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기세덱
2016년 11월 23일 본문 말씀: 창세기 14:17-20
(14: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4: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4: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14: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성경에 나오는 지명이나 인물에 대한 이해는 2중으로 겹쳐져 있는 사항을 고려해야 합니다. 인간 사회에서 이해하는 지명이나 인물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뿐이라고 여기고 덤벼들면 그 지명과 인물로 엮여내는 사건의 핵심에 들어서지도 못하고 튕겨나오게 됩니다. 사람들 눈에서 ‘하나님의 동행’이 눈에 보이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특이한 사건을 ‘동행하는 자’ 주변에 일으키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받은 자조차도 기이하게 여기게 됩니다. 즉 자신이 예상하거나 기대치 않는 사건이 일어난 것에 대해서 본인의 해석조차도 하나님께 양보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람은 본의 아니게 어떤 인간들의 전쟁에 개입하게 된 상황입니다.
분명 아브람은 패배자가 아니라 그 전쟁에서 승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아브람 이번 전쟁을 달리 봅니다. 결코 자기 역량으로 승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 이길 수없는 전쟁에서 무사히 자기 조카 롯의 모든 것을 빼내었다는 것은 ‘복의 근원’의 위상에 맞는 내용을 하나님께서 이번 전쟁에 담았다고 보는 겁니다.
즉 복과 저주의 진실은 전쟁 없이는 마무리 되지 않는 겁니다. 곧 전쟁 없이는 평화도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평화란 총괄적인 전면전이 일어났음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이는 곧 전쟁 방식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정체를 조금씩 드러내시는 겁니다. 인간들의 이해하는 전쟁의 양상은 ‘힘 센 쪽’이 결국 승리자가 된다는 원칙입니다.
하지만 ‘복의 근원’이 진실이 드러나는 전쟁은 다른 방식으로 결정됩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아브람이 전쟁에서 승리해서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 곧 ‘의(義)의 왕’이 마중을 나옵니다. ‘의(義)의 왕’이란 모든 의로운 자가 소속된 그 나라의 왕이라는 말입니다. 즉 의인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그 나라의 왕입니다.
따라서 ‘의의 왕’이 마중을 나와서 축복했다는 말은 이번 아브람의 전쟁은 ‘의와 죄’와의 전쟁이었습니다. 죄에 대해서 의는 결코 승리를 양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 전쟁입니다. 누가 죄쪽에 있을까요? 이번 전쟁에서 아브람은 어쩔 수 없이 전쟁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조카 롯을 세상 사람들이 건드린 겁니다. 이는 ‘복의 근원’과 관련된 인물을 세상 사람이 건드린 겁니다. 이렇게 해서 일어난 전쟁이라면 이는 세상 사람들이 상식선에서 이해하는 전쟁은 곧 ‘복의 근원’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저주받는 자들로 분류됩니다. 이번 전쟁에서 아브람은 숫적으로 적들보다 우위에 있어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람이나 멜기세덱의 입장에서 전쟁의 성격을 달리 규명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벌리는 전쟁과는 전혀 다른 전쟁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유발했다는 점을 알아야 했습니다. 세상 사람이나 아브람이나 롯이나 모두 특이한 하나님의 전쟁 방식에 대해서 문외한입니다.
설사 그 방식을 사전에 미리 안다 할지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역량을 포기할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 즉 복의 근원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전쟁관점이 왜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관점인지를 알리기 위해 밥이 되고 미끼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창세기 3:15에서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선’이 싸우는 방식입니다.
뱀의 후손으로 하여금 여자의 후선을 발꿈치를 물도록 허락하는 순서가 먼저입니다. 복의 근원과 관련된 인사인 롯을 세상의 군왕들이 건드린 겁니다. 아무 생각 말입니다. 자연 아브람이 관여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는 아브람쪽의 승리입니다. 문제는 아브람에게 전혀 이길 만한 원인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곧 아브람이 이번 전쟁 자체를 ‘하나님 전쟁의 결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길 수 있는 내막은 아브람이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쪽에서 실시했고 그 방식을 적용한 결과물이 바로 자신의 승리로 이어진 겁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이 생각한 ‘복’이란 뭘까요? 그것은 바로 ‘의(義)의 왕’의 백성이 되고 ‘의’라는 복을 받게 된 것을 말합니다.
