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12 요한1서 버지니아강의14-이 근호 목사
줄곧 요한일서 내용에 대해서는 계속 해왔습니다. 앞에 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시카고강의하고 뉴저지 강의에서 했었습니다. 일단은 그 내용을 보셨고 다 안다고 치고, 앞에 있는 열 세 개의 강의를 여러분들이 안다고 치고, 여러분들만의 강의가 아니기 때문에 진도 계속 나갑니다. 할 수 없어요. 다시 복습합시다. 그런 거 없습니다.
요한일서 2장 20절에 보면,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21절,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이래 되어 있거든요. 사도가 오늘날 우리뿐만 아니고 오고가는 모든 세대사람들에게 구태여 이 말을 꼭 해야 될 이유가 뭐냐, 1번. 심심해서. 2번. 자기 좀 알아달라고. 3번. 그냥 헛소리인줄 알면서 그냥 외쳐볼라고.
왜 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을까요? 쓸데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돈이 안 되고, 현대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서 원하는 바가 없었고 기다리는 사람이 없었다 이 말이죠. 경주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런 것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죠. 그런데, 21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라는 말을 사람들이 그렇게 기대하고 이 말을 해주기를 그렇게 학수고대하고 고대했습니까? 살기 바쁜데?
그걸로 실생활에 전혀 도움이 안 되고,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은, 있으나마나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왜 했을까요? 그것은 이 성경 안만 진실이고 현실이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이 강의에서 첫 번째 시작하는 것은 뭐냐 하면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해봅시다. 현실은, 1번. 지진이 현실이다. 2번. 진리가 현실이다. 이렇게 사도는 묻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냐, 둘 다 현실이라고 이렇게 할 수 있죠. 그럼 사도는 다음과 묻습니다. 진리가 우선입니까? 지진이 우선입니까? 이런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진리가 있어서 지진을 유발했습니까? 아니면 지진 따로 진리 따로, 지진은 이공계에 해당되고 진리는 인문계에 해당되고, 둘 다 그렇게 우리한테 양쪽 다 편리한대로 뽑아 세울 수 있는 겁니까? 하고 묻는 거죠. 그런 진리가 우선일까요? 지진이 우선일까요? 우리가 아는 기독교의 교양에서는 진리가 우선이라고 하죠. 그런데 문제는 교회라고 쳐서는 안 됩니다. 진리에서 지진이 나온 그 경로를, 근거를 제시하세요. 주관식문제.
진리에서 지진이 나온 그 경로, 메카니즘을 제시하세요. 이렇게 문제를 낸다면 모르죠. 어떻게 진리에서 지진이 나오느냐 말이죠. 현대 과학은 지진은 지구의 내파와 관련되어서 맨틀의 움직임에서 나온 거예요. 그 맨틀 안에는 내핵과 외핵이 있고 내핵과 지구의 자전축에 의해서 전개적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고, 그 움직임이 지각 표면까지 움직여서 지진이 일어난다 이 말이죠. 그렇게 되면 지구의 움직임과 인간들의 행복을 추구하는 감정과 관련성이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지진이 많이 봐줍니까? 아이구, 요거, 요거 지진일어나면 어린애가 아프겠다. 피해가야지. 지진이 그런 안목이나 인격성를 갖고 있습니까? 없죠. 맹목적이잖아요. 그러면 오늘날 인간들은 맹목적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이거는 우연이나 운에 맡기는 도박 같은 인생입니다. 어떻게 될지를 몰라요. 그럼 이거는 인생의 허무죠. 목적도 없고 이유도 없고 의미도 없고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인간의 의미나 목적이 뭐냐, 거두절미하고, 머리 잘라내고 꼬리 잘라내고 남는 것은 그냥 잘 먹고 잘 살자.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거는 나는 모르겠고, 그냥 잘 먹고 잘 살자 그뿐이죠.
