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아브람전쟁(창14;13-16) 161116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1. 18. 14:11
2016-11-16 20:58:20조회 : 49         
   아브람 전쟁 161116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아브람 전쟁(창세기 14:13-16)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ZaYxTJBpoDI, Hit:4
 이근호16-11-16 21:23 
아브람의 전쟁 

2016년 11월 16일                        본문 말씀: 창세기 14: 13-16  

(14:13)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고하니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더라 

(14:14)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십팔 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14:15)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14:16)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왔더라 

인간 세상은 전쟁 중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위한 전쟁이냐 하는 것입니다. 다들 자신을 위한 전쟁입니다. 축복과 저주를 판정 내리는데 있는 인간들은 자신이 얻은 수입으로 결정합니다. 승자가 될 경우를 축복이라고 간주하고 패자(敗者)가 되면 저주라고 여깁니다. 아브람과 롯과 마찬가지로 이 전쟁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람을 ‘복의 근원’으로 지목하신 바가 있습니다. ‘복의 근원’은 곧 ‘저주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즉 복과 저주의 기준은 아브람 외에 다른 사람들이 각자 결정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들이 스스로 복받았다고 우겨봤자 하나님에게는 먹혀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오롯이 아브람 인생을 통해서 전달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람의 인생을 통해서 새롭게 등장하는 복과 저주의 기준이, 기존의 인간들이 생각하는 기준과 얼마나 다른지를 비교해 봐야 합니다. 사람들이 전쟁을 하는 이유는, 다들 스스로 잘되기 위함입니다. 즉 자기 인생은 자신의 책임져야 하고 관리해야 한다고 여기는 겁니다. 

사실 아브람도 애굽에 내려가서 그런 식으로 행동을 보였습니다. 살기 위해 거짓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복의 근원’답게 되는데 있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 본인 책임으로 맡기신 적이 없습니다. 아브람이 어떤 짓을 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신대로 아브람의 사정은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예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은 본디 멋진 곳입니다. 살기도 좋을뿐더러 목축하는데도 유리한 땅이라서 모든 주변의 종족들이 탐을 내는 땅입니다. 아브람이 롯과 헤어지면서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게 되니, 롯은 당연히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땅은 너나 할 것없이 모두가 탐을 내기에 거기에 자연적으로 악인들이 설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전쟁도 벌어졌습니다. 먼저 점령한 북쪽의 네(4) 왕의 연합군에 대해서 남쪽의 다섯왕이 연합해서 그 좋다는 소돔과 고모라 땅의 주도권을 얻기 위해 맹렬하게 전쟁을 벌렸지만 결국 네 왕의 연합군이 승리하게 되고, 약탈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아브람의 조차 롯의 재산과 가족들도 북쪽으로 포로 잡혀 가게 되었습니다. 아브람과 롯의 관계는 아브람이 과연 ‘복의 근원’임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가장 가까운 관계입니다. 삼촌의 책임감으로 조카 롯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복의 근원’의 효과를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받게 되는 관계입니다. 

아브람은 평소에 전쟁에 뛰어들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요 즐기는 사람도 아닙니다. 조카 롯에서 아무런 일이 없다면 이 9개 종족의 전쟁에 끼어들 하등의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으로 하여금 이 전쟁에 개입하게 하시도록 조카 롯을 현지인들이 건드리도록 조치하신 것입니다. 

