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123서

버지니아 강의18강 16091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0. 2. 08:16
2016-10-01 23:42:34조회 : 15         
20160913 요한1서 버니지아강의18-이 근호 목사이름 : 이미아 (IP:122.43.165.245)

20160913 요한1서 버니지아강의18-이 근호 목사

 

이번 시간에는 요한일서 2장 27절,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기름 부음의 목표가 나와 있죠. 기름 부음은 독자적이지 말라. 홀로 사는 것이 아니다. 거하라는 말은 니가 새로운 소속에 포함되었다. 전에 니가 빠져나올래야 빠져나올 수 없는 것처럼, 기름 부음이 너를 사로잡아서,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 안에서, 성령 안에서 바깥으로 탈출하고자 해도 너는 실패할 것이다.

 

그러면 이 말씀이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우리는 지키는 말씀이 아니고 확인되는 말씀이에요. 지키는 말씀이라는 것은, 내가 지켜야 현실이 되는 것은 지키는 것이고. 확인되는 말씀이라는 것은, 이미 이런 현실이구나, 하는 것을 재삼 재차 반복해서 깨닫는 겁니다. '에구, 바보같이 또 내가 이곳에 있으면서도 저곳을 사모했구나.' 또 확인하고. 뭐 돌아 서면 마찬가지겠지만. 또 다시 되게 되면 '아이구, 바보같이 성령이 함께 있는데, 천국 안에 있으면서도 지옥에 있는 사람을 그렇게 부러워했구나.' 하는 겁니다.

 

부러워한다는 것은 그 부러움을 통해서 자기 소속의 정체를 밝히는 겁니다. 세상을 부러워한다는 것은 세상에 속했다는 건데, 우리도 여전히 옛 사람 때문에 세상을 부러워하게 되죠. 근데 기름 부음이 가만히 있습니까? 가만히 있지 않습니까?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아이비리그Ivy League도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아이비리그에 가서 영생 얻을 것 같으면 다 기를 쓰고 공부하죠. 천국은 아이비리그하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염려되는 것은 아이비리그가 천국의 귀한 복음을 가로막지나 말았으면 좋겠다는 이런 생각이 들죠. 그래서 기름 부음의 목표가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 안에 소속돼서 거한다는 겁니다. 거한다는 말을 다시 말씀드리면 나의 어떤 행동과 관계없이, 그 상태, 그 상황 안에 놓여있다. 또는 갇혀있다. 그러니까 좋은 데 갇혀있는 거죠. 나쁜 데 갇혀있는 것이 아니니까. 괜히 바깥에 나가도 마귀한테 걸리지 않는, 안전한 벙커 안에, 또는 방주 안에 있는 거죠.

 

새로운 방주를 뉴왁 이라고 하잖아요. 새 방주라는 이름의 도시잖아요. 우리는 새로움 안에 갇혀있는 겁니다. 노아가 보호를 받듯이. 뭐 뉴왁 간다고 구원받는 것은 아니고. 우리는 새로운 성령 안에서 있다. 이 말이죠. 그럼 기름 부음에 목적을 알았어요. 어디 거하게 하는 거죠. 우리의 행함과 관계없이, 그 상태 안에 안정적으로 영원히 놓여있는 상태가 돼가는 것이 기름 부음의 목적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 기름 부음이라는 말은 뭐냐, 이것은 바로 만남입니다. 기름 부음이 만남이에요. 만남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내 속에 것을 끄집어내는 것을 만남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불자가 도를 닦는 것, 절대로 만남이 아닙니다. 부처한테 비는 것, 이걸 흉내 내는 거죠. "니만 부처야? 나도 부처될 수 있어. 니만 해탈해? 나도 해탈할 수 있어." 하나의 모델로 삼아서 따라 붙는 것은, 이것은 만남이 아니고 하나의 목표가 되겠죠. 그러나 그렇게 되면 계속해서 자기는 고립되어 있습니다. 만남이라 하는 것은 나 여기 있고 나 말고 다른 존재와 부딪힘을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면 이 만남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만남이 유용함이 되는 경유가 있고, 만나자마자 유용함에 실패해서 헤어짐의 경유가 있죠. 만났는데 그걸로 끝까지 헤어지는 거예요. 만나서 한 덩어리가 되는 반면에 둘이 만나서 그냥 둘이 빠이빠이 하고 헤어지는 거예요. 만남에는 이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기름 부음이라는 것은 성령이고, 성령과 인간의 만남이 될 때, 물론 하나로 융합되는, 융합이라는 말은 어려우니까 성경에 있는 대로 합시다.

 

연합된다고 합시다. 또는 성경에 있는 대로 하나가 된다. 또 성경의 다른 말로 하면 세례다. 세례, 연합, 하나, 다 같은 말이에요. 세례라는 말이 어렵기 때문에, 연합으로 해서 하나로 합쳤다. 이렇게 보시면 좋겠습니다. 만남이라는 것이 하나로 합쳐야 되는데, 이것이 헤어져버리죠. 그러면 복음이라는 것은 인간이 있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나타나가지고, 어쨌든 만나잖아요. 만났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불러서 이렇게 영원히 성령에 거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끝까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남하고 만날 때는 공통점 찾고, 취미 찾고, 저 사람하고 사귈 가능성이 있는가, 없는가를 살피잖아요. 우리 인간들의 만남은 무엇을 위함이냐 하면, 나의 유익을 위함입니다. 나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인지, 손해가 되는 사람인지. 만나서 이용가치가 있는지, 빼낼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빼냄을 당하는 위험한 요소가 있는 사람인지. 분간해서 적당히 관찰하고, 적당히 탐색전 벌이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갈라서는 겁니다.

