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하나님의 의(창15;5-7) 16121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2. 17. 03:12
2016-12-14 20:40:18조회 : 69         
   하나님의 의 161214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하나님의 의(창세기 15:5-7)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2YEe6tLgWRM, Hit:7
 이근호16-12-14 21:27 
하나님의 의 

2016년 12월 14일                    본문 말씀: 창세기 15:5-7 

(15: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15: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에 부담을 가집니다. 이는 그동안 인간 세상 속에 파묻혀 고만고만하게 사는 것이 습성화되었기에 자기 몸이 이런 생활을 편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가 개입되면 분위기가 싸늘해져버립니다. 그것은 약한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주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편하기 살기 위해서라도 하나님 이야기를 될 수 있는 한 거론하지 않고 그 대신 교회 이야기나 전도 이야기로 대신 때우게 됩니다. 그것은 아무리 신을 언급해서 결국 ‘인간들끼리의 활동이요 활약상이요 행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주인공은 하나님으로 나옵니다. 

평소에 인간들은 자신을 주인공삼아 벌리는 상황에 익숙해졌는데
막상 성경은 그렇지 못하니 여기서 억지스러운 해석들이 남발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을 제쳐두고 인간들의 행동들에 주목하면서 그들을 흉내내는 식으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할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인공이 되어야 될 일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자를 주인공으로 설정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면 같은 인간이라는 입장에서 감당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주인공으로 삼지 아니하면 결코 진리요 복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인공 되시는 하나님께서 또 한 사람을 거론하십니다. 그 분은 바로 아브람입니다.
그리고 7절에 보면, 그를 그 되게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고 소개하고 계십니다. 

이는 곧 아브람이 스스로 노력해서 하나님을 만나 뵈려고 노력해서 결국에서 하나님 사람이 되었다는 식은 용납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아브람은 실은 일반인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와서 그는 모든 관계가 단절되는 사람으로 전환됩니다. 흔히 인간들의 사회란, 인정(人情)과 우정과 의리와 혈통, 혈육이라는 가족 관계와 사회적 인맥으로 구성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자아성이란 바로 이런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힌 바로 그 촘촘한 그물망으로 조성되는 겁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정을 오랫동안 나눈 사람, 그렇지 않고 싸웠던 사람, 자기를 사랑해주고 인정하는 사람, 그렇지 않고 자신을 욕하고 미워하는 사람 등등의 인간관계로 형성된다고 여깁니다. 

그 속에서 소위 ‘교인’이 탄생합니다. 스스로 ‘교인’이라고 여긴다면 이는 그 조직이 가져다 주는 유대감 속에 함몰되어 있다고 봐야 합니다. 사람은 외로우면 괴로운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오신 결과는 바로 이런 모든 인간 관계가 모조리 작벌하는 결과를 낳은 겁니다. 
곧 아브람은 이방인이요 객이요 나그네로 살게 하시는 겁니다.
아브람은 남들과는 달리 하나님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살아야 될 존재로 일방적으로 지목당한 겁니다.
일종의 납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서 아브람은 세상에 대한 미련과 애착을 끊어지는 삶을 살게 됩니다.
바로 이런 현상은 하나님쪽으로 그냥 빈 손으로 아브람에게 다가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의’를 제공하려 하십니다.
이 제시된 ‘하나님의 의’의 효과는 바로 ‘믿음’입니다.
아브람에게서 그 어떤 것으로 ‘하나님의 의’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내미신 ‘하나님의 의’라는 관계성의 결과는 아브람에게 ‘믿음’이라는 것을 발생시킨 겁니다. 

곧 이질적인 것이 아브람 내부에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을 신약 로마서 1:17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즉 복음이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도 ‘의인’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의’이라고 그 의는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서만 나온다는 소식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의의란 딴 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란 메시야를 살해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는 겁니다.
이 소식이 복음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님에게 있어 이와같은 바른 믿음이 나온다면 그 선조가 되는 아브람의 믿음이란 곧 ‘아브람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아브람 속에 들어오게 된 약속으로서의 ‘하나님 의’ 안에 있는 내용으로서의 믿음입니다. 베드로전서 1:11에서는 이점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즉 선지자로서 살아가야 하고 그렇게 다루게 될 아브람은 자기 속에서 메시야의 십자가 고난에 참여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의’ 곧 ‘십자가 복음’이 밀고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아브람 본인도 사전에 미처 알지 못했던 ‘불신’과 ‘배신’이 자기 생애를 통해서 마구 밖으로 방출되는 현상을 보이게 됩니다. 

