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강-창 14장 21-24절(소돔왕)1611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4장 21-24절입니다. 구약성경 17페이지입니다.
창 14:21-24
“소돔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아브람이 소돔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오직 소년들의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찌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
지난 시간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에 아브라함에게 멜기세덱이라는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일이 뭐냐? 그 사람이 두 가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 사람의 직분에 나타나고 있는데 하나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입니다. 또 하나는 살렘이라는 지역의 왕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 또는 제사장으로서의 왕, 그런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등장했습니다.
그럴 때 아브라함이 했던 행동은 얻었던 십일조, 십분의 일을 그 왕에게 바쳤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합당하다고 생각해서 바친 거예요. 십분의 일을 바친 의미가 뭐냐? 내가 이번 전쟁에서 얻은 모든 것은 내 선에서 내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본인이 말려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 그냥 막연하게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멜기세덱이 하는 일, 제사장으로서의 왕, 왕으로서의 제사장, 그 일을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그것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 본인을 사용했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입니다. 어째서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인가, 하는 것은 아브라함 본인도 거기에 대해서 점점 더 알아가야 될 입장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복의 근원의 내막을 알게 하는 일은 아브라함 본인이 나서서 할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계획에 차질 없이 아브라함을 가지고 진행시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벌려놓은 전쟁에 그냥 말려들어갈 뿐이에요. 이걸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아쉬운 것도 있고, 원하는 것도 있고, 인생의 미래계획도 있지만 하나님은 전부 다 그것을 개 무시합니다.
일체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고집이 있어요. 네가 복의 근원으로서, 또는 신자로서, 천국백성으로서 보여줄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 보여줄 것이 뭐냐 하면, 장차 올 천국은 왕 같은 제사장, 왕과 제사장의 요소가 결합된 성질, 그러한 본질이 질서를 이루어서 영원토록 지속되는 세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나라는 말이 하나님나라지 사실은 본인 나라거든요. 내가 뭔가 잘되고자 하는 나라, 기어이 내가 불멸의 존재로서 살아남고자 하는 자기의 욕망이 참작되어 있는 그런 나라는 말이지요. 물론 아브라함도 그런 종류의 한 사람일뿐이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난데없이 하나님이 “네 본토 아비 집을 떠나서”라고 지시하시면서 아브라함은 여름철 워터슬라이드의 물줄기를 따라서 쓸려나오는 입장, 아브라함 인생 자체가 본인이 운행하는 인생이 아니고 그냥 물살에 쓸려서 떠내려가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 급물살의 본질이 뭐냐? 복의 근원이에요. 본인이 복의 근원 하겠다고 손들고 나선 것이 아닙니다. 자처한 것이 아니에요. 물살에 쓸리듯 되어버렸습니다. 도대체 물살이 어떤 종류의 성질을 갖고 있기에 나는 복의 근원으로서 원치도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그것을 부여받았느냐. 그것은 차츰차츰 그 내막이 밝혀집니다. 그 내막에서 하나님 쪽에서 보호를 해주십니다.
지난번에 본 것처럼 아브라함이 기근 때문에 애굽에 가서 자신은 그저 살 궁리를 했을 뿐이지요. 그런데 난데없는 하나님의 매서운 손맛이 바로 왕에게 나타나서 바로 왕이 식겁했지요. 그러자 화가 나서 “아브라함 너는 보통 인물이 아니면서 왜 너 자신을 디스 했느냐? 너 자신의 어느 정도 대단한 존재인지를 네가 무시해버리면 어떻게 돼? 솔직하게 하나님의 복의 근원이라고, 하나님이 함께 있다고.”
그런데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내가 뭐? 나는 보통사람하고 똑같아요.” 이런 식이라는 말이지요. “아니야. 똑같은 사람이 아니야. 어젯밤에 나 혼났어.” 그래서 바로 왕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너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준 것 빼앗는 것이 아니고 “너같이 위험한 인사는 전부 다 가지고 나가거라.”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그냥 기근이나 피해볼까 하고 애굽에 내려갔다가 졸지에 졸부가 되고 말았어요. 자기 조카까지 덕을 봤지요.