곧 아브람이 ‘복의 근원’으로 지목되고 난 뒤에 아브람이 가는 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아브람의 위상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일반 사람들이 생각할 수는 복과 저주의 기준이 아니라 전혀 다른 기준이 아브람을 인생을 통해서 비쳐 나오게 됩니다. 마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나타나므로 서 사람들은 전혀 다른 기준을 들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흔히들 사람들은 자신들이 마땅히 구원될 자격이 있다고 여기고 하나님을 상대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정작 구원자를 보내게 되면, 그들이 곡해하고 있는 잘못된 기준으로 인하여 구원자가 사람들에게 미움받고 제거되는 사태가 일어나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1:10에 보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면서, 인간들이 어떤 말을 좋아하고 기뻐한다는 것을 익히 하시고 의도적으로 피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들은 ‘자기 전쟁’을 할지 결코 ‘영적 전쟁’, ‘하나님의 전쟁’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정성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이미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4:4에 보면,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에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고, 천국을 제시하고 지옥쪽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른 기준에 의해서 자신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잘난 존재로, 긍정적 존재로 부추겨줄 그런 기준을 끌어다가 그 앞에서 자신을 세워놓고 자신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소위 ‘자기를 미워할 줄’을 모릅니다. 자신의 업적을 미워할 줄 모르고 고수하는 식으로 생을 살아갑니다. 이런 기준 외에는 다 거부합니다. 오로지 자기를 위한 기준 말고 다른 기준에 주어져 있음을 인간들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인간도 구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에게 합당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님만 구원하십니다. 이 ‘예수님 구원’에 참여하게 될 자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들이 바로 ‘예수 이름의 능력’으로 구원될 자요, 예수님의 죽으심의 능력으로 천국갈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람은 318명이라는 터무니없는 소수의 병력을 가지고 막강한 연합군을 이기고 거기에 포로 잡혀 있던 조카 롯과 그 재산을 도로 찾아왔습니다. 이 와중에서 이번 승리가 결코 자신의 승리가 아님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이게 바로 ‘복의 근원다운’ 모습입니다. 

곧 성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성도는 본인 인생에서 일어나고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개인적인 인생 목적이 무산되고 부정당하는 식으로,
‘나를 위한 일생’이 아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즉 ‘내 것’, 혹은 ‘나의 구원’은 애초에 하나님의 의중에 없음을
늘 명심하는 현상들을 마주하게 만듭니다. 

원망도 하고 불평도 하지만
결국에는 내게 필요한 인생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서 필요했기에
펼쳐지고 전개되는 인생인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 자체가 곧 영적 전쟁에서 승리한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늘 단호하게 우리 인생을 개입하셔서 ‘나의 것’을 소멸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6-11-17 19:47 

62강-창 14장 13-16절(아브람전쟁)1611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4장 13-16절입니다. 구약성경 16페이지입니다. 

  

창 14:13-16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고하니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더라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 십 팔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 왔더라.” 

  

아브라함에게 전쟁을 해야 될 일이 또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에 아브라함이 롯의 재물과 부녀의 목숨까지 다 찾아 왔다고 했는데 이게 원래 누구 것인가 하면, 원래 그 모든 재산과 모든 것이 하나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가지 않았으면 이 막대한 재산을 얻을 기회조차 없었어요. 애굽에서 아브라함은 우세스러웠습니다. 거짓말 한 것이 들통 났고 자기 힘으로 자기가 구원받으려고 시도한 거지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뜻은 분명해졌고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거기서 느낀 것은 뭐냐? 하나님의 복의 근원이 되는데 있어서 내가 기여할 것은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지목한 복의 근원되기에 내가 추가적으로 협조할 사항이 있다거나 애써서 노력한다고 해서 그 일을 이룰 수 없는 입장에 있으며, 더 나아가서 도리어 하나님이 하시는 그 지정된 자리에서 나의 기본적인 욕구가 방해를 놓고 있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은 알게 되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에게서 선물은 잔뜩 받았는데 받아놓고 난 뒤에 굉장히 부끄럽고 미안스럽고 황공스럽지요. 그렇다면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롯에 대해서 전에는 하나의 가족이라는 입장, 하나의 혈통이라는 입장 때문에 무조건 자기자존심을 위해서 보호해야했다면, 이제는 아브라함은 뭘 느끼는가? 그냥 삼촌이 아니라 복의 근원 입장에서 복의 근원의 혜택을 입을 첫 대상자로 조카를 하나님께서 내 곁에 붙여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너를 지켜줄게, 이렇게 되면 남자의 자존심 같은 것이 팍팍 살잖아요. 그런 것이 아니라 “나는 너를 지켜주지 못해. 나는 거짓말쟁이니까. 하지만 나를 나 되게 하시고 복의 근원되게 하신 분이 너를 지켜주는 것을 나는 목격하고 싶다. 나는 그런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다.” 그것이 진짜로 동행하는 하나님인 것을 아브라함이 그 조카 롯의 관계를 통해서 알아가게 됩니다. 

