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14 요한1서 버지니아강의19-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이미 선악과 따먹고, 사탄의 속성을 그대로 물려받았죠. 그렇다면 이제 사탄은 영적존재로서 뭘 아느냐 하면, 하나님을 알아요. 그러면 사탄이 신에게 대들었다는 말은, “니만 신이냐? 나도 신이 되겠다.” 해서 반발했고, 더 사탄이 아는 것은 뭐냐, 단순히 신이 되겠다는 도전이 아니고, 누가 주가 되느냐에 대해서 사탄이 알고 있어요. 독생자 예수님을 주라고 승격시키신 것에 대해서 사탄은 반발합니다.
그래서 무덤사이에서 귀신들린 청년이 나와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여, 당신이 무슨 일 때문에,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압니다.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왔죠?” 라고 먼저 언급하죠. 예수님께서 “쉿! 조용히 해라. 니만 알고 있어!” 이런 식으로 대화가 나오는데, 모든 인간은 속성상 최종적인 자리에 본인이 있어야 되지, 본인 말고 다른 사람이 있으면 인간은 만족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최종적인 자리에 가야 만족하는데, 그것은 뭐냐, 이 세상이 사탄의 세상이기 때문에 사탄의 성격과 맞아야 살아요.
“목사님. 어떻게 삽니까?” 사탄의 마음을 가지고 사시면 살 수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그런 식으로 살면 돼요. 그런 식으로 모든 게 교육되어지고. 그럼 사탄의 생각을 유지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 십자가만 외면하면 돼요. 그래서 편안히 주일날에 교회 가고, 평소에는 자기 직장가고. 아무 일도 없죠. 고민거리도 없고. 왜? 교회에서 십자가 복음이 안 들려지니까. 행복을 만끽하죠.
십자가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곧 성령께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누굴 책망해요? 이 세상을 책망하거든요. 이 세상은 곧 멸망하고 불로 타기 때문에, 그걸 통보해주는 건데, 그 통보를 귀 막고 안 듣겠다는 거예요. 제발 좀 부정적 이야기 하지 말고 긍정적 이야기를 해줘야 행복이 유진된다는 겁니다. 행복이 유지된다는 말은 내가 지향하는, 내가 최고라는 것에 대해서 가로막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유교적 분위기 속에서 남자들의 가부장적인 특징이 뭡니까? 옳고 그름이 아니에요. “내가 말하고 있는데 니가 중간에 왜 토를 달면서 입을 여느냐?” 이 말이죠. “내 이야기 끝나고 난 뒤에 ‘예’ 라고 해야지 어데? 하늘같은 남자가 이야기하는데 여자가 끼어들어서 재수 없게?” 그리 이야기하죠. 그래서 얼마나 분했으면 어떤 tv프로그램에 김숙이라는 개그우먼이 있어요. 김숙이 옆에 있는 윤정수 보고 나무라는 거예요. 어떻게 남자의 목소리가 담을 넘어가느냐고 나무라고 있어요. 이게 어디 남자의 목소리가 담을 넘어가? 무엇의 패러디냐 하면, 여자의 목소리는 담을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가부장적인 것을 패러디로 이제 김숙이 반대로 하는 거예요.
결국에 모든 인간은 서로 고립자가 되어야 하는데, 다만 고립자가 되기 위한 힘을 비축하기 위해서 고개 숙이는 척, 아부하는 척, 양보하는 척하고 다들 무슨 놀이? 천사놀이 하고 있는 거예요. 수모를 당하면서 상대방을 마귀로 만들고, 자기는 거기에 대해 참고 있고, 저쪽이 마귀 되면 이쪽은 불쑥 천사에 가까워지겠죠. 백설 공주 라는 동화를 아시죠? 그 동화가 오늘날 상당히 문제가 돼요. 뭐가 문제냐 하면 백설 공주가 자기를 돌봐준 일곱 난장이를 버렸다는 사실. 얼마나 못됐는지. 결국 결혼은 누구하고 했습니까? 이웃나라의 왕자하고 했죠. 그럼 일곱 난장이는 뭐가 돼요? 결국 결혼은 외형보고, 외모보고 하는 거예요. 돈보고 외모 보고 하는 거예요. 도움 받는다고 도움 주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사탄은 기존의 하나님의 체제에 반대해서, 독자적으로 내가 따로 나서는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가 따로 주가 되겠다 하니까, 주가 될 독생자 예수님과 주가 되겠다고 한 사탄과 이 전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사탄과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고, 잠재적인 주가 되시는 예수님과 전쟁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는 하나님과 마귀하고 싸운다는 거예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주권사상 때문에, 신의 주권사상을 깨부수는 것을 마귀라고 보는데, 그러면 알라, 이슬람 종교의 특징이 뭐예요? 알라의 주권사상이잖아요.
그들이 사람 죽여 놓고 하는 소리가 뭡니까? 신은 위대하다. 모든 게 주의 뜻이다. 그런 뜻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들 세계에서 보기에 사탄은 뭐예요? 하나님의 하신 일에 토 달지 말자, 그리 되잖아요. 그러나 그것은 인간들이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그럴싸한 논리지만 실제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반대하는 것이 사탄입니다. 악마는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요. 그러나 예수님이 활동하시고 예수님의 주되심의 활동을 나타내면, 그 현장에 그걸 극구 반대하면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사탄입니다.
