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6. 12. 23) 34-1
마가복음 9장 30-31절 봅시다.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 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죽었다가 살아나야 메시아라는 사실에 대해 함구령을 내렸죠. 주님이 이 이야기를 함부로 발설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기만을 학수고대 했는데 그 메시아가 죽는다는 것은 희망 자체가 좌절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희망을 좌절시키는 메시아에 대해 언급해 봐야 그들이 믿지 못할 것이기에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만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실효성이 있을 리가 없지요. 괜히 개한테 진주를 던질 필요가 없는 겁니다. “남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안 한다.”고 하면서 제자들에게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제대로 된 메시아 관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은 다 버릴지라도 너희들은 내가 버리지 않겠다는 뜻입니까? 너희들만큼은 내가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의도가 강하지요.
‘너희들만큼은 내가 안 버릴 게.’라는 취지로 말씀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자기 능력으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다른 사람과 달리 총명하고 지혜로워서 주님을 제대로 알기 때문에 주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을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것을 적용시키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알아서 예수 믿고 신앙생활 잘하겠다는 것은 오늘 본문과 배치되는 거예요. 오늘 말씀이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들어온다면 ‘내가 어떤 수를 써도 예수 믿을 수 없구나.’ 이렇게 정리 되어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애써도 예수님을 알고 믿을 능력은 아예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이 나온다면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감사로 이어집니다. 저 사람보다 내가 더 낫기 때문에 주님이 날 버리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이나 나나 어리석기는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나는 다른 사람 생각과는 달리 ‘주님이 날 불러주지 않으면 나는 결코 주님께 갈 수 없다.’는 희한한 마음이 드는지 이상할 뿐입니다.
이건 성질이 착해서 이런 것이 아닙니다. ‘나는 원초적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할 수 없는 자다.’는 사실이 어떻게 수긍이 될까요? 이것을 수긍한다는 자체가 정말 특이한 일입니다. 기적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신앙생활 하는 것이 이 맛에 합니다. 아무것도 한 것 없고, 할 줄도 모르고, 해도 소용없는데 그래도 즐겁고 감사하고.
창세기 3장에 보면 세상 사는 것이 참 힘들고 어렵지요. 그러나 가끔 주님을 생각하면 힘들다는 생각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져요. 내 주제파악을 못해 나온 교만과 불평일 뿐인데, 이런 교만을 깨닫게 된 것으로 인해 더욱 감사한 마음이 들지요. ‘교만을 깨닫게 된 것으로 인해 감사한다.’ 이 말을 누가 이해하겠어요?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뭔가를 숨기셨다면 제자들에게도 숨겨야 하는데 알려주십니다. 그 다음 문제가 뭔가 하면, 예수님이 왜 돌아가시려 하는가? 자신의 죽음은 이미 예언한 말씀입니다.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사람들에게 죽임 당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셨어요. 왜 꼭 이렇게 하셔야만 합니까? 이 방식 외에 다른 방식은 없습니까?
현재 사람들이 사는 것을 ‘세상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 현실 외의 1’이 됩니다. 그래야 아까 이야기가 맞잖아요. 예수님을 아무도 못 알아보는 겁니다. ‘세상 현실 외’라고 했을 때는 ‘세상 현실’을 그냥 두고 이것 배경(빗금 부분)에 무엇인가 나타나겠지요.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주께서 일방적으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만들어 낸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세상 현실이란 테두리에서 예수님이 새로 만든 세상 현실 외의 범주로 넘어갈 수 있을까요? 일체 없습니다. 최근에 체스터턴의 책을 서평 해 놓았는데 읽어보셨나요? 지잭이 이 사람 글을 인용해서 제가 그 사람 책[체스터턴의 정통]을 읽어보고 서평 했습니다.
이 사람의 책을 보면 어떤 주장을 하는가 하면 ‘세상 사람들은 왜 예수를 안 믿을까?’ 자신은 변증이 아니라고 했지만 변증에 관한 글이에요. 제가 권하고 싶은 책은 아닙니다. 이 사람의 책을 읽고 불만스러운 점은, 이 세상 철학과 이성으로 진리를 찾아보자고 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대해 실망하시면 새로운 세상이 눈에 보일 겁니다.’ 이런 식으로 변증하는 것은 변증이 아니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시간 이미지에 의해 누구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하다하다 안 되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요.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살다 살다 못 살면 ‘죽으면 다른 세계가 있겠지.’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합니다. 이건 연결성입니다. 이생이 있으면 저생이 있다는 것. 이건 모든 종교가 그렇지요. 특히 이집트의 종교, 태양신. 태양신은 성질이 급해서 이 세상 자체를 죽음을 대배하는 세상으로 여깁니다. 바로왕 시스템이죠. 바로왕은 태양의 아들, 신의 아들입니다.
이 세상 끝나고 저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잭이 체스터턴의 주장을 수용해서 ‘기독교에 대해서 알았다.’고 하는 내용이 뭔가 하면, 이 세상 바깥에 천국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안에 천국이 있다는, 배격당하는 식으로 천국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해서 이 부분은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어요. 지잭이.
