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아브람과 롯(창13;5-9) 16110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1. 11. 07:40
2016-11-09 20:35:25조회 : 50         
   아브람과 롯 161109이름 : 이근호 (IP:119.18.94.40)   

아브람과 롯(창세기 13:5-9)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gQZGojDNxjc, Hit:3
 이근호16-11-09 21:14 
아브람과 롯 

2016년 11월 9일                             본문 말씀: 창세기 13:5-9 

(13:5)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13:6)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13:7)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13: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13: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는 인간의 진실을 밝혀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오해와 오류만 발생됩니다. 인간 사회에서는 이런 오해와 오류가 쉴새없이 교차되고 있습니다. 아브람 부부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복의 근원’이라는 괜찮은 정체성을 부여받은 아브람은 자신을 지키는 것이 곧 ‘복의 근원’을 지켜내는 사명이라고 여겼습니다. 

그 어떤 경우라고 ‘복의 근원’인 본인의 생에 위기가 와서는 아니된다고 여긴 겁니다. 자기가 죽으면 ‘복의 근원’도 말살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찾아오자 이 부부는 풍족하다는 애굽으로 삶의 터저를 옮기게 됩니다. 그곳은 힘이 있어야 살아남는 곳입니다. 아브람이 내린 조치는 아내를 바쳐서라도 ‘복의 근원’을 유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은 곧 아브람의 입장으로서 최선의 선택입니다. 달리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겁니다. 아브람의 예상대로라면 바로왕을 만족시키게 되면 자신의 가족이 살아남을 여력이 마련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과연 바로왕은 아브람의 아내를 받아들이고서는 아브람에게 풍족한 재물을 선물로 하사했습니다. 

일이 이것으로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의 근원이라는 아브람의 행동에다 모든 것을 일임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셨습니다. 아브람의 예상에 없는 사태입니다. 바로왕이 큰 재앙을 만나게 되었고, 바로왕은 자기에게 난데없이 떨어진 재앙의 이유가 아내의 요건이 되지 못한 여인을 아내를 삼은 것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바로왕은 아브람에게 따지고 묻습니다. “왜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이고 나의 처로 내놓았느냐”는 겁니다. 이러한 따짐의 배후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습니다. 바로왕은 건드려서는 안될 부부를 건드렸다는 후회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브람에게 전에 주었던 재물을 그대로 갖게 하고 애굽에서 추방시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상에서의 ‘복의 근원’의 한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지상에서 자신이 내린 결정이 곧 하나님의 결정이 되는 것이 ‘복의 근원’이 보여줄 신앙이 아니라 도리어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임받은 ‘복의 근원’이기에 자신이 하는 결정이나 선택이 곧 하나님의 결정이요 사전에 예정된 선택이라고 여기는 바로 그것 자체를 수정이 되는 자가 곧 ‘복의 근원’입니다. 

쉽게 말해서 성도라면 이 지상 생활을 통해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데 이 변화는 ‘예상된’ 변화가 아닙니다. 그리고 인간 자신들이 미리 결심하고 각오 해서 달라질 변화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개입은 성도로 하여금, 자기로 인해 피해본 자들에게 도리어 미안하고 죄송스럽게 느끼만한 그런 자기 변화입니다. 

거짓말은 아브람이 했지만 재앙은 바로왕이 당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아브람이 품고 있는 ‘복의 근원’의 위상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식이고 이 방식에 준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 일에 개입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람의 인생은 아브람 본인이 꾸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람의 선택과 결심과 획책이 아브람으로 하여금 ‘복의 근원’답게 하는 직접적인 근거가 되지를 못합니다. 여기서 아브람의 내린 결정은 롯과의 관계에서 밝혀집니다. 애굽에서 받아온 재물과 가축으로 롯과 아브람에게는 풍성함을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가축떼와 더불어 제한한 목축지를 공동으로 사용하다보니 가축을 키우는 실무진끼리 충돌이 있게 됩니다. 