그 한 예를 들어볼까요? 고린도후서 11장,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수정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우리가 어디서부터 고쳐야할지, 참 많아요. 고린도후서 11장 3절에 보면, “뱀이 그 간계로 이와(하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제가 12년 가까이 시골에 있으면서, 아무리 설교해도 이 할머니들이, 여기 본문이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잖아요. 사탄이 그리스도와 관계있는데, 할머니들한테 물으면 꼭 하나님이라고 해요.
“그리스도를요?” 그리스도라는 말이 안 나오고 꼭 하나님이라고 보는 거예요. 왜? 목사들이 그리스도를 2인자로 가르쳤기 때문에. 이왕이면 2인자하고 상대할 것 같으면 1인자하고 상대해야지. 재벌총수하고 상대해야지 재벌아들하고 상대해서 뭐하려고요? 기본에 깔려있는 것이 뭐냐 하면 조물주, 절대자, 그것이 이름이 바뀌어서 하나님. 그러면 하나님 잘 섬기면 구원받는다. 이게 토대가 되어 있습니다. 그게 사탄의 종교인데. 참 이걸 분명히 하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요. 전부 다 쉽게, 쉽게 하나님 생각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1장에 보면 누구나 하나님을 알아요. 그러나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 아니하고, 다 하나님 안다 이 말이죠. 하늘의 별 누가 만들었겠어요? 하나님이 만들었고, 저 천지창조도 하나님이 했겠지. 유대인도 그렇고 힌두교도 마찬가지고, 불교도 마찬가지고 천주교도 마찬가지고, 모두 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믿는데, 정작 하나님의 일은 너희들이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스라엘 야곱의 혈통에서 나온 어떤 특정인물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인물이 만유의 주가 되겠다는 것이 하나님이 짜놓은 원대한 비밀이고 스케줄이에요. 이게. 원대한 프로젝트가 이겁니다. 예수님을 주로 올리는 것이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대한예수교장로회로 나와야지, 대한하나님교회 나오면 이미 수상한 겁니다. 순복음과 대한하나님교회요. 어차피 2인자를 딛고 1인자로 나와야지, 이래서 2인자를 무시하는, 2인자 딛고 나온다는 거예요. 이거는 뭐냐 하면 자기 개인구원에 욕심이 있어가지고, 그냥 하나님을 이용하는 겁니다.
이게 안 되니까 말씀도 관심도 없고, 성경도 관심이 없는 거예요. 이게 안 되니까. 자꾸 하나님을 안다는 거예요. 상식적으로, 교양적으로, 마음적으로, 심적으로, 양심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면 정성만 다하면 돼요. 그러나 예수를 안다는 것은 십자가 앞에 자기를 죄인으로 드러내야 해요. 어떤 것을 해도. 어느 쪽이 편하고 어느 쪽이 마음이 수월해집니까? 사람의 노동을 알아주는 쪽이 좋지. 실컷 해도 죄라고 하는, 이거는 언뜻 다가서지 않는 거예요. 다가서봤자 또 마찬가지에요. 다가섰다고 또 보상이나 대가 내놓으라고, 이게 마찬가지인데.
그래서 성령께서는 뭐냐, 예수의 이름으로 오셔가지고 진짜 성령세례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게 되어 있어요.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야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지 못한다고 되어 있잖아요. 모든 것이 관련된 것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11장에 4절에 보면,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한 번 적어볼게요. 사도바울이 다른 예수라고 하죠. 부처 믿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고, 예수 전했는데 보니까 다른 예수라 이 말이에요. 다른 영. 성령을 그렇게 강조하고 성령, 성령하면서 삼위일체 강조하는데, 보니까 다른 성령을 이야기하더라는 말이죠. 고린도교회가. 또는 복음, 복음하면서 다른 복음을 전하더라는 말이죠. 자, 이걸 사도바울이 증거 할 때에, 이 증거 함을 받은 그쪽 목회자나 교인들이 사도바울한테 뭐라고 대들겠습니까? 우리가 다른 예수라면, 그 고린도교회가 “여러분 우리 다른 예수 전하겠습니다.” 이렇게 했던가요? 아니죠. 예수 전하죠. 성령 전하고. 참참참~ 참 복음 전한다고 하고. 순순순~ 순 복음 전하는 줄 알고. “여러분 우리가 다른 복음입니다.” 이렇게 안 하잖아요.
그렇다면 이렇게 지적하는 사도바울보고 뭐라고 대꾸하겠느냐 말이죠. 진짜예수, 진짜성령, 진짜복음의 기준이 뭔데? 기분 나쁘다 이거죠. 그런 소리하는 거 보니까 니는 진짜예수, 진짜성령, 진짜복음을 안다는 이야기인데, 그럼 니가 제시하는 진짜예수, 진짜성령, 진짜복음은 뭔데? 하고 대들겠죠. 그럼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답변을 해야 되겠죠. 사도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사도다” 사도라고 해요. 사도.
