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123서

버지니아강의 17강 16091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10. 2. 07:59
2016-09-30 22:44:59조회 : 46         
20160913 요한1서 버지니아강의17-이 근호 목사이름 : 이미아 (IP:122.43.165.245)

20160913 요한1서 버지니아강의17-이 근호 목사

 

적그리스도가 뭐냐, 전에 한 것을 요약하면 벌써 사도요한 말 자체가 인격모독입니다. “우리는 몰라도 돼요.” “아니, 니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모르면 니는 사람이 아니야.” 그런 뜻으로, 인격모독으로 또 나오죠.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가 없으되” 완전히 이거는, 그 당시에 하나님을 믿고 있는 세계에서 하나님이 없다고 한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아들을 시인하는 자는 아버지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보고 싶으냐, 이건 요한복음 10장에 나온 이야기를 그대로 한 거예요.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거든 왜, 또 아버지를 보길 원하느냐”

 

그러면 한 번 정리해봅시다. 하나님 여기 있고,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따로 있고, 예수님은 아버지라고 소개함으로써 여기 뭐가 있느냐 하면, 자기를 아들로 제시하고 숨어있는 분은 아버지가 되겠죠. 그러면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믿게 되면,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내 방식이 여기서 계속 유효하고 살아있죠. 방법이.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 관계 자체가, 아버지도 숨어있고 아들도 숨어있다면 이 관계도 숨어있겠죠. 그 숨어있는 것이 뭐냐 하면 율법의 완성입니다. 율법의 완성이 되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의가 되고, 의가 되면 죄가 없죠. 죄가 없으면 이게 축복이 되고, 축복이 되게 되면 영생을 얻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수위, 이 하나님의 의의 정도, 본질은 어떤 인간도 이 관계를, 의를, 율법의 완성을 못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율법의 완성 담당자가 아들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일은, 결코 어느 누구도 나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겨냥해서 사람들이 모르는 법을 계속해서 제시를 하게 되어 있어요. 제시하는 것이 뭐냐, 예수님이 여기 계시면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말씀 나오죠. 행위 나오죠. 또 기적 나오겠죠. 이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스스로 이루어서 해석해서 만든 의기 때문에, 이 기적과 행위와 말에 대해서 인간들이 지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지키죠.

 

왜냐하면 옛날부터 못 지킨 것은 물론이고, 새삼스럽게 예수님의 말을, 지금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숙제하나 더 내주면,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이거 더 지키라고 내줘버리면, 그건 생각도 못한 거잖아요. 이혼증서 써주면 이혼이 된다. 이거는 모세의 법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혼증서 백장 써줘도 그거는 간음이다. 이렇게 해버리니까, “그 이야기를 왜 이제 와서 합니까?” 그런 식이에요. 그 이야기를 이제 와서 해버리면, “우리가 의가 될 수 있는 준비기간이 짧지 않습니까?” 그런 식이죠.

 

못 지킨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뒤늦게 마지막 때 이야기하는 거예요. 기어이, 기어이 아버지와 아들 관계, 의의 관계에 니가 합세되지 못한다는 것을 기어이 보여주기 위해서 나타나시는 겁니다. 그러면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예수님께서 홀로 다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가버렸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떤 사이냐 하면 끊어진 관계죠. 아버지와 아들의 나라와 이 세상은 끊어진 나라죠. 끊어졌다는 말은, 이쪽에서 이어지지 아니하면 이 끊어진 관계는 여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끊어진 관계 속을 이어버리면서, 이 세상, 사탄의 세계, 흔히 말하는 이 세상을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속했던, 마귀가 속한 그 세상 있잖아요. 그 세상을 무슨 세상으로 바꾸느냐 하면 아들의 세상으로 흡수통합을 시켜버립니다. 흡수통합을 시켜버리면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 하면, 내 목숨 끊어지고 안 끊어지고는 영생과는 상관없게 돼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됩니다.

 

주님께서 사나 죽으나에 신경 쓰는 이유가 그동안 우리가 마귀한테 매인 것은 죽기를 무서워해서 벌벌 떨어서 그동안 굴복했다는 겁니다. 우리 육신이 굴복한 거예요. 육신은 다른 말로 하면 본능이고, 본능은 생존을 발휘하게 되어 있고 생존의 본능 때문에, 아무리 신학을 했고, 지식을 해도, 그딴 것은 본능 앞에 못 이겨요. 본능 앞에 이기지를 못합니다. 죽인다고 하면 예, 예, 안 믿습니다. 대번에, 0.1초도 안 기다려요. 생각할 것도 없어요. 살려주세요! 금방 나와요. 죽인다는 것도 되지만 다른 말로 하면, 돈 줄게! 예~ 예~ 그것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이 갖고 있는 육의 본성은 어떤 경우라도 이걸 이길 신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관계를 잇기 위해서는 주님께서는 정복을 해야 돼요. 정복 또는 이김이라고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번 강의의 핵심은 이겁니다. “이 땅은 주의 땅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이 땅은 인간의 땅이고 하늘만 주의 것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이 땅마저 주의 땅입니다. 이 땅이 주의 땅이라면,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어쨌든 간에 이 땅을 소박하나마나 나의 땅이고 싶어 하는 생각으로 우리는 가득 차 있죠.