서로 자기 가축에서 좋은 풀과 물을 먼저 먹이겠다고 나서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여기서 아브람은 어떤 결정을 내립니다. 그것은 바로 롯에 대한 보호자 의무를 포기하는 겁니다. 즉 아브람은 조카 롯을 보호하는 보호자 자리에 있고, 롯은 아브람으로부터 보호받은 위치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 관계에서 아브람은 롯을 떼내어버립니다. 그러면 남는 것은 롯의 자리입니다. 그 빈 자리를 아브람은 자신의 자리로 여깁니다. 그러면 본인 자체가 전에 롯의 입장인 것처럼 보호받아야 될 존재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변화’입니다. 그리고 전에 자기 자리라고 여겼던 ‘보호주체의 자리’는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자리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에 의해서 보호당하는 아브람의 운명은 ‘하나님의 예정된 선택’이 구체화되고 현실화되는 그 자리가 됩니다. 창세 전부터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가 곧 성도라는 이 신약시대에서 나타날 그 진리가 구약에서는 벌써 아브람을 통해서 실생활 가운데서 발현됩니다. 

아브람은 롯과 헤어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죄하겠다”는 겁니다. 즉 “나의 자리는 이것이어야 돼”라고 내 선에게 정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결정이나 선택이 자기 인생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정해지지 않았지만 늘 정해진 자리는 나타내는 자리가 곧 자신의 자리요 신앙인이 갈 자리인 것을 아는 겁니다. 아브람은 애굽에서는 다음과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예상했지만 예상되지 않게 예상된 사태’를 말입니다. 즉 아내를 바치면 재물을 얻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 예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예상대로 재물이 주어지게 되면 이 재물을 얻게 된 경로에서 아브람 본인의 선택이나 결정은 배제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 구원도 이런 식입니다. 예정되었지만 예상할 수 없게 진행되는 경로를 통해서 예정된 사태로 인하여 구원되는 겁니다. 이 와중에서 성도의 생각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구원이란 자신이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럼에도 쉴새없이 자신이 구원에서 탈락될 까봐 뭔가 계속 노력하고 결심하고 선택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자기 모습을 보면서, 구원을 바라는 본인이 본인의 구원의 훼방자인 것을 되풀이하면 인식하게 됩니다. 성도는 늘 자신의 빈 자리를 쳐다봐야 하고 그 모든 은혜가 바로 자신이 행함이 끼어들 수없는 바로 그 자리에서 주어진다는 것을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모든 것은 사실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선택과 결심을 믿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6-11-10 16:58 
61강-창 13장 5-9절(아브람과 롯)1611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3장 5-9절입니다. 구약성경 15페이지입니다. 

  

창 13:5-9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교회에서 교리신학을 이야기할 때 예정론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예정론이라 하는 것은, 누가 구원받을지, 누가 구원 못 받을지에 관한 것은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놓았다는 것이 예정입니다. 정해놓을 때 그 선택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운명에 대해서 본인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선택해서 그 사람의 미래를 확정지었다는 이것이 예정론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평소에 인간들이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인간들이 하는 결정은 무슨 의미냐는 말이지요. 아무짝에도 소용없지 않은가? 나의 선택, 나의 의지에서 나온 선택이 나의 구원과 관련성이 없다면 “나는 예수 믿습니다.”라고 선택했고 결정한 그것도 하나님 앞에 결국 소용없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것이 염려스러운 겁니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내가 구원받고 싶어도 주님의 선택이 앞서기 때문에 주님에 의해서 선택되지 않는다면 내가 아무리 구원받아서 천국가고 싶어도 하나님 앞에 거절당한다는 사실을 내가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 굉장히 서글픈 거예요. 되지도 않은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본인에게 절망적이겠습니까? 

  

만일 선택되지도 않은 인간이라면 지금 열심히 예수 믿고 설치는 것들이 결국 다 무용지물로 끝날 것인데 이 쓸데없는 짓을 언제까지 계속 해야 되느냐, 하는 자괴감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을 요구하느냐 하면, 창세전에 누가 선택했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시니까 일단 그것은 하나님에게 비밀로 돌려드리고 그 다음에 뭘 원하는가 하면, 내가 열심히 예수 믿는 이 행위가 주님의 선택했던 그 흔적이라고 좀 목사님이나 주위에서 확인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내가 열심히 예수 믿고, 교회 다니고, 기도한 이것이 구원받은 자, 이미 하나님의 선택된 사람에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누가 옆에서 좀 안심을 시켜줬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그것을 많이 요구하게 되지요. 예정론을 받되 예정론에 대해서 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해놨습니다.” 하는 그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야기하셨더라도 그 이야기는 하나님께 돌려보내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데 신경을 쓸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정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은 소용없는 일이 되기에. 놀아도 구원을 받는데 왜 일을 할까요? 아무 짓도 안하고, 나쁜 짓만 골라서 하고, 사람을 죽이고 또 죽여도 이미 선택된 사람이라면 그 행동과 무관하게 천국을 간다면 까짓 거 이왕 천국 갈 것 원 없이 나쁜 짓 실컷 하고, 남의 것 다 빼앗고, 자기 욕심껏 살고, 죽어서는 편안히 즐기고, 두 가지 다 획득할 수 있으니 이런 횡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또 그럴 용기는 없다고요. 왜냐하면, 나쁜 짓하면서 예정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나중에 천국 가고자 하니까 일단은 염치가 없고 양심에 걸리고, 그 다음에 나쁜 짓을 했는데 천국 간다는 것이 아무리 성경이야기라 할지라도 그게 정답이 아닌 것 같은 느낌들이 강렬하게 밀려오는 거예요. 성경의 뜻이라 할지라도 그거 믿다가 진짜 나쁜 짓 너무 하다가 지옥가게 되면 나만 손해 아닌가, 하는 식으로 안심이 되지를 않는 거예요. 