즉 고난 가운데서, 이질적인 요소가 자기 안에 상주하는 것으로 확인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자기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 사랑’이 내주함을 알려주는 바깥 상황들이 들이닥치게 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아브람의 세상과 결별되는 삶은 곧 이방인으로서의 삶입니다.
이 이방인은 곧 예수님께서 인간 세계에서 추방당하는 그 취지와 결합하면서
세상 사람들의 원리와는 전혀 다른 원리에서 구성되는 약속의 세계를
아브람을 통해서 보여주게 됩니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제 3의 인물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예수님 보기를 원했고 보고 기뻐했습니다.(요 8:56) 즉 자신은 참된 믿음이 없고 사랑이 없는 죄인으로서 하나님이 자신을 사용하셨다는 것을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밀려들어와서
날마다 자신에게 분출되는 배신과 불신을 보고 사는 자가
곧 이 세상에서 이방인입니다
.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9) 

이런 자만이 자신의 믿음을 믿지 않는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복음으로 우리 자신의 것으로 굳어진 것들을 파괴시켜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6-12-16 06:45 
66강-창 15장 5-7절(하나님의 의)1612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5장 5-7절입니다. 구약성경 17페이지입니다. 

  

창 15:5-7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주인공이 나타납니다. 사람을 상대로 한다면 사람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비난도 하게 되고, 판단도 하게 되고, 저 사람은 저런데 나는 어떤가, 이렇게 비교가 될 수 있지만 성경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사람과 사람으로 할 때는 별 부담을 안 느껴요. 너나 나나 똑같은 인생이다, 이렇게 되지만 하나님을 상대로 한다는 것은 그 앞에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하고 상대할 때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곧잘 말을 잘 하다가도 어떤 대화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끼어들면 분위기가 다 깨지지요. 싸늘해지면서, 우리 이쯤에서 헤어지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상식적으로 사람에 대해서는 평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지만 하나님을 상대로 해서 함부로 하나님이 이렇다, 저렇다, 말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너무나 큰 부담이 돼요. 

  

우선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있다고 친다면 더욱더 문제가 커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았으며 무엇을 했는가, 책임추궁 당할 여지가 있다는 거지요. 하나님이 계시는데 너는 무엇을 했나, 이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너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데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고
왜 사람만 생각하고, 사람만 상대하고, 사람의 눈치만 보고, 사람만 의식하면서, 사람에게 관심 두고만 살았어?
네가 나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했어?”


이렇게 나오면 자칫하면 지옥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무 엄청난 분이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생각을 안 하려고 해요. 기피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빼고 행복한 삶을 사람들은 생각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뉴스요 드라마고 방송이고, 세상 모든 정보들, 정보의 바다에서 하나님 빼고 이야기하자는 거예요. 하나님 빼고 진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하나님 빼고 정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하나님 빼고 진리에 대해서, 진실함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는 겁니다. 

  

하나님 빼고 자기들끼리 진실을 이야기하고, 진리를 언급하고, 양심을 논하고, 정의를 논하고, 사랑을 논하고, 평화를 논하면 그게 정답입니까? 자기들끼리 소꿉놀이 하는 그것이 정답이겠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들으려고 합니다. 왜? 용기가 없어요. 비겁한 겁니다. 참 비겁해요. 고만고만한 자들끼리 밀고 당기면서 그런 식으로 살아보겠다는 겁니다. 

  

너무 큰 덩치가 오게 되면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나에게 무의미해지기에 그것이 싫다는 거지요. 하나님 앞에서 서고, 하나님 이야기하는 그것이 부담이 되고 무의미하게 느껴지느냐고 물으면 그 이유는 본인들이 몰라요. 그저 습관상 눈에 보이는 세상에 너무 정들었다 할까, 너무 익숙해졌다 할까, 기껏 비겁한 변명이 그 정도밖에 안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중에 죽게 되면 만나게 되겠지. 그 때 고개 숙이고 순종해서 잘못했다고 빌면 무슨 수가 나겠지.’ 무턱대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끊어놓고 자기 나름대로 살면서 내 인생이 어쩌고저쩌고, 행복했다느니, 보람찼다느니, 실패했다느니, 자기가 맘대로 점검하고, 판단내리고, 결정짓고, 그것도 마음에 안 들면 약 먹고 자살하고. 