왜 당신은 잘 먹고 잘 살아야 됩니까? 라고 물어보면, 내가 그러고 싶어서. I Wanted, 내가 그러고 싶어서, 내가 원해서. 왜 원하십니까? 그러는 내 욕구와 욕심이 그렇다. 그러면 당신의 욕망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답변이 없네. 당신은 왜 그런 욕망을 원하십니까? 그걸 분석한 것이 정신분석학이에요. 정신분석학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사람에게 나타나는 모든 행동이라는 것은 지표면에 나타난 것이고, 그 지표면 밑에는 지진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욕망이고, 그 욕망은 어릴 때부터 가정교육 받으면서 세뇌 받은 것이고, 학습 받은 것이고. 니는 우리 집안에서 이 정도 돼야 돼. 그것을 가지고 타인의 시선, 응시라고 이야기합니다.
행동 하나하나에 자기 개인적인 행동을 하고 난 뒤에, 친정아버지는 어떻게 보겠는가? 내 동창생들은 내가 이런 꼴로 사는 것을 얼마나 욕하겠는가? 또는 반대로 나를 그렇게 우습게 봤던 인간들이 내가 이렇게 저택에 사는 이 모습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화들짝 놀라겠는가? 내가 롤스로이드 고급차 타고 다니는 것을, 그 집 앞에 한 번 주차를 하고, 어이! 한 번 불러내야 되겠는데, 이런 모든 의도성은 인간의 욕망이며 그 욕망은 타인에 의해서 그렇게 되어야 된다는 것을 기초로 해서 우연이고 맹목적으로 그러한 부를 축적하는 것. 이것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게 만약 해답이 아니라면, 그러면 진리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그 메커니즘을 성경은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진리와 지진을 합쳐서,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세상이라고 봅니다. 같은 용어에요. 우리는 현실이라고 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세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세상이나 현실이나, 현실이나 세상이나. 그런데 성경에서는 여기에다 한 마디 더 합니다. 세상은 갇혀있다. 또는 재판의 대상이다. 심판의 대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심판의 대상이라고 본다면 우리는 현실이 전부라고 생각하는데, 그 현실이 심판의 대상이라면, 그러면 현실 바깥에 다른 세상의 테두리가 또 있단 말인가? 라는 안목을 성경에서 제공해줘요. 그러면 그 안목에서 뭐가 주어지느냐 하면, 니 왜 태어났는지 모르지? 니 죽어서 어디 가는지 모르지?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고 그 다음에 심판이 있으리라. 그러면 누가요? 그거는 성경한테 물어야지. 누가요? 라고 묻는 순간, 나는 어떻게 지금보다 밥 먹고 잘 살고 돈 잘 버느냐 하는 문제의 관심사에서 방향이 틀어지게 합니다. 내가 누굽니까? 로 바뀌는 겁니다.
내가 누굽니까? 주체에 관한 문제에요. 성경이 없으면 내가 누구냐를 누구보고 묻느냐 하면 같은 똑같은 인간들끼리 물었어요. 당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당신은 나를 얼마나 예쁘다고 봅니까? 참하다고 봅니까? 이래 보는데, 당신은 어떤 관점에서, 어떤 기준점을 가지고 저를 심판할 요량이십니까? 사도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에 사울이었죠. 사울은 어떻게 살 요량이었느냐 하면 일단 여호와를 심판주로 간주하고 자기와 심판주 사이에 주님이 주신 기준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 기준이 뭐냐 하면 율법을 줬다는 거예요. 그럼 사울이라는 사람은 오해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가지고 심판한다. 라고 오해를 했습니다. 육해도 아니고 사해도 아니고 오해를 한 거예요. 율법 지킨 것이 오해서 율법대로 심판한다는 것이 오해라면, 그것마저 오해라면 그럼 진실은 무엇이냐? 진실은 이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심판을 받는다는 자체가, 그것이 오해고 실수라는 겁니다. 그게 오해고 실수에요.