이 세상 안에 천국이 있다고 했는데, 이 세상 안에는 누가 살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지요. 그럼 우리 마음속에 천국이 왔다는 것은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 마음속에 천국이 들어오면 우리 마음이 영접하거나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 현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것처럼, 그 성질이 각 사람의 마음속에서 똑같은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이것은 라캉이 이야기하는 소문자 a를 말합니다. 뭔가 모르는데 우리가 안다고 하는 그 모든 것을 비켜 나가는 것. 우리가 알았다 싶으면 벌써 미꾸라지처럼 빠져나와서 우리로 하여금 욕망을 유발하면서 ‘따라오려면 따라와 날 잡아봐라!’는 식이 됩니다. 마치 달을 따라가는 것 같아요.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하고 쳐다보면 역시 저 멀리 떨어져 있어요.
아무리 따라잡아도 인간은 진리에 도달할 수 없는데, 도달 못하면 포기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절대 진리에 대해서 포기할 위인들이 아닙니다. 계속 포기하지 않고 따라잡는데, 그것이 뭔가? 미지의 X. 소문자 a가 우리에게 욕망을 불같이 유발시킨다는 겁니다. 지잭이 이런 주장을 하면서 로마서 7장을 언급해요.
로마서 7장에서 사도바울이 2개의 내가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2개의 내가 존재한다는 말이 아니고 기능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거예요.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만족했다가 불만족으로, 계속해서 2개의 이질적인 세력이 내 안에서 다투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냄비 속의 물이 온도가 올라가면 끓지요. 물이 끓으면 냄비 뚜껑은 들썩들썩할지 모르겠지만 냄비가 들썩들썩하지는 않아요. 우리의 겉모습은 냄비인데 우리 속은 내가 통제가 안 돼요. 이게 좋다가 저것이 좋고, 행복에 겨워 눈물을 흘리다가 갑자기 짜증나는 일이 생기고, 이런 식으로 우리 삶은 우당탕탕 요란하게 흘러갑니다.
우리 마음은 한 시도 고요한 적이 없습니다. 늘 요동치지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고요를 찾기 위해서 혼자 생각에 몰입합니다. ‘생각하지 않으면 고민하는 나도 없다.’ 생각 없는 현장을 ‘침묵’이라고 합니다. 침묵 속에 있으면 고민할 주체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산 속에서 침묵하고 있어도 산 밑에서 전기세 받으러 올라오면 침묵은 깨지고 맙니다.
라캉은 말합니다. 사람들을 a가 괴롭히니까 여기에 대한 대처로 ‘~인 척’ 하는 것으로 그때그때 때운다는 겁니다. 고요한 척, 침묵에 몰입한 척, 과거의 일을 잊은 척, 지금 죽으면 천국 가는 척하면서 사는 거예요. 사람들이 ‘이 땅에서 고생해도 죽어서는 저세상 가면 되지.’ 라는 생각은 본인의 선택이고, 선택은 본인의 생각에서 나와요.
로마서 7장에서 인간은 2개가 서로 싸운다고 했지요. 2개의 이질적 요소가 싸우는데 사람들이 이 싸움이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해 여기서 생각을 선택해요. 마치 깔끔하게 양복입고 외출하는 것처럼. 사실은 방금 부부싸움을 해서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대문 밖에서 이웃을 만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친절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것처럼.
이렇게 자신을 다른 나로 포장 또는 선택을 합니다. 이렇게 선택을 하면서 자신을 감추려고 하니까 이 선택이 과도하게 됩니다. 그럴 경우에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과도한 에너지가 소비됩니다. 그러면 당이 떨어지지요. 이 상태에서 누가 조금만 건드리면 분노가 폭발합니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는 거예요.
폭발을 못 시키면 온 몸이 다 아파요. 이 분노를 풀 대상을 만나지 못하면 외로워요. 그래서 자식 혹은 아내, 친구라도 붙들고 쏟아내야 됩니다. 그래야 숨통이 트이는 겁니다. 지잭이나 라캉이 잘 이야기했어요. 인간세계는 미지의 a가 우리를 골탕 먹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 해결책이 있는가? 해결책은 없어요.
지잭이 말하는 성령은 뭔가? 성령이 오면 사랑의 공동체가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분석한 현재 인간은 뭔가 자기 내부에 잡을 수 없는 것이 있어요. 잡으려고 하면 자꾸 도망치니까. 안 잡으면 찾아오고, 잡으려 하면 도망치고. 이것이 자신이 분석한 것인데, 그러면 성령의 사랑 공동체가 왜 난데없이 튀어나왔는가? 사랑의 공동체를 체험은 못했지만 성경에 나오는 내용이니까 갖다 붙인 거예요.
이제부터 이야기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상 못한 새로운 배경을 일으키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 31절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고 했잖아요. 그럼 질문하겠습니다. ‘사람은 누가 만듭니까?’ 사람은 사람이 만들어요. 왜냐? 사람에게서 사람이 나오죠. 이건 성경에서도 이야기합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다’라고.
모든 인간은 부모가 낳았어요. 사람이 사람을 태어나게 해요. 심지어 예수님도 사람에 의해 태어났어요. 마리아 없는 예수님은 없어요. 예수님의 아버지는 목수였고, 어머니는 마리아입니다. 이게 인간들이 알고 있는 지평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낳는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게 해놓고 ‘성령으로 낳았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현실로는 도무지 알지 못할 현실 밖이 등장했지요? 성경에서는 성령이 예수님을 낳았다고 했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나았지요. 그러니 생각이 다릅니다. 사람이 사람을 낳는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사람을 감히 영적 세계, 천국에 보내려고 애를 쓰고 있지요.