  

자기 몸도 아닌 것을 두고 자기가 마치 주인인양, 다들 그렇게 살아가니까 하나님을 잊어도 무방한 존재인 것처럼 물 흘러가듯이 탁류에 휩쓸려서 정신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다 보니까 2016년도도 저물고 있습니다. 탁류에 휩쓸려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성경은 사실은 매일같이 우리에게 법이라는 이름으로,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브레이크를 걸었습니다. 브레이크 건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에요. “그쪽이 아니다. 하나님 없는 생활, 그 쪽은 아니니라.” 하나님이 없는 생활해도 결국 죽으면 주의 음성 들을 때가 오나니 그 때 가서는 이미 늦었다는 겁니다. 

  

“미리 당겨서 하나님 있는 삶을 살아라.” 하나님 있는 삶이라 하는 것은 우리한테 분명 부담되는 것이 맞아요. 부담되는 것은 맞지만 그 부담을 죽기 전에 미리 맞닥뜨려야 됩니다. 그 부담은 딴게 아니라 심판의 부담이지요. “하나님, 저 어떻게 심판하실 거예요?” 그 기준과 표준을 미리 맞닥뜨려야 됩니다. 

  

맞닥뜨리는 동시에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되어버려요. 뭐가 되는가? 나그네가 돼요. 나그네가 되고 남들 보기에 외톨이가 되는 겁니다. 왜 남들이 다 하는 짓거리를 안 하고 남들이 안하는 짓거리를 왜 하느냐는 거예요. 남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하루에 몇 초도 생각 안하고 사람들 등살에 떠밀려서, 세상에 떠밀려서, 세파의 풍문에, 화제꺼리에 떠밀려서, 뉴스거리에 떠밀려서 그냥 그만그만하게 헤헤거리면서 잘도 행복하고 잘도 살아가는데 너는 왜 거기서 하나님을 집어넣은 인생을 살려고 하느냐, 하고 왕따 당할 겁니다. 

  

오늘 본문에 아브라함 나옵니다. 처음에 본문에 하나님이 나온다고 했지요. 하나님이 단독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짝을 이루어서 나옵니다. 그러면 그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뭐냐? 나그네입니다. 객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나그네고 객이고. 아브라함만 그렇습니까?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 그 손자 야곱도 마찬가지고 나중에 히브리서 11장에 보니까 믿음의 계열이 다 그래요. 

  

모세 같은 경우에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 됨을 거절하고. 공주의 아들 됨을 왜 거절합니까? 재벌 집 아가씨의 아들 됨을 왜 거부합니까? 재벌 3세가 될 수 있는데.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기를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늘이 주는 상을 바라봄이라고. 하나님이 우리 쪽에서 보면 부담되는 것이 맞습니다. 부담 안 된다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부담되는데 하나님 쪽에서 아브라함이 나타날 때는 그 부담을 하나님 쪽에서 감안해서 대신 짊어지면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결속되도록 하는 그 장치, 그런 관계, 짜임새를 하나님 쪽에서 이미 마련했습니다. 

  

“아브라함아! 폴짝 뛰어서 나에게 오너라.” 그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붙잡는 도구, 그 기구까지 하나님 쪽에서 준비했어요. 덮치면 덮이도록. 아브라함은 수동이고 피동이에요. 하나님만이 능동입니다. 히브리어의 동사가 피동, 능동, 강한 것, 약한 것, 재귀, 자기한테 돌아오는 것, 누굴 시킨다는 사역형, 이런 것들이 있는데 근본적으로는 완료와 미완료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주께서 손을 내밀면 완료가 되고 약속만 던져놓으면 미완료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어쨌거나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발생된 사물로, 대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피동이든 능동이든, 사역이든 뭐든간에 늘 “하나님이여! 오늘은 무슨 지시를 내리실 겁니까?” 지시와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관계로 결속되어 있는 족속, 그게 히브리민족입니다. 특이하지요. 