다시 말해서 내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고, 따라서 율법을 지킴으로써 내 단도리가 되고, 내 미래는 보장되겠다는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진면목이 아니에요. 그게 오해에요.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종교는 오해입니다. 사기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 여호와, 그거는 사울에게는 가짜였습니다. 가짜였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줬다는 사실도, 그 하나님 자체가 가짜기 때문에, 하나님이 율법 줬다는 그것도 가짜였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나를 심판할 때, 그 나라는 것, 에고ego, 또는 이드Id, 라고 하는 ‘나’가, 그것은 내가 조작한, 거짓된, 잘못된 ‘나’입니다. 일종의 가면 같은데, 진실한 나는 영원한 미제의 사건으로 남아요. 내가 몰라요. 그래서 사울은 자기 현실 속에, 세상 속에 하나님 집어넣고 율법 집어넣고 자기 집어넣어서, 그걸 짬뽕을 만들어서, 자기 구원되는 프로젝트를 거기서 조작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종교라는 거예요. 이게 구원파에요. 이게 기존 교회의 장로교고 침례교고 이런 거예요.
성경은 근본적으로 묻습니다. 니가 니를 제대로 알고 니가 구원을 언급하느냐, 이 말이죠. 니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나 여기 있어. 괴롭다. 살기 싫다 죽어서 좋은 데 가고 싶다. 구원해주세요. 그거는 니 생각이지. 니 생각. 그거는 니 중심으로, 니가 지구고, 태양은, 하나님은 너를 위해 돈다는 니 중심적 사고방식이에요. 종교는 오락이고 취미에요. 종교 단체는 교제모임단체로 끝나는 거예요. 결국은 지 잘난체하는,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삼위일체 해도 지 자랑질 하는 현장입니다.
그런데 소비자들이 그걸 원하기 때문에 목사는 돈을 받고 그 장소를 제공하고 그들에게 적절한 위로를 퍼부어주는 거예요. 목사는 그 돈 받고 생계와 노후대책까지 보장받고요. 친목단체를 가지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친목단체를. “주여, 저 구원해주세요. 예수 믿습니다. 구원해주세요.”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니가 도대체 누군지를 알고나 구원을 언급하느냐?” 구원은 인간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지금 목소리 낮추라고 하네요. 아니, 아니, 흔들거린다고요. 네 알았어요.
구원은 인간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구원받고 싶어요.” “니가 뭔데 구원을 받아? 니가? 니가 누군지를 알고 지금 구원 운운하느냐?” 모든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옵니다. 인간은 구원을 소망할 잽도 못돼요. 그런 권리도 자격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해요? 인간이 누군지를 알고 사랑해요?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겠죠. 자기만 사랑한다는 것을 깔고, 나만 사랑한다는 것을 차마 못해서, 너무 염치없어서 인간을 사랑한다고 해놓고, 사랑을 인간 안에 슬쩍 집어넣어가지고, 그러니까 전체 인간을 사랑하니까 부분집합 안에 나를 사랑하겠지. 어디서 꼼수를 쓰고 있어요. 꼼수를.
성경을 본다는 것은 계시를 대하는 겁니다. 계시를 대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를 계시라고 느낄 수 있느냐 하면, 멀쩡한 내가 갑자기 소멸되는 그 순간에 계시는 비로소 계시다워요. 그걸 블라인드 스팟 이라고 이야기했는데, 내가 갑자기 소경이 되는 순간, 따라서 내가 어디에 있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도 못하고, 나에 대해서 관심조차도 날아가 버릴 때, 그때 내가 여기 있는 것은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니고, 나 말고 다른 것이 내가 여기 있는 것을 느껴요.
