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123서

버지니아강의 15강 16091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9. 30. 18:31
2016-09-28 22:28:06조회 : 45         
20160912 요한1서 버지니아강의15-이 근호 목사이름 : 이미아 (IP:122.43.165.245)

20160912 요한1서 버지니아강의15-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갇혀 있는 사람을 주께서 하나님의 성령을 보내서 건져냅니다. 자, 그렇다면 건짐 받았으면 됐다. 이래 버리면 개인구원에 빠져요. 나 구원받았다. 끝났다. 뉴저지에서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서울대학 갔는데, 수학정석 볼 필요 없지 않느냐, 정철종합영어 안 봐도 되거든요. 서울대학 합격했거든요. 그럼 성경 왜 봅니까? 구원받았는데. 으면 성경 볼 필요 없잖아요. 그거는 왜 봐야 되느냐 하면, 구원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을 증거 하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구원받았나 구원 받았다는 것을 증거 하지 말고, 예수님은 이런 분이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구원을 시켜준 거예요.

 

구원이 하나의 서랍이라면, 거길 열어보면 양말들 있잖아요. 양말들 증거 하라고 우리를 서랍장으로 사용하십니다. 이래 보시면 적당합니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는 서랍장은, 이건 주님한테 의미 없습니다. 그 빈 바구니에, 그 서랍 안에 주님의 것으로 담아야 되는데, 이것을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됩니다. 주님의 것으로 담는다 하니까, 사람들이 주님의 것 중에서 괜찮은 것 담는 것으로 오해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바리새인, 사두개인 이 모든 것도 같이 담아야 해요.

 

바로 내가 바리새인이고, 내가 바로 사두개인이고, 내가 왕 바리새인이고. 왕 바리새인이라고 한 말은 허운석 선교사가 사용했던 단어입니다. 내가 왕 바리새인입니다. 자꾸 왕만두 이런 것들이 생각이 나요. 나쁜 것, 그리고 얍삽한 것, 그리고 성경이 지적한 것, 그걸 우리가 마음껏 담아야 해요. 왜냐, 그 지적조차도 주님으로부터 온 지적이기 때문에. 그런 지적들을 실컷 담아도 이미 서랍장 자체가 구원이기 때문에, 구원에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구원은 어떤 행동도 구애받음이 없어야 돼요. 온전한 자유죠. 온전한 자유.

 

주의 의지로 인해서 발생된 이 모든 상황을 기꺼이 감사하면서 되뇌이면서 그걸 수용하는 인생을 사는 겁니다. 누가 뭐 폭행을 하든, 때리든, 뭘 하든 그거 관계없이, 그것마저도 구원받은 사람한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걸 받으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그 안에 우리 옛사람도 놓여있고, 그 옛사람에 대한 주님의 가혹한 질책들이 계속 주어지죠. 그 바뀜이 결국 무엇에 대한 바뀜으로 이해되어야 하느냐 하면, 옛사람이라는 것이 도대체 뭐냐 하면 바로 우리가 주체였던 주체로서, 내가 주인공으로 살아왔던, 주체라는 말이 너무 어려우니까 바꿉시다. 주인공 노릇하며 살아온 거예요. 주인공 노릇이라는 것이 어릴 때 소꿉놀이 있잖아요. 그게 주인공 노릇이에요. 커서도 맨날 그 놀이를 하지만.

 

물론 갑이 되면, 옛날에 했던 그 소꿉놀이를 그대로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을이 되면 못해요. 그래서 을로서 갑을 지향하는 겁니다. 나도 얼른 갑이 되어서 내 휘하에 밑에 사람 부리면서 어릴 때 했던 왕초질 했던 소꿉놀이를 계속 지속하고 싶은 겁니다. 따라서 이 주체로 했던 나를, 옛사람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개체로 바꾸는 거예요. 개체로 바꾸면 뭐가 되느냐, 수동형이 됩니다. 피동형이 돼요. 주께서 귤을 주셨잖아요. 주께서 맛있게 먹게 하셨습니다. 혓바닥이 안 아파서, 이가 안 아파서 주께서 주신 귤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런 태도가 어떤 태도입니까? 수동적인 태도고, 피동적인 태도죠. 아침에 일어나서 주께서 참 잠을 잘 자게 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침부터 감사가 시작되죠. 주르륵주르륵 비가 오면 주께서 비가 오게 해주셨군요. 따라서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비 안 맞도록 주께서 주신 우산 가지고 씁니다. 그럼 이 언어활동에 있어서 주께서 주셨다는 말이 너무 빈번하게 들어가도 귀찮아요. 그걸 전부 다 생략을 해보자 말이죠. (( ))생략을 하고 살아가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엄마 돈 도!” 이래 되는 거예요. 간단하죠. “돈 도!” “이 콩나물 좀 깎아주세요.” 이게 전부 다 생략한 현상입니다.

 

이걸 생략을 안 하게 되면, 주께서 주신 몸이 주께서 주신 당신 앞에서 주께서 주신 콩나물 사러 주께서 주신 돈 가지고 사러 왔으니까 주께서 내려온 지시에 의하면 깎으라고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에 깎으려고 하는 겁니다. 이 모든 결과에 대해서 주께 영광 돌립시다. 이 말은, 간단히 말하면 깎아주세요. 좀 헐값에 안 되겠습니까?입니다. 그러니까 남들 보기에는 사는 게 똑같아요.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본인이 알고 있는 문제에요. 본인이. 그걸 남한테 과시할 필요가 없거든요.

