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한 능력(마태복음22장23절)20161227대전강의83강-이 근호
두 번째 시간 마태복음 22장 23절입니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부활이 없는 이유를 이렇게, 이렇게 부활이 있게 되었을 경우의 불합리함, 따라서 부활이 있다면 이런 불합리함이 있기 때문에 부활은 없어야 된다, 라고 했던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사두개인들이죠. 원래 이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오경만 믿기 때문에 부활을 믿지 않아요.
그러면 구약성경을 안 믿는가? 안 믿는 것이 아니고, 후대에 뒤에 나오는 성경의 두꺼운 부분은 모세오경에 대한 어떤 해석판, 설명판이라고 봐가지고 모세오경을 중요시여깁니다. 그 이유가 뭐냐, 그건 모세가 직접 받았잖아요. 어디서? 시내 산에서. 누구 만나고? 하나님과 독대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비선실세입니다. 문고리 1인방이에요. 문고리 3인방이 아니고. 모세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갈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모세가 냈던 글은 자기 글이 아니고 하나님 그 자체죠.
모세오경을 통해서 누가 봐도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이잖아요. 출애굽기 19장에서 이스라엘만큼은 내가 확실하게 축복된 나라로 만들겠다. 나중에 다윗의 자손, 메시아를 보내서 만들겠다. 그걸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부활이 없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땅에 이상적인 나라가 건설 될 것인데, 부활될 이유가 없죠. 땅에 이상적인 나라가 생기는데. 부활이 되게 되면 땅에서 혼선이 일어나는 거죠. 그러니까 하늘나라의 부활이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고, 땅에서 죽어 다시 살아날 경우에 호적정리가 난처해진다 이 말이죠.
형이 결혼을 했는데 아들이 없다. 그래서 시동생하고 형수하고 결혼을 했는데 또 자식이 없다. 그렇게 둘째, 셋째, 몇 째까지 갔습니까?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다. 하여튼 여자가 문제야. 여자가 진작 죽었으면 총각들의 팔자가 그렇게 헷갈리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각각 부활 때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한 거예요.
우리가 이 사두개인의 말을 딱 보니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는데, 만약에 우리가 그 현장에 있다면 사두개인보고 “당신은 이래서 문제입니다.”라고 옆에서 조언을 해줄 때 뭐라고 조언을 해줘야 되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내신 정답을 모른다고 치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그들도 나름대로의 논리적이고 이성이 있는 사람들이니까.
부활이라는 것이 이 땅에 살아생전에 있는 관계, 가족관계가 그대로 동질성으로, 똑같은 관계로써 인수인계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뭐를 놓치고 있느냐 하면 인간이, 제가 이걸 지난 낮 설교에서 동질성이라고 했는데, 이 나라는 ‘나’가 죽어도 맨 그 ‘나’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바로 이렇게 연속성을 가진다, 또는 동질, 같은 질을 가지고 연속성을 가진다. 그럼 뭐를 모르느냐 하면 단절됨을 모르는 거예요. 단절된다, 바꾸어준다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구식 휴대폰을 가지고 있다가 모든 통신체제가 바뀌면 구식 휴대폰은 못 쓰고 새로 만들어진 휴대폰이 가동이 되잖아요. 그거만 쓸 수가 있잖아요. 내가 어떻게 구원받았느냐가 아니고, 내가 보여줄 세상은 이런 세상이었는데, 부활의 세상은 저런 세상이다. 세상 자체에 맞도록, 구성원이 거기에 맞는 인간이 돼요. 우리는 내가 있고 내 둘레에 세상이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게 아니고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여기에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개인구원이라는 것은 성경에 없어요. 보통 애기를 목욕시키면 애를 다 시키고 난 뒤에 그 더러운 물은 버리잖아요. 애는 건지고. 근데 하나님은 뭐냐, 둘 다 다 버려 버려요. 그 애는 여기에 맞는 애고, 새롭게 만든 곳에는 새롭게 애를 제조해야 돼요. 더러운 물과 함께 버리지 않는 아이는 없다는 말이 있어요.
우리의 상식으로는 애를 목욕시켰으면 애는 건지고 때는 버리는데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
양쪽 다, 이 세상이 얼마나 더러운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심어놓은 실존이고 인간이기 때문에
새로운 나라를 만들게 되면 이것과 전혀 다른 인간을 새롭게 만들어야 될 필요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사두개인은 이 땅에서 모세율법을 시내 산에서 줬기 때문에, 이 땅에 줬기 때문에, 이 땅의 율법을 믿고 지키면 점점 더 내가 착한 인간으로, 맨 같은 인간인데 착한 인간으로 바뀌어서 그대로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누가? 사두개인들이, 바리새인들이, 오늘날 모든 교인들이. 이 사두개인의 이야기가 오늘날 교회의 맹점을 제대로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새롭게 만들어질 생각은 안 하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내가 지금보다 더 향상된 괜찮은 존재로 만드는데 예수님이 어떤 정보나 팁Tip을 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모델로 해서 그 모델을 본받으면 우리가 지금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된다고 생각하고 교회를 가는 겁니다. 가서 지금보다 더 나을 수 있는 법 조항, 그런 시 조항, 명령 그런 것만 뽑아내서 그걸 실천에 옮겨서 숙제를 했는데, 숙제를 얼마나 잘했는지 스스로 측정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성적이 얼마나 올랐는지. 이게 바로 내신 성적입니다. 내신 성적.
