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14 요한1서 버지니아강의21-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요한일서 3장에서 본격적으로 사랑이 뭐냐 할 때, “목사님. 사랑이 뭡니까?” 라고 한다면, 예수님께 무슨 일이 있어났는가, 그게 모아지면 그게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할 때 너무나 모호하잖아요. 추상적이잖아요.하나님께서 사랑이라고 하면서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님의 구체적인 활동을 가지고 사랑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흔적을 잡고 지나가게 되면 그동안 우리 눈에 몰랐던 것이 거기에 나타나요. 마귀의 일이 나타나는 겁니다. 마귀의 일.
그럼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못 받는, 사랑이 미치지 않는 영역에서, 사랑이 차단된 세계에서 살아왔던 겁니다.그렇게 하나님의 차단된 사랑에서 주님이 오셨는데 그렇다고 사랑 안 하느냐? 아니죠. 사랑이 예수님께만 집중해서 조명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행위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되고, 예수님에 대해서 이해 못하는 모든 영역은, 그거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이 아닌 정도가 아니고, 미움이 되죠.
하나님께 미움이 되면서, 미움 받는 원인은 바로 악마, 요한일서 3장 8절에서는 마귀라고 하는데, 마귀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마귀가 하나님의 사랑을 차단시키는 방향으로 그동안 세상의 권세를 쥐고 왔던 거죠. 권세를 부려왔던 겁니다.그럼 여기서 이게 현실이라면, 말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실제라면, 우리 주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과 아는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라는 생각을 우리가 할 수 있어요.
성경자체가 옛날 문화 배경이고, 오늘날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이 21세기에 적용될 때, 주의 사랑이 적용될 때, 우리는 어떤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느냐? 그런 질문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거기에 대한 답변을 이것으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욥기. 욥기에 나타났던 현상은 평온했던 거예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질서 잡혀있고 균형 잡혀있습니다. 욥은 선한 사람이며, 부자며, 자식들이 아름다우며 훌륭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하고, 그 다음에 부자고, 그 다음에 자식들이 잘 되고, 또 하나 더한다면 본인의 몸이 건강했어요. 건강했고, 의롭고, 부자고, 자식이 많았고,이 네 가지의 4중 축복을 다 갖고 있던 거예요. 욥이.
이야기가, 이것이 끝부분의 이야기가 아니고 욥의 시작이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바로 여기에 대해서 주위의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욥의 세 친구들이 등장합니다. 등장하면서 욥이 이렇게 된 것은 욥이 의롭고, 의롭기 때문에 부자 되고 건강하고 자식이 많게 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 당시에 거의 확정된 사상체계였죠. 확정된 겁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다? 선한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런 복을 주지 않고 가난하게 만든다. 그런 내용이 욥기에서 내내 주고받고, 주고받고 흘러나옵니다.
아무 문제없어요. 아무 문제없는데,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원칙이냐,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원칙이냐, 아니다 이 말이죠. 여기서 뭔가 뒤집어져야 돼요. 뒤집어지는데, 여기에 동원된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사탄입니다.하나님께서 사탄과 내기하기를 욥은 당대의 의인이고 욥같이 믿음이 좋은 사람을 못 봤다. 지금 말로 하면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은 욥을 내세웁니다. 그것은 욥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욥의 자리가 하나님이 마련한 서랍장이기 때문에. 욥 가지고 뭔가 보여주시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구약에 있다는 말은 장차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동일한 내용이 미리 거기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목사님. 그럼 사탄이야기 하다가 왜 욥 이야기 합니까?” 사탄의 뜻은 욥의 친구들이 보여줍니다. 욥의 친구들이 뭐냐 하면 사람은 착한일 하면 복을 받고 나쁜 짓 하면 벌 받는다. 이게 바로 사탄의 생각이에요. 악마의 생각이에요.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본성의 생각인데, 이게 사탄의 생각입니다. 그럼 어째서 그렇게 되느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은 욥의 친구들이 아니고 욥이에요.
욥의 친구들이 정말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면 욥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욥의 친구들이 동의를 해줘야 해요. “욥아!니가 참 의롭지만 참아. 니가 아무리 자식 열명이 하루아침에 다 죽고 재산 날아가고 니 건강을 잃었다고 할지라도 나는 믿는다. 니가 의인인 것을.” 이렇게 되면 욥이나 욥의 친구들이나 별 차이가 없는데, 욥이 이렇게 힘들게 되니까 욥의 친구들이 등 돌려버렸죠. 등 돌린 이유는 딱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현재 통용되고 있는,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그 원칙에 대해서 니가 낯설다는 거예요. 낯설다.
하나님의 사랑은 낯설어요. 흔히 통용되는 사랑과는 대조되는 사랑으로 오는 겁니다. 사랑 같지도 않아요. 꼭 미움을 닮았어요. 사랑이란 게. 우리가 사랑이라는 것은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걸 누가 거부해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게 잘못되어 있다는 것은 뻔히 아시죠. 당신이라는 말은 애초부터 없는 말이에요. 주님은 사랑이시지, 날 위해서 사랑을 준비한 것이 아니에요.
사랑이라는 것은 그렇게 나쁜 의미가 아닌데, 욥기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은 굉장히 낯섭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결국은 욥이 누굴 위해서 기도하느냐 하면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하죠. 그러면 욥이 받은 사랑이 저쪽에 흘러들어가지 아니하면, 욥의 친구들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똑같은 방법이 독생자 예수님에게 주어집니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한다. 따라서 너희들은 나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아버지의 사랑이 너희에게는 있지 아니해서 그렇다.