조카는 멋도 모르고 휘파람 불면서 신나게 같이 왔습니다. 양떼, 소떼, 가축 떼가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뭔가 이 조카와 다르게 내가 하나님의 특별한 복의 근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내가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나의 선택보다 주의 선택에 자기 몸을 맡겨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래서 조카와 함께 거하게 되지 못했을 때에, 조카와 분리되는데 있어서 그 원칙을 적용합니다.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할게.” 조카는 너무나 인간적이지요. 좋은 땅, 요지의 땅, 다운타운, 어떻게 마다하겠습니까? 땅값이 제일 높은 곳인데. 땅 값 제일 높은 그 곳, 살기가 좋으니까 사람들이 모였고, 그 모인 곳에는 온갖 쓰레기 같은 악이라는 것은 다 모여져 있어요. 좋다는 곳에는 개나 소나 다 간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거기서는 오직 살기 위한, 더 내것 만들기 위한 짐승의 전투장이 될 뿐이지요. 누가 봐도 좋기 때문에 거기에 휩쓸려 갔습니다. 좋기 때문에 서로 암투가 생기고 전쟁이 벌어졌고, 조카는 멋도 모르고 거기에 휩싸였고, 조카가 지는 쪽에 속해버렸어요. 점령당하면서 조카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다 빼앗기게 되었고 사로잡혔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이 그 전쟁에 뛰어들었습니다. 뛰어들었을 때 그 전쟁에서 예상 밖의 승리를 거두어서 조카 롯을 적들로부터 해방시켰고 전쟁의 승리자가 되어서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을 만났습니다. “당신이죠?” 이번 전쟁은 당신의 의미를 나타내서 내가 복의 근원이라는 것, 하나님과 지상에 있는 복의 근원인 나, 그 사이에 걸쳐있는 구조를 밝히기 위해서 멜기세덱이 자기 앞에 등장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그 질서체제, 사다리 타는 것처럼, 지상에 있는 것과 하나님과 함께 움직여 나가기 위해서는 거기에 연결된 원칙이 유지돼야 돼요. 그 원칙이 뭐냐? 제사제도입니다. 멜기세덱은 제사장이니까 제사제도에요. 따라서 제사로 연결되지 아니하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이 아닙니다. 제사로 연결된다는 말은 희생제물이 개입되지 않는 인간은, 희생제물과 엮이지 않은 자의식은 지옥 갈 사람입니다.
그리고 희생제물과 엮이게 되면, 그 희생제물 없이는 나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은 것임을 깨닫는 자기의 죄의식이 있어야 돼요. 죄의식이 있다는 것은, 내가 지금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은 내 덕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늘 느껴야 됩니다.
군대서 하는 헬기레펠 훈련이 있습니다. 헬리콥터에서 지상에 있는 전우를 구출하는데 특수부대원이 헬기에서 출렁이는 사다리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와서 지상에서 작전을 벌리는 것이 있지요. 헬기의 움직임 따라서 줄사다리도 같이 흔들리지요. 그처럼 지상의 아브라함도 줄사다리에 엮여서 같이 움직여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복의 근원이라는 것은 막연하게 내가 복의 근원이 아니라 이제는 복의 근원되도록 하는, 나를 대체하는, 내가 복의 근원이 아니고 내 안에 나에게 나타나신 어떤 분이 갖고 있는 직능, 그 기능이 내 안에 장착이 될 때 나는 비로소 복의 근원의 면면을 지상에 발현할 수 있고 보여줄 수 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제사장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인데 왕으로서의 제사장.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다스릴 때 원칙이 있는데 그게 뭐냐? 제사제도라는 것을 가지고, 왕은 전체성이니까 전체를 통치하는 기능이 왕이에요. 왕이 떴다는 말은 그 나라의 어떤 요소도 왕의 권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에요.
로마서 5장에 보면,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는 죄가 왕노릇 한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는 왕이 있어요. 누가 왕인가? 대통령이? 아닙니다. 죄가 왕입니다. 죄가 왕노릇 하고 있어요. 악마지요. 악마가 왕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어떤 인간도 악마의 권세, 악의 권세에서 아무리 몸부림을 치고 애를 써도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겁니다.
