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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강의-악마의 겸손 16122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2. 25. 08:13
2016-12-25 00:07:18조회 : 12         
가락-요한복음12장44절(악마의 겸손)161220a-이 근호 목사이름 : 이미아 (IP:122.43.188.127)

가락-요한복음12장44절(악마의 겸손)161220a-이 근호 목사

 

오늘 강의는 요한복음 12장 44절입니다.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그렇게 되어 있죠. 이게 지금 요한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그럼 요한복음이라는 신약 앞에 뭐가 있느냐 하면 구약이 있죠. 구약의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그 상태가, 우리 같으면 구약의 말씀을 우리가 이룬다, 라고 뭐 이렇게 할 텐데, 나를 믿는 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구약이 그렇게 잔소리가 많고, 율법이 그렇게 많은데, 하나님께서 이것도 지키고 저것도 지키고, 지키고, 지키고, 라고 하면 우리가 예상하는 구약의 완성은 뭡니까? 지켰다, 지켰다, 지켰다, 지켰다가 되잖아요. 지켜라, 지켜라, 지켜라, 이스라엘 백성은 못 지켜서 망했으니까 너희들은 지킬 수 있다. 이게 정답인데.

 

그리고 마태복음 5장 17절에 보면 내가 온 것은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다 완성하려고 왔다고 했죠. 그 말씀을 들어보면 구약에 있는 구약 사람들은 제대로 말씀을 못 지켰는데, 이제 예수님께서 새로 만들어내고 새로운 백성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은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의 실패한 그 실패를 딛고, 이 사람들은 성공적으로 지키는 사람이 됐다는 뉘앙스가 굉장히 강렬하잖아요.

 

그러면 너희들은 이제는 지키게 됐으니까 지켜라. 이게 우리가 기대하는 최종적인 완성태인데, 오늘 본문에 보면 나를 믿으라고 되어 있다는 말이죠. 나를 믿으라. 그러면 구약에 있는 모든 말씀이 다이렉트로, 직접 못 지켰는데 우리보고 너는 지키라고 하지 않고 경유를 하죠. 한 곳을 이렇게 다녀가죠. 구약에 있는 모든 말씀이. 그러면 여러분들이 다 아시다시피 어디를 경유하겠습니까? 구약의 모든 말씀이 어디로, 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듯이 어디로 다 빨려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그 행하심 속으로 구약이 전부 다 빨려 들어가겠죠. 마치 새떼나 벌떼에서 여왕벌 하나 움직이면 다 따라서 움직이는 것처럼. 세계명작동화에 피리 부는 사나이가 피를 부니까 그 동네에 있던 쥐떼가 피리소리 듣고 따라가서 그 많던 쥐떼가 다 없어지는 것처럼. 주께서 던져준 그 모든 말씀들이 예수님이 피리 부니까 피리소리에 전부 다 그리로 가는 거예요. 다 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나를 믿으라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구약에 있는 그 모든 말씀이 어느 것 하나도 직접 성도에게, 신약에 성도라고 일컫는 사람에게 직접 오는 법은 있다? 없다? 전혀 없는 거예요.

 

뭘 지켜야 되는데, 지키라는 요구사항이 단 하나도 없는 거예요. 마태복음 5장 33절에 보면 일체 맹세하지 말라고 했어요. 일체 맹세하지 말라. 그 말은 뭐냐 하면 지금 인간들이 맹세하고 싶어 아주 환장을 했어요. 맹세하고 싶어서. 다시 말해서 이것 지킬게요. 저것 지킬게요. 이렇게 장담하고 싶은 생각이 출렁이는 거예요. 그리고 마태복음 6장에 보면 금식하고 싶어 하고. 구제하고 싶어 하고. 구제도 중독입니다. 남 도와주는 쾌감이요, 마약하는 그 쾌감 이상으로 강력해요. 있으면 남 퍼주고, 있으면 나 도와주고, 헌금하는 재미에 빠져버리면 정말 마약 같은 쾌감을 줍니다. 적당하게 끊어줘야 합니다. 안 그러면 큰일 납니다. 선교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기도도 마찬가지고. 흔히 방언도 마찬가지고. 선행도 마찬가지고.

 

인간 자체가 뭘 행하게 되면 거기에 욕망이 받쳐주기 때문에, 이 욕망은 무한의 욕망이에요. 조절이 가능한 욕망이 아닙니다. 스스로 끊을 수 있는 욕망이 아니에요. 마약만 마약이 아닙니다. 종교적 욕망도 마약의 일종입니다. 엔도르핀이 팍팍 나오죠. 그 종교적 기도의 열망은 바로 인도의 수 십 만개 종교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 아픔이 많은 기도. 더 낮아지는 기도. 더 충격적인 고통을 보여주는 기도. 왜 층격을 가해야 하느냐 하면, 기도를 함으로써 나한테 스스로 가하는 그 고통이 기도의 응답으로써 이게 어떻게 희열로 바뀌는지를 본인이 테스트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어느 정도로 아픔마저 능가하는 대단한 신앙인가를 늘 테스트하고 싶은 거예요.

 

그 테스트해서 역시 나는 대단한 신앙인이라는 것을, 그러한 효과를, 고걸 얻고 싶은 소망을 손에 쥘 때의 그 희열, 카타르시스, 이거는 정말 로또 맞은 것처럼 큰 쾌감입니다. 자기가 신이 되는 즐거움보다 더 큰 즐거움이 있을까요? 남이 해내지 못하는 그것을 본인이 해내는 거예요. 엄홍길 그 사람이 왜 자꾸 높은 산에 올라갑니까? 그것도 한 개만 올라가면 되지, 세계 15개의 꼭대기는 다 올라갔거든요. 왜 그렇습니까? 범접할 수 없는 경지가 주는 즐거움은 대단한 거거든요. 종교도, 정신적인 세계도, 그러한 에베레스트 산이 여러 군데 있어요. 니가 그 산에 올라가봤나? 니가 이 산에 올라가봤나? 등산가들은 최고봉에 올라간 것이 끝이 아닙니다. 난코스도 올라가봤나? 산소통 안 메고 올라가봤나? 추운겨울에 가봤어? 이래요. 누가, 누가 더 잔혹한 체험을 극복했느냐를 묻는 겁니다. 세상에 모든 것이 그렇게 깔려있어요.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말씀을 주님이 걷어가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있습니다. 주어진 것이 오늘 본문 46절에 나옵니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세상 자체가 뭐냐 하면 어두움이에요. 요한복음 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빛이 왔으되 누가 깨닫지 못해요?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죠. 그 어두움을 뒤에는 세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구약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줬는데, 그 실패한 이유가, 예수님이 오니까 그 실패한 이유가 드러납니다. 왜 실패했느냐, 어두움이기 때문에. 어두움이 말씀 지키겠다고 나선 그 자체가 어두움의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로마서 3장 19절에서는 아주 명확하게 이야기하죠. 율법을 준 것은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 입을 막는다고 하니까 일종의 마스크를 쓰고, 마스크를 쓰고 그 다음에 흰옷까지 입어버리면, AI 조류인플루엔자 소독하는 사람이 되죠.

 

온 세상으로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는 이 말이, 바로 시내산에서 십계명, 율법받기 전에 율법을 준 대상자가 누굽니까? 바로 홍해를 건너온 그 사람들이죠. 그 사람들이 홍해 건너오기 전에 어떤 하나의 의식을 치렀죠. 문설주에 뭘 발랐어요? 바로 피를 발랐죠. 이게 개인이 한 이벤트나 해프닝이 아니고, 어느 쪽에서 뭔가 지켜보는 자, 이 피에 대해서 주목하는 어떤 실체가 있죠. 이 실체가 뭐냐 하면 이 세상을 심판하는 천사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피를 발랐다는 말은, 어떤 주목하는 주체가 따로 있다는 것을 상정해야 돼요. 피 바르고 싶어서 피 바른 것이 아닙니다. 남아돌아서 피 바른 것이 아니고, 누구 보란 듯이 하는데, 누구 보란 듯이 피를 발랐는데, 이 피는 지켜보고 있는, 심판을 행사하는 그 분과 유일하게 매치가 될 수 있는 관계가 되겠죠. 매치가 될 수 있는 관계. 피 바르라고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알려줬죠.

 

이 대상자를 누가 정했습니까? 이거 중요한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논해서 반상회에서 정한 것이 아니죠. 이장들이 모여서 한 것이 아니잖아요. 일방적으로 이게 왔다면, 이거 주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시내산에 올라가가지고 십계명 받습니다. 율법 받습니다. 이 피 바른 백성에게 율법을 줬다는 말은 도대체 이 관계가 뭐가 되느냐 하면, 이 관계가 서서히 역사적으로 전개되는 겁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자기-전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기-전개.

 

양탄자 깔아놓는다는 것입니다. 칸 영화제에 일반인이 올 때는 말고 스타들이 올 때는 뭘 깝니까? 레드카펫을 깔죠. 이 레드카펫을 영화배우가 들고 자기 쪽에서 깝니까? 아니죠. 영화 주최 측에서 깔죠. 그걸 이병헌이가 밟고 지나가면 그 레드카펫이 처음에 출발했던 장소에 집결하게 되죠. 그러면 율법을 준 것은 결국은 예수님의 자기 전개라고 볼 수 있다는 말이죠. 모든 성경은 누구를 위해서 증거 하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 증거 한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모든 말씀은, 모든 사건은, 모든 계획은, 창세 천지창조는 예수님의 자기 전개에요. 자기 전개.

 

그런데 구약에는 예수님이 안 나타나잖아요. 구약에 예수님이라는 이름이 나타납니까?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마태복음 1장 23절에 처음 나타나잖아요. 이름을 예수라 하라. 구약에는 그게 없어요. 그냥 여호와, 주의 이름, 이렇게 되어 있단 말이에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렇게 기능적으로 나타났잖아요. 그럼 구약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자기 전개라면, 그때도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활동을 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이미 예수님께서 활동을 했죠.

 

활동을 했는데, 양탄자처럼 깔아준 것이 율법이라고 했고, 그럼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고 율법을 못 지킨 쪽으로, 그들은 어디로 솔솔 끌려오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 쪽으로 끌려와야 되는 겁니다. 율법에 실패하면서, 율법을 못 지키면서 그리스도 쪽으로 오는 거예요. 제가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구약에는 율법을 줬고, 지키라, 지키라, 지키라, 이거 하지 아니하면 저주 받고 지키면 복을 받는다. 이렇게 조항까지 다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율법에 그렇게 법이 많으면, 적어도 우리가 생각하는 신약에서는, 구약에서는 못 지켰는데 이제는 지켜라, 이게 우리의 상식인데, 이게 아니고 오늘 본문 12장 44절에 보면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으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동안 뭐가 있었다? 구약전체, 천치창조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살펴볼 것이 뭐냐 하면 구약의 그 말씀에서 나를 믿으라는 것까지, 고게 점프하는데, 도약하는데, 어떤 구조를 가지고 이 점프가 무난히 성사가 되느냐, 그 점을 추적 하면 될 거예요. 왜 그걸 추적해야 되느냐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지키겠습니다.” 하다가 이제는 뭐로 바뀌어야 하느냐 말이죠. “믿나이다.” 라고 바뀌어줘야 이 사람이 바로 성도다 이 말이죠. “지키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 예, 믿을 수밖에 없죠. 믿는 것이 완성입니다. 말씀지킴의 완성입니다.” 라는 고백이 스스럼없이 나와야 돼요.