  

영 믿음직하지가 못해요. 착한 일 많이 하고 예정되었으니 천국 간다, 즉 천국 간다는 것은 예정된 것이고 그리고 착한 일 하는 것은 예정된 자가 착한 일 하게 되어 있으니까 이 두 가지 이야기가 서로 결합이 잘 스무드하고 되니까 차라리 이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겠다는 그런 생각을 누구나 갖게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예정론 안 믿는 겁니다. 예정론을 믿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나쁜 짓을 해도 예정되었으면 구원받습니까?” 그것도 예정론 아닙니다. 그러한 예정론은 개인구원에 입각한, 내가 이러나저러나 살아봐야겠다는 자기의 의도가 깔려있는 채로 나오기 때문에 그것이 성경에 나오는 어떤 하나님의 이론이라도 연결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성경 밖의 인간, 성경을 보면서 자신은 성경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금 성경을 보지만 사람은 살다가 죽어서 사라지면 그만이에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살다 죽으면, 죽고 난 뒤에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하는 것이 성경 밖에서 통용되는 이야기고, 성경 속에 들어가면, 인간은 죽어도 성경테두리 안에서 못 빠져 나온다는 것이 성경이야기입니다. 

  

네가 죽는다고 해서 주님의 음성을 더 이상 안 듣는 것이 아니에요. 죽더라도 나중에 무덤에 가 있더라도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요한복음 5장의 말씀. 그러니까 성경 안에 있는 자기를 발견해야지, 성경을 놓고 자기를 성경바깥에 세워놓고 성경을 어떻게 이용해먹고, 내가 사는데 성경이 어떻게 유용하냐는 식으로 성경을 보는 것은 아무리 봐도 그것은 성경을 이용하는 것 밖에 안 되고 소용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많은 질문을 들었겠습니까? “목사님, 제가 내가 창세전에 예정된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저에게도 수백 번의 질문이 들어왔어요. 내가 확인을 하겠다는 말은 성경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일단 성경 밖의 내가 확정이 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성경이 믿어질 만하면 그제야 성경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겠다는 거예요. 

  

성경을 보기 전에 나부터 먼저 안심이 된 상태에서 ‘이제 성경 좀 볼까? 성경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그렇게 들어가겠다는 겁니다. 이미 구원은 챙겨놓았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니 그런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거지요. 그런 질문이 성립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정되었기 때문에, 선택되었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이것, 그 믿음으로 한 나라가 만들어졌어요. 

  

그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하신 족속이라고 하는 출애굽기 19장에 의해서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전부 다 구원받기로 확정된 유일한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8장에 보면, 그들이 천국에서 쫓겨나요. “어딜 들어와? 천국이 네 나라라고? 누가 그렇게 하던데? 너희끼리 한 이야기지.” 자기들끼리 이야기한 거예요. 

  

인간과 인간들이 맞대고 아무리 의견을 주고받아도 거기에서 해답이 안 나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해답이 안 나오게 되어 있어요. 정답이 안 나오고 진리가 안 나옵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물어보면 될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묻는다고 응답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올 때 비로소 낯선 질문을 하나님에게 하게 되어 있지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먼저 하나님 쪽에서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의 움직임이 먼저 있고 하나님이 찾아온 사람에게는, 어떻게 내가 이런 질문을 할까, 할 정도로 낯선 질문을 하나님에게 해대게 되어 있습니다. 사울에게 예수님이 찾아왔을 때 “주여, 누구십니까?” 평소에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나면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이야기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적이 없지요. 