이는 아브람이 결코 자신의 의로움이 성실함으로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하나님의 원수의 힘’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음을 확신하는 계기로 작용합니다. 그 증거가 바로 ‘십일조’를 멜기세덱에서 바치는 대목입니다. 10%를 멜기세덱에게 바친다는 말은 90%를 제공받았다는 결과성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 결과는 하나님의 세계의 종속된 존재라는 고백입니다. 히브리서 7:2-3에 보면, 멜기세덱의 최종적 정체가 나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멜기세덱은 2중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살렘이라는 지역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처소는 하늘에 있습니다.(시 11:4) 그런데 가현성은 예루살렘입니다. 그 예루살렘의 왕은 다윗입니다. 하지만 다윗도 2중적 인물입니다. 다윗이 죄인으로서 죽음으로서 다윗에 가리워진 ‘다윗언약’에 완성된 인물, 곧 메시아는 다윗 혈통으로 오시게 됩니다.
그 분이 바로 ‘주의 이름’입니다. 주의 이름은 지상에 사건을 남깁니다. 추상적으로 그냥 하늘에서 주시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주의 이름이 전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은 홍해가에서 ‘주의 이름’의 죽음에 참여했어야 했습니다. 홍해 물 속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이스라엘 외부적이 다가 아닙니다. ‘자기 의(義)’로서 구원얻겠다는 바로 그것이 뱀 쪽의 무기였습니다. 성도는 자기 의를 예수님 십자가에서 심판당한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내놓을 수 있는 구원의 근거는 오직 사랑, 곧 화목제물입니다. 원수된 자도 의인되게 하는 그 ‘하나님의 의’는 (롬 5:10) 사랑에서 나온 겁니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인 겁니다. 믿음의 내용도 사랑입니다.(갈 5:6) 소망의 내용도 사랑입니다. 오직 십자가 사건만이 온 우주의 구심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모든 역사가 사랑의 두루마리에 풀려나온 휴지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3강-창 14장 17-20절(멜기세덱)1611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4장 17-20절입니다. 구약성경 16페이지입니다. 창 14:17-20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구약에 사람이름도 나오고 지명도 나오게 되면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그런 것을 본다는 것 자체가 부담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그 지명이나 사람을 모르면 귀하신 하나님의 뜻을 모르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부터 앞서지요. 성경에서 지명이나 사람이름이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은 이미 역사적으로 보여줬다는 거예요. 추상적으로 “하나님이 저기 계시다.”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쳐다보기 이전부터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실제로 사건들을 남겨왔어요. 하나님이 어디계신가, 라고 하늘에 대고 물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낮은 곳에 오셔서 일들을 일궈 줬습니다. 많은 일들을 만들어냈어요. 그러면 그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인간들이 예상할 수 없는 일들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사건과 일들을 접하면서도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그것은 그 사건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우리 쪽에서 하나님을 찾아나서는 그 선입감속에 나의 유리한 쪽으로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얻어 보려는 자기욕심이 앞서다 보니까, 하나님이 툭툭 던져놓은 그 사건 속에서 “에이, 내가 원하는 것이 없네.” 하고 외면해 버려요. 외면해버리고 “하나님이여,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철야해가면서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사건들을 주셨는데 막상 그 사건 들여다보니 정작 본인이 요구하는 것이 안 들어있으니까 그것을 치워버리고 다른 것을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성경을 보고 이 세상을 산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하나님은 사건 남기고 그 사건에 대한 내용과 해석에 대해서 하나님의 성령의 계시로 성경을 주셨으면 그 성경자체가 근본적으로 우리가 요구하는 것,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냥 주님의 뜻 그대로 왔다는 것을 우리가 반기고 그것을 인정해줘야 돼요. 그냥 객관적으로 아무 느낌 없이 그냥 보지를 않아요. “이것 볼 테니까 내가 원하는 것 주옵소서. 장래가 잘 되게 하옵소서.” 이런 식으로, “죽어서 구원되게 하옵소서.” 이런 식으로 욕심을 먼저 내니까 성경을 왜곡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시켜만 주세요. 