 

어디가 사느냐? 내가 확보한, 내 소유의 내 땅은 몇 평이냐? 부동산중개소 알아놔서 어느 집이 괜찮은 집입니까? 그게 자리에 깔려있는 것이, 이 땅은 내 땅일 수가 있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한 적이 없어요. 내가 살기 위해서 이 땅을 이용해야 된다는 것이, 이 본능이 앞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 땅은 주의 땅이라고 했는데, 주의 땅인데 내 땅으로 했으니까 이 사람은 살 수가 없죠.

 

그런데 주의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 단수가 아니고 복수에요. 사람들이 있습니다. 레위기 26장에 나오죠. 품꾼의 자격으로 삽니다. 그들이 누구냐, 이스라엘입니다. 주인은 따로 있고 품꾼으로 사는 거예요. 레위기 대목을 보겠습니다. 요새는 자신감이 없어요. 26장인지 25장인지. 26장 앞에 25장 마지막 절입니다. 55절,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꾼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꾼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여긴 진짜 버지니아다. 성경책을 보잖아요. 딴 데 가면 전부 다 스마트 폰 펴놓고. 그게 훨씬 빠르대요.

 

자, 머리 좋은 사람은 딱 압니다. 야! 내가 생각하는 구원을 다 배제하고 하나님의 숨겨진 구원만 적용시켜서 구원하는구나. 머리 좋은 사람은 대번에 딱 나옵니다. 뭐 여러분도 머리 좋은 편에 포함되지만. 개인구원이 없는 거예요. 자, 개인구원이 없고 하나님의 자신을 위한 구원이 있다면, 내 개인구원은 없다 정도가 아니고, 이제는 발길로 매일같이 차이는 겁니다. 저리 가! 그거는 니 생각이고. 그런 니 중심의 구원은 내가 생각하는 구원과 섞일 수 없고 배제당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한일서는 인격모독이에요. 품꾼이라는 것은 어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가 객체가 되고, 주님의 하나의 대상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주인님은 따로 있어요. 그래서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이 그 말이에요. 예수님이 주체가 되고 나는 주님에 의해서 새로 발생된, 옛날의 내가 아니라, 흙에 살리라 했던 내가 아니라. 주님에 의해서, 주님이 생각한 그 땅에 살리라. 그러니까 노래 바꿔야 돼. 주님이 주신 땅에서 살리라.

 

이거는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어야 되는데, 이쪽에서 내가 살리라가 주님의 땅에서 살리라로 바뀌려면, 그 안에 반복된 유월절이 도입되어야 하는데, 그 반복된 유월절을 세 글자로 십자가라고 하는 겁니다. 십자가. 유월절을 다시 언급할까요? 여러분 다 아시겠지만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자, 언급할 때 물어볼 테니 답변 한 번 해보세요. 왜 유월절에는 둘째아들, 셋째아들이 왜 가담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맏아들이니까.” 에구, 정답을 미리 이렇게 말하시면 재미가 없잖아요?

 

자, 그러면 하나 더, 왜 하필이면 맏아들만 그렇게 하고, 이왕 하는 거 둘째아들, 셋째아들도 아들인데, 주께서 아들 다 상대하면 왜 안 됩니까? “오직 맏아들만 인정하기 때문에.” “장자만.” 예, 장자인데요. 제가 원하는 답변은 뭐냐 하면, 창세전에 독생자는 몇 명입니까? 한 명이죠. 바로 장자에요. 예수님의 장자 됨을, 구름 끼면 밑에 그림자 있죠. 창세전에 독생자의 그림자가 이 지상에 펼쳐지는 겁니다.

 

그러면 유월절은 우리 구원하는 사건이 아니고 예수님 됨을 보여주는 모형이고 그림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은 신약의 모형이라고 히브리서에 나와 있고, 로마서 5장에는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되어 있고, 영어로 하면 심볼symbol이라고 그렇게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완전히 인간을 도용하면서도 인간인 우리는 빠져있어요. 이스라엘은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만들어줬기에, 우리가 원하는 이스라엘로 하나님께서는 번창케 해주실 것이다. 시켜만 주이소~ 이래 나온 거예요. 시켜서, 나와서, 그래서 멸망당한 거예요.

 

예수님이야기인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다가 아니라 이스라엘 속에 이스라엘이 있다. 이케요? 그 속에 또 이스라엘이 있다. 이렇게요? 그 속에 또 있다. 결국 최후에 남은 자는, 내 아들, 내 장자, 요단강 세례 받을 때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면서 무슨 이야기를 했어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변화산에서는 뭐라고 한 줄 알아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막9:7).

 

그래서 하나가 열둘이 되는 관계를 주께서는 성사를 시킨 겁니다. 하나가 열둘이 되는 건데, 요한계시록에 12지파가 나오죠. 1이면 1이고 12이면 12이지, 어떻게 1이 12로 퍼질 수가 있고, 어떻게 12가 1로 수렴될 수가 있느냐? 이건 수학적으로는 성립이 안 돼요. 아니, 말 잘못했는데, 수학적으로 성립이 됩니다. 귤 12개가 있습니다. 숫자로 12죠. 이게 1로 되려면, 숫자라는 것은 뭐냐 하면, 양(12)입니다. 양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질(1)로 바꾸면 됩니다. 간단하죠. 참 쉽죠잉~

 