  

주님께서 찾아오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하는 질문이 나온 거예요. 자기부터 움직인 것이 아니에요. 그동안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기 전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대인들 간에, 인간들 간에 얼마나 의논을 많이 했겠습니까? 인간끼리 많은 의논을 해 봐야 거기서 뽑혀져 나오는 것은, “나는 살아야겠다. 우리는 살아야 됩니다. 죽고 난 뒤에 우리는 천국가야 됩니다.” 이러한 노림수, 욕구만 쏟아낼 뿐이지요. 

  

정답도 모르는 사람에게, 똑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 백날 물어봐야 서로 간에 협상과 정치적 타협만 나오지 무슨 해답이 나오겠습니까? 지난 시간에 아브라함 부부가 약속의 땅에 기근이 들자 애굽에 내려갔습니다. 애굽에 내려가서 아브라함이 한 것이 뭐냐? 인간 대 인간의 의논을 한 거예요. 인간과 인간이 의논을 하게 되면 거기서 인간적인 선택이 나옵니다. 

  

그 선택이 뭐였는가? 자기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이고, 그래서 속이게 되면 애굽에서 목숨 부지하고, 북쪽의 약속의 땅에 들린 가뭄이 없어질 때까지 우리는 여기서 숨이라도 쉬면서 버틸 수 있다는 이것이 아브라함의 선택이었습니다. 거기에 아내 사래가 동의를 했고요. 아브라함이 제안했고 사래는 동의했고 그리고 아브라함부부가 만났던 애굽의 사람들과 애굽의 바로왕도 다 같은 인간이에요. 

  

“참 예쁘구나. 네가 저 누이동생을 나에게 주게 되면 너에게 많은 선물을 주마.” 협상과 거래가 되었잖아요.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나를 선택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선택했는데…….’ 그런 생각은 계속 갖고 있었던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나를 선택했다는 것에 대해서 나름대로 ‘하나님은 선택은 아마 이럴 거야.’라는 생각을 한 거예요.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선택했으니까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 이 지상에서의 나의 선택이 하늘의 하나님의 선택과 일치될 것이다.’라고 생각한 거예요. 왜? 자기는 복의 근원이니까.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 이 지상에서 어떤 일을 선택할 때 그 선택은 곧 하나님이 기대했던 선택과 합치된다고 아브라함은 그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행동에 옮겼던 모든 것 하나하나가 결국 어떤 충돌로 일어났느냐 하면, 하나님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예상한대로 일이 진척되지 아니하고 난데없이 하나님이 바로왕 그 집안에 쳐들어왔습니다. 12장 1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드디어 하나님께서 큰 재앙을 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을 하신 거예요. 뭘 가지고? 나는 너를 복의 근원, 저주의 근원으로 선택했다는 하나님이 선택의 취지가 담긴 하나님의 액션, 행위가 실제로 지상에 침투할 때 여기에 큰 재앙을 몰고 온 겁니다. 그 재앙을 몰고 온 결과가 뭐냐? 16절에,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 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라고 되어 있지요. 

  

자기 마누라를 가지고 성상납해서 부자가 된 거예요. 그리고 20절에,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갑자기 아브라함이 부자가 되었어요. 복을 받은 겁니다. 그런데 이게 아브라함이 선택한 경로를 따라서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예상했던 그 경로는 파탄 났어요. 들통 난 겁니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목숨만큼은 부지해야지, 했는데 예상외로 바로 왕이 자기 마누라는 낚아채고 많은 복을 줬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개입해버리니까 바로 왕이 하나님에 대해서 놀라버린 것이 아니고 더 놀란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의 근원이라고 여기는 아브라함 본인이 자기를 지목한 하나님에 대해서 낯선 면을 발견하고서 더 놀라버린 겁니다. 

  

나의 결정이 하나님의 결정이 아니라는 거지요. 아닌 정도가 아닙니다. 나의 결정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정반대로 조치한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은 알았습니다. 본문 9절에 보면,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롯과 아브라함 둘 다 양과 소떼가 마구 늘어났습니다. 제한된 목축지가 있는데 요단강 근처에 있어요. 베델과 아이성 중간지대라 합니다. 

