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14 요한1서 버지니아강의20-이 근호 목사
자, 요한일서 3장 1절에 보면,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우리가 자녀가 되는 방법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예수님을 믿음으로 자녀가 된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써보겠어요. 여기 하나님의 자녀가 있고, 여기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께 사랑으로 자녀가 되는 것인지, 이거는 요한일서 3장 1절이고. 믿음으로 자녀가 되는 것인지, 이거는 요한복음 1장 12절이고. 어느 쪽이 맞는 것인지 우리가 생각을 해야 되는데, 하나님의 자녀라 하는 것은, 이것은 생뚱 맞는 겁니다. 전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거예요. 자녀라 하는 것은 항상 뭘 생각하느냐 하면 혈통을 생각하고, 자녀라 하는 것은 누구누구의 자녀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자녀라 하는 것은, 자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니 아버지가 누구냐? 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녀가 되는 겁니다. 이 자녀 안에는 아버지의 정보가 들어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녀라 하는 것은,나 자녀다! 자랑하기 위해서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교회에서 또 이걸 잘못 가르치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항상 들을 때는 뭐냐, ‘나는 되었구나. 구원되었구나.’ 자기 자신의 구원되었음을, 자녀라는 것으로 대변하는 경향이 있어요.
자녀라 하는 것은 방금 제가 이야기했듯이, “우리 아버지가 이런 분입니다.” 라는 것을 드러내라고 자녀가 되는 거예요.변호사 역할이 뭡니까? 자기 재판 잘하라고 변호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억울할 사람을 승리하게 위해서 변호사가 있잖아요. 그게 바꾸어지면 안 됩니다. 우리가 아버지를 드러내기 위한 자녀가 아니라, 자기 자녀 됨을 자랑질 하는 것은, 이거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자기 구원욕구에서 나왔어요. 구원욕구. 여러 번 버지니아에서 계속 강조합니다마는,인간의 개인적인 구원욕구에서 나왔습니다.
이 개인적이라고 하는 것은, 지난 시간에 이걸 뭐라고 했습니까? 고립이라고 했죠. 고립은 어떤 여건 때문에 고립이 생깁니까?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자기가 뭐라고요? 신이죠. 신. 이 본성을 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의 본성을 어떻게 하면 발산하고, 신의 본성을 어떻게 하면 확인 할 길이 없는가? 하고 노리다가 신의 자녀가 된다니까 멋진 기회가 찾아온 거예요. 그러니 요한복음 1장에서는 믿음으로 된다니까, “믿습니다.” 라고 된 거예요.
결국 자녀인데, 아버지 노릇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나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거예요. 믿음으로.강조점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거예요. 내가 나한테 수작을 부려서 구원받았다는 거예요. 내가 나한테. 남들은 안 믿는데 나는 믿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 보시기에 어처구니가 없죠. “너는 뭘 말하고자 하느냐?” “내가 믿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뭘 얻었는데?” “제가 구원받았어요.” “그게 뭔데?” “하나님의 자녀.” 그러나 하나님께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보여 줄 것을 믿느냐? 하는 겁니다.
이거는 하나님 아버지가 어떠한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출발점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함을 믿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원욕구가 되면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되죠. 그럼 무엇을 잘라야 됩니까?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에서 무엇이 잘려나간다? 자신의 세상적인 욕구와 구원의 희망은 다 잘라내야 됩니다. 무엇을 잘라내야 하는가? 목적을 잘라내요. 사람이 살면서 마귀의 시험과 유혹을 당하는 이유는, 집착을 가진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목적이 있는 한, 그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는 목적 말고 다른 목적으로 반드시 활동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자녀의 목적은 뭐냐,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드러내기 위한 목적이 이미 확정이 되어 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고린도전서 6장이 그냥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니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너의 존재의 목적은 이미 결정 났느니라. 아버지가 어떤 분이지 드러내라. 이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 가서도 목적이 따로 있어요. “하나님. 이번 일만 잘 성사된다면 다이아몬드가 문제겠습니까?”
이미 월요일에 바이어와 만나서 계약체결을 해야 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화요일에 애가 중요한 시험이 있다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수요일에 내 딸 진희가 선을 봐야 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이상은, 그런 날을 앞두고 있는 주일날에는 목적이 뭐냐 하면 완전히 아버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에요. “아이구 이 어려운데, 이 더운데, 교회까지 왔는데,이런 소박한 소망정도는 주고받고 해야, 뭐 계속해서 믿을 마음이 들겠습니다. 제발 이번만큼은 어쨌든 간에 성사시켜주시옵소서.” 이게 우리 동네에 갑바위 있거든요. 갑바위 비는 것하고 교회 비는 것하고 차이점이 없어요.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자기의 그런 소박한, 시험 잘 보게 해달라고나 기도하려고 하는데, 이건 뭐 목사와 장로가 또 거기다 목적을 줘버리네. “이번에 예배당 지어야 되는데 여러분 합심해서 기도합시다.” 이건 또 예배당 짓는 것이 목적이 돼버렸어요. 예수님이 건축갑니까? 예배당 짓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지, 여기 장도리하고, 장도리 오랜만에 사용합니다. 장도리. 장도리하고 줄자하고 옆에 허리에 차고 목수일 하러, 아버지는 목수였지만, 미장일 하러 오신 게 아닙니다.