어느 땅에서 신앙생활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너희 교회가 몇 명이냐는 양을 묻지를 않습니다. 누구 이름으로 모이느냐? “두 세 사람 걱정하지 마!” 두 사람, 한 사람 괜찮아요. 누구 이름으로 모이느냐? “주의 이름으로 모였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게.” 사람들은 그런 소리하니까 참 주님도 바쁘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사람들이 굉장히 걱정해요. 왜? 너무 바쁘게 설쳐가지고. 전국에서 애들이 굴뚝 앞에서 양말 펴놓고 선물 기다리고 있으니까. 택배회사치고 그렇게 바쁜 택배회사가 없어요. 그거 이상하죠. 그래서 어떤 물리학자가 계산을 해봤습니다. 루돌프 사슴이 끄는 썰매의 속도가 얼마가 되어야 가능하냐를 계산해보니까, 시속 40만키로가 되어야 그게 가능하대요. 빛의 속도에요. 완전히 인터넷이에요. 그렇게 돼야 선물을 다 줄 수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한테 아무 쓸데없는 계산을 했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돌아다닐 필요가 없어요. 왜? 그것을 주께서 유발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에베소서 1장에서는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충만”(엡1:23). 유비쿼터스, 어느 곳이라도 내가 없는 곳이 없다. 바로 성령 안에서는 멀리 있다는 게, 그게 필요 없어요. 그냥 충만하다고 이야기하면 돼요.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하늘에 같이 있어요. 충만한 겁니다.

 

양에서 질로 바뀌려면 뭐가 날아가요? 개인구원이 날아가죠. 개인구원 없고, 1로부터 다시 보게 되면 우리는 주님의 구원 안에, 같은 구원의 혜택을 입습니다. 다만 뭘 봐야 하느냐, 그 경계선인 유월절, 십자가를 증거 해야 되겠죠. 갈라디아서를 쓴 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15년 내지 20년 후에 썼습니다. 확실한 것은 몰라요.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의 입장에서, 또는 갈라디아서 편지를 읽는 입장에서는 난해하기가 짝이 없어요.

 

십자가는 이미 15년 전에 끝난 사건이에요. 십자가 있던 갈보리 요새 가봐야 거기 아랍인들이 장사하고 있어요. 십자가 있던 갈보리 골목에. 안 가봤지만 동영상으로 다 봤어요. 다 있더라는 말이죠. 그럼 십자가가 보인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갈라디아 사람들아 니 눈앞에 십자가가 보이지 않느냐?” “안 보이는데요?” “이거 뭔가 이상해? 나는 보이는데?” “어데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하면서 뒤에 나온 말이 뭐냐 하면, “니가 지금 행하고 있는 것이 십자가에서 행함이냐 아니면 율법의 행함이냐”

 

자, 율법을 행하려면 누가 전제되어야 해요? 내가 여기 하나로 있음을, 내가 여기 있음을 전제로 해야 되죠. 내가 있게 되면 십자가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내 똥배가 보이죠. 내가 보이지 십자가가 왜 보여요? 내가 보인다는 것이 뭘 가려버린다? 십자가가 보인다는 것을 가려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여기 있음으로 하지 말고, 십자가의 반복되는 능력의 작용으로, 십자가 증거 하라고 내가 여기 있을 때는, 내가 안 행했는데 행해요. 행하면서 뭐와 결부시킨다? 십자가와 결부된 행함으로써 지금 등장하니까, 행하세요. 행하되 뭘 경유해야 된다? 내가 행했다는 내 주체가 행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주체로 연결되게 되면 어떤 것을 행해도, 헌금을 하던 뭘 하던, 그것이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아니, 헌금 하는 것이 죄라면서 왜 갑자기 의가 나왔느냐? 조건이 있어요. 십자가를 경유해서, 그럼 십자가를 경유하면 뭐가 죽는다? “제가 지금 헌금하니까 의죠?” 라는 그것을 찢어버리죠. 어떻게? 헌금하는 것도 죄라고 들어가서 나올 때는 주님이 하신 의로서 나와 버리는 겁니다. 말로하면 복잡한데, 따지고 보면, 뭐 없네? 없어? 복잡할 게 없어요. 그냥 살면 되고, 강조하게 되면 ‘막’글자 하나 붙여서 막국수처럼 막살면 되고. 막국수나 국수나 맨 국수에요. 막 하나 붙었다고 이단이고 그냥 행한다고 이단이 아닌 것이 아니고. 그거 뭐 그냥 쳐서 그냥 막 뽑아내서 시원한 물에 헹궈 먹으면 돼요.

 

오늘 강의가, 모든 것은 예수님이신 아들의 관계가 이 땅을 접수해서 그 땅에다 그냥 퍼붓는 거예요. 지금도 퍼붓는데, 누굴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성령을 받은 자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계속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관계를 보면서 우리는 알죠. 우리가 이렇게 나 댄 것은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한 것인지 날 드러내기 위한 것인지 알죠. 자,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요한복음을 한 번 봅시다. 요한일서와 요한복음이 관련이 있습니다.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를 제가 설명하기 전에, 잠깐 제가 묻는 형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한다는데 우리는 그리심 산에서 예배합니다. 그런 것이 맞습니까?” 하는 조로 이야기했죠. 그럴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23절 보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그 다음에 □다. 그 □다음에 뭐가 들어갑니까? “곧 이 때라” 이걸 설명하려면 몇 시간 더 걸려요. 근데 이건 생략합시다.