 

만남이라고 하는 것은, 만남이 하나로 성사되기 위해서는 그 결정권이 나한테 있다. 이래 되는 겁니다. 놀라운 것은 이 사랑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사랑해서 부부했는데, 부부라고 해서 하나 되는 것이 아니고, 살아가면서 계속 살 것이냐, 말 것이냐, 계속 탐색하고 있어요. 물론 애까지 낳으면 탐색한 변수가 생겨가지고, 헤어지는 조건이 좀 더 어렵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못 헤어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성령의 만남이 하나 되기까지는, 성령께서 뭐를 제공해야 된다는 논리에 이릅니까? 사랑을 줘야 된다는 겁니다. 사랑이 되는데, 사랑의 목표는 바로 하나 됨이다. 그러면 물어봅시다. 혼자 살고 싶어요? 누구와 한 덩어리가 되어서 살고 싶어요? 어느 쪽에서 살고 싶습니까? 혼자 살고 싶어요. 태어난 태생이 혼자 살고 싶어요. 그러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내용은 뭘까요? 태생이 혼자 살고 싶은 인간을 기어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과 함께 살고 싶은 그 작업의 기록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 되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혼자 살고 싶기에, 혼자 사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아까 이야기했죠. 저 사람이 나한테 이익이 되는가? 손해가 되는가? 그럼 이거는 그 사람을 같이 나한테 이용하겠다는 것, 이익이 되는 조건하에서만 내 부하직원으로, 내가 다루는 하녀로, 하인으로 할 때만, 당신과 같이 살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조건이 있어요. 나한테 이익이 될 경우에만. 그러다 결혼 하고 10년 후에 이익이 안 된다 싶으면 갈라설 준비를 하죠. 먼저 변호사 만나가지고 지금 헤어지면 몇 퍼센트 받습니까? 뭐 이런 것 물어보러 몰래가서 만나고. 잘해주면 이거 또 인간 개과천선 되는 모양이라, 이렇게 생각하는데, 개과천선은 없습니다. 성격은 변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탐색전을 계속하는 거예요.

 

결국 결혼이란 하는 것은 본게임 뛰기도 전에 탐색전하면서 볼일 다 봐요. 치고 박고하는 겁니다. 계속해서 저 아내가 나한테 얼마나 이용당할 것인가? 남편이 얼마나 이용당할 것인가? 맨 그 탐색들을 하는데, 그 탐색을 누가 배우느냐, 자식들이 배워가지고 자식들이 커서, 여자가 남자 고를 때, 나는 우리 아빠 같은 남편을 구할래! 라는 딸도 있는 반면에, 어떤 경우라도 나는 우리아빠 같은 남자 만나면 죽어도 결혼 안 한다고 하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죠. 그건 평소에 엄마가 어땠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아빠가 엄마한테 잘 해주면, “나는 아빠 같은 남편이 아니면 결혼 안 해!” 가 되고. 아빠가 엄마 구박하게 되면, “차라리 그런 남자 만나느니 내가 결혼 안하고 죽고 말지.”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배운 대로 사니까.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나한테 참고사항이 되는 겁니다.

 

자, 그럼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은 만남이었는데, 만남은 그냥 헤어지면 안 되니까 주께서는 만남과 동시에 뭘 퍼붓는다? 사랑을 퍼붓는데, 그 사랑에 대해서, 어? 사랑은 좋은 건데, 받아들이면 되지? 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열두 제자의 관계를 보니까 그렇게 만만치 않더라 이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과 예수의 만남과, 인간 대 인간의 그 만남과 별 다를 게 없어요.

 

제자들도 예수님 볼 때도 이용가치를 따졌고, 평소에 인간이 인간을 볼 때에 이용가치만 따졌고. 세상은 이용가치만 따지니까 눈치 채고 헤어지지만, 주님은 분명히 이용가치만 따진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에게 이용가치를 당해줘요. 당해준다고요. 사도행전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베드로가 설교한 장면이 나오는데, 36절에,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너희들이 폐기처분한 그 사람을 하나님은 주워 다가 이 세상의 영원한 왕으로 삼았다고 하니까, 그 뒤 37절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하거늘”

 

우리가 어찌 할꼬? 그 안에 분명히 예수님을 본 적이 있는데,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죠. 왜 성사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을 만났으면 믿으면 되는데, 왜, 안 믿고 있다가 죽었다가 부활하고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야 허겁지겁 예수님 앞에 어찌 할꼬? 하고 나서느냐 말이죠. 그러면 그 가치를 알았단 말입니까? 몰랐단 말입니까? 몰랐다 이 말이죠.

 

그리고 난 뒤에 38절에,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래 되어 있죠. 이 본문이 참 재미나요. 예수님을 놓쳤는데, 놓치고 보니까 아깝더라 이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돼요? 옛날 행색이 그대로 나오죠. ‘아, 이렇게 이용가치가 있는데, 이용가치 있으니까 내가 믿어야 되겠다.’ 하고 나서죠. 그럼 그게 믿는 겁니까? 또 이용가치 노리는 겁니까? 또 노리는 거예요.