그럼 아버지의 사랑이 있지 아니한다는 것은 누구한테 지배를 받고 있어요? 사탄한테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삽니까? 낯선 것을 한번 찾아보세요. 우리의 상식과 안 맞는 것을 살아가면서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착하면 복을 받고 나쁜 짓을 해서 벌을 받는데, 착한일 했는데 복이 안 오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보다 더 신기한 것은 나쁜 짓을 내가 봐도 너무 많이 했어. 그러면 다리몽둥이가 부러져야 하는데 더 잘살아.
뭔가 나쁜 일 한 내가 더 행복하고, 십일조도 한두 번 안 낼 때는 움찔거리지, 자주 안내면 복 받아요. 십일조 하면 갈수록 꼴아 박고, 십일조 안 하면 더 복을 받게 되어 있다니까요. 주일성수 처음에 빠질 때는 온 몸이 소름끼칠 정도로 벌벌 떨지만 서너 번 빠져버리면, 하늘은 쨍쨍 날씨도 좋구나! 애들아, 선생님 손잡고 소풍가서 점심도 먹고..그런 유치원 노래가 있어요. 하늘도 쨍쨍~유치원에서 소풍가는 그런 노래가 있거든요. 그 가사를 보면 너무 아름다워요. 하늘은 쨍쨍, 날씨도 좋고, 엄마가 김밥 싸들고 가는 그 모습을 볼 때, 얼마나 행복합니까? 물론 그 유치원 애가 독생자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알리는 없을 거고.
사랑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독점했어요. “사랑이 보고 싶어? 내 가는 길을 봐! 이게 사랑이다.” 뭔가 가위로 찢어버리는 것. 세상을 두 토막 내는 그런 양상입니다. 그래서 사탄과 예수님의 관계, 이런 것이 요한3서에 쭉 나와 있는데요, 하면 후딱 지나가는데, 지나가면 우리가 그만큼 진리를 놓치기 싫기 때문에, 우선 아브라함을 예로 들겠습니다.
자, 여러분 이건 다 알기 때문에 주고받고 하는 식으로 해봅시다. 아브라함의 인생이 평탄한 인생이었어요? 아니면 찬란했습니까? 어떻습니까? 이름부터가 벌써 두 개죠. 뭔가 인생이, 아브라함 인생이 특징이 뭐냐 하면 갈 바를 알지 못했어요. 갈 바를 알지 못했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갈피를 못 잡는 거죠. 갈피를. 가라하는데 갈 곳을 잃어버렸어요. 최백호 같아. 어디로 갈지를 몰라요. 물론 하나님의 지시가 떨어져서 움직였는데, 만약에 지시가 안 오면 어떻게 할까요? 안 오면? 10년이고, 100년이고 안 오면 어떻게 될까요? 오도 가도 못하죠. 감감하죠.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난해한 것은, 아브라함 존재만 생각하는데, 아브라함 때문에 사건들이 움직입니다. 주위 환경들이 움직입니다. 심지어 애굽에 흉년까지 발생되니까. 모세 때도 모세 때문에 주변의 배치조직들이 다 달라져요. 질서가 잡혀가고 하는 그런 현상이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이것이 신약에서 말하는 사랑이라면 모든 다른 것은 사랑과 아닌 것을 위하여 배치가 달라져요.
그런 영화가 있었죠. 자동차인데, 갑자기 기계소리내면서 갑자기 로봇이 되는 그런 영화. 트랜스포머죠. 트랜스포머 같아요. 모세나 사도바울이나 아브라함과 이사야 이 모든 것이. 특히 엘리야 엘리사처럼. 여호수아 같은 경우는 하늘의 태양도 져야 하는데 눌러도 안 져요. 누르고 싶어요. 빨리 태양이 지라고 해도 지지도 않아. 뭐, 이상하게 돼요(수10:12). 그게 뭐냐 하면, 뭔가 트랜스포머를 그때그때마다 조종하면서 뭔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불법과 의를 구분하는 기준점으로 아브라함을 제시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아브라함 인생을 통해서, 그때그때마다 아브라함이 새롭게 불법과 의를 생산한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걸 오늘날 적용시키면 성도 한 사람이 여기 버지니아에 살면, 이 버지니아는 무엇이 불법이고, 무엇이 의고, 무엇이 복음이고, 무엇이 복음이 아닌 것을 증거 하는 기준점을 벌써 하나에 포함시키고 있는 셈이 되죠. 그 기준점을. 또 나가서 예수, 영어로 지저스Jesus외치라고 하는 뜻이 아니고.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돼요. 있기만 하면.
우리가 설치지 않더라도, 그 성도 중심으로, 그 사람중심으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중심으로 주변배치도가 이게 달라진다 이 말이죠. 그럼 어떻게 압니까? 찾아보세요. 찾아보면 그런 것들이 하루에도 수 번 내지, 수십 번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제 말에 동의를 안 하시는데, 세상의 진위를 안다는 말이 아니고 불법과 의의 기준점이 새롭게 보인다 이 말입니다. 세상이 지금 지진 나고 홍해 갈라진다는 말이 아니고. 성도가 보기에, 전에는 저 사람이 좋았던 사람인데, 아닌 것 같아요. ‘나는 저 사람이 천당 간다면 나는 내가 알아서 지옥 갈 거야.’ 하는데, 저 사람이 이상하게 천국 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사전에 미리 협상을 보던지, 뭘 해야 돼요.