 

그래서 자기가 주님한테 잘못한 것을 절대 남한테 이야기하지 마세요. 뭐 남이 위로해봐야 위로도 안 되고 해결책 없습니다. 나의 죄를 남한테 알리지 말라. 이건 이순신 장군이 비슷한 이야기를 했죠. 나의 죄를, 내가 죄 지은 죄를 남에게 알리지 마세요. 괜히 그게 주님 의지 않고, 남 의존하는 그것이 버릇됩니다. 의존하는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날 안 도와주면 널 미워할 거야.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 갑자기 복수심이 일어날 수 있어요. 니가 뭔데 나를 안 도와주느냐 하는 식이라 말이죠. 그럼 저쪽에서 니가 뭔데 내가 도와줘? 서로가 자기 위주기 때문에 안 되죠.

 

그래서 한 번 정리해보면, 성령은 어떻게 한다? 주체와 객체를 바꾸는 겁니다. 그동안 니 주인공 노릇 많이 했다. 고만해라~마이 묵었다. 바꾸는 거예요. 자, 주체에서 객체로 바꾼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그 바꾸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바꿔지게 되면 주인공인 예수님으로부터 지적을 받는 대상자가 됩니다. 지적을 받는 대상자가 되었다는 말은, 이 관계 자체가, 이 관계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의에요.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가 된다면, 지적을 받게 하기 위해서 뭘 주느냐 하면 율법을 줘버려요.

 

그럼 우리는 지적받는 대상이 되고, 주께서는 지적받은 대상을 향하여 뭔가 지적하기 위해서 율법이나 산상설교나 사도의 권면과 명령이 뭔가 와야 되지 않습니까? 분을 품되 해가 지도록 품지 말라. 사도바울의 의견이 아니에요. 주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5장에. 그걸 왜 줬느냐, 너와 나의 관계는 하나님의 의의 관계인데, 의의 관계라는 것은 반드시 죄가 형성돼야 거기서 의가 나와요. 주님께서 옥에서 나왔거든요. 그러니까 지옥에서 구원이 있고 지옥에서 부활이 있어요.

 

그러면 이것은 우리에게 뭘 의미합니까? 이 땅에서 내가 시키는 대로, 이 땅에서 지옥생활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지옥생활 하고 있습니다. 아까 지옥생활의 제가 멋진 예를 드렸죠. 애 성적 만점 받은 것 하고, 75억 재산 가진 것. 아휴, 괴로워 미치는 거예요. 로또 하면 일등이고, 심심풀이로 했는데 또 되고. 땅 사놨는데 열배 오르고 서른 살 때 시집간다고 했는데 이십대 때 남자 열 명이 들끓어서 골라먹는 재미있고. 이건 뭔 도대체 왜 이런 환란을 주시는지. 떠나야 되잖아요. 우리의 주체와 객체의 영원한 만남은 이 땅이 아니에요.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

 

하늘나라에 살아야 되는데, 이 땅에서 우리를 고생시키는 방법도 가지가지죠. 자꾸 이 땅에 살면서 환경이 나빠서도 지옥이지만, 환경보다 더 나쁜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자꾸 예를 들어야 해요. 성경의 예를 들어야 해요. 디모데후서 3장 2절을 한 번 읽어보세요.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이래 됐죠.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죠. 그러면 돈을 사랑한다는 것을 누가 시범조로 보여야 합니까? 돈을 사랑한다는 계시를 받은, 이미 서랍장, 구원받은 사람이 이 땅에서 보여줘야 돈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의가 구원받은 사람을 통해서 마음껏 발현되어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뭘 사랑하게 한다? 돈이 있어도 또 있고 싶고, 75억 있으면 750억 있고 싶고, 돈을 사랑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나는 죄인입니다. 오직 우리의 구원은 이미 형성된, 십자가로 대속하신 죄 용서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까 첫째 시간에 한 제 말이 맞는 거예요. 어디까지 악랄 하냐, 계속 악랄함을 찾는 거예요. 그 방법을 친절하게도 누가 도와주느냐, 성경 말씀이 도와주니까 우리는 성경 말씀을 늘 묵상해야 돼요. 이것마저 죄였어! 왼뺨 때리는데 오른뺨 돌려대지 않은 이것마저 죄였어!

 

이번 가야산 수련회 때 마태복음 강의했잖아요. 다들 들어보셨으니까, 물어보면 부담되니까 물어보질 못하겠는데, 그런 이야기 했어요. 우리에게 오른 눈이 지금 박혀있습니다. 지금 박혀있는데, 오른 눈이 박혀있다는 말은 분명히 둘 중의 하나다. 하나는 뻔뻔스럽거나, 안 그러면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거나, 둘 중의 하나에요. 왜냐하면 주께서는 니가 오른 눈으로 범죄 하거든 빼버리라고 했거든요.