집하나 지어놓고 다 이루었다고 하지 않아요. 집하나 지어놓고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것은 집 없는 사람들한테 봉사해서,무슨 운동입니까? 해비타트Habitat(무주택 가정 및 열악한 주거환경에 놓여있는 사람들의 주거문제 해결을 목적으로 설립된 봉사단체). 해비타트죠. 뭐, 해비타트 운동해서 집지을 때나 하지만. 주님은 이 땅을 불로 싸질르러 왔는데, 짓기는 뭘 짓습니까? 인공적인 것은 불로 다 태워지는데요.
그래서 자녀는 뭐가 없어야 된다? 목적이 없어야 된다. 이 세상에서 목적이 없는 이유는,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또 “목사님 말씀은 너무 허무합니다.” 허무하기는 뭐가 허무해요? 목적이 있을 때는 뭐가 허무해요? 목적이 없을 때는 허무하지만. 도대체 설명을 뭘 들었는지 모르겠어요. 실컷 듣고 허무합니다. 아하, 지가 기대한 목적과 결부된 방법을 제시 안 하니까, 그래서 허무하다고 생각하겠죠. 이러한 믿음, 하나님께서 믿음을 줬을 때는, 우리가 덥석 물어서 믿음이라고 하지 마시고, 제대로 된 믿음이 누구부터 시범조로 보여줬는가를 발견해야 돼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자녀의 모델, 모델이 아니고 마델이에요. 제대로 된 발음한다. “믿음이 보고 싶어?” “이게 믿음이야.” 그 당시 바리새인 믿음과 완전히 대비 적이었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목적이 없이 살면 어떻게 사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일단은 목적 없습니다. 목적 없어도 돼요. 아버지가 누구신지 드러내면 그게 우리의 목적이죠. 어떻게요? 하지 마세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목적은, 아버지의 자녀라면 아버지를 드러내야 하니까.
자, 고린도전서 7장 30절에 보면, 목적 없는 사람, 곧 성도죠. 하나님의 자녀죠. 자녀가 그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나와 있습니다.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주로 우는 자는 어떤 자입니까? 찡찡대는 자죠. 고민이 많은 사람이죠.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는 자같이 하며” 촐랑대지 말란 말이죠. 뭐 일이 잘 됐다고 까불까불되지 마라. “매매하는 자는 없는 자같이 하며” 돈도 아무것도 없으면 장사 못하죠. 매매하면서도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 다음에, “세상에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백화점에 가서 뭘 살까? 신상 나온 것 없는가? 하면서 살피는 사람은 이 물건들이 백화점에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물건을 집어라 이 말입니다. 그렇게 쇼핑할 때 너무 심사숙고하지 말라는 거예요. 어떤 것을 해도 별 의미 없다는 겁니다. 백화점에 가면 남자들은 화장실 앞에 가방 들고 앉아있고. 여자들은 두 시간 세 시간 쇼핑하고. 거기서 여성은 위대하다가 증명이 돼요. 다리 아픈 줄도 몰라요. 정말. 다 소비를 못하는 것처럼 하며. “이 세상의 흔적은 지나감이라” 인생 뭐 있어? 아무것도 없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쉽게 말해서 소비자체가 목적이 되지 말고, 부자가 되는 것이 목적이 되지 말고, 나는 항상 울지 말아야 돼! 그게 목적이 되지 말고, 나는 항상 웃어야 돼! 그게 목적이 되지 말라 이 말이죠. 왜냐하면 세상이라는 것은 그냥 내 옆으로 스쳐지나가는 구름 같은 것이에요. 이게 어떤 환경이 지나가든, 이게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분 자체는 변함이 없다는 겁니다.
뭐가 보장이 돼주는가? 이제부터 그 이야기가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에, 오늘은 자녀인데 내일은 자녀인지 아닌지 헷갈리고, 그 다음에 자녀라고 했다가 한 달 뒤에 헷갈리고, 아예 70 넘어가지고 치매 걸려서 하나님의 자녀고 뭐고, 이거는 뭐 행악질했을 때에, 그때 과연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인가? 또 본인은 하나님의 자녀인가를 생각해보자 이 말입니다. 치매 걸린 환자는 정신병이기 때문에, 우선 내가 누구냐 자체를 정립할 수 없죠. 그 기억을 저장하는 부분이 망가졌기 때문에.
그럼 치매환자에 있어서의 그 사람의 미래나 그 사람의 행동은 본인이 결정 못하기 때문에, 본인 외에 외부에서 결정하게 되어 있죠. 그럼 논리는 간단해요. 그 치매환자가 만약에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 관리는 누가 하겠습니까? 1번. 요양병원장 2번. 가족 3번. 며느리 4번. 아버지. 몇 번 이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관리하겠죠. 물론 며느리를 보내서 하든지,뭐 이렇게 보내서 하겠죠. 딸이 있으면 딸이 하는데, 우리 집안에는 딸이 없기 때문에 며느리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산부인과에서 딸 놓으면 와우! 하는데 아들 놓으면 죽었다! 마지막까지 누가 돌볼 것인가? 딸은 반드시 부모를 돌보고, 아들은 마누라한테 팔려가게 되어 있어요. 아들은 다 빼앗기게 되기 때문에 키워줘 봐야 아무 소용없어요. 옛날에는 딸 키워봐야 출가외인이라고 아무소용 없다고 한 것이 바뀌어져서 아들 키우면 아무소용이 없어요. 아들이 뭐 아이스께끼고, 아이비리그고 갔어도 아무소용이 없고, 누구 좋은 일 시키느냐 하면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거예요.