그 내신 성적에서 제일 잘한 사람이 목사 본인이고. 그 다음에 거룩한 장로들이고. 만날 조는 장로들이고. 그 밑에 권사, 권사는 보지도 맙시다. 권사는 만날 집에 가면 장로하고 싸우기 때문에. 괜찮은 집사고. 그래서 일반교인들은 이미 수 십 년 믿은 사람이 저 정도 된다는 것을 보고 어떤 목표가 생겨요. 인생의 목표가. 잘하면 따라 잡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중심 잡은 영적 권위를 가진 목사가 어떤 말을 할 때는 말을 한다는 자체는 본인은 지키고 있다는 것처럼 하니까, 목사까지 목표를 잡으면 너무 거룩하고. 자기는 직업이 있으니까. 개인 직업이 있으면서 장로정도는 따라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죠. ‘저 정도야? 식사 기도하는 저 정도야? 그거는 나도 하겠다. 크리스마스 때 성가대 대원들 수고했다고 불고기 사먹으라고 돈 주고 하는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다.’ 돈 몇 푼주면 되잖아요.
그러다 어느 날 장로가 노래방에서 유행가 부르는 것을 보면 ‘저런 것도 돼? 저러면 안 되는 것 같은데? 세상을 사랑하면 안 된다고 야고보서에서 분명히 지난주에 우리 목사님이 설교를 했는데, 어떻게 그 설교를 듣고 장로가 노래를 불러? 그런데 그 장로가 너무 잘 살아. 아, 저거는 하나님께서 봐주는 모양이다. 노래방 가는 것은.’ 그러니까 자꾸 도전해야 될 모델이 지 편안대로 자꾸 점검이 되는 거예요. 지 편안대로.
제가 여기서 그림을 하나 그리겠습니다. 이게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를 이 그림 하나로 깔끔하게 설명되리라 생각됩니다. 원을 하나 그리겠습니다. 이 원 안에 있는 것을 중심 되는 핵, 중핵. 바깥 원 표면에 인간들이 살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주변사람을 봐요. 교회와도 저 장로는, 저 권사는, 저 집사는, 하고 이래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활이라는 이 사태, 이 장場을 주신 것은 중심(중핵)을 경유하고 다시 의미를, 복음적 의미를 가지고 세상(바깥 원)을 보게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잖아요. 부활 하실 때 그냥 부활하신 것이 아니죠. 어디로 갔습니까? 세상에 감추어진 비밀로 갔어요. 이게 뭐냐 하면 성령은 모든 감추어진 비밀을 알려줘요. 성령은 세상의 어떤 깊은 것이라도 다 통달하시니까(고전2:10).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서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성경말씀 중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 물으면, 신학자들이 이천년 교회역사 가운데서 제일 어려운 것은 최종적으로 딱 하나에요. 같이 볼 수도 있지만 두 가지로 나눌 수도 있어요.
첫째는 뭐냐 하면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저를 버리시나이까” 이상하다. 자기가 부활될 것을 그 전에 다 알면서도 왜 이런 말씀을 하시나? 지금 연기하시나? 일부러 알면서 지금 폼 내고 계시는가? 두 번째는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 두 개를 사실은 십자가에 관련된 하나로 보시면 됩니다. 이걸 속 시원하게 풀어주는 사람이 제가 보기에는 아직까지는 없어요. 조심해야 돼요. 없다고 하면 건방지다고하니까. 있을 수도 있겠는데 아직까지는 없어요. 이걸 설명해주는 사람이. 한꺼번에 풀어야 되거든요. 예수님이 그렇게 강하고 아버지의 신뢰, 아버지를 의존하는 것이 그렇게 강렬한 분이 갑자기 이 대목에서 그렇게 흔들리느냐 이 말입니다.
논리학에서 S와 P라는 표시가 있습니다. S는 주격이고 P는 서술격이에요. 서술격. 나는 밥을 먹는다 할 때, 나는-S에 해당되고 밥을 먹는다-P에 해당되는 겁니다. S해놓고 뒤에 아무것도 없으면 안 되죠. “나는..” “뭐?? 말을 해? 뭐? 어떻다고 말을 해!” “나는...” “뭐? 아프단 말이야? 신난단 말이야? 뭐 돈을 달란 말이야? 자고 싶단 말이야?” “나는..” “그 다음이 뭔데?” 하잖아요. 이 주격은 그냥 홀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반드시 서술이 있습니다. S-P
이 S자리에 누가 있느냐 하면 아버지가 계세요. P자리에 누가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계십니다. 언제? 창세전에. 창세전에 아버지(S)하고 예수님(P)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와서도 예수님은 여전히 아버지를 찾으면서 P의 자리에 있잖아요. 그런데 이 땅에 와서 예수님은 중보자가 돼요. 그러면 P이면서도 S와 겹치는 겁니다. S와 겹치는데 십자가에 와서 S와 P를 분리해야 될 입장에 있는 거예요. 중보자가 아니라면 S와 P를 겹치지 않습니다.