그러면 구원 얻겠지요.” 이렇게 하는데 성경은 우리가 요구하는 구원을 주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구원을 제공하는 것은 악마가 하지요. 마귀가 나서서 “어서 옵쇼!” 스시 집에서 일본말로 “이랏샤이마세!”하고 영접하듯이 마귀가 제공하는 거예요. 성경은 “너는 가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만들어낸 사람은 내 나라에 올 수 있다.” 그게 하나님께서 하신 뜻 안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는 가지 못하고 내가 원하는 방식에 걸려들면 너는 천국이고 영생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서 내 방식 철회하고 주의 방식이 성경을 통해서 구원받지도 못할 우리에게 제시되었고 제공되었다는 마음으로 성경을 보셔야 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는데, 그돌라오멜, 이름도 어려워요. 롯이 있었던 소돔과 고모라를 통치하고 있던 북쪽 네 명의 왕들 중의 우두머리가 되는 왕입니다. 그동안 롯이 있던 지역을 권력으로 통치하고 지배해 왔었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자기 집에 있던 소수의 인원, 318명, 정규군이 아니고 개인적인 종들이지요. 집에 있던 종들을 데리고 정규군과 싸움이 되지도 않는데도 불구하고 승리해서 롯을 빼낸 거예요. 롯을 권력에서 빠져나오게 만든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 그게 아브라함이에요. 아브라함은 롯을 데리고 나온 사람인데 남들 보기에는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지역을 점령했던 북쪽 왕을 마치 이긴것처럼 보이지요. 역사라 하는 것은 하나님 제키고 인간 대 인간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거든요. 누가 누구와 붙어서 이긴 쪽은 힘센 쪽이고 진 쪽은 힘이 약해서 졌다는 이것이 역사를 살고 있는 인간의 아는 범위의 한계에요. 힘만 있으면 이긴다. 그 방식을 하나님이 그대로 사용하시면서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서는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이겼다. 그 일만 해야 될 사람이 아니고 그 다음일이 또 남이 있어요.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에게 누군가 찾아옵니다. 두 명의 왕이 찾아와요. 하나는 소돔 왕이라는 사람이 찾아옵니다. 이것은 그 지역 왕으로 전쟁에서 패배했었는데 아브라함 덕분에 숨통 트인 사람, 소돔이라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던 지역의 통치자인데 줄곧 통치를 당해서 전쟁에서 패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수입된 아브라함 때문에 전쟁의 승리편에 서게 된 사람, 인간적인 왕이지요. 그 다음에 또 하나의 왕이 등장하는데 18절에, 살렘 왕 멜기세덱입니다. 멜기세덱의 히브리어 מלכּי־צדק [malkı̂y-tsedeq ; 말키 체데크]는 '왕'이라는 뜻의 מלך [melek ; 멜렉]과 '의'라는 뜻의 צדק [tsedeq ; 체데크]의 합성어로 의의 왕이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의의 왕이라는 이름을 가진 살렘, 살렘은 지금의 예루살렘이에요. 예루살렘 역시 소돔과 고모라 근처에 있어요. 근처의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다시정리하게 되면, 아브라함이 승리해서 돌아오는 길에 두 명의 왕을 만나게 되지요. 하나는 소돔 왕을 만나고 또 하나는 멜기세덱 왕을 만납니다. 그 전에 아브라함은 전쟁이라는 사건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 사건을 치르게 된 이유는, 아브라함이 전쟁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자기 조카가 소돔전쟁에 휘말렸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개입하게 되었어요. 조카를 지켜야 되니까. 그러면 이야기가, 전쟁에서 아브라함은 승리했다, 그걸로 끝날 문제인데 아브라함은 이번 전쟁을 자기가 일으킨 전쟁도 아니고 자기가 승리한 전쟁도 아니라고 보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 승리가 나에게 일어날 수는 없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내가 예상하지 않았다. 내가 기대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전쟁에 휘말린 것, 거기에 대해서 뭔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전쟁,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서, 자기가 어떤 하나님인가를 나타내기 위해서 아브라함과 그 전에 하나님과 사적으로 맺어진 그 관계를 보다 더 깊이 있게 알려주는 계기로서 이번 전쟁이 마련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이전에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사적인 관계가 뭐냐? 복의 근원관계입니다. 복의 근원, 또는 저주의 근원, “아브라함 너로 하여금 복의 근원되게 한다, 너에게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 받는다.” 복과 저주라는 것은 다 너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복 받고 싶다고 해서 복받는 것이 아니고요. 그것은 개인의 여망에 불과하고 희망사항에 불과해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희망사항과 여망을 전부 잘라버립니다. 