바로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를 위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사랑을 준 게 아니고, 사랑이 트랜스포머를 위해서 우리를 하나의 기계처럼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지금 요한일서 3장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게 보시면 그 다음부터 훅 지나가요. “니가 바로 계명이다. 사랑이라는 계명을 품고 살아가는, 하나의 기계처럼 내가 다룰 거야.” 이 말이 굉장히 중요한데, 왜 중요한가 하면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 짓지 아니하나니” 3장 9절에 나오죠.
이걸 바로 구원파들은 본인이 죄 짓지 아니한다는 거고, 진짜 성경이야기는 죄 안 짓는 방향으로, 너를 기준으로 해서 모든 것을 재편성해줄게. 전에 죄였던 것도 니가 쑥 들어가면 죄 아닌 것이 되고, 전에 죄 아니었던 것이 너로 인하여 죄가 되는 이유는, 너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나님의 자녀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는 절대로 죄 짓지 않는 자녀로 부각시키기 위해서, 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고 주변을 바꾸어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새롭게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활동하고 이렇게 움직인다는 겁니다. 그 신기함을 찾아보라는 이야기에요.
근데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저 사람을 맞춰줘야지.’ 맞춰줄 필요 없어요. 맞춰주면 누가 변하느냐 하면 우리가 자꾸 달라져요. 달라지게 되면 3장 9절은 성립이 안 됩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확정적이에요. 이걸 다른 말로 완전체, 완전한 존재라고 이야기해요. 완전한 존재. 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존재. 하나님입장에서 모르고 그런 소리하지만, 저 성질 나빠요. 성질 나쁜 것은 아는데, 이게 예수님 옷을 입었다니까요. 어디, 너 보고 이야기하나? 우리 속에 성질 더러운 것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전에는 어떤 교인 보면, ‘정말 성질 더럽다. 저러다 지옥 가겠다.’ 했는데, 복음 듣는 태도 보니까 ‘성질 더러워도 저 사람 천국 가겠네.’ 라는 생각이 들면, 이것은 뭐냐 하면, 기준!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기준은 이게 완전체라는 것. 내가 새롭게 알던 모르던 간에 처음부터 완전체로 왔는데 내가 오해한 거죠. 사실은 내가 나에 대해서 오해한 거예요. 내가 착하게 살아서 영광 돌린다는 자체가 오해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자녀이기 때문에, 완전체에 인식론적으로 결합시키려고 한 거예요.
갑자기 제가 어려운 말해서 죄송한데, 인식론 나왔어요. 인식론, 교양에 속한 것이니까, 여러분!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인식론이라고 하는 것은 칸트철학에 나오는 건데, 존재론하고 인식론을 구분하면 쉽습니다. 존재론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 어떻게 있는가? 무슨 목적으로 있는가? 존재론입니다.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하는 존재를 내가 어떻게 알아채느냐? 하는 문제에요. 여기서 칸트는 말합니다. 이성의 비판, 또는 이성의 한계를 통해서 인식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인간의 도덕이라는 것은, 이건 손댈 수 없어! 무조건 이웃을 사랑해야 돼! 살인하지 마! 라는 것으로 움직이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우리의 존재다. 그 인식에 못 미치는 사람이 있고, 이미 아는 사람이 있는데, 어쨌든 인식론은 이성을 분석하고 판단하면 할수록, 저 진리에 접근하는 인식을 얻기 때문에, 뭐, 공부 좀 하라는 그런 이야기를 칸트가 하는 거예요. 인생 제대로 좀 생각하고 살아라!
그러면 너가, 처음에 무식할 때 생각하는 너와, 생각하고 공부하고 보는 너가 아마 다르게 보일 걸? 다르게 보인다는 말과 다른 존재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걸 성경에 그대로 적용시키면 딱 맞아요. 내가 예수 사랑하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압니까? 치매 걸리면 어떻게 압니까? 존재에서, 이미 하나님의 자녀에서 인식이 나오는 거예요. 근데 칸트의 잘못은 뭐냐 하면 내가 너를 분석하기 때문에, 그 존재나, 그 인식이나, 그 주인공은 내가 어떻게 해봐야 하는데, 하나님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예수 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니가 점점 더 인식해야 될 거야. 어떤 인식으로? ‘죄 못 짓는구나. 죄를 짓고 싶어도 못 짓는구나.’로 달라진다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여러분이 이해된다는 것은 아예 기대한 적 없고요. 이 자체가 구체적인 인물이 딱 한 사람이 있어요. 누구냐 하면 다윗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이스라엘 왕이에요.