목적이 없다, 목적 없이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와 이 세상의 뱀의 자녀와 확연한 차이가 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더 핵심적인 건, 우리가 자녀가 되고 싶었습니까? 딱 깨놓고 말해서 인간의 육신은 하나님의 자녀에 미혹 받고 그것이 유혹거리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뭐냐 하면, 그냥 육체적인 작업과 쾌락이에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몸의 컨디션입니다. 섭씨 18도에서 20도 사이가 최고 좋아요. 이러면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예수님도 잊어버려요. 편안한 것.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노후대책이 될 정도로, 한국 같으면 월 300백 이상만 뭐 따박따박 나오면, 이것이 내 육신으로서는 만족이에요. 이런 만족도가 있는데 뭐 구태여 하나님의 자녀 되려고 그렇게 애쓰지 않습니다. 결국 제 말이 뭐냐 하면 육신이 뭘 방해한다? 자녀 됨을 매일같이 방해하고 있는 거예요. 육신의 쾌락 때문에 이 더운 날 이렇게 활동하시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어서 오늘도 활동하셨습니까? 온종일. 뭐, 활동해서 자녀가 될 것 같으면 얼마든지 활동하겠는데, 활동해서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제 말이 맞는다면 무슨 근거가 있어야 되는데, 결국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은 뭘 끊어내야 될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죠. 뭘 끊어내야 되는가? 요한복음 1장 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이렇게 했죠.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녀 값을 한다면, 자녀 티를 낸다면 뭐를 자꾸 하나님께서 잘라내겠어요?
혈통에 구애받지 말고, 니 육신에 구애받지 말고, 타인의 시선에, 타인의 응시, 타인의 평가에 구애받지 말아라. 왜냐하면 그것과 별개로 너는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별개로. 그러면 이 이야기를 추론해보면 이래요. “하나님이여!” “왜?” “저를 자녀 만든 것은, 그러면 제 뜻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그렇지. 너 뜻이 아니지.” 왜? 우리 육신 속에는 혈통의 욕구와 그리고 주변의 시선과 안목으로 똘똘 뭉쳐있습니다.
내가 뭘 꿈적거린다는 것은, 어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내가 뭘 움직인다는 것은, 결국은 남한테 보란 듯이 또 복수심을 깔고 ‘니가 나를 개무시 했지? 봐! 이정도야!’ 자꾸 타인을 의식해요. 타인을. 남은 가만히 있는데. 가만히 있는데, 혼자 일부러 상상을 해가지고, ‘니 그렇게 했지?’ 보란 듯이. 도대체 교회 와서도 걸음걸이부터 달라져요. 뭔가 좋은 일 있으면,딱딱딱 이렇게 들어오고. 뭐 안 좋은 일 있으면 뒤에 앉았다가 축도 끝나기도 전에 없어져버리고.
자랑거리 있으면 “안녕하세요? 할렐루야!” 하고. 우사스러운 일 있으면 언제 왔는지 점심도 안 먹고 그냥 가버리고.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불행하게 만들지만 나는 인간성이 좋아서 그래도 인사는 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더 심한 저주는 퍼붓지 마세요.” 뭐 이거 협박도 아니고, 압력 주는 것도 아니고, 공갈치는 것도 아니고, 평소에 사람한테 하는 행세대로 그대로 하나님한테 하잖아요.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겠어요? “니그 아버지 꼬라지 좋다~” 하나님의 자녀가 그 꼬라지에요. 그 꼬라지요. 무슨 하나님의 자녀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완전무장 되어 있습니까? 물론 끊을 수 없습니다마는.
다시 이야기합니다. 자녀가 되는 노선과 그 통로는 따로 있다는 것. 그거는 예상치도 못한다는 것. 나아가서 예수님이 왔을 때에, 자녀 된 조건도 동반해서 다 세팅되어서 우리한테 찾아온 겁니다. 예수님 혼자 구원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자녀가 되는 권세를 지니고 독생자가 오셨어요. 우리는 그 권세를 주님 것에서 내 것으로 이동하려고 하는 그런 막돼먹은 생각을 하지 마세요.
탐을 내도 탐을 낼 것을 내야지.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면 되지, 구태여 주님 손모가지를 비틀어가지고, “요거는 전능하신 능력이니까, 주님 무겁죠?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기도 빡세게 해서 주님 가지고 오신 권능을 내가 가져와버리면, 이거는 뭐냐 하면, 아까 제가 오후 두시에 했습니다.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자칭 뭐가 되고 싶다? 신이 되고 싶다는 그 열의를 참지를 못해서 주님 오니까, 주님이 뭐 화물엘리베이터입니까? 얼른 문 열고 주님은 생각 안 하고, “아이구, 고맙습니다.이제야 택배가 왔군요.” 주님이 택배기사도 아닌데.
물건만 자기가 가지고 가가지고, “자, 나보다 능력 있는 사람 나와 봐! 내가 안수하면 병 나아!” 이건 무슨 이런 무당이 다 있어요? “자녀가 어떻게 되는지 나한테 물어~ 봐~!” “부채야! 부채야! 안 되겠다~!” 이건 뭐 교회 권사가 점을 치질 않나,투시가 뭐? 니 앞길이나 투시하세요. 지 앞길은 지가 가로막고 보지도 못하고 뭐 남을 투시한다고? 예언한다고? 왜 자꾸 주님만? 우리는 주님한테 전부 다 맡겨야 하는데, 있을 것도 맡겨야 되는데, 주님한테 있는 것을 손모가지 비틀어가지고 끙끙대면서 내 것 만들려고 하는 이유가 뭐냐? 남한테 기 안 죽을라고. 맨날 내 능력이 얼마? 능력이 얼마? 내신 성적 따지고.