중보자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대리자라는 뜻입니다. 누구 대리자냐 하면 죄인의 대리자거든요. 죄인의 대리자. 예수님이 하늘나라에서는 P지만 중보자입장에서는 아버지를 대신해야 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와서는 S자리에 계시는 거예요. 이 땅에 아버지의 모습으로 오신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리고 자기 백성은 P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S자리에 있어야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기도했던 그들만, S자리에서 기도하신 예수님과 관련된 P의 자리에 해당되는 진짜 자기백성, 예정된, 택한 자기백성이 되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어렵지 않죠? 그 다음에 봅시다. 아버지 앞에서는 P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하나님을 대신하니까,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니까, 주의 이름으로 왔으니까 S가 되는 겁니다. 이 S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분리가 되는 거예요. 분리가 되게 되면 이제는 사람하고 관계 안 합니다. 아버지하고 관계하잖아요. 그러면 S의 자리는 아버지한테 맡기고 P의 자리에 갑니다. 근데 P의 자리는 바로 무슨 자리냐 하면 죄인의 자리에요. 죄인의 자리니까 죄인의 자리에 충실해야 돼요. 죄인이니까 지옥 가는 것이 당연하죠. 죄인이니까 나무에 올려서 저주받아야 마땅한 거예요.
나무에 올려서 저주받아야 한다고 하는 것을 지난 오후 설교에서 제가 한 기억이 나는데, 그거 들어보셨습니까? 신명기 21장 22-23절. 하필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받는다. 왜 나무에 달렸느냐 하면 하늘 쪽을 향하여, 땅과 약간 거리가 있는 관계에요. 나무에 달렸다는 말은 땅에 엎어져 죽은 것이 아니고, 쳐다보듯이, 누가 보듯이 죽은 거예요. 그걸 나무에 달렸다 이 말이죠. 제가 설교하면서 그 말씀을 몽땅 누가 가져간다고 했어요? 예수님이 다 가져간다고 했죠. 비빔밥으로 제가 예를 들어서 했잖아요. 두 사람이 비빔밥을 시켰는데 한 사람이 전화 받고 끊었는데 한 사람이 다 먹었다고. “내 비빔밥 어디 갔노?” “내가 다 먹었다.”
말씀을 주셨는데, 말씀을 예수님이 다 가져갔어요. 다 가져가서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무위에 올라가버립니다. 이 나무위에 올라간 모습이 어떤 모습이냐 하면 요한복음 3장에서 모세가 놋뱀을 들어야 한다고 하거든요. 이 들어야 한다는 말이 땅에서 일어난 사건이면서도 땅에서 표현한 하늘의 모습을 땅과 간격을 띄우면서 높이 쳐다봐야 한다. 쳐다봐야 한다는 사실을 유발시키기 위해서 중보자가 나무위에 달려 돌아가셔야 되는 거예요. 근데 그게 이미 아버지께서는 저주받은 자가 그래야 된다는 거예요.
그럼 예수님 전에 나무 위에 달린 자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있죠. 있어도 그건 저주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아버지(S)와 예수님(P)의 관계에 있지 않기 때문에. 말씀의 완성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서 P의 자리에, 말씀을 완성하는 P의 자리에 충실해야 되는 겁니다. 충실하기 위해서는 인간들이 갖고 있는 죄라는 것을, 인간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다 보여줄 수가 없어요.
예수님은 중보자이기 때문에 인간 편에 서서, 그것도 구원받을 사람, 예수님S와 자기백성P의 관계에 있게 될 사람, 그 사람들을 위해서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지나가게 해달라는 그 기도밖에 할 수가 없어요. 그것밖에 못해요. 모든 인간들의 한계가 그거에요. 너무나 고통스러울 때는, 고통의 극한에서는, 이 고통이 나한테 대충 왔다가 가게 해달라는 그거밖에는 못해요. 욥도 마찬가지고.
인간을 대신해서 다 이야기해놓고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고 하면서 자기가 지금 P의 자리에 있다는 외침이에요. 그리고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이것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성립되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중보자라는 것뿐만 아니고, 예수님이 벌써 점선으로 된 P라는 것을 확보했다는 것이 됩니다. 확보하는데 성공했어요.
그 다음에 빈자리, 점선으로 된 P의 자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제는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기가 원하는 자를 집어넣게 됩니다. 집어넣게 되면 이 집어넣은 자리가 무슨 자리냐 하면, 집어넣은 사람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는 이 놀라운 고백이 터져 나오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하게 하시죠. 성령께서.
이 사람은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예수님만 바라보는 이미 영생 받은 자가 되고, 축복이 머물러 있는, 그 사람이 어디를 가도, 서울 가도 서울에 축복이 가 있고, 부산 가도 부산에 축복이 가 있고, 어디를 가도 축복을 유발시키고 보여주는 사람으로 사는 겁니다. 교도소에 가도 축복이고. 마치 요셉처럼. 어딜 가도 주께서는 함께 하셔서 요셉으로 하여금 복의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게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성도가 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시가 되고. 왜냐하면 그 사람 속에 그리스도가 움직이니까.