 

아직 강의 시작 3분전인데, 일찍 시작해서 지금 오시는 분한테는 제가 미안하지만, 시간 지나서 오시면 미안해야 할 사람은 없겠죠. 자, 이 대목이 그렇게 만만치 않습니다. 이 논리가 굉장히 어려워요. 상당히 어려운데 여러분이 감내해주셔야 합니다. 자, 그럼 어떤 점을 우리가 생각해야 하느냐 하면, 여기 46절에 보면,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아까 유튜브 동영상 두 번째에서 한 것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여기에 아무것도 없을 때는 그냥 테이블입니다. 그런데 귤이 있는 순간 갑자기 이 테이블의 위치가 귤이 있는 지점과 그 외의 지점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되죠.

 

그럼 귤이 없을 때는, 너는 거기 앉았네, 너는 여기 앉았네, 가 되는데, 그런데 귤이 와서 있는 순간 너는 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라는 새로운 이슈가 등장하는 겁니다. 귤에 대해서. 이 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나는 귤 안 좋아해, 나는 귤 좋아해, 라는 달랑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귤이 없는 순간에는 테이블을 나눌 수가 없죠. 전기톱 가지고 나눌까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동일성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동질성, 또는 동일성. 질이 같다. 뭐가? 이 세상이. 달리 말하면 이 현실이.

 

현실은 누가 초월적으로 나서서 옳다, 그르다 할 입장이 못 되고, 각자 자기 팔자대로, 자기 사는 대로 그냥 살면 돼요. 그게 민주주의입니다. 남한테 피해주지 않는 한, 처벌받을 이유는 없어요. 귤 먹는다고 처벌받습니까? 내가 귤 먹는데, 목사님이 아이고 가슴 아파! 이러지 않죠. 근데 뺏으면 안 되죠. 제가 지금 중요한 이야기합니다. 민주주의 법은 뺏으면 안 되지만 내가 귤 먹는 것은 되죠. 그래서 민주주의 법에는 도둑질하지 말라가 있겠죠. 근데 십계명에도 보면 남의 것을 탐내지 말고 남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라고 나와 있죠.

 

그럼 우리가 십계명을 해석할 때, 우리가 민주주의로 해석해야 될까요? 아니면 복음으로 해석해야 될까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깔아놓은 카펫이라고. 카펫, 그것의 의미는 최종 때, 마지막 때에 등장하죠. 카펫이 멈춰있는 것이 아니고 이게 이동하니까. 어디로? 결국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리라는 예수님 쪽으로 이동하거든요. 그러면 율법에 대한 해석은, 그 당시에 사람들이 율법을 해석하는 것은 반칙이에요. 그래서 해석한 결과가 뭐냐 결국 말씀을 곡해해서 못 지키는 것이 돼요. 그 당시 사람들이 머리가 나빠서 못 지킨 것이 아니에요.

 

무엇과 연관성이 안 돼요?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성이 안 되니까 못 지킨 거예요. 그럼 우리는? 성령, 주의 영이 와 버리면 주의 사람이잖아요. 주의 사람이 되면 율법을 어떻게 지킵니까? 율법의 의가 되도록 지키겠죠. 그럼 율법을 행해서 의가 됩니까? 지금 이 문제를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에서 다루었어요.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느냐, 아니면 성령으로 의롭게 되느냐, 그렇게 묻고 있습니다. 만약에 율법으로 의롭게 될 것 같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헛되이 죽으심이라 이렇게 되어 있고, 그게 2장에 나오죠.

 

1장에는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이야기에요. 벌써 복음과 저주가 관련성 있게 등장했잖아요. 복음만 등장한 게 아니에요. 복음은 뭘 유발시킨다? 가만히 있는, 테이블에 귤 하나 놓듯이, 가만히 있는 이 세상을 저주 판으로 유발시키는 거예요. 그럼 다른 사람이 니가 전한 복음이 그렇게 대단하면 그 복음의 내용이 뭐냐고 다그칠 게 아닙니까? 그게 2장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복음이야기하면서 복음이 이렇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부터 먼저 언급을 해요. 이거는 구약을 언급한 다음에 제가 신약을 언급한 것 하고 똑같은 취지입니다. 율법으로서는 뭐가 안 된다? 의가 생산될 수 없다는 거예요. 율법으로서는. 그 말은 뭐냐 하면 율법은 저주받게 하는 거예요. 인간을, 이 세상을, 이 세상이 어둡기 때문에. 그럼 가만히 있는 사람 저주하면 안 되잖아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사람이 율법이 없을 때는 굉장히 점잖아요. 근데 율법이 오게 되면 가만히 있는 탐심도 자극을 받아서, 갑자기 탐내지 말라는 율법이 오게 되면 탐내게 되어 있는 거예요. 이걸 들쑤셔놓는다, 라는 말이 적당해요. 들쑤셔놓는다. 가만히 있는 사람을 들쑤셔놓는 거예요. 도서관에 앉아서 착하게 가만히 앉아서 공부하고 있는 사람인데,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이 없어요. 근데 복음 아나? 복음 아나? 복음 아나? 십자가 알아? 라고 쑤시니까, 공부하는데 피해 받잖아요. 민주주의에서는 피해보면 안 되잖아요. 와락 화내죠. 거봐! 화내는 것 보니까 복음 모르네. 당한 사람은 어처구니없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 한 번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이 잘했어요? 바리새인이 잘했어요? 누가 잘했어요? 누가 잘못했어요? 누가 잘하고 누가 잘못했어요? 지금 예수님이 잘못하고 있는 거예요. 바리새인은 가만히 지키려고 있는 거예요. 아주 점잖은 사람들이에요. 누굴 의식해서? 막 돼먹은 사람들을 일곱 단계로 나누어서. 제일 밑바닥에 있는 막 돼먹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늘 살고 있는데서 지켜보면서, “우리는 그러지 말자.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저와 같이 되지 말자.”라고 이렇게 한 거예요. 그 제일 밑바닥에 누가 있느냐 하면, 바로 세리와 창기가 있는 거예요.

 

누가복음 18장에 나오죠. 성전에서 기도할 때, 예수님이 누굴 비교했습니까? 바리새인이 기도하는 것하고, 세리가 기도하는 것하고, 둘 다 모범답안으로 끄집어내서 비교하잖아요.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뭐가 들어갔습니까?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게 바리새인의 개인적인 고백이 아니고, 그 전체의 분위기입니다. 그 전체의 분위기에요.

 

도서관이야기 다시 할게요. 도서관에서 책보면서, 그것도 성경 보면서 아주 착한 사람이라고요. 그런데 되도 않는 인간이 와가지고 가만히 점잖이 앉아있는 사람을 쑤시는 거예요. 가만히 말 안 하고 있으니까 더 쑤시는 거예요. “니가 십자가 알아? 복음 알아?” 처음에는 참았죠. 나중에 그 분이 성전을 뒤집어놓아요. 성전을. 참다, 참다 못 참아서 성전에서 완전히 깽판 친 거예요. 이건 뭐 강도의 굴혈이다, 강도의 아지트다, 라고 하니까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 해도 자꾸 건드리면 못 참잖아요. 그래서 확 일어나니까 “거봐, 어두움이잖아!” 이렇게 된 거예요. 이거는 도대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에요.

 

제가 아까 중요한 것을 이야기했어요.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십계명을 설명한 것과 복음적 관점에서 십계명을 설명한 것과 결과가 제가 다르다고 이야기했죠. 민주주의는 피해 입히지 아니하면 사람이 항상 점잖은 사람이 돼요. 점잖은 사람을 갈라디아서 2장에서는 의인이라고 해요. 그 의인 중의 의인이 누구냐, 바로 사울이라는 사람이었어요.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이에요. 이거는 자타공인, 자기도 그렇고 남들도 그렇게 인정해줘요. 얼마나 용감했던지 하나님께 충성하고자 예수 믿는 이단들을, 괜히 괜찮은 민족을 흔들어버리는 그 예수 믿는다는 잔당들을 소탕하기 위해서, 자기의 청춘을 불사르는 소탕작전에 나서잖아요. 그것도 선봉자에 서서.

 

그리고 예수 믿는 그 당시의 이단중의 괴수인 스데반이라는 사람을 죽일 때, 행정적인 처리가 잘 되는지 그것을 자기가 지켜보고 있었어요. 보고하고 위해서. “돌 던지는데 피곤하지? 땀나지? 힘들지? 옷 벗어서 나한테 가져 와.” 사도행전 7장 58절에 보면 옷을 벗어서 가져오라는 거예요. 옷 벗는다는 것이 힘들어서 옷 벗는 경우도 있고, 그 당시에 율법으로 처형할 때 “나는 죄가 없습니다. 주의 뜻입니다.” 라는 의식 때문에 옷을 벗든 간에, 하여튼 관계없이 주동인물이에요. 주동인물. 스데반 집사가 사울이 주동자라는 것을 알잖아요. 다 알죠. 누가 주동했다는 것을.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이 “니가 얼마 안 가서, 몇 개월 안 돼서 구원받을 걸?” 하고 예언했습니까? 안했죠. 남의 일까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스데반 집사님이 아는 것은 어떠한 인간도 구원될 수 없다는 그거는 알아요. 어떠한 인간도. 저 사람은 구원되고, 저 사람은 구원이 안 되고, 그게 아니라. 어떠한 인간도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럼 스데반 집사 본인은 구원 받았잖아요? 본인이 구원받은 것이 아니죠. 스데반 집사가 구원받은 것이 아니에요. 새로운 스데반 집사로 구원받았죠.

 

그럼 여기서 헌 스데반 집사고 새 스데반 집사고 간에, 그 인간이 그 인간인데 예수 믿으면 되잖아요? 예수 믿어서 새로운 스데반 집사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 믿는다고 새사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사람 될 수 있는 여지가 헌사람 한 테는 일체 없습니다. 만약에 옛날 지옥 갈 내가 예수 믿어서 새사람 돼버리면 예수 믿는다는 것이 새로운 율법이 돼버려요. 옛날 율법 방식을 대체하는 새로운 율법, 예수 믿으라는 율법, 그 율법은 자기 자신의 행함에 의해서, 예수 믿는 행함에 의해서 자기가 의인이 돼버려요.