  

그 알아가는 가운데서 아브라함은 뭔가 자기인생에 일이 자꾸 생긴다는 거예요. 아주 이상한 일, 본인이 원하지도 않은 일이 자꾸 발생이 되는 겁니다. 발생이 되면서 그 일조차 하나님께서 의미 있게 일으킨 일이라는 것으로 복의 근원으로 쏙쏙 빨려들어가기 시작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쉽게 말해서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요새 말로 하면 복음이죠,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과 무관한 일은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복의 근원되게 하신 것과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일을 추진하시고 “네가 복의 근원이야. 아브라함을 내가 복의 근원으로 세웠어.”라는 그 하나님의 결정을 증거하듯이, 증명하는 일들이 아브라함 주위에서 일어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 일어나는 일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전쟁에 아브라함이 관여됩니다. 원래 이 전쟁은 아브라함이 관여할 필요 없는 전쟁이에요. 이 전쟁은 북쪽의 네 나라와 남쪽의 다섯 나라가 서로 얽혀서 싸우는 겁니다. 원래 소돔과 고모라가 에덴동산 같다고 했어요. 들이 좋고 물이 많고 그래서 에덴동산 같았어요. 그렇게 좋은 땅이에요. 

  

에덴동산같이 좋은 땅이니까 조카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나는 우로 할 것이다, 했는데 롯은 주저 없이 에덴동산같이 보이는, 너무나 살기 좋아 보이는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했지요. 그렇다면 “그래. 너는 그 땅으로 가고 나는 다른 땅으로 갈게.” 이렇게 떨어지게 된 겁니다. 물론 그 근처기는 하지만. 

  

그런데 이 네 왕과 다섯 왕이 어떤 관계냐 하면, 원래 소돔과 고모라가 네 명의 연합된 왕들이 더 힘이 세었어요.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는 네 왕이 통치하는 식민지 같은 것이었습니다. 북쪽 네 왕의 연합이 남쪽에 있는 다섯 왕의 땅을 지배하과 있었다고 보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제일 좋은 땅이 소돔과 고모라에요. 거기에 조카 롯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런 치욕스런 통치를 받을 수 없다.” 하고 다섯 왕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네 왕이 “이것들 봐라?” 해서 붙은 전쟁입니다. 전쟁에서 강대국인 북쪽의 네 왕이 이겼어요, 이제는 소돔과 고모라의 거주민까지 큰 피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평화롭게 살았는데 “어길 감히 대들어?” 해서 작살이 나게 되었습니다. 

  

10절에 보면,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군사가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롯이 있던 자리가 승자의 자리가 아니고 패자의 지역으로 되어서 약탈당하는 지경이 되어서 심지어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오늘 본문이에요. 아브라함은 조용히 복의 근원으로 살면 되는데 원래 조용하면 복의 근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독생자로 이 땅에 왔을 때 조용했습니까? 오히려 예수님 없는 세계, 그 시절이 조용했지요. 예수님 들어오고 난 뒤에는 유대나라가 그야말로 요란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돌발발언과 모든 기적은 기존의 질서체제에 얽매이지 않았어요. 해석이 안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위기 같은 것을 느꼈어요. 

  

창세기 12장부터 죽 보게 되면, 아브라함이 누구냐, 부터 먼저 정립해야 돼요. 아브라함이 누구냐? 복의 근원입니다. 지난 시간에 했듯이 복의 근원인 동시에 저주의 근원이에요.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아브라함이 아예 없다고 여긴다면 복인지 저주인지 그 판정을 누가 내리는가 하면, 살고 있는 본인들이 임의로 판정을 내리면 돼요. 

  

내가 복 받았다고 하면 하늘에서도 그것이 복인 줄로 알고, 내가 일이 잘 안된다면 내가 믿는 하나님께서 나를 미워하는 것처럼 판정을 자기가 내리고 임의로 해석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 저주의 근원으로 삼아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내가 자발적으로 나는 복 받았어, 또는 나는 저주받았어, 이런 자기에 대한 판정이 전부 무효가 됩니다. 소용이 없는 거예요. 

  

이것은 오늘날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이단인 것을 모르면서 복음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이것이 뭔가 소용이 있다고 교회 나와서 믿거든요. 예수님은 나에게 소용 있을 것이라고 믿는데, 마치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보면서 믿었듯이 그렇게 믿는 그 자체가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작용하겠지만, 천국이라도 가 볼까 하겠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그런 뜻이 아니에요. 