 

빼버리라고 하니까 안 빼고 버티겠다고 하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주님 싫습니다.” 하는 이야기나 아니면, “지은 죄가 없는데요?” 하는 거나. 아무것도 내가 이 눈으로 죄 지은 적 없다는, 둘 중의 하나에요. 그럼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뭡니까? 개무시 한 거죠. 말씀을 개무시 한 거예요. 말씀이 성경책 안에 갇혀있는 거예요. 평소에 돈 벌기 바빠서 말씀에 신경도 안 쓰고 있는 거예요. 내가 사는 것이 우선이데, 성경은 나중이고. 성경 안다고 돈 갖다 주는 것도 아니고요.

 

바로 그 삶에 충실 하라는 이 말입니다. “나 살기 바쁜데 성경이 뭔 대수야?” 라는 것을 액자로 만들어가지고, 이거 잘못 붙였어.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하지 말고, 돈 벌기에 바쁜데 이 성경이 대수야? 라는 이걸 액자로 붙여야 돼요. 그래야 가슴에 확 와 닿는 거예요. 이게. 확 와 닿는 거예요. 그래놓고 뒤에다가 디모데후서 3장 2절. 벌써 또 말씀 하나 기억했죠? 확실하게 다가오죠. 성경말씀은 그렇게 외우는 거예요. 위반하면서 외우는 거예요. 위반하면서. 이미 위반하고 있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위반했다를 소급해서 딱지 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딱지를 이만큼 묶어야 해요. 성경 본 만큼 딱지는 늘어나야 해요. 그럴 때,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그래서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 모든 일이 일어난 이유는, 너로 하여금 죄인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예요. 이미 구원된 죄인, 이미 구원받은 죄인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재료로 했습니다. 죄인이라는 재료가 있어야 의가 생산돼요. 대추가 들어가야 대추차가 나오듯이, 우리는 죄인으로 들어가야 의인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천국에 가서 면류관을 반납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제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다시 이야기 하면 주체와 객체를 바꾸는 작업에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여기 작용하고 있습니다. 자, 다시 요한일서 2장을 봅시다. 2장 20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이 기름부음이라 하는 것은 2장 27절에 보면 좀 더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2장 27절을 보면,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죠.

 

뭐, 그럼 목사는 뭐예요? 니는 니 고백만 내놓으라. 목사의 설교는 없어요. 목사의 고백만 있을 뿐이죠. 그 고백을 보고 저건 뭔가 성령의 고백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그건 악령이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방법을 얻을 생각을 하지 말고 방법은 없습니다. 성령이 옴으로써 확실해졌어요. 성령이 왔다는 말은, 아! 방법이 없었구나. 십일조, 주일성수, 방언, 신학공부, 성경공부, 이게 방법이 아니에요. 서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그거는 방법이 아니에요. 어떤 성경 말씀도, 모든 성경 말씀을 이미 주님이 가로채서 주님이 다 이루었습니다.

 

일점일획이라도, 이걸 다 지킨다는 것은 예수님이 지금 자기보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이거는 내 숙제지, 니 숙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왜? 처음부터 인간은 못 지키는 것을 아시는 겁니다. 자꾸 못 지킨다는 것을 아는데, 자꾸 우리는 간음하지 않았다 하니까, 우리가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쪽에서 어떤 의미에서 억지를 쓰시는 거예요. “나는 지금까지 귤을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라고 하시게 되면, “누구든지 귤을 보기만 해도 이미 먹은 자니라” 라고 억지를 부리시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미리 법을 정한 것이 아니고, 딱 듣고 난 뒤에 고뤠? 이거는? 하고 다시 제시하게 되면, 그런 게 있었어?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따라오려거든 따라와 봐. 도저히 그 갭을 메울 수가 없어요. 베드로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 나한테 해코지하는 사람을 내가 일곱 번 용서하면, 정말 주의 합당한 일곱 번이라는 것은, 이건 완전히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베드로가 만약에 그 말을 듣고 여섯 번째 용서하고 일곱 번째 할 때 얼마나 기분 좋았겠습니까? 이제 성질 죽이고 한 번만 용서하면 되거든요.

 

그런데 주께서는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고, 약간 약을 올려버려요. 일흔 번에 일흔 번이니까, 70곱하기70같으면 얼마입니까? 490번. 고집 있는 베드로 같으면 489번까지 갈 수도 있는 문제에요. 이제 한 번만 하면 주의 뜻대로 했다. 한 번만 하면. 십일조 하라고 하니까, 갑근세 떼고 십일조입니까? 집 바꾸는데 월세 전세 차이만큼 십일조 합니까? 전체 십일조 합니까? 이게 베드로의 우매한 질문하고 똑같은 거예요. 주님의 답변은 이겁니다. 너는 용서하지 못한다. 왜? 니가 용서하고자 했기 때문에 니는 용서할 잽이 못된다. 그럼 용서는 누가 하느냐, 이미 용서받은 자가 용서한다.

 

그 뒤에 나온 이야기가 뭐냐 하면, 어떤 신하가 있었는데, 임금한테 빚 탕감을 많이 받았는데, 자기는 탕감 받아놓고 자기 하인이 돈 20원 안 갚았다고 옥에다 집어넣고. 그때 주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진멸한다. 그럼 하나님의 진멸, 지옥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 십자가가 오기 전까지는 지옥이고 천국이고 용서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이 십자가 들이댈 때부터 모든 실체는 그 기준으로 확연해졌어요. 십자가 모르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래 되는 거예요.

