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강-창 15장 1-4절(상과 방패)1612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5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17페이지입니다.
창 15:1-4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만 두지 않네요. 자기사람을 곱게 살도록 방치하지 않습니다. 내가 설쳐서 사는 것과 주께서 다가와서 주께서 주물럭거려서 사는 것, 그것 차이 납니다. 내가 심심풀이로, 또는 뭔가 가만있지를 못해서 뭔가 해야 돼서 설치다가 당해놓고는 “주의 뜻입니다. 주께서 인도하십니다.” 하는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자신의 육 됨을 감추려고 생각해서는 됩니다.
성경이 왜 있습니까? 하나님이 자기 택한 백성 찾아올 때는 그냥 빈손으로 오지 않습니다. 어떤 원칙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 원칙 같은 것을 가지고 오게 되는데 가지고 오게 되면 그 하나님이 가지고 온 것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역시 아브라함도 아담의 자손이잖아요. 구원 못 받을 사람입니다. 이 상태로서는 구원 받지를 못해요.
하나님이 찾아오지 아니하면 왜 내가 구원되지 못하냐의 요소를 끄집어내는 내용물을 가지고 찾아오십니다. 이것은 충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왔을 때 찾아왔는지 아닌지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 내가 이대로 살면 지옥 가는 행세를 마음껏 하고 있다는 것을 새록새록 다시 한 번 비춰보게 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남들은 돈 없으면 고민되고, 집안 어려우면 고민되지만 성도에게는 그런 것은 고민거리도 되지 않아요. 그런 것은 고민거리도 되지 않고, 내가 어떻게 잘되느냐가 아니라 내가 살아가면서 나타나고 보여주는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보여주는 것과 합치되는가, 일치되는가 하는 그것에 대해서 고민하게 만들고 생각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성도의 특징은 사람이 무섭지 않아요. 왜 그런가 하면, 복음과 연결되지 않은 것은 배추밭의 배추와 같습니다. 옛날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늘 이야기해준 것이 있어요. “네가 세상 나가서 사람을 겁내지 마라. 겁나거든 연습하면 된다. 어떻게 연습하는가? 배추밭에 나가서 앞에 뭐가 볼록볼록 있더라도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라. 어차피 배추다.”
그렇다면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이 볼록볼록 있더라도 어차피 배추거든요. 배추가 150만이 모이든 200만이 모이든 어차피 배추거든요. 이걸 성경대로 하게 되면 복음에서 끊어진 사람은 사람이 아니므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취급을 안합니다. 복음이 끊어진 사람들. 동양철학하는 사람들, 뭔가 좀 안다는 사람들, 잘나간다는 사람들, 질문해대는 국회의원이나 질문 받는 사람들이나 복음과 연결되었는가를 보세요.
안 나오잖아요. 그러면 배추가 배추들을 앞에 세워놓고 배추이야기하고 있는, 아무 의미 없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그런 세상, 그렇게 설치다가 결국은 죽 미끄러지듯이……, 눈길이 굉장히 미끄럽지 않습니까? 그들은 브레이크 없는 벤츠처럼 죽죽 미끄러져 가고 있어요. 어디로 가느냐 하면, 저 지옥으로 계속 미끄러져 가고 있어요. 이거 중력의 법칙입니다. 당기니까 갈 수밖에 없지요.
왜? 복음의 끌어주는 사슬이 없기 때문에. 미끄러지더라도 복음으로 목을 딱 걸고 잡아당겨줘야 빠져나올 수 있는데 빠져나올 수 있는 고리가 없어요. 그 빠져나오는 고리를 ‘복의 근원’이라고 합니다. 달리하면 중보자, 중개인. 쉽게 말해서 브리지, 다리. 그래서 성도라 하는 것은 자기만 구원받는 사람이 아니고 아브라함같이 구원받았다, 가 아니라 내 안에서 하나님의 브리지, 다리가, 하나님의 연결고리가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인생을 살아가는 자, 그게 바로 아브라함의 계통에 속한, 복의 근원계통에 속한 성도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상급이란 쉽게 상이라고 보면 되고, 방패는 다 아시듯이 전쟁할 때 막는 도구. 상이라고 나오니까 이 본문을 보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야, 성도가 보너스 타는구나. 상을 받는구나.’ 이렇게 오해들을 하셔요.