  

네가 왜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그들과 접촉하고 그들과 만나는 기회를 갖게 된 겁니다. 가락교회에서도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어떤 분이 말하기를, “우리교회가 복음이고 진리 같으면 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교회를 수천 명 모이는 큰 교회로 만들지 않고 조그마한 교회로 놔두겠느냐? 그것은 진리가 아니기에 그렇다.” 그렇게 반박하는데 그 반박하는 사람이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뭐냐? 

  

‘내가 이 큰 교회 다니면서 구원을 받는 것보다, 복음 아는 우리교회 가서 구원받는 것이 유리하겠지.’라고 하는 것을 검토해보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은 삑, 처음부터 뭔가 잘못되었어요. 복음은 내가 구원받는데 유리하라고 준 복음이 아니고, 내가 다른 어떤 교회에서 수십 년 신앙생활 하는 이것이 전혀 구원이 아니고 오히려 구원을 방해하는 짓거리를 그동안 50년, 60년, 70년, 계속 해오고 있었다는 것을 복음 앞에서 알아보라는 말이지요. 과연 우리가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지. 

  

다른 교회를 다닌다든지,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은 내용을 들을 생각은 안하고 “안 그래도 내가 복음 많이 알고 신앙생활 오래 했어요.” 하는 거예요. 제 말은, 나는 멋있는 사람인데 구원받고자 하는 그것도 멋있다는 것이 아니고, 복음은 과연 우리가 구원받고자 할 자격이 있는지 그 자격부터 따져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나는 복 받아야 돼.’라는 생각은 누구나 다 하고 있어요. 누구나 하고 있는데 그 생각이 이게 이단이라니까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오기 전부터 이미 인간은 복 받고 싶어 해요. 저주받고 싶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복 받은 자냐, 저주받은 자냐의 판별을 누가 내리는가 하면, 본인이 내립니다. 

  

제가 신학교졸업하고 지금까지 늘 마음속에 해결 안 된 찝찝한 내용, 그런 것들이 있어요. 물론 해결이 안 되다 것이 아니라 해결이 되었지만 그동안 꾸준히 해결하기 어렵다 한 것들이 있었어요. 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여성들이 굉장히 약해요. 약하고 비폭력적이잖아요. 남에게 나서서 남성들에게, 또는 세상에 대해서 해를 입히지는 않거든요. 최순실도 여성이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여자라고 해서 지옥 안보내고 천국 보내주는 법은 없다는 말이지요. 남자 입장에서 뭘 생각하느냐 하면, 왜 연약하고 늘 깔끔하고, 늘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늘 깔끔하고 착하기 그지없고, 좋은 생각, 양심적이고 착한 생각만 하는 여성을 왜 하나님께서 같은 대우를 하면서 지옥을 보내는가? 남자로서 그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왜 착한 여자를, 뭘 잘못했다고, 무슨 큰 해를 입혔다고 지옥불, 지옥의 유황불에 보내는가? 제가 신학교 다니면서 온전하게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이 이거였어요. 야고보서 4장 4절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잘 듣고 계시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해서 하는 소리입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여기 여성에 대해서 세상과 벗되는 대표적인 사람으로 여성을 듭니다. 세상과 벗된 것이 간음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비폭력적이고, 남성보다는 남에게 해를 덜 끼치는 여성에게 하나님께서 가차 없이 간음한 여인이라고 욕을 하고, 저주하고, 지옥 보내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여자들이 개인적으로 누구한테 폭력을 했다기보다도 자기 자신이 누구냐를 아는 것에 대해서 다른 기준을 갖고 자기와 비교시킨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거예요. 

  

선악과가 여자 보기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러운 거예요.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한 것보다 더 강렬한 것이 뭐냐? 내가 저것을 따먹으면 좋겠다는, 내가 따먹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선악과가 어떤 보탬이 될 것인가를 생각한다는 겁니다. 다른 기준을 갖고 오는 거예요. 복음을 모르는 교회 교인이라고 해서 나쁜 사람들 아닙니다. 오히려 착한 일 하려고 얼마나 애들 씁니까? 