 

그러가 더 난해한 것은, 전에는 예수님 사람 몸으로 있을 때에는, “아저씨 좋게 지냅시다.” 하면서 악수 먹고. 그러면 좋은 관계로 지내는 건데, 지금 예수님의 육체가 없잖아요? 지금 부활승천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안 계신, 예수님이 부재한 상태에서 예수님과 사귄다는 것은, 예수님이 이용가치가 있다고 해서 어떻게 사귈 거냐? 하는 문제입니다. 하늘에 대고, “주님! 어찌 할꼬? 제가 귀한 것을 놓쳤습니다. 좀 봐주세요?” 이렇게 하면, “아이구, 니가 뒤늦게 내 가치를 알았구나? 내가 갈게.” 하시면서 쪼르르 쫓아오시는 겁니까?

 

예수님은 안 오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방법에 놀아나지를 않아요. 악수하자고 한다고 같이 손 내미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치워라! 이거!”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여 돈을 바치면 사람들은 되게 좋아하죠. 주님께 돈 바치면 “치워라! 이거!” 하시는데. 어디서 사람 사귀는 행세를 나한테 똑같이 적용시켜? 먹힐 것 같아? 니가 어디다 써 먹을라고 해? 사람한테는 정성이면 통하지만 나한테는 정성이면 안 통한다 이 말이죠.

 

그럼 이건 뭐냐, 바로 끊어진 단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버렸지만 아이구, 고맙게도 하나님 아버지가 이걸 살렸구나. 라는 말만 내용이 되는 것이 아니고, “누가 버렸어? 누가 버렸어? 내 아들 누가 버렸어?” 뭐 누가 버렸겠어요? 세상 사람이죠. 바로 그러니까 너희들은 애초부터 너희들의 사고방식과 숨겨진 하나님의 사고방식은 단절되어 있는 거야. 십자가의 의미는 단절을 확고히 하는 의미입니다. 예수 믿으라고 십자가 있는 것이 아니고. 믿지 못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십자가를 선포하는 거예요.

 

누가 믿었으리요? 누가 알았으리요? 그걸 그대로 계속 적용시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선교단체나 교회를 저는 거부하고 싫어하는 겁니다. 그건 구원받는 사람들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그들의 취지와 그들의 모든 작정과 경영방식이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고, 어쨌든 사람들을 불러다가 구원시키려는 그 사고방식이 단절의 의미를 누락시키고 있어요.

 

“어쨌거나 목사님! 단절되면 못 가잖아요?” 그 뒤에 보세요. 성령세례를 받죠. 성령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면, 그게 뭐냐 하면 니가 나를 사귀고자 하는 것, “중요한 것을 놓쳤으니까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라도 관계 맺읍시다.” 하는 그 자체가 죄에 해당되는 것을, “어디 감히 단절을 니 입으로 그걸 돌파하려고 하느냐?” 단절을 돌파하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뭐가 돼요? 죄가 되는 거예요. 아쉬우니까 찾잖아요. 사람들이 사람을 왜 찾습니까? 자기 필요 없으면 내칩니다. 왜 찾습니까? 아쉬워서 찾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흔한 이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사랑이란 사귈 때는 몰라요. 헤어지고 난 뒤에 사랑이라는 것을 비로소 느끼는 겁니다. 헤어지고 난 뒤에. 아깝다. 헤어질 때는 온갖 큰소리 다 치죠. “가! 가란 말이야!” 낙엽 던지면서 해놓고는, 가고 난 뒤에는 이상하게 그만한 사람이 없네. 그래서 헤어짐의 특징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저는 이렇게 봅니다. 만나고 난 뒤에 헤어짐의 특징은 이걸로 끝나요. 독백.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거죠.

 

아내 죽고 난 뒤에 수시로 꽃을 사들고, 처량 맞게 비가 철철 내리는데 가가지고, 일부러 비 맞는 고통을 자청하면서, 공동묘지에 가서 ‘여보! 내가 왔습니다. 고등어 굽어주는 당신은 어디 가고, 콩 갈아서 국수해주는 당신은 없고, 나 당신 없어서 못 살겠습니다. 진작 잘해줄걸.’ 하고 한 바탕 눈물인지, 빗물인지 분간은 안 되고. 우산을 쓰면 안 돼요. 일부러 처량하게 비를 맞아줘야 해요. 그럴 때는 옷을 나일론 계통, 방수계통의 옷을 일부러 입고 와 가지고 지가 납득이 되는 쇼를 벌이고 하는 거죠. 청승을 떨고 처량 떨면서 하죠. 그래놓고 집에 와서 혼자 중얼중얼하죠.