이러한 관계를 성령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위에 예수님처럼, 예수님도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잖아요. 물론 예수님을 안 믿고 핍박한 사람들이죠. 오늘날도 우리가 스데반 집사를 보세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을 때 청와대 누구한테 전화했어요? 아무한테도 전화 안 했죠. 자기 일가친척이라든지 누가 와서 때리지 말라고 비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없었죠. 그냥 그대로 짱돌이 날아오도록, 예수님께서 장치를 그렇게, 미장센이죠. 장치를 그렇게 만들었어요. 무대장치를 그렇게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성령이 충만해서 그렇게 했을 때에 이 돌을 던지는 바로 옆에 사람을 다이렉트로 본 것이 아니고, 옆에 돌 던지는 사람한테 “니 죽는다. 니 지옥 간다.” 이렇게 한 게 아니고,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중심, 중핵을 경유해서 이것을 다시 주변(바깥 원)에 있는 사람들을 해석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나라, 또는 천국의 나라, 라고 하는 것을 새롭게 만들어요. 그래서 여기 31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절,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할 때에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은 아브람의 하나님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건 제가 지난 번 수요일에 설교를 했죠. 아브람의 하나님이 아니에요.
아브람은 아브라함을 생각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죠. 인간의 한계는 자기가 상상한 한계 바깥으로 스스로 자기가 갇히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상상한 그 안이 자기의 상상한 전부가 되고, 그게 현실이 됩니다. 이걸 지난 낮 설교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펜스라고 했죠. 펜스를 친 존재가 누구라고 했죠? 악마인데, 악마를 이 세상 신이라고 했죠. 이 세상 전부는 야구장처럼 악마가 펜스를 쳤다 이 말입니다. 이걸 설교할 때 아우른다 했죠.
그러니까 복음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아이고, 내일 되면 모르지. 모레 되면 모르지. 나는 알지만 저쪽 미국은 모르지.’ 이게 아니고, 복음을 안다는 것은 세상 전체를 다 아울러서 한꺼번에 다 아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전체는 다 어디에 갇혀있다고 했습니까? 펜스에 갇혀있다. 악마, 펜스, 이걸 제가 무슨 쇼라고 했습니까? 트루먼 쇼. 1998년 작품인데, 세트장이에요. 만두 찔 때 덮어주는 모양처럼, 반원모양으로 되어 있고, 그 안에 보면 섬이 하나 있고, 바다도 인공적으로 만들어서 트루먼을 어릴 때부터 생중계해가지고 세계 모든 사람이, 심지어 중국까지 중계가 됐다고 해요.
뭔가 이상한 트루먼 쇼를 하고 있는 거예요. 기획자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 기획자입니다. 우리는 악마가 쳐놓은 펜스에서 하죠. 그럼 이 펜스에 어떤 낙서가 되어 있겠습니까? 낙서라고 하는 것은 지난, 지난 주 낮 설교에서 했는데, 이 낙서를 두 자로 뭐라고 했던가요? 이 낙서를 종교라고 했고, 이 낙서를 지난주에는 삼위일체, 신학이죠. 신학을 알면 구원된다고. 근데 신학은 마귀가 준 건데?
신학은 개인구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어떤 신학을 알면 구원받습니까?” 질문 자체의 시작이 이렇게 돼요. “이런 식으로 하면 구원받습니다. 언제, 몇 월 며칠에 구원받은 것을 알면 구원받습니다.” 이게 구원파의 신학이잖아요. 칼빈주의 신학은 뭡니까? “하나님의 예정되어서 구원받습니다.” 이게 칼빈주의 신학이에요. 칼빈주의는 구원의 능력이 아닙니다. 신학끼리 싸우고 한국교회 썩었고 신천지가 이단이라고 하는데, 둘 다 이단이에요. 둘 다 십자가 복음 같으면 교회에서 다 쫓아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복음은 이미 악마의 능력에서 벗어난 분이 유일하게 규범으로, “오직 이것뿐이야!” 하고 제시한 것이에요.
구원의 능력은 오직 십자가다.
근데 이 안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인간에게는 신학이 있고, 성경공부가 있고, 큐티가 있으니까, 인간들이 지혜롭고 슬기로워요.
근데 십자가는 뭡니까?
어리석은 거예요. 미련하고. 미련하고 어리석다 이 말이죠.
왜? 무엇을 해도 소용이 없으니까.
“그럼 나는 어떻게 구원받아야 합니까?”라는 것이 나오죠. 니가 그런 소리 한다는 자체가 이 펜스 안에서 세상 악마가 우리 마음속에 그런 말이 나오도록 퍼트린 거예요. “144,000까지 전도하면 구원받습니까?” 여호와증인이나 신천지나 다 그런 것 하잖아요. 144,000을 채운다고, 자리채운다고. “일천번제하면 복 받습니까?” 이건 기존교회에서 하는 거고. “방언하면 구원받습니까?” 이건 순복음 교회나 기존교회에서 다 그렇게 하고. “하나님의 계시, 허연 영감이 나타나고 있고, 하나님의 계시 받으면 구원받습니까?” 이게 뭐냐 하면 세상 악마가 뭘 막기 위해서?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의 피 능력을 가로막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데, 그걸 누가 그렇게 시켰느냐 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시킨 거예요.