 

우리는 시간이 흐르지만 주님은 이 세대로 봐요. 이 세대라. “이 때라” 원뜻은 카이로스가 됩니다. 지금 주님이 활동하는, 주님이 개입한 이 때라. 그러니까 예배는 누가 주관한다? 니가 나한테 드리려고 오는 것이 아니고, 너 개인, 나 여기 있어가 아니라, 독생자인 아들과 아버지의 이 관계를, 예배하라는 이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예배하라는 그 말씀을 주님이 주셨기 때문에, 그 주님을 독생자가 대표해서 그것을 성취해서 지상에다, 이 땅에다가 그냥 퍼부어 버리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돼요.

 

자, 묻습니다. 그렇게 했으면, 여기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뭐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다음에 25절이 문제입니다. “여자가 가로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질문 드립니다. 방금 신령과 진정, 성령이야기 했는데 왜 여자가 메시아 이야기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게 질문입니다. 흐름상 이걸 알아야 돼요. 지금 주고받는 것이 예수님께서는 예배이야기 했고, 예배 같으면 어떻게 예배드려야 합니까? 예루살렘입니까? 그리심 산 가야됩니까? 아니다. 신령과 진정, 다시 말해서 진리와 성령으로 예배할 때가 온다. 그렇게 갑자기 장소이야기에서 뭐로 바뀌었습니까? 성령이야기로 바뀌었죠.

 

그러면 성령이야기가 나와야 될 건데, 여자가 하는 말이 “메시아가 와야 된다고 하는데, 메시아가 오시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줄 겁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언제인지 메시아가 오시면 알려줄 겁니다.” 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바로 “네가 말하는 바로 그니라” 했거든요. 자 그럴 때 여자가 왜 갑자기 메시아 이야기를 끄집어내느냐 이 말이죠. “예. 알겠습니다. 성령으로 예배드리겠습니다. 예. 제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겠습니다.” 요새 흔히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여러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겠습니다. 여러분, 휴대폰 끄세요.” 파이프 오르간 우와왕~♬하박국 3장에서 말씀, “성전 안에서는 모든 사람은 잠잠할지어다”(합2:20). 이 멘트 한 번 깔고. 파이프 오르간 한 번 치고, 없으면 그냥 전자오르간 치고. 조용! 이렇게 신령과 진정을 우리가 꾸미면 되지 않습니까?

 

내가 만약 사마리아 여인 같으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하면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정신 바짝 차려서 신령과 진정으로 분위기 띄어서 예배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는데, 왜? 메시아 이야기를 언급하느냐 이 말입니다. 여자가. 여자가 예수님을 보고 뭘 감 잡았어요? 주께서 내뱉는 말은, 바로 이거는 자기가 알기로 메시아가 와서 가르친다는 말은, 그 이야기를 이미 언급했다는 자체가, 메시아가 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 말은 내가 할 게 전혀 없습니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내 몫이 아니고, 파이프 오르간 몫이 아니고, 경건하게 옷 입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유발하는 현장이 곧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메시아가 혼자서 다 합니다. 기다립니다.” 하니까, “니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바로 나잖아.” 여자가 뭘 버려두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여기서 기가 막힌 거예요. 여자가 처음에 뭘 하러 왔습니까? 물 길러 왔잖아요. 자기 본분을 잊어버렸어요. 본분을. 물 길러 왔다는 것은 자기 존재감이 물길을 때 있는 거예요. 근데 물동이를 버려두었다는 말은 뭡니까? 까짓 것, 내 책임이고 뭐고. “야야! 순자야. 니 어디 갔다 왔어?” “물 길러 갔죠.” “니 물 어디에 있는데?” “없어요.” “뭐 이런 게 다 있어?” “메시아를 만났습니다.” “메시아를 만난 거는 좋고 물 달라고? 니 물 길러 보냈잖아?” 하면 무슨 말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아차! 하고 다시 돌아가서 예수님 만나고 이럽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물 길러 갔던 그 모든 타이밍이 예수님께서 이미 짜놓은 각본대로 움직였다는 겁니다. 내가 메시아를 기피하려고 해도 기피 못할 팔자가 되었다는 거예요. 이놈의 팔자가 무슨 팔자가 되어가지고, 기어이 메시아 받아서 천국 가야 할 팔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드디어 이 무대에,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이 벌이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벌이기 위해서 땅 위에, 이미 자기 땅으로 접수하시고 그 땅 위에 무대를 설치하시고, 그 무대에서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뽑아진, 그때 길거리 캐스팅 된 여자가 사마리아 여인이 된 거예요.

 

요한복음 4장의 주인공이, 여자 조연으로 이렇게 영원토록 우리 앞에 등장한 겁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마찬가지고. 등장했어요. 그 현장에 누가 없었습니까? 유대인들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말씀을 악바리로 지킨다는 유대인하고 말씀 지키는 것 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발길로 차는 거예요. 저리가! 너희 유대주의자들은 저리가! 구원받았다는 말은 뭐냐, 옛날에 우리의 옛 성정이 배척당하는 현상을 동반하고 주께서 우리에게 계속 들이대는 겁니다.

 

물 길러야 돼요. 맞습니다. 물 안 먹고는 못 사니까. 그러나 그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에요. 남자 다섯 있었고 지금 사귀는 남자는 여섯 번째다. 그러나 지나가보면 으흠~어깨를 올려야 돼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자한테. 왜? 내 입장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럼 나에게 일어난 남자 다섯은 누구 일입니까? 내 일이 아니고 누구의 일입니까? 주의 일이에요.