 

이게 독백이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헤어지긴 헤어졌으나 깔끔하게 헤어져야 하는데, 현실은 헤어졌지만 자기마음은 헤어짐을 용납을 하지 않기 때문에, 대치물이 있어야 돼요. 그게 주권사상이라는 겁니다. 진짜 주권사상은 십자가를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사상인데, 인간의 주권사상은 인간이 납득이 되는 하나님이어야 된다는 그 조건하에 신의 주권사상을 만든 겁니다. 당신은 통치하시오. 당신의 통치를 흔쾌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알라는 위대하다. 뭐 이런 거예요. 여호와는 위대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이 와도 못 알아봤어요. 왜?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싫어버린 바가 되었기 때문에. 인간이 여호와 주권사상으로 턱하니 버티고 있으니까, 진짜 하나님의 주권이 십자가의 모습으로 오니까 내치는 거예요. 평소에 잘하고 있는데 쓸데없이 왜 또 죄인이라고 들이댑니까? 그래서 밀치는 거죠. 밀치니까 넘어져버렸죠. 넘어진 그 사건이 바로 무슨 사건? 십자가 사건인 거예요.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은 바로 내가 떠밀었다. 강력하게 저지했다. 강력하게 반발했고, 내 영역에 오지 말라고 밀쳤다는 그 증거가 십자가인데, 십자가가 그냥 십자가가 아니고 피를 흘리죠. 그 피를 보면서 우리는 뭡니까? ‘아, 나는 인간도 아니구나! 나는 인간도 아니구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결국은 마지막 배신을 하도록 만들어요. 어쨌든 간에 배신하게 만들어서, 그 배신할 때만 배신이 아니었어요. 그전부터 베드로 본인이 몰랐지, 내 속에 배신의 성향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

 

참, 하나님의 말씀은, 작전은 아주 예민하죠. 조밀하고. 촘촘하고. 빈틈이 없어요. 기어이 죄인 되게 만들잖아요. 기어이. 근데 이 독백을 하는데, 이 독백하는 이러한 버릇은, 결국은 뭐냐 하면은, 뭐 하나님이 됐든, 누가 됐든 간에, 나의 감정은 내가 살려야 되겠다. 나는 포기 못하겠다는 것으로 가득 차죠.

 

그런 독백을 9개월 된 외손녀나, 외손자를 두고도 할아버지들이나 할머니들이나 늘 해요. “아이구 요거 이 아몬드 맛있어 보여요? 그래 따라서 웃었어요?” 그런데 9개월이라 말도 못 알아들어요. 할아버지가 무슨 말하는지도 몰라요. 이이이잉~ 팔만 흔들 뿐이에요. “그래? 맛있다 이 말이지?” 지가 내뱉은 말을 자문자답하면서. 애는 앙앙앙앙~ 팔만 흔들고 있어요. 일어서지도 못하고 앉아가지고. 자기 즐거움을 의도적으로 유발시켜놓고 그 즐거움을 자기가 회수하면서, 외로움을 벗어날 시도를 하고 있는 겁니다. 혼자 있는 외로움을. 그래서 손자, 손녀 없으면 외롭다고 하잖아요.

 

평소에 혼자 노는 시체놀이를 열심히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노는 버릇이 그대로 있는 거예요. 그래놓고 뭐 자기이익이 되면 열심히 예수 믿고. 교회 뭐 몇 달 안 나가도 오히려 월급 더 올라가고 편안하게 되면 성경도 안 보고, 기도도 안 하고, 교회도 안 가고, 관심도 없고, 동영상도 안 보고, 그냥 편안하게 히히거리고, 동영상 틀어놓고 잠옷 바람으로 왔다 갔다 해가지고, 한바탕 지나가서 한 20분 지나간 뒤에 와서 그 다음 듣고. 이건 뭐 전부 다 혼자 노는 게임이에요. 혼자 노는 버릇이에요. 오늘도 예배드렸다고 치고.

 

주님께서 연합이라는 만남을, 성령이 오면 연합된다고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확인할 길이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기백성에게 확인할 길을 줍니다. 자, 이제 그 확인하는 방법을, 제가 말씀을 제시해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 한 번 봅시다. 14절, 15절, 누가 한 번 크게 읽어보세요. 14절,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절,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자, 방금 읽었던 것이 이사야 6장에 나오는 예언의 말씀이죠. 여러분, 예언의 말씀은 흐지부지 됩니까? 반드시 현실화됩니까? 성취라는 말도 좋지만, 이 땅 자체가 주의 땅으로 변화됨에 따라서 이 땅에 예수님의 십자가 무늬가 얼룩덜룩하게 있죠. 이 말씀이 그대로 이 땅에 반드신 실현되고 성취됩니다. 우리가 못 알아봐서 그렇지만. 그걸 알아보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밖에 없어요. 이 세상 전부의 모든 변화가 십자가의 얼룩무늬라는 사실. 이거는 어느 하나가 십자가와 무관하게 되는 사건은 없어요.

 

모든 사건은, 김정은이 핵실험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서 나타난 사건들입니다. 십자가와 연결된 사건. 참,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믿어야 될지, 구라가 너무 심한 구라가 아닌가, 무슨 논리가 김정은이 핵실험하고 무슨 관계가 있냐고 그렇게 하는데, 그게 연관이 되어 있어요. 이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만남을 성사시키는데 있어서, 제가 질문을 던지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진짜 예수님을 만났느냐? 그냥 이용차원에서 예수님을 그냥 이용해보려고 하느냐? 그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 그 질문을 던져놓고 그 답변으로 제가 제시한 것이 지금 이 본문을 언급한 거예요.