  

그런데 복음을 모른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지옥 보낸다면 30년 또 50년 동안 교회 다닌 것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하나님의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에 가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에 가 있다는 말은, 예수님만이 복과 저주를 결정짓는 유일한 기준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기존의 한국교회는, 성당도 다 마찬가지만, 목사나 장로들 다 마찬가지겠지만, 내가 잘 믿는다는 것, 내가 죽으면 천국 간다는 기준을 복음에서 가져와야 될 것을 본인이 결정짓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이 된다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나오지요.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종이 아니라고.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기준이 된다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한 10분 동안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정리해보겠습니다. 남에게 “혹시 복음을 아십니까?” 하면 배운 가락이 줄줄 나와요. 십자가가 어떻고, 언약이 어떻고, 예수님의 부활이 어쩌고,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했다는 식으로 죽 나옵니다. 

  

그렇게 묻지 말고 이단이 뭡니까, 라고 물어야 돼요. 이단이 뭡니까, 라고 묻게 되면 그들이 이단과 진짜 구원받은 사람의 기준을 제시하게 돼요. 그냥 복음이 뭡니까, 하게 되면 그동안 자기가 들었던, 알고 있는 정보, “내 안에 이런 것이 들어 있습니다. 좋은 것은 다 끌어 모아 가지고 있습니다.” 큰 소리 치면서 막 내놓는다는 말이지요. 

  

“우리 교회도 십자가 가르치고, 부활을 가르치고, 바자회도 열고, 친목도 도모하고, 남도 구제합니다.” 이런 자랑질을 해요. “그거 말고 이단과 복음의 기준이 뭡니까?” 이렇게 물어보세요.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요? “성경대로 바르게 안사는 것은 이단이고 바르게 사는 것은 이단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겠지요. 그러면 그 다음에 준비된 멘트를 날리세요? “당신은 성경대로 사십니까?” 

  

그러면 그쪽에서 이렇게 나와요. “다 못살지만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세요.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천국 가는 기준은 말씀을 다는 못 지키고 최선 다해서 지키면 천국 갑니까?” 그렇게 물어야 돼요. “그리고 당신들이 이단이라고 여기는 것들, 신천지, 여호와의 증인, 그들은 뭐라고 기준을 정할까요? 당신들과 똑같은 이야기, 성경을 최선을 다해서 지켜야 된다고 이야기를 해요.” 

  

제가 제시합니다. 복음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지옥가야 합당한 존재다. 내가 나의 미래를 좋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제시한 기준이 아닌, 내가 할 만하고 좋아 보이는 기준을 임의로 수정해서 우리한테 적용시켜서 10년, 20년, 30년, 40년, 교회충성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했기에 그들은 십자가 죽으심이 기준이 아니라 교회 있음, 정통교회 있음, 개혁주의정통신학을 가르치는 교회 있음, 삼위일체 가르치는 교회 있음, 이게 기준이라고 하는데 그게 천국과 지옥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까? 그 교회 성만찬 하지 않으면 지옥 갑니까? 그 교회에서 세례 안 받으면 지옥 가는 겁니까? 그것은 정치적인 집단이에요. 

  

지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지고 사용하시는 이유는 이 전쟁을 하는 겁니다. 세상에 전쟁 없는 곳이 없어요. 모든 전쟁은 누구 전쟁이냐 하면, 좋은 땅을 차지하는 전쟁, 그리고 나를 살리기 위해서, 나를 더 기쁘게 하기 위해서 좋은 것은 다 뺏는 전쟁을 하면서 그 전쟁에서 승리한 결과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복이라고 하고 그 복을 얻게 되면 자기 자신을 뭐로 보는가? 복을 얻을만한 자격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게 복의 근원이에요. 

  

본문에서 네 왕이 승리를 했거든요. 네 왕이 승리했다는 말은, 그 네 왕이 연합된 입장에서는 본인이 승리했으니까 누가 승리하게 했다? 하나님이, 신께 승리하게 했으니 내가 바로 복을 얻을 만한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소돔과 고모라를 접수한 승리자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면 이 사고방식과 오늘날 우리들의 사고방식과 다를 바가 뭐가 있습니까? 부자 되면 복이고 가난하면 저주고, 그거잖아요. 패배하면 저주고 승리하면 복이고.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접수한 네 왕과 차이점이 뭐가 있어요? 차이점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동안 신앙생활 뭐하고 살아온 겁니까? 전쟁 없이 살았어요. 어떤 전쟁? 영적인 전쟁 없이 살았어요. 