자, 왕의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면 이스라엘 중에서도 최고의 자리기 때문에, 제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리라고 생각해서, 그 자리에 올랐다고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사실 그만한 근거가 있었어요. 골리앗을 누가 죽였어요? 그것도 어른 다윗이 아니고 소년 다윗이에요. 소년 다윗은 그 당시 어른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 어린아이 내세운 것과 똑같은 겁니다. 애들도 이기는 것을? 꼬라지 좋다! 어른 주제에? 어른 되면 믿음이 더 좋다고요? 애들 믿음보다 못하잖아?이걸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시편 8편에 나오죠.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죠. 어른들은 칼 들고 말 타고 무슨 짓이고? 하나님의 전쟁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얼마나 전쟁이 미리 확정되었으면, 나중에 끝나서 “진작 이겼다고 이야기해주지?” 이렇게 나왔다고요. 찬송 부른다는 것이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저쪽은 활과 칼과 병거로 나오지만, 여기서는 횃불 들고, 뭐 정월대보름입니까? 왜 항아리 들고 횃불 들고 나팔 들고 왜 갑니까? (삿7장). 칼이 어디에 있어요? 칼이 없어요. 칼이 없는데, 터지고 난 뒤에는 여호와의 칼이요, 기드온의 칼이요. 도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무기는 이미 승리한 것에 대한 무기입니다. 내일 할 것을 미리 다 하는데. 여리고성은 이미 무너지게 돼있어요(수6장). 그것을 미리 안다고 나팔 부는 겁니다. 나팔 부는 것은 뭐냐 하면 승리하고 난 뒤에 부는 축하의 나팔을 이스라엘 백성은 미리 부는 거예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미리 부른 겁니다. 모든 것이 미리 앞서서 뒤돌아보는 식으로 평가하는 거예요. 우리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하늘에 앉히시고 뒤돌아보는 식으로 이런 육신을, 이런 메커니즘을 통해서,과정을 통해서 우릴 구원했다는 겁니다.
그럼 그 구원을 하는데 뭐가 개입되는가, 바로 계명이 주어지죠. 계명은 뭐다? 바로 사랑이고, 사랑은 예수님의 독생자 일대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 있으니 바로 예수님이다. 그럼 예수님하게 되면 안 나타난 듯이 나타나죠. 실제로 예수님이 가게 되면 누가 나타납니까? 귀신들이 소리 지르면서 하는 말이 뭡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죠? 우리를 멸망케 하러 오셨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쉿! 조용히 해! 조용히!” 그리고 병이 낫게 되면, “이 병 낫게 된 것을 남한테 알리지 마라!” 메시아는 비밀이에요. 알리지 마라. 왜냐하면 사람들은 병 나은 것만 보기 때문에.
너희들이 모르는 귀신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모르고, 다만 몸이 아픈데 보기 때문에, 주님을 찾아올 때, 또 소문 듣고 병 나으려고 오는 거예요. 마태복음 9장에서 병 나으려고 왔다가 죄 씻음 받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기분 좋았겠어요? 기분 나빴겠어요? 안 좋았습니다. 왜 안 좋았느냐 하면, 병을 고치는 것은 그 시대가 용납하지만, 죄를 사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불경스런 일이기 때문에 죽여 버립니다. 어디서? 어디 이단에 빠져서? 하고 죽여 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중풍병자에게, 중풍 병 나으려고 왔는데, 중풍 병이 아니고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이렇게 되니까, 그 다음에 그 사람이 중풍 병 걸려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사람은 죽을 때는 병들어 죽잖아요. 그러나 중풍 병 걸리든, 감기 걸리든 이 사람은 죄 사함 받은 상태에서 감기 걸리고, 죄 사함 받은 상태에서 중풍 병 걸리고, 죄 사함 받은 상태에서 치매 걸리는 거예요.
그것을 바로 사랑이, 성령이 오면 인식하는 거예요. 아! 내가 완전한자구나! 죄를 짓고 싶어도 죄 못 짓는구나! 그러면 니가 나쁜 짓 하면 죄 짓고, 착한 일 하면 죄 안 짓고 하는 것은 누구의 일이냐 하면, 여기 요한일서 3장 8절에 보면 그게 마귀에게 속한 마귀의 일이에요. 그러니 요한일서가 얼마나 엄청난 이야기를 합니까?
과연 이 말을 제가 하면서도 이걸 믿어야할지 말아야 할지. 이거는 너무 충격적인 발언을 지금 쏟아놓고 있습니다. 3장6절에 보세요.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지금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니가 있는 소속의 능력과 권세는 너로 하여금 완전자로 만들어내는데 충분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니가 그런 소속을 보지 않고 개인구원으로 봐버리면 우리는 이걸 지키려고 할 거예요. 자기가 죄 짓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꾸 착한 일만 할 거예요. 그런데 그게 뭐냐 바로 예수 안이 아니고 예수 밖에 있다는 티를 내고 있는 겁니다. 사랑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이 없다는 뜻이에요. 사랑을 받으려고 한다면. 제가 설교 시간에 사랑에 대해 그런 예를 하거든요.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에게 가까이 가지 않는다. 상대를 접촉해버리면, 이거는 성경적으로 맞는 이야기에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손으로 만져 버리면, 이 더러운 때가 사랑하는 대상을 만져버리면 사랑에 흠집이 생겨버립니다.너무 사랑하기에 사랑고백을 못하는 거예요. 너무 사랑하면. 다들 그런 경험이 있지요. 남편 된 사람이 너무 나를 사랑하기에 차마 말을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거예요. 그 다이아반지를 그냥 드리지 못하고 케이크 속에 집어넣고. 돈 없으면 붕어빵 속에 집어넣고, 돈 있으면 케이크 속에 집어넣고 벌벌 떠는 겁니다. 먹었는데, ‘아야! 뭐가 끼이네?’ 보니까 돌이 나오면 깨지는 거고. 다이아 나오면 성사되는 거고.