 

그 의를 가지고 칭의라고 합니다. 칭의는 내가 어떠한 행동을 했는데, 거기에 대한 성경적, 하나님 쪽에서 오는 반응이 칭의가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상태에서 칭의가 되는 경우는 없어요. 그 칭의 이론에 의하면, 믿음을 조건으로 걸 때 칭의가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데 칭의가 돼버리면, 신자인지 아닌지가 이게 확인이 안 됩니다. 곤란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칭의 이론이 뭐냐 하면 악마의 이론이에요.

 

왜, 악마의 이론이냐 하면 예수님의 시작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시작을 인정하지 않고, 칭의의 시작은 뭐냐 하면 구원 못 받아서 아쉬워하고 안달하는 내가 시작점이에요. ‘아휴, 나 구원받고 싶은데.....,’ 이게 시작점이에요. ‘그럼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뭐 없을까? 옳지! 믿자.’ 그러니까 구원 못 받는 자에게는 아직도 무슨 능력이 남아 있다? 예수 믿을 수 있는 능력은 아직도 남아 있다. 알미니안주의죠.

 

칼빈주의는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예수 안 믿는 나에게, 예수 안 믿는 나를, 안 믿는 나라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여지는 있다. 요거 칼빈주의입니다. 그럼 칼빈주의의 시작은 뭡니까? 나는 하나님 앞에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게 출발점이 되겠죠. 그래서 이단입니다. 그게.

 

출발점에, 알미니안, 감리교죠. 알미니안주의나 칼빈주의나 둘 다 지금 뭐가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없죠. 둘 다 없기는 마찬가지에요. 둘 다 자기 구원받는 욕심에 환장해버렸어요. 그래서 칭의라는 것은 없어요. 그런 것 없어요. 칭의라는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칭의는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의로 인정받았다.” 그거거든요. “나는.” “나는”이라고 할 때 그게 옛사람입니다. 옛사람은 죽어야 되지, 옛사람이 계속 유지되면 안 돼요.

 

그러면 구원받은 스데반 집사님은 어디에 있느냐? 구원받은 스데반 집사는 시작을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 못 받아 안달하는 스데반 집사가 아니라, 예수님부터 출발한 거예요. 예수님부터. 뭘 재료로 해서? 옛날 스데반 집사를 재료로 해가지고. 죄인을 재료로 해서 새로운 스데반 집사로 바꾸는데 그 시작점이 주의 영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주의 영으로부터 시작해서, 스데반 집사가 설교할 때 주의 영이 충만해서, 주님께서 자기가 만든 작품을 회수하기 위해서 서서 스데반 집사를 영접했습니다.

 

그러니까 스데반 집사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 정상이에요? 돌 던져 죽이려고 하는 그 유대인과 사울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옛사람과 같이 지극히 정상인이죠. 스데반 집사에게는 누가 미친 자에요? 새사람 된 본인이 기이한 사람이 돼버렸어요. 저 사람들과 함께 얼마든지 정상인이 될 수 있는데, 주께서 조치를 해버리니까 그야말로 정상인의 범주가 안 되도록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 순간 그 테이블 위에, 스데반 집사가 죽는 것이 그 테이블이라면, 누가 그 시대의 귤이 되겠습니까? 스데반 집사가 귤이 되겠죠.

 

그리되면 예수님의 복음이 어떻게 됩니까? 스데반 집사를 통해서 스데반 집사의 죽음을 아는 쪽과 그 외, 익셉트except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일단 사울은 스데반 집사를 죽였으니까, 스데반 집사가 어디에 속합니까? 스데반 집사와 함께 성령 충만한 쪽에 속하지 못하고 그 외에 속하는 거예요. 그 외에 속하는. 주께서 일을 이렇게 하셔요.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누구한테 한 것이다? 나에게 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믿는 것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를 믿는 거죠. 그럼 여기 이 말씀을 할 때는 예수님께서 누구하고 관계를 하고 있습니까? 아버지와 예수님과 관계를 하고 있죠.

 

그럼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난 뒤에는,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과 아버지와의 그 관계를, 이제는 예수님이 아버지 우편에 앉았으니까, 아버지 자리에 계신 예수님과, 그 전의 자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있었던 자리에 누굴 아들의 이름으로 거기에다가 배치를 하느냐 하면 예수 믿는 사람, 스데반 집사님 같은 분들을 거기다가 배치를 해버려요. 배치를 해버리면 예수님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이나, 아버지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성공한 그 관계나 같은 관계가 돼버리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은 빛이시고 그들을 가지고 빛의 자녀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빛의 자녀. 그럼 빛의 자녀는 누가 만들었어요.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관계가 없었던 빛의 자녀를 어두움 속에서 새로 만들어낸 거예요. 새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럼 만들기 전의 사람들은 뭡니까? 만들기 전에는 예수 오면 예수 믿으려고 율법을 행했을 것이고, 십계명 이야기하면 십계명 지키려고 했을 것이고, 성령이면 성령 믿으려고 했을 것이고, 삼위일체면 삼위일체 믿으려고 했을 것이고, 그렇게 할 것이라 말이죠. 왜냐하면 그래야 그게 어두움의 속성을 노골적으로 잘 드러내니까.

 

지금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구약이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로 도약되는가, 넘어가는 포인트를 잡아내는 거죠. 잡아내는 것. 그 포인트를 잡아 낼 때, 제가 왜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예수님 빼놓고 남들은 다 빠져라! 이 말입니다. 왜? 어두움이니까. 그림으로 그려야지 이해가 되는데,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봅시다. 예수님이 여기 계시면 구약은 예수님이 깔아놓은 하나의 카펫이라고 이야기했죠. (예수━━━구약). 깔아놓은 카펫을 돌돌 감아버리면 예수님 쪽으로 모입니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셨으니까.

 

그러니까 예수님과 구약 사이에는 어떤 단절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모든 성경은 누구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다? 예수님 자기에 대해서 증거 한 것이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 이렇게 되기 때문에 단절점이 없어요. 그런데 문제는 제 3의 영역에 있는 우리입니다.         (예수님━━━구약)

                                                                      ↑(제 3의 영역에 있는 우리).

 

제가 지난주일 낮 설교에서 이야기했잖아요. 줄넘기 할 때,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노래 부르면서 들어갈 타이밍을 찾잖아요. 예수님의 줄넘기에 끼어들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제3의 지역이 주님께서는 없다는 거예요. ‘야, 이거 괜찮네. 예수님께서 완성했으니까 나는 달랑 요거, 그 전에는 율법 지켰지만 나는 율법 폐기하고 예수 믿어야지. 나는 믿음으로 구원받아야지.’ 이렇게 나갈 제 3의 영역이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구약을 독점한 이유가 우리의 영역이 어두움의 영역이기 때문에 그래요. 어두움의 영역이기 때문에. 이 어두움의 영역에 있는 자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다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어두움의 죄성을 또 다른 죄성으로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이 돼요.

 

어두움은 누가 대표로 보여줬느냐 하면 예수님하고 구약이 연결되어 있는데, 연결점을 이해하지 못한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이거든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유대인들이 누구냐 하면 도서관에서 점잖게 앉아서 공부하고 있는 착실한 학생이죠.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율법을 연구합니까? 왜 그렇게 착실하게 하려고 합니까? 그들이 맹탕이 아니에요. 나름대로 노림수가 있다고요. 뭘? 우리 조상들은 율법을 못 지켰지만 우리들은 율법 지켜서 구원받겠다는 거예요.

 

이사야 58장에 이런 말씀이 있죠. “너희들이 안식일에 먹고 마시는구나. 안식일에 차라리 금식하고 불쌍한 이웃을 도와주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들은 안식에 뭐 했느냐 하면 안식일에 금식하고 도와줬어요. 옛날 조상들은 안식일에 기쁘게 잔치하고 놀았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를 70년 동안 포로 잡혀가게 했다면, 우리가 역사를 잊어버리면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렇게 우리는 그와 같은 역사를 다시는 반복은 하지 말자. 그게 바로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거든요. 그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기 자신의 바탕을 전혀 모르는 거예요.

 

근데 예수님을 뭐라고 했느냐 하면 빛이라고 했죠. 빛으로 온 자체가, 이 세상 전체가 어두움이라는 뜻이에요. 제가 이걸 설명하면서 예수님을 귤로 봤죠. 귤로 봤다는 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자기들이 어두움이라는 것을 몰라요. 자기들이 알아서 그냥 빛이고 어두움이라고 했는데, 막상 빛이 뜨니까 졸지에 빛이 없던 모든 것들이 뭐가 된다? 어두움이 되는 거예요. 물리적으로 원래는 말이 안 되거든요. 빛이 없으면 어두움이 약간 밝아야 되잖아요. 깜깜한 동굴에 플래시flash비치면 약간 밝아야 되잖아요. 빛은 그게 아니고 빛이 오게 되면 더 어두워져요. 안 어둡다고 자부하는 것도 어두워져요.

 

교회에 복음이 들어와 버리면 그다음부터는 교회가 어두움이라는 것이 들통이 나버립니다. 그래서 교회는 전력을 다하여 십자가 복음을 못 전하게 하는 거예요. 근데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그 교회를 비난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게 바로 극히 정상이에요. 스데반 집사가 죽는 것이 비정상이지, 옷 지켜주는 사울은 극히 정상입니다. 왜? 어두움다우니까. 어두움답다 이 말이죠.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것은 극히 정상이에요. 아까 유튜브 두 번째 강의했잖아요. 주님이 찾아오면 우리는 당황스럽다고요.

 

그동안 예수 믿으려고 얼마나 좋은 것들을 많이 끌어 모아 놓았습니까? 근데 막상 성령이 오니까 하등 그게 소용이 없어요. 그게. 출제문제가 달랐어요. 출제문제가 우리가 납득이 안 되는 출제문제였어요. 그 출제문제를 누가 알았느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고, 어느 목사도 몰랐어요. 누가 아느냐, 아버지하고 예수님하고 둘만 아는 출제문제를 던져주니까, 자기 내부는 엉망진창이에요.

 

예상문제해서 밤샘했는데 예상문제가 하나도 안 나왔어요.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가? 이런 것이 하나도 안 나왔어요. 그냥 요나처럼 이러려고 선지자 됐습니까? 내가 이러려고 선지자 됐습니까? 우리 지금 이러기에요? 정말? 주님께서 40일 만에 니느웨가 멸망한다고 했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왜 니느웨 백성들이 말을 듣습니까? 회개를 하면 제 체면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선지자 꼴이 말도 안 됩니다. 우리 사이에 이러기에요? 우리 사이 이러기에요?