  

왜 영적인 전쟁을 안 하는가 하면, 교회 나가는 모든 일이 나 좋으라고 하는 일인데 전쟁할 필요 없지요. 내 역량 껏 하면 되니까. 너무 무리다 싶으면 헌금 조금만 하면 되고, 좀 벌었다 싶으면 많이 하면 되고. 피곤하면 기도 조금만 하면 되고, 컨디션 좋으면 기도 많이 하면 되고. 

  

내가 할 수 있는 역량만큼만 제시해서 그 분량만큼의 보상만 따내면 내 것 잃지 않으면 나는 복의 근원이다, 라고 하고 싶고 그게 진리라고 하고 싶은 거예요.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세상과 짝한 여인들이 간음했다고 평가받는 이유가 뭐냐? 하와도 마찬가지지만 비교해서는 안될 것을 가지고, 자기 자신이 누구냐를 하나님이 제시하지 않은 기준을 가지고 해요. 

  

그 기준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조립된 것, 구성된 겁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낯선 존재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원했던 복과 저주의 기준이 아니에요. 낯설기 짝이 없는 복의 근원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요청하지도 않는 메시아의 모습으로 오신 것과 똑같은 겁니다. 예수님 오실 때 누가 알아봤습니까? 열 두 제자가 알아봤습니까? 아무도 못 알아봤어요. 

  

그만큼 우리는 하나님이 원치 않는 기준을 가지고 자기를 정당화 하면서 살아오면서 자기가 복의 근원이라느니, 택한 백성이라느니, 천국은 우리가 갈 곳이라느니, 그런 식으로 유대교라는 종교세계를 이루었습니다. 거기서 종교세계에 합당한 질서체제를 갖추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이 나설 때입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나서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관련된 사람인 조카 롯이 세상 전쟁에 말려들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아브라함이 가담되었어요. 아브라함의 조카가 세상전쟁에 뛰어든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그냥 빼앗긴 거예요. 아브라함은 조카를 책임지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무모한 전쟁에 말려든 거예요. 본문에 보니, 14절에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 십팔 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아브라함이 300킬로쯤 되는 아주 먼 곳까지 가서 그 조카가 갖고 있던 재산과 가족들의 목숨을 다 건져옵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을 좋아하는 깡패 같은 존재가 아니에요. 

  

318명이라는 것은 극히 작은 숫자입니다. 저쪽에는 네 명의 왕이 연합했어요. 그 당시의 왕은 지역의 왕이지만 아무리 소규모라 해도 네 명의 왕이 군사를 모아놓으면 백 단위가 아닙니다. 엄청나요. 천 단위가 훨씬 넘을 겁니다. 이길 수가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으킨 전쟁인 것을 아브라함은 압니다. 나중에 알게 되지요.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이겼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상황은 하나님이 만들어놓고 빼도 박도 못하도록 자기조카와 자기 자신이 관여되도록 조치를 하신 겁니다. 이 전쟁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설교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세상에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냥 인간의 전쟁이 아니고 이것이 영의 전쟁, 영적 전쟁이라는 거예요. 

  

사람의 전쟁이라면 자기 살기 위해서 하기 때문에 자기가 불리하다고 하면, 평소에 살아온 방법이 있기에 무리한 전쟁이라든지 과도한 전쟁에 끼어들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신으로 하여금 복의 근원인 것을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한 방편으로 자기조카와 관련된 전쟁을 하나님께서 유발시켰다는 것을 알기에 이것은 어쩔 수 없이 뛰어들어야 될 입장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전쟁에서 승리를 했을 때 아브라함 본인도 놀래요. ‘이것은 분명히 내가 승리한 것이 아닌데, 이 승리의 전략이나 힘을 안 가졌는데 왜 나에게 승리가 돌아왔지?’ 자가지신이 누구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정립하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전쟁은 오늘날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전체를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보내면서 좀 희한한 이야기를 해요. 이게 뭐냐 하면, 전쟁이 아닌 듯 하지만 진실한 전쟁, 육적으로 뭘 빼앗고 빼앗기고 그런 전쟁이 아니고 인간들이 생각지도 못한 구원에 관한 전쟁을 그 미천한 열 두 제자를 보내서 하게 하십니다. 제가 방금 제자들을 미천하다고 이야기했잖아요. 