사랑한다는 것은, 연애할 때 사랑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셋방살이를 하느냐, 월세가 문제가 아니고, 그냥 그대 있음에 나는 아무래도 괜찮다는 겁니다. 참, 언제 적 이야기를, 제가 옛날이야기를 간만에 하고 있는 겁니다. 옛날 한 번씩은 다 들어봤죠? “그대 있음에, 그대가 나에게 어떤 짓을 저지른다 해도, 군화발로 짓밟는다고 해도 그것을 나는 나의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이 정도로. 내가 지금 너무 오버하고 있네. 진정해야 돼!
예수님은 아버지를 사랑해요.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입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버려도 아낌없이 수용하겠다는 겁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왜? 아버지의 뜻이니까. 이게 하나님의 자녀 아닙니까? 누가 그것을 실행하겠어요? 안 돼! 안 돼! 하지 마세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그게 되게 하시는 거예요. 내가 시키는 것이 아니고, 기어이 그게 되게 하시는 겁니다. 어떻게? “예수님!” “왜?” “저건 마귀 일이네요?”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딱 보니까 알겠네요.” 그러니까 이건 완전자에요.
행함으로 의롭고, 행함으로 자기 의를 지키려고 하고,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것, 저게 딱 내가 보기에는 마귀 일이네요?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았니? 어떻게 알긴, 그냥 알아지네요. 그게 바로 완전한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그런 말 한다는 것은 니가 완전자야. 다시 말해서 너에게서는 죄가 나올 수가 없다는 거예요. 죄가 나올 수가 없어요. 내뱉는 모든 말이 예수님의 사랑을 경유해서 나오기 때문에 죄가 없는 겁니다.
거의 비슷한 이야기가 구약 잠언에 나옵니다. 잠언 19장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죠. 거기에 보면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이 말은 니가 그 여자를 선택했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선택당하도록 하나님께서 뒤에 사전조치를 해놓았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여자가 하나 투입된 것이 아니고, 여호와가 투입되는 거죠. 누구 가정에? 내 가정에. 그렇다면 여호와가 투입되면 이게 내 가정이 됩니까? 여호와 가정 됩니까? 이게 여호와의 가정이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완전하라고 하는 것은 나보고 완전하라고 한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간섭과 통제 안에 있기 때문에, 완전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보고 니가 무슨 완전자야? 어제 니가 이런 죄 지었고, 이런 죄 지었는데? 그렇게 지적하거든, 그 지적은 사실 예수님의 얼굴을 향하여 지적하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누가 너를 송사하리요? 너를 위해서 누가 커버했는데? 내 목숨 바쳐서, 내 생명 다하여서 커버했거든요. 하나님께 받은 사랑으로 자기백성을 지킨 그 사랑이 사랑인데, 이 사랑은 이미 모든 인간들의 비난과 악마의 술책과 악마의 권세를 벗어나는데 이미 성공했던, 성공한 능력이 그대로 우리에게 투입된 겁니다.
따라서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는, 완전히 닫혀, 이중삼중의 벙커 속에서 주님 혼자 구멍 뚫고 나왔고, 나온 구멍이 십자가고, 그 구멍사이로 부활의 능력이, 이 바깥의 자유로운, 죄에서 벗어난, 죄에서 마귀로부터, 율법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저주로부터 벗어난 그 자유가, 다시 올라갔다가 다시 떨어져가지고 구멍 속으로 들어와 버리니까, 여기 속이 내부에 속한 외부가 되는 겁니다. 내부에 속한 외부.
그럼 내부에 속한 외부니까, 여기 성도가 있고 성도 아닌 사람이 있다면 여기서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단절이 되죠. 단절. 성도는 완전자. 성도 아닌 자는 완전치 못한 자. 결국 주님은 성도를 구원용이 아니고 기준용으로 사용하는 거예요.기준용으로. 그럼 내가 착했다, 못됐다, 하는 것은 지금 내가 누굴 바라보는 겁니까? 내가 내 행동을 기준으로 보는 거죠.이게 옛 성품입니다. 나는 어째서 이렇게 성도가 되었지? 보는 것은, 그 순간 타인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기준을 지금 전달하고 증거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삶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하신 일을 증거 하기 때문에, 자신은 어떻게 해야 돼요? “나는 뭘 해도 죄인입니다.” 라는 소리를 해야 되죠. 사도바울처럼 죄인 중의 괴수라는 말을, 아주 이제는 미소 띠면서 아주 편하게 그렇게 이야기를 해야 돼요.
어떤 분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마는, 남편이 괴롭히려고 자꾸 성경구절을 갖다 대고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오른뺨을 때렸는데 왼뺨을 내놓아야지, 니가 왜 안 내놓느냐?” “나는 안 내놓을 거야.” “왜?” “무조건 니하고 반대로만 하면 되니까.” 이게 완전자이기 때문에. 저쪽의 주장은 뭐냐 하면, 사람이 착해야 복을 받는다는 주장이잖아요.
그럼 우리는 이 버지니아에서 하나의 기준이 된다면, 모든 것이 예수님 중심으로 배치가 된다면, 무조건 반대로만 하면 돼요. “예수 믿어야 구원받아!” “나 예수 안 믿어!” 이러면 되는 거예요. 그게 완전자에요. 무조건 반대로만 나가면 돼요.뭐 심술도 아니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서 제가 시카고강의 6번짼가, 사랑하지 말라고 했죠.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은 가짜교회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손잡으세요. 또 남녀 간에 손잡게 만들어가지고, 미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짜릿짜릿하게 만들어놓고,이것도 음란의 유혹을 참아가면서 이중고삼중고를 집어넣어놓고, 사랑하는 형제자매~ 노래 부르면서 하는데, 그건 교회가 아니에요. “여러분들은 서로 사랑하지마세요.” 라고 해야 돼요.