  

목축지는 제한되어 있고 애굽에서 가져온 선물보따리는 많아서 그것을 롯과 나눴는데 양쪽 다 번창을 했어요. 7절에 보게 되면,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서로 자기 양떼에게 물을 먼저 먹이겠다고 다툴 지경이 되었어요. 이런 다툼이 날 정도의 예상 밖의 횡재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무엇을 생각했는가?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겠다는 것, 아브라함이 자기의 선택권을 조카 롯에게 넘겨주는 것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정신적 변화가 일어난 겁니다. 그 변화가 뭐냐? 자기가 보호해야 할 롯의 자리를 롯의 자리가 아니고 자기 자리로 삼아버립니다. 그러면 자기가 있던 자리는 빈 공터가 되지요. 공백이 됩니다. 내가 선택함으로 내가 복의 근원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나는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당하는 자리가 나의 자리가 됨으로써 날마다 새롭게 선택하실 그 분을 본래 있던 나의 자리에 두기 위한 빈자리가 마련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전에는 아브라함이 롯을 보호했어요. 조카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시했으니까. 그러면 자기는 롯을 보호해야 되고 롯은 보호받는 자리에요. 그러면서도 아브라함은 “롯아, 걱정하지 마라. 내가 복의 근원이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실 거야. 가뭄 들어도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떤 노력과 수단이라도 다 해서, 내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여서라도 우리 집안 안 망하게 가장으로서, 책임자로서 내가 가장으로서 다 할게.” 

  

그래서 실시한 것, 자신의 최선의 방안으로 생각한 것이 자기 아내를 바로 왕에게 바쳐서 커미션 받아 챙겨서 목숨이나마 부지하려고 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선택과 결정을 그대로 하게 하되 주님께서 거기에 개입을 한 거예요. 바로 왕에 대한 하나님의 재앙으로 개입한 겁니다. 

  

그러면 그 재앙은 사실은 바로 왕에게 떨어진 재앙인 동시에 아브라함 본인을 내려치는 본인의 재앙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왜? 본인이 잘못했기 때문에. 바로 왕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자기는 사기 친 것이 없어요. 사기는 누가 쳤는가? 바로 왕에 본인이 사기를 쳤지요. 자기 아내면서도 누이동생이라고 장담한 거예요. 그 말 믿은 게 바보지요. 

  

바로왕은 그저 그걸 믿고 받았는데 마땅히 아브라함 본인에게 떨어져야 할 재앙이 바로에게 떨어져 버린 겁니다. 얼마나 미안했겠어요. 잘못은 자기가 해놓고 벌은 다른데서 받고.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내 편에 서신다면. 전에는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당당했겠어요. “하나님, 나를 지목해서 선택했으니까 이제는 저에게 모든 것을 일임해주세요. 제가 똑바로 행동할 테니까 그런 행동을 할 때마다 복 주시면 됩니다.” 이렇게 얼마나 자신만만했겠습니까? 

  

그런데 자기 딴에 똑바로 해서 스스로 살아보겠다고 한 그 짓이 애매한 타인에게 재앙이 떨어지게 만든 책임이 있다면 결국 나의 자리란 무슨 자리인가? 나의 자리는 내가 선택하고 결정한다고 해서 내가 복의 근원이 될 수 없는 입지에 있음을 밝혀내는 자리가 되겠지요. 

  

이것은 아까 제가 처음에 했던 질문과 같은 질문입니다. “목사님, 하나님께서 예정한 사람인 것을 제가 어떻게 압니까?” 이미 묻는 의도가 “하나님의 예정된 자라면 예정된 자답게 똑바로 살아드리겠습니다.”라는 의도가 밑에 깔려 있어요. 자기의 본질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처럼, “나는 복의 근원이다.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날 예전부터 선택해서 구원했기 때문에 이제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하나님의 뜻과 합치되는 일일 것이다.”라고 착각해서 벌이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는 수정하고 그게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이 개입하심으로서 선택된 자에게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정리해 봅시다. 어떤 사람이 창세전부터 예정된 사람입니까? 변화가 일어나야 될 사람입니다. 변화는 어떤 변화인가? 내가 성경 속에 있는 하나님을 분석하고 연구하고 탐구하는 자가 아니라, 나는 성경바깥에서 성경 안을 연구해서 이게 좋다 싶으면 믿고 안 좋다고 하면 안 믿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인간이 아니고, 성경 속에서 나를 발견하게 되면, 내가 지옥가든 천국가든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고 내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여기 살아가지만 내가 살아가는 것이 내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감지덕지하고 황공스러운 심정으로 받아줘야 되는 것입니다. 몸이 아프든 건강하든, 애가 말썽을 부리든, 학교를 가든 안가든, 이것이 내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인 거예요. 내일이 따로 있고, 성경 잘 믿어서 내 뜻대로 잘 해볼까, 라는 수작을 부릴 어떤 여지를 주지를 않습니다. 성경 속에서 너를 발견하라. 