성경말씀 하나하나하고 오늘날 교회영접하게 되면 성경말씀이 절로 이해돼요. 반대로 하면 돼요. 반대로. 꼭 말씀은 봐놓고 결과는 반대로 돼가요. 주님한테 맡기면 내 고민은 내가 놓으면 돼요. 주님께서 오른손 손모가지를 잡으면, 내가 왼손으로 잡는 주님은 놓아도 괜찮은데, 주님이 잡았다는 것을 못 믿기 때문에, 내가 붙들어야 되는데, 백날 붙들어봐야 치매 걸리면, 붙들고 싶어도 무슨 짓 하는지 몰라요. 그냥. 결국 인간은 치매 걸리나 안 걸리나 늙어 죽을 때 되면 정신없어요.
심지어 대구 유명한 교회 목사가 미국에 집회 가서 설교 도중에 갑자기 흘러간 유명한 노래를 불렀어요. 술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이 가가지고, 의도적이 아니라 갑자기 중풍이 왔는데 정신을 잃어가지고, 중풍이 와도 찬송가가 오면 은혜로운 데, 찬송가가 나온 것이 아니고 평소에 흥얼대던 유행가가 막 나왔어요. 저처럼 평소에 유행가 하면 원래 그러려니 하고, 위아래 위위아래 막하면 원래 그렇다가 되는데. 이게 아니고 지 딴에는 한 경건해가지고, 평소에도 경건으로 목사 대우받아서 그동안 생계비 받아놓고, 거기서 갑자기 흘러간 옛 노래를 불렀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나중에 병원에 갔어요.
목적을 버리라는 말은, 정말 제가 심사숙고한 거예요. 모든 사람의 고민은 그가 따로 목적을 챙겨서 그런 거예요. 그럼 목적을 왜 챙기느냐고 물어보면, 그 목적이 있음으로서 내가 누군지를 구체화하겠다는 거예요. 당신이 그거 구체화 안 해도 성경말씀에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이미 충분히 확정됐습니다. 남한테 기죽지 않는 나의 정체성, 아이덴티티identity, 그걸 따로 적립하기 위해서 자꾸 주님의 능력이든, 뭐든, 따로 힘을 갖고 싶은데, 사실 따지고 보면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것은 그 집안과 아버지가 자식한테 기대가 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엄마라든지, 키워준 사람이, “너는 절대로 우리 부모한테 실망시키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돼!” 그것을 심어주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여기 혈통의 자녀가 되죠.
혈통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지 맘대로 되는가? 지 맘대로 안 돼요. “믿습니다.” 해봐요, 그 믿음은 주께서 인정도 안 해줍니다. 권세에서 나온 믿음이어야지, 뭐 욕심에서 나와 믿는다고 하면 누가 못해요? 그래서 오늘 강의에서 우리가 할 일은 정해졌습니다. 육신의 자녀를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방법을 알고 합시다가 아니라, 이미 자녀가 된 사람에게만 납득이 되는 겁니다.
육신의 자녀가 그 다음에 뭐로 바뀌느냐 하면 하나님의 자녀죠. 방법에 대해서는 추상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이미 있는 자가 더 받게 되어 있고, 없는 자는 아예, 아무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해도, 없는 자는 없음으로 끝나버려요. 마태복음 13장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있는 자는 더 받을 것이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빼앗긴 채로 니는 지옥가라 이 말이거든요.
그 본문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참 어렵죠. 뭔가 없는데 빼앗기는 것이 어디에 있어요? 없다는데 왜 없는 것을 빼앗기느냐, 엎친데덮친 격으로. 있는데 왜 더 주느냐 하는 이런 문제도 생긴단 말이죠.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되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께서 뭔가 추가적으로 이걸 집어넣어야 해요. 집어넣는데 예수님의 일대기가 여기에 들어가요. 예수님의 일대기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모형을 여기 육신의 자녀에다가 결합을 시켜요. 예수님을 결합을 시켜버리면 나오는 결과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육신의 자녀는 권세가 없어요. 땅을 뚫고 하늘로 나갈 권세가 없습니다. 그러면 권세는 어디서 오는가? 예수님에게서 이쪽으로, 자녀로 권세가 오게 되는 거예요. 그럼 요한복음 1장에서는 권세라고 되어 있는데,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요한일서 3장에서는 권세라고 하지 않고, 권세인데 딱 깨보면, 구체적으로 흔히 보는 권세는 힘이잖아요? 힘은 정치적인 힘일 수도 있고 경제적인 힘일 수도 있는데. 그런 힘 말고, 우리가 아는 그런 힘 말고, 하나님이 원하는 힘은 따로 있어요. 그게 요한일서 3장에서 구체적으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사랑이라고 해요.
그래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아는 사랑 말고, 힘으로 작용하는 사랑이라고 이해하시면 요한복음 1장과 요한일서 3장과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자, 이야기가 이렇게 우리는 연결했는데, 세밀하게 과정을 밟아야 해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성급하게 나오지 말고,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밟아나가시면, 거기에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은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세밀하게.
그러면 그 과정에 대해서 말씀이 세밀하게 근거가 있어야 되는데, 그 근거를 우리가 놓치게 되면 우격다짐이 돼요. 그 우격다짐이 뭐냐 하면, “믿씁니다.” 하고 자꾸 자기행위를, 주님의 행위로만 점철되고 연결되어야 할 고리에다가 자기의 우격다짐이 그 속에 끼어들게 되면, 이거는 굉장히 수상해요. 분명히 가짜일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합니다.