  

굉장히 특이해요. 내가 나에 대해서 먼저 의식하고 그 다음에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나에게 모셔오든지 내가 찾아가든지, 다가가는 것이 아니고 다가올 수 없으면 진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영히 모르는 존재가 되어버려요. 모르는 존재정도가 아니라 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갈 때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결속관계를 가지고 왔는데 그 관계가 본토 아비 집을 떠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본토 아비 집을 떠났다는 것은 교회 좀 다닌 사람은 다 알아요. 아브라함은 자기의 본토 아비 집을 떠났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본토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이 뭐냐 하면, 우정, 의리, 양심, 혈통, 인정사정, 이 세상에 대한 미련……, 칡 뿌리 캘 때 곁가지들이 있지요. 그걸 단칼에 때려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다 끊어지지요. 그것이 다 끊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뭐로 사는가 하면 정으로 살거든요. 정주고 정 받고 사는 그것이 이웃관계 아닙니까? 그런데 그 정, 인정사정 다 끊어버린 거예요. 세상에 대한 어떤 미련과 집착도 다 끊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아, 아브라함이 세상을 끊어서 하나님 만났구나.’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을 붙잡는 그 기계장치가 뭐냐 하면, 딱 도달하게 되면 두두두득, 소리가 나면서 그런 게 다 끊어지는 거예요. 

  

양심이 끊어지고, 윤리 도덕도 끊어지고, 그야말로 아브라함을 제 삼자가 볼 때는 ‘뭐 저런 특별한 인간이 다 있어? 저거 뭐야? 이상한 사람이네.’ 인정사정 다 끊어지면 뭐가 끊어지는가 하면, 대화가 끊어져요. 관심사가 끊어지고.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해 봅시다. 우리 쪽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참 부담됩니다. 이제 그 부담되는 이유를 알았어요. 왜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부담되고 차라리 사람하고 관계하는 것이 굉장히 자연스럽고 친숙한가? 나라는 것이 그냥 나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인정사정과 혈통과 전통과 역사에 얽히고설킨, 칡뿌리보다 더 끈질긴 관계의 여러 교차점 위에 우리가 놓여 있는 거예요. 

  

그 교차점, 그 관계는 우리 눈에 안보이니까 우리는 편하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 머리 참 잘나왔다. 저 사람 참 부자인데 나도 부자 되었으면. 저 사람이 뚜껑 없는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는데 나도 타볼까?’ 우리는 그냥 편하게 생각해요. 저 사람과 나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그러나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그것이 주님이 우리를 찾아올 때는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고 내 힘으로 아무리 쳐내려고 해도 쳐내지지 않는 끈끈한 관계망 속에서 우리가 꾸준히 성장해왔고 그 속에서, 인간들의 관계의 장에서 하나의 생산물이 된 거예요. 

  

만들어진 겁니다. 뭘 로? 인정사정, 혈통, 인습, 관습, 세상에 대한 애착. 그걸 고상한 말로 하면 타인의 시선. 다른 말로 하면 타인의 기대, 기대치. 사랑하는 부모님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응시,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 그걸 종교적으로 하게 되면, “나는 널 위해서 열심히 지금도 새벽마다 기도하고 있다.” 이런 것. 그거 성령의 칼로 쳐내버려야 합니다. 날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성령의 칼로 쳐내버려야 돼요. 칡넝쿨보다 더 질겨요. 

  

흔히 믿는다는 사람들이 마지막 좋게 헤어지는 작별인사가 뭐냐? “그래. 걱정하지 마. 내가 널 위해서 꼭 기도해줄게.” 기도하는지 확인전화 해 봤습니까? 기도한들 응답될까요? 오늘 본문의 어려운 점이 그겁니다. 오늘 본문이 얼마나 어려운지 어려운 것부터 결론적으로 먼저 말씀드릴게요. 

  

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 대목이 아마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일 겁니다. 그런데 이 대목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들 설명하는지 참. 물론 전부다 거짓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 믿었듯이 우리가 믿으면 의인 됩니다.” 이것은 전부 다 거짓말입니다. 이것은 마귀의 전략이고 장난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쪽에서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왔다 했잖아요. 멀쩡하게 자기고향에서 잘 살고 있는 사람을 쳐내서 본토 아비 집을 떠나게 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으니” 할 때 이 믿음이 뭐냐 하면, 불신과 배신을 들추어내는 작업을 말합니다. 믿지 아니하면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아브라함 속에 들어 있는 불신과 배신이 나타나지를 않아요. 