 

근데 이 본문의 제일 마지막에 뭐로 되어 있느냐 하면,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고 되어 있죠.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는 말을 아주 쉬운 말로 하게 되면, 내가 허락하는 한 너희가 절대로 고침 받는 일은 없다. 내가 너희들이 내 말 듣고 고침 받으면 손에 장을 지진다. 아주 단호함이에요. “내가 모든 말씀을 준 것은 너희들이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고치고 싶어도 내가 나서서 저지할 거야. 내가 나서서 그걸 못하게 할 거야.” 라는 예언의 말씀이에요.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깨닫지 못해야 정상이라는 이 말이거든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라고 내가 이 말씀 줬기 때문에 니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이런 뜻이다 이 말이죠. 마치 뭐냐 하면 그 강대상에 예수님이 설교하시는데, 어떤 사람이 실수를 해서 “아멘”했어요. “아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무슨 아멘이야? 뭘 아멘이야? 내 뜻도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아멘이야? 그리고 아멘 못 할 거야. 아멘 못하고말고. 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지금 강대상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거예요. 온 인류를 향하여.

 

그러니까 이 교회가요, 뭐 예수님의 뜻을 뭐 반영하는 정도가 아니고요, 반대해요. 교회라는 자체가 반대해요. 뭐 절은 말할 것도 없지만. 자꾸 사람 편에 서버리면 이거는 십자가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사상, 하나님의 주권사상이 나와 버려요. 하나님의 주권사상. 신은 무섭다. 신은 위대하다. 신은 장엄하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그 장엄함 앞에서 약합니다. 약하디 약한 여러분! 큰 것을 품 안에 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믿으세요. 여러분 알아줍니다. 사랑하니까. 이거에요. 이거.

 

뭐가 빠졌어요? 뭐가 날아가 버렸어요? 고칠까 두려워함이라. 이게 날아가 버렸다니까요. 내가 온 것은 너희들이 깨닫지 못하게 함이라. 이 예언의 말씀을 그럼 어디서 찾습니까? 어디서 발견해야 되겠어요? 강의에서 이 시간쯤 되면 앞에 했던 것을 다 잊어버려요. 제가 다시 한 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인간의 모든 만남은 이용가치, 유용성 아니면 안 만납니다. 만나서 사귀더라도 저 인간이 동업을 빙자한 사기를 치는구나.

 

보증 선다는 말이 뭐예요? 보증서라고 하는 말은 안 하잖아요? “동업합시다.” 또는 “투자하세요.” 라고 하죠. “좋은 아이템이 있는데, 투자하세요.” 이게 동업이고 이게 보증이에요. 보증서서 사기 당했다고 하는데, 보증이라는 말은 없고, 전부 다 공동투자해서 사기당한 거예요. 오늘날의 부부의 개념도 사업하는 사람한테는, 여긴 사업하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입니다만, 사업하는 사람한테는 여자를 보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고, 여자의 친정집안의 재산을 보고 결혼을 하죠. 세상에 자식 미운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식이 어렵다는데 가만히 있을 부모 없잖아요.

 

그럼 사위되는 사람이 자기 아내한테, “여보, 친정 한 번 갔다 와. 이거만 메꾸면 깔아놓은 돈 다 회수하게 되어 있어. 우린 대박이야. 요것만 메꾸면 되는데, 한 이천 필요해.” 물론 한국은 이천이지만, 미국은 이천달러죠. 그러면 딸이 와가지고 엄마 붙들고 훌쩍훌쩍 짜면서 “언니는 아이비리고 보내주고 나는 고등학교 보내주고?” 그러나 그 테마도 한두 번 써먹어야지. 죽을 때까지 써먹어요. “언니는 대학가고 나는 고등학교만 보내주고?” 엄마가 “공부하라고 할 때 공부 왜 안 했어?” “그때 엄마 장사한다고 해서 도와준다고 못 했잖아?” 또 핑계도 엉뚱한 핑계대가지고. 기어코 못 다한 몫을 유산으로 빼내기 위해서. 가만히 있는 거 보니까 전부 다 그렇게 산 모양이라. 그렇게 찔찔 짜니까 “그래서 뭐? 뭐?” “김서방이 요거만 도와준다면...” 결국 또 돈 이야기. 엄마가 돈 없다고 하면 집 대출받으라고 하고. 담보해서.

 

인간은 이용가치가 없으면 사귀지를 않습니다. 그 단단한 혈통도. 부모는 자식을 혈통으로 보죠. 자식은 그 혈통을 혈통으로 보지 않고, 투자 백그라운드로 봐요. 따라서 자식에 있어서 혈통이란 조건이 있어요. 돈 있는 부모가 혈통이고, 돈 없는 부모는 짐입니다. 참, 너무 강력하게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 평소에 하는 태도가요, 자기밖에 모르는데, 거기다가 뭐 예수님 말씀, 무슨 말씀, 아이구, 잘도 믿겠다. 곡해해서 믿어버리고, 주권사상 믿으니까, 하나님 믿으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이거는 더불어 옵션으로 오는 줄 알았어요.

 

제 1인자를 믿는데, 제 2인자는 땡겨서 그냥, 옵션으로, 국밥에다 숟가락 하나 더 얹는 것처럼. 그렇게 얹으면 믿는 걸로 알고 있어요. 세트로. 하나님 믿는데 아들 믿지. 아들의 의미도 몰라요.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예 너희들을 모른다는 뜻인데, 하나님을 아는데?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데? 하나님이 인격자인 것을 아는데? 세상만물은 하나님이 만들었고 하나님이 운영하는 것을 아는데? 그거는 주권사상이에요. 주권사상. 신의 주권사상이에요.

