느냐, 그래서 6장 4절에 보면 “그들이 가로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꼬 가로되 블레셋 사람의방백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이라야 하리니” 쥐가 왜 들어가요? 쥐가? 왜냐하면 이 방법이 재앙이 왔으니까 재앙을 제공하는 매개자가 아마 쥐 때문에 왔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쥐와 더불어서 언약궤에 실어서 보내는 겁니다. 마치 AI조류독감 인플루엔자가 같으면 병든 새를 살처분 해서 보내는 것처럼.

 

이 사고방식이 나중에 이스라엘의 멸망의 사고방식인데, 이 블레셋이 먼저 보여줍니다. 원래 이 공동체는 자칭 깨끗한 거예요. 깨끗하다. 근데 여기에 재앙이 왔다면, 깨끗한데 재앙이 왔으니까 제일 먼저 혐의를 둘 사람이 누굽니까? 뭔가 새롭게 뛰어든, 뭔가 이질적인 것이죠. 어떤 괜찮은 재벌집안이 있는데, 갑자기 재앙이 오고 사업이 안 된다. 그러면 한 달 전에 결혼한 며느리에게 혐의를 두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있습니다. 유다가 큰 아들 죽고 둘째 아들 죽으니까 그 혐의를 누구한테 둡니까? 다말이라는 며느리한테 두잖아요. 그 며느리한테 셋째 아들이 장성해도 안 주잖아요. 왜? 주면 또 죽을 것 같으니까.

 

이게 제일 처음에 이야기한, 내 것이 무너지면 안 된다는 겁니다. 내 것. 하나님이고 뭐고 내 것이 중요하지, 하나님은 뒷전이에요. 나중이에요. 하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것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이게 불신자의 특징인데, 신자는 뭡니까? 내 것 보다도 주께서 주신 확고하게 있는 규범, 확정된 것, 예수를,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게 되면 영생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께서는 어떤 사태와 상황들로 몰아세웠다는 사실. 흔들림이 없는 것. 그런 사람에게는 아까 예를 들었던 안 믿는 의사하고 결혼을 해도 오히려 감사하게 받으시면 됩니다. 결혼 하죠. 뭐? 그럼 교회는? 교회는 나중에 다니면 되고. 믿음은 성령 오시면 받으면 되는 거예요.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말고, 그것은 나중문제니까 빨리 혼사나 치릅시다. 이왕 말 나온 김에 빨리 날 잡고 초스피드로, 폭주하듯이, 빼앗기면 안 되니까, 해치워버려야 해요. 이건 신랑이 이런 방법을 쓰는 거예요.

 

그 다음에 6장 6절 봅시다. “애굽인과 바로가 그 마음을 강퍅케 한 것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기이하게 행한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아,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가지고 실제적으로 설교를 하셨네요. 뭐냐 하면 너희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곱게 안 나오고 저쪽을 어떻게 했다? 강퍅케 했다 이 말입니다. 누가요? 바로 왕이 강퍅한 사람이 아니에요. 인간성이 참 좋아요. 근데 이스라엘에게 무조건적인 은총을 더 크게 부각하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가만히 있는 점잖은 양반인데, 계속해서 강퍅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유발한 거예요. 재앙유발해서 그 다음에 성격을 악하게 유발시킨 겁니다.

 

그래서 명절에 복음 전하면 집안의 점잖은 친척들 전부 다 악한 성격으로 다 유발돼요. 먼저 입 떼지 마세요. 먼저 입 떼면 “처음부터 네가 집안 분위가 깨려고 노렸지?” 이렇게 돼요. 가만히 있다가 성령께서 건드리거든, 뭐, 교회가 어떠니 하면서 건드리거든, “그거 점집이거든요.” 이래 시작해가지고 그렇게 하면 돼요. 먼저 건드렸으니까. “참, 우리 교회는 전부 태극기에다가 번쩍 번쩍 달아가지고 박근혜 물러가라! 장로들이 권사들이 데모했다.”고 하면 “그거 다 점집이거든요.” 한 번 툭하고 던지는 거예요.

 

이거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6장 9절에 봅시다.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그가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빼냈던 그 소문난 여호와가 진짜 마음먹고 노리고 우리를 치기 위해서 재앙 내렸는지 아닌지는, 벧세메스로 암소 잡아가지고 올라가서, 사람 손은 안 되고 암소에 의해서, 그걸 자율차라고 합니다. 자율로, 운전대 없이 벧세메스로 가게 되면, 그거는 우리가 저쪽 이스라엘 하나님한테 된 통으로, 다이렉트로 당했다. “아, 그 출애굽의 그 이야기가 이게 현실이구나.”라고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보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전도를 누가 해요? 하나님 본인이 전도하지, 우리가 전도하거나 우리가 필리핀에 간다고 선교되는 것이 아니에요. 주께서 시키는 대로 하면 이 대전바닥이 선교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