왜? 완전한데 왜 사랑을 해야 돼요? 완전한데, 또 사랑하게 되면 그동안 미흡하다는 티를 내게 되는 거잖아요. 완전하기 때문에 사랑 안 해도 그게 사랑이 되는 겁니다. 차라리 그게 사랑이 돼요. 얼마나 느긋하면 사랑 안 해도 사랑이 될 지경입니까? 너희들이 생각하는 사랑은 사랑해야만 사랑이지만, 주님이 주신 사랑은 예수 안에 있는 그 자체가, 죄인도 사랑하시는 주님의 숨겨진 사랑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기회를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께서 이 현장과 함께 만든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체로 살아가기 때문에, 이것이 아까 강의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목적이라고 했죠. 그러니까 우리의 개인적인 목적은 놔버려야 돼요. 근데 잘 안 놓아지죠? 그럼 어떻게 하느냐. 애를 때릴 때, 다리를 위로 쳐들고 엉덩이를 때리면서 맴매! 맴매하잖아요. 하나님께서 목적을 안 놓으면 우리를 거꾸로 쳐들어요. 그럼 옷에 들어있던 잔돈들이 어떻게 됩니까? 우르르 떨어지죠.
맴매! 맴매! 목적을 갖지 마! 먹든지 마시든지 뭐든지 다, 너를 완전자로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 너를 기준으로 세웠는데, 기준! 하고 손들어야 할 기준이, 뭐가 미흡하네, 아직도 멀었네, 아직도 배고프네, 월드컵 4강까지만 하면 되는데, 히딩크 감독은 아직도 배고프다는 거예요. 그럼 우승해야 돼요? 왜 자꾸 목적을 대요. 목적을.
한일전 축구한다고 하면, 뭐 예수 믿는 사람들 기도하고, “주여! 주여! 한 골 넣게 해주세요.” 한 골 넣고 나면, “한 골 지키게 하옵소서.” 무슨 목적이, 그때그때마다 그렇게 세속적이에요. 저 같은 경우는 결과만 봐요. 1대0이구나. 수고했다.지면은, 내가 질 줄 알았어. 까불지 마라. 이런 식으로. 한일전 이기는 게 뭐, 축구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잖아요.
우리가 어떤 목적을 잡아버리면, 이건 백퍼센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착한일이 동원되고, 이거는 스스로 완전체 아님을 폭로하게 되고, 폭로하게 해버리면 이 버지니아에서 기준이 날아가 버려요. 주께서 이 말도 안 되는 기준을, 우리가 뭐 했다고 기준입니까? 완전하지 않은 인간을 이미 완전한 자로 확정지어놨다는 것은, 세상을 마귀의 세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인식론을 새롭게 가지라는 뜻입니다.
그게 바로 아브라함이에요. 이삭이고, 야곱이고. 뭐, 이삭, 야곱 부자 된 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완전히 인생이 그렇게 꼬여도, 엉망진창입니다. 특히 야곱 같은 경우에는 여자 둘이, 지들끼리 싸워가지고 난리도 아니에요. 삐져가지고. 남자와 동침하는데 가위바위보해가지고 하는 동침이 어디에 있어요.
요한일서 3장 7절을 한 번 봅시다. “자녀들아” 아까 자녀라고 하는 것은,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설명해드리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혈통으로 오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에서,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죠. 그럼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면 누구 뜻도 포함이 됩니까? 내 뜻으로 내가 자녀 된 적이 없습니다. 만약에 내 뜻으로 자녀가 된다면 우리는 완전 자가 아니에요. 이케요? 저케요? 자꾸 완전을 추구하게 되죠.
그러면 그것은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마귀가 나타나지 않아요. 마귀가 오히려 그 사람을 도와주기 때문에,마귀하고 단짝이 되지, 마귀가 내 앞에, 적의 영역에 마귀가 나타나지 않아요. 마귀가 어떻게 나타난다? 완전치 못하기 때문에, 완전을 향하여 열심히 매진하는 그런 모습을 해야 마귀가 흐뭇해하면서, 모든 인간세계를, 그동안 완전한 세계가 없었기 때문에, 충분하게, 넉넉하게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께서 병을 고쳤잖아요? 어떤 돈을 바랬습니까? 그 사람이 착하기 때문에 고쳐줬습니까? 그게 바로 확실한 증거잖아요. 착하지도 않지, 헌금하지 않지, 고침 받고 헌금한다는 보장도 없어. 그럼 완전 자가 완전한 치료를 했잖아요. 누가 발작을 일으켰는가, 마귀가 난리가 났어요. 왜? 대가없이 고쳤느냐? 대가없이? 우리는 기도해서 고쳤는데, 왜? 예수님은38년 된 병자를 그냥 말 한마디로 가게 하느냐 이 말이죠.