잘라버리고,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복과 저주는 어떤 특정사람에게 전부 다 일임을 해놓았어요. 일종의 중보자지요. 특정사람에게 일임을 해놓고 그 다음부터는, 왜 그 아브라함이라는 존재가 하필 복의 근원이 될 수밖에 없고 동시에 저주의 근원이 될 수밖에 없는가를……, 아브라함 본인은 모르지요. 자기도 당했으니까. 자기를 복의 근원으로 지정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대동하면서 조금씩조금씩 그 내막을 펼쳐줄 거예요. 펼쳐주는 그것으로 아브라함 중심의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는데 그 새로운 역사가 역사의 구심점이 되는 겁니다. 인간역사의 해답이 돼요. 역사는 왜 있고, 세상은 왜 있으며, 왜 태어나며, 세상의 모든 사건과 움직임은 무엇을 중심으로 회오리치고 있는지, 그것을 보여주는 구심점역할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사적인 일이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는가?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속성, 자기의 본성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전쟁방식으로 알려줍니다. 이 말은, 평화란 전쟁 없이는 이루어지는 일이 없다. 세상에 있어서의 모든 하나님이 준비한 복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그 전에 전쟁을 전제로, 필수적인 과정으로 거쳐야 된다는 겁니다. 전쟁 없는 복도 없고 전쟁 없는 저주가 없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복과 저주 속에서, 그냥 우리는 가만있으면서 복 주면 복 받고 저주를 주면 저주를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과 저주의 양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을 향하여 전면적인 전쟁을 감행을 하시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전쟁 중에 있습니다. 그 전쟁에 대해서 창세기 3장 15절에 이미 본질을 이야기했어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의 그 전쟁. 그 전쟁, 일관성 있게 꾸준히 그 전쟁의 내막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인류의 역사는 진행되어야 됩니다. 인류는 계속되어야 돼요, 인간의 존재, 인간의 역사라 하는 것은 막연하게 부모가 자식 낳고, 또 부모가 자식 낳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구심점을 갖고 있는데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양보할 수 없는 전쟁이고 그 전쟁이 마무리되면 세상은 끝입니다. 종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미 종말에 와 있습니다. 전쟁이 이미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승지가 누군지 이미 판명이 나버렸어요. 승자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죽음에도 불구하고 사흘 만에 부활한 사람은 오직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주의 이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4장 12절에 보면, 구원받을 다른 이름을 준적이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구원을 언급하고 있어요. 다시 말해서 구원이라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는 뭐냐 하면, 빠져나옴입니다. 빠져나오려면 둘이 그냥 전쟁하는 것이 아니고 뭔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자를 권력이 억누르고 있어요. 그리고 권력에 사로잡힌 자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못 빠져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환경을 만들어놓고 이제 전쟁은 개시되는 거예요. 사로잡힌 자가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아브라함과 관계없는 사람이라면 그냥 그들은 롯의 재산과 목숨은 승리자 되는 그돌라오멜과 그 세명의 연합군에게 약탈당하고 다 죽임을 당해야 돼요. 어쩔 수 없어요. 힘센 자가 승자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기 때문에. 그리고 그 힘센 자가 승리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인간도 토를 달 사람이 없고 이의를 달 사람이 없습니다. 숫자 많은 것이 최고에요. 탄핵도 200명만 있으면 되잖아요. 숫자가 많은 게 최고라고요. 우리는 너무나 잘 아는 겁니다. 북한이 핵 만들려는 이유도 그것 때문인 거예요. 핵무기가 무기중에 제일 발달된 무기니까 그걸 갖겠다는 거예요. 힘으로 승리하겠다는 이 세계가 있고 그러한 거대한 세계의 하나의 위계질서로서의 돈, 권력, 그런 서열에 의해서 그렇다, 그러려니, 하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 와서 기도하는 내용이, 빙빙 돌려서 이야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이니 찬양이니, 주의 이름을 높이니, 백날 해도 그것은 빌미고 실제로 “뭐? 뭘 달라는 말인고?” “이번에 우리 애 수능성적 올려주세요. 그 이야기지요.” “수능성적 올려서 뭐할 건데?” “서울법대 가면 되지요.” “서울법대가면 뭐할 건데?” “판사하지요.” “판사해서 뭐할 건데?” “돈과 권력을 얻지요.” “결국 권력과 돈이네.” 