  

불신과 배신을 노골화시키고 그걸 현실화, 구체화시키는 그 첫 번째 작업이 뭐냐? “여호와를 믿으니”입니다. 믿지 아니하면, 내가 하나님을 불신하고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 주님을 믿지 아니하면 이것이 발각되지 않고 탄로 나지 않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배신자가 바로 나라는 거예요. 배신자여! 배신자가 나고 불신자가 따로 없고 내가 불신자라는 사실이에요. 

  

믿어서 뭐 의인된다고요? 정반대입니다. 그런 사람은 정 반대로 가르치고 있는 거예요. 지옥 보내기 위해서. 마귀가 그 짓 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을 믿을 재주도 없고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었어요? 아브라함이 아담의 자손인데 자기가 무슨 능력으로 믿습니까? 아브라함은 알았지요. 나의 믿음으로 의인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이 이삭 바치고 죽을 때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와 여호와 사이에 제 삼의 인물을 거론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원했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여러분은 아시겠지만 대부분은 모를 거예요. ‘저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느냐?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것이 개혁주의의 모토인데.’ 그래서 개혁주의가 이단이에요. 

  

믿음으로서 의인된 사람 아무도 없고요, 행함으로도 의인된 사람 아무도 없고, 믿음으로든 행함으로든, 죽을 먹든 밥을 먹든 의인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의인은 없어요. 의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왜 의인됩니까? 의인 될 수가 없음을 주께서 찾아와서 우리에게 비로소 알려주시는 거예요. 의인은 단 한분밖에 없어요. 

  

그 한분되는 의인이 의인으로서, 믿음으로서 의인되었다는 최초로 등장하고 그것으로 끝이에요.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온 거예요. 창세기 15장도 어렵지만 로마서 1장 17절 말씀도 만만치 않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제가 친절에 친절을 더해서 설명하겠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지요? 설명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이 나타나기 전에는 뭐가 없다? 하나님의 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이 세상에 믿음이 없는 거예요. 이게 간단한 논리에요. 뭘 믿어요? 아브라함이 누굴 믿어요? 아브라함 본인이 하나님을 안 믿었어요. 하나님이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하나님을 안 믿는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애초부터 믿을 위인이 되지를 못해요. 믿음으로 구원되는 것 아니고 믿음으로 의인되는 것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 의인되었으면 신학교수 불러다가 이야기해 보세요. 우리나라 신학교수 천명에게 묻고 싶어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으면 더 이상 아브라함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치 않는 것이 맞지요?” 제가 묻고 싶어요. 

  

본인이 여호와를 믿었는데, 약속을 믿었으면 되었지 왜 예수님이 필요합니까? 십자가가 왜 필요합니까? 천 명 중에서 답변을 들어보고 싶어요. “성경에 문자로 나와 있잖아요. 창세기 15장에 나와 있잖아요.” 하겠지요. 글자는 사람을 죽이는 거예요. 문자대로 본 그것이 사람을 지옥 보낸다니까요. 

  

유대인들이 성경보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을 몰라서 지옥 갔습니까? 도대체 기독교가 시작한 벌써 2천년이 되었어요. 2천년이 아니라 3천년이 되어도 모를 것 같아요. 이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끊어내서 오게 한 것은 이미 그 아브라함은 아브라함 본인이 본인을 관리할 입장에 있지 않고 생소한 내용이 여호와를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계속 투입이 되는 겁니다. 

  

투입이 되면 투입된 그 말씀 하나하나,
그것을 관계라고 하는데 그 관계를 하나님의 의라고 이야기해요.
그렇다면 그 관계를 아브라함이 받는 것이 믿음이 아니에요.
그 관계를 성사시키는 관계성 안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인정하는 믿음까지 생산되게 되어 있습니다.
없는데서 새롭게 만들어지게 되어 있어요. 

  

로마서 1장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는 말이 나오거든요. 이 말도 사실은

구약 같으면 사람은 믿음으로 의인이 되리라, 이렇게 이야기해야 되는데
의인부터 앞장세워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다시 말해서 의인이라는 것은 없었는데 믿음이 새롭게 발생되어서 의인이 새롭게 발생되었다. 