사람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령이 나았잖아요. 이미 영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이 육으로 이 땅에 오셨어요. 예수님은 영에서 육이 되었고, 인간은 육에서 영이 되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봐도 못 믿는 이유가 예수님은 육의 한계까지 가요. 육의 한계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영에서 육으로 태어났고, 그 육은 죽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영의 요소가 소멸되지 않고 계속 살아있어요. 그런데 인간이 예수님을 보면서도 못 믿는 이유는 방향이 달라서 그래요.
인간들은 지금 살아 있는 나를 어떻게 하면 영생의 나라에 갈 수 있을까를 계속 궁리하고 있습니다. 아까 ‘~외’라고 했지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이 방향성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육에서 영으로 넘어가려고 해요. 자기 죄 값으로 죽는 것이 목표인 사람은 없습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뭡니까? 신자는 예수님이 가는 방향으로 같이 따라갑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주님 따라 간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실 때만 가능합니다.
많은 사람이 가는 넓은 길로 가지 않고 주님 가신 좁은 길로 가는 것은 성령의 이끄심이 아니면 절대 안 됩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의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원인은 영이고, 결과는 죽음입니다. 인간들의 원인은 육이고 기대하는 결과는 영생입니다. 원인부터 이렇게 다른 거예요.
유대인들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됩니다. 여기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죽게 한다. 이건 맞는 말입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게 합니다. 얼마나 고마운 율법입니까? 율법이 오지 않았으면 우리는 의인이라고 여길 텐데 율법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내가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니 굉장히 감사한 일입니다.
이처럼 율법이 나로 저주 받게 한다면,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이 말은 내가 원인으로 나설 입장이 못 된다는 겁니다. 율법이 원인이고 우리는 율법이 원하는 결과가 될 뿐입니다. 따라서 결과로써 원인에 대해 제대로 고백하는 사람이 될 때 성도입니다. 이 말은, 이미 구원 받은 상태에서 성경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인이 되어 얻는 구원은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원인이잖아요. 내가 여기 있고, 사람이 사람을 나았잖아요. 그러니 우리는 태어나도 사람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겁니다. 사람 전체가 예수님을 죽게 한 악마의 종이라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는 말은 우리가 할 소리가 아닙니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이 할 소리지 인간이 할 말이 아닙니다. ‘내가 구원을 기다렸는데 마침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구원될 수가 없어요. 구원 문제는 오직 예수님만이 알아서 할 일입니다. 예수님만 구원자가 되어야 비로소 인간은 닭 쫓던 개 신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을 떠날 때 예수님이 떠나가셨다고 생각하잖아요. 물론 예수님이 떠나가신 것이 맞아요. 그런데 다른 복음서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났다고 되어 있어요. 어느 것이 맞습니까? 골로새서 1장에 보면 예수님이 중심이지요. 그런데 인간은 처음부터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해서 자신에게 어떤 조치를 해 달라는 겁니다. 자신에게 무슨 권한이 있는 것처럼.
“주여, 저는 저의 행함으로 구원 받지 못하니까 주님께서 저를 구원해 주세요.” 이렇게 나옵니다. 굉장히 겸손한 것처럼 보입니다. 에스더 4장 16절에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했는데, 에스더가 금식해서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행동을 취했습니다. 현재 인간이 알고 있는 것 외의 행동을 했어요.
법에 의하면 왕후는 왕의 초청 외에는 왕에게 올 수 없습니다. 만약 왕이 초청하지 않았는데 왕 앞에 나타나면 왕이 왕후를 죽여도 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법은 왕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법입니다. 그래서 왕이 요청할 경우에만 왕비는 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의 합리적 이성에 의해 만들어진 법입니다. 나라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이 법을 에스더가 깹니다. 그런데 그 전에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선언을 했어요. 에스더가 자살하려고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법을 무시하고 나선 행동입니다. 법을 무시한다는 것은 ‘너는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 앞에 지극히 미약한 인간이야.’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지키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입니다.
왜? 복음은 하나님의 모든 정성과 취지와 목적이 거기에 다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복음 외에 관심이 있다면 그는 개보다 못한 자입니다. 사람 취급 안 해도 괜찮아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정작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복음뿐인데, 인간들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냥 자기 정성 담았다고 ‘받으서소.’라고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재산의 반이 아닌 전부를 드렸다면 죽었을까요, 살았을까요? 그래도 죽었어요. 무엇이 중요한지를 몰랐어요. 복음만 중요하다는 점을 모르고 자꾸 복음 외의 것을 가지고 ‘이것 바치면 기뻐하시겠지?’ 이러고 있어요.
성령 앞에서 내 의를 내세울 수가 없어요. 우리가 어떤 일을 했다면 성령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낯선 빗금을 드러냅니다. 내가 오늘 새롭게 복음을 알았다고 좋아하면 그것도 비켜가요. 새로운 빗금을 내놓아요. ‘이만큼 알았으니까 이제 천국 갈 수 있겠지요?’라고 하면, 이것으로 구원 받겠다고 시도하는 복음 외에 속해요.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조차 복음 외에 속합니다.
주께서 이것마저 거부한다면 우리는 짜증을 내겠지요? 그 짜증 내는 요소가 아까 얘기했지요. 소문자 a로 우리 안에 들어 있어요. 우리 마음속에 있을 불평과 불만의 요소를 끄집어내요.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우리가 ‘~인 척’하는 줄도 몰랐어요. 성령이 임하니까 이것을 알았어요.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간직하고 있는 것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구나.’