왜? 왕의 권한이니까. 사장님과 직원사이가 아닙니다. 싫으면 사표 던지면 되는데 왕의 통치하에서는 그것이 성립이 안돼요. 내가 내 인생을 바꿔본다? 그것은 세상철학, 세상종교에서나 그런 소리 하는 것이지 내 인생을 다른 인생으로 가볼까, 그런 것은 없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라는 시인이 이런 시를 지었답니다.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인데
「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몸이 하나니 두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한참을 서서 낮은 수풀로 꺾여 내려가는 한쪽 길을
멀리 끝까지 바라다보았습니다.」
이것은 세상 잘 못보고 있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이미 가두어졌는데 무슨 선택을 해요. 아담과 그 후손들은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의 입장입니다. 사형선고를 때려버렸어요. 사형선고에 대한 벌이 뭐냐 하면, “마귀 안에서 벌 받아라.” 인생이라 하는 것은 벌 받는 중입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이.
벌 받고 있으면서 ‘나는 벌 덜 받는 쪽을 선택할까? 어느 것을 선택할까? 착하면 벌 덜 받고 악하면 벌 더 받게 될까?’ 그런 선택의 권한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10월 광주강의에서 “멕시코감옥”이라는 제목으로 했거든요. 현대의 감옥은 칸칸이 있지만 멕시코의 감옥은 그냥 하나의 시장터에요. 시장터인데 거기서 장사를 하든, 사기를 치든 맘대로 하되 그 전체 울타리는 못 벗어납니다. 벗어나면 다 죽여 버린다는 그것이 멕시코 감옥이에요.
지금도 그렇게 운영되는 감옥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나라에서 돈이 없어서 죄수들끼리 살게 하게 넓게 울타리는 치고 그 밖으로 나오면 기관총으로 쏴 죽여 버려요. 그 안에서 원대로 맘껏 살라는 거예요. 일요일마다 가족들이 죄수들에게 면회 오게 해요. 가족들이 면회 와서 사식 넣어주고 돈 넣어주는 거예요. 그러면 나라 입장에서는 교도소운영비가 죄수가족들의 푼돈으로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거든요. 매주 면회 와서 먹을 것 주고 생활비 대주니까.
그리고 사회에서 혐오하는 3D업종을 교도소 안에 집어넣어요. 교도소에서 죄수들이 그 일을 해주면 품삯과 그들이 먹는 밥을 퉁치는 식으로 하는 겁니다. 그 안에서 죄수가 죄수를 상대로 아파트 장사하는 사람도 있어요. 말이 아파트지 얼기설기 나무판자로 칸 막아놓고, 공동수도시설 해놓으면 밖에서 넣어준 돈으로 아파트를 구매합니다. 그러면 길바닥에서 안자고 그 얼기설기 만든 그 아파트에서 살고 같은 죄수라도 그 아파트 업주는 떵떵거리면서 살고, 그냥 일반 세상과 똑같이 살아요.
공통점이 뭐냐? 멕시코 감옥 뿐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 증거가 백세가 되어도 더 못살고 다 죽는다는 겁니다. 죄 값으로. 아담에게 내린 “정녕 죽으리라.”가 계속해서 우리에게 살게 하면서 똑같은 죽음이 계속 주어지는 것은 죄가 왕 노릇 하기 때문이고,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아담이 자기 후손을 새끼 까듯이 번식을 해야 될 이유가 그 아담의 죄, 아담의 죽음의 의미를 그 후손들을 통해서 점점 더 부각시키기 위함입니다.