  

그런데 그 믿음이라는 것도 원래 없었는데 복음이 나타나니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니까 믿음이라는 것이 새롭게 만들어졌다는 거예요. 그러면 믿음이라는 것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어디서 나오는가? 하나님의 의에서만, 의가 나타날 때만 동시에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믿음이라는 것도 없어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발생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신약 로마서 1장 17절의 내용이에요. 어차피 인간에게는 아예 없어요.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없다 이 말이지요. 그렇다면 왜 창세기 15장 6절에서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긴다고 할 때 그의 의, 여기서 그가 아브라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 속에 들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언급하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1장 10절의 말씀처럼 선지자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 있다고. 이럴 때 적합한 한국 속담에 이런 것이 있어요. 자식은 겉 낳았지 속 낳았나, 하는 말입니다. 자식 잘 키우려고 부모가 그렇게 잔소리를 해도 자식이 엇나가니까 나중에 부모가 탄식하면서 “자식이 내 맘대로 안 되는구나. 자식은 겉 낳았지 속은 안 낳았지.” 

  

사람의 모양체는 물체, 물질로서 자식 비슷하게 태어났지만 자식의 마음까지야 부모 원대로 만들어지겠는가? 그럴 리 없다고 탄식해서 하는 이야기거든요. 아브라함이 자기 본토 아비 집을 나올 때 누가 봐도 아브라함은 하나의 물질이에요. 하나의 형체와 세포를 갖고 있고 DNA를 갖고 있습니다. 

  

신체, 혈통, 성경에서 말하는 육이지요. 혈통을 갖고 있으니 이것은 겉 낳은 거지요. 그 다음에 속을 낳는 문제는 아브라함에 겉에서 속으로 전환될 수 있는 그 통로가 없어요. 겉은 어디까지 육은 육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성령으로 나야 영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3장 8절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쉽게 말해서 이런 거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지고 노는 거예요. 전혀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를 아브라함에게 계속 집어넣으니까 지팡이가 하나님의 의, 하나님과의 관계라면 지팡이를 넣는데 그 지팡이가 아브라함 속에까지 들어오려면 그 지팡이 끝에 다이아몬드같이 달린 것이 있습니다. 장차 올 예수님만 갖고 있는 ‘믿음에서 믿음으로 의인되는 그 믿음’ 다른 믿음은 안 되고 의인되는 믿음이 따로 있거든요. 

  

따로 있는 그 믿음을 그 지팡이 끝에 달고 아브라함 속에 집어넣어버리면 아브라함 인생을 통해서 뭐가 방출되는가? 그 때까지 미처 몰랐던 배신과 불신이 방출되게 되어 있어요. 뭐가 쑥 들어오니까 잠자고 있던 귀신의 코털을 건드린 거예요. 그래서 바깥으로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불신과 배신입니다. 

  

내가 믿는 예수,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내 착함의 연속이고, 착함의 연장이고, 착함의 반복이에요. 얼마나 착했으면 예수까지 믿겠습니까? 나의 훌륭함과 대견함과 나의 침착함과 나의 지혜로움의 표상이지요. 그런데 주님이 주신 믿음이 들어와 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그 때부터 본인도 몰랐던 주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과 배신과 그리고 불신이 막 나오는 거예요. 

  

그걸 누가 보여주는가? 열 두 제자가 똑똑하게 보여줬습니다. 내 속에서 가룟유다까지 튀어나올걸.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당신은 뭘 근거로 그렇게 장담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올 때 멘트 날려서 구원시키러 온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온 것이거든요. 십자가가 무슨 사건입니까? 모든 인간은 아무도 예수님을 이해 못했다는 확실한 증거, 결정적 증거가 십자가잖아요. 

  

모든 인간의 그 똑똑한 이성과 지혜의 총집결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하게 만든 동기가 되었다는 것을 담아 있는 내용이 십자가사건이라는 말이지요. 그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로마서 1장에서는 ‘하나님의 의’라고 했거든요. 하나님의 의라고 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보시기에 유일하게 인정할 만한 ‘하나님의 믿음’이 되는 거예요. 