주께서 늘 우리를 들쑤시는 그 능력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영이 되시는데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여기에 말씀이 있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육에서 영이 되는데다 말씀을 동원합니다. 말씀을 예수님이 좀 뜯어가고, 나머지는 인간이 뜯어가고 이렇게 됩니까? 아니죠. 모든 말씀은 예수님께 다 가버렸어요.
성령을 받은 후에는 예수님께 간 말씀이 우리에게 오면 ‘내가 이것만큼은 지켰습니다.’라는 말이 나올까요? 나올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는 누구도 합류할 수가 없어요. 처음부터 예수님 십자가로만 구원 받지 ‘나도 십자가 졌습니다.’라고 해서 구원 받을 자는 없습니다.
끝까지 예수님 십자가지, 내가 십자가를 알고 실천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주님이 발로 차버립니다. 우리가 스스로 신앙생활 할 수 있는 말씀을 주께서 남겨준 적이 없어요. 비빔밥을 2인분 시켰는데 전화가 와서 잠시 통화를 하고 왔는데 상대가 다 먹고 빈 그릇만 남았어요. 그 빈 공백이 바로 성도라는 그릇입니다. 거기에는 십자가만 담겨 있어요.
내가 할 일을 다 가져 가셨어요. 그럴 때 우리는 이 공백에서 미처 내가 발견하지 못한 육을 알게 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달라진 적이 없는 육 자체가 바로 나인 것을. 이것을 사도바울은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어요. 우리가 의롭게 될 여지를 성경 어느 구절도 남겨놓지 않았어요.
‘나 이것 지켜서 의인 되어야지.’ 이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숟가락 들고 먹으려고 보니 그릇은 비어있고, 이미 십자가 앞에 가 있어요. 온유하려고 했는데 온유가 사라졌어요. 남은 것은 온유한 척 하고자 하는 내 육적인 시도, 마귀적 그림자만 보이지요.
빈 그릇에 예수님의 십자가만 담긴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표현한 것은 아닙니다. 매일 나와 싸웁니다. 이것이 들어가야 해요. 나는 늘 주님 십자가에 저항하고 반발합니다. 철부지 아이처럼 찡찡거리죠. 엄마와 1살 된 아기가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재롱을 부리니까 아기는 웃어요. 5분 쯤 지나면 잠도 오고 웃음도 나고 하니까 엄마한테 짜증을 부려요.
자려면 곱게 자지 왜 엄마에게 칭얼대지요? 엄마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터무니없는 객기를 부리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거예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보기에는 아기의 본능인 것처럼 보이지만, 잠들기 전에 엄마한테 칭얼대는 것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생각이 드는 이유가 뭔가 하면, 엄마가 나쁜 것이 아니고 아이가 나쁜 거예요. 잠이 오면 그냥 자면 되지 왜 엄마를 괴롭히느냔 말이죠. 십자가가 우리 그릇 속에 들어온다는 말은 우리가 나쁘다는 거예요. 인간들의 불평은 잠투정하는 아이와 똑같아요. 불평하는 자들은 전부 다 하나님 탓을 합니다.
운전할 때마다 ‘하나님, 오늘도 지켜 주옵소서.’ 기도하는데 오늘은 아내가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 바람에 기도도 못하고 차를 출발시켰어요. 그런데 과속을 해서 경찰에 잡혔어요. 이 순간 정말 기분 나쁜 것은 다른 차는 내 차보다 더 빨리 지나갔는데 그 차는 잡지 않고 내 차가 잡힌 거예요.
사람들이 언제 기분이 좋은가 하면, 오랜만에 동창을 만났는데 자기보다 훨씬 늙어 보였을 때 얼마나 고소한지 몰라요. 이렇게 인간은 이기주의입니다. 생각을 바꿔보세요. 늘 걸려야 했는데 그동안 봐줘서 안 걸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오늘 기도만 했더라면 안 걸렸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게 뭡니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원인으로 봐요. 이 시간 강의 마치면서 생각해야 할 것은, 모든 것이 십자가에서 나온 결과인데, 복음이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나온 결과를 우리는 평소의 버릇이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고 그 귀함에 흠이 나는 것에 대해 투정을 부리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그릇에 담겼다. 이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그냥 담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늘 투정을 부립니다. 경찰한테 잡혔다고 짜증을 내고, 잠이 온다고 투정을 부리고. 그럴 때 내 속에 하나님을 거부하는 괴물이 나의 길들여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0분 쉽시다.rhkd
서경수 (IP:211.♡.22.140) | 17-01-18 13:59 |
광주 강의(2016. 12. 23) 34-2
예수님이 오셨는데 왜 꼭 죽어야 하셨는가? 그것은 인간의 자력으로 구원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력 구원은 방향이 틀렸습니다. 육에서 영으로 가려고 해요. 그러나 예수님은 영이면서 육이 되셨죠. 영에서 육이 되는 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합니다. 모든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이것을 지난 가락교회 강의에서는 ‘피리 부는 소년’이라고 했어요.
피리를 불면 모든 쥐가 다 피리 소리를 듣고 모입니다. 쥐 퇴치하는 데는 최고입니다. 만약 피리 부는 소년이 이 동네에 있다면 이곳에는 쥐가 한 마리도 없을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면 모든 말씀이 십자가 중심으로 쏠리게 되어 있습니다. 첫째 시간에 제가 말씀드렸지요. 우리가 지킬 말씀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네가 원치 않는 길로 데려간다.” 방향이 다르지요. 원치 않는 길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방향을 반대로 바꿔주는 일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제가 가락교회에서 강의한 내용을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물세례 다음에 성령세계가 옵니다. 물세례의 의미는 모든 인간은 죄인이란 겁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성령세례가 주어집니다. 그럼 물세례 안 받은 사람에게는 성령세례가 안 오는가?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그 안에 물세례가 이미 함유되어 있어요. 따라서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우리에게 반복시키는 겁니다. ‘네가 무엇을 해도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것이죠.