 

여자분들 이 이야기 들으면, 나도 좀 괜찮은 남자 골라잡는 재미로 한 열 명 사귀고 천국 들어가면, 엘리자베스테일러가 그렇잖아요. 돈 되죠, 인물 되죠. 뭐 인물도 점점 더 뭉개집니다마는. 데미 무어, 세상에! 26살 연하남이에요. 돈 되지, 인물 되지, 골라잡아, 애먹이는 남편이 있나, 혼인신고는 말고는 지 맘대로 하면 되고. 그러다 남자가 누나 헤어지자고 하면 돈 한 1억 부르면 챙겨주면서 잘 놀았다고 보내고 다른 남자 또 사귀면 되고. 마돈나. 마돈나가 무슨 뜻이냐 하면 성모마리아라는 뜻입니다. 하여튼 성령을 받았어. 하여튼 복이 무슨 이런 복이 다 있어? 남자 다섯 있었는데 또 사귀고. 얼굴이 되는 모양이라. 그러니까 그렇게 사귀죠.

 

그런데 어떤 작가가 이런 이야기해요. “도대체 인간은 무슨 저주를 받아서 한 남자, 한 여자만 데리고 사느냐? 신의 저주는 이게 저주다.” 라는 거죠. 그래서 오스카 와일드 라는 유명한 미국 작가가 이런 이야기 했어요. “한 여자한테 잔소리 듣는 그 아픔은 한 여자만 바라본다는 그 행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멋있는 말이죠. 한 여자로 인해 잔소리 듣는 아픔은 오직 한 여자만 바라볼 수 있는 그 혜택에 비하면 그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라 이 말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깊이 생각하라는 거예요. 사람이 두 여인을 다루는 것이 행복하게 보이나 천만의 말씀이에요. 골치 아픈 거예요. 야곱 보세요. 질투사이에서 그게 진짜 힘들죠. 제가 어떤 아랍사람을 아는데,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있어요. “아랍 사람은 좋겠다. 여자 네 명까지 둘 수가 있어서?” 그러니까 아랍 사람이 되받아서 말이 “하나도 버거운데, 네 명 한 번 해보죠?” 이게 돈이 돼야 하지, 돈이 없는 인간이 네 명 하면요, 이거는 남자를 바짝 애먹일 판이에요. 감당 안 되는데요. 가만히 생각하면, ‘아! 그렇구나.’ 다 이렇게 나타나죠.

 

자, 다시 한 번 해봅시다. 땅이라 하는 것은 옛날 어느 땅이었다? 사탄의 땅이었고 세상이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어디서부터 왔다? 땅에서부터 왔어요. 근데 그것마저 주께서 점령을 했다는 말은, 마음껏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하라. 근데 그것이 누구의 뜻이었다. 아들을 증거 하기 위해서, 너희가 죄인 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사탄은 그런 식으로 해서 미움을 받은 거예요. 인간은 빠지고 사탄과 주님과의 싸움인데, 그러면 우리는 뭐하면 됩니까? “성령 보내줬잖아?” “그럼 성령 안에는 뭐가 있는데요?” “사랑이 주어졌잖아.”

 

이게 요한일서 4장에 나오는데 한 번 봅시다. 조건이 있습니다. 이 조건부터 설명해들어 가겠습니다. 어렵더라도 참으시기 바랍니다. 요한일서 4장 12절에 보면 어느 때나 하나님을 뭐가 없다? 본 사람이 없다고 하죠. 이것은 요한복음 20장 29절에 나오는 말씀과 똑같은 말씀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는 것을, 같은 사도요한이기 때문에 줄곧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게 굉장히 부담이 돼요. 그래서 교회는 뭐냐 하면, “목사님. 내가 신자인 것을 증명해주세요.” 라고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소비자를 계속 붙들어야 하기 때문에, “기도하시면 아마 이런 복을 받을 것입니다.” 라고 해서, 소비자가 원했던 거예요. “우리 가정에 이런 변화가 생기면 신자 맞죠?” 라고 확인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실적과 업적을 손에 쥐기를 원하는 겁니다. 보고 믿겠다는 거예요. 교인들이 그렇게 나오니까, 40일 철야해보라고 한다든지, 새벽기도에 연속 출석해보라고 한다든지, 성경을 한 열댓 번 쓰시면 아마 손가락은 아프지만 은혜는 받을 걸요? 이렇게 해서 마음이 낮아진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자꾸 어떤 결과를 내다보게 되고, 그 다음부터 그 사람에게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죠. 목사님께서 방언을 터지게 하는데 방법이 뭐냐 하면 주기도문을 천 번을 하라고 했다. 실제로 조용기 목사가 시킨 거예요. 뭐 방언해야 성령의 은사라고 하는데 안 되니까, 우리 좀 하게 해달라고 요청하니까 주기도문을 천 번 해보라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불교에서 백팔번뇌, 백팔번뇌가 안 되면 삼천배하든지, 번뇌를 삼천배할 때, 한 번 할 때마다 돈을 깎아봐야 해요. 천 곱하기 천하면 백만 원인데, 이걸 복리로 계산하게 되면 이백만원이 돼요. 뭐 새마을금고에서는 이자를 별로 안 주기 때문에 한 백오십만 원쯤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거 해가지고 부흥된 교회가 많거든요. 왜? 행함을 이야기해주니까 복잡한 성경을 덮어도 괜찮아요. 시키는 대로 하면 납득이 되니까. 왜? 납득되게 실적을 만들면 돼요.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은 실적을, 업적을 줄 리가 없으니까, 그럼 어떻게 하느냐, 그 기도의 응답을 본인이 만들면 돼요.