소위 총신의 교수라는 작자도 그렇게 오해해요. 상급의 차등론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는 이름 이야기도 하기 싫어요. 우리가 상을 받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상 자체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성경 봐도 그게 안 보이는 모양이라. 뭘 받아 챙겨요. 날마다 우리는 죽음에 넘기우는데 뭘 받습니까?
고린도후서 4장 11절 말씀에, 날마다 우리가 죽음에 넘기우고 그리스도 생명이 우리 안에서 분출하는데. 우리가 또 뭘 소유합니까? 무거워서 천당 못가겠다. 이거 챙기고 저거 챙겨서. 상급의 차등이 없는 정도가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의 상도 아닌 것을 상으로 만들어줘요. 그리고 방패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막아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체가 방패가 돼요.
그렇게 되려면 중간에 두 가지의 절차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와서, 또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찾아와서, “내가 너의 상이 되어주고 너의 방패가 되어줄게.”라는 그 명령이 하달되면서 그렇게 명령받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 상되고 방패가 되는데 실패해야 됩니다. 이게 구약이에요.
어제 가락강의에서 이걸 두고 계약이 깨졌다고 한 겁니다. 새 계약은 깨진 계약이 선행되어야 계약이 성립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스스로 구원될 수 없을 정도로 온 천지가 죄인이 되어줘야 그게 바로 의가 나오는 절차입니다. 항상 죄에 넘기움은 항상 거기서 의가 나오는 유일한 절차에요. 그 과정과 절차를 비켜서는 어떤 생명도, 영생도, 구원도 없습니다. 천국도 없어요.
하나님의 방식이 깨진 계약 안에서 그걸 재료로 새로운 계약을 만들기 때문에, ‘깨진 계약은 옛날일이고 이제는 새로운 계약을 소유하면 돼지.’ 이런 사고방식은 전혀 하나님의 뜻을 몰라요.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던가요. 충돌이라고 했지요. 이미 아담의 자손 아브라함은 망가졌어요. 계약이라는 것도 뭔지 몰라요. 뭔가 망가졌다는 것도 잘 몰라요.
망가졌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요구하는 것과 하나님이 나한테 요구하는 것이 마주칠 때, 만날 때, 아, 하나님 앞에서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하는 그 자체가 망가진 것을 내용으로 담아서, 간절히 원하오니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하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저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목사님, 앞으로 기도 어떻게 합니까?”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가르친 기도에 나와 있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죽 주기도문이 나와 있는데 그 주기도문의 핵심이 뭐냐? 생존의 문제에 대해서 내가 걱정을 뚝 끊어야 돼요. 무엇을 달라, 달라, 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기 때문에 그것은 해서는 안돼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의 범주를 못 벗어나요.
모든 인간이 다 이방인 같잖아요. 우리도 이방인이고. 우리가 뭘 달라는 것은 왜 달라고 하느냐 하면, 생계문제와 몸 건강문제입니다. 생계문제는 양식이 떨어지니까 당장 내일이 큰일이고, 몸 아픈 것은 지금 당장 몸이 아프니까 아파서 못살겠어서 내 몸 편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이미 이방인의 기도고 주기도문의 기도와 다른 거예요.
이방인의 기도, 다시 말해서 우리가 뭘 원하는지를 전제로 해서 주께서 주기도문 가지고 우리에게 나타나는 거예요. 오늘 본문하고 똑같아요. 아브라함은 자기가 지금 뭘 갖고 있는지를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찾아오니까 거기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자기 속내를 드러내는 겁니다. “나는 평소에 이것 원했습니다.”하고 내놓는 거예요.
여지없이 주님께서는 “노! 그것은 아니지. 그것은 너의 위상에 안 맞고 네가 해야 할 역할에 안 맞는다.”고 한 거예요. 비록 너의 소원이지만 너의 몸은 너의 소원을 위해서 네 몸을 관리할 주인공이 못 된다는 겁니다. 몸이 아프고 생계가 어렵게 될 때 우리가 이 점을 생각해야 돼요. 자신의 몸은 자기가 관리할, 혹은 처분할 입장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는 제가 참 나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겠어요, 정말.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사니까 제가 말하는 것이 너무 어처구니없이 들릴 수밖에 없어요. 내 몸을 내가 처분하고, 내가 관리하고, 내가 이끌지 누가 있는데? 그러면 저는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게 잘했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그래서 잘했다는 거예요? 그것가지고 천국까지 밀어붙이겠다는 겁니까?