그게 뭐냐, 하나님의 계시, 말씀이 이 현장에 있고 나는 그 안에서 사라져버려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사라지고, 나만 사라지고 내가 있던 그 자리에 그리스도만 있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이 자리가 그리스도의 자리네. 내가 여기 있고 그리스도 저기 있고, 맞상대해서 타협하고 흥정하려고 했더니만, 그거는 내가 조작한 가짜 예수고, 나를 사라지게 하시는 그것이 바로 주님의 작용이고 활동이고 작업이라는 사실을, 사도바울은 알게 됩니다. 주님 만나고 난 뒤에.
그래서 하는 말이 “주여 누구십니까?” 할 때, 비로소 “나는 죄인이다.”에서 “나는” 없애버려야 해요. “그냥 죄인이다.” “나는 죄인이다.” 라고 하면 뭘 노리는가 하면, “죄인인데 구원받아야 되겠습니다.” 나라는 것이 설정되어 있기에, “죄인인데 어떻게 한번 긍휼을 베풀어주옵소서.” 이렇게 나올 여지가 있지만, “나는”을 없애버리면 죄인 되게 하는 그런 작용만 이 현장에 이 자리에 퍼부어주옵소서. 세상 전체를 죄로 만드는 그 작업에, 휩쓸려가게 하옵소서. 그러면 거기에 등장하는 것이 뭐냐 하면 죄 안에서만 반드시 의가 등장하게 되어 있어요.
주님이, “내가 전 세계를 죄라고 규정했다.” 하시면서 비로소 우리 안에 등장할 때,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것이 되는 겁니다. 강의 끝냅시다. 끝나도 될 것 같은데. 처음부터 내가 노림수를 가지고, 내가 이렇게 구원을 받아도 되는 입장이냐? 하는 것은 생각 안 하고, 내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 옳지! 로마서 10장이 있구나. 누구든지 예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으리라. 됐네. 여기 있네. 주여, 손들고 나옵니다. 목사들이 손들고 나오라고 하고 뭐, 오늘도 한 영혼이 영접했다고 하고, 박수치고, 물에 풍덩 담가가지고 던지고, 어디 물미역도 아니고 물에 담가가지고. 그래놓고 잠시 예배드리고 집에 가면 돈 좋아하고. 이게 뭐예요? 도대체?
요한일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세상이라고 해서, 세상이라고 언급할 때는, 세상이라고 언급하면서 가두어두게 하는, 이걸 인간이 아는 궁극적 가림막, 또는 휘장이라고 합시다. 궁극적 휘장을 휘하에, 슬슬 또 어렵기 시작합니다. 아래쪽에. 세상을 궁극적인 휘장으로 간주하는 아래쪽에,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요한일서에서는 어두움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의 용어나 요한일서의 용어나 요한계시록 용어나 같은 용어이기 때문에.
이것이 어디 아래 있느냐 하면, 진리 휘하에 궁극적인 휘장으로 짜여진 세상이 있는데, 이 전체를 어두움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인간은 기껏 생각해봐야 휘장 안에서만 놀고 있다는 이 말입니다. 놀고 있네~ 이 말은 맞는 말이에요. 어두움에서 놀고 있는 거예요. 어두움 안에서.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어떻게 살면 됩니까? 방금 다 이야기했는데, 어두움 안에서, 어두움과 더불어서 노시면 되는 거예요. 막살면 되는 거예요. 또 전매특허용어 나왔다. 그냥 막사시면 되는 거예요. 그것도 어떻게? 즐겁게. 부담 갖지 마시고.
여기까지가 끝인가보오~♬ 아니 더 즐기세요. 여기가 끝이 아니니까 주저하지 마시고. 갈 데까지 가보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뉴저지에서 강의했지만, 내가 도대체 어디까지 악랄해질 수 있는가를 테스트해보세요. 내가 어디까지 악랄해질 수 있는지. 내가 아무리 악랄해져도 베드로만큼은 덜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뭐 우리는 혜택 받은 것도 없으면서 하잖아요. 베드로는 혜택뿐만 아니고 교회의 반석입니다. 너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그 사람이, 나는 예수를 저주한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죠. 그러면 교회라는 것은 무엇이 기초가 되어야 해요? 배신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논리가 간단한 논리에요.