 

자기 기도응답을 본인이 만들어놓고 기도응답 됐다고 우기는 그 작전을 보게 되면 가관입니다. 가관이에요. 본인이 억지로 우기는 그 모습이 가관이라니까요. 안쓰러워요. 주님께 기도를 했는데, 조용한 거 보니까 다 그렇게 했는가 보다. 기도했는데, 주여! 성적 좋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애를 딱 기다렸어요. 시험 쳤는데 배렸어요. 배려서 아, 응답이 없는구나. 하는데, 그 순간 아는 친척이 와가지고, 아드님 요새 놀고 있죠? 뭐 시험 친다면서요? 성적이 안 나와서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 회사에 마침 내가 아는 사람이 있어가지고 좋은 자리 있는데 오세요. 아이구, 주여! 앗싸! 응답됐구나. 기도응답이 됐구나. 피할 길을 주시는구나. 주께서 환란 날에 피할 길을 주신다고 했으니까.

 

원인을 어디서 찾느냐 하면 자기 기도응답을 찾는, 찾다보니까 응답이 자기한테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순간 히브리서 7장이 날아가 버려요. 주의 기도로 우리 죄를 들추기 위해서 줬다는 생각은 안 하고, 자기 기도를 기어이 응답시키려고 다른 방법으로, 하여튼 어쨌든 저쨌든 취직만 되면 되잖아요. 목적이 취직이니까. 됐다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 그게 응답이에요. 내 기도는 응답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 응답이 응답이다 이 말이죠. 어제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해서 복잡 했습니다마는, 다시 복잡해졌어요.

 

기도의 응답을 찾고자 하는 그것을 탓하지 마세요. 모든 기도할 때는 노림수 없는 기도는 없습니다. 주여, 기도하는 것 잘 보고 계시죠? 나는 어떤 식으로 하던 나는 겸손해가지고 찾지는 않겠습니다마는, 찾지는 않겠습니다마는 주실 줄 믿습니다. 그게 실적이잖아요. 하다가 어떤 식으로 예상 못한 행운이 오게 되면, 주여! 응답이군요. 아차! 그때 배웠지? 이게 응답이 아닌 것을! 이게 응답이 아닌 것을 믿습니다. 하는데, 기분은 왜 그렇게 좋아지죠? 이중삼중으로 트릭을 쓰는데 가관이에요. 가관. 여러분, 그냥 사시면서 기도케 하는 것이 처음부터 그게 주의 기도응답 입니다.

 

자식 취직시험 친다는데 가만히 있을 엄마가 어디에 있어요? 뭐 소녀의 기도처럼 꿇어앉아 원피스 입고는 안 하겠지만, 뭐 기어 다니고 화장실에 왔다 갔다 하면서, 주여! 주여! 하는 이것도 기도라 말이죠. 무시로 기도한다 말이죠. 기도 안 할 수 없게 만들어요. 무시로 기도하라고 했으면 분명히 우리에게 적용되게 되어 있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게 되어 있어요.

 

그게 요한일서 4장 12절 아까 했잖아요.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그러니까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어서, 답답해서, 인간 쪽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꿈틀거린다는 것을 주께서 아신다 이 말이죠. 그럼 인간이 원하는 것은 자식 취직이고 결혼이겠지만, 주께서 주는 것은 달랑 하나밖에 없어요. 사랑이고 성령입니다. 성령을 주시고 사랑해주신다는 것은, 이거는 지금까지 달라진 게 없어요. 여전히 그대로 가는 겁니다.

 

12절을 이어서 보면,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우리가 사랑하면, 여기 우리라는 것은 어제 우리가 배웠습니다. 우리라 하는 것은 뭘 경유한다? 독생자를 경유해서. 여기 우리라 하는 것은 아비들아, 자녀들아, 할 때 그 우리죠. 그러면 그 사람들을 깨보면 뭐냐 하면 영적조건이 붙어있는 거예요. 영적조건이. 이미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그게 붙어있으면 우리가 되는 겁니다.

 

그럼 다시 하면, 우리라 할 때는 양적으로 하면 안 되고 질적으로죠. 질적인 것은 따로 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하는 자에게. 거기서 발생된 결과물이 우리가 되고, 그 우리에는 뭐가 있고 사랑이 있고, 사랑에는 성령이 거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온전한 사랑이고, 이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고,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뭐를 표현하느냐 하면, 이 땅에서 독생자가 활동하시는 것을 반복적으로 성령의 공동체, 또는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이 반복적으로 증거 되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작용하시는 거예요. 요한일서, 요한복음 그렇게 이해했죠.

 

요한일서 한 번 들어가기 전에 여기서 한 번 정리합시다. 교회가 뭡니까? 교회는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 뭡니까? 우리는 몰랐는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우리에게 이미 다 이룬 업적으로, 다 이루었다는 현실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그럼 우리가 하는 일은 뭡니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온전히 모든 율법을 다 이루어서 하나님의 의가 생산됐다고, 사랑이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증거 하는 일을 우리에 해당되는 사람이 하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정리됐죠.

 

그 다음에 요한일서 2장 24절 봅시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처음부터. 이 처음부터라는 것은 창세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요한을 알게 된, 편지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안이라는 말이 너무 어려우니까 이걸 제가 쉽게 하기위해서, 소속이 정해져 있다. 이 소속에서 생기는 것은 신분입니다.