평소에 하는 행동이 내 몸을 내가 처분하겠다는 그런 마음씨를 가지고 가기는 어딜 가요? 그 마음씨가 어디 가겠어요? 갈 데는 한군데 지옥밖에 없지요. 주님께서 천국 이야기는 왜 하십니까? 주님께서 천국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아담한테는 천국이 허락되지 않았는데 내가 찾아가면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이 찾아올 때 빈손으로 안 오거든요. 빈손으로 오지 않고 지옥 갈 인간인데 천국 갈 요소를 가지고 온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온지 안 온지 어떻게 압니까? 차이가 나잖아요. 차이나, 중국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차이가 나요.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것 주세요, 다고, 다고, 주세요, 그것인데 하나님의 천국에 합당한 기도는 뭐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 아버지의 내용이 뭐냐 하면 딱 두 가지에요.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는 네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두 번째는, 너는 죄 용서문제 때문에 내가 아직도 너에게 양식을 매일같이 공급해주고 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옵소서.” 이 용서문제, 죄 문제 때문에 세상이 전부 다 지옥 가는 거예요.
우리는 생계문제가 고민거리지만 주님께서는 생계가 문제가 아니고 “네 죄는 어떻게 할래?” “저는 별로 기억이 안 나는데요?” 속성자체가 하나님의 의와 거룩에 부합되지 않으면 그게 죄가 되는 거예요. 부합되지 않는지 어떤지 우리가 하나님 만나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압니까? 그렇게 나온다면 주님께서 준비한 분이 계십니다. 누구냐? 예수님을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살았는데 너는 왜 그 식이냐는 말이지요. 그 예수님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에요. 그러면 이미 이 본문은 뭘 보고 있느냐 하면, 그 자손, 자손의 자손의 끝, 그 끝에 오시는 그분을 어디서부터 보고 있느냐 하면, 그 선조 되는 아브라함의 본문을 보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해도 또 돌아서면 생계문제 그리고 건강문제, 그거 외에는 할 게 없어요.
정말 제가 오죽했으면……, 참 제가 헛된 망상도 많이 해요. 내가 만약에 방송국 사장 된다면 건강프로 다 없애버리고 음식프로 다 없앨 거예요. 건강프로 없애고 음식프로 없애면 누가 보겠어요? 기본이 건강이고 기본이 잘 먹고 잘살겠다는 것인데. 복음프로그램 하게 되면 보겠습니까?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소문난 세상인데.
이 세상이 죄로 소문난 세상이고 유황불앞에서 대기상태에 있는 세상인데 그 세상 값을 해야지요. 철저하게 복음을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야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냥 살게 하지 않고 일부러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과 수직적으로 끊어진 이것은 사람이 아니거든요. 수직에서 끊어진 것을 잇게 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대상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상이 되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방패가 되는 관계가 끊어진 그 다리를 놓는 속성이 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참, 아브라함은 좋겠다. 하나님께서 친히 상이 되어주시고 친히 방패가 되시니.’ 하는데 글쎄 아브라함은 실패했다니까요. 아브라함은 실패하고 그 바통을 이삭에게 넘깁니다. 이삭은 실패하고 그 바통을 야곱으로 넘겨요. 끝까지 실패하고 이로써 모든 아담에 속한 인간은 성공자가 하나도 없다. 엘리야고 모세고 아브라함, 엘리야도 다 실패했다. 다니엘도 실패했다. 오직 유일하게 하나님의 상,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방패가 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중보자 보내준다, 구원자 보내준다, 이러면 될 것을 가지고 왜 하나님은 상을 이야기하고 방패를 이야기하는가? 상이라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완료가 되었을 때 나오는 결과물을 상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평정이 되었을 때, 심판 그 이후를 말합니다. 상은 어디에 등장하는가? 심판이 마감되고 난 뒤에 상이 나오는 거예요.
오늘 고 3들 수능성적표 나왔습니다. 수능성적표는 뭐냐? 수능채점이 끝나고 난 뒤에 나눠주는 거예요. 그게 상이 되는 거예요. 캘거리 마지막 강의가 그거였거든요. 십자가 부활로 말미암아 이미 완료가 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 사후적으로 성령을 통해서 파악이 된다는 겁니다. 다시 기억이 납니까?