그거지요. 이 세상사는 것이 권력과 돈 외에 뭐가 더 있겠습니까? 그걸 왜 빙빙 돌려서 이야기하느냐는 말이지요. 권력주세요. 돈 주세요, 하면 되는 것을. “백점 만점에 3점.” “안됩니다.” “뭐?” “백점 만점에 팔십점이요.” “뭐? 왜?” “돈 주시고, 권력 주시고 사람답게 살게 하옵소서.” “사람다운 것이 뭔데?” “그거야 제가 압니까? 그냥 돈이 있으면 사람답고 권력 있으면 사람답겠지요.” 인간은 전쟁이라는 것을 의식합니다. 의식하는데 그것은 누구의 전쟁이냐 하면 자기의 자존심의 전쟁입니다. 이것을 멜키체데크, 멜기세덱은 말합니다. 의의 왕이라. 살렘이라는 이 지역의 왕인데 남들 보기에는 작은 마을의 왕으로 왔는데 이름 자체가 의의 왕이라. 하나님의 의가 없는 사람은 못 들어가는, 백성이 되지 못하는 미래의 왕, 그게 멜기세덱입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보게 되면 멜기세덱은 살렘이라는 그 지역의 왕으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히브리서 7장에 보면……, 히브리서 7장은 신약입니다. 신약은 종말에 나타나는 거예요. 종말이라는 것은 이미 전쟁이 마무리 된 거예요. 마무리되어서 전쟁이 완성이 되어버렸어요. 완성이 된 이 전쟁에서 멜기세덱의 정체가 비로소 제시됩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라고 할 때 특정지명 이름인줄 알았는데 그 뒤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것까지는 창세기에 나오는 것과 동일합니다.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라는 것은 전쟁이 마무리 되고 나서의 왕이라는 겁니다. 전쟁 없는 평화는 없다고 했지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 멜기세덱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어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속성을 알리기 위해서 그냥 꽂아놓은 것 같아요. 어느 별에서 왔니? 도대체 어느 별에서 온 거예요? 외계인 같아요. 지상과 혈통적으로 엮일 수 있는 모든 관계를 찾을 수가 없어요. 동사무소에 가도 호적도 없고 본적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이중신분입니다. 분명히 사람 눈에 띄기에는 그냥 소규모 마을의 추장정도인데 실제로서는, 너희들 눈에 그렇게 보이냐, 실제로 품고 있고 감추어진 신분은 하나님과 관련된 분입니다. 족보도 없고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데 족보가 있는 인간세계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등장해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온 거예요. 아브라함이 그에게 십일조를 드렸는데 십일조라는 것은 뭐냐? 십분의 구를 돌려받는 예식, 의식입니다. 주는 것이 아니고 십분의 구를 돌려받는 의식이 되는 겁니다. “아이고, 이렇게 많이, 십분의 구나 주십니까?” 이 모습이 십일조를 드리는 겁니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는 인간의 행위가 원인이 되고 그 결과를 돌려받는 식이지만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에서는 이미 결과를 받고 원인을 찾아가는 식으로 행위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바로 사랑으로 되는 믿음이라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5장 6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항상 믿음은 믿음으로 그 내용이 담기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은 사랑으로 되어있어요. “먼저 사랑해줬잖아요. 믿음 주시는 사랑을 해주셨잖아요.” 이게 바로 믿음의 내용이에요. “믿습니다.”가 믿음의 내용이 아니고 안 믿는 인간을 믿도록 사랑을 해주셨잖아요. 믿음을 주셨다는 것이 아니고 사랑을 해주셨다고 고백을 해야 그것이 믿음이에요.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보면 비로소 그게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 속에 믿음이 있으면 가짜라는 거예요. 소망 속에 소망이 있으면 가짜라는 거예요. 믿음 깨 보니 사랑이 들어 있고 소망 깨보니 사랑 들어있을 때 주님은 사랑중심으로, 요한 1서에 나오는 대로 화목제물 중심으로, 화목제물이라는 그 사건, 십자가사건을 주목하라고 주께서는 믿음, 소망을 주신 거예요. 하늘 쳐다보라고 믿음, 소망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아가페에 있다는 그 아가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일어난 어떤 사건을 주목하라는 말입니다. 화목제물이라는 사건, 십자가사건, 그 십자가사건이 구원의 능력이잖아요. 그 십자가사건을 앞당겨 보여주는 것이 이 멜기세덱의 등장입니다. “아브라함아! 너는 그 전쟁에서 승리자가 아니다.” 아브라함이 이걸 알아요. 왜냐하면 승리를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승리라는 결과 속에 자기가 묻혀버린 거예요. 승리에 의해서 자기가 말려든 겁니다. 이것은 절대로 자기 승리가 될 수가 없어요. 아브라함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구십니까? 내가 예상치도 않게 승리를 하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어서 나오세요. 누가 나로 하여금 이렇게 승리케 하셨습니까?” 