사도이다. 사도는 열두 사도가 있는데, 열두 사도가 죽으면 뭐도 없어지느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없어져요. 성경이 마감이 됩니다. 성경편집이후라고 보면 돼요. 물론 성령께서 그러게 배후에 작용을 하지만. 그들의 말이 아니라, 사도가 하는 말이 다 성경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이 다 성경이 아니고, 성령께서 편집한 것만 성경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성경이라고 하면 안 돼요. 그건 더 보태는 거고. 성경에 나오는 것만 성경이지, 이거 말고도 예수님 말씀이 있다고 해서 그걸 고고학적으로 발굴했다고 해서 성경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중간에 성령께서 확정지어 나간 거예요.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과 만남을 주선하는 그 안에서 이 책 외에는 없다고 확정지어 놨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배제하고 나면, 성령을 빼고 나면, 우리가 예수 믿으려면, 예수님에 관한 정보를 더욱더 수집해야 하는데, 도대체 얼마를 수집해야 정확한 예수상이 규합되겠습니까? 이만큼 정보를 모아서, “자 그러니까 예수다.” 라고 했는데, 만약에 몇 년 뒤에 또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상황이 나타나 가지고 쭉 한다면, 지금까지 한 것은 예수는 미흡한 예수고, 미흡한 예수 믿으면 그거 구원받겠어요? 온전한 예수를 믿어야지.
그럼 온전 이라는 말은 누구 소관입니까? 성령께 속하잖아요. 아까 요한일서 5장에 보면 하나님께 속한 자는 죄 짓지 않죠. 이거는 뭐냐 하면 성령과 함께 거하기 때문에 그래요. 완전, 온전 이라는 말은 인간이 쓸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나 성령이, 예수님 쪽에 계신 성령이 하시는 말씀이거든요. 죄 짓지 아니하고 완전하다는 말은 성령 안에 거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면 이야기해봅시다. 니가 이렇게 예수알고, 성령알고 복음 안다는 소리인데, 그럼 니가 아는 예수, 성령, 복음이 맞고, 우리가 틀렸다면 니는 무슨 예수, 무슨 성령, 무슨 복음이냐? 할 때, 사도는 자기가 사도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희는 목회자이지만 나는 사도라는 거예요. 사도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의 발자취가 됩니다.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견해 같은 것이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계시에요. 그럼 일반적인 사람들의 행동과 사도의 행동의 차이점이 뭐냐, 일반적인 행동은, 일반적인 모든 사람들의 행동은, 그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로 마감이 되지만, 사도의 행동이 계시가 돼버리면 사도가 이렇다, 저렇다가 아니라 예수님이 이런 분이구나로 규합이 돼요. 이걸 오해한 자가 신천지 이만희입니다. 행함이거든요. 성경을 행하게 되면 여러분들은 개인구원 받습니다. 개인이 모인, 개인구원이 되는 신천지를 집단구원이라고 이렇게 주장하는 거죠.
근데 이 성경이 개인구원 목적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까? 제가 아까 했죠. 성령이 아니고서야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 못하죠. 성령의 뜻은, 내가 잘 믿는다, 내가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관련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누구신가? 그것만 알면 그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의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근데 이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애들 공부한다고 바쁜데, 인터넷 다음에 보니까 “세상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야자시키냐?” 이래 나왔어요. “애들 대피시켜야지 지진이 일어났는데 애들 공부시키냐?” 해서 문제가 됐는데, 애들 야간학습 왜 시킵니까?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시킵니까? 고립자라고 했잖아요. 고립자. 내 집안은 독특하고 절대적이고 뛰어나다. 그걸 증명하고 싶어서 자기 자식들 그렇게 시키잖아요. 근데 거기다가 무슨 사도바울의 편지가 먹혀들겠어요? 지금 사도요한은 기적을 바라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기적을 바라고. 기적이라는 것은 날이면 날마다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요나가 물에 빠졌습니다. 그 지점에 누가 물에 빠져보세요? 고래가 삼키는지. 사건이라는 것은 일어났다 사라지면 그 현장에 사건이라는 것은 없어요.
예를 들면 방금 우리가 점심때 콩국수 먹었죠. 그 콩국수를 지금 만들어보세요. 그 콩국수 맛이 안 납니다. 왜냐하면 콩국수 먹는 그 맛과 관계없이 콩국수 만들면서 수다 떨고 좋았던 분위기는 어디서 수입합니까? 중국에서 수입해요. 그때 그 상황을 그대로 재현이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까? 불가능해요. 왜? 사건이기 때문에. 사건은 한번 휙 나타났다가 휙 사라지면 없는 거예요.
우리 인생? 인생이라고요? 사건입니다. 있다가도 없어지면 없는 거예요. 결국 누구나 있어도 늙어죽으면 없어지죠. 결국 인생이라는 것은 없는 겁니다. 그럼 나는 뭡니까? 나는 없는 거예요. 나는 없는데 여기 생겼으니까 이건 사건이다 말이죠. 내가 존재하는 것 자체도 감사해야 해요. 왜? 나라는 것이 없어야 되는데, 여기 빨간 티 입고 앉아계시잖아요. 이것이 사건이에요. 지금 동영상화면이 흐릿해졌어요. 이것도 사건입니다. 껐다가 한 번 새로 해보세요. 동영상 두 개 올리면 돼요.
사도가 전하는 것은 예수님의 주되심입니다. 자, 그러면 제가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예수님을 그 전처럼 하나의 사건으로 모으면 돼요. 무슨 사건이냐? 사람들은 예수님이 계시다고 보지만, 예수님이 계신 자체가 사건인데, 누구한테만? 성령 안에 있는 자만 이게 사건이 됩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한테만, ‘아! 예수님이 먼저 계셨음에 내가 있었구나. 예수님 있음에 짧은 인생이지만 살아가는구나.’ 이걸 아는 겁니다.