상이라 하는 것은 뭔가 평정한 사람의 자기성과인데, 자기의 공로와 노고가 거기 담겨 있는데 그래서 그 노고가 실패로 끝나지 않고 어떤 성과를 거두었다는 그것이 상이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 임신한 거예요. 배가 불룩 나온 거예요. 내가 너를 낳았다, 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하면서 사실은 누구보고 이야기를 하느냐? 아브라함자손을 보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임신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서 아기로 태어나는 것, 한 아기가 태어나니 곧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그것을 지금 상이라는 묘사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태어난 존재물, 성과물이 하는 일이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모든 적들의 공격을 다 커버할 수 있어야 되지요. 그게 바로 방패입니다.
방패는 공격용이 아니고 수비용이에요. 수비용이라는 말은, 이미 누가 승자가 되어서 접수하고 그 점령지에 지금 아브라함이 살고 있고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승자인가? 마귀가 승자에요. 여기에 하나님께서 쏙, 아브라함을 자기 본토 갈대아 우르의 아비집을 떠나게 해서 갈 곳을 없게 만들어서 그 과정자체에서 없는 것이 새로 발생되도록, 상과 방패라는 것이 생겨나도록 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의 상이고 방패가 된다.”는 그 말은 뭐냐 하면, 아브라함과 함께 찾아온 그 하나님이 빈손으로 온 것이 아니고 방패 같은 기능, 그리고 결국 승리의 열매를 맺는 기능자가 이제부터 아브라함과 함께 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렇게 아브라함을 따라 붙여서 동행하게 된다면 아브라함에게 어떤 변화가 있어야 되는데 어떤 변화인가?
그 변화가 기적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굉장히 평범해 보이는 기적을 줍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관계를 확인해주고 증명해 줄 것이 어디서 오는가?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서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 다음 질문이 뭐냐 하면, 2절에,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있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작업을 끝날 때까지 이어갈 것이니까 그렇다면 자식이 있어야 하는데 자식이 없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은 생각했어요. 아브라함이 사실은 자식이 없는데 양자를 이야기합니다. 다메섹 엘리에셀은 자기 집에 있는 종이에요. 나중에 늙어서 이삭의 색시감 구하는데 파견되는 사람이 엘리에셀입니다. 이 양자라 하는 것은 마지막 때 자기주인을 잘 섬기도록 종이라도 양자로 택하는 경우가 있어요. 어차피 자식이 없으니까 엘리에셀을 자식으로 한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겠다는 그 증거가 뭐냐 하면, 네 몸에서 자식이 태어날 것인데 그것이 증거가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상과 방패가 되시는 그 작업을 너를 통해서, 너의 자손을 통해서 쉬지 않고 계속 이어나간다는 증거가 뭐냐? 네 몸에서 계속해서 자식이 태어난다는 겁니다. 그리고 5절에 보니까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늘의 별같이 많은 자손이 나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걸 생각해 봐야 돼요. 방금 두 가지 단계가 있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의 상이 되고 내가 너의 방패가 된다고 했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한테 약속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하면서 자손 이야기를 했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아브라함 네가 살아 있는 동안 일을 이룬다는 말이 아니고 그게 시작이 되어서 하늘의 별같이 많은 자손, 또 자손, 그 자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이 상과 방패가 골고루 전달되는 일을 너를 통해서 개시, 시작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게 실패로 끝났다고 했지요. 시편 3편 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여기는 주가 나의 방패고 영광이라고 되어 있거든요. 오늘 본문에, 여호와께서 나의 방패라는 말과 같아 보입니다.
같이 보이는데 다윗이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이미 같은 내용이 아니고 그 내용이 드디어 갈라집니다. 보다 더 구체화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나의 방패요, 할 때 그 나라는 것이 아브라함 때는 ‘아, 나에게 주는 구나. 방패와 상을 소유하면 돼지.’ 이렇게 했는데 다윗쯤 되게 되면, ‘내가 가질 수 없는데 나의 방패가 된다면 내 안에 진정한 하나님의 상이 되고 하나님의 방패가 되실 분이 내 안에서 내 후손을 통해서 서서히 구체화 된다.’하는 사실을 다윗(언약)에 와서는 점점 더 보다 내용이 깊어지고, 확산되고, 확대되는 겁니다.