 

억울하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이미 저주 받은 데다, 저주받은 것을 일부러 구원하는 것이지, 저주 없는 곳에 저주를 내리는 것이 아니고, 당연히 저주받아야 돼요. 하지만 예수님의 자기희생이라는 그걸로 인하여, 그 저주의 일정한 구역을 만들고, 그 구역에 있는 것을 남은 자라고 하는데, 그걸 교회라고 해요. 저주받아야 되는데, 그들이 구원받을 자격이 있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없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일방적인 예수님의 자기 결정권에 의해서, 저주 받은 사람들 중에서 일부를 자기 천국으로 가게 하시기 때문에 천국 가는 사람은 자기자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어느 정도로 인간의 공로를 탈취시키고 없애느냐 하면, 그 예를 들기 위해서 주께서 예를 든 것이 뭐냐 하면, 바로 강도, 강도는 자기 공로 없잖아요. 세리, 창기, 그리고 거지나사로 같은 경우에는, 거지라도 아픈 거지. 이런 것들. 이런 사람들. 전혀 내세울 것이 없는데, 그들을 하나의 모델케이스, 미국 발음으로 마럴케이스. 모델케이스로서 그들을 뽑아 세움으로 말미암아 거지되어 구원받는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에요. 그러면 서로 거지되려고 난리도 아니에요. 창녀나 깡패 되어 구원받으려고 하면 안 돼요. 전부다 창녀나 깡패 되어서 교회 다 옵니다.

 

이건 뭐냐 하면, 그냥 살아! 니 하는 짓대로 그냥 살면, 뒤에 톡톡 두드리거든 뒤돌아보고 그냥 낚이면 돼요. 낚이면. 그럴 때 이렇게 해야 돼요. 왜 주님 저를 구원하십니까? 화내야 된다니까요. 가진 자의 여유죠. 구원받은 자의 여유. 구원받은 자의 호들갑을 떠시기 바랍니다. 아이구, 제가 왜 천국 갑니까? 속으로 기분 좋으면서. 슬슬 웃으면서. 천국 가면서도 애한테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고, 가정에 불화가 일어날 수도 있죠. 불화 있고 가정이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주여! 이런다고 내가 천국 가는 것 안 좋아할 줄 알아요? 그렇게 이야기하면 되잖아요. 참 말은 쉽다. 그죠?

 

내 자식을 이렇게 어렵게 한다고 해서 내가 주님을 싫어할 줄 알아요? 환란이나 기근이나 핍박이나 위험이나 적신이나 칼이나, 어떤 것도 주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로마서 8장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기름 부었다는 말은, 요청한 적이 없다는, 주문서 낸 적이 없다는 이 말이죠. 그냥 와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냥 와버리면 어떤 차이가 나느냐, 내가 주인공이 됐을 때의 진리와, 주님이 주인공이 되어, 기름부음 받은, 성령을 통해서 왔던 그 주인공이, 그 주인공이라는 개념 자체가 완전히 대립되고 반대되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우리는 나 죄인이라는 모습으로, 내가 곡해한 개념가지고 그동안 복음이니, 십자가니, 성령이니, 사랑이니, 엉터리 같은 그런 개념들을 남발했습니다. 충성이니, 순종이니, 기도니, 그런 것을 했다고 고백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런 □ 분입니다.” 라고 □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집어넣는 거예요. 나를 집어넣어서, “나는 이렇게 해서 죄인입니다.” 하는 이것이 바로 배후에 진짜 주체자가 객체 안에 있는 나를 집어넣어서, 죄인으로 엮어서 주체는 따로 있음을 증거 하는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문장이 길긴 긴데, 여러분 알아들으셨죠? 제가 이걸 달리 표현할 수가 없어요. 주님이 계시기에 나의 기도가 응답 안 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우리 기도가 응답이 되면은요, 지옥 갈 사람이에요.

 

그래서 기도하다가, 보통 응답이 안 되는데, 기도하다가 응답될 때가 있잖아요? 따지셔야 됩니다. 왜? 주님이여, 기도응답해주십니까? 지금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이 말이? 왜? 저의 기도를 응답해주십니까? 왜? 그럼 지금부터 저 혼자 살란 말입니까? 그럼 주님이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그렇게 기도응답 해줬다고 불평하는 그것이 기도의 응답이니라. 이야기가 참 복잡해가지죠. 히브리서 7장에 나오거든요. 어떤 사람도 기도 응답해주지 않고 오직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시는 것,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 기도 응답에 루트는 이미 정해져 있어요. 예수님과 아버지로 이미 기도 응답이 끝났습니다. 그러면 우린 뭐냐 예수님의 기도응답의 결과물이죠. 기도응답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뭐가 필요해요? 주체, 객체 바꿀 필요가 있듯이, 그동안 기도응답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서, 이게 바꿀 필요가 있죠. 그래서 바뀐 사람만 기도응답 받았다고 화나서 따지는 거예요. 주님이여, 제가 기도할 때 응답해주지 말라고 기도했잖아요? 이런 식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말이 굉장히 꼬여가지고 의미파악이 힘들어요.