자,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성령의 취지와 활동의 목적은 예수님의 주되심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그 목적을 위해서 예수님 먼저 오셔가지고, 주 되실 때까지 계속해서 돌봐주시는데,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보혜사라고 합니다. 보혜사. 돌봐주는 것. 이걸 다른 말로 하면 간호사라고 하거든요. 간호사, 돌봄이 없으면 예수님이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을 수 없어요. 그 보혜사 말고, 이제 예수님이 승천하시는데 다른 보혜사, 이미 예수님이 주 되신 이후에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그리스도가 주 되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지, 우리 개인구원을 위해서 성령이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 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주되심과 관련된 충만이지, 나 신앙생활 잘하라고 주는 충만이 아니에요. 예수님을 잊어버린다든지,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 하지 못할 때, 주께서 역사하사 충만케 하는 겁니다. 내가 잘되는 것하고 관계없어요.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놀랍게도, 아이러니하게도 성령이 충만했어요. 두 번만 충만하면 다 죽겠다. 충만해서 돌 맞아 죽었어요. 충만해서.
이런 이야기가 교회에서 설교하면 무슨 위로가 되겠어요? 위로가 안 되어야 되죠. 왜? 그들은 사탄의 마음이니까. 지금 사탄의 마음에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 하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남을 자는 남고, 들을 자는 듣자. 갈라면 가라. 이거 다 배짱장사다. 배짱장사. 뭐 장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도바울이 사도행전 마지막에 배짱장사 한 거예요.
고린도후서에서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나는 사도인데 어떻게 살았는가, 나는 죽음의 길만 찾아갔어요. 강도의 위험과 도적의 위험과, 사도바울은 주기도문도 못 외웠는가 보죠. 주기도문에 일용할양식이 있잖아요. 사도바울은 일용할 양식도 없어요. 일용할 양식도 없을 때,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하나님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얼마나 근심되겠습니까? 주의 일 하겠다는데 뭐 도와주지를 않아요. 뭐 내일 하겠다고 하는 겁니까? 주의 일 하겠다는데 양식이 없어요.
사도바울이 성령에 충만했어요. 그런데 어떤 선지자가 하는 말이 “당신이 예루살렘에 가면 지금 잡힌다. 가지마세요. 잡히니까 가지 마세요.” 하는 것이 그 사람의 해석인데, 사도바울은 “그래, 그럼 가서잡혀야지.”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잡힌다는 소리를 듣고, ‘아, 지금 제 코스로 접어들었네.’ 네비게이션에서 이랬어요. 지금 예루살렘에 가시면 잡힙니다. turn left! turn left! 잡히는 쪽에 가지마세요. 잡히는 쪽으로 가니까, turn right! turn right! 그러니까 잡혀야죠. 하늘나라는 환란 없이는 갈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개인구원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는 모습을 주님이 가고 싶어 하는 거예요.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사건이기 때문에. 사건은 순간이거든요. 긴긴 세월의 인생이 이게 응축이 돼버리면 하나의 거대한 사건이 되니까, 사건 자체에 주님은 주님으로서 또 작용을 하는, 이러한 관계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오늘 요한일서 2장에 들어가 봅시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크게 쓸게요. 사귐입니다. 사귐의 반대말은 고립자.
모든 세상의 힌두교나 모든 이방종교는 특징이 고립이에요. 심심해서 미쳐요. 고립되어 있어요. 신이라고 하는 것은, 둘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최고의 산이 있으면 제일 꼭대기에 있어야 해요. 제일 꼭대기에 있는 산은 가끔 영화 보면 나옵니다. 파라마운트 픽쳐스, 파라마운트사 영화 보면 제일 꼭대기 산이 나오죠. 파라para는 초월한다는 뜻이에요. 산을 초월하는 최고의 꼭대기. 이게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입니다. 왜 사람들은 신을 이렇게 그릴까요? 본인이 그 자리를 은근히 염원하고 기다리기 때문에.
그 특징은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사건이 하나 있어요. 무슨 사건입니까? 바벨탑. 바벨탑사건이 갖고 있는, 함유하고 있는 것은 우리 이름이 하늘에 닿겠다. 그동안 자기 이름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땅에 있다는 거예요. 땅에 있으니까 누구한테 눌립니까? 하늘에 있는 신에게 늘 당하고 산다고 느끼는 거예요. 5.8의 지진에다가, 당하고 사니까. 어떻습니까? 5.8지진일어나면 사람들이 회개할까요? 회개 안 할까요? 그게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습니다.
당하면 당할수록 오기가 더 생긴다고 나와 있어요. 얼마나 마귀 적입니까? 당신이나 나나 신인데, 신은 신끼리 알아줘야지, 왜 힘들게 하십니까? 더 닦달 내요. 이런다고 우리가 당신한테 굴복할 줄 알아? 당신이 정말 신이라면 우리에게 기적을 베풀어봐! 기적을 베푼다고 바리새인들이 복종하겠어요? 예수를 신으로 인정해주겠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를 신으로 인정하는 그 정도로 나도 만만치 않는 신이죠?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지옥 가는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다 이 말이죠. 내 믿음으로 예수 믿는 것은, 이것은 저주받아요. 선물로 받아야죠. 선물로 받는 믿음은 반드시 어디서 오는가 하면, 십자가에서 와요. 십자가에서 와버리면 그 믿음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십자가의 의미가 들어있죠. 그러면 믿음을 받는다는 것은 곧 십자가를 받는 것이 되고, 십자가가 내 안에 들어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니 믿음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것을 우리 안에 활성화시키겠죠.