  

그 믿음이 성도에게 차고 들어오니까 성도 앞에 튕겨져 나가는 것이 뭐냐 하면, 나의 믿음은 주님에 대한 거짓 믿음이고, 배신이고, 가룟유다의 믿음이고, 베드로의 배신이고, 불만이고, 불평이고, 속에 있던 괴물들이 아악! 소리치면서 내 속의 귀신들이 마구 나가는 현상을 보이는 겁니다. 60넘은 어떤 여성에게 대통령직이 쑥 들어오니까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 했나.” 대통령에 대한 불만이 나오지요. 

  

주님이 쑥 들어오니까 “내가 인생 이렇게 꼴아 박으라고 주께서 찾아오셨습니까?” 주께서 “그렇다!” 그렇다, 가 아니고 “고렇다!” 그럼, 이 아니고 “고럼!” 환란과 핍박과 위험과 적신과 칼이나 어떤 경우라도 주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 주의 사랑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그 때부터 환란과 핍박과 곤고, 이런 것들과 맞닥뜨림으로서 내 쪽에서 자꾸 하나님을 이용하고 하나님을 이용해서 천당 가려는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마귀의 전술이었다는 겁니다. 악마가 조작해 낸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마귀가 만든 이런 것들이 마구 더럽게 방출되는 겁니다. 

  

우리는 내 쪽에서 만들어낸 믿음 소망 사랑가지고 뭐 하려고 했느냐 하면, 부모로부터 안 끊어지려고 하고, 인정사정 이용해서 더불어 살려고 한 겁니다. 소통하면서. 소통이 인문학의 주제지요. 더불어 살면서 외롭지 않으려고 했고 남에게 인정받는 사람으로, 가족에게 인정받고, 주위 사람에게 인정받고, 교회에 인정받고, 성화된 경건 된 신자라고 칭찬받고 싶은 용도로서 우리는 믿음, 소망, 사랑을 열심히 짜내서 만들어 낸 겁니다. 

  

여러분, 아브라함 인생이 그런 인생이었습니까? 아브라함 인생은 사자성어로 하면 ‘우당탕탕’ 만화에 그런 것이 있지요. 천막 안에 괴한이 들어왔는데 안에서 싸우는 모습은 안보이고 천막 바깥으로 울퉁불퉁 튀어나오는 모습 있지요. 그래놓고 글자로 “우당탕탕!”이라고 써놓았잖아요.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당탕탕이에요. 평생 나의 갈길 다가도록 우당탕탕이에요.

  

한시도 쉬지 않고 우당탕탕. 내가 할 수 있는 찬송은 우당탕탕 찬송. 같은 말로 엉망진창. 두자로 하면 개판, 뒤죽박죽. 이걸로 낱말 잇기 합시다. 설교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에게 찾아왔다. 그 다음에 아브라함을 나그네로 만들었어요. 나그네로 만들고 아브라함보고 훌륭하라는 소리 안합니다. 그 다음부터 우당탕탕이에요. 

  

아브라함의 모습이 열두 제자의 모습이고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에요. 뭔가 쳐들어왔어요. 허락도 없이 그냥 쑥 들어와서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믿을 줄 모르고, 이렇게 나는 고집이 세며,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항상 시선과 내 마음은 세상 쪽에 가 있어요. 그 때가 좋았는데. 인간들이 서로 정 주고 받을 때가 참 좋았는데. 얼마나 가족의 정이 따뜻한지. 이웃에 사는 보살이 얼마나 정이 많은지. 고추도 같다주고 떡도 주고 보살이 얼마나 나에게 친절했는지. 

  

전에도 이야기한적 있지만 전에 봉화에 사는데 수도가 얼어서 물이 안 나와서 밥도 못해먹고 있을 때 그 교회 교인들도 아무도 몰랐을 때 우리 뒷집 살던 안식교 교인이 물 다 대줬어요. 얼마나 고마운 이단인지 몰라요. 혹시 운전하다가 타이어 펑크나면 통일교 교인이나 신천지교인이 와서 타이어 고쳐줄 수도 있어요.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의 정이 없으며 못삽니다. 정이 없으면 아마 외로워서 자살할 거예요. 우리는 남에게 인정 못 받으면 정말 죽고 싶어요.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요. 남들처럼만 살고 싶어요. 그냥 보통으로 살고 싶어요. 그런데 보통으로 사는 것만큼 힘든 것이 어디 있어요? 이러한 심리, 마음가짐, 내 인생 다 가도록 없어질 것 같아요? 