우리의 배신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거예요. 왜? 어차피 대표적 배신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어두움 안에서 배신 외에는 할 게 없기 때문에. 뭐, 경건 찾고, 백날해도 배신이에요. 삼위일체 연구하고 신학박사해도 전부 다 그게 배신입니다. 전부 다 거짓이에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이 그 말이에요. 그 말씀이라니까요. 이미 해답은 다 나오고 난 뒤에 소급해서, 거꾸로 지금 표현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에서.
성경을 안다는 것은 마지막 때 이야기 거거든요. 이 마지막 때, 결승점에 돌아서서, 다시 뒤에 따라오는 모든 것들을, 이렇게 규정짓는 겁니다. 그럼 마지막 때는 세월이 안 됐는데, 왜 마지막 때입니까? 성경에서 여기 어두움 안에 뭐가 흐르느냐 하면 시간이 흐릅니다. 그럼 시간이, 궁극적인 휘장, 하나의 둘러친 범주라면, 갇혀있는 범주라면, 마지막이라 하는 것은 시간조차도 벗어난 묵시세계가 되는 겁니다. 묵시세계.
그 묵시세계는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성령 안, 예수 안, 십자가 안이라고 사도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사도바울이 삼층천 올라간 것을 아시죠? 그 안목에서 세상을 지금해석하고, 거기에다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시간 속에 갇혀있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바로 한 진리를 증거 하기 위해서 그렇게 그들은 분주하게 폭발해야 되고 울렁거려야 됩니다. 미국에 유명한 옐로스톤이라고 있잖아요. 옐로스톤의 샘물은 평소에는 부글부글 거리죠. 부글부글 거린다는 말이 적당한 것 같아요.
부글부글 거린다는 말이 뭐냐 하면, 큰솥에 곰국 끓이듯이, 오래 끓이면 부글부글 거리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거기에서 나와 올라가는 모든 수증기는 누가 받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증명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그들은 부글부글 거립니다. 그 부글부글 하기 위해서는 천사가 필요한데, 그 천사는 타락천사가 필요해요.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꼭 천사가 필요합니다.
천사를 함부로 이기려고 하지 마세요. 하늘나라 공무원들입니다. 공무원들이 얼마나 세다는 것은 공항검색대를 보면 알아요. 많이 당했습니다. 공항검색대에서 분위기 잡고 할 때, 그걸 사탄이라고 보시면 그 사탄의 말을 들어야 해요. 평소에 잘 길 들여져왔습니다. 그 사탄이 있음으로 해서 세상은 하나의 정형화가 되고, 하나의 질서가 잡히는 겁니다. 사탄 때문에 질서가 잡히는 거예요. 사탄이 없으면 이거는 질서가 안 잡히는 겁니다.
질서 있는 세계는 사탄의 세계에요. 주님은 사탄의 세계, 질서 있는 세계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렸어요. 혼선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흑암가운데, 혼돈가운데 창조를 시작하기 때문에, 질서 있는 것을 혼선으로 또는 혼란으로, 혼돈으로 전환시키는 그 특수한 임무를 띠고 아버지로부터 이 땅에 왔잖아요. “아이고, 우리 가정은 너무나 행복합니다.” 그거는 예수 안 믿는 거예요. 그거는.
그 행복한 가정에 무슨, 마태복음 10장에서 집안 식구 원수니라는 말씀이 어디에 대응이 되겠어요? 무슨 원수가 웃으면서 친한 원수가 어디에 있습니까? 정다워서 우리 헤어지지 말자고 하는 원수가 어디에 있어요? 무슨 다정한 가운데서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어미나, 며느리가 시어머니하고 싸우고, 자식이 부모하고 싸우고, 자식하고 부모하고 싸우는 것은 유산문제 빼놓고 어디에 있겠어요? 형제가 형제랑 싸우고. 그건 아버지 장례식장에서나 싸우지 뭐 있겠어요? 그 외에는 다 평안하잖아요.