 

“주님이여, 제가 응답하지 말라고 기도했는데, 왜 응답하십니까?” 주님께서는 “그게 응답이야.” 그러니까 지금 응답이라는 말을, 한 단어를 사용하니까,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면서 주님이 쓰시느냐, 내가 쓰느냐에 따라서 그게 합치가 안 되는 것 같은데 합치가 돼요. 아이고, 말 그만 합시다. 내가 이야기를 끄집어냈어도 너무 심하게 끄집어냈다. 여기서 중지합시다. 어쨌든 취지는 알겠죠? 주님이 결과로써 있어야 되는데, 내가 지금 내가 된, 원인제공자인 나를 끼어 넣게 되는 것은, 이것은 진리에 합하지 않는 그런 것이 맞지요? 라고 물으면, 니가 그걸 아니까 그게 바로 너에게 알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작업을 꼬이게 하신 거예요.

 

자, 방금 한 것을 우리가 생각해봅시다. 자, 제가 묻습니다. 기름부음의 결과가 뭐라고요?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했잖아요. 왜 타인을 의식해요. 타인을. 주님하고 상관하는데 왜 목사 지가 끼어듭니까? 여러분 헌금했습니까? 평소에 니가 보태준 것 있어요? 생활비 당신이 줍니까? 당신이 노령연금 줬어요? 왜, 당신이? 당신이나 헌금하라고? 당신 헌금? 당신이 왜 나한테 묻는데? 왜 교회에 늦게 오십니까? 니나 잘하세요. 니나. 기름부음이 사정이 있어서 오다가 차 펑크 나서.. 그거는 주님하고 나하고 의논할 문제지 당신이 끼어들 문제가 아니야. 니나 제대로 잘 신앙 고백적으로 하세요. 니나. 쓸데없이, 월급 깎아 버릴까보다. 심방 갈까요? 오지 마! 주여, 목짜가, 목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니가 언제 목자야? 목자는 주님밖에 없어요.

 

진짜 목자는 “나는 목자가 아닙니다.” 라고 고백하는 자가 주님의 목자에요. 그게 목자 개념이, 주체, 객체가 변함에 따른, 모든 개념의 변환. 그게 뭐냐, 진리 아닌 진리. 진리 아닌 진리 같은 진리. 진리인 것을 위해서 반드시 진리가 아닌 것이 있어야 돼요. 죄 속에서 의가 나오고, 지옥 속에서 천국 나오고, 구원받지 않은 상태에서 구원이 나오기 때문에. 항상 우리는 어느 자리에? 지옥자리에, 저주자리에, 잘못된 개념자리부터 우리는 출발해야 됩니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가 있습니까? 바로 정돈된 자리. 조직화된 자리. 권력으로 조직화된 자리. 안정된 자리. 혈통으로. “내 아버지 장례 치르고, 끝까지 효심으로 행하겠습니다.” 효심으로 안정된 그 효심의 자리를, 주님께서는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마8:21-22). 바로 그 효심을 찢어버리잖아요. 효심을. 효심해서 뭘 한다고요. 왜 목사님들은 어버이날 맨날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에베소서 6장만 본문으로 설교하고 이 본문은 왜 안 하는지 모르겠어요. 마태복음 8장,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그 본문을 가정주간에 왜 삼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마태복음 10장 34-37절에 나오는 좋은 본문 있잖아요.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그것, 고부간의 싸우고 하는 그것을 가정주간에 왜 본문으로 삼지 않습니까? 따지고 싶네요. 정말. 발상의 전환이에요. 발상의 전환. 지금까지 모든 개념을 거꾸로 배우신 거예요. 근데 거꾸로 배워도 그렇게 우리가 좋아한 것은 평소의 삶이 내 중심이기 때문에 그래요. 소비자가 있으면, 고객이 있으면 장사는 되게 마련이거든요. 이런 내 중심의 고객이 있으니까 교회가 번창하는 거예요. 우리는 삽으로 팝니다. 저는 호미로 팝니다. 각자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천국의 지름길 제공합니다. 이런 것들이 코앞에 있는 거예요.

 

아무도 주께서는 그들에게 하청을 준 적 없어요. 주님 것은 주님 마음대로 성령 주셔서, 성령세례 주셔서 구원시킵니다. 유대인들이 수천 년 동안 얼마나 다졌습니까? 이렇게 해서 말씀 지키면 메시아 만날 수 있다. 이케요? 저케요? 요케요? 하면서, 십일조는 이렇게 지키고, 안식일은 이렇게 지키고, 백날 하면 뭐합니까? 성령세례는 이방인이 다 받는데? 십일조 한 적도 없고, 안식일도 지킨 적 없고, 할례 받은 적도 없는데, 성령세례 받으니까 에디오피아 내시가 물에 가서 세례 받고, 성령을 받고 나니까 그 자체로 의인되어 버렸어요. 하나님의 의가 되어 버렸어요(행전8:26-40).

 

유대인들이 시기 나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시기 나니까 그 시기 난 분노를 풀길이 없어가지고, 바로 사도바울 니가 로마에서 복음 전해서 그렇다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복음 전했다고 사도바울을 죽이잖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고니온에서 죽었어요. 본인도 죽은 줄 알았습니다. 그때 갔어야 했는데. 죽은 시체를 성 밖으로 내쳤는데, 이게 또 꿈틀거리네(행전19-20). 파리 어디에 갔어요? 죽은 줄 알았는데? 파리 귀신에 너무 씌여 가지고. 죽었어요. 죽었죠. 그래도 안심 못합니다.