세례요한이 복음을 전파하면서 뭐라고 했지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했지요. 회개하라는 것은 방향을 바꾸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가는 방향은 어떤 방향입니까? 천국이 오는 방향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회개할 때 자신을 죄인 되게 만드시는 천국을 봐야지요.
내가 착한사람 되는 천국 말고, 나를 죄인의 괴수로 만드는 천국을 봐야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회개입니다. ‘도끼로 찍어버린다’는 이야기를 왜 했겠어요? 찍혀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구원 받는다면 저 돌들이 구원 받는다.’는 이야기는 왜 했어요? 내가 돌멩이만도 못하다는 것을 알면 그는 천국을 발견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돌멩이는 때려도, 욕해도 신경 쓸 권리가 없어요. 돌멩이기 때문에. 요즘 돌멩이 같은 사람들이 청문회에 많이 나오지요. “모릅니다.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안 했습니다.” 제가 만약 질문하는 국회의원이라면 그런 증인들을 칭찬하고 싶어요. “어떻게 그런 깊은 도를 닦았습니까?” 하면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이 진리라고 했어요. “아는 바 없습니다.” 진작 그렇게 살지! 자기보다 수준도 낮고 공부도 못한 것들이 공격해 올 때 “죄송합니다.”라고 하잖아요. 만약 청문회 자리가 아니라면 “너, 어느 대학 나왔어!” 이렇게 했을 텐데 청문에 자리에 나와 있으니까 저자세로 머리를 숙이고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얼마나 겸손합니까? 평소에 그렇게 살지!
우리가 주님 앞에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살지를 못해요. 왜 그런가 하면, 내가 원인이 되고, 내 수고와 희생의 결과를 노리면서 악착같이 살기 때문에 천국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잘 보여준 사람이 사두개인, 바리새인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에게 욕을 얻어먹는 겁니다.
방향이 바뀌었기 때문이지요. 주님은 물에 잠겨서 기다렸지요. 죄도 없는 분이 죄인만 들어가는 물에 잠겨 계시면서 ‘나 여기 있다. 하늘나라는 이곳에 있다.’고 하십니다. 여기에 개구리처럼 퐁당 뛰어든 사람은 주님과 하나가 됨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자입니다. 이 사람들이 다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자기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물에 잠겼다.’ 이것을 표본으로 성령세례를 줄 때 그대로 하십니다. 성령세례 안에 물세례가 들어 있어요. 예수님이 떠나시고 보혜사가 오시는 이유가 예수님이 떠나시고 난 뒤에 마무리로 성령이 오신다는 거예요. 성령이 오시면 마무리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할 기준 정하기가 이미 끝난 거예요.
그래서 무엇이 중요합니까? 하나님이 지키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복음이죠. 박카스나 건강음료에 보면 ‘의약 외 품목’이란 표시가 되어 있이요. 의약품이 아니잖아요. 세상의 모든 것이 ‘복음 외 품목’들이예요. 이런 것을 주님이 지킬 의무가 없어요. 그럼에도 우리가 주님께 찡찡대며 짜증을 부리는 이유가,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을 주님이 안 지켜줬다는 것입니다. ‘복음 외 품목’인데.
정작 우리가 귀하게 여기고 자랑해야 할 것은 십자가뿐인데 우리는 십자가 자랑할 생각은 않고 다른 것 안 지켜 주신다고 십자가 지신 분께 대드니까 얼마나 우리가 육적인 존재인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9장 31절에서 ‘내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신 거예요.
‘너희들이 구원 받는데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죠. 처음부터 끝까지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으로 구원이 되지 다른 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 말씀을 들으면서 오해한 것이, 주님이 하신 말씀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거예요. 예수님께서 ‘나는 죽는다(마16:21)’고 하시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결코 주님께 그런 일이 없도록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남자들이 결혼할 상대에게 하는 말이 바로 이 말이죠. ‘내가 당신을 지켜주겠습니다.’ 지가 뭔데 상대를 지킵니까?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인간이 왜 이런 장담을 합니까? 그냥 겸손하게 “지금은 내가 지켜줄 게.” 이 정도는 말할 수 있지만, 끝까지 지켜준다는 것은 불가능한 약속입니다.
33절을 봅시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의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청문회에 나온 증인들이 평소에는 사람들과 말을 잘 했는데, 청문회에서는 왜 말을 안 합니까? 제자들끼리는 말을 많이 했었는데 예수님이 질문하시니까 왜 잠잠하지요? 할 수 없이 국회의원이 다 이야기해 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나눈 대화 내용을 알고 계십니다. “증인에게 묻습니다. 천국 가면 누가 더 높으냐는 이야기를 했지요? 맞습니까?”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 말씀 보고 기쁜 게, 다 알아요. ‘정신 차리고 똑바로 살아야지.’ 그런 짓 하지 마세요. 정신 차리면 더 큰 탈이 납니다. ~척이 됩니다. 정신 차리나 안 차리나 인간은 별 차이가 없어요. 주님이 귀하게 생각지 않는 것을 나는 귀하게 여기고, 주님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나는 전혀 귀하게 생각지 않고 이런 행세가 죽을 때까지 계속 갑니다.