 

심지어 그 이야기가 예수님의 공생애를 예언한 거예요.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내게서 떠나게 하옵소서. 하지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그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나는 너희들이 어떤 마음 고생한다는 것을 나는 이미 체휼했다. 나도 다 알고 있다. 내가 뭐 하나님이니까 모를지 싶어? 내가 죄 없으니까 고생 하나도 안 한지 싶지? 내가 너희들이 겪는 마음고생을 다 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음고생 겪었다고 해서 그 근거로 구원되는 것은 아니에요. 구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고생하고 이렇게 신앙 때문에 어려워하는 것은 이미 완성된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하나 더 배우기 위해서 확인하는 거예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아까 이야기 다시 해보겠습니다. 유월절에 피를 발랐다. 죽음의 천사가 안 오면요, 피를 바르는 이게 이상한 일이에요. 피를 바른다는 것은 피를 원하는 자가 없으면 이거는 미신 같아요.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성도에게 이상한 짓을 원하고 있어요. 어떤 누구도 납득이 안 되는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기도 많이 하면 주께서 기뻐하시고, 헌금 많이 하면 기뻐하시고, 믿쑵니다, 하면서 열심히 하면 기뻐할 줄 아는데, 그런 것들은 인간들끼리는 이해가 되지 이상한 짓은 아니에요.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것이 이상한 짓이에요. 비도 안 오는 데 왜 배를 만들어요. 사람들에게 설득이 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거예요. “예수 믿고 착하게 삽시다.” 이건 얼마든지 설득이 돼요. 그러나 “착해도 소용없습니다.” 이거는 사람들을 설득할 어떤 건더기가 없어요. 그렇잖아요?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사람들이 너를 미워하는 것은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믿기 때문에 너희를 미워하는 거라고 되어 있거든요. 예수님을 미워했던 그 미움이 그대로 너희에게 주어졌다면 니 땡잡은 거야! 이런 뜻이라는 말이죠. 글쎄, 그런 횡재가 어디에 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어떤 범위 밖에서 일이 기적처럼 주어지니까, 이게 기적의 사나이도 아니고 뭡니까? 기적 받았으니까. 내가 예상할 수 있는 기적 말고, 정말 예상도 못한 기적으로 말미암아 내가 다루어진다면, 우리가 보통 신분이 아니에요. 그걸 귀한 존재라고 제가 저번에 피라는 책에서 했는데. 정말 귀한 존재기 때문에 내가 봐도 내가 낯설 정도로 낯설다. 내가 봐도 내가 조절이 안 된다. 당황스럽다. 침착할 문제가 아니다. 침착하고 싶어도 침착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리죠.

 

다시 말씀드리면 구약과 예수님과 연결성이 있어요. 끊어짐이 없습니다. 왜? 완성이니까.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니까. 근데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자기가 이해한 모세의 율법의 내용과 연결이 안 돼요. 여기 모세 이야기하고 비슷한 이야기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요한복음 7장에도 나오지만, 요한복음 5장 45절에 보면 너희들이 그렇게 모세를 높이지만 모세가 너희를 저주할 것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너희들을 저주할 것이다. 너희들이 모세를 최고로 쳐주지만,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나를 평가하는 기준이 모세 율법이지만 너희들이 갖고 있는 모세 율법이 너희들을 손댈 것이다. 너희들은 편하게 있지만, 너희들이 모세율법을 다룬다는 그 모세 율법이 저주할 것이다.

 

모세율법으로 저주받아야 마땅한 인간들이 어디 함부로 예수님을 평합니까? 이 말은 모세율법과 그들의 관계가 애초부터 끊어져있다는 거예요. 모든 게 단절이에요. 모세율법과 끊어져있으니까, 결국은 이거는 빛과 빛의 노선과 끊어져 있으니까, 이 전체가 뭐가 돼요? 어두움이 되는 겁니다. 이제부터 강의가 어려워져요. 제가 지금 그림을 그리면, 어두움 밖에 빛이 있고 밖에서 빛이 오니까 어두움이 됐다. 이래 되잖아요. 이거는 뭐 어지간한 사람은 다 알잖아요. 그거는 당연하지. 이래 되는데, 문제는 이 빛이 어두움을 이끌고 가고 있다는 겁니다. 어두움 내부에 들어가서, 내부적으로 장착이 되어서, 빛이 엔진처럼 가동되어서 어두움을 더욱더 활성화시키는 작업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어두움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동방박사처럼 별 따라 오면 참 좋겠는데, 밤하늘에 별이 요즘 스모그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고. 빛이 어두움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두움 안에 있는 거예요. 어두움 안에 빛이 있으니까 그 어두움 안에 빛의 여파로 인하여, 그 결과로 인하여, 어두움에 있는 자들이 서로를 보면서 빛이라고 간주하는 현상들이 일어나요. 그래야 그 다음 말이 이해가 돼요. 그 다음 말이 뭐냐 하면, 본문 요한복음 12장 47절에 “내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그 다음 48절에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따로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지금 예수님이 하는 말이 심판이라는 말과 구원이라는 말을 지금 이 세상에다가 같이 섞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예수님이 현재 이 세상 안에 있잖아요. 이 말씀을 하고 있을 때 이 세상 안에 있죠. 그러니까 이 세상이 구원을 받든지 심판을 받든지 둘 중의 하나가 아니라, 구원도 들어있고 심판도 들어있고 둘 다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이 어두운 세상 안에 구원도 들어있고, 세상 안에 심판도 같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이 둘로 나누어져야 하잖아요? 둘로 나누어져야 되잖아요?

 

근데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현실은 절대로 둘로 나누어질 건더기가 없어요. 그런 근거가 없어요. 전부 다 하나의 세상이 되는 거예요. 하나의 세상에서 둘로 구분하는 논리도 어려울뿐더러, 둘이 된 것을 하나로 생각하는 그 논리도 굉장히 어려워요. 그 논리는 두 번째 시간에 하겠습니다. 그 논리가 굉장히 복잡하기 때문에 그 논리를 두 번째 시간에 하겠는데, 첫 번째 시간을 끝내면서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슈퍼맨시리즈 제 3탄에 보면 슈퍼맨이 약간 돌았어요. 돌아가지고 갑자기 착한 슈퍼맨이 악해졌어요. 악해져가지고 그 힘을 어디다 쓰느냐 하면 이탈리아 피사에 가면 탑이 하나 있죠. 피사의 사탑이라고 하는데, 그게 약 5.5도가 기울어져있거든요. 이 사악한 슈퍼맨이 그 탑을 바로 세워버려요. 여러분, 탑은 바로 세워 있는 것이 옳은 거예요? 아니면 기울어져있는 것이 옳은 거예요? 탑은 누워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세워 있어야 되는 것이죠. 근데 사악한 슈퍼맨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 탑을 반듯하게 세워버렸다는 이 말이죠. 근데 반드시 세워버린 탑은 그때부터 의미가 없어요. 하나의 기울어져 있다는 의미가 날아가 버립니다.

 

그렇다면 이 어두움을 지배하는 악마가 하는 일이 뭘까요? 죄인에게, 어두워진 이 세상에 평안을 줘버려요. 희망을 주고, 평안을 주고, 인간이 행함으로 의인을 만들어버려요. 근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평안을 주러 온 겁니까? 아니면 불화를 주러 온 겁니까? 싸우러 왔죠. 인간에게 가장 강한 결속력이 뭐냐 가족결속력입니다. 가족결속력, 이게 가장 왜 강하느냐 하면 기투거든요. 사르트르의 기투. 인간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그냥 던져진 존재에요. 그냥 던져진 존재.

 

내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어떤 집안에서 살 것인가는 나의 선택과는 상관없었다는 겁니다. 그냥 던져진 존재입니다. 어디에다가 던져졌어요? 세상에다가. 세상에 던져진 존재기 때문에 인간은 무슨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느냐 하면 나의 존재의미와 목적은 무심코 던져졌기 때문에, 그걸 우리한테 강요를 해서도 안 되고, 그걸 닦달내서도 안 된다는 겁니다. 왜? 내가 살고 싶어서 태어났습니까? 내가 살고 싶어서 이 세상을 골랐어요? 고를 것 같았으면 차라리 미국 맨해튼을 골라야지. 있을 것 다 있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세상에서 억지로 살아가고 싶은 사람에게, “사는 의미가 뭐냐? 목적이 뭐냐?” 그걸 묻는다는 것은 실례라는 겁니다. 그거는 논리상 반칙이 되고 억지가 된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내가 사는 의미를 이제부터 내가 만들어 가면 되죠. 만들어 가면 되는 거예요. 내가 한 역량만큼, 내가 수고한 노동만큼 열매를 얻으면 되죠. 근데 모순이 뭐냐, 내 의미가 뭐냐, 내 존재가 뭐냐고 그걸 묻는 것은 본질이라면 실존은 본질보다 앞서 있다는 겁니다. 내 실존이 던져진 존재기 때문에, 실존의 입장에서 ‘나는 어느 정도까지 능력이 있는가?’ 그게 나의 본질이 되는 거죠. 그 본질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이 들어있습니다. 결국은 나의 나 됨은 나하기 나름이에요.

 

내가 놀면 거지가 되고, 그것도 내 책임이고. 내가 부지런해서 돈 벌면 그 부자 되는 것도 다 내덕이고. 인간 뭐 있어? 그거죠. 인생 뭐 있어? 한 방이지. 그거죠. 뭐 있어요? 지가 노력한 만큼 얻는 것, 이게 진리라는 겁니다. 그렇게 살다가, 우연히 던져진 존재기 때문에 우연히 살다가 죽으면 그거는 내 책임이 아닌 거죠. 뭐, 살만큼 살면 됐지. 그렇게 하다 살다 죽으면? 뭐, 죽으면 죽는 거지. 도대체 죽는 것 때문에 왜 두려워하고 종교를 찾고 신을 찾느냐 이 바보들아!

 

왜? 태어날 때부터 우리한테 “니는 꼭 하나님 믿고 살아야 된다.” 라고 그걸 우리한테 주문하고 태어났으면 하나님 믿지. 태어나고 보니까, 의무감 없이 태어났는데, 왜 예수 안 믿는다고, 하나님 안 믿는다고, 책임을 묻고 지옥천당에 보내버리면, 이건 나한테 억지로 과도한 요구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앞뒤가 안 맞는 행동이다. 이 말입니다. 이의 있으면 이의 있다고 한 번 말해봐라. 내 말이 틀렸으면 틀렸다고 토 달아봐라.