그래서 우리는 성령 받게 되면 육과 영의 갈등이 계속 일어나는 겁니다. 근데 그런 갈등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어요? “예수님. 받으소서. 받으소서.” 맨날 바치고 봉사하고 더불어 동급이라는 것을 자랑질하고. 주 앞에 죄인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도 죄인이라는 것은 십자가 처음 믿을 때 한 번만 죄인이고. 지금은 죄인이지, 그때는 죄인도 아니었어요. 모르는데 알았네. 그뿐이지, 죄인이라는 의식이 없어요. 지금은 한 고비 넘었으니까, 그 다음에는 지성이면 정성이라고, 정성만 바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요한 때나 지금이나 세대가 더러운 세대라서 이 말씀이 그대로 유효합니다. 요한일서에서 성령을 주었다는 것은 사귀자고 하는 겁니다. 근데 사귀는데 조건이 있어요. 주 안에서 사귀자. 주 안에서. 그럼 주 안에서 사귀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갈라디아서 6장을 한 번 보겠습니다.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자,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은 뭘 주장한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 합니다. 그 주되심이, “주님 저기 계시네!” 가 아니죠. 이 땅에, 이 땅이 현실이라고 할 때는, 이 땅이 주님의 땅이니까, 현실에 어떻게 나타난다? 십자가 자랑으로 나오죠. “주님! 주님입니다!” 이게 아니죠.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아, 주님 저기 계시네!” 이런 간증, 신비한 경험을 가지고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에요. “나 신비한 경험 했다.” 그건 코카콜라 목사가 하는 것이고. “나는 주님 봤다! 천당 봤다! 지옥 봤다!” 그걸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건 인간의 종교성을 유도도해서 자기 팬클럽 만드는 것이고. 실제로 성경에서는 사도바울이 말하는 계시에 의하면, 예수님의 계시에 의하면, 정말 주되심의 그 자랑은 이 땅에서 주님 찬양! 이게 아니고, 여전히 한결같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를 꾀더냐. 십자가를 이야기해요.
그래서 제가 십자가를 증거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저를 비난하면서 이 근호 목사는 십자가밖에 모른다고 했어요. 이게 욕인지 칭찬인지 내가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인지. 오직 십자가만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성경에 부활, 성령, 다른 것 많은데, 다 빼고 십자가만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십자가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니나 내나 목회자라면 그렇게 해서 장사되겠느냐? 그 이야기에요. 교회가 있어야 사람을 건질 게 아니냐 이 말이에요. 학원이 세워져야 서울대학 보내죠. 그러니까 보험회사가 있어야 보험금을 제공받고, 보람상조가 있어야 장례식이 간편하고.
모든 게 어떤 단체가 있어야 되는데, 왜 단체를 부정하고 십자가만 이야기하느냐? 우리가 교회를 유지하는 것은 우리가 밥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고 주의 일이잖아? 근데 순수한 마음으로 교회 일을 하겠다고 하는데, 그래서 교회 와서 봉사해라, 헌금해라, 하는데 니는 왜 그걸 순수하게 보지 않고 왜, 그걸 비난하느냐? 그럼 한국교회가 다 썩었느냐? 한국교회 다 이단이냐? 이런 식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결국은 관심사가 뭐예요? 하나님 앞에 하청 받았다는 거예요. 하청 받았다는 거예요. 주 앞에 가지 말고 일단 나를 거쳐서 주님께 가라는 겁니다. 내가 관리인이기 때문에. 지가 세리도 아니고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세례요한이나, 사도요한이나, 사도바울은, 사도들은 십자가만 자랑했어요. 그리고 베드로, 요한이 그랬잖아요. 앉은뱅이가 걷게 된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지금 주님이 없으면 내가 하청 받아서 하겠는데, 지금 주님이 계시면, 물론 보이지 않지만. 주님이 계셔서 이런 결과를 낳았으면, 너의 눈에 내가 보인다는 말은 어떤 의미겠어요? 보이지? 보이는 것을 사람이 안 했다는 것을 증거 하라고, 다른 말로 하면, 보이는 사람은 나 아니야! 라고 하기 위해서 보여 진다는 거예요.