이 승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조카를 인간의 전쟁판에 일부러 갇히게 만들었고 거기에 어쩔 수 없이 아브라함이 개입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남들 보기에는 단지 인간과 인간의 전쟁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은 뭘 로 이것을 해석했는가? 전체 인간들의 사고방식이 갖고 있는 그 전쟁과 아브라함이 갖고 있는 독특한 전쟁과의 싸움으로 보는 겁니다. 독특한 전쟁.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유일하게 복의 근원이 되거든요. 인간들이 승리해서 따낸 행복 그것이 복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경유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복이 아니고 그것이 저주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통해서 아브라함 빼놓고 모든 인간을 아브라함의 적으로, 아브라함의 원수로 만들어버립니다. 아브라함의 원수들끼리는 서로 이야기가 통해요. 힘센 자가 승리자라고. 그런데 유독 아브라함만 “내가 조카 롯을 빼내온 것은 내 솜씨가 아닙니다. 내 힘, 내 권력이 아닙니다. 내 칼솜씨가 아닙니다. 내 사병들의 놀라운 전략의 승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이 전쟁을 통해서, 내가 승리할 수 없는 전쟁에서 빠져나왔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게 되면, 나는 복의 근원이지만 처음부터 내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권력에 휩싸여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권력에 휩싸인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어떤 것도 스스로 일을 계획해서 성취하는 어떤 방법도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네 힘으로 열심히 해서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빠져나와 봐라.” 그런 것을 지시한 적이 없습니다.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건을 유발시킵니다. 빠져나올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고 이미 빠져나오게 만들어놓고 도리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의아해하게 만드는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 전쟁은 나중에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대대로 그 원칙이 사건으로서 반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 사건이 출애굽기 15장에 나오지요. 홍해로 이스라엘백성들을 데려갑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이제는 죽었다. 물에 빠져죽든지 아니면 뒤따라 오는 애굽 군대의 칼에 죽든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우리는 끝났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모세에게 하야를 외치는 것뿐이다. 모세를 탄핵하는 수밖에 없다.” 촛불집회 하면서 “모세야! 그 자리에서 내려오너라.” 데모했습니다. 모세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백성도 아닌데 사람들은 자신을 지도자라고 착각을 하니까.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모세야! 백성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라.” 그래서 모세가 이야기합니다. 딱 다섯 글자에요. “가만있으라.” 우리교회에 이 표어 적어야 돼요. “가만있으라.” 나대지 말고. 촐랑대지 말고. 다른 말로 하면 전도하지 말고, 선교하지 말고, 그런 뜻이에요. 나대지 말고 가만있으라. 교회 망하더라도 가만있으라. 네가 늙어죽더라도, 굶어죽더라도 가만있으라. 왜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 냈느냐 하는 그것은 어린양의 살점만 먹는 것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고 어린양의 살점에서 역사가 번져 나와야 돼요. 마치 애들이 두루마리 화장지를 갖고 놀게 되면 온 방에 화장지가 널리는 것처럼, 그 둥그런 화장지 모양새가 어린양이라면 어린양을 돌돌 풀면 거기서 두루마리화장지 같은 역사가 펼쳐지는 거예요. 그 펼쳐진 역사중의 하나가 뭐냐?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이 와서야 전쟁을 벌인다는 겁니다. 거기에서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물어야 되는데 이스라엘백성은 그 물려야 될 역할을 해요. 이스라엘백성들이 물릴 때는 당황스럽고, 무섭고, 화나고, 겁나고, 모세에게 대들고 그랬어요. 우리는 죽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가만있으라. 네가 애써서 천국백성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서서 천국백성 만들 테니 너는 가만있으라. 하나님이 어떻게 조치하는지.” 그들은 죽음이라는 것, 하나님이 유발한 전쟁의 죽음까지 닿아야 돼요. 맞닿아서 그 죽음 속에 들어가야 됩니다. 홍해 물속까지, 앞으로, 앞으로, 홍해 물속까지 들어가야 돼요. 요단강 물속에 들어가야 됩니다. 주님이 죽는 십자가 자리에 가야 돼요. 자기십자가를 지고 주님 따라가서 자기 육신이 죽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방식이 죽는, ‘나는 이런 식으로 구원받으래.’라는 그 방식이 죽어야 돼요. 그 방식은 로마서 10장에 보면 ‘자기의’에요. 의, 히브리어로 체데크입니다. 