  

이 미천한 제자들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제자들이 갖고 있는 무기,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능력으로는 이 전쟁에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가락교회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사람의 죄가 살인하거나, 미워하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부모를 공경 안하거나, 간음을 하거나, 안식일을 안 지키거나 그런 것이 죄가 아니고 목적을 갖는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이야기한 이유가 있어요. 모든 범죄는 반드시 목적이 있어요. 저것을 갖겠다는 목적. 목적을 갖는 것이 죄라면 성도의 삶이라 하는 것은 딱 답이 나와요. 목적을 안가지면 되는 거예요. 이게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인데 뭐든지 목적을 가지면 그 목적 하나에 매진하기 때문에 자기체면과 관련이 됩니다. 기어이 해보겠다는 그것으로 인해서 힘이 들어가고, 그것이 시험거리가 되고, 그 목적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과 감사가 날아가 버리지요. 

  

이것은 하나님의 전쟁이 아니고 자기전쟁이거든요. 그런데 목적을 가지는 것이 가장 큰 죄라면 성도가 목적을 안 가져야 되잖아요.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목적을 안가지게 되면 놀면 되겠네, 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중요합니다. 목적을 가지지 말고 부지런해야 돼요. 목적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부지런 하다는 말을 연결시키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매사 주님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거예요.
그러면 내 목적이 아니고 주님이 필요한 목적을 위해서 오늘도 나를 사용하시는데 거기에 필요한 상황들을 수동적으로 늘 부여받고 있는 겁니다. 왜 우리가 목적을 가지면 안 되는가? 이것이 나의 자존심과 나의 명예와 체면을 위해서 나설 수밖에 없는 죄인이기에 그래요. 

  

그렇게 되면 결국 마지막에 내가 잘났다, 가 돼요.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지만 교인들이 예수를 믿겠다고 나름대로 설치게 되면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것이 자기 목적이 돼 버려요. 그런데 예수 믿고 구원받겠다는 것이 죄라고 이야기하면 그들이 무슨 말인지 못알아들어요.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인간이 무슨 짓도 다 해요. 

  

무슨 짓도 다 하기 때문에 그 가는 길이 누구의 길이 되느냐 하면, 주님의 구원하는 길이 아니고 자기가 나름대로 기준을 세워서 자기구원을 따내겠다는 고집의 자기에 관한 전쟁이에요. “마귀야, 나오너라. 내가 신앙인인 것의 본때를 보이리라. 내가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본때를 보이리라. 어떤 시험도 내가 이기리라.” 이런 식으로 전쟁을 하는 거예요.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그게 이단인 거예요. 구원 받겠다 하는 것이 이단입니다. 구원받겠다는 목적을 두면 안 되는데 자기가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고 뜻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는다는 그런 뜻은 주께서 주신 적이 없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너 구원 받아라.” 하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에 의해서 우리가 걸려들면 구원되는 겁니다. 

  

그것을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앞서서 본문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아브라함이 전쟁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고요. 남의 전쟁에 끼어들고 참여하는 것이 취미인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영적 전쟁으로 말려들게 한 겁니다. 영적전쟁에 말려들게 하는데 우리 보기에는 영적전쟁으로 안 보이고 그냥 군사력과 군사력의 대결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군사력이 아브라함 쪽이 현저하게 작아요.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전쟁입니다. 인간의 전쟁의 모습을 띄면서도 주께서 영적전쟁을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해주고 알려주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전쟁의 승리가 돌아오더라도 “역시 내가 믿음 좋아. 역시 나는 잘났어.” 이러 식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웬일입니까, 주님이여! 이런 식은 제가 생각하지 않는 전쟁입니다. 이게 뭡니까?” 

  

결국 아브라함은 자기자존심과 체면을 거기서 찾을 수가 없어요. 나 잘났다, 라는 것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마태복음 10장에서 제자들에게 한 거예요. “네가 전도할 때에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그리고 누굴 꾀이고 신자 만들려고 생각하지 마라. 주께서 붙여주거든 ‘아하, 신자가 여기 있었네.’ 이렇게 해야지 네가 하늘나라 확장한다고 나대지 말라.”는 말이지요. 