  

애가 안 죽고 살아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해야 돼요. 잘 먹고 잘 뛰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모든 것이 감사할 뿐이지요. 왜냐하면, 애가 잘 먹고 잘 뛰는 것이 내가 공들여서 나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서 이만큼이라도 애가 잘 된 것이 아니거든요. 우리는 항상 성경 안에서 우리를 발견한다고 하면서도 늘 평소의 생각은, 내 결정과 선택을 해놓고 그 다음에 성경 안에 있는 하나님한테 결재 받고 재가 받는 식으로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극히 인간적인, 인간 대 인간이 하는 행세를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내 인생에서 내 손을 떼야 되는데 내 인생에서 손을 뗄 능력도 없고 그러한 방법도 몰라요. 방법도 따로 없어요. 분명히 주님의 인생이고 주님의 몸인데 꾸역꾸역 이것은 내 인생이고 내 몸이라고 우기고, 내가 관리하고, 내가 조종하고, 내가 계획 잡으려고 하는 이것을 고수하게 되는데 이 고수하게 되는 것을 주의 뜻대로 변경할 수 있는 재주나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 점에서는 우린 아브라함하고 똑같아요. 안되면 어떻게 하는가? 안되니까 주님께서 개입하잖아요. 어떻게? 잘못은 내가 했는데 피해는 남이 보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잘못은 아브라함이 했는데 피해는 남이 보고 그 피해덕분에 예상했던 예상 밖의 복을 받습니다. 예상했던 예상 밖의 축복. 내가 아내 바치면 이 정도는 바로가 나에게 복을 줄 거야, 라고 예상했는데 그 복이 오기는 왔는데, 그 방법이 내가 예상한 경로를 따라서 온 것이 아니고 예상 못한 경로를 따라서 오는 식으로 복이 왔을 때, 내게 주어진 모든 여건과 환경은 나의 것이 아님을 또 다시 우리는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상황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 다른 이유 때문에 나에게 덧입혀 진 거예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이 말은 이미 영광이 도착했고 이미 도달되어 있다는 겁니다. 착한 일을 해서 영광돌리라는 말이 아니고 지금 여기 있는 것 자체가 주의 것입니다, 라는 것보다 더 착한 일은 없어요. 

  

이것가지고 반듯하게 살겠습니다, 가 아니라 “이것 할 때 그 이것에서 네가 손을 떼라.” 하는 거예요. 그게 네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것이 내 것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또 나의 선택과 나의 결정과 나의 의지와 나의 욕구와 포부와 기대와 소망이 마구 섞여 들어가는 거예요. 섞이게 되면 거기서 자기의 고집을 우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만큼 했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해 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나올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롯의 자리에 아브라함을 옮기기 위해서, 하나님의 낯선 개입으로 아하, 내가 롯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오히려 하나님에게 보호받아야 될 롯의 자리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따라서 롯과 만나고 난 뒤에는 롯과 헤어지도록 주님께서 헤어지도록 주님께서 조치를 하셨습니다. 

  

그 조치가 7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서로 다퉜다고 하는 거예요. 함께 할 수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복을 받아서 함께 살면 참 좋겠는데 서로 다툰 거예요. 그래서 인생이라 하는 것은 살아가면서 본의 아니게 다툴 수밖에 없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경우는 뭐냐? 상대를 죽은 존재라고 생각해야 돼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우리가 세상 살면서 이 사람이 어떠니, 저 사람이 어떠니, 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너무 간결하게 인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경 안에서 인간은 복음을 모르면 죽은 자입니다. 복음을 모르면 죽은 자에요. 복음을 모르는 사람과 헤어진다. 그동안 귀신하고 살았는데 이제 귀신하고 헤어진다고 보시면 됩니다. 