나의 의로 내가 착해서 구원받겠다는 선악적인, 선악과 따먹은 그 인간이거든요. 그러나 너의 의가 선악과에서 나왔기 때문에 너의 의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내가 왜 구원을 못 받는가 하면, 내 의를 내가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원수 된 자를 예수님의 화목제물로 구원한다는 대목이 나오거든요. 원수된 자, 경건치 못한 자라고 하나님께서 말하는 것은, 우리가 항상 주님의 원수, 나의 의, 교회 나오는 의, 기도하는 의, 선교하는 의, 헌금하는 의, 예배참석 하는 의, 모든 것이 움직일 때마다 우리는 나의 의를 삐질삐질, 오뉴월에 땀 흘리듯 계속해서 바깥으로 내는 겁니다. 그 의를 주워 모아서 이것으로 천국 보내달라고 합니다. 그런 마음 가지고 성경을 보게 되어 있어요. 성경에 있는 용어들을 아무리 봐도 성경의 뜻을 모릅니다. 왜 모르는가? 성경 보는 것도 나의 의가 되고, 성경말씀이 시키는 대로 지키는 그것도 결국 나의 의로 회수가 되니까 아무리 성경을 보고 아무리 반듯하게 경건하게 살아도 그 악마의 권세에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갇혀 있어요. 원래 거리에 손짜장이라는 것이 있거든요. 면을 손으로 뽑아내는 것이 손짜장입니다. 나는 그런 뜻만 있는 줄 알았지요. 나중에 방송에서 보니 상대방이 손으로 직접 비벼주는 것이 손짜장이라고 나와요. 선보는 아가씨에게 기다려 보라고 해놓고는 상대방이 손으로 막 비비는 거예요. 손짜장이라면서. 물론 개그입니다. 그렇게 깊은 뜻이 있었구나. 성경에 나오는 모든 용어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관련되지 않으면 손짜장 하나라도 그렇게 엉터리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나는 이미 죽은 존재라는 것을, 어떤 행동을 해도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모르게 되면 그것은 바로 손짜장이 손으로 면을 뽑아낸 짜장인 줄 모르고 면을 손으로 주물럭거려서 먹으라고 내미는 식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엉망진창이에요. 멜기체데크, 의의 왕이라는 것, 살렘이라는 그 지역이 너 보기에는 지상의 어떤 작은 마을로 보이지만 그 지역은 나중에 하늘로 올라가요. 하늘로 올라가면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 되고 하늘로 올라가기 전에 먼저 이 살렘 땅에서 하나님의 보좌가 되고 이 보좌가 하늘 위로 올라갑니다. 위로 올라가는데 그 올라가는 방법은 엘리베이터로 올라가는데 그 이름이 다윗언약이라는 겁니다. 다윗언약은, 다윗은 죽고 다윗을 상한심령, 죄인으로 만듦으로 말미암아 그걸 계기로 다윗언약은 위로 올라갑니다. 사무엘하에 다윗이 거기에 대해서 예언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이스라엘 왕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예언자였습니다. “나 같은 왕이 내 혈통 따라 올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들레헴 유다자손의 마을에서 태어난 거예요. 크리스마스입니다. 미리 온 미리 크리스마스, 메리가 아니고 미리 크리스마스. 그 살렘 땅에 멜기세덱이 와서 체데크, 왕, 완벽한 하나님의 의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이제 아브라함 혈통을 통해서 시작! 개시할 거예요. 그것은 반드시 전쟁을 통해서 하는 겁니다. 그 전쟁은 이방민족과 하다가 나중에는 이스라엘 내부의 율법으로 의롭게 한다는 무리와,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장차 오실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의 의로만 구원받는다는 그 두 파벌이 싸우면서 누가 이기는가? 율법으로 의로워지겠다는 것이 이기면서 의의 왕은 고난의 선지자의 이름으로서 희생을 당하게 됩니다. 멜기세덱이라는 그 미래에 올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한, 곧 예수님이지요, 그 예수님의 내용을 멜기세덱이라는 제사장이 먼저 보여주는 거예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요새말로 하면 중보자가 되는 겁니다. 중보자가 되어서 롯과 더불어서 아브라함마저 세상의 마귀의 권력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입장을 전쟁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이 전쟁을 통해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내가 이 세상 권세에서 어떤 노력을 해도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건을 일으켜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318명이라는 작은 숫자를 가지고 승리케 했을 때에 벌써 복의 근원의 흔적, 징후들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이 뭐냐 하면, 그 하나님을 믿음에 의인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아브라함뿐만이 아니고 아브라함 자손대대에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복이 되는 거예요. 자 그러면 이렇게 정리됩니다. 하나님의 복은 뭐냐? 하나님의 의가 복이 되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의, 복을 받는 방법은 뭐냐? 방법은 없어요. 왜 없는가 하면, 결과로서 주어지기 때문에 없는 거예요. 결과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을 하나님의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 믿음의 내용은 반드시 희생과 사랑, 화목제물이 근거가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에 아브라함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변하는 겁니다. 