확대시키기 위해서 주께서는 “확대” 이렇게 하고 끝나는가? 아니에요. 전쟁이 일어납니다. 전쟁이 일어나는데 그 전쟁은……, 제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올 때는 충돌이라고 했어요. 초창기 이스라엘의 충돌은 이스라엘과 다른 나라와의 싸움이 일어납니다. 다윗의 경우에 사울에게 쫓기는 중에 있을 때에 블레셋이나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전리품이 나오니까 그 전리품을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백성들에게 나눠줬거든요.
그러니까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불만이 심했어요. “전쟁은 우리가 했는데 왜 전쟁에 참여하지도 않고 집에서 놀고 있던 사람에게 왜 전리품을 나눠줍니까?”라고 할 때 다윗이 하는 말이 “이 전쟁은 우리가 이긴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긴 전쟁”이라는 거예요.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도 마찬가지에요. “이 전쟁은 우리에게 속한 전쟁이 아닙니다.” 했어요.
아사와 여호사밧이 유대나라 전쟁할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괜찮은 왕이 전쟁할 때 승리를 했는데 그 승리방법이 사람이 무기 들고 하는 승리가 아니에요. 자기의 노동력, 군사력을 동원해서 이긴 승리가 아닙니다. 최종적인 결론이 에베소서 4장 8절에 나와 있는데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고 되어 있거든요.
오늘 설교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요. 지난 시간에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났어요. 멜기세덱은 고정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분이에요. 아브라함은 이 땅에서 나그네고. 이 지상에서는 그림자같이 나그네고 멜기세덱은 그걸로 대가 끝나요. 멜기세덱은 자손도 없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손이 있습니다.
고정된 것을 빔으로 쬐면 하나의 점이 긴 역사, 스토리를 만드는 거예요. 참 어렵지요? 멜기세덱은 족보는 고정된 족보고 그 멜기세덱의 후광을 입고 그 내용물을 품고 있는 아브라함은 그 족보가 있거든요. 긴긴 역사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 역사는 어디서 나왔는가? 멜기세덱이 쪼인 그 빔에서 나온, 그 빛에 의해서 쬐인 것이 아브라함의 역사가 된다는 그 말이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가야 될 길이 이 지상이 아니고 멜기세덱이 있는 그 자리로 옮겨야 돼요. 그게 위가 되는 거예요. 사로잡힌 자를 위에서 사로잡아놓고 그 사로잡힌 아래를 향하여 선물을 주는 겁니다. 선물을 주게 되면 그 선물 받은 자가 위로 들림, 올라오게 되어 있어요.
어제 가락교회에서 강의한 내용인데 잠간 보게 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들린다는 것은, 십자가의 높이가 2미터 남짓 하겠지만 들린다고 함으로서 땅과 하늘이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2미터밖에 안 되는 높이인데 그게 뭐가 들리는 것인가, 승천해야 들리는 것이지, 라고 하는데 십자가에 올라간 것을 두고 들린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민수기에서 모세가 놋 뱀을 들었다고 할 때의 그 들림과 연결 짓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렇게 들릴 때 지상은 자동적으로 땅이 되어버리고 하늘과 땅 사이에는 십자가, 다시 말해서 인간의 죄 때문에 죽은 것 때문에 단절되어 있어요.
죄가 어딜 감히 주님 자리에 합류할 수 있느냐? 합류 못합니다. 십자가 때문에 하늘과 땅은 완전히 단절되었음을 분명하게 결정지었어요. 이제는 땅에 있는, 죄 속에 있는 인간이 주님 자리에 가려면 여기서 뽑아내야 돼요. 불러줘야 되고 호출을 해야 돼요. 그런데 호출하려면 근거가 있어야 돼요.
어떤 근거인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조건하에, 믿음의 노선이라는 조건하에 주님에 의해서 부름을 받아서 주님의 나라에 갈 수가 있는 겁니다. 이게 새계약이에요. 제가 지금 엉뚱한 소리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 열심히 하시고 헌금 내세요,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가 섞일 수가 없어요. 그것은 계약이 아니거든요.