 

사도바울 본인이 본인 게 아니에요. 내가 죽은 자 같으나 산 자요,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한 자요,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요, 우겨쌈을 싸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이거는 모조리, 전부 다 성령이 하셨다. 다른 말로 하면 주 안에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주님이 하신 일이다. 계속 하는 겁니다. 그걸 요한일서에서는 성령이 하지 않고, 성령이 또 나옵니다. 그걸 먼저 기름부음이라 해서, 성령 대신 기름부음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바로 그 당시에 인간 대 인간, 인간 대 목자, 인간 대 목사의 관계를 완전히 재편하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사람 빠져! 그동안 너희들이 기대하고 한 수 배우겠다고 한 인간들 나가세요!”

 

인간들이 있던 목사의 강대상에, 성령을 세워놓고, 기름부음으로 이야기해서 보이지 않는 분 중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백성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신승훈이 불렀던 <보이지 않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라~라~라라~♬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에요. 보이지 않는 사랑을 위해서 모든 보이는 사랑에 대해서는 집착을, 기대를 하지 마세요. 남편이고 자식이고 다 그게 나의 집착의 대상입니다. 그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서, 얻어내기 위해서, 몸부림치지 마세요. 그거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 안에 반드시 뭐가 들어 있느냐, 배신의 자리가 자리 잡고 있어요.

 

이거는 제가 시카고강의에서 제가 했죠? 다 보셨네요? 이야! 이거 괜히 이야기했네요. 물청소 괜히 했네요. 다 아시네? 들어도 몰라요. 들어도 다 잊어버려요. 이렇게 답변이 되죠. 결국 요한일서 2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들에 있어서의 진리라고 하는 것은, 항상 세상의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의 장막 같은 것, 가름막, 적당한 말은 이거에요. 방어막. 진리 휘하에 방어막이 쳐져있다. 이래 보시면 돼요. 그 방어막 안에 갇혀있는 상태입니다. 갇혀있는 상태에서 주님이 오실 때에, 요한일서에서는 이것이 주님의 어떤 모습이냐 하면, 주님이 키가 몇 센티냐? 뭐 몸무게가 몇 킬로냐 그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기능이거든요. 그럼 기능이 뭐냐 하면, 화목제물.

 

다 아신다고 하지만, 진도를 위해서 다시 한 번 정리하면 화목제물은 제사를 마무리 했을 때. 앞에 있는 제사는 다 했다는 거예요. 앞에 있는 제사가 다 뒤로 넘기고, 릴레이처럼 넘겨서 마지막 최종적인 것이 바로 화목제물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에서는 뭐냐 하면 율법 외에 한 의가 있으니 얼마나 하나님이 용의주도합니까? 율법 줘놓고, 모든 것을 저주하게 만들고, 율법 외에 한 의가 있다는 말은, 율법과 한 의를 섞지 말라 이 말입니다. 율법을 지킬 때는 행함이 들어가야 되죠. 예수님의 화목제물 십자가는 행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 예수 믿는 것이 뭐가 돼버려요. 행함이 돼버리죠. 니 믿음 가지고 믿는 것은 행함의 일종이지 믿음이 아니죠. 그러면 그 행함의 범주에 나타나지 아니하는 믿음은, 그건 외부에서 주어져야 되죠. 주께서 십자가 질 때 그 안에 뭐도 이게 옵션으로 들어 있느냐 하면, 택한 백성이 반드시 십자가에 대해서는 믿게 되는 그러한 요인이 십자가 사건 안에 이미 포함이 되어 버렸어요. 하나의 옵션이에요. 옵션. 세트로 되어 있어요. 옛날 tv살 때 화면 말고 안테나도 같이 줬거든요. 그냥 tv줘버리면 백날 해봐야 아무것도 안 나와요. 아까 집사님네 tv에서 심심해서 뭐하나 봤더니 아무것도 안 나와요. 신호가 안 잡혀서 안 된다고 하면서 지 혼자 돌아다녀요. 그러니까 십자가가 백날 코앞에 있는데도 몰라요.

 

근데 십자가가 멀리 있거나, 안 그러면 아예 십자가가 느껴지는 것은, 이건 분명히 십자가 안에 장착된 것이 이미 내 안에 투사됐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에요. 기름부음입니다. 그래서 기름부음에 의해서 된 사람을 요한일서 2장 19절에서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세 글자로 되어 있어요. “저희들” 이거 참 어렵습니다. 2인칭 복수죠. “저희들” 굉장히 어려운 용어입니다. “저희들” 또는 성경에서 같은 취지로 나오는 1인칭으로 되어 있는, “우리들” 이런 용어를 설명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주체가 되어 있을 때는 저희들과 우리들이 누구냐 하면, 내가 있는 곳이 우리들이 되고, 나와 함께 있는 곳에, 내가 주체가 되어 있을 때, 내가 보이는 맞은편에 서있는 것을 저희들이라고 하잖아요. 근데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주체가 바뀌었어요? 안 바뀌었어요? 주체가 바뀌었어요. 그러니까 주님이 함께 있으면 우리들이 되고, 주님이 보고 사랑하는 자는 저희들이 되죠. 그럼 주체가 우리가 된 입장에서는 이 저희들과 우리들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게 돼요. 없어요.