언제까지? 마지막 아담이 올 때까지. 마지막 아담이 와야 아담이 선악과 따먹은 죄가 무슨 죄인지를 마지막 아담 되시는 예수님이 다 보여줘요.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저주는 단순히 목숨 끊어지는 것이 다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것이 목숨 끊어지는 것만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영원한 유황불에 들어가는 것, 악마를 위해서 마련한 형벌에 같이 들어가야 돼요. 그것이 바로 저주입니다. 그러니까 죄의 왕 노릇이라는 말도 되지만 더 아주 실감나게 이야기하자면, 벌 받는 것, 책벌의 세계에요. 이 땅에서 행복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지금자기 주제파악이 안되어서 그런 생각 하는 거예요. “목사님, 어떻게 행복합니까? 누굴 찾아가면 내가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 결혼하면 행복합니까, 혼자 살면 행복하겠습니까?”
대전에 가니까 어떤 집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복음을 진즉에 알았으면 결혼 안했다는 거예요. 애 키우는데 힘들어 죽겠다고. 여자 혼자 몸으로 애 둘 키우려니 너무 힘든 거예요. 복음 진즉에 알았다면 결혼을 안했을 것이고, 결혼을 안했으면 애도 없었을 것이고. 요즘 젊은이들 생각과 어쩌면 똑같은지.
그런데 옛날 과거로 돌아가면 또 결혼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남자가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그 미모를 그냥 방치할 남자가 아니잖아요. 예쁜 사람이 당하는 수모, 예쁘기에 당하는 수모라고 좋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 어떤 기대를 했었는데 점점 가면 갈수록……, 나중에 여자들 50넘으면 갱년기가 찾아와요. 얼굴 벌게지고.
50대 되어서 이젠 해방이 되어서 가고 싶은 곳 가고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먹겠다고 했는데 이제는 몸이 말을 안 들어요. 60대에, 이제 은혜 받겠다는데 성경공부 하면 졸기 바쁘고요. 당최 내 주체 자체가 내 맘먹은 대로, 내 원하는 대로 몸이 움직여주지를 않아요. 이래나 저래나 아까 불렀던 찬송가 292장 <내 본향 가는 길>가사처럼 본향으로 그냥 가야 돼요.
저쪽이 본향이지 이쪽에서는 그냥 나그네 인생이에요. 떠돌다가, 멕시코감옥에서 지내다가 떠날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행복이라는 것은 없어요. 브라질 클럽축구팀 비행기사고 났지요. 아주 작은 마을의 팀인데 브라질을 대표해서 가다가 사고 났다 이 말이지요. 가기 전에 사진도 찍고 좋아라고 하면서 전세기를 탔는데 76명이 타고 가다가 달랑 5명 남고 다 죽었습니다.
목적지에서 41킬로미터 남겨두고 산에 박아서 71명이 죽고 5명이 살았는데 그 중 한 명은 살아 있을 때 오른쪽 다리 절단하고 이제 왼다리까지 절단하게 되었어요. 골키퍼인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이 뭐냐? 71명이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5명이 살았느냐 하는 거예요. 비행기가 산에 받혔는데 어떻게 5명이 살았는가?
제가 그런 기분이에요. 이 복음 전하는데 어떻게 그걸 믿느냐는 말이지요. 80명한테 복음 전하면 다섯 명 알아듣는다면 와! 이것은 기적이에요, 기적. 어떻게 세상을 볼 때 교도소라는 안목으로, ‘행복은 나에게는 안와도 돼. 어차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평생 우리는 저주받도록 되어 있는 것이 마땅해. 그런데 저주치고 왜 이렇게 행복하지?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기적을 받은 거야.’
이런 생각을 갖는 사람이 76명 중에서 5명만 있어도 다리 두 개 절단되어도 괜찮아요. 5명만 되어도 놀라운 기적에 속합니다. 지난 낮 설교 했지만 누가 감당하리오. 아무도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진짜 그랬어요? 목사님이 지어낸 것이 아닙니까?”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3절에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절대로 너한테서 받지 않겠다는 거예요. 소돔 왕이 물품을 가지고 와서 “당신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전쟁에서 승리자가 되어서 이렇게 많은 전리품을 얻었습니다.”하고 바치니까 아브라함이 “안 받는다. 절대로 안 받는다.” 그 대목입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한다는 것과 같은 취지에요.