 

회사에 사원들이 들어갈 때 뭘 달죠? 사원증 달죠. 사원증 가지고 입구에 들이대면, 카드 대라고 해서 들이대면 패스, 통과되잖아요. 소속된 자는 주님의 성령이 함께 있기 때문에, 패스가 됩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가 함께 있고. 결국 이 소속이라는 말은 뭐냐, 시간이 삭제되어 있어요. 시간이 끊어져있으니까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묵시가 되는 겁니다. 그럼 시간이 삭제되었다는 말은, 우리 몸은 시간 속에 있는데, 몸은 시간 속에 있기 때문에 숫자로 다루어지게 되고, 본질은 묵시에 속하고.

 

이 땅 자체를 접수했는데 이 땅에는 시간이 흐릅니다. 시간은 세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크로노스, 아이온, 카이로스. 이렇게 있는데, 이 카이로스는 아이온하고 한데 묶읍시다. 세 가지를 하려면 복잡해요. 여러분들 복잡한 거 싫어하니까. 이 둘(아이온, 카이로스)은 크로노스하고 비교가 됩니다. 크로노스는 단선적 시간관. 단선적 시간관의 특징이 뭐냐, 과거는 흘러갔다. 이순신 장군이 죽었다. 십자가는 흘러갔다. 교회에서 십자가는 잊으라. 구원의 새 생명만 남았다. 이게 단선적 시간이에요.

 

“여러분 미리 아시고 불렀지만,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미래에 성화되는 것만, 거룩하게 되시면 여러분은 천국에 골인합니다.” 아주 합격 안 됐어요. 합격하려고 애쓰는 자는 합격되고. 안 그러면 탈락한다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의 모든 바탕이 뭐냐 하면 단선적 시간관을 유지하면서 사는 거예요. 이런 시간관을 유지했던 자들이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이었어요.

 

그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어떻게 다윗의 저~ 밑에 있는 후손이, 어떻게 다윗의 제일 꼭대기 선조가 되겠는가? 설명하라. 자, 다윗이 있습니다. 다윗을 있게 한 선조가 있겠죠. 그것을 예수님은 주라고 합니다. 또 다윗의 후손들이 있잖아요. 어떻게 이 선조가 후손과 일치가 되겠는가? 단선적 시간관에서 설명해보라. 만약에 이게 설명이 안 되면 뭘 버려라? 단선적 시간 속에서의 나, 자아를 포기하라. 시간속의 나를 포기하라. 이걸 포기하고 묵시 속의 나를 진짜 나라고 인정하라. 이런 뜻이거든요.

 

근데 그 사람들은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단선적 시간 외에는 시간의 의미가 없어요. 시간 개념을 이게 전부라고 본 겁니다. 말을 못하죠. 그럼 주님도 “나도 말 안 해줘. 너희들이 말을 못하면 나도 말 안 해줘” 하고 사라지죠. 그럼 제자들은? 제자들도 몰라요. 아무도 몰라요. 예수님께서 시간에서 부활로 말미암아 묵시로 가고 나니까, 비행기가 뜨면 밑에가 보이죠. 묵시로 확 뜨니까 그 시간적 단선관이 뭐냐 하면, 이 시간(아이온)에 갇혀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단선적 시간이었습니다. 시간을 가두어 놓는 시간이 아이온에요. 이걸 우리말로 번역하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세대에요. 세대. 세대는 갇혀있다. 동그란 시간, 구(球), 동그란 시간의 창고. 아이온.

 

아무리 그들이 미래의 천국을 원해도 그 천국은 아이온에 갇힌, 옛 시대가 조작해놓은 가짜 천국이에요. 아무리 지옥이 무섭다 해도 그 지옥은 있지도 않는 가짜 지옥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아이온을 뭐로 만들었느냐 하면 지옥으로 만들었어요. 누가 대장이기 때문에? 사탄이 대장이기 때문에. 그래서 아이온을 지옥으로 보내버리면, 적그리스도, 가짜 양의 탈 쓴 짐승, 가짜 선지자, 이것들이 가면서 거기에 누가 따라오느냐, 그들을 추종하는 자들도 함께 어느 불에 간다? 유황불로 가게 되어 있어요. 유황불로.

 

유황불로 들어오는 순간, 카이로스, 아이온, 그리고 크로노스가 드디어 다 깨집니다. 시간 자체가 없어요. 그럼 시간 자체가 없다는 말은, 시간은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시간이죠. 그렇잖아요? 필요에 따라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거죠. 그럼 이 시간을, 이런 그림을 상상할 수 있는데요. 둥그런 원 안에 시간의 철도가 깔려있습니다. 이걸 한 번 압축을 해봅시다. 옆에 밀어내고 위아래 위위아래해서 찌그러트려봅시다.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카이로스가 돼요. 때가 되어 버려요. 때는 점입니다. 점의 특징은 면적이 없다는 거예요. 물론 현미경으로 보면 면적이 있지만, 우리의 인식상 약속을 했어요. 면적도 없고 그냥 점이다. 있는지, 없는지 경계지점으로 보자. 볼펜 가지고 점을 딱 찍어버립니다.

 

그러면 이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죠.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흔적이라고 하고, 이걸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단선적 시간에서, 오늘 며 칠 이죠? 묵시 속에 있어서 시간을 잊어버렸어요. 9월 14일. 9월 14일이 단선적 선이잖아요. 이 선을 잘라보면, 식빵 슬라이스 하듯이 잘라보면, 모든 게 뭐냐 하면 사건사건사건...연발총 쏘듯이, 사건의 연관된 것에 뭉치, 또는 다발이 되겠습니다.