시킨 이유를 지나 낮 설교 때 했습니다. “욥을 한번 봐라. 욥을.” 욥은 하나님하고 마귀하고 내기를 안 했으면 제 3의 욥이 나타나지를 않아요. 욥은 제 3의 자기가 완전한 것도 몰랐어요. 마치 아브람이 아브라함인줄 상상도 못했어요. 내가 어떤 인간이 되어서 구원받는지를 내가 짐작도 못해요. 그래서 제가 그랬잖아요. 욥 안에 욥이 구원받는다고. 동질성은 아닙니다. 반드시 그 중심에 중심 핵, 십자가를 경유해야 돼요.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유명한 말씀이 나오죠. 우리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심지어 우리라 할지라도. 천사라 할지라도. 천사가 와서 이야기해도 믿지 마세요.
십자가 복음이 아니면 구원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보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해놓고 그 다음에 행함 문제로 나갑니다. 갈라디아서 3장 3절에, 니가 어떻게 성령으로 시작해서, S죠. 주격이 하나님인데 니가 어떻게 S자리에 들어가느냐, 니가 어떻게 S자리에서 P자리로 해서, 니가 어떻게 관리주체로 삼아서 너를 구원시키겠느냐, 이 말입니다.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자기가 주체고 자기가 객체인 이 예를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평생을 자기 인생을 자기가 꼬깃꼬깃, 매일같이 일기 쓰고, 매일같이 Q.T하고, 성경에 줄 그어놓고, 성경 보면 줄을 다 그어 놓아가지고 더 이상 줄 칠 데가 없어요. 그것도 모자라서 성경 다 베껴 쓰고, 정성이에요. 이 베껴 쓰는 것은 다른 종교에도 다 있거든요. 힌두교나 불교에 보면. 티베트에 가면 불경 돌리는 것이 있잖아요. 안 가봤지만. 안 가 봐도 <걸어서 세계 속으로>라는 프로그램 보면 다 나와요.
그러니까 천주교인들은 마리아상 앞에서 머리부터 시작해서 어깨에다 미사일을 팍팍 꽂죠. 그 모든 짓거리를 마귀가, 그렇게 해야 사람이 뭔가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 안정이 돼요. 백팔번뇌라고 해서 묵주 돌리고, 이런 짓 하고 있어요. 교회 오면 앞자리에 앉아야 은혜 받고. 꿇어앉으면 더 은혜 받고. 박수도 잘 쳐야 되고, 손깍지 끼워서 모아야 되고, 옥색 원피스 입고 오늘도 무사히, 앞에서 주여! 하면....., 습관은 제 2의 천성이 돼요. 악마가 아예 칩을 박아놓아 버렸어요.
그래서 교회 오래 다니고 중직들 가정 같으면 뭐 앉았다 하면 저절로 나와요. 주~여! 주~~여! 말을 해? 뭐라고? 주~~여! 믿씁니다. 뭘 믿는데? 믿어야 할 것은 저를 믿지 말게 하옵소서. 그걸 믿어야 해요. 저의 이 행동을 주께서 쓰레기로 취급해주시옵소서. 선교회비 내는 이 행동을. 돈 내는 이 행동을. 십일조 내는 이 행동을 완전히 쓰레기로, 배추잎사귀보다 더 못하게 버려도 괜찮습니다. 그걸 믿습니다. 왜냐, 구원의 규범은 그게 아니거든요. 내가 행동을 바르게 하면 이게 성깔에 따라서 아침 다르고 오후 달라요. 아침에는 성질냈다가, 그리고 자기가 미워하는 집사가 1부 예배에 오면 자기는 2부 예배에 가고, 이래 갑니다. 꼴 보기 싫어가지고. 모르겠어요. 이번 수련회도 누구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있어서 안 나올 수도 있는데.....,
우리가 예배나 어떤 모임이 있다고 하면 갈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얼마든지 선택해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주께서 환경을 못 가게 만들면 못 가는 것이고, 가게 하셔서 가게 하는 그런 거예요. 저도 마찬가지고. 강의하고 싶다고 해서 강의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허락해야 됩니다. 모든 것이 우리가 P의 서술어 자리에 있고, P의 자리는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림을 다시 그리면
눈에 보이는 세상, 바깥 원이에요.
반드시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곳까지, 중핵을 경유해서 보게 되면
예수님이 다녀간, 공생애의 아픔을 남기고 다녀간 이 공생애를
우리가 반복해서, 되풀이해서 그 다음 기수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돼요.