아브라함은 제사와 관련된 인물입니다. 왜? 멜기세덱이 자기 앞에 나타났기 때문에. 그래서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 철저하게 종속되어야 될 이유가 그 레펠, 헬기에서 내려오는 줄사다리가 계속해서 유지되어서 자기내부로 들어와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제사제도입니다.
다시 이야기할까요? 제사제도가 출렁인다는 말은 내 안에 희생제물이 출렁인다는 말이고, 제사제도가 출렁인다는 말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한,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겁니다. “행복이라는 것, 구원? 번영? 성공? 이런 단어는 저에게 합당치 않습니다.”라는 그런 것이 늘 내 안에 출렁거리고 있어야 돼요.
이런 이야기는 아담의 후손들에게는 도저히 생길래야 생길수가 없어요. 왜? 아담의 후손은 저주받을만한 힘에 의해서 통치받기 때문에, 악마의 힘에 의해서 통치받기 때문에. 악마의 심보나 인간의 심보나 똑같아요. ‘저주를 왜 받아? 내 나름대로 행복하면 돼지. 내가 열심히 일해서.’ 여기에 대해서 이의 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로 이의 걸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가만두지 않습니다. 왜?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특이한 존재가 되어야 되고 낯선 존재가 돼야 돼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얼씨구나 좋다고 남들 다 좋아하는 에덴동산 같은 소돔 땅을 덥석 잡았지요. 잡았는데 자기만 좋았습니까? 남들도 다 좋아하는 땅이지요.
그래서 인간적인 싸움에 말려들어서 힘없으니까 지고 모든 것을 빼앗긴 거예요. 롯의 입장에서는 그 빼앗긴 재물과 가족은 곧 자신이 이 땅을 살아가는 유일한 보람, 행복인데 그 자체를 세상에 의해서 몽땅 다 빼앗긴 거예요. 자, 아브라함이 롯에게 행복을 되찾아 준거예요, 아니면 자신이 누군가를 되찾아 준겁니까?
아브라함은 이번 전쟁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 입장에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스스로 알아낸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앞에 뚜벅뚜벅 걸어오는 제 3의 인물, 제 3의 남자, 그 남자로 인해서 알게 된 거예요. 그 남자의 이름이 멜기세덱입니다. 의의 왕. 돈으로 의를 살 수 있습니까? 돈으로 저주에서 풀려날 수 있습니까? 억만금으로 멕시코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이 악마의 통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구원을 원합니다. 심보가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심보로서 벗어나봤자, 담 넘어 봤자 그것도 또 하나의 본격적인 지옥이라는 감옥이에요. 지옥자체가 감옥이거든요. 세상 떠났는데 지옥 간 거예요. 좁은 감옥 에서 넓고 지독한 저주가 시작되는 감옥에 또 잡힌 겁니다. 그러나 소돔왕은 그걸 몰라요. “당신 덕분에 행복합니다.”라고 “좋은 게 좋다고 우리가 줄 것 주고받을 것 받겠습니다.” 제가 당신덕분에 받았으니까 성의를 표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에게 준 거예요.
아브라함은 절대로 받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소돔왕의 눈에는 멜기세덱이 없는 거예요. 소돔왕의 눈에는 왕 같은 제사, 하나님의 전체성, 모든 것을 통치하는 것,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통치하는가, 가 전혀 없어요. 소돔왕의 머릿속에는 그런 안목이 없습니다. 제사제도 안에서, 희생제물 안에서 세상을 다시 보는 그런 안목은 소돔 왕에게 장착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낮에 어떤 교회 목사의 설교를 들어봤어요. 강남의 큰 교회에요. 듣고 난 소감이, 아하, 악마의 종이 아니면 아예 목사를 해서는 안 되는구나. 악마의 종만이 이 땅에서 목사를 하는 거예요. 악마의 앞잡이만이 목사 할 자격이 있어요. 큰 교회에요. 설교하는 그 노림수, 그 의도가 어떻게 그렇게 악마적인지. 오늘 본문을 보면서 딱 소돔 왕 같아요.