계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상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자체가 상이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서 상이 되고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서 방패가 되는 거예요. 왜? 모든 적을 다 이겼으니까. 모든 적에 승리한, 유일하게 구원하신 분이 예수님밖에 없으니까, 결과물이니까 그 상되시는 분이, 방패 되시는 분이 에베소서 4장 8절의 말씀처럼 위에서 선물을 나눠줘 버리면, 그 선물은 성령이거든요, 그 성령을 나눠줘 버리면 이 지상에 있는 상으로서 성도고 지상에 있는 방패로서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 건드리면, 소자 건드리면 주님을 건드린 것이 돼요. 쉽게 말해서 “전쟁 끝났어, 얘들아! 전쟁 끝나서 자유민 된 것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2차 대전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보게 되면 일본군이 미군포로를 잡았어요. 토교근처의 산에 포로수용소를 만들어놓고 석탄 캐는 노역을 시켰습니다. 포로에게 노역시키면 안 되는데 노역을 시켰어요.
아주 비참한 노역을 시켰습니다. 나중에 그 포로수용소의 소장은 전범으로 잡히게 되는데요. 1945년 8월 15일까지 노역을 시켰어요. 아직 무슨 소식이 안 들어왔어요. 그런데 본부에만 라디오가 있어요. 라디오에서 항복했다는 소리가 나오고 미군폭격기가 도쿄 상공에 날아왔습니다. 폭격기가 오기 전에 수용소 소장이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는지 “포로 전원은 목욕타임이다.” ‘오늘 목욕시켜서 다 죽일 모양이다. 목욕이나 하고 죽지 뭐.’ 하는 마음으로 갔는데 미군 폭격기가 도쿄 상공을 날아다니니까 수용소를 지키는 일본 군인들이 총을 다 놔버렸어요.
미군포로들은 눈치 챘어요. 해방이라고. 그렇게 해방된 자가 성도입니다. 누가 건드립니까? 죽여도 잠자는 거예요. 그냥 쉬는 겁니다. 죽어도 영생이고 살아도 영생이고. 이미 살아 있을 때도 영생 얻었기 때문에 죽음이 영생을 이겨낼 수가 없어요. 죽음이 영생을 취소시킬 수가 없습니다.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예수 그리스도가 만든 작품이에요.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선지자의 상이 나오는데 그 상은 유대인들이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네가 이런 상 받아볼래? 저런 상 받아볼래? 안되지? 안되니까 너는 상이 될 수가 없어.” 그것을 이야기했고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상이 나와요. 12절부터 보면,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모든 성도가 공동구원, 덩어리 자체가 주님의 상 덩어리이기 때문에 누구공력,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그 역할의 공력이 나옵니다. 주님은 나에게 물주는 것을 시켰고, 주님은 나에게 씨 뿌리는 일을 주었는데 씨 뿌리고 가꾸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 모든 근거는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상은 주님의 상이고 받는 면류관이 있는데 요한계시록 4장에서, 천국에 가서 보면 장로들이 면류관을 벗어서 주님 발 앞에 던집니다. 상이라는 것은 그 수여자를 찾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주셨잖아요. 제가 왜 씁니까? 주님이 쓰셔야지요. 주님 쓰실 그것을 이 지상에 있는 우리에게 상을 주셨잖아요. 영생의 상을.”
방금 제가 한 이야기가 장난입니까? 이게 아브라함에게 있는 이야기에요. 아브라함은 메시아가 아닙니다. 그냥 시작점이지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상이 된다, 방패 된다, 그 작업을 시작한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시작한 것은 이삭에게 넘겨지고, 이삭은 야곱에게. 그래서 아브라함의 복이 뭐냐? 이삭이고 이삭의 복이 야곱이고, 그리고 구약의 복이 예수 그리스도가 복이고, 신약성도의 복이 바로 예수님이 나의 상이요 나의 방패고.
그래서 다윗이 시편 3편 3절에, “주는 나의 상이요 주님은 나의 방패십니다.” 내가 마귀로 인해서 이 땅에서 포로수용소에 갇힌 채 있는 이것을 이기신 분은 오직 주님,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 증거는 바로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것, 십자가와 부활이 그것을 증거하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오직 십자가와 부활만 증거한 겁니다.
사실 부활은 십자가의 의미를 담았기 때문에 그것을 합쳐버리면 고린도전서 2장의 말씀처럼, 십자가만 능력이 되고, 갈라디아서 6장 말씀처럼,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는 다고 그렇게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이 우리 보기에는 생계에 힘써야 되고 건강이나 체크해야 될 세상인 것 같이 보이지만 우리가 우리를 너무 무시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성도되게 하셨다는 것, 우리는 날마다 실패하지만 실패 속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성공이 늘 나올 수 있도록 성령께서 역사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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