 

아이구, 제가 그 말 들으면 속상해요. 정말. “목사님. 주권사상 아닙니까?”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의 본성을 완전히 까발리기 위해서 오셨어요. 까발리는 근거가 이사야 6장 읽었던 겁니다. 너희들은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한다. 왜? 이용가치로 신을 따진다면 나는 피해가겠다. 나는 기피하겠다. 너희들이 나를 다른 사람 사귀듯이 나를 어떻게 한번 해보겠다고 한다면 내 모든 말씀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말씀으로 적용되고, 더 결과는 뭐냐,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너희들은 두 번 다시 내 말 듣고 고치는 법은 없다. 이걸 분명히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결국 인간이 남는 것은 뭐냐 하면, 오늘 강의의 제목을 붙인다면 고립자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신이에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신처럼 되는 거예요. 신은 옆자리를 준비하지 않습니다. 항상 신은 자기만을 위한 자리만 자기가 꿰차고 있을 뿐이에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이거는 고쳐질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도 안 고치잖아요. 니가 신인 것을 고친다면 내가 손을 장을 지진다는 식이에요. 절대로 너희들은 자기 본성을 못 고칩니다. 한 번 신이면 영원한 신이에요. 한 번 해병대는 영원한 해병대에요. 고쳐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고칠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왜냐하면 이사야 6장을 이미 깔아놓았기 때문에. 어떤 누구도 고침을 받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그런 것으로 일단 전체를 규정시켜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다고요? 스쳐지나가죠. 열두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다녔다고요? 스쳐지나가는 거죠. 3년 동안 따라다녔다고요? 3년 동안 따라다녀 봤자, 이걸 압축시키면 카이로스, 한 순간이 돼버려요. 한순간.

 

그래서 인생은 뭐라고 했습니까? 안개니라. 안개의 특징이 뭡니까? 있다가도 없어지는 거죠. 생일축하합니다~♬하다가, 죽을 때 되면, 죽고 난 뒤에 6개월 지나면 그 집 할아버지 이름도 몰라요. 다 잊어버려요. 나중에 자기 아버지, 어머니이름도 돌아가시면 다 잊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엄마가 신이 아니고 내가 신이기 때문에. 내가 신이에요. 그걸 어디서 찾느냐, 자식들 행동하는 거 보면 압니다. 아무리 맞춰서 부모효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부모가 어렵다고 하면 도망치기 바빠요. 미국까지 따라오면 독일 가버리고, 독일 가버리면 남미로 가버리고. 따라오지 마! 따라오지 마! 귀찮게 하지 마! 숨 좀 쉬자!

 

우리도 부모한테 그렇게 살아왔고, 그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DNA로 그대로, 빈 그릇에 아이스크림 채우듯이, 그냥 거기다가 우리의 본성을 아이스크림 꽉꼭 눌러서 채우듯이 다 채웠습니다. 자식을 보면 바로, 내가 잊었던 내 어릴 때 본성을 그대로 되풀이해서 자식이 보여줍니다. 그런 마음으로 예수 믿는다? 아, 정말 예수 믿는 사람 있으면, 저는 기적이라고 안고 싶어요. 정말 우대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자진해서 자기 신 됨을 포기할 사람이 있을까요? 오! 이거는 아니죠.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 예수 믿고 뭘 믿어도 자기의 신 됨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기존에 나왔던 모든 개혁주의 신학의 문제점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잘못 안다. 이건 OK이에요. 근데 잘못을 알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바뀔 수 있다. 이건 NO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야기했죠. 니가 원치 않는 길로 간다. 그런 이야기할 때 베드로가 성령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이미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고 나중에 오순절 되면 성령을 받게 되죠.

 

그럼 성령 받고 난 뒤에는 베드로가 지가 원하는 대로 갔을까요? 원치 않는 길로 갔을까요? 원치 않는 길로 본격적으로 가게 돼요.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끝까지, 사도요한이나 베드로, 이 인간들이 얼마나 고립적인 신처럼 살아왔는가를, 그게 왜 주님 앞에 죄가 된다는 사실과, 그리고 예수님이 자빠져서 피흘려가지고, 그 피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그 사실을, 절대적 고립자인 나와 예수님의 피와 연계시켜서,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전파시키기 위해서, 주께서는 원치 않는 길로 가게 하는 겁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것은 두 번 다시 안 해요. 왜? 했기 때문에. 만약에 요단강 건널 때, 또 물 꽉 차 있었으면 사람들은 전부 다 모세에게 눈 다 돌려서 모세 지팡이를 봤을 겁니다. “모세님. 또 물이 있네요. 에? 했던 것 있잖아요? 했던 것? 지팡이가지고 물을 대기만 해도 갈라지는 것?” 근데 두 번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예 물속에 들어갑니다. 물은 끊어지지 않아요. 제사장 죽을 뻔 했을 거예요. 언약궤 메고 중앙로 들어갈 때 제사장 아마 혼났을 거예요. 아마 어떤 제사장은 몰래 구명조끼 장착했을지도 모르죠. 사람이 믿을 걸 믿어야지, 물속에 들어간다면 못 믿죠.