 

이게 노벨문학상까지 거부한 사르트르의 장담입니다. 그럼 피사의 사탑은 바로 세울 필요가 없죠. 기울어진 그 자체로 해야 관광객이 모이니까. 이걸 공사해서 바로 세우면 피사에 아무도 안 오려고 할 겁니다. 바로 있는 흔해빠진 탑을 왜 구경하려고 합니까? 이러한 예와 어두움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그거는 두 번째 시간에 하겠습니다.

 

10분 쉽시다.


가락-요한복음12장44절(악마의 겸손)161220b-이 근호 목사

 

피사의 사탑에 대해서, 기울어져야 되거든요. 모든 탑은 그 정도 무너지면 다 무너지거든요. 근데 수 백 년째 계속 서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그게 의미가 있는 것처럼, 인간은 기울어져야 돼요. 인간은 바로 서면 의미가 없어요. 죄인이어야 되거든요. 그래야 예수님이 빛이 돼요. 예수님만이 빛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은 어두움이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두움이라는 것을 가지고, 우리가 스스로 어둡다 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마세요. 어두움이라는 것을 깨우쳐주신 주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야 되지, ‘아휴, 조금만 잘 할 수 있으면 빛 가까이 갈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마세요. 빛은 예수님으로만 충분해요. 예수님으로만 충분하지 우리까지 빛이 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빛을 받으면 되지, 우리가 별이 되면 안 돼요. 자칫 자기가 보혜사가 되면 안 돼요. 보혜사는 성령으로 충분하지, 지가 또 보혜사 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예수님께서는 믿음이라는 그것을 구약 전체의 완성으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라는 이 말은, 여기서 난해하기 시작하는데요.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이 완성이 아니에요. 예수님을 믿으라는 이 말이 완성이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앞으로 예수님의 존재가 주님의 우편에 있은 다음부터는 여기서 뭐가 내려오느냐 하면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내려와요.

 

전에는 율법이 내려왔지만 지금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내려온다고요.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까. 이 말씀이 내려오기 때문에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은 전부 다 예수님처럼 되면 안 되고 말씀처럼 돼야 돼요. 예수님의 말씀처럼. 말씀의 주가 되시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말씀을 지켜버리면 이 우리가 제 2의 예수가 돼버려요. 그것은 주가 두 명, 세 명, 네 명이 될 수가 있어요. 이러면 안 되잖아요.

 

쉽게 말해서 우리가 말씀을 지키면 안 되고, 말씀이 우리를 삼켜서, 삼켜져버려야 돼요. 삼켜져버리면 우리는 삼킴을 당하기 때문에, 내 자랑을 하지 못하고 삼켜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위력만, 완성의 위력만 잘 증거 하게 되고 그것을 자랑하게 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나오잖아요. 십자가 외에는 내가 자랑할 것이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 외에요. 십자가 외에는.

 

그러면 십자가 외에 하고 예수님하고 차이점이 뭐냐, 예수님은 존재지만, 십자가는 예수님의 존재가 벌인 최종적인 기능이잖아요. 십자가 기능. 그럼 우리가 제 2의 주가 될 필요가 없고, 주님의 말씀의 완성이 되는 그 능력은, 우리에게는 능력이 없고, 완성된 그 능력이 우리를 삼켜줘야 우리는 완성 안에 합류가 되고 포함이 돼버리는 겁니다. 말씀의 능력에 의해서 포함이 돼버리죠.

 

그러면 예수를 믿으라고 할 때 믿으면 안 되고, 예수를 믿으라는 말씀 자체가 우리한테 덮쳐버리면 그때부터는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이 믿어지는 사람이 돼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으라는 그 말씀이 우리가 안 지켜도 주님 쪽에서 지켜서 우리에게 완성된 체로 만들어내는 그 업적을 이룬 거예요. 우리는 그 결과물이 돼버리고. 그래서 “예수 믿은 것도 주께서 하셨잖아요. 제가 믿은 게 아니에요. 주께서 일을 벌여가지고 예수 믿어라! 요한복음 12장 44절, 그 말씀을 던진 예수님이, 본인이 그 말씀을 가지고 우리한테 실현시켰잖아요.”라는 고백을 하는 거예요.

 

면류관을 반납하는 거예요. 이건 제가 쓸게 아니고, 제가 쓴 면류관조차도 주께서 남기신 모든 말씀이 흰옷을 입게 현실적으로 적용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 적용된 열매가 우리들이라는 거예요. 우리들. 하나님은 농부시고,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그럼 성도는 뭐예요? 그 가지에 맺힌 열매가 되잖아요. 열매가. 열매를 맺읍시다. 열매를 맺자고 한다고 해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에요. 맺긴 뭘 맺어요? 열매가 되게 해요. 열매가 되게.

 

그래서 가지에 붙어있지 않는 자는 열매가 되지 못하고 주께서 잘라버린다 이 말입니다. 하라는 말이 아니고 반드시, 필히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끔 그렇게 하는 거예요. 왜요? 주께서 잘라버린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잘라버리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박수를 치고 거기에 동의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일이, 내가 일의 주체자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대상이 되고 객체가 될 뿐입니다.

 

그러니까 처음 시간부터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하게 되면 예수님의 이런 말씀 이전에 구약이 있었다고 했죠. 구약의 모든 것이 예수님한테는 불연속이 아니고 연속입니다. 그런데 우리한테는 뭐가 됩니까? 우리도 연속이라고, 율법 줬으니까 지키겠다고 그렇게 했는데,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착각했는데, 그 율법한테 우리가 저주를 받게 되었으니까, 아, 애초부터, 지금 못 지켜서 불연속이 아니고, 처음부터 율법을 우리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존재였음을 발견하게 된 거예요. 우리는 십계명을 못 지키는 거예요. 심지어 못 지키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으라는 것도 못 지켜요. 나를 믿으라는 것도 못 지키는 겁니다.

 

그래서 지난 수요일에 설교 할 때 뭐라고 했던가요? 예수 믿어서 의인 된 사람은 없다고 했죠. 예수 믿어서 의인 된 사람은 없어요. 로마서 1장 17절에 보면 자리가 바뀌어졌어요. 의인은 뭐로 살리라?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예수 믿어서 의인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은, 의인이 된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자가 이미 의인이 된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믿음이 어디서 나왔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온 것이고. 그 믿음이라는 것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 앞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의가 쉽게 그냥 나타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만 나타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은, 실제로 그 효과를 이제부터 어두움을 향하여 본격적으로 발휘했는데, 그 발휘한 결과가 뭐라고요? 의인이 생산되었다 이 말입니다. 의인이 되고 난 뒤에 보니까 자기의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된 것이고. 믿음으로 믿음에,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에서 나온, 예수님에게서 나온 그 믿음이 나를 삼켜서, 나를 덮쳐서, 그래서 나는 졸지에 그 믿음 노선에 의해서 구원이 되었으니까, 그게 로마서 1장이거든요.

 

근데 로마서 4장에 가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행함이 아니고 은혜로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은혜. 은혜라는 말을 할 때에 은혜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은혜와 극히 대비되는 말을 썼는데, 그게 뭐냐 하면 행함이라는 말을 쓴 거예요. 이거는 행함이 아니고 은혜로 된 것이다. 따라서 은혜에 속한 자들은 아브라함처럼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어떤 현상? 이거는 내가 행함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고백이 똑같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거는 내가 행하지도 않았는데 누가 행했어요? 그건 주께서 남긴 그 말씀이 실효성 있게 적용이 된 거예요. 어떻게 그게 실효성이 있느냐, 그거는 구약을 보면 알죠.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땅에서 움직였잖아요. 그들 속에 누가 함께 있었습니까? 주의 이름이 함께 동행 했죠? 그들은 날마다 실패해요. 실패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계속 존속한 것은 누구 때문에 그랬습니까? 주의 이름의 약속 때문에, 주의 이름이 남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다른 모습으로 신약까지, 예수님까지 계속 이어지게 하잖아요. 그렇죠?

 

이걸 그대로 신약의 성도에게 적용시켜봅시다. 성도가 성도 된 것이 누구 덕입니까? 예수 믿고 난 뒤에 정신차려가지고, 본인이 성령 받았으니까 자기 행함으로 행해서 계속해서 신앙인을 유지하는 겁니까? 아니죠. 구약하고 똑같았잖아요. 주의 이름이 계속 동행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구원받은 솜씨가 주의 이름의 성과인 것을 성도는 그냥 확인할 뿐이죠. 그럼 성도가 해야 할 것은 구약의 실패한 그것을 답습하면 되죠.

 

왜 실패를 답습해야 되는가? 그 실패가 실패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뭐가 주어지게 되기 때문에? 그들에게 언약이 주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그들에게는 실패가 되겠죠. 로마서 3장 19절에 율법이 주어진 것은 모든 입을 막고 심판아래 있게 하심이라. 그래서 21절에 율법 외에 한 의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화목제물이라는 겁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딴 게 아니에요. 어떤 행동을 하던 간에 그것이 십자가와 연결이 되면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인의 고백이 뭐냐 하면, 자기가 어떤 행동, 귤을 까먹는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이 무엇과 관련이 되어야 해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되는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와 귤 까먹는 것하고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예를 한 번 보여드릴까요? 귤을 까먹으면서 ‘주님, 감사합니다. 이 귤을 까먹고 힘내서 주님께 영광 돌릴게요.’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합시다. 지 혼자 중얼중얼하면서 귤을 까먹었다 이 말이에요. 그럼 주님께서 귤을 다 까먹게 해놓고 “아까, 니 귤을 까먹으면서 무슨 소리했느냐?” “주께서 은혜로 주셨으니까 감사히 먹고 힘내서 영광 돌리겠습니다.” “그러면 니가 귤 까먹기 전에 영광 돌리는 것하고, 귤 까먹고 난 뒤에 영광 돌리는 것하고 그게 차이가 있어야 할 텐데? 방금 기도를 그렇게 했으니까 그 차이가 뭐가 있는지 보여줘 봐라.”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별 차이가 없죠. 그게 뭐냐 하면 사람에게 이미 뭐가 각인되어 있느냐 하면 식사기도 할 때는 이렇게 해야 되고, 귤 까먹을 때는 이렇게 해야 영광 돌린다 하는 것이 이미 각인되어있으니까, 귤 먹는 순간에 그냥 먹기에는 심심하고 미안스럽고 하니까 뭔가 한 마디 해야 미안한 감이 약간 줄어진다는 느낌이 들죠. 그 줄어든 만큼 뭐가 쌓이느냐 하면 내가 그만큼 하나님과 괜찮은 관계라는 자기 의가 형성이 돼요.