정작 귀한 것은 갔다버리잖아요. 오죽했으면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에 어떤 정보가 담겨 있는가 하면, 사람에게 냉정하게 버림받았다는 내용이 들어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이 어떤 의미입니까? ‘제가 주님이 중요한 줄도 모르고 버렸습니다.’라면서 자기 행세를 예수님 십자가를 통해서 늘 확인하면서 바라보는 거예요.
‘내가 참 철없는 짓을 하고 있었구나.’하는 것을 바라보고, 주께서 원하는 것은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잘 하겠습니다.’가 아니라, 아직도 원인이 내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이게 중요한 거예요. 한 번 회개하고 반성한다고 해서 주님이 착한 인간으로 인정해 주시지 않습니다.
오늘 회개해도 내일되면 똑같은 일을 되풀이해요. “나에게 왜 이런 낭패를 주십니까? 이런 식으로 더 이상 살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그래서 주께서는 우리가 끄집어낼 수 있는 문제까지 출제해 주십니다. 출제하시면서 정답과 연결시키면서 십자가를 투입합니다. 우리는 문제 내줘도 못 풀어요. 답을 알려줘도 문제가 뭔지도 몰라요.
따라서 십자가 안에서 주님이 일방적으로 내주신 문제가 무엇이며, 정답이 무엇이며, 그 문제를 푸는 것까지 100% 주님이 혼자 다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을 주신 겁니다. 제자들은 이 이야기를 못 알아듣고 ‘정신 똑바로 차려. 앞으로 그런 짓 하지 말고.’ 하면서 잔소리 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어요.
오해하는 이유가 뭔가? 본인을 원인으로 생각하고, 본인에 의해서 자신이 기대한 결과가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신 말씀을 내가 잘 순종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구원 받겠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제 주장에 의하면 이 말씀을 누가 다 지킵니까? 예수님 홀로 새 언약 용도로 다 소비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킬 수 있는 말씀은 전혀 없습니다.
율법 폐기론은 아닙니다. 율법은 있어요. 주님이 가져갔지. 폐기된 것이 아니고 주님이 가져 가셔서 주님이 완성한 상태로 우리에게 주시니까 완성 속에 율법은 살아 있어요. 복음의 이름으로 살아 있어요. 이 강의가 다 끝났다고 칩시다. 그러면 우리는 뭘 하면 됩니까? 죄 지으면 되지요. 어떻게 죄 짓습니까? 성경을 보면 모든 것이 죄가 됩니다.
9장 35절에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우리가 복음 알았다고 한 것이 불과 5초 전이에요. 그런데 5초 후에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대하면서 ‘미쳤어요?’ 이런 반응이 나와요. 내가 뭐가 못나서 끝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차만 몰면 앞차를 추월 못해서 환장하는데 왜 끝이 되어야 해요? 양보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건 약속 시간이 많이 남아서 시간 때우려고 하는 것이지 바쁜데 양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광주에서 서울 가는데 ‘가마 탈래, 비행기 탈래?’ 물으면 가마 탄다고 할 사람은 없어요.
우리의 본성은 우리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 본성의 관리 주체가 우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관리 주체이고 싶어요. 여기에서 가증함이 나오고 위선이 나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이 이야기를 듣고 제자들 가운데 이런 꼼수를 쓰는 사람이 있어요.
“주님, 저는 첫째가 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이렇게 나설 사람은 없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증인석에 앉아 있거든요. 주님은 제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제자들에게 질문했지요. “너희들이 길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니?” 이 물음은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알면서 물은 거예요.
제자들은 서로 누가 더 서열이 높은가에 대해 이야기를 한 거예요. 요즘 노인들은 좋은 세상을 만났습니다. 심심해서 죽을 지경인데 TV가 케이블 방송까지 가세해서 하루 종일 나와요. 채널 바꿔가면서 TV보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 요즘 박근혜, 최순실 사태 때문에 계속 시끄럽지요. 첫째가 된 대통령과 그 일당의 허물이 폭로되면서 마음껏 욕하고 비난하면서 나도 첫째를 비판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었다는 즐거움과 희열을 맛봅니다.
36-37절을 봅시다.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영접’이란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주님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은 어린아이 영접이 아닌 예수님 영접으로 보는 거예요. 이 말은 ‘그동안 나(예수님)의 모습을 띤 사람들을 너희(제자)들이 첫째가 되겠다는 심보 때문에 무수히 짓밟았다는 것을 이제 알 것이다.’ 이런 의미입니다.
분명히 주님을 대비하는 마음을 줬건만 제자들은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정신 때문에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무시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어린아이’를 왜 거론하십니까? 어린아이는 관계성을 말하기 위해 거론하셨습니다. 어린아이가 가장 어린아이다울 때는 스스로 선택을 하지 않을 때입니다. 본인의 선택과 생각이 불필요하다는 마음이 바로 예수님 앞에서 성도의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를 제일 큰 자리에 앉게 해주세요.’ 이건 선택이죠. ‘나는 기도해서 두 번째 자리를 얻고야 말리라.’ 이건 맹세죠. 선택과 맹세는 본인의 의지에서 나오잖아요. 그런데 어린아이는 본인 생각은 무시당하고 뒤에 계신 예수님이 주는 대로 받으니까, 예수님이 원인이고, 나(어린아이)는 결과가 되는 거지요.