 

그래서 성경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 저희와 우리들을 집어넣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활동에 의해서 없던 우리들이 새로 생기고, 없던 저희들이 새로 생기는 거예요. 새로 생겼다는 말은 그 뿌리가 자신의 노력이나 행함의 토대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건 뭐냐 하면, 역사 속에 묵시적 존재가 되고,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내가 속하지 않음같이 너희도 속하지 아니했다고, 예수님의 일방적인 어떤 연결 체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럴 때 그 관계가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 한 기름부음이에요. 기름부음.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세상 속에 왔다가 가셨잖아요. 예수님이 오셨을 때, 자기를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죠. 근데 그런 고백을 할 때,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아서 했거든요. 성령세례 받고. 그래서 성령세례 받은 사람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그 상황을 반복해서, 계속 이 땅에서 발생을 유발시킵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냐 하면 주께서 주인공이고 우리는 주님에 대한 객체로서의 저희와 우리가 되기 때문에, 주님이 사용하신 우리들과 저희들과 예수님 본인과 연결된 것이 있기에, 모든 성경의 우리들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우리들이죠.

 

따라서 예수 믿은 모임은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 안 믿는 모임도 물론 교회가 아니고. 그 점을 설명하기위해서 누가 19절 한 번 읽어보세요. 19절,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어떤 일단의 사람이 있었는데, 사도가 보기에는 그건 적그리스도를 따랐어요. 적그리스도한테 우르로 나갔습니다. 자, 문제 하나 나갑니다. 그럼 남아있는 그 우리는, 하나님이 인정한 우리입니까? 우리 아닙니까? 우리라고 하면 워치만 니 지방교회입니다.

 

제가 아까 했잖아요. 우리라는 것은 없다고. 그때그때 발생시켜줘야 돼요. 어떤 일단의 사람들이 나가면 남아있는 우리는 진짜 택한 백성이라고 하지 말고, “다음에는 우리 차례다.” 라는 이런 마음의 준비를 하라 이 말이죠. 주께서 나가라면 나가야지, 우리가 뭔데 버틸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 이 말이죠. 자, 로마서 9장 한 번 봅시다. 이건 예전에 했던 설교인데요. 3절,“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 바로라” □안에 뭐가 들어가죠? “저주를” 또 □안에 뭐가 들어가죠? “원하는”

 

또 이것도 액자 해서 이쪽에 하나 걸어놓고. “저주받아 끊어지는 것이 우리 가정의 소원입니다.” 라고 해야 되는데. 어느 교회 가서 이야기했더니만 뭣도 모르고 앞에서 아멘하는 분이 있었어요. 이 세상의 모든 개인구원, 다시 말해서 구원파는 이 본문에 의해서 다 깨져버려요. 구원파보면 이 본문 이야기하세요. 사도바울은 구원 못 받았네. 왜? 구원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고 저주를 원한다고 했으니까. I Wanted 저주! 저주를 원한다. 누구의 뜻이면? 주의 뜻이면. 왜? 자기는 객체기 때문에. 객체가 주체노릇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은 이미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주인공이 와 있기 때문에, 어디 건방지게 니가 인생의 주인공 노릇을 하느냐 말이죠.

 

나한테 일어나는, 가정에서의 일이나 어떤 일도 주인공이 알아서 일으킨 일이지, 내가 원인되어서 일으킨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한테 실망은 하되 자책은 하지 마시라고 제가 뉴저지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매일같이 우리의 삶은 우리한테 실망하는 겁니다. 근데 실망할 때 웃으면서 하세요. ‘니는 안 돼. 인간아 니는 인간 될 수가 없어.’ 히히히~기분좋아하면서. ‘안 돼! 나는 인간 될 수가 없어!’ 히히히~그게 기름부음입니다. 그게 성령 받은 사람이고. ‘안 돼! 주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거는 지옥 갈 사람이고.

 

범사에 감사하라. 참 간단한 멘트입니다. 정말 간단한 멘트에요. 한 때 말고 매일 반복적으로. 따라서 그 말씀을 반복적으로 하기 때문에 이 성도한테는 개인적인 성장은 없어요. 말씀의 깊이는 있습니다. 전에 알던 말씀보다 더 내려갈 수 있지만, 더 내려간다고 해서 개인적으로 구원이 더 되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있는 서랍장이 듬성듬성하다가 양말 쪼가리 더 끼어드는 거예요. 이 말씀 몇 가지, 중요한 구절로 요한복음 3장 16절 같은, 그렇게 듬성듬성 있다가, 이제는 남들이 찾지도 않는 시편 끄트머리 구절까지 하나의 삶이 되어서, 내 구원의 증거물로써 여기 가득 차있는 그런 현상들을 주께서 그렇게 합니다. 모심기하듯이 모를 빡빡하게 심는 거예요.