언젠가 제가, 한 십 년 전에 그런 이야기했는데, 기도하니까 방언이 되더라. 그 사람은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 방언이 안 됐는데, 기도하니까 거기서 힘이 나와서 내가 방언하는 사람이 됐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언제 했느냐? 어제 기도할 때 했다. 그럼 그 사람한테 오늘 기도해봐라. 오늘 기도하니까 또 방언이 되네. 그럼 내일 해봐라. 내일 될지 안 될지. 쭉 되다가 만약에 한 달 후부터 안 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앞에 것이 다 부정당해요. 그럼 그 사람은 또 당황해서 기도의 방법을 또 바꾸기 시작합니다. 리모콘 누르면 tv나오고 누르면 tv나오고 하는데 안 나오는 거예요. 당황스럽잖아요.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자녀이겠습니까? 요한일서에서는 완전자거든요. 요한일서에서 성도는 완전자입니다. 하자나 고장이 나지 않고, 실패도 없고, 서비스 부를 필요도 없어요.이미 자녀가 되었으면 그 자체가 완전해요.
그럼 그건 뭐냐 하면 사랑이 품고 있는 권세는 마귀가 어떻게 설치든 간에, 이 권세가 오류를 일으키는 법이 없이, 온전한 사랑으로 그 사람을 온전한 자녀로 만든다는 것을 확인해주기 위해서, 요한일서가 정말 지루할 정도로, 정말 짜증날 정도로, 이 말은 했잖아요? 왜 또 합니까? 할 정도로, 이렇게 좀 솎아내고 싶을 정도로, 너무 답답할 정도로, 이렇게 촘촘하게 사랑으로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일서를 보게 되면, 뭐, 빤한 이야기. “하나님은 사랑이다.” “저 알아요.” “그래, 서로 사랑하란 말이야.” “안다고요. 두 번, 세 번, 잔소리라는 것을 아셔야지.” “사랑하는 자들아!” “예. 고맙습니다. 사랑해줘서.” 뭐, 자녀 됐는데 왜 자꾸 하느냐?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은 자녀 됨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얼마나 우리에게 촘촘하고 세밀하게 치밀하게 일하셨는가를, 아버지의 공로로 돌리고, 아버지의 행함을 영광 돌리기 위해서 자녀가 된 거예요.
구원받았으면 때려치우지 뭐? 아니에요. 종합영어 정철이라는 사람과, 수학정석 정대석이가 얼마나 촘촘하게 잘 해놨으면, 내가 서울대에 들어갔는가를. 또 다른 사람이 들으면 내가 서울대 나온 줄로 오해하겠다. 저는 서울대 출신 아닙니다.얼마나 수학정석 참고서를 잘 해놨으면 내가 대학에 들어갔느냐? 그럼 대학 들어갔다고, 구원받았다고, 성경 덮는 것이 아니고, 자녀라면 다시 봐야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내일 수요일에 창세기부터 시작합니다. 뉴저지 수련원에서 창세기부터 할 거예요.
이제 성경 보는 이유를 알겠죠? 구원받겠다고 성경 보면 애초에 지옥 가는 거예요. 봐도 지옥 가요. 성경 만독 해도 지옥 가요. 난데없이 구원받아 놓고, 도대체 왜 난데 없이냐, 왜 뜬금없이 구원해주느냐, 한 번 볼까? 이러면 되는 거예요. 성령세례 받고, 이방인들은 성령세례 받고 성경 봤어요. 편지를 보게 되면 성경도 성령으로 썼고, 자기도 성령 받았기 때문에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겁니다. 사도의 말이. 그럼 사도 쪽에서는 뭐냐, “그러니까 성도지.” 라고 확인하면서 우리는 하나의 교회라고, 주 앞에 영광을 돌리고 찬양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데살로니가후서 3장 2절에 나오죠. 또 사도행전13장 48절에 보면 영생줄자는 따로 있다. 영생줄자에게 영생이 돌아간다. 영생 주기로 작정된 자에게 이 복음이 먹혔다. 이래 되어 있어요. 뭐 예정론 따질 거 뭐 있어요. 사도행전만 봐도 분명히 나오는데. 무슨 이의를 겁니까? 예정론에 대해서. 자,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조금 있다 이야기하고요. 우선 요한복음 1장 12절 봅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되어 있죠.
그 권세는 예수님이 주시는데, 권세라는 것은 그 뒤에 요한복음 3장이나, 제가 시간 내서 찾지는 않겠습니다. 특히 17장2절 같은 경우에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모든 권세를 주셨는데, 이 권세는 이 세상을 위함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영생받기로 작정한 자에게만 차질 없이, 작업이 차질 없이. 마귀가 아무리 달려들어도 그걸 떼 내는데 소모되는, 권세를 사용하는 겁니다.