‘예수님이 원인이고 나는 예수님의 결과물이다.’라고 하는 순간 우리는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무시당합니다. 왜냐? 그들은 방향성이 첫째가 되는 것, 남에게 안 지는 것, 그리고 예수님과의 관계성으로가 아닌 독자적으로 가는 것입니다. 최고가 되려고 나서는데 그것이 안 되면 다른 것을 선택해서 거기에서 최고가 되려고 하지요. 이것은 방향이 잘못 된 거예요.
예수님은 아무도 가지 않는 길, 저주 받는 자리, 자진해서 버림받는 길로 가셨어요. 이것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이 말씀으로 예수님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체스터턴 이란 사람이 주장하기를 ‘세상의 어느 종교가 자기가 믿는 하나님께 버림받기 위해 믿으라고 하는가? 그런 종교는 없다. 그래서 너희들이 기독교를 공격하는 것은 헛된 짓이다. 진짜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포기할 때 그분이 진짜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을 믿어야 구원 받는다.’ 대단하지요?
세상의 모든 종교는 왜 전지전능하고 위대한가 하면, 본인이 그렇게 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루지 못한 한을 내가 믿는 신이 해소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여겨 그 신을 섬기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신이든 전지전능하지 않은 신은 없어요. 힌두교의 브라만 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브라만 아트만. 아트만은 ‘자아’란 뜻인데, 힌두교의 특징은 아트만이 나도 되고 신도 돼요. 내가 곧 신이에요. 얼마나 솔직합니까? 큰소리 쳤는데 자기 꼴을 보니 신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도를 닦습니다.
처음부터 ‘나는 신이다.’ 라고 출발하는 것은 불교입니다. 이 불교는 아담의 마음에서 나왔어요. 이 세상의 모든 아담의 마음을 가진 자가 불교 신자라고 보면 됩니다. ‘내가 곧 신이다.’ 이것은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 따먹을 때 마귀가 한 말이잖아요. ‘네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했지요.
성경이 얼마나 정확합니까? 아니라고 부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내가 하나님이다’ 하는 것을 온 몸으로 뿜어내며 삽니다. 150만이 촛불집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하야하라고 외쳤어요. 그런데 이런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150명이 청와대 근처에서 하야하라고 외쳤는데 대통령이 하야를 했다. 촛불 들었던 사람이 정말 기분 나쁠 거예요.
다수가 외칠 때는 하야하지 않았는데 왜 소수가 해냈는가? 굉장히 기분 나쁘지요. 그러나 그 소수에 내가 포함되었다면 정말 기쁘지요. 이게 바로 내가 신이라는 증거입니다. 왜냐? 내 판단과 내 수고대로 성취되었으니까. 앞으로 또 내가 원하는 일이 있다면 내가 나서서 행하면 성취될 것이니까 나는 이 땅에 존재할 이유가 있는 거예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실망한 것은 자신들이 신이 되고자 하는 희망을 짓밟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 싫어합니까? 자신들의 꿈을 부숴버리기 때문이죠. 누가 희망을 가지라고 했던가요? 죄는 목적이 있어요.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이 죄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귀히 여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은 복음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복음이 아닌 것은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성도가 복음을 생각할 때 하나님이 도와주심을 깨닫게 돼요. 그런데 복음 외의 것에는 절대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습니다. 대신 마귀가 도와줍니다. 왜냐? 지옥은 마귀가 친절하게 인도하지 않으면 아무도 갈 수 없습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벽으로 존재하는 것이 마귀입니다.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못 보게 가립니다. 방수, 방음, 온도도 차단되는 완벽한 벽입니다. 하여튼 마귀는 복음이 일체 들리지 않도록 온갖 발악을 다 합니다. 그래서 주님과 우리 사이에 늘 벽으로 끼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벽이 우리를 소경으로 만들어 지옥으로 데려갑니다. 가다보면 벽의 인도를 받고 있는 동창생들을 많이 만나요. 이야기도 서로 잘 통합니다.
말씀은 언어인데 죽음을 유발하는 언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말을 해야 합니다. 말을 함으로 관심을 나한테 끌고, 그렇게 될 때 상품을 팔 수 있는 겁니다. 국회의원들이 선거 유세를 할 때 온 우주를 다 살릴 것처럼 말을 하지요. 그런 말이 자신을 국회의원 되게 만들잖아요.
사실은 말이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의 허위를 덮기 위해서 또 거짓말을 해야 하고, 그것을 믿도록 하기 위해 또 거짓말을 덧붙이고 계속 이렇게 갑니다. 이것이 힘든 사람은 지리산에 가서 혼자 삽니다. 어떤 의미에게 남자가 결혼하는 것은 무조건 자기 말을 들어줄 대상을 찾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여자가 결혼하는 것은 자신을 지켜줄 든든한 울타리를 마련하려는 것입니다. 20대에는 눈이 낮기에 그 때 결혼하면 좀 쉬운데, 30대에 가서 결혼을 하려고 하니 후보감이 점차 감소해요. 생물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동물들 중 암수가 결합할 확률이 가장 높은 것이 인간이라고 합니다. 수컷 매미는 여름 밤 내내 울어도 암컷이 찾아와 교미하는 것은 4% 정도랍니다.
왜 인간에서 인간이 태어났습니까? 이건 상식이기에 이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왜 인간이 인간을 낳아야 합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만 인간 외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만들듯이 흙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만든 인간을 따로 상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 약속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은 어머니가 하늘에 있어요. 그 사람만 천국에 들어갑니다.