 

우리가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사용하시겠다는데, 뭐 할 수 없죠. 그럼 강도는 성경을 얼마나 알았습니까? 강도는 성경 볼 시간이 없었죠. 다만 그 사람은 성경의 결과물을 그냥 획득했으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 누구 못지않죠.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요한일서의 주제가 바로 그 사랑입니다. 사랑에 의해서 철저하게 인간의 행위를 가치 없는 것으로 짓밟아버리고 나중에는 사탄과, 악마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두려워하느냐 말이에요? 분명히 너는 사랑이 없으니까 두려워한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사망 영역 따로 있고 생명 영역 따로 있다는 거예요. 옮겼다는 겁니다. 옮겼다는 거죠. 어떻게 하면 안 돼요. 삽이고 호미고 하면 안 돼요. 이미 기름부음 자체가 통보해주는 거예요. 이미 다 해놓고 통보해주는 겁니다. 차 수리 맡을 때, 차 고장 난 사람보고 드라이버 가지고 이거 좀 해죠? 이게 아니고 하이카가 다 알아서 해 줄 테니까, 할머니는 저기 가 계시고, 다 해놓고 “다 됐습니다.” 이렇게 오죠. 요새 하이카 광고 있어요. 할머니가 차 고장 나서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에, 한쪽으로 밀어놓고 젊은 사람이 와가지고, “할머니 여기 좀 계시고 우리가 다 알아서 해드리겠습니다.”

 

천국의 전문가는 우리가 아니고 주님이 알아서 다 해놓으셨습니다.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성령을 주셨고, 성령을 주니까 주체와 객체가 바뀌었고, 바뀌니까 구원받았다. 개인구원 받았다가 아니라 이제부터 할 일이 생겼는데, 그건 뭐냐 하면 모든 개념들을 반대로 생각했다는 것을 널리널리 전파하는 겁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전파하듯이. 나랏말싸미 듕귁(중국)에 달아, 천국 말씀이 지옥과 달라,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 서로 맞지 아니할세, 이걸 어여삐 여겨 내가 성경을 맹가노니 이래가지고 훈민정음이 제작이 되듯이. 그럴 때, “니가 만들었냐?” “아니. 우리 주님이 만들었다.” 그렇게 주님이 만드신 하늘나라를 우리가 마음껏 펼치는 겁니다.

 

우리가 할 것은 바로 주체에서 객체로, 수동형으로 바뀌면서 감사가 아울러 터져 나오는 거예요. 극단적인 상황을 이렇게 생각해놓으시고, 극단적인 생각 놓고, 지금은 그만큼 숨쉴만하니까, 그만큼은 감사가 아니냐? 제가 이야기하죠. 항상 범사에 감사해야 되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이 요한일서를 보면서 답답해하지 마시고 느긋한 가운데서, 침 발라넘겨 보면서, ‘도대체 내가 뭐야? 아, 주께서 이런 식으로 만들어놓으셨구나.’ 그렇게 보는 겁니다.

 

다시 19절을 제가 말씀드립니다만, 우리에게서 나갔다 할 때, 그 우리는, 남아있는 우리 끼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뭔가 적그리스도를 유발시켜서 나가게 하는 그 어두움의 작업과 동반해서, 자동적으로 그 옆에 생기게 하는 것이 우리라 이 말이죠. 그렇다면 그 우리는, 또 다시 구원받은, 거듭난 집단으로 여겼던 그 집단 내에서 또 배신의 자리를 발생시켜서 또 구분하는 거예요.

 

애들 옛날 어릴 때 노는, 지금도 하지만, 바닷가에 가서 하는 놀이가 뭐냐 모래 쌓아놓고 중국집 나무젓가락 위에다 꽂아놓고, 가위바위보해서 이긴 사람이 먼저 모래를 조금씩 옆에부터 파내고, 파내고 하다가 마지막까지 나무젓가락을 쓰러지지 않게 하는 애가 승자가 되잖아요. 이긴 사람한테 뭐든 다 해준다는 내기를 걸고 하잖아요. 그렇게 주님도 남은 자의 마지막에, “우리끼리만 남았습니다.” “아니 멀었어.” 또 갈라내고 또 갈라내고.

 

결국 남은 자는 누구밖에 없느냐, 예수님의 몸밖에 없고 우리는 그 몸의 지체에요. 지체기 때문에 머리에서 부어주는 성령이 저 마지막 실핏줄까지 다 도달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도달된 결과가 뭐냐 하면, “콩나물 값 좀 깎아주소” 이거라 말이죠. 생략된 것이 많지만. “아이, 좀 깎아주소” 이거라니까요. 이게. 뭐 이야기 다 붙이면 문장이 아주 길어져요. 아주 코미디가 된다니까요. 구봉서가 아들 이름 짓는 것처럼. “김 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그렇게 번거롭게 되어버리죠.

 

우리라는 것은 내가 속한, 내가 주체가 된 우리 집단이 우리가 아니고, 나를 반대한다고 저희가 될 수 없고 예수님 중심으로 해서 그때그때 우리가 나오죠. 여기서 잘렸는데 딴 데 가서 그 우리가 성립한다면, 우리나 저들이나 주님 안에 있다면, 어디가도 같은 우리잖아요. 백지영의 노래에 나오잖아요. “같은 하늘 다른 곳에 있어도 부디 나를 잊지 말아요.” 슬퍼하지 마세요. 같은 하늘에 같은 주님 안에 있다 이 말이죠.

 

그걸 누가 가르쳐줘요? 기름부음이. 성령은 도대체 역할이 뭐냐, 그냥 니가 있음이 주님의 사랑의 결과니라. 우리가 매일같이 돈 번다고 잊어버리고, 놓쳐버린 그것을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내 건데 왜 가져갑니까?” 라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유발해가지고, ‘아차, 아차, 이러면 안 되지. 내 것이 아니지. 내가 주체가 아니지. 내가 객체지.’ 하고, 그 자리에서 감사를 유발시키는 작업이 계속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