이 세상 일어나는 모든 일이 자기 택한 백성에게 영생주기 위한 하나님의 치밀한 권세작전이에요. 어떤 경우들이 발생되더라도 그 권세는 자기백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에 다 살리는데 소모될 권세입니다. 그러니까 지옥 갈 사람은 뭐냐, 남 좋은 일시키는 들러리죠. 그래서 예수 믿고 난 뒤에는 명절에 안 믿는 친척들 만나면, 뜬금없이 “아이구 올케 미안해.” “형님. 뭐?” “에이, 그런 게 있어. 미안해.” “뭐? 구체적으로 왜 미안한데?” “니가 지옥 가서 내가 천당 가게 생겼어.”이거 뭐 누구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명절분위기 다 깨고. “미안해 올케. 니 지옥 가는 바람에 내가 천국가게 되었어.” “다시는 내가 시댁에 오나봐라.” 시집 분위기 왜 이래요? 요새? 소통의 시대에 와 이래? 소통이고 뭐고 마음먹고 구분을 짓는 셈이 되죠.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일으킨 것도, 미얀마, 북한이나 어떤 일을 일으키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인해주기 위해서. 그런 일들이, 베트남이라든지 영국, 프랑스, 모든 일이, 시리아의IS전쟁, 모든 것이 우리 영생과 관련이 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관련이 있습니까?” 그거 이야기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죠. 그 내력을 이야기하려면. 성경에 다 있거든요. “이러한 것도 궁금하다니까요?” 알았어요. 알았어. 고린도전서 한 번 찾아봅시다. 3장. 이거는 동서한테 써먹으세요. “동서! 미안해. 동서가 지옥 가서 내가 천당 가게 생겼어.” 성경구절에 어디 이런 것도 있나? 없는 것 같은데 있어요.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21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만물이 다 누구 것이라고요? 여기 너희가 누군데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잖아요. 또 계속 읽어보세요. 22절,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다 누구의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 것이잖아요. 제가 지금 말을 과하게 했습니까? 같은 성경 보고 있는데. 같은 하늘아래에서 같은 성경 보고 있는데.
저는 이게 보이는데요. 여기 시리아 나오네. 터키 나오고. 북한 핵문제 여기 나오네요. MBC뉴스 시간에 나오는 것이 다 나오네요. 다 누굴 위함이다?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한 이야기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의 응답입니다. 겟세마네의 기도, 2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 모든 권세를 내게 주신 것은 택한 백성에게 영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한 겁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는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 경제적으로 그렇게 구분되지만, 주님의 나라는 양과 염소로 구분돼요.좋은 고기 나쁜 고기로 구분되고. 영생 얻을 자와 지옥 갈 자로 구분돼요. 거기서 이러한 부글부글한 움직임들이 어떤 조합을 짜 맞추어 움직이는 겁니다. 이 정도 알려면 드론 띄워 저 높은 곳에서 지구를 돌아가면서 다 봐야 돼요. 이 모든 세계에서 움직이는 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발휘하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내가 믿습니다.” “니가 믿게 된 권세가 어디서 왔는데?” 내가 믿습니다, 하고 믿어버리면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자랑할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정녕 되었다면, 고린도전서 3장 23절을 보세요. 거기 보면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23절,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나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자녀라는 어떤 특정 역할자리가 필요했던 거예요.
그 자리에, 그 엑스트라 자리에, “니가 해라!” “니가 가라! 하와이.” 하듯이. 나를 집어넣은 거예요. 우리는 무심코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 털썩 앉아놓고, 하나님의 자녀 되기 전에는 자기의 육체의 행복과 쾌락을 위해서 나름대로 목적이 있었어요. 남한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한, 이 정도야! 하면서 자랑질 했는데, 성령께서 성령세례 주셔서 그 자리에 앉고 보니까, 어? 내 목적과 내 의도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나를 집어넣어준 하나님의 세밀한 말씀의 그 과정들과 하나님이 뜻을 자랑하라고 우리가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아는 겁니다. 돌아가는 모든 만물이.
그때부터 바이어를 만나든지, 친척을 만나든지, 모든 만남에 대해서 우리가 새로운 안목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어요. 하나님이 저 분을 왜 보냈을까? 니가 왜 왔어? 하지 않고. 하나님이 왜 보내셨을까? 그렇게 바라보면 되죠. 아직까지 제가 이야기하면서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 되는 그 과정은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중간단계로 갈라디아서 3장26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라고 되어 있죠.
자,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것이 단독으로 따로 떨어져 나오는 겁니까? 아니면 어떤 소속이 되는 겁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되죠. 자, 그렇다면 제가 예수 안에서를 강조했습니다. 이 자리를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 오다 보니까 여기 감리교도 있던데. 감리교에 가서 어떤 목사 설교를 듣거나, CBS나 기독교방송 설교 들으면, 뭐가 빠지느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빠지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시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이야기해요.
출발이 인간의 행위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면 있는 것 없는 것 다 끄집어내가지고, 정신집중을 시켜가지고, 믿씁니다! 믿씁니다! 하는 거예요. 그때는 스마트폰 다 진동으로 해놓고,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는 문자 알잖아요. 정신이 하나면 안 될 일이 없다. 그런 뜻이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믿음을 참기름 짜내듯이 짜내는 거예요. 특히 부흥회가 그런 거예요. 믿씁니까? 믿씁니까? 이래가지고요. 뭐가 빠졌습니까? 그거는 자기 안에서 믿음을 끄집어낸 것이기 때문에, 자기는 지금 연출을 하고 수상한 연극을 벌이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짜내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소속감을 줄 수 있는, 예수 안 속으로 우리를 뒤집어 씌웁니다. 인디언 천막처럼. 우리가 여기 있는데, 천막이, 권세가 와서 뒤집어 씌워버려요. 그럼 안이라는 것이 성립되면서 천막은 경계가 돼요. 그리고 밖이죠. 그럼 여기 안에 있는 우리는 뭘 아느냐 하면 안도 알고 밖도 알고, 예수 그리스도 안도 알고, 예수그리스도 밖도 알고, 둘 다 알았어요. 밖에는 물론 지옥이고 안에는 천국이 되는 겁니다.
그럼 이것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왜 중요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목적은 뭐냐, 그냥 무심코, 그냥 추상적으로, “하나님!” 이러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이 집중적으로, 초점이 모인 곳이 뭐냐, 하나님의 주 되신,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자랑하라고 우리를 예수 안에 집어넣은 거예요. 자랑할 때 예수 밖에서 자랑하지 말고, 예수 안에서 자랑하란 말입니다. 예수 안에서.