  

절대 없어지지 않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의의 지팡이 끝에 있는 다이아몬드 같은 믿음이 우리의 모든 것을 쫓아내는데 그것을 두자로 뭐라고 성경에 했느냐 하면, ‘행함’이라고 되어 있어요. 세자로 하면 ‘자기의’ 그것을 네 자로 하면 ‘자기영광’ 요새말로는 자존심. 요즘에는 자존감을 살려라, 하는데 그러면 바꿀게요. 자존감. 자존심, 자존감, 자의식. 이런 것들이 바깥에 나옵니다. 

  

주께서 이미 끊어놓은 세상에서는 뭘로 통한다? 자존감으로 통하고, 자존심으로 통하고, 자기영광으로 통하고, 대화가 되고, 우리는 그 세계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선망하고, 그 세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안심하고, 마음이 가라앉아 진정되고,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얻어요. 그 세계에서 소통하고 살면. 날 알아주고, 날 인정해주고, 날 사랑하고, 날 예뻐해 주고, 칭찬해주고, 격려해주고, 배려해주는 세상. 

  

하나님의 도움으로 진득하게 살고 싶어서 맨 날 교회 가서 새벽기도 하고. “하나님이여, 저쪽 세계에서 인정받게 하옵소서. 저쪽 세상에서 날 쳐내지 말게 하옵소서.” 기껏 우리가 믿음의 내용이 그런 것들입니까? 십자가는 어디로 날라 가 버렸어요? 우리가 싫어한바 된 그 분은 어디로 날라 가버렸습니까? 우리 안에 어디 있습니까? 내가 좋아하는 하나님, 내 소원 들어주는 예수만 믿으면서 “믿으면 구원시켜 주겠지요?” 누구 맘대로? 그게 마귀인데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일방적으로 규정하고 그 다음부터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는, 그러니까 아브람을 죽이는 거예요, 아브람을 죽이고 아브라함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작업을 왜 하는가? 갈라디아서 3장 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여기에 복이라는 말이 나와요. 다시 읽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생소한 믿음이 주어진 것 자체가 이미 복 받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누구한테? 8절에 보면, 이방인에게. 이방인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자기 본토 아비 집을 떠나서 객이 되고 이방인이 되었거든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세계전체를 인간이 원리 못 벗어나는 한계점으로 정하고, 인간세계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그 바깥세계를 따로 설정해놓고 그쪽 세계를 이방세계라고 하는 겁니다. 세상에서 살면서도 이방인처럼 살게 하는데 그 세계는 이미 떨어져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이 생각한, 하나님이 계산하고 꿈꾸는 다른 세계의 백성들은 자기 힘으로는 못 벗어나는데 믿음으로 그 세계에서 이미 끊어졌다는 거예요. 

  

끊어질 때 무엇을 포기했느냐 하면, 자기 행함으로, 율법으로 의롭다 하는 그 자기의를 포기한 거예요. 자기 의를 포기한 그 모습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공생애를 통해서 보여줬던 그 모습입니다. 사람에게 떠밀려서 인간세계 밖으로 떨어져 나가 돌아가신 분, 그 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천국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했는데 다시 찾아와서 예수님이 자기가 갔던 경로를 그대로 우리에게 주입시키니 우리가 본의 아니게 강권적으로 예수님의 복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없던 믿음이 나타나고 주님의 믿음이 우리를 차지합니다. 

  

차지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날마다 우리 바깥으로 주님에 대한 배신과 그리고 불신과 불만스러운 모습들이 나오면서
불신과 우리 속에 있는 믿음과 두 개를 조립해 볼 때
‘아, 내가 바로 약속의 사람이구나.’
강제로 이방인 되게 하셔서 강제로 구원받게 하는 대상자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그 몸의 총화가 ‘믿음으로’, 그게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거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을 믿어서 믿음이 아니라 주님이 찾아와서 생긴 현상이 믿음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믿음이 가짜로 들통 나게 해주시고 사실은 믿은 것이 아니고 주님을 이용한 것이고, 불신과 배신의 원천인 것을 날마다 즐겁게 감사함으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