그들은 안식일 날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하나님한테 이쁨 받아서 병자를 고치는 방법을 사용했어요. 베데스다못가에서.그래서 안식일을 지켜야 행운이라도 온다. 이런 식이었는데,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한테 찾아가서, “야!니 아직도 이러고 있나?” 또 병자가 생각하는 것이, “누가 나를 업어서 첫 번째로 베데스다못가에 던져주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38년 된 병자가 요구하는 것은 뭡니까? 예수님이 완전자라는 것을 모르고, 자기가 생각한 그 생각은, 일단은 완전한 것으로 보고, 이 완전에, 주님에게 자기는 그냥 협조만 해주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계획은 내가 세우고 주님께서는 다만 힘만 주시면 된다는 거예요. 근데 주님은 어떻게 나갔겠습니까? 들고 낑낑거리면서 물속에 들어가게 했습니까? “완전한 내가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강도여! 니가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여자여! 내가 용서로 사하노니 너는 죄가 없느니라.” “나사로야! 나오너라!”
이게 뭐예요? 너나 나나 이제는 예수 안에서, 내가 완전한 것처럼 너희도 완전해져버린 거예요. 완전체로 예수님께서 생산해버린 거예요. 이 믿음은 인간의 힘으로 안 됩니다. 하나님의 권세가 와야 이게 믿어져요. 거울 봐도 볼품없습니다.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질 거예요. 이게 내려앉고, 위아래 위위아래가 점점 내려앉을 거예요. 모든 게 다 흘러내릴 수 있는 문제란 말이죠. 뭐가 완전해요? 두 번만 완전했으면 여기 자빠지겠다. 정말.
뭐가 완전합니까? 하지만, 세상이 보이는 거예요. 인간들의 헛수고, 마귀의 꾐에 빠져서 교회에서 헛수고 하고 있는 거예요. 헛수고. 공짜로 주는 자식이고, 공짜로 주는 선물인데, 이걸 내가 기도해서 얻겠다는 거예요. 결재는 내가 만들고 당신은 거기에 필요한 능력만 후원해달라는 거예요. 그게 뭐가 완전이에요? 완전을 추구하는 것이지. 그게 무슨 완전입니까? 그건 하나님의 자녀 되려고 하는 것이지, 그게 무슨 하나님의 자녀겠어요?
그럼 하나님께서 말씀만 해대시지, 왜 친히 오셨겠습니까? 주님이 친히 오셨다는 것은 우리가 해내지 못하는 그 변화를,주께서 완전한 자녀로 이미 확정짓기 위해서 오셨고, 십자가에 그 근거가 있고, 성령을 통해서 선물로 줬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니, 그 자녀는 누굴 증거 한다?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모든 관계를 마음껏 증거 한다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4장 봅시다. 참, 사도바울이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4장 6절에,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지금 제 말이 아닙니다. 성경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았잖아요. 영을 받았으면 그 티를 낼 거 아니에요. 그 티가 뭐냐, 8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마귀에게 종노릇해서 뭘 지켰느냐 하면, 10절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이게 골로새서에 보면 안식일을 지키고, 율법을 지키는 이 짓거리들을, 십일조하고, 이 짓거리하는 것은, 티를 팍팍 내는 거예요. 뭐다? “나는 마귀에게 속했습니다.” 그럼 교회는 뭘 생산하는 곳이다? 마귀자녀를 더욱더 마귀자녀로 확정짓는,낙인을 찍는, 그런 업무를 하면서 돈을 챙기는 곳이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구원파는 뭐라고 합니까? 구원파는 교육을 받으라는 거예요. 교육을. 우리 단체에 와서. 개인구원을 받아야 개인구원이 된다는 거예요.
성경에는 개인구원은 없습니다. 개인구원은 오직 누구한테 해당되는가, 예수님에게만 해당이 되고, 그 분의 개인구원으로, 개인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지. 나도 주님 앞에서 뭔가 한 수 배웠다고 독자적인 나를 따로, 존재를 획책할 수 있는 어떤 여지를 없애버려요.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이고 예수 이름으로 살아나서, 살아나보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확보했어요. 하나님의 자녀 되는 모든 구비서류를 확보했기 때문에. 그때부터 낑낑거리면서 우리 따라오려고, 하나님의 자녀 되려고 애쓰는 꼬락서니하고는, 참 가관이다. 가관. 가관입니다.
가정에 저주가 흘러내리니, 일천번제를 드려야 대학시험에 붙니, 안 붙니, 세상에! 인간에게도 정성을 드리는 법인데, 살아계신 하나님께 정성을 안 해놓고 무슨 뻔뻔스럽게 복을 바라느니, 이거는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계속 쏘아대는 말이 이거에요. 니가 그런 벌을 받고도 니가 죄 없다고 하면, 더욱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너를 더 벌주겠는가? 자기 딴에 하나님 중심주의에요. 하나님 주권사상입니다. 예수 안에서 욥은 기가 차요.
주께서 이유 없이 고난주니까, 이거는 나중에는 친구가 아니고 웬수에요. 하다하다 안 되니까 욥이 욕을 해버려요. 너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하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니가 지금 어긋난 길로, 잘못된, 교회 안 다니고 이상한 모임만 가고 있다고 공격을 해대는 거예요. 아니 기가 차서! 예수님이 십자가 왜 졌습니까? 안 그래도 숙제 많은데, 율법만 해도 숙제 많은데, 숙제 하나 더 내주려고? 실제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계명 지켰지만 모자라다. 예수님의 계명까지 지켜야 된다는 겁니다. 새 계명까지.