아브람은 절대로 아브라함을 생각 못했어요.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아브라함이 없는데서 불쑥 생기는 것이 아니고, 먼저 이삭이 있죠. 이삭이 있어 버리면 노선이 바뀌어버립니다. 광주가려다가 부산으로 가버려요. 지옥가야 될 노선이 이삭을 통해서 노선이 천국으로 가게 됩니다. 이쪽으로, 지옥으로 갈 때는 룰루랄라죠. 룰루랄라. 룰루랄라는 이걸 선형적시간관이라고 해요. 선형적시간관. 뭐냐 하면 그냥 과거, 현재, 미래가 철로처럼 직선으로 되어 있는, 선형적 시간관으로 쭉 갑니다. 내가 교회 몇 년 다닌 것, 유아세례 받고, 앞으로 내가 뭐 장로 되고.....,
근데 천국으로 가는 노선으로 바뀌어버리면 이게 선형적 시간이 아니고, 묵시적 시간이 돼요. 내일은 난 몰라요, 가 돼요. 내일 죽는다는 말이 아니고, 오늘 살았으면 오늘로 족하니라. 내일 염려는 내일하라. 이 말은 내일의 계획에 대해서는 니가 주도권이 없다는 거예요. 내일의 계획을 뭐로 채워 줄지, 그거는 주께서 S의 자리에 있으니까, 주격 자리에 있으니까 주께서 또 어디로 몰아넣을지, 또 어떻게 될지.
예를 들어서 1월 8일에 수련회를 하는데 1월 7일에 제가 독감에 걸리면 어떻게 돼요? 독감 걸리면? 취소죠. 취소되는 겁니다. 그럴 줄 알고 내가 독감주사를 맞았지. 그럴 줄 알고. 그래서 예정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예정이 아니고 미래예정이에요. 주께서 마중을 나오는 예정이에요. 마중을 나온다는 말은 앞으로 되어 질 일에 대해서 니가 예비하거나 준비할 하등의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하등의 자격이 없어요.
그 확실한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소고기 사주면 집에 들어가지.” 이래 안 했거든요. “가락지 주면 아버지 얼굴 봐서 한 번 집에 들어가 주고.” 이게 아니고, 뭘 주느냐 하는 주도권은 아버지한테 있지, 자기는 그냥 고개 푹 숙이고 ‘받아만 주시옵소서. 이게 웬 횡재고?!’ 이러고 있다 말이죠. 이런 마음. 근데 거기에 가락지 예정되어 있죠. 소 잡는 것 예정되어 있죠.
예정이 나를 마중 나와 버리면 거기서 뭐가 날아가느냐 하면 내가 어떻게 되겠다, 하는 그것이 예정의 자리에서 우리는 빠져야 되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했더니만 구원받았다고 하는 이게 예정이라는 마련된 자리에서는 빠져야 되고, 구원하기 위해서 준비된 것은 다 주님의 의해서 준비한 것이지, 내가 미리 예정해서 한 것은 없다는 겁니다. 내가 구원을 예정해서, 이거 예정으로 구원받은 것은 없어요. 구원받은 사람은 주님의 의한 예정을 날마다, 매일같이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이삭은 아브람을 위해서 죽은 자가 되죠. 이삭을 볼 때마다 아브람은 죽은 자가 되죠. 아브람에서 이삭이 나왔잖아요. 이삭의 이름이 웃음이라 말이죠. 이 웃음은 불신앙이거든요. 사래 때. 이삭이라는 열차가 달린다면, 그 안에 자기가 있다면, 옛날 열차를 보면 석탄을 태우잖아요. 그래서 삐이익 하고 경적을 울리면서 움직이죠. 그 탄의 재료가 뭐냐 하면 아브람의 불신앙의 재료가 되어가지고 기차가 천국으로 가는 거예요. 아브람의 불신앙이 날마다 아브라함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이것이 벌써부터 시작된 곳, 그것이 뭐냐 하면 부활의 세계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죽은 적이 없죠. 아브람은 죽은 적이 있지만 아브라함은 죽은 적이 없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산 자의 하나님이에요. 아브라함은 살아 있어요. 아브라함의 이름을 줄 때마다 그 이름 안에 죽어도 살아있는 내용물이 들어있기 때문에,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거든요. 그리고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그 내용물로 들어간다 말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이고. 예수님 안에서 이미 죽음이 극복된 상태에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날마다 우리의 육은 마땅히 죽어야 되고, 육이 마땅히 죽어야 된다는 말은 성경에 보면,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보면 매일 우리의 묵은 옷을 벗기는 거예요. 물론 비듬도 떨어지고 각질도 떨어지죠. 쓰레받기로 쓸어 담아보면 그게 우리의 시체 아닙니까? 지연된 죽음. 자꾸 죽음의 흔적들을 떨어내죠. 그 사람에게서, 흙에 속한 육체에게서. 자꾸 죽습니다. 보톡스 맞아봐야, 청와대에서 맞아봐야 한 번 신경 쓰면 그 맞은 효과 다 날아가요. 소용없습니다. 그게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에요. 이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는 아브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죄 값은 사망이 되죠.