  

일말의 미련이나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돼요. 그런데 사람들은 누구를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을 통해서 자기 잘남을 증명하고 싶어서 그 사람에게 사랑과 애정을 퍼붓습니다. “내가 이 정도로 너에게 애정과 관심과 사랑을 베푸니까 너는 이제 내가 준 나의 가치를 잊는다면 너는 인간도 아니야.”라고 상대에게 자꾸 기대를 하게 돼요. 특히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울고불고 난리지요. 헤어지고 못살겠다고 하는데 이게 전부 다 ……, 설교 처음에 이랬어요. 인간 대 인간에게는 자기의지, 자기선택밖에 없어요. 복음이 없습니다. 복음은 하나님 쪽에서 개입할 때 “주여, 누구십니까?” 하는 질문을 통해서 새롭게 출발하는 것입니다. 인간 대 인간에서의 모든 만남은, “하나님, 이렇게 안 믿는 가정을 만났는데 이제 복음 주셔서 믿게 하옵소서.” 복음 핑계대지 마세요. 이것은 헤어지기 싫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해서, 내가 퍼부은 정성과 사랑이 아까워서라도 내가 그 사람을 놓치기 싫다는 거예요. 개 키우다 개 죽으면 그렇게도 울잖아요. 그런데 개가 무슨 복음을 압니까? 난초 키우다가 물을 그렇게 주는데 시들시들 죽어가요. 꼭 우리교회에서 키우는 화초 같아요. 우리교회는 뭐 키웠다 하면 다 죽어요. 물 너무 줘서 죽이고 너무 적게 줘서 또 죽이고. 죽으면 얼마나 아깝습니까? 

  

바로 아브라함이 롯을 그렇게 키운 거예요. “걱정하지 마라. 내가 복의 근원이다. 내가 너 하나 책임 못 지겠어?” 이것은 자기 아내도 마찬가지에요. “여보, 나를 믿어. 내가 남자야, 남자.” 남자가 무슨 하나님인가? “내가 남자야. 이것만 양보해주면 다 되는 거야. 우리 집안 잘되라고 하는 거니 네가 잠시 바로 왕과 잠자리를 해라. 이러면 우리가 산다. 우리가 보기에 최선의 길은 그것밖에 없어. 안 그러면 우리가 살길이 없어. 가나안땅에는 가뭄이 들어서 더 이상 여기서는 못살아. 그러니까 우리가 버티고 살아야지.” 이런 식으로 했을 거잖아요. 

  

그게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변화가 없으면 성도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누구나 시작은 그렇게 하되 거기에 변화가 일어나야 돼요. 그런 짓거리 하면서 그동안 살아온 그것을 주께서는 뻔히 알고 있다는 거예요. 네가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는 것은, 그렇게 못났고, 부족하기에 주님으로부터 보호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내가 나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를 보호하고 내 주변을 보호하는 자리에서 내가 얼른 떠나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떠나지를 못한 겁니다. 롯에게 선택권을 줬어요. “어떻게 할래?” 롯을 보니까 롯이 무엇을 선택하느냐 하면, 10절에 나옵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그게 소돔과 고모라 땅이에요. 

  

얼마나 그 땅이 좋은지 그 땅은 모든 사람이 탐을 내는 땅이에요. 13절에 보면,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그 당시에 소돔과 고모라 땅만큼 좋은 땅이 없어요. 누가 선택해도 제일 좋은 땅입니다. 목축지도 좋고, 요새말로 하면, 대구 동승로 번화가지요. 그 땅을 중심으로 다섯 왕과 아홉 왕이 서로 차지하려고 벌이는 전쟁이 있었으니 그게 소돔과 고모라전쟁이에요. 

  

나중에 아브라함이 거기 개입합니다. 미리 말씀드릴게요. 아브라함이 롯을 떠나보내고 롯의 자리에 본인이 서 있으면서 아브라함이 자기가 있던 그 빈자리에 누가 등장하는데 멜기세덱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예정된 선택이 하늘에 붕 떠 있는 관념이나 추상이 아니라, 실제로 이 지상에 예정된 선택의 뜻이 아브라함 주변에서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하고, 드디어 번지기 시작하고,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창세전부터 예정된 선택자의 그 특이성, 특징들, 선택된 자만 체험할 수 있는 경험, 아브라함은 구원받은 자의 변화를 유도하게 되고 변화를 야기하게 됩니다. 어떤 변화? “내 인생은 하나님께 맡깁니다. 내가 선택해서 내 인생 꾸려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에 의해서 나는 모든 것을 맡깁니다.” 그런데 맡긴다고 해서 하늘보고 맡긴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변에 있는 복음 모르는 사람들, 자기도 마찬가지지만 저쪽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그저 코앞에 있는 잘 먹고 잘살겠다는 사람과 더불어서 함께 있다가, 복음을 모를 때는 어차피 헤어져야 돼요. 