 

그걸 돌아서면 고게 내가 미처 몰랐던 죄가 추가가 돼서 등장하는 겁니다. 그럼 그 다음부터 귤 까먹을 때 중얼거립니까? 가만히 있습니까? 가만히 있겠죠. 그럼 왜 가만히 있습니까? 안 중얼거리고? 가만히 있는 것이 죄를 줄인다고 생각하는 죄를 범하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어떤 짓을 해도 어두움이고 죄 되게 하시는 그 작용이 있는 사람은 성도입니다. 그런 현상이 나타나면. 어떤 것을 해도. 주님이 동행하시기 때문에 항상 그게 십자가와 관련되도록 만들어요.

 

이걸 하면 했다고 죄고, 안 하면 안 했다고 죄고. 해도 했다고 죄고, 안 해도 죄고, 그냥 했다고 해도 죄고, 그걸 안다고 해도 죄고. 내가 이걸 하나 저걸 하나 죄라는 것을 알았다는 그것도 죄가 되고. 그럼 어쩌라고? 그냥 죄 지으라 이 말이죠. 편하게. 항상 삐딱한 나를 바로 세우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아주 사악해요. 사악한 슈퍼맨이에요. 항상 뭔가 덜 죄짓고, 덜 죄지은 그 폭만큼 내가 미처 몰랐던 영광이 된다고 착각하는 거예요. 그만큼.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십자가라는 것은 하늘에서 죽은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라는 것이 얼마나 깊이 인간 속에 들어왔으면, 바로 인간의 손에 의해서 당한 폭력사건입니다. 그 정도로 깊숙하게 들어왔어요.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 구경도 못했어요. 왜? 그때 안 태어났으니까. 그때는 실존적으로 기투가 아니었으니까. 거기에 태어나지 않았으니까. 그럼 태어나지 않았으면 우리는 죄 없습니까? 선악과 안 따먹었으면 죄 없습니까? 우리는 내가 행하지 않은 일엔 죄가 없어요. 그럼 주님은 어떻게 합니까? 십자가가 십자가 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일어난 상황을 우리 일생을 통해서 그대로 다 집어넣는 거예요. 예수님의 공생애를 거기다가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으면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의 공생애가, 그 십자가가 가신 아픔이 계속 나오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 현상이.

 

그 현상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우리는 십자가 구경도 못했고, 선악과 구경도 못했다. 아담이 따먹었지 내가 따먹었나, 하는 그 모습이 우리에게 일종의 뭐로 비치느냐 하면 우리 스스로 보기에 이게 의인이 되는 겁니다. 의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의 십자가가 작용할 때, 항상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뭐로 생각한다? 나는 어떤 경우라도 의로울 수 있다는 본성이 계속해서 드러나게 하는 거예요.

 

이걸 누가 하느냐, 십자가가 우리로 하여금 의인인척 하는 이 죄를 계속 이어지게 하는 거예요. 한평생 성도의 남은 인생 속에서 십자가 믿고 죄인인데 십자가로 구원받았다는 이 고백을 하더라도, 돌아서면 또 다시 우리는 의인인 척하는 거예요. ‘십자가까지 믿었으니까 이 정도면 의인이 아니야?’ 하고 의인인척 하는 행동을 계속 하는 이유가 십자가가 밑에서 밑받침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 십자가를 단독적 보편성이라고 합니다. 보편적인데 뭔가 드러나지 않는 게 모든 것을 움직이는 추동력이 되는 거예요. 우리 가운데 드러나지 않는 그것이 뭔가, 예를 들면 방귀 뀌면 누가 방귀 뀌는지는 대번에 알잖아요. 근데 아무도 안 뀌었는데 방귀냄새가 나도록 만들듯이. 뭔가 사람들은 각자 개인의 소질을 발휘했을 뿐인데, 의인이라는 공통점은 한결같아요. 모이면 지 잘났다고 하거든요. 우리가 어떤 일을 해도, 누구하고 할 것 없어요. 서로가 다 이런 행동했으니까, 이런 계획했으니까, 의인이라는 그러한 속성을 드러내는 배후에 그것이 이 세상을 떠나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함께 우리와 어울려서 세상 끝 날까지 계속 가는 겁니다.

 

“나를 찌른 자도 볼 것이요”(계1:7). 근데 그 분을 우리가 구체적으로 찾을 수가 없어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 쪽에서는 연결돼야 하지만 우리 쪽에서는 그 분께 다가가는 것이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그 분을 찾을 수가 없지만, 우리가 알기로는 그 분이 계속해서 작용한다는 것을 우리를 통해서 고백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어두움이에요. 그럼 그 속에서 우리가 죄만 바라본다는 것이 아니고, 성경말씀 전체가 같이 오게 되죠.

 

47절에 봅시다.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인데, 이걸 여러분한테 한 번 물어볼까요? 물어보겠습니다. 제가 묻습니다. 심판을 안 하겠다는 말씀입니까? 너희들은 심판 당해도 싸다는 말씀입니까? 심판당해도 싸다는 거예요. 심판당해도. 이 말은 뭐냐 하면 믿고, 안 믿고 간에 이미 너희들은 심판 대상이라는 겁니다. 믿으면 심판 안 받고, 안 믿으면 심판 받고 이게 아니라, 예수님의 심판 있기 이전에 이미 말씀 가운데서 마땅히 심판 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실효성 있게 그렇게 만들잖아요. 그럼 현실 속에서 항상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오늘도, ‘12월 20일도 나는 심판 받아야 되는데 오늘도 안 받았다.’ 내일 되면, ‘어? 나 심판 받아야 되는데 오늘도 안 받았다.’라고 느끼는 것은 주께서 계속해서 동행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우리보고 뭘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이 너와 동행하고 있고 너를 덮치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심판을 받아야 되는데 안 받는 이유가 뭐지? 아,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예수 믿게 하시는구나.’

 

그 다음에 봅시다. 47절 후반 절에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고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라고 했죠. 그럼 진짜 성도는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서 감사하겠어요? 아니면 자기가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서 감사하죠. 왜? 심판함이 아니고 너를 구원한다는 것에 대해서, 그게 모든 솜씨와 행동의 주체가 여전히 우리한테 있지 않고 일방적으로 누구한데 있다? 주님한테 있기 때문에. 주님한테 있음을, 말씀으로 전체가 덮친 것을 보니까, 우리 행동을 통해서 계속해서 이게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주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철저하게 우리에게서 뽑아낼 것을 다 뽑아내는 거예요.

 

우리는 냄비 안에 있는 뼈입니다. 우려낼 것을 다 우려내요. ‘내 안에 전에 주신 말씀에 이런 것도 들어있네!’ 하고. 뽑아낼 것은 다 뽑아내요. “지키지 마! 지키지 마! 내가 우려낼 거니까 그냥 살아. 니 잘난 체 하며 살아. 우려낼 건 내가 우려낼게.” 그래서 성도가 뭐냐 하면 성도는 잘난 체 안 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도 똑같아요. 잘난체하는데, 성도와 성도 아닌 자의 차이점이 뭐냐, 이 잘난체하는 것조차도 주님의 말씀의 계획된 대로 잘난 체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주의 말씀대로 잘난 체 할 수밖에 없다. 그럼 성도 아닌 자가 뭐냐, 주의 뜻대로 잘난 체 할 수밖에 없는 나는 구원받았다고 하는 게, 성도가 아닌 사람이에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주께서, 잘난 체 하는 이유가 주께서 일방적으로 끌고 가시기 위해서 잘난 체 한다는 것을 믿게 된 사람은 성도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성도에게 잘난 체 하는 행동을 하게 하셨다고 내가 믿는다고 이야기하면, 그건 성도가 아니에요. 말의 주체와 말 행위의 주체가, 이게 틀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쉽게 말해서 쓸데없이 남한테 고백하지 말라는 겁니다. 남한테 고백하면 뭐합니까? 지 잘난 체 하는 거예요. 주께서 아시면 되지, 왜 남한테 신자인 것을 확인받고 인정받으려고 해요. 주께서 아시면 되지.

 

주께 인정 못 받았으니까 남한테 확인 받으려고 하거든요. 목사한테. 그럴 필요 없어요. 그럼 그 사람은 자칫하면 목사한테 약점 잡힙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구원시켜줄게.”하고 스스로 지가 목사의 딸랑딸랑 거리는 마귀의 종이 돼요. 그럴 필요 없어요. “구원 받았습니까?” “니나 잘하세요!”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니나 잘하세요. 주님하고 나하고 문제를 니가 왜 알아야 되는데?” “목사님. 저 구원받았습니까?” 무슨 제가 도사도 아니고, 제가 십자가지지도 않았는데, 십자가지지도 않은 사람한테 왜 물어요?

 

다만 제가 이야기할 것은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어떤 행동을 해도 항상 주의 말씀대로 실시된 것이 믿어진다는 것. 자기가 믿는 것이 아니고 수동적으로 믿어진다는 것은, 이게 바로 요한복음 12장의 말씀이 적용된다면 성도입니다. 누구라고 이야기 안 했어요. 그냥 성도입니다, 에요. 그냥. 그러니까 성도네요, 라고 이야기 할 수가 없어요. 근데 이름 부를 때 그냥 누구누구 성도님이라고 불러주지만. 그거는 확실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부를 것이 없어가지고 “아무개 불신자님!” 이렇게 부를 수는 없잖아요. 무슨 욕을 얻어먹을라고. 내가 뭔데 신자 아니라고 확정을 못하잖아요.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는 문제이잖아요. 인간의 운명에 제가 관여할 바가 아니잖아요.

 

고린도 전서 1장 14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가이오 집 외에는 왜 세례를 안 줬을까요? 나는 세례를 주러 온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러 왔다는 말 대신, 왜 복음과 대치된 자리에다가 세례를 준 이유가 뭡니까? 성만찬도 마찬가지에요. 복음 앞에는, 복음의 반대편에는 세례 있고, 성만찬이 있어요. 왜 그렇게 배치를 하는 겁니까? 사람이 뭔가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그 원인을 자기의 행위에다가 결부시키기 때문에 그래요. 세례 받았다~! 그렇게 되면 세례 받은 것과 안 받은 것으로 자기가 구원받은 것과 안 받은 것으로 구분 짓는 결정적인 기준으로 삼아버려요.

 

그러면 세례 받으면 구원된다고 이래 버리면 세례 받은 행위는 얼마든지 내 쪽에서 발휘할 수 있거든요. 머리 들이밀고 물 뿌려주세요. 안 그러면 옷 벗고 욕조에 들어 갈랍니다. 할 수 있는 문제 아닙니까? 세례 받았네, 유아세례 받았네, 할 수 있단 말이죠. 할 수 있다는 것은 납득이 되잖아요. 설득이 된다고요. 설득이 돼버리면 행위가 구원을 유발시켜버려요. 인간의 행위는 구원을 보여주는 행위가 아니고, 나중에 행위는, 자기가 죄인임을, 구원받을 수 없음을 이야기하는 행위가 되어야지, 이래서 구원 받았지롱~하고 나오는 구원과 연관시켜서 나오면 안 돼요. 그러면 예수님이 피를 흘릴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과 좋게, 좋게 이야기해서 구원받게 되죠. “내가 말씀했다. 지켰나?” “예. 지키겠습니다.” “아이고, 괜찮네.” 이래서 구원받은 것이 없어요.