‘영접’이 무슨 뜻이라고 했지요? 관계성 속의 결과물입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9:37)”라고 했지요.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했는데, 이 말은 자기가 자기를 원인으로 해서 구원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7절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여기에서 단계를 2단계로 말씀했어요. 폭포가 한 번 떨어지고, 거기에서 다시 한 번 떨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에서 예수님, 예수님에서 하나님.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인간 외 인물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예수님을 믿을 수 없어요.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이 영접하도록 하시면 그 사람은 자신이 예수 믿을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증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아버지가 아니면 나는 구원 될 수 없다’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가 예수님의 공생애와 같은 레벨에 들어가게 되어 예수님과 같은 심정으로 세상에서 자기를 알립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뭡니까? 왕따 당하고 추방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미움 받고,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힙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원했습니까? 아니죠. 우리의 본성은 남에게 인정받고, 낙오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칩니다. 이것이 막 사는 거지요.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우리는 으뜸이 되고 싶어요. 그런데 바로 그 점이 주께서 구원한 사람의 특징이라는 거예요. 결국 이 말은 뭐냐? 오늘 본문과 같은 말을 한 거예요. 지키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고 이 모든 말씀을 주님이 몽땅 가져가서 우리는 못 지키는 사람으로 들통 나게 하려고 이런 말씀을 주신 거예요.
그럼 이 말씀 듣고 구원 받으면 되지 않습니까? 아니요. 구원 된 자의 입장에서 이 말씀을 봐야 돼요. 책망 받는 제자들을 보면서 ‘꼭 내 모습이네.’ 이것을 깨달았다고 해서 우리가 성질을 뜯어 고치는 것이 아니고 내일도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요. 아니 죽을 때까지 똑같이 살아가야 해요.
첫째가 되는 것을 포기 못하는 이유가 포기가 안 됩니다. 될 수가 없어요. 남과의 경쟁에서 졌는데 기뻐하는 것은 바보지 정상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 눈에 들어오지 않아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거예요. 그러나 성령께서는 강제로 보게 하십니다.
성령이 오시면 우리의 죄와 의와 심판 개념에 대해서 책망하십니다. 성령이 책망하실 때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주시는 말할 수 없는 평강이 찾아옵니다.
38절을 봅시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제자들을 보면 우리의 모습과 너무 닮았어요. ‘우리를’의 자리에 ‘십자가마을’을 집어넣어 봅시다. “선생님, 십자가마을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어서 우리는 그를 이단이라고 했습니다.” 첫째가 못되어 환장한 것입니다. 십자가마을은 버림받은 떨거지들의 모임이라서 본인이 원인이 되어서는 참여할 수 없고 주님이 보내셔서 참여했으면 참 좋겠어요.
수련회 참석여부에 대해 본인의 의지나 선택을 말할 필요도 없어요. ‘나는 참석을 결심했기에 꼭 참석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참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쩔 수 없이 오게 된 사람이 참석하는 것이지요.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이 말에 담긴 의미는, ‘본점이 여기 있는데, 대리점이 왜 본점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들은 너희들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냈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아, 너희들은 스스로 잘나서 본점 직원의 자격으로 귀신을 쫓아냈나? 내 능력 아니면 너희들도 귀신 쫓아내지 못했어.’
귀신이 나갔다면 이미 주님의 능력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주님은 숨겨놓은 지점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따르지 않았는가? 제자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훌륭해서가 아니라 죄인의 대표자로 있는 거예요. 따르지 않는 자가 착하다는 것은 아니고, 제자들은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제자들은 이 상황을 오해해서 자신들이 약간이라도 훌륭한 점이 있어서 자신들을 제자로 부른 것으로 여겼어요. 십자가마을이나 우리교회가 있을 이유가 없어요. 십자가마을을 쳐다본다면 바보에요. 정말 귀한 것은 복음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주님 마음대로지 우리가 어떻게 해 달라고 요청할 수 없어요. 그래서 십자가마을은 매일 결과물이어야지 10년 전은 어떠했고, 5년 전은 어땠고 지금까지 이렇게 이끌어 왔다. 이렇게 되면 마귀의 장난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다음 주일에 모이면 있는 것이고 안 모이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모였다면 ‘아, 주님이 또 기적을 일으키셨구나.’라고 보면 돼요. 그런데 다음 주일 늘 나오시던 분이 안 나오면 ‘왜 안 나오셨지?’라는 궁금증이 생기고, 이게 바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심보이고, 이게 죽을 때까지 계속 갑니다.
그런 상태 속에서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아는 것은 주님의 은혜고, 이 은혜를 주신 주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김 집사님이 왜 안 오셨지? 왠지 허전하네.’ 그러면 주님이 “허전하면 안 되냐?”라고 하실 거예요.
어느새 우리가 복음을 막는 벽이 된 거예요. 복음을 전한다는 미명하에 복음을 가리는 마귀 짓을 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남은생애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께서 십자가만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렇게 만든다는 사실, 그게 바로 주님 앞에 선 어린아이의 마음입니다. 나의 의지, 나의 선택은 전혀 하늘나라와는 무관한 것임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조금 잘 못했다고 가슴을 치고, 좀 잘했다고 자화자찬하며 뿌듯해 하는 이 심보가 복음적인 것이 아닌 반복음인 것을 십자가 은혜로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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