 

원치 않는 길을 간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사태를 일으킬지 예측이 안 돼요. 주께서 내일 일에 무슨 사태를 준비해가지고 화들짝 놀래게 만들고 경기 나게 만들지 예측이 안 됩니다. 근데 경기 난다는 것이 잘못이에요. 왜냐하면 여전히 우리는 내가 천상천하유아독존, 내가 최고가 되겠다는 이 성격을 뭐 포기를 못하니까. 그래서 끝까지 성령이 함께 하지 아니하면 구원 못 받아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그냥 쪼개가지고 성령 있는가만 봐요. 내가 성령 받고 인간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안 봅니다. 성령 들어있으면 성령이 알아서 제대로 죄인 되게 만들었던 거예요. 그걸 가지고 무슨 법이라고 하면, 성령의 법이라고 해요. 전에는 율법의 법이라서 내가 알아서 고치고, 내가 알아서 인간되는데, 이제는 그건 실패로 끝났고, 이제는 성경이 강권적으로 기름부음이 내빼지 못하게 합니다. 이게 하나에 속했기 때문에. 주 안에, 성령 안에 거하기 때문에.

 

자, 그렇다면 이 고립자, 그러면 고립자로 만드는 이유가, 인간이 스스로 신이라는 의식을 인간이 태어나서 일부러 만든 것이 아니고, 이건 인간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적은, 예수님의 적은 마귀다. 맞는 말이죠. 동시에 예수님의 적은 인간이다. 그 말도 똑같은 의미로 맞는 말입니다. 그럼 그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 근거는 바로 마태복음 16장에 나와요.

 

23절에 보면, 유명한 구절인데,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분명히 사단아 물러가라고 했죠?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우리 같으면 니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탄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이렇게 해야 될 것을, 본문에서는 뭐냐, 니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그러면 인간의 일은 하나님의 일에 합치가 됩니까? 대적이 됩니까? 대적이 되죠. 반대가 되죠.

 

그걸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서는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육체의 열매. 아니, 육체 없는 인간이 없으니까. “저, 육체 있습니다.” “육체 있으면 니는 신이야. 신으로 행세할 거야.” “그럼 어떻게 고칩니까?” “못 고쳐.” “근데 저 사람은 천국 가잖아요?” “그건 성령이 임했잖아? 이 바보야!” 성령이 임해야 되는데, 왜 자꾸 니 힘으로, 이 말씀가지고 니가 고쳐서 도 닦아가지고 천국에 가려고 하느냐? 성령이 임해야 되는 거예요. 성령이 임해야. 성령이 임한다는 말을 지금 제가 안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거부터 확실히 해야 해요.

 

성령이 인간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인간이 사탄의 일과 동일하다는 그 전제 작업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내가 니하고 상대하는 것이 사탄하고 상대하는 것과 똑같은 거야. 그런 취지에서, 그런 차원에서 니 상대하는 거야.” 라고 성령이 우리한테 말씀을 해줍니다. 그러면 저주받을 사람도 성령이 상대하고, 구원받을 사람도 성령이 상대한다면, 그럼 구원받을 사람을 상대할 때는 저주받아 지옥 갈 사람을 상대하는 것하고 뭔가 달라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우리가 언뜻 할 수가 있죠. 지적하는 것은 똑같아요. 하지만 그건 달라요.

 

뭐냐 하면 요한복음 16장에 보게 되면, 자꾸 찾지 마세요. 찾으면 여러분이 피곤할까봐 제가 걱정이 돼가지고 배려하고 싶어요. 요한복음 16장 8절, 그가 와서, 그라는 말은 보혜사, 성령이 와서 하시는 말씀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거예요. 방금 하버드에 입학했고, 방금 세계에서 제일 큰 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축하는 못할망정 뭐라고 합니까? 성령이 와서 “아이구, 축하한다. 열심히 해라.” 이렇게 성령께서 격려한다는 것은, 평소에 우리가 고립자와 고립자,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그렇게 축하하게 되면 저 사람은 나한테 유용하다는 계산이 서가지고, 내가 축하하고 잘 보이면 쟤가 나중에 출세할 때 이득이 올 거라는 계산을 해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은 그런 게 없어요. 성령과 우리의 만남은 그런 게 아니고, 책망입니다. 방금 취직해서 좋다고 하는 애한테 하는 말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리라” 참, 냉혹하죠. 미국영화에 보면 이런 게 있습니다. 한국영화에도 그런 게 있습니다마는, 주인공인데 오해를 받았어요. 오해를 받아 도망자 신세가 됐습니다. 오해받는 이유가, 주로 그런 영화에서는 경찰 내부의 비리 때문에 그렇습니다.

 

쫒기는 사람은 형사인데, 오해받아서 퇴직했어요. 살인누명을 쓰고 도망가다가 사랑하는 사람의 도움을 받았는데, 주로 사랑하는 여자의 도움을 받잖아요. 영화의 특징은 도움 준 여자가 전부 다 이뻐~ 이뻐요. 이쁜 여자의 도움을 받아 둘이 결혼생활을 할 때, 안 그래도 추적하는 형사들이 드디어 알았는데, 세상에 냉혹하게도 목사 앞에서 결혼선언을 하고 있는데, 실례합니다. 경찰서에서 나왔습니다. 수갑 채워서 체포하는 거예요.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데, 안 기다려요. 그래야 영화가 되거든요. 냉정하거든요.

 

방금 취직해서 좋다고 하는데,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해서, 철컥 채워서 가져가버려요. 다른 사람들은 참 잘했다 하는데, 성령께서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따지는 거예요. 얼마나 냉혹합니까? 이거는 신자뿐만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는 이미 십자가를 근거로 일하시기 때문에, 십자가에 대해서 죄 없다 할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근데 죄 없다는 것을 핑계로 해서 체포한다는 것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구원해주겠다는 겁니다. “이제 너는 꼼짝없이 천국에 가게 되었어! 천국에 합격!”이라는 통지서에요. 그럼 체포된 그들은 뭐냐, 빈 서랍장이 돼요. 서랍장이 되면서 앞으로 살아가면서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하노라” 이 말씀이 구원받은 서랍장 안에 이게 하나하나 쌓이게 되는 겁니다. 많이 쌓이게 되죠. 실제적으로.