이 말은 인간은 의지할 곳은 오직 혈통, 혈육 외에는 의지 할 것이 없는, 그걸 생리, 하나의 본성처럼 이 땅에서는 꽁꽁 단결된 혈통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탄이 와서 그렇게 조립한 겁니다. 그렇게 조직한 거예요. 그게 마태복음 4장에 나오죠. 바로 사탄이 예수님을 테스트하잖아요. 마태복음 8장에서 어떤 제자가 와서 예수님을 따르게 했다 이 말이죠. 따르겠다고 해놓고 약속을 안 지켰어요. 집회 참석한다고 해놓고는 볼 일 있어서 못 온다고 한 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왜 못 왔느냐고 하니까, 아버지가 죽었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뭐다? 질서 잡힌 것을 혼동케 하시죠. 죽은 자은 죽은 자로 장사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좀비는 좀비끼리 해서 부산행으로 보내버리고, 니는 나를 따르라 이 말입니다. 니는 아버지가 사람으로 보이나? 그런 뜻이에요. 니 눈에는 니 잘 키워주고, 니 공부시킨 부모가 사람으로 보이니? 근데 우리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니가 사람으로 안 보이죠?
그렇게 무모한 질문을 해대가지고, 사람으로 하여금 당황시키는 그 질문을 해대는 예수님이 사람으로 안 보입니다. 결국 제거대상입니다. 어디 안정된 세계에 호작질을 하러 와서, 시카고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마는, 시카고강의를 많이 해서 어디인지 모르지만요.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고요. 아니, 뉴저지강의 첫째 시간에 했구나. 유대인들이 침착한 사람이에요. 72명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의 개인의 의견이 진리를 통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서 거의 만장일치 아니면, 만장일치로 합의되지 않으면 결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만장일치로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 72명 뿐만 아니에요. 거기에 참석했던 모든 군중들도 예수님의 가치를 어느 정도보다 더 못한 것으로 봤느냐 하면, 강도바라바보다 더 못한 것으로 쳤다 이 말이죠. 이건 뭘 의미하느냐 하면 모든 인간은 각각 개성 있다고 NO! 다양하다고 NO! 갑가지 영어를 씁니다. 모든 인간은 각자 환경이 다르다고, 서로 다르다고, 의견 소통이 안 된다고요? 아닙니다. 그들은 똑같은 인간이었습니다.
그걸 집단적 onE, 1이에요. 단체 1이에요. 그래서 개인구원은 없습니다. 개인 심판도 없어요. 모든 것은 딱 하나, 단체지옥이고, 단체구원입니다. 하나로 봐야 해요. 인물보고 뽑는 것이 아니고, 인물보고 절개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해부를 해버려요. 해부를 해서 로마서 8장처럼 그리스도의 영이 있느냐를 찾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이쪽으로 분류를 합니다. 영이 있으면 이쪽으로 분류를 합니다. 아, 참 냉정합니다. 정말 냉정합니다.
왜 그렇게 냉정 하느냐 하면, 인간이 자기 구원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게 복음이에요. 인간은 자기 구원에 어떤 것도 기여한 바가 없습니다. 한국교회와 그리고 2000년 교회와 구원파 부터해서 모든 것이 이단인 이유는 딱 이 한가지입니다. 자기구원에 보탬이 되는 그러한 생각과 행동을 시도하게끔 유도한다는 그것이, 바로 인간이 가짜로 만든, 세상 안에서 돌아다니는 삼위일체. 세상 안에서 돌아다니는 천국, 지옥 개념. 세상 안에서 돌아다니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세상 안에서 돌아다니는 성령개념, 복음 개념. 그 안에 갇히도록 하는 겁니다. 세상 안에서.