진정한 믿음이라면, 정말 성령 받았다면, 저 분 때문에, 저 이 목사님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지금 저한테 아직 몸이 있는 거예요. 죽으면 하나의 납작해져 사건 되어 없어지지만. 마술사들이 뭐 이렇게 해놓고, 하나! 둘! 셋! 하면 없어지잖아요. 주님은 마술사에요. 시켜놓고 손 떼면 없어져요. 저 뿐만 아니고 여러분들 다 마찬가지입니다. 살만큼 살면 없어져요. 그렇게 치매로 애먹여도 돌아가시면 없어져요.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잖아요. 마술사 손에는 아무 일도 없어요. 조금 전까지 비둘기 보이고, 돈 보이고, 색종이 보였는데, 아무것도 없어요. 왜냐하면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는데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세상이 꽃처럼, 풀처럼 없어지고 남는 것은 그 현장에 주의 말씀, 예수님 말씀만, 예수님의 행적과 공로와 일하심만 남아요. 이것을 바로 성령 받은 사람만 아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게 아니고요. 갈라디아서 6장 14절을 다시 해보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네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제가 이 본문을 왜 찾았느냐 하면 사귐이 뭐냐? 라고 했잖아요. 보통 세상적인 사귐은 뭐냐 하면, 너 나가 계속 있어야 사귐이 형성되는데, 주님의 사귐은 뭐냐 하면 우리 자신이, 사람들이 눈에 있으면서도 마치 없는 것처럼,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으로 사귐을 이 세상에 드러내겠다는 겁니다.
제가 설교하고 녹음하고 동영상 찍고 하는 것이 분명한데,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주께서 하신 것이지, 제 행동과 관계없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주께서 잠시 나타나게 하신 것입니다. 헌금을 해도 죄가 된다면 안 하면 되겠네요?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데, 그게 평소에 돈을 얼마나 좋아했다는 것을 티를 내는 거예요.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헌금 안 하고 천국가게 하옵소서. 할 수만 있다면. 이런 식이라니까요.
헌금을 하게 되는 것은 의미 없다는 것을, 헌금하면서 나름대로 중요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지적하기 위해서 헌금하게 하신 거예요. 자발적으로 해봐야, 인간은 내놓고는 후회하거든요. 돈이라는 것은 내놓으면, 너무 과했나? 나만 쪼단가? 그래서 식당가면 어떤 사람들은 신발 끈 묶는다고 하고, 화장실 간다고 하는 이유가 뭡니까? 눈치 보는 거예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이번 일로 낼 사람 없습니까? 하면 눈치 다 봐요.
사귐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평소에 인간들끼리 사귀는 식으로 하는 것을 삭제시키면서 사귐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자꾸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면서 사귀어요. 우리의 사귐은 뭡니까? “안녕하십니까? 우리 뭐 노래방이나 갈까요? 하면서 술 먹고 하는 이게 사귐이잖아요. 진짜를 핵심으로 한 사귐은, 십자가의 의미만 드러내는 쪽으로 사귀어야 그게 성령 안에서 사귐이지.
천주교 수녀원이나 단체나, 영성단체처럼, 그저 묵도하고, 스케줄 짜가지고, 아침에 몇 시에서 몇 시까지 노동하고, 그 다음에 기도하고, 그 다음 묵상시간, 노래도 그냥 부르는 것이 아니고, 워더디다디더디디~♬ 이태리 사람도 못 알아듣는 라틴어로 해가지고, 무슨 그런 사귐이 있어요? 그건 사귐이 아니고, 벽을 보고 독백하는 거예요. 자기가 생각하는 사귐을 자기가 연출하는 겁니다. 9개월 아기 보고 “사과 먹고 싶지? 줄까?” “어따띠띠띠~”하면 무슨 말인지 모르잖아요.
마찬가지로 자기가 예상한 거룩함을 설정해놓고, 그게 종교놀이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건 개인적인 종교놀이고. 교회에서 권사 활동하는 것은 교회에서 하는 놀이고. 어쨌든 저쨌든 놀이에요. 사귐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식으로 사귀는 것이 사귐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사귀어야 되고, 성령 안에서 사귄다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죄인이라고 것을 확인하는 겁니다. 죄인인 것을 확인하는 거예요. 그럼 죄인이라는 것을 확인하면 뭐만 자랑하겠어요? 십자가만 자랑하겠죠.
그럼 그 십자가는 자기한테 뭐 했다고요? 날마다 나를 죽이고, 나는 세상에 대하여 이미 죽은 자요. 세상은 십자가 안에서 나에 대하여 죽고. 그래서 제가 쓴 책에 이런 제목이 있어요. <죽은 세상 산 성도>라는 책이 옛날에 나왔습니다. 세상은 죽었지만, 세상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은 성도만 살아있다. 성도가 고립되어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사귐 속에서 살아있고,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의 영생의 능력 안에서 살아있고.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아주 해프닝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은 마르다, 마리아 오빠 나사로가 살았다고 이야기하고. 오빠하고 살았던 마르다, 마리아는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이건 뭐 우긴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잖아요. 주께서 우시면서 “가자! 현장에!” 현장에 갔어요. 제가 만약에 주님이라면, 돌문 있고 무덤 있잖아요. “거봐! 살았잖아?” 이렇게 했을 거예요. 마르다, 마리아하고 다른 사람은, “어딜 가서 이게 살아있어? 이게 숨을 쉬나?” 그럼 주님께서는, “불러봐! 오빠 이름을! 나사로이름 불러봐!” 그러니까 “사람들이 저 분이 미쳤나?” “불러봐!” 그냥 죽었으면 혹시 기절한 줄 아는데, 나흘 되어 썩은 냄새가 되잖아요. “이미 썩었습니다.” “썩었어도 한 번 불러보라니까! 안 불러? 그럼 내가 부를게.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니까, 살았네.