  

성경 안의 세계는 둘로 나눠지잖아요. 헤어질 때 기준은 어디 있는가? 그 기준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갈라지면서 그 갈라진 경계선에서 밑에서 솟아 올라와요. 그동안 우리가 엉덩이로 그것을 가로막고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의 예정된 선택을 자꾸 위에서 찾으면서 “목사님, 가르쳐주세요. 어떤 식으로 예정되었는지요? 예정된 자는 누구입니까?” 자꾸 하늘을 보고 묻는데 사실은 본인이 깔고 앉았어요. 

  

내 인생은 내 것이다, 턱하니 깔고 앉아서 그런 생각을 하니까 그 기준이 눌려서 안보였던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주변에 예상 밖의 경로로 인도를 하니까 그동안 엉덩이 털면서 나와 보니까, 지금까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천국 길로 꾸준히 인도해 왔어요. 그 인도해 온 그것이 나로 인하여 숨 막히고, 나로 인해서 무시당하고, 내가 시답지 않게 여기고, 나는 내 욕망대로 내 선택에 의해서 좋아한 사람만 얼싸안고 좋아했지 나를 지적하고, 나의 허점을 이야기하고, 나의 욕심을 지적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멀리했습니까? 

  

내가 멀리했던 그 사람이 있던 자리, 내가 보호하고 싶지도 않은 그 자리가 바로 주님이 나를 구원하는 주님이 계신 자리인 것을 우리는 몰랐던 겁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였는데 자기가 잡아 죽인 사람이 믿는 그 예수가, 본인이 핍박했던 그 예수가 자기를 창세전부터 예정하고 구원하기로 작심하신 그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인 것을 사울 자기 능력으로는 알 수가 없었지요. 찾아오니 아는 거예요.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을 찾아왔습니까? 찾아왔다면 사울과 똑같은 체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나 스스로 구원받고자 하는 이 노력과 시도가 주님을 얼마나 가슴 아프게 만드는 악마적인 시도인 것을. 쉽게 말해서 교회 다녀서 구원받겠다는 이것이 악마의 일인 것을 왜 진즉에 몰랐습니까? 기도해서 구원받고, 헌금해서 구원받고, 교회 봉사해서 구원받고, 전도해서 구원받고, 예배 바르게 드려서 구원받고, 가정을 잘 돌봐서 구원받겠다는 이 모든 시도가 주의 일이 아니고 악마의 일인 것을. 

  

그 밑바닥에는, 이런 식으로 내가 기어이 구원받아야지, 라고 시도하는 그 시도, 그것을 사자성어로 ‘보람상조’라고 합니다. 자기 죽을 때를 대비해서 적금 붓듯 하는 보람상조. 보람상조 가입하면 안마기 줍니다. 해외여행 보내줍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 나와서 보람상조 회원가입하게 되면 나중에 죽고 난 뒤에 뭔가는 혜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거 나입니다. 바로 그것이 내가 스스로 내 힘으로 수작을 부리는, 악마가 시키는 대로 수작을 부리는 악마의 일인 것을 알게 될 때에…….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다,”고 했거든요. 그것은 자기가 보호해야 될 롯에게 물었다면 이제는 자리를 바꾸어서 “주께서 우하시면 나는 좌하고 주께서 좌하시면 저는 우하겠습니다.” 

  

그래야 항상 주님의 돌보심이 눈에 보이는 자리, 내가 나를 보는 자리가 아니고, 내가 있던 그 앞을 바라보는,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인도하고 내일 되면 어떻게 인도할지, 주님이 크게 보이고 나는 주님이 바라보이는 대상자가 되는 그 자리, 내가 잘못된 길로 좌할 때 주께서 우해서 이끌어 가시는 그것이 늘 새록새록 느껴지는 그 자리가 이미 나의 선택이 아니고 주님의 선택에 의해서 나의 선택과 늘 충돌하면서까지 우리를 늘 건져내시고 이끌고 계시고 구원해 내시는 겁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자리에 드디어 멜기세덱이, 진짜 구체적인 인물이 보다 세밀하게 보다 더 깊은 예수님의 본질을 가지고 주께서 다음 사건들을 아브라함을 위해서 준비해 두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매일같이 선택하는 그 선택의 질과 그 성질이 그리고 그 의도가 참으로 수상하고 악마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패로 해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저희들 날마다 실패하게 해주시고 그 실패가 주님의 성공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