 

그 말씀이 오게 되면 우리가 신으로 살고, 신으로 산다는 것은 악마의 앞잡이로 살았고, 그것은 남들 다 그러니까 나도 그렇게 살면 되는 줄 알고 살았죠. 첫 번째 강의에서 제일 먼저 이런 이야기를 한 것 기억하시죠? 인간이 추구하는 것을 행복이다. 20대도 행복, 30대도 행복, 지금 40대 사람들을 보세요? 지금 이 시간에도 열심히 일하잖아요? 그 사람들 왜 일합니까? 코리안 타운에서 열심히 일 하잖아요? 아이스크림도 팔고 열심히 일 하잖아요? 왜 합니까? 행복하기 위해서. 왜 행복해야 되는데요? 남 행복? 아니에요. 나 행복! 이게 인간의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인간의 일을 뭐로 봅니까? 이게 사탄의 일이에요. 누가 이 말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인격모독, 모멸로 보죠. 목회는 어려운 것이 아니에요. 불가능한 거예요. 지금 여러분들은 불가능한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사람의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이 시간에 강의 듣는다고, 이거 할 수가 없습니다. 이거. 또 이런 게 있어요. ‘이거 하게 되면 오늘 못 온 손님 내일 곱빼기로 오시겠지.’ 곱빼기로 오신다고 하는 것은 참 점잖은 분이고, 보통 교회에서는 곱빼기로 안 하고 30배 60배 100배로 온다고 이야기해요.

 

십일조 하게 되면 계산이 빨라야 돼요. 25,600원 같으면 계산이 바빠요. 25,600☓30, 60, 100. 왜 30배 하느냐, 100배달라고 하면 자체적으로 너무 교만하게 보이거든요. 양심이 있지. 처음에 30배로 시작하다가 조금씩 양을 늘려서 60배로, 100배로. 이 비유가 어디서 나옵니까? 씨 뿌리는 비유에서 나오죠. 이 이야기가 돈 소유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십자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인간은 결국 고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그런데 옆에 밭을 보니까 30배 60배 100배 됐잖아요. 불가능입니다. 기적입니다. 내가 그걸 원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고침을 받지 못한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정한 목표, 내가 주는 말씀은, 니 행함으로는 어림도 없다. 니가 도 닦고 해봐야 니 행함은 여전히 고침을 받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괜히 평생 수녀해가지고, 독신선언해가지고, 수녀 한다든지 해봐야, 자개만 짜고 토속된장만 만들지, 그거 뭐 아무 의미가....., 그리고 노는 시간에 기타치고 가스펠 송 부르고. 그러다 늙어서는 노인정에 가서 저그들끼리 십원짜리 화투치고 세월 보내는 거예요. 모자하나 덮어쓰고. 신부도 마찬가지에요. 그 사람들 그거 실수한 거예요.

 

근데 왜 그렇게 하느냐,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남보다 더 빠른 신으로 승진하고 싶은 거예요. 남이 천천히 거북이로 오는 것을 자기는 토끼로, 빨리 자기의 본성이 합치되도록, 나는 신이라고 높이고 싶은 겁니다. 그러다 결혼도 안 하고. 토끼는 원래 중간에 산에서 한 번 자게 되어 있어요. 엉금엉금 기는 거북이가 태극기 꼽아버리면. 세리와 창기가 태극기 꼽아버리면 바리새인들은 자다가 완전히 지옥 가는 겁니다. 그 말도 안 되는, 되지도 않는 경주, 달리기, 레이스를 위해서, 주께서는 이렇게 해요.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달려라! 한 번 붙어봐라! 뛰어!. 더더더더 속도를 내봐! 추월해봐! 되는지?

 

세상에 그 이야기가 오늘날 한국교회, 미국교회, 온 교회에서 바리새인, 왕바리새인 짓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이렇게 바치면 신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바치면 복을 더 받겠습니까?” 계속 사탄의 속임수가 작렬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그 목사는 자기 교회를 가질 때 자기가 신이 되기 때문에. 자기가 고립하면서도 외롭지 않기 때문에. 장사하는 것, 농사짓는 것, 자식 키우는 것, 애 교육시키는 것, 전부 다 결국 자신의 영혼은 내가 절대자 되는 것이라는 선악과 따먹은 그 성향을 한시도 버린 적이 없어요.

 

이거는 정말 성령께서 죄를 날마다,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지 아니하면, 성령께서 함께 아니하면, 그거 뭐 주님만 날마다 대적할 존재일 뿐이죠. 뭐.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성경 왜 봅니까? 고침을 받지 못할 정도로, 니 주제 파악하라는 거예요. 니는 감추고 있지만 나는 이미 안다. 니 신되고 싶지? 신을 이용해서 신보다 더 절대적인 신이 되고 싶지? 그게 사탄의 생각이기 때문에, 주님이 사탄을 이겼다는 말은 바로 그 이김으로 우리를 부숴버릴 거야. 우리 자신을 부숴버릴 거예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