교회가 뭡니까? 교회는 예수님만 자랑하는 곳이 교회에요. 그 조치를 위해서, 너희들 가운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고,재산 있는 사람도 많지 않고, 또 똑똑한 사람도 많지 않고,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잘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고전 1:26-31). 세상에서 자녀가 아니고, 자기 나름대로, 독자적으로, 고립적으로, 나는 성공했다고 자랑하는 그 인간들을, 오히려 그들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권세가 예수 안에서 구비되어 있습니다.
자, 여러분 물어봅시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누굴 부러워 했겠습니까? 질문하는 자체가 잘못되었죠. 그럼 여러분은 누굴 부러워합니까? 아이고, 하나님의 자녀인데, 하나님의 자녀답게 이야기합시다. 그 이야기는 초반에 이야기고 지금 여러분은 바뀌었죠. 예수 안에 있으니까,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뭘 부러워해요?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 하다가. 이제는 더욱더 구체적으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갈라디아서입니다. 우리가 보는 요한일서는 그보다 더 구체적입니다.
예수 안에 뭐가 있더냐? 하는 겁니다. 요한일서 2장을 한 번 보겠습니다. 예수 안에 뭐가 있느냐? 3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절,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여기 계명이 나오죠. 여러분들이 시카고강의를 참석하지 않았고, 또 유튜브 볼 시간도 없었기 때문에, 제가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율법에 계명이 많아요. 그런데 요한복음에 보면 계명이 많지가 않아요. 딱 하나에요. 그럼 하나라는 말은, 여러 계명이 하나로 종합되었다는 라는 말이 아니고, 완성했다는 말입니다. 완성했다. 그러니까 올림픽으로 이야기한다면, 뭐 경기를 메달 따기 위해서 경기 할 경우에는 금메달 리스트가 유보되어 있지만, 이미 메달을 줘놓고 달린다는 것은, 달릴 때에 선수가 간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금메달리스트가 간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럼 우리를 뭐로 보느냐 하면 이미 완전한 자, 완성된 자, 그걸 구체적으로 예수 안에 있으면, 바깥에서 어떤 마귀가 고자질을 하고, “알나리깔나리 쟤는 간음 했대요~” 아무리 해도 백날해도 의미 없어요. “쟤는 간통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아줌마래요~” 백날해도 소용없어요. 창문 빼꼼히 열고, “누구냐? 쓸데없이 이 골목에 와가지고 내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를 욕하는 자가 누구야?”
이렇게 하면 바리새인들이 짱돌 들고 “죽이라! 여자를 내놔라!” 하잖아요. “누구야? 니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가지고 욕해? 그래? 그러면 니들한테 묻는다. 여기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란 말이야!” 그럴 때 주님께서는 글로 쓰시는 거예요. “한번 내가 니가 죄 있는 것을 밝혀봐?” 글로 쓰거든요. 무슨 글인지 모르지만, 글로 쓰니까 그 글을 보고 전부 다 도망가는 거예요.
“자, 이 글대로 해서 죄 없는 자? 너야? 나와!” 글을 보고서는, “죄 있습니다.” “그럼 가!” “너 나와!” 글을 보여주면서, “있어? 없어?” “있습니다.” “왜 있는데, 죄 있는 자가 돌을 들고 와? 다 가! 죄 없는 자는 나밖에 없어. 이 여자는 내가 처리할거야. 다 저리가! 저리가! 내가 처리할거야.” “여인아! 너를 정죄하는 자가 어디 있더냐 ?”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 둘이 예수 안이라는 뜻이에요. 예수 안에. 밀실에, 예수 안에 있어요.
“여인아! 너를 정죄하는 자가 누가 있더냐?” 다시 말해서 “니가 신경 써야 할 타인의 응시는 있더냐?” 이 말이에요. “너를 그렇게 주시하고 너에게 관심 끄는 자들이 있더냐”? “다 가버렸습니다. 아무도 없나이다.” 어쩌면 우리 교회 표어를 만들라면, 이걸 제가 설교시간에 했죠. 이걸 표어로 삼는다고 했죠? “아무도 없나이다.” 그것도 길잖아요? “없나이다.” 아무도 우릴 정죄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이야기죠. “누가 정죄하리요?” “없나이다.” 다시 말해서 “여자여! 그 많은 자를 누가 보냈느냐?” 여자는 싱긋이 웃겠죠. “주님이 보내놓고, 뻔히 알면서도 왜 저한테 묻습니까?” 이러겠죠.
주께서 예수 안에 우리를 두기 위해서, 주님의 조치가, 주님의 자녀를 감히 힐난하고 시비 거는 자들을 주님 선에서 다 처리를 해버립니다. 가! 가! 저리가! 가! 가! 똥개들 가! 다 가! 오늘 강의 제목은 “가!”입니다. 가! 가! 가! 다 가! “우리 둘이 남았다. 예수 안이다. 있나?”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그것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 왔거든. 니 힘으로는 율법을 못 이루는데 내가 왔다.”
그러니까 계명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종합됐다는 말이 아니고 완성한 계명이 주어진 거예요. 율법시대 지났다는데, 하필이면 왜 또 계명이냐? 계명의 특징이 있어요. 이게 확정적입니다. 계명은 요지부동이에요. 확정이 되니까. 그 계명이 뭐냐, 사랑의 계명이에요. 사랑하겠다는 데에 있어서 누가 이의를 걸 수 있다? 없다? 아, 이 말이 중요한데, 이게 시카고강의를 들으셔야 하는데, 다시 합시다. 인간보다 뭐가 우선이냐 하면, 계명이 우선이라는 것을 요한일서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는 계명의 계명다움을 증거 하기 위해서 따로 새 인간 됐다는 겁니다.