만약에 제가 수련회 할 때, 제 의식이 뭐냐 하면 불신자들이 처음 왔다, 복음을 전혀 안 믿고, “이야기하기만 해봐. 내가 너한테 욕할 거야.” 라고 만반의 준비가 된 사람, 너무나 현실적인 사람들만 왔다고 치고, 그렇게 강의를 합니다. 그럼 제가 말을 던지죠. 인간은 왜 늙죠? 그렇게 공격하고 싶으면 제 질문에 답변을 해보세요. 인간은 왜 늘고 왜 죽느냐 말이죠? 여러분 살고 싶죠? 다 살고 싶죠. 다 살라고 하니까. 근데 왜 죽어요? 살고 싶으면 계속 살아야지 왜 죽습니까? 모르잖아요. 그럼 그 다음에 나오는 멘트가 뭐냐 하면 로마서 6장 23절, “죄 값으로 죽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 하고 죄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예요.
그러나 그 사람들은 제가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뭐냐 하면, 사람 뭐 있어? 그냥 살다가, 교회 가서 착한 일 많이 하고, 착한 일 많이 하면 천당 가겠지. 뭐 복음이고 뭐고 지가 아는 상식대로만, 교양인 같으면 교양인답게, 아는 대로, 우리도 좀 알아! 이래 하는데, 저의 질문은 그렇게 교양 있는데 왜 죽느냐 이 말이죠? 그렇게 교양이 있는데? 어쩌다보니 죽죠. 어쩌다보니 죽는 것이 아니고 죄 값으로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죄를 서른 살 때까지만 짓고 그 다음에 안 짓는 것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뿡뿡 방귀를 뀌는 거예요. 죄를 계속 낳는 거예요. 계속해서. 죽음에 가까우니까 누적된 방귀가 더 많은 거예요. 각질이 더 많고. 그걸 ‘아이고, 아쉽다. 교회 가서 착할 수 있었는데?’ 하지 마시고, 그게 하나님의 조치에요. 누구나 그래요. 누구나. 복음을 알든 말든 누구나 그렇게 죽어요.
그러나 복음 아는 사람은 이렇게 죽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친절함으로 보여요. 하나님의 친절함으로. 고맙습니다. 또 늙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눈이 내려갔는데 눈을 찝을까? 올릴까? 제가 오후설교 때에 그런 이야기했죠. 인생을 살면서 가끔 고소할 때가 언제냐 하면 오랜만에 동창을 만났는데 자기보다 더 늙어 보일 때. 갑자기 예상 못한 희열이 오는지. “아이고, 야야! 니 와 그리 늙었노?” “니도 만만치 않거든?” TV에 탤런트가 오랜 만에 나와 보세요. 굉장히 갑자기 늙어 보이죠. 이순재 나왔을 때 갑자기 늙어 보였는데, 꽃보다 청춘에 나와 가지고 괜찮아 보이잖아요.
사람들이 본인이 나서야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거는 오해입니다. 그냥 강아지처럼 가만히 있어도 매일같이, 주님이 매일같이 주님의 일을 하는데, 그게 하루에요. 하루. 매일. 매일매일 주께서는 나를 가지고, 오늘 이렇게 한 번 다듬어볼까? 오늘 이렇게 해볼까? 매일같이 우리를 조각품처럼 손댑니다. 어떻게 빨리 처치할까하고, 죄 값으로 어떻게 더 늙게 보이게 할까하고. 그래야 성경말씀과 합당하니까.
석가모니는 늙어죽었어요. 맞죠.
예수님은 죄 값으로 죽었어요. 그게 달라요.
석가모니는 우리하고 같은 류類인데,
예수님은 같은 류類가 아니에요.
석가모니랑 합쳐서 우리는 전부 다 아브람이라면,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되는 거예요.
어느 누구도 그 악마의 펜스에서 성공한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그래서 주님께서 오실 때는 어떤 방식으로 오신다고 했어요? 전에 다른 강의에서 다 한 것을 하려니까 미안한데, 다 듣는 사람도 있지만 다 안 듣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주사기 방식으로 들어온다고 했죠. 쑤실 때는 분명히 들어왔는데, 조금 지나니까 들어온 구멍을 못 찾겠어요. 그러면서도 지금 이 속에, 성령은 보증이라고 했어요. 성령께서 미리 선물로, 보증의 선물로 와 있어서 우리는 세상을 볼 때에 바깥 원에서 안에 있는 중핵, 중심핵을 경유해서 다시 세상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이 육신 때문에 갖고 있는 죄를 재료로 삼아서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 되게 하시는 그 기쁨을 우리에게 계속 주죠.
그 기쁨이 뭐냐, 주의 일은 한결같이 이미 확고하게 정립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확고하게 정립이 되어 있어요. 이것을 마태복음 22장 29절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니가 뭘 모른다? 하나님의 능력을 모른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이 뭐냐 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설교하시잖아요. 설교 안에 이미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있어요.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을지어다. 사두개인은 들을 귀가 없어요. 알고 똑똑하기는 한데 들을 귀가 없어요.
지금 이 땅에서 있는 모든 결혼제도는 흙에 속한 인간들끼리의 결혼제도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천사와 같이 결혼하지 않습니다. 천사는 성차가 없어요. 남성, 여성 차이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는 남과 여가 있어요. 이거는 인간들이 의논하고 회의해서 한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정해준 거예요. 그 이유는 남자가 여자를 넘어설 수 없고 여자가 남자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성차가 있는 것을 성차가 없는 식으로 전가될 수가 없어요. 넘어설 수가 없어요.