  

그것은 정치적이고 권력적이에요. “봐라, 내가 주의 종이라서 이만큼 교인 모아놨잖아.” 그게 자기의 구원받음과 주의 종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냥 사람들을 많이 모은 셈이 돼요. 교인 하나 안 나오면 당회장 명예가 떨어지고 교인수가 확 늘어나면 역시 나는 주의 종이 맞고. 거기에 교인들은 멋도 모르고 말려들고. 물론 다 알고 말려들지요. 

  

“역시 우리교회 최고야. 하나님께서 이만큼 크게 해줬어.” 이것이 사람을 좋게 하는 기준입니다. 거기서 초연해야 돼요. 거기서 벗어나야 돼요. 그러려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어떤 목적도 가지면 안 됩니다. 구원받겠다는 목적을 가지면 이것은 판판이 지옥 갑니다. 천국 가는 사람 특징이 뭐냐 하면, “구원 안 받으려고 하는데 왜 자꾸 저를 주님께서 공짜로 용서해주십니까? 나 같은 죄인을 왜 안 버리십니까?” 이런 고백들이 나와야 돼요. 

  

그런 고백들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주변의 모든 것이 영적전쟁으로 꿈틀거리고 있고 요동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뒤늦게 발견하게 하십니다. ‘아, 이것은 내가 하는 전쟁이 아니라 영적 전쟁에 내가 말려들었구나.’ 에베소서 6장 10절부터 보면,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이 말씀이 말씀대로 우리에게 적용이 되려면 우리는 ‘이것은 반드시 이렇게 돼야 돼. 이것은 반드시 내가 지켜야 돼. 이것은 어떤 경우라도 내 명예를 걸고 놓치면 안 돼.’라는 자기고집, 자기의 목적은 하나님에 의해서 다 부서져야 됩니다. 내가 가진 그 목적이 오히려 좌절로 마감되어야 됩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십자가의 거저주시는 은혜, 대신 죽으심의 그 능력이 그 때서야 비로소 고맙고 감사합니다. 

  

‘내 인생은 처음부터 내 인생이 아니었구나.’ 그런데 제가 아까 기도할 때 했지만 우리는 맨 날 눈만 뜨면 ‘내 인생 내가 오늘도 괜찮게 가꿔야지. 남에게 기죽지 않을 정도로 내가 모으고 다듬어서 이렇게 내가 잘살았다고 남에게 자랑질을 해야지.’ 이게 우리의 사는 힘이고 동기부여가 되고 말았어요. 

  

그러다 보니 이 모든 전쟁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네 명의 왕과 다섯의 왕이 전쟁을 벌이는 그런 인간의 전쟁 꼴과 똑같이 되는 겁니다. 우리의 일상 삶이 피곤하지도 않습니까? 언제까지 다른 기준을 잡아당겨서 자기잘난체를 할거예요? 십자가 믿으니 도와준다고요? 복음 아니까 도와준다고요? 누굴 도와주는데요? 

  

우리가 복의 근원이라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면, 우리는 날마다 이것은 내가 원하는 인생이 아닌 것에 깜짝 놀라면서 감사하면서 “누구 은혜입니까? 누가 그렇게 했어요?”라고 물어야 돼요. 끝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했지요.
이게 참 어려운 것이, 주를 사랑 안 해서 어려운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를 사랑하라는 말은, 네가 사랑하지 말아야 될 것을,
주께서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것에 네가 마음을 더 빼앗기기 때문에
정작 사랑해야 될 분을 사랑 못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그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모든 목적, 내가 저걸 꼭 사랑해야지, 갖고 싶은 것을 두고 사랑해야지, 하는 모든 것들을 

주께서는 때찌, 해서 좌절케 하시는 그것으로 하여금 내 인생이 아니고 주의 인생으로서, 

우리가 주의 인생에 붙어 인생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오늘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시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벌이는 영적전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살아가는 모습 중에서 내가 누구냐를 알기 위해서 어떤 기준을 비교하고 갖다 붙였습니까? 십자가 앞에 서야 될 우리가 건전하고 괜찮은 나의 이상형을 가지고 내 모습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까? 이 시간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이미 주의 영적 전쟁 안에 놓여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이단적 사고방식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