도대체 주님이 보는 세상 안목은 뭐고, 우리는 뭐냐는 말이죠. 주님은 이렇게 할 거예요. 아버지와 나와 사귐이 있고, 너희들은 아버지와 아들 사귐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껏 인간 대 인간의 사귐에 참여했기 때문에, “어딜 봐서 살았어요? 죽었지?” 하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더 웃기는 이야기는, 이게 요한복음 12장 10절에 나옵니다. 나사로가 살았잖아요. 유대인들은 예수님만 처지하면 되는데, 예수님 때문에 나사로가 살았으니까, 나사로도 함께 죽이려고 시도하고 있어요.
똑같은 현상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베드로 불러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고기 잡는데 도사입니다. 오른쪽, 왼쪽, 위쪽, 아래쪽, 그물 안 던져 본 곳이 없어요. 오른쪽 빼놓고 왼쪽만 하는 것이 아니에요. 던져볼 곳 다 던져봤어요. 없어요. 그날따라 없어요. 주께서 고기보고 다 가라고 했으니까. 고기보고 빠지라고 했으니까. 고기들 민방위훈련 시켜서 다 치워놨어요. 없어요. 주님이 이야기합니다. “그물을 오른쪽에 던지라!” 아, 베드로가 갈등을 일으키죠. 자기는 이미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다 훑어서 없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없는 것을 알지만 말씀에 의지해서 한 번 그냥 던져는 보겠습니다.” 이왕 안 잡히는 것 던져봤죠. 탁 던지니까 배가 기우뚱합니다. 어떻게 됐어요? 너무 많이 잡혀서, 배가 기울 정도로 잡혔습니다. 그 없던 고기가 어디서 생겼습니까? 우리 같으면 “땡잡았네! 고맙습니다.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만납시다.” 그럴 건데. 그게 아니고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 버려둔 것처럼,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한테 달려가서 바짝 엎드려 하는 말이, “주여, 몰라 뵈었습니다.”
인간이 예상한 것은 단선이에요. 단선. 과거, 현재, 미래로, 그래서 미래는 항상 예상하게 되어 있어요. 예상 밖이라고 하는 것은, 원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묵시세계가 여기 관여할 때만 그렇습니다. 카이로스, 하나의 때로서. “나는 죄인입니다.” 그 다음에 나온 말이 중요합니다. “나 같은 인간은 상종할 필요가 없습니다.” 상종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상종해야, 사귈 때 “나 주님하고 사귄다!” 이따위 소리 안하죠. 그러면 뭐냐, “나 같은 인간도 이렇게 사귀어주시는 십자가만 자랑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게 성령의 만남이에요. 만남이고, 통합이고, 연합이고.
따라서 걱정하거나 염려한다는 것은 성령 안에서는 사실상, 이론상 생길 수 있는 여지가, 건덕지가 없어요. 지가 죽었는데, 죽은 놈이 무슨 염려하고 걱정을 합니까? 죽었는데? 죽은 줄 아시고, 내가 보기에는 내가 살아있지만, 아까 “나사로야 나오너라!” 할 때 주님은 다른 안목 가지고 우리를 보잖아요. 다른 안목은 십자가에 근거해서 다른 안목,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그 논리와 그 원칙을 가지고 그런 시선을 봤다면, 나는 죽은 자라는 말을 가볍게 해도 괜찮아요.
살았다 해도 못 알아듣고, 죽었다 해도 못 알아듣는 인간들에게 차라리, “너 내가 산 걸로 보이지? 사실은 주 안에서 살아있어!” 라는 말을 당당하게 하시라는 말입니다. 왜? 사귐이니까. 그래서 주 안에서 사귐이 있다는 말이 요한일서 1장에도 나오고 2장 초반에도 나와 있고, 그리고 3장에도 사귐이고, 4장에도 사귐이 있는데, 하지만 이거 다 찾다보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니까.
결국 사귐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화목제물의 효과를 통해서, 이 말이 어려우니까 더 쉬운 말로, 예수님의 피를 경유해서, 경유라는 말은 무슨 취지로 하느냐 하면, 이 근처에 놀이동산 있어요? 놀이동산에서 보면 철주 세워놓고 철주에 체인이 여러 가닥으로 묶여 있고, 탈 수 있도록 의자들이 있어 남녀들이 타서 막 돌아가면 악~하고 소리 지르면서 좋다고 하고, 이게 빙빙 돌잖아요. 이 고리와 이 고리가 어디서 묶입니까? 가운데 철주에 묶이잖아요. 세상에 있는 모든 일들이 예수님 안에서 연결되어서, 전부 다 관련되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렇다면 주님께서 사귄다, 교회가 서로서로 사귄다 할 때, 그냥 사귀면 안 되고,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니까, 서로 저 사람이 이익이냐 아니냐, 잘났느냐 못났느냐, 이쁘냐 못생겼냐, 그걸 따지기 때문에, 반드시 이게 주님께 가게 되면, 가는 순간 우리는 성령 세례 안에서 가기 때문에, 죽은 자죠. 죽은 자로서 가다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면, 전에 ‘저 사람을 이용해야지.’ 하는 생각이 죽음과 함께 이미 소멸된 상태에서 ‘오직 저 사람에게 그리스도만 자랑해야지. 나 못난 것만 자랑해야지.’ 이렇게 교회가 서로 사귀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이 교회는 어떻게 할까요? 이제 서로 자랑해야죠. 이해 안 되십니까? 지금 다 와 가는데 이 말이 이해 안 되면 안 됩니다. 우리 못난 사람들끼리 예수님 때문에 살았잖아요? 그러니까 자랑해야죠. “우리 애가 아이비리그에 다니고..” 좀 자랑을 해야죠. 이미 이것이 못난 짓인 것을 다 알고 하기 때문에. 그런데, “권사님. 그런 소리 하면 안 돼요. 권사가 되어 가지고. 이근호 목사님 강의 못 들어봤습니까? 주 안에서 우리는 못난 자인데, 십자가만 자랑하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저는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아이구, 자랑질 하기는 씨.” 그건 지 자랑질이죠. 지 자랑질. 그 과정을 설명해야지. “이렇게 지 자식 잘 두었다고 까불다가 당했습니다.” 그걸 자랑해줘야지. “나는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뭐 복음 안다고 개코나 알아요? 맨날 돈 자랑하고, 여기는 돈 자랑할 사람 아무도 없기 때문에 안심이 된다마는. 돈 자랑하고, 뭐 자랑하고, 교회 뭐 똑같네? 복음 알아도? 똑같아요. 강도에요. 강도. 다른 교회에 비해서 우리교회는 특수하다고 하죠. 우리교회도 똑같아요. 다른 교회하고 똑같아요.