그 이유가 뭐냐,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동성애가 있죠. 왜? 동성애가, 성경에 보면, 레위기고 로마서고, 구약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어요. 동성애는. 동성애의 특징은 성차를, 하나님이 정해준 성차를 모독하고 있는 겁니다. 무시하고 있어요. 동성애의 특징이 뭐냐 하면 성욕이 과도해요. 이성으로서는 자기 성욕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부터 자극이 안 돼요. 변명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처음부터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나는 남자지만 속에는 여자가 있어서 그런다고 이렇게 변명을 해요. 변명을 하는데, 일단 그 변명에 대해서는 약간의 동의할 내용은 있어요.
뭐냐 하면 이게, 동성애가 가정환경 탓이 굉장히 많습니다. 가정환경 탓. 성차에 대해서, 남성, 여성의 분리됨에 대해서 환경적으로 날카롭게 그 가정이 체제가 잡혀야 되고 분별이 있어야 되는데, 그게 엉망진창이고, 아버지 술주정뱅이고, 어떤 그런 환경 속에서 ‘나는 안 저래야 돼! 나는 안 저래야 돼!’ 나는 안 저래야 되니까, 그게 뭐가 돼버렸느냐 하면 자기 성격의 정체성이 돼버린 거예요. 아버지가 엄마를 막 때리게 되면 갑자기 엄마에게 애정이 더 가게 되가지고, 엄마하고 자기하고 정신적으로 같은 일치감을 느껴버리면 동성애 속성이 늘어나는 것이죠. 그게 뭐냐, 습성은 제2의 천성이 되니까, ‘내가 왜 이러지?’ 하다가 ‘그래! 이렇게 되는 것이 편해.’ 그럼 자기 육체의 편안대로 사는 거예요. 편안대로. 동성애의 특징이 뭐냐, 환경이고 뭐고 없어요. 지 편안대로 사는 거예요.
마귀 짓입니다. 하나님의 기준, 기준자체를 완전히 무시하고 모독하는 거예요. 그럼 이 땅에 남녀는 왜 있는가? 그것은 제가 지난번에 설명했는데, 전에 남자가 먼저 있고 다음에 여자가 있잖아요. 남자가 여자를 만들었거든요. 만들었는데, 사실은 남자가 여자를 만든 것이 아니고, 여자도 하나님이 만들었죠. 남자가 잠잘 때 했으니까. 이 남자가 모든 것의 대표자가 되어 버렸어요. 그리고 난 뒤에 남는 것이 뭐냐, 생명나무, 나무에 생명이라는 것이 붙었잖아요. 이 생명을 여자 이름에 붙여버립니다. 그럼 여자가 남자를 새로 만들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여자의 후손인데, 여자의 후손은 아들이에요. 요한계시록 12장에. 아들 낳은 자만이 여자고, 그리고 여자에게서만이 아들이 나온다는 것은, 남자, 여자의 진정한 의미는 이 지상에 어떤 남자가, 여자가 이 자리를 차지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여자는 이미 남자에게 복속됨으로써 남성을 바라보는 여성이 되는 거예요. 저주받아가지고. 선악과 먼저 따먹어서 저주받아서. 모든 여자의 희망은 남성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여자의 후손에서 여자는 남성이 희망이 아니고, 이거는 그 자체가 생명인데, 기존의 모든 여자는 남자처럼 되면 사회에서 성공한 여자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여자는 자기를 소모하더라도 사랑을 원해요. 뭘 주던지 사랑을 원한다니까요. 남자와 하나 되는 그 사랑을 원해요. 결합되는 것. 근데 남자는 뭘 원하느냐 하면 소유를 원해요. “나 오늘 색시하나 얻었다.” 얻었다, 소유잖아요. 근데 여자는 자기 소유를 버리고 저 사람과 나와의 관계, 사랑의 관계를 원하는데, 그러니까 영원한 부부사이는 의견일치가 안 됩니다. 부부의 행복을 기대하지 마세요.
남자는 여자를 소유로 본다니까요. 남자가 나이가 많으면 소유에 실패해요. 아내라는 소유에 실패하고 자식이라는 소유에 실패하고. 여자는 남편이 주는 사랑에 버림받고 자식의 사랑에 버림받아요. 남자는 소유에 버림받고 여자는 사랑에 버림받고. 둘 다 동상이몽이에요. 그럼 왜 못 헤어지는가? 돈 때문에 못 헤어져요.
그게 이 세상의 죄악 된 모습입니다. 주께서는 이런 것을 통해서 죄를 더 육적으로 확대시키고, 이 땅을 확대시켜서, 주께서 모든 것을 다 심판하시고, 벌써, 성령이 주신 벌써 아브라함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이 사탄의 펜스에 갇혀있었던 것을 깜빡 잊어버리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저 남들처럼 되기를 얼마나 소원했습니까? 이것이 바로 쓰레기 같은, 같은 존재인 것을, 같은 죄인인 것을, 이제는 명심케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