“하나님 덕분에 행복 합시다. 하나님 덕분에 천국 갑시다.” 그거예요. 지금 자기 자신에게 뭐가 문제인지를 몰라요. 우리가 지향하고 구원 받겠다 하면서 구원받겠다는 그 덩치, 그 덩어리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전혀 몰라요. 지금 소돔왕은 아브라함과 비교합니다. “아브라함 당신도 승리자고 당신덕분이지만 나도 승리자고 우리 둘다 한패 먹고 친구삼자. 좋게 지내자. 자, 내 것 받고 친하게 지내자. 당신이 내 눈에 좋은 사람으로 보인다. 우리 이래서 좋은 관계 유지하자.”
소돔 왕 보기에는 아브라함이 자기와 같은 류 인줄 알고 있어요. 그게 바로 성경 내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헌금을 하는데 속이고 헌금해서 그날 둘 다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그 사람들은 왜 속였을까요? 다른 사람 헌금하고 자기 헌금하고 동일하게 본 거예요. 헌금하는 본인이 제사의 희생제물 안에서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 안하고, 사도는 헌금 받는 사람이고 자기는 헌금 하면 되고, 헌금을 해서 사도의 발 앞에 두면 되잖아요.
5장 2절에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사도들의 발 앞에 뒀거든요. 사도는 눈에 보이잖아요. 자기도 거울 보면 자기 눈에 보이잖아요. 똑같은 인간이라는 말이지요. 똑같은 인간, 받는 일 하고 나는 내기만 하면 되고, 내면 그만이라고 그렇게 보는 거예요.
이게 소돔 왕이 아브라함에게 “당신 덕분에 얻었으니 내 것 받으세요. 나도 양심이 있지 이 정도는 당신이 받아도 합당합니다.” 하고 내는 것 하고 사고방식이 똑같은 겁니다. 흉내 내고 모방하는 거예요. 베드로가 이야기합니다. 네가 성령을 속이고 있다고.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하면서 성령까지 신경 안 썼습니다.
성령까지 신경 쓸 것이 뭡니까? 어차피 종교라는 것은 모방인데. 흉내고 교육인데요. 비슷하게 가면 되잖아요. 그 비슷하게 가는 것, 그것이 낭패입니다. 마태복음 7장 24절부터 28절에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반석위에 지은 사람이 나오고 모래위에 지은 사람이 나옵니다. 그런데 반석과 모래가 둘 다 어디에 있느냐 하면, 땅 밑에 깔려 있어요. 겉으로 봐서는 보이지를 않습니다. 기도할 때 같이 기도하고, 찬송할 때 같이 찬송하고, “나의 반석~” 노래할 때 같이 노래하고, 가운입고 성가대 같이 하고. 한쪽은 검고 한쪽은 희고 그런 것이 없어요. 똑같아요.
모방 잘하고 흉내 잘 내면 다 같은 신자고 다 같은 교인으로 취급받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왜 같은 교인인데 다른 사람을 폄하하느냐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어요. 흉내를 누가 못냅니까, 흉내를! 애도 낼 수 있어요, 애도. 애도 기도하라고 하면 손 들고 기도하고, 목사가 설교하면 자기도 흉내를 내고, 돌 안된 아이도 충분히 설교도 하고 다 해요. 찬송할 때도 손들고 찬송하고 다 해요. 증거가 있습니다.
애들도 하는데 어른들이 못하겠어요? 폼 내면 그 공동체에 넣어주는 겁니다. 아담이 왜 후손들을 남긴줄 알아요? 이 세상에서 악마의 모습을, 계속해서 아담이 지은 죄가 어떤 죄인지를 후손을 통해서 악마가 나올 때까지, 악마가 어떤 것을 가지고 인간을 통치했기에 인간의 마음이 악마와 똑같이 되었는지 그 내막을 밝히고 발굴하기 위해서 역사는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겁니다.
그 가운데 불쑥불쑥 튀어나온 것이 뭐냐 하면, 이처럼 흉내내다가 당했던 사람들이 등장하는 거예요. 또 하나 말씀드리면 열왕기하 5장 16절에 나옵니다. 거기에 나아만 장군이 나와요.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가서 깨끗하게 문둥병이 나았어요. 그 다음에 나아만 장군이 고마워서 엘리사에게 자기 나라에서 가져온 예물을 바칩니다.