목적은 이 계명의 완성을 증거 하기 위해서, 너에게 이 계명에 머무는 인간으로 내가 새로이 지음 받은 거예요. 뭘로? 화목제물로. 드디어 앞에 화목제물 나오잖아요. 화목제물로 말미암아 너가 구원을 받았으니, 이 계명 안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화목제물의 효과가 발휘되고 있습니다. 그 효과는 이렇게 늘어져서 우리까지 포함되죠. 이게 바로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그 권세가 요한일서에서는 사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정리하게 되면 계명은 뭡니까? 사랑이다. 계명=사랑
자, 다시 요한일서 3장 봅시다. 사랑이다. 그럼 목사님. 흔히 교회에서 하는 말이 맞네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표어처럼.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합니다. 그 말이 다 맞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를 겨냥하느냐 하면,인간에게 겨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아닌 인간이 없기 때문에. 그럼 지옥이 있다는 것은 다 쓸데없죠. 차라리 그럴 것 같으면 여호와증인한테 가든지. 여호와증인에게서 지옥은 겁주기 용이에요. 불교 같아요.
불교의 윤회설이 뭐냐 하면, 겁주기 용이에요. 나쁜 짓하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쥐새끼로 태어난다. 쥐새끼에서 한 바퀴 더 돌면, 쥐새끼로 태어났다 죽었다. 그 다음에는 바퀴벌레다. 바퀴벌레로 태어났다 죽으면 그 다음에는 뭐? 한 번 한 것은 안 하고 다른 동물로 바뀌죠. 모든 동물을 섭렵하고 난 뒤에 결국은 인간이 돼요. 왜? 대승적견지에서 봐주기 하기 때문에. 불교는 안 믿고 기다리면 다 부처가 돼요. 해탈되게 되어 있어요. 성질 급한 사람만 머리 깎지 안 그런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부처가 되게 돼있어요. 이게 불교에 대자대비에 다 들어있는 겁니다. 뭐, 불교논리는 그렇게 구태여 이야기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목사님. 하나 의문점이 드는데요. 주님이 말씀하실 때, 내가 새 계명을 주노니, 그게 여기에 합당한 그 말씀이십니까?”그렇죠. 그 새 계명에 열두제자가 아무 기여한 바가 없습니다. 멍청하게, 저 분이 무슨 이야기하느냐? 계명이 있는데, 왜 새 계명이냐? 완성될, 이제는 예수 안이 완성했죠. 예수님이 완성했죠. 예수 안을 만들어버리면, 하나의 천막으로 만들어버리면, 여기다가 사람을 집어 넣어 버리면, 뭣도 모르고 완성체 안에 다 들어오게 됩니다.
마치 혼인잔치에, 놀다가 혼인잔치에 끌려와가지고, 혼인잔치에서 잔치국수 먹는 식이에요. 단 조건이 있어요. 이 잔치는 너의 개인구원을 위함이 아니라, 아들의 주되심, 아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지, 너를 기쁘게 하기 위한 용도로 혼인잔치가 있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야 되죠. 근데 그 중에 어떤 사람이 나는 놀았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우기는 사람은 예복을 입지 않아요. 뭘 안 입느냐 하면, 예복을 입지 않아요. 그러면 들어왔다가 쫓겨나가요.
예복을 입는다는 말은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 보면, 그리스도로 옷 입는 거예요. 이건 모든 인간의 지위와 학력과 성격과 성질, 모든 것을 다 옷 하나로, 똑같이 유니폼 하나로 통일시켜버려요. 그러니까 자기자랑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지난 시간에 뭐든지 다양성은 예수님을 경유해서 하라고 했잖아요. 예수님이 모든 세계를 연결시키는 축이에요.그걸 CPU라고 하잖아요. 중앙처리장치. 모든 들어오는 것의 입력은 중앙처리장치를 통해서 배달되게 되어 있고. 또는 모든 택배는 물류센터에서 걸러가지고 대명동은 대명동으로 따로 가고, 동인동은 동인동으로 따로 가듯이, 정비소에 온 것은 거기서 분류가 되어야 트럭에 싣고 집중적으로 배달해주듯이.
일단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나와서 주님으로 회수가 되고, 주님께서는 자기백성에게만 영생을 주도록, 세상의 모든 정치라든가 경제를, 이렇게 기름 값 오르락내리락 하고, 곡물 값까지 다 조정하는 겁니다. 특히 시카고에서 그런 일을 많이 하죠. 주님이 특별히 시카고를 신경 쓰는 것은 아니지만. 전 세계 곡물시장과 원자재 시장의 가격을 결정짓는 곳이에요.그래서 시카고에서 무슨 난리가 나면 전 세계가 전부 다 경제공황이 일어날 정도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럼 한 곳에서 하지 말고 여러 곳에서 하면, 근데 그걸 여러 곳에서 하면 경제적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에. 항상 금융의 일 번지는 월 스트리트 이렇게 한 곳에 집중하게 되어 있어요.
그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목적이 없어야 된다는 것은, 그 목적이 뭐냐, 하나님 아버지를 증거 하는 것이다.그 아버지가 구체적으로 뭐냐, 구체적으로 예수 안이죠. 예수 안이 뭐냐, 새 계명이죠. 하나의 계명. 그 계명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딱 깨보니 사랑이다. 사랑은 어떤 것인가? 그건 10분 쉬고 다시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