아! 정말! 로마서 13장에 보면, 모든 율법은 사랑함에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 이런 것은 눈에 안 들어와요.사랑만 하면 모든 율법은 온전히 다 이루었다. 간음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도적질하지마라...뭐 하지마라. 사랑하면 그게 다 되는 거예요. 사랑하면 그게 온전한 거예요. 이 이야기만 하고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마귀이야기까지만 하고 다음 것은 딴 데 가서 할 테니까 들어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까 제가 분명히 사랑을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소멸이라고 했죠. “그대 있음에 내가 어떻게 되도 상관없이 그대만 모실 수만 있다면, 제발 당신을 모실 수 있는 그 영광을 저한테 허락하소서.” 이러니까 남자들이 다 프러포즈할 때 신사답게 무릎을 꿇잖아요. “당신에 있음에 내가 이런 굴욕적인 모습도, 당신 있음에 충분히 용납됩니다.” 초장에 하자마자 일어서지만. 자, 정리합시다. 사랑 앞에는 뭐가 없다? 내가 없죠. 내가 없으면 나의 목적도 없죠.
그러면 일 하지 말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던 간에, 하나님의 사랑의 기준을, 확정된 너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 일을 하도록 궁지에 몰아넣는 거예요. 제가 자주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촌에 가면 사람들이 농사짓잖아요. 자, 물어봅시다. 농사짓는 이유? 1번. 농업이 그렇게 재미가 난다. 2번. 땅이 있기 때문에 지었다. 3번. 할 것 없어 그 짓한다. 몇 번입니까? 할 게 없어 그 짓해요. 농사도 마찬가지고, 판사도 마찬가지에요. “공부가 제일 쉬워요.” 이러면 결국은 그쪽 길로 갈 수밖에 없어요. 실력은 대기업인데 일부러 중소기업에 가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왜 대기업 가는가? 대기업 가는 쪽으로 그렇게 몰아세우니까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나를 살게 하시는가? 우리를 위함이, 구원파처럼 내 개인구원이 아니라,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기 위해서 가장 적합한 환경을, 딱 맞춤, 월계수양복점이죠. 딱 맞춤으로 그렇게 맞춰서. 이렇게 살게 했단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화낼 거예요. 왜? 다른 사람처럼 재벌 되게 맞추지, 왜 고생하는 것으로 맞췄느냐? 그러면 저는 답답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소멸되잖아요. 사랑 앞에서.
“사랑하는 분이 어떤 조치를 해도 저는 상관없습니다.” 해야 사랑의 관계다. 이 말이죠. “이것 왜 저렇게 몰아붙였습니까?” 이렇게 따지는 것은 누구를 의식합니까? 사랑을 의식 하지 않고, 사랑을 이용해먹으려는 심보가 돼버려요. 그대 있음에, 주 예수 있음에,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왜? 완전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보면,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뭘 받을 지어다? 저주를 받을지어다. 또 이 말 듣고 되지도 않는 사랑을 해본다고 새로 시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뜻이 아니고, 우리가 빈 서랍장이에요. 빈 서랍장에, 고린도전서 16장 22절이라는 양말이 하나 들어온 거예요. 여기에 차곡차곡 쌓이는 거예요.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라. 이게 쌓이는 거예요. 이 전체가 뭐다? 새 계명이고 사랑이다. 이 말이죠. 십자가 피가 묻어가지고. 우리는 그냥 빈 서랍장인데, 날이 갈수록 말씀이 하나하나 쌓여가지고, ‘아, 이래서 우리는 사랑을 받았구나!’ 하는 것을 증거 하시면 되는 겁니다.
마지막 이거 보고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아까 53분했기 때문에, 완전자기 때문에, 이번에는 2분 까겠습니다. 요한일서 3장 3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여러분, 확 안 와 닿죠? 요한일서가 어려워요. 뭐냐 하면, 자기가 어떤 목적을 지녔는지를, 주께서 자기에게 어떤 목적을 주었는지를, 본인이 알아요. 목적을 이루면 더럽고 이게 아니라, 이미 깨끗해졌기 때문에 깨끗함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그 쉬운 일을 그냥 하면 돼요.
왜? 목적은, 내가 구원받는 것을 목적으로 할 것 같으면 이게 실패로 끝나요. 어디까지 깨끗해져야 합니까? 이렇게 되는데, 우리는 주 안에 있기 때문에, 깨끗해졌기 때문에, 주의 깨끗함을 증거 하는 것은 간단해요. 어떤 악랄한 짓이 내 속 안에 또 있다는 것을 인정해버리면 화목제물의 그 가치가 계속 부각되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잖아요.
그럼 나는 그 사랑하는 사람의 그 광채 앞에, 그 희한한 영광 앞에 나는 있으나마나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럼 남들이 이야기하기를, “니 뭐야?” 할 때, 자기는 이미 소멸되었기 때문에 자기를 이야기하지 않죠. 누굴 이야기합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더이다.” 고어 써가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더이다.”
그거 증거 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누굴 증거 한다? 아버지의 행하심을 증거 하는. 아버지의 행하심을 증거 하는 것이 자녀라면, 딱 자녀에 맞는, 딱 그 완전한 자가 되는 겁니다. 아버지 덕분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뭐가? 그 아버지 사랑이 저에게 넘쳤습니다. 그 아버지의 깨끗함이 오늘날 이렇게 저에게 새로운 목적을 갖게 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죄 없다 하면 아버지를 거짓말하는 자로 만든다는 요한일서의 말씀처럼, 죄 있는 것을 화목제물로 죄 없이 했다는 것이 과연 사실이라면, 우리는 죄 없음을 믿게 하옵소서. 그래서 죄 없게 하신 화목제물, 하나님의 사랑, 그것만 우리의 자랑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