 

피라는 것은 끝났고, 니는 할 수 없고, 결정됐고, 구원 될 수 없었다는 것을 뒤늦게 되풀이해서, 반복해서, 남아있는 인생 전체를 걸쳐서 그걸 드러내는 작업을 계속해서 주의 이 말씀을 가지고 하는 거예요. 내가 심판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내가 매 들고 왔는데, 매 들고 온 것은 구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매 들고 온 거다. 이 말은 니는 매 맞아도 싸다. 이 말입니다. 나 아니면 너는 구원이 안 됐었어. 그런 뜻이다 이 말이죠. 얼마나 간단한 문제입니까? 그러면 주님! 고맙습니다. 이렇게 하면 될 걸, 그렇게 하면 성도일 걸, 나는 구원받았지롱~ 노렸던 구원을 드디어 획득했네! 이렇게 돼버리면 이건 맞아도 더 맞아야 돼요. 왜 자꾸 기대했던 바를 성취한 성공자로 자기 자신을 그렇게 계속 붙들려고 해요?

 

이 세상이 왜 어두우냐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검토하는 것도 있지만, 우리 외곽에,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과 나라를 통해서 거기에 동의를 함으로써 우리가 어두움이라는 것을 깨달아요. 동의를 하면서. ‘아, 저거는 신앙과 관계없이 착한 일이네.’ 이렇게 순간 동의될 수가 있다고요. 평소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복음으로 생각 안 하다 보면, 다들 그래요. 동의하다가도 돌아서면 아차! 복음으로 보니까 그것도 아닌 것이 돼요.

 

제가 아까 식사시간에 도서관에를 갔다 왔어요. 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다가 제가 하나 인용한 것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중국의 대학교 식당에 대학생들이 새겨야 될 16가지 내용을 새겨 놓았어요. 그걸 시간가는 것이 귀하기 때문에 빨리 읽겠습니다. 대학생들한테 밥 먹으면서 이걸 계속 새겨라 이 말입니다. 1. 원대한 포부. 2. 굳은 신념. 3. 조국사랑. 4. 인민을 위한 복무. 중국이니까. 5. 학습권면. 6. 자강불식. 스스로 강하게 하고 휴식 없이 계속하라. 7. 규정준수. 8. 바른 기풍. 기풍이라는 것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9. 철저한 신용. 10. 엄격한 자기관리. 11. 예의범절. 12. 단결우애. 13. 근검절약. 14. 분투정신. 15. 건강한 신체. 16. 생활열애. 나는 생활을 열심히 사랑하겠다. 이 16가지를 하라는 겁니다.

 

뭐 빠진 것 있어요? 빠진 것이 있거든 아이디어 내보세요. 거의 완벽하죠? 이걸 대학생들에게 하도록 시킵니다. 그럼 결론은 뭡니까? 바른 대학생, 착한 대학생이겠죠. 근데 이것을 비판해보세요. 비판할 수 있습니까? 중국입니다. 공산세계에요. 비판해도 어떤 공통성을, 보편성을 느끼지 않습니까? 보편성. 근데 예수님께서 여기에 복음을 전했다, 대번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죠. 공산당이니까. 그렇죠? 방금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여기에 동의하죠. 옳은 소리만 해놓았으니까 동의 안 할 수가 없죠. 우리가 중국사람 이라고 치면 “그것 맞네. 다 맞네.” 하겠죠. 같이 맞는다고 하는 어떤 공통성을 발견한 사람한테 주님이 틀리다고 한다면 우리는 주님을 살해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 같은 공통성에 동의하니까. 같은 속성을 갖고 있으니까.

 

이걸 우리는 어떻게 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중국 대학생들에게 준 교훈을 보면서 또 다시 확인하는 거예요. 내가 죽어 마땅한 인간이라는 것을. 우리는 자녀교육 이렇게 시키잖아요. 이 16가지면 완벽한데. 그래서 오늘 제목을 제가 처음부터 정했어요. 겸손한 악마. 자기한테 희망을 거는 거예요. 착할 대로 한 번 착해보자. 어느 정도로? 겸손에 겸손을 더하면서. 이게 십자가 죽으심을, 내가 예수만 믿으면 된다는 그 연속성을, 나름대로 그 연속성을 거부하고, 나로부터 출발해서 나온 그 연속성, 내가 심지어 예수까지 믿고 기어이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그 연속성을 내가 유지한다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의 복음은 연속성이 아니고 계속해서 불연속성입니다. 동행해주니까 구원받는 거지, 5년 전에 예수 믿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뭐 한 번 믿었으면 성령이 임해서 계속 구원받는다고요?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내주하니까 그런 거예요. 그 성령이 누구 영입니까? 주의 영이죠. 주의 영은, 성령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십자가가 하신 일을 가지고 들어가는 거예요.

 

요한복음 16장을 미리 땡겨서 한 번 봅시다. 7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는 것이 유익이라, 이유가 뭐죠? 같이 오시면 되는데? 같이 계시면 되잖아요? 왜 예수님이 계시면 안 됩니까?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그 이유가 뭐냐를 여러분한테 묻는 겁니다. 같이 계시잖아요? 삼위일체 이론이라면 같이 계시면 되는데? 예수님계시고 영계시고 같이 있으면 될 것 아닙니까? 왜 임무 교대합니까? 왜 바통터치하십니까? “사역이 달라서.” 예, 사역이 다른데, 장춘옥 집사님이 오랜만에 바른 소리 하니까 제가 다 당황스러운데, 아직까지 칭찬이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그 이유를 대야 합니다.

 

사역이 어떻게 다릅니까? 그걸 맞추면 제가 귤 줄게요. 사역이 어떻게 달라요? 예수님이 떠나간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게 단절을 의미하는 겁니다. 같이 있으면 사람들이 오해해요. 예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내 편이고 나는 예수님 편이라고. 서로 좋은 게 좋다고, 친구라고 했으니까. 함께 있음이 가능한줄 알고 있어요. 함께 있다고 가능한 게 아니죠.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어두움 속에 함께 있어도 한 통속이 아닌 거예요.

 

그게 뭐냐, 단독성이에요. 단독성. 아까 제목이 겸손한 악마라고 하는 것이 너무 심해서 수정 들어갑니다. 보편적 단독성으로. 유식해보이고 하니까. 단독성이에요. 단독성. 그런데 예수님을 별개의 인간으로 안 보고, 너나 나나 똑같은 목수 아들로 본 거예요. 같은 인간으로 봤다는 말은 서로 이바구(이야기의 경상도 방언)하고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이 말이죠. 예수님한테 이래 기도하면 아이고, 알았다고, 착하다고 응답하고. 서로 사귈 수 있는 관계로 보는 거예요. 단절성을 전혀 이해 못하는 거예요.

 

십자가 빼버린 겁니다. 모든 성경해석에서 십자가를 빼버리는 거예요. 이제 십자가 믿었으니까 같이 이제 맞담배 합시다. 맞담배 하든지 맞짱 뜨든지. 십자가 믿었는데 뭐. 이제 부활의 새 생명의 영에 같이 있는데 뭐. 이제 십자가 잊어버리고 같이 막 나갑시다. 같이 친구고 사귑시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묻죠. 어떻게 그게 예수님하고 막 사귈 수가 있습니까? 성령이임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성령이임해서.

 

그러면 한 번 봅시다. 요한복음 16장 8절 “그가 와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세상을 어떻게 합니까? 책망하죠. 아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뭘 빠트렸습니까? 책망의 역사를 빼버린 거예요. 성령이 함께 있기 때문에 이제 맞담배 하듯이 같이 맞먹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까 했던 질문에 답변해보세요. 성령의 기능이 뭡니까? 책망이죠. 그럼 예수님의 기능이 뭡니까? 불연속성, 단절이죠. 아, 끝까지 대답했으면 정말 귤 하나 주는데, 취소해야지. 그러나 잘 이야기했습니다. 칭찬합니다.

 

이게 사역이 달라서 그래요. 사역이 다른데, 다른 이 사역을 같은 시대에 할 수 없는 거예요.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역과 그걸 근거로 해서 이리와! 이리와! 이래서 너는 지옥가야 해! 라고 꾸짖는 사역의 순서가 달라야 한다 이 말입니다. 주의 영이 그런 영입니다. 그 단절성을 더욱 단절화 시키는 것이 성령이 하는 일입니다. 성령은 자기 이야기를 안 해요. 주님이 하신 일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주님이 하신 일을.

 

그렇다면 요한복음 12장 47절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심판하지 않는 이유가 아직까지 예수님께서 최종적인 단절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너희들 손에 내가 죽어야 비로소 이 세상은 일체의 동정이나 인정을 베풀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는 겁니다. 일체의. 그래도 목사님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잖아요? 사랑하는 자가 없어요. 사랑하는 자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가 “그래도 인간 중에 사랑하는 자가 있잖아요?”라고 그렇게 말하면 안 돼요.

 

사랑하는 자를 말한다는 것은, 아까 이야기했듯이 귤이 없는 가운데 축복과 저주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인간은 누구 편에 자기를 포함시킨다? 저주 축복을 가름할 때, 반드시 축복 편에 본인을 세워놓고 그 다음에 그 다음을 이야기해요. 그러면 보편적 단독자는 누굽니까? 예수님 밖에 없는데, 꼭 인간은 보편적 단독자 옆에 누굴 세웁니까? “주님 저는 다르겠죠?”라고 꼭 세워요. 인간의 조직신학의 문제가 거기에 있어요. 신학을 배운 그걸로 인하여, 내가 신학이 요구하는 그 축복의 자리에,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자꾸 자기를 간주하는 거예요.

 

신학이 사람을 배립니다. 안 그래도 배린 인간인데, 신학이 인간을 더욱더 배려놨어요. 목사 되면 구원은 기본이라고 여기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목사라는 것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단절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줬는데, 오히려 기름부음 받은 목사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나하고 같은 업자라고 본 거예요. 같은 업자라고. 그럼 성령이 오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바로 그것 때문에, 너 때문에 십자가에 죽었다고 이야기하겠죠. 귤을 까먹으면서 귤을 먹고 주의 영광 돌리게 해달라고 하는 이것 때문에 죽은 거예요. 그래서 이게 죄니까 다음부터는 귤 까먹을 때 곱게 까먹겠다고 하는데, 또 곱게 까먹은 것 때문에 죽으신 거예요.