 

그럼 뭐로 끊을까요? 1분으로 끊을까요? 그럼 1분으로 끊으면 60초로 다발로 끊어집니다. 그래서 순간순간 우리는 묵시의 은혜를 받아서 하루를 살기 때문에 그날 걱정은 그날 하라. 다시 말해서 니가 걱정하는 사건은 니가 잘못해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주께서 유발하신 거예요. 사무실 문을 닫는데, 철컥 달렸다. 이거는 주께서 유발하신 거예요. 이거는. 카이로스입니다. 그 사건을 일으키신 당사자 누굽니까? 시간 자체를 초월하신 분이죠.

 

이제는 그렇게 시간 자체를 초월하신 분이라고 하지 말고,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계획했던 바를 실현하기 위해서 뭐를 정복했다? 이 버지니아 땅을 점령하고 접수하고 한 거예요. 우리는 졸지에 품꾼이 되고 말았고. 우리는 품꾼이 되었어요. 뭘 보여준다? 사건을 보여주는, 주께서 우리와 함께 살아있다는 것, 임마누엘. 주께서 함께 있기만 합니까? 가만히 멀쩡히 앉아만 있습니까? 계속해서 사건을 일으키는데 사건의 증거를 대라. 내가 사건의 증거에요. 내가.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 내가 고백한다는 것,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유하면서 나 자신을 사건으로 볼 수 있다는 이 안목, 양이 아니고 질적인 안목.

 

이게 바로 주의 유발하신 사건이기 때문에, 이게 증거죠. 제가 이렇게 은혜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서신에 쫙 깔려있어요. 이번 대전에서 겨울수련회 하는데, 거기서 골로새서를 하는데, 골로새서 이야기가 이 이야기가 될 거예요. 사도바울의 편지를 읽을 때는 묵시로 읽어야 돼요. 그래서 베드로후서에 보면 사도바울의 편지를 문자로 보지 말고 뭐로 읽어라? 영으로 읽어라 이 말입니다. 그걸 문자로 억지로 풀다가 다 넘어졌느니라.

 

본인은 단선적으로 해가지고 나를 예쁘게, 해피니스하게 하려고 하고. 성경이여, 목사님 설교해가지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세요. 나나나나나 그렇게 하고. 베드로의 편지는 영적으로 우리를 슬라이스, 완전히 잘라내요. 모든 하루하루를 잘라가지고, 고 하루하루 발걸음을, 오른발에서 왼발 내딛는 것도 주의 뜻이 아니면 딛을 수가 없다. 왜? 그런 경우 제가 많이 봐요. 그래서 제가 마그네슘 갖고 왔지만. 쥐가 나가지고. 지금은 앉아서 하지만 서서 할 때는요, 쥐나요. 쥐나면 이게 며칠가요. 한 이틀, 삼일 막갑니다. 빨리 마그네슘! 마그네슘! 부를 동안에 계속 쥐는 나고 있죠. 마그네슘 먹으면 약간 풀리는데, 기분상 풀린 것 같기도 하고. 플라세보 효과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효과 나고. 그 다음부터는 마그네슘 미리 먹고. 미리 먹는데 자꾸 잊어버려요. 안 그럴 줄 알고 있다가 또 쥐가 나고 그래요.

 

그런데 어쨌든 간에, 갑자기 개인이야기해서 미안합니다만, 나도 날마다 슬라이스, 잘라야 해요. 그 자를 때에 발걸음을 생각 못하죠. 아까 처음에, 이거 강의하고 쉽시다. 처음에 행복은 뭐냐 하면, 지금은 우울부터 시작하죠. 하지만 행복했던 기억은 나죠.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소망해야 되고, 기대해야 되고,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돼요. 포기하지 마!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경보고 교회 나오잖아요.

 

그런데 묵시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발걸음을 세는 것도 내 뜻이 아니라면, 우리가 미리 어떻게 행복 할까? 하는 것도 따질 필요가 없어요. 왜요? 역사를 벗어나서 묵시 안에 속하고, 성령 안에 속한 자체가, 우리가 도달해야 될 모든 목적은 이미 확보해 있는 것이 된 거니까. 여기서 뭐 더 이상 뭘 원합니까?

 

거지나사로가 부자 되기를 원했던가요? 아니죠. 거지가 되던, 뭐가 되던, 확보했잖아요. 나사로 이름이 바라봄이잖아요. 이미 그 나라를 바라봄이 현실이 됐으면, 오늘 여기 우리라고, 우리, 우리, 그렇지, 그렇지, 라는 뜻이에요. 그렇지, 라는 묵시의 결과물이 나와 있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사랑만 확인하면 돼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고, 두려움이 없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만 하면서 살아가는데, 문제는 이게 우리가 늘 확인이 안 되고, 또 콩국수 어떻게 준비하고, 그게 또 걱정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자꾸 또 기대를 해요. 콩국수 맛이 잘 나와야 되는데,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께서 수시로 들락날락하면서, 콩국수 못 나와도 영생 얻었어요. 삽이냐 호미냐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모든 콩국수 짜면 짠 대로 먹으면 되고, 뭐 안 먹어도 되고, 그런 걱정은 주께서 유발하신 하나의 사건으로 치시고, 우리는 그냥 쉬시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점심 먹어가면서. 콩국수 그것도 하나의 사건입니다. 모든 게 이처럼 사건 안에서, 주님의,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의 계획된 것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