그리고 야곱은 이스라엘로 변하는 겁니다. 여기는 아브람인데 장차 아브라함이 돼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누굴 닮았는가? 멜기세덱을 닮아갑니다. 왜? 자기가 십일조를 바쳤으니까. 다른 말로 하면 십의 구를 받았으니까. 자기에게 주신 분은 의의 왕이고 십분의 구를 받는데 그 받는 내용은 뭐냐? 하나님의 의의 왕에게 하나님의 의를 받아버렸으니까 그 관계는 믿음의 관계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 속에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뭘 받았습니까? 복을 받았습니까? 그 복의 내용이 뭐예요? 화목제물, 율법 외에 한 의, 하나님의 의를 받는 거예요. 무슨 재주로 받았습니까? 무슨 재주로 받는 것이 아니고 더 이상 나의 의는 신경 쓰지 말라고 주신 선물이거든요. 아까 제가 예배 전에 기도할 때 기도제목이 이겁니다. 왜 분노하느냐고, 화를 내느냐고 했습니다. 왜 대중들이 분노하고 화를 내는 겁니까? 경제가 어떻고, 정치가 어떻고, 이렇게 화를 내지요. 솔직하게 인간이 화를 내는 것은 내 의대로, 내 뜻대로 안되니까, 내 의대로 필요한 보상들이 안 오니까 화가 나는 거예요. 나는 착한데 왜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내 착함에 부응하지 못하는가? 그것 때문에 화를 내는 거예요. 화를 내면서 꾹꾹 참고 겸손한 척을 하면서 교회 와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헤헤헤!”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속에는 자기의가 들어 있으면서. “내가 이 정도로 주님 앞에 신경 쓰고 이 정도로 하나님 앞에 성심성의를 다하는데 이 정도는 반대급부와 보상을 주셔야 나도 신앙생활 하는 보람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러니 인간이라는 것은 살아가면서 결국 싸움이 뭐냐? 나에게서 나오는 것은 나의 의와 자존심밖에 없고, 주님은 우리의 멱살을 쥐고 “이 마귀야!”하고 흔들면서 “네가 자꾸 화내고 분노하는 것은 아직도 네 의의 티를 내고 있는 것이다.” 하게 되면 많이 흔들리다 어지러워서 쓰러지게 되면 비로소 머리 긁적이면서 “십자가 의, 주의 의로 구원받았잖아요. 그런데 내가 왜 감사치 못하고 화를 자꾸 내고 있지?” 우리는 주의 의를 담는 그릇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내가 구심점이나 중심점이 아니에요. 우리는 주님의 두루마리휴지에 불과합니다. 그 휴지가 풀리면서 전부 다 하나님의 의가 풀려나오는데 그 중 하나의 객실을 내가 담당하고 있는데 그 의가 뭐냐? 어린양의 생명책의 객실, 그 이름이 녹명, 기록된 자들이 풀려서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을 이루고 의의 왕국에 입성하는 겁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이 있어요. 시편에 줄줄이 나오는데 시편 3편에 보면 다윗이 그렇게 이야기해요. “여호와의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가만있는데 적들이 많아요. 그 적들을 어떻게 이기는가? 시편 8편에 보니 주의 이름으로 승리한다고 되어 있어요. 주의 이름으로 오실 멜기세덱의 승리, 주의 이름으로 우리가 의인됨으로써 이 죄악을 이길 수가 있었던 겁니다. 끝으로 민수기 34장 13절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모세가 백성들 대표를 불러요. 아직 전쟁은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줄 그어놓고 “너는 어느 땅으로 할래?” 그렇게 합니다. 전쟁은 하지도 않았어요. 전쟁은 시작도 안했는데 이미 땅을 다 차지한 것처럼 해놓고 12지파 땅 분배에 들어갑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은 천국 가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천국에 왔어요. 오고 난 뒤에 골로새서 3장의 말씀처럼 땅의 것을 얻은 것이 아니고 하늘에 우리 생명이 가 있다는 것을 이 땅에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펼치는 그림자고 하늘구름의 그림자처럼 예수그리스도의 백성의 그림자를 이 땅에 보여주는 겁니다. 남들 보기에는 환상처럼 보이고 망상처럼 보이겠지만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이 뭘 알겠습니까? 그들에게 손짜장 대접할 때 손으로 주무르시기 바랍니다. 이게 하나님의 방법이다. 네가 아는 방법, 네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구원받는 그것은 이 교회들이 장사하기 위해서 지어낸 것인데 너는 그 마귀의 덫에 빠진 거예요. 교회 나와서 우리는 얼마나 자신이 자기의를 내세우는지를 티내시고 이 교회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를 티내시고, 진정한 교회는 하늘나라 성도들의 총회, 하나밖에 없는 그 교회의 신자로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전쟁이 있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영생도 없고 평화가 없는데 이미 전쟁이 마무리 된 상태에서 우리가 회고하듯이 우리의 살아가는 이 모습들을 봅니다. 주께서는 무엇을 대상으로 전쟁을 했는지를 이제는 깨닫게 해주시고 주의 십자가가 우리의 의를 죄라고 지목한다는 사실을 또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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