 

이래도 죽으시고 저래도 죽으신 거예요. 아까 정답이야기 한 것 때문에 죽으시고 정답 이야기 안 한 것 때문에 죽으시고. 뭘 해도 우리는 단절되어 있음을, 주님의 성령이 와서 지적을 하는 그 자체는 같은 성령 안에 있는 자에게만 그 지적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예.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았습니다.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았습니다.”라고 하죠. 로마서 1장 17절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죠. 이미 의인은 주께서 아시게 하신 거예요.

 

그렇게 보시면 되고, 그 다음 요한복음 12장 48절에 보면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이게 누굽니까? 나를 믿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이 자가 누구죠? 아버지죠. 아버지. 아버지겠죠. 지금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예수님이 아버지 오른편에 있는 입장이 아니고, 본인도 아버지로부터 구원받아야 할 자리고, 그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면 제자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요. 함께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대표한 자기 입장을 설명해주는 겁니다. “나도 구원받아야 된다. 아버지께서 심판하실 거다.” 언제?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실 것이다.

 

그 뒤에 아버지가 나오잖아요. 50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자, 이걸 설명하면 시간이 끝날 것 같습니다. 말로 설명하면 잘 이해가 안 되죠. 지금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있는데 예수님이 있는 자리는 어디냐 하면 죄인의 자리죠. 십자가 지기 전이잖아요. 십자가 진 이유가 뭡니까? 예수님께서 죄인이기 때문에 돌아가신 거예요. 죄인의 자리에 함께 있는 거예요. 예수님은 뭐냐, 보편적 단독자니까. 보편적 대표자에요.

 

대표자가 십자가 지기 이전이니까, 십자가 지고 해결하기 이전이니까, 무슨 자리에요? 죄인을 대표하는 자리에요. 그럼 죄인을 대표하는 자리에서 누구를 지금 언급하고 있습니까? 아버지를 언급하죠. 대표자하고만 하니까 다른 사람은 이해 못해요. 다른 사람은 이해 못하고 아버지하고 관계합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심판할 수 있습니다. 근데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낸 것은 심판 요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요소도 있다는 거예요. 아예 심판만 할 것 같으면 아버지가 예수님을 보내지도 않았죠.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낸 것은 먼저 뭐부터 확실히 하고? 심판받아 마땅함을 확실히 해놓고, 그 다음에 그 안에서 구원을 이야기하면서, 예수님 본인이 너희들 속에 박혀있다는 거예요.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얻는 거예요. 영생 얻는 거예요. 그걸 알기 위해서는 뭐냐, 내가 아는 아버지 입장에서는 너희는 이미 물 건너 간 거예요. 저주받아, 심판받아 마땅한 거예요. 따라서 예수인 나를 빼놓고는, 내가 만약에 빠져나가면 “구원해주세요. 영생주세요.”라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말이죠. 그거는 너희들의 합당한 권리가 아니고 그런 위치에 있지 않다는 거예요. 심판하기 위해서 주께서 말씀을 줬는데, 너희들이 백날 해봐야 아버지께 심판받아야 마땅한데, 계모임해가지고 그래도 사랑해달라고 하는 그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소리를 정 하고 싶거든 아버지한테 할 게 아니고, 예수님이 왜 왔느냐를 따지게 되면 ‘아, 심판받아야 마땅한데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구원이 되는구나.’라는 그 상태가 예수 믿는 상태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럼 예수 믿는 상태의 전제가 뭡니까? “심판받아 마땅한데”이거죠. “나는 심판받아 마땅한데” 다시 말해서 “구원해주세요.”하는 것은 우리가 할 소리가 아니라는 뜻이죠. 그러면 예수님 보고 “구원해주세요.”라는 것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왜냐하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는 이미 단절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우리를 대표한다는 것은 예수님 생각이에요. 우리가 기대하거나 우리가 원했던 바가 아닙니다. 예수님 생각이고, 그 예수님 생각은 아버지 생각이에요.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너는 저 죄인을 위해서 대표자가 되어라.” 이거는 아버지 생각이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 본문 말씀을 죽 보면 이거에요. 너희들은 이렇게 하라가 아니라, 내가 너희들에게 풍덩 잠겼다가 빠지면서, 풍덩 집어넣었다가 빼면, 그러니까 어떤 소시지를 막대기에 끼우고 밀가루반죽을 입혀서 기름에 풍덩 집어넣었다가 뺐는데, 그냥 그대로 있다면 이건 뭔가 변화가 없죠. 근데 풍덩 집어넣었다가 나오니까 밀가루가 바삭바삭하게 튀겨졌잖아요. 핫도그가 완성 됐잖아요. 지금 그 변화를 주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 변화를. 근데 집어넣고 한다는 것은 우리 아이디어가 아니에요. 저주 받을 인간에게서 그런 아이디어가 나올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여, 율법 주셨으니까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연속되어 있죠? 주께서 구원받으라고 율법 줬으니까 우린 잘 지키겠습니다.” 이래 생각한다니까요. 신약 때에 와서는 “우리를 구원하려고 예수님 주셨죠? 예, 예, 예수 믿을 그 정도의 양심은 있습니다.” 연속성을 주장하죠. 그러니까 이거는 아버지도 모르면서 아버지를 아는 척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아버지는 오직 예수님만 알아요. 유일하게 아버지를 아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표해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나타난 변화의 결과에 대해서만 고백할 따름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핫도그라는 제 몸을 보니까, 심판받아야 되는데 구원의 튀김가루가 묻어있다, 이거는 제가 원한 바가 아닌데요? 아, 요한복음 12장에 보니까 이 말씀대로 그렇게 되었네. 주께서 주의 말씀대로 본인이 알아서 성취했네. 아이고, 주께 감사합니다. 이게 오늘 본문 보는 태도에요. 본문 보는 태도입니다. 뭐 할 것도 없네. 우리는 그냥 놀았네. 그냥. 죄만 지었는데, 주께서 풍덩 잠기고 빼고 자시고 다 하셨네. 혼자 말씀 던져놓고 그 말씀을 혼자서 다 했어요. 그 와중에서 우리가 느낀 것은 우린 어두움이었다는 것. 어두움 되게 하셨다는 것. 어두움이고 어두움 되게 하셨는데, 그거는 예수님을 빛으로 드러내기 위한, 예수님이 빛이신 작업의 일환입니다.

 

이런 고백이 쏟아질 때 항상 그 고백을 들어보세요. 그 주체자의 자리에 누가 들어가 있습니까? 주님이 들어가 있죠. 그래놓고 “나는 구원받았네.” 이래 되어버리면 이야기가 갑자기 이상해져버려요. “지금껏 주께서 하신 것처럼 앞으로도 주께서 계속해서 나를 구원할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이래 되어야죠. 그 말을 누가 하겠어요? 그 말을 믿는 자 외에는 아무도 그 말을 할 사람이 없습니다. 믿는 자 외에는. 은근히 자기 구원을 노리는 사람들은 그 괜찮은 문장, 센텐스sentence를 자기한테 집어넣어버려요. 그러니까 나 구원받았다고 그 고백을 남한테 할 필요가 없어요. 남이 뭘 알아주겠어요? 뭐 이력서에 예수 믿는다고 하면 예수 믿는 회사에 취직되는데 유리할지는 모르지만.

 

끝으로 이 말씀하고, 총정리 하고 마치겠습니다. 아까 강의할 때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의 자기-전개라고 했죠. 예수님의 자기 전개. 카펫. 예수님의 자기 전개라고 하면 우리는 그 말을 알아듣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예, 그거 믿을게요. 자기 전개 믿을게요.” 하잖아요. 근데 그 예수님의 자기 전개라고 하는 것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 뒤돌아보면서 해야 될 고백이에요. 자기 전개라고 하니까 우리는 올라 탈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카펫을 깔아놓으면 우리는 제 3의 지역에서 홀라당 그 카펫을 밟으려고 뛰어들 시도를 하게 돼요. 그렇게 되면 그것은 예수님의 자기 전개가 아니고, “나도 약간은 기여했습니다. 나도 구원받는데 약간은, 폴짝 뛰어든 것은 제가 했습니다.” 이렇게 하죠. 그거는 잘못된 겁니다.

 

아까 사르트르의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그걸 연결시켜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사르트르가 뭐라고 했습니까? 본질보다 무엇이 앞선다? 실존이 앞서고, 실존이 실존되기 위해서 내용물로 나는 이런 인간이라고 본질을 채우고, 그 본질은 뭐냐, 자신이 노동한 것,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인간의 자기 실존은 자기 행함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양심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지가 사람 죽여 놓고 이건 주의 뜻이라고 하면 책임을 안지는 거잖아요. 그러면 그건 안 되고, 실존이 우선이기 때문에 나라는 인간은 내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이 옳다는 겁니다.

 

사르트르가 누구하고 결혼했어요? 보봐르 하고 결혼했죠. 계약 결혼했습니다. 계약을 자꾸 연장시켰습니다. 죽을 때까지. 사르트르는 먼저 죽고. 보봐르는 끝까지 살았어요. 나중에 무덤에 둘이 함께 묻어줬는데. 계약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책임지겠다는 뜻이에요. 책임지겠다. 내 인생 내가 책임지겠다.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합니까? 소위 성도라고 하면서도 자꾸 뭐가 올라와요? “예수 믿습니다. 성도 맞습니다. 성령세례 받았습니다.”하면서, 내가 그렇게 믿으면서도 또 몇 분 지나고 몇 시간 지나버리면 실존이 나와요. ‘주님 믿는 사람이 이래서 되겠는가?’ ‘내 행동이 이래야 되겠는가?’하고.

 

사르트르의 이야기를 안 했으면 이게 성도의 바른 삶인 줄 알거에요. 그러나 이게 바로 악마의 겸손이에요. 오늘 강의 제목 또 수정 들어갑니다. 악마의 겸손으로. 근데 악마의 겸손이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죽을 때까지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나오죠. 이게 죽을 때까지 나와요. 이게 악마의 겸손인 것을 이해하면 이게 바로 성도가 되는 거예요. 성도가. 이 겸손이.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를 보고 ‘아이고, 또 까불고 있고 또 예쁘장한 악마가 나오네.’ 그렇게 보고 기뻐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또 까부네? 내 인생 내가 책임진다고?’ ‘아이고, 엄마가 돼서 자식을 그렇게 가르치다니?’ 이게 주부가 매일같이 하는 소리 아닙니까? 또 돌아서서 ‘예쁘장한 악마가 또 까불고 있네.’라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은 주님의 자기 전개인데, 돌아서면 나의 전개, 나의 잘남의 전개로 새로운 소설을 쓰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또 다시 발견합니다. 이 자체가, 이러한 단계가 나온다는 자체가 주님의 자기 전개의 일부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