그래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사귐이 있는 겁니다. 아무리 성경을 해석해도 결국 막사는 것에는 변함이 없어요. 결국 막사세요. 이걸로 되돌아와요. 막 사는 대로. 그러나 거쳐서 오는 것과, 그냥 막사는 것과 다르죠. 그래서 막살라고 해서 삐져서 안 나오는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잖아요. 막살라는 그 소리 듣고 삐져가지고. 잘 해보려고 하는데 격려는 못할망정, 인간을 더 망치게 만드느냐? 이런 식으로 하죠.
그게 뭐냐 하면, 어지간히도 지 자랑하려고 한다. 십자가는 피해버리고 내가 이렇게 우수한 존재가 되어간다는 것을 자랑하려고, 그 자랑 못해서 환장을 했어요. 환장을. 나는 지금 혼의 차원 떠나서, 영의 차원으로 들어가고 있어. 뭐 우주 로켓 발사하니까? 하여튼 나는 지옥 간다고 자랑질 하고 있어. 그게 뭡니까? 십자가만 자랑 못한다는 다른 예수 믿는 사람들이에요. 지옥 가는 게 그렇게 자랑스러운가? 그럼 마음대로 떠들라고 하세요.
자, 요한일서 2장 28절 봅시다.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것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이것 설명하려면 어디로 가느냐 하면, 로마서 9장으로 가야 돼요. 33절, 누가 한 번 읽어주세요.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시온에 누가 있다고 했습니까? 돌이 있죠. 그 돌은 뭐를 깨는 돌이냐 하면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다 깨는 돌이에요. 그게 바로 32절에 나와요.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어디에 의지한다? 행함에 의지하는 것을 다 깨버립니다. 따라서 여기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미리 깨지면 안 부끄럽다는 말이죠. 미리 사람 앞에서 잘난 체하지 말고, 미리 주님 앞에서, 완전히 성령에 의해서 다 깨져버리세요.
그게 나이아가라 이야기를 뉴저지에서 두 번씩이나 이야기한 것이 그겁니다. 폭포 보러 갔는데, 폭포가 안 보여주겠다는 거예요. 멀리서는 보이는데, 더 진짜 폭포보기 위해서 갔는데, 물이 카메라고 뭐고 다 덮어버렸어요. 하얘가지고 소리도 안 들려요. 카메라 찍었는데 소리가 안 들려요. 어딜 감히 진짜 폭포 모습을 봐? 멀리서 가짜나 봐! 가짜 볼 때는 폭포 있고 나 있고 하죠. 정작 가보면 나도 없고 폭포도 없어요. 물보라만 있어요. 그게 제가 나이아가라 폭포에 갔던 깨달음입니다. 깨닫는다고 부처 되는 것은 아니고.
배타고 밑에 가니까. 폭포는 없고 물만 뒤집어 쓴 거예요. 그냥 물 뒤집어 쓴 줄 알아요? 바람 불어요. 바람 불면 카메라고 뭐고 앞에 덮어 쓴 것이 다 가려가지고, 이거 하나 벗기고 초점 맞추고 이게 안돼요. 그래서 2인 1조로 가야 돼요. 나는 촬영 포기하고 아내로 하여금 카메라 잡고 결사적으로 찍게 하고, 그래서 펼쳐진 윤곽을 겨우 찍었어요. 다른 사람은 난리도 아니에요. 그건 예상도 못했거든요. 그럴 줄은.
비만 오면 괜찮아요. 바람이 세니까. 그냥 다 내려가는 거예요. 완전히 물속에 빠졌지 폭포 앞에 있다는 의미는 없어요. 그게. 그래가지고 배를 싹 돌리니까, 이쪽은 미국 배, 저쪽은 캐나다 배를 돌리니까, 한숨 쉬고 멀리 가서 찍어봐야 그거는 내가 있고, 내가 찍는다가 포함된 것이기 때문에 그건 가짜입니다. 그 폭포는 가짜에요. 진짜 폭포는 앞에서 혼났어요. 폭포이야기 하다가 마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