그런데 열왕기하 5장 16절에 보면, “가로되 나의 섬기는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받지 아니하리라 나아만이 받으라 강권하되 저가 고사한지라.” 엘리사가 거부해버려요. 왜냐하면 나아만은 어디서 배웠느냐? 나아만은 자기의 신에게 배웠기 때문에. 아람나라의 신 림몬을 섬기고 있었거든요. 림몬 당에서 자기들 종교에서 하던 행세를 그대로 엘리사도 같은 줄 알고 그렇게 한 겁니다.
엘리사가 받지 않았을 때 아, 우리가 평소에 신을 섬기는 것과 다른 거예요. 다르다는 겁니다. 엘리사가 받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네 눈에 나만 보이나?”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지시하고 명령 따르면 효과 보는 그런 종교가 아니에요. 여호와종교는 그게 아닙니다. 내가 내 소원대로 한 맺힌 것을 풀어주고 거기서 내가 기대하는 행복, 내가 기대하는 어떤 축복, 이것을 노리고 어떤 행위를 원인으로 제공해서 제물을 바쳐서 주고 받고 하는 그 소돔 왕 같은 그런 종교, 여호와는 그런 종교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말하는 복의 근원은 그게 아니고 제사의 종속되는 거예요. “내가 바로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심령입니다.” 여기에 참여하는 거예요. 여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게 복이에요. “죽어 마땅하고 행복은 내 입에서 꺼내지도 마세요. 내가 저주받아도 합당합니다. 이게 이 악마의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들에게 합당한 저주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언약에 준한 안목을 가졌기 때문에 그 안목에서, 그 십자가안목에서 나를 되돌아보니까 내가 이 땅에서 고생고생 하다가 죽을 때 죄 값으로 죽는 것은,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성취로 보는 입장에서는 합당한 조치인 거예요.
육에 속한, 흙에 속한 인간은 마땅히 그래야 되는 거예요. 아담의 자손은 마땅히 그래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온 세상의 성당과 교회를 보세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림몬당이에요, 림몬당. 그러면 바른 교회는 어디 있습니까? 왜 바른 교회를 찾아요? 바른 교회 가서 행복하려고? 구원받으려고? 바른 교회는 없어요.
이 세상에는 복음만 있지 바른 교회는 없습니다. 복음만 전하는 교회도 언젠가는 변질되고……, 말을 잘못했습니다. 언젠가는 변질되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변질되었지요. 변질 안 된 때가 있었어요? 성령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내가 흉내 내고자 하는 그 예배당, 그 교회, 우리교회, 그것마저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목사마저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복음전하는 목사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 사람은 절대로 십자가 진적이 없다는 사실. 내가 상한심령이고 죄인 중에 괴수인줄 아는 것, 오직 성령께서 앞장세우는 십자가 앞에서만 자기의 주제가 파악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바로 복이라 하는 거예요. 이게 복입니다. 미리 알아챈 것이 복이에요. ‘아, 내가 이런 혜택 받는가?’
바라기는 76명중에 살아남은 5명, 다리 잘린 채 살아난 사람 말고 멀쩡하게 살아남은 네 명이 되기 바랍니다. 정말, 정말, 살아있는 것이 기적일정도로. 아담의 죄 속에서 살았는데 어떻게 이걸 알아요? 악마가 통치하고 있는데 어떻게 악마의 힘을 째버리고 그 안에 있는 이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철없는 우리에게 성령이 그냥 쳐들어와서 “네가 누군지 알아? 십자가 쳐다보면서 네 주제 파악해.” 이런 혜택, 이른 은혜, 은사를 정말 창세전에 예정된,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 아니면 이런 혜택 못 받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이 얼마나 우리를 속이고 있는가를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해 주옵소서. 구원을 희망하고 행복을 희망하는 자체가 주제 넘는 일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해주시고, 나의 구원을 희망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에 같이 동참해서, 십자가의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그것이 이미 성령 안에서 천국이 들어온 것임을 저희들이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