그 갇혀있는 그 안에서와 진짜 진리 안에서의 차이점은 뭐냐, 세상 안에 갇혀있는 성령, 삼위일체의 주인공이 결국은 어디로 소환되느냐, 나로 소환되는 반면에, 진짜 진리 안에서 모든 그 부글거림의 원인자는, 최종적인 한 분밖에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요. 그래서 내가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예수님 믿어서 구원받는 겁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믿어서 구원받는 거예요. 예수님이 아버지 믿었던 그 믿음을 성령을 통해서 택배로 보내주는데, 아무나 보내주는 것이 아닙니다. 추석 선물 다 보내주는 것이 아니거든요. 아무나 보내주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하고 이미 창세전에 이야기가 끝났어요. 요한복음 6장에서 내가 온 것은 내 뜻을 이루려 함이 아니요. 아버지의 뜻을 이룸인데, 아버지의 뜻은 뭐냐, 내게 주신 자는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 살리는 이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경우라도 낙오되거나, 숫자 하나라도 착오가 되거나, “아이구, 야 어디 갔노? 바쁘다보니 빠트렸네.” 이런 것 절대 없습니다. 따라서 목회는 주님만 하지, 어떤 목사도 목회 한 적도 없고, 목회는 그냥 세상에서 하는 거죠. 세상에서 하면서 지옥 다 보내는 거죠. 어떤 인간도 인간이 목회해서, 사도바울이 구원한 사람 단 한 명도 없고요.
왜냐하면 성령은 사도바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말합니다. 인간 쪽에서 성령이 있어야 구원을 받는데, 그 성령을 누가 보내느냐, 누가 그 제공자냐 있어서 사도바울은 아주 눈치가 빨라요. 쏙 빠집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고린도전서 1장에서 “나는 십자가 안 졌다.” 라고 하면서 뒤돌아서요. “나는 십자가 안 졌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 졌다는 말은 십자가에서 뭐가 나온다? 십자가 사건을, 그 내용을, 성령을 통해서 전달하는 그 과정에서, 주 안에서 십자가가 주 외부의 십자가, 바깥의 자기 백성의 십자가로 이렇게 연결되게 되어 있어요. 체인으로 연결되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사도바울은 눈치 빠르죠. 걸릴까봐,, 얻어맞을까봐, “나 십자가 안 졌어.” 하고 빠지는 거예요. “나 보지 마! 나는 가이오 집 외에는 세례 준 적 없어”(고전1:14). 빠집니다. 빠지놓고, ‘아이고, 큰일 날 뻔했다. 사람들이 얼마나 진짜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 이게 무슨?’ 세상에! 구원파, 감리교, 장로교, 세상에 이런 게 어딨어요? 이런 게? 왜, 구원파, 장로교, 이런 게 있습니까? 시간을 고수하기 때문에. 그 시간, 옛날에 괜찮은 이론들이 시간으로 형성돼가지고, 우리는 그 시간에서 형성된 그것을 정통진리이론으로 받아들여서 대한예수교장로회 간판 걸은 거예요.
이 말은 “나는 이단입니다.” 라는 소리하고 똑같은 거예요. 아예 구원파 없애버리고, 통째로 2000년 역사 전체를 구원파로 간주해도 상관없어요. 다 구원파에요. 다 개인 욕망이에요. 지 뭐 한 게 있다고 구원받으려고 합니까? 시작을 자기부터 시작한 것은, 자기부터 시작했다는 점에서 어느 파도 이의가 없습니다. 여러분 구원받고 싶죠? 우리 파에 오면 원활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거든요. 하나의 예를 들게요. 밭에 작물을 손질하는데, 삽으로 해야 되겠어요? 호미로 해야 되겠어요? 질문 자체가 어처구니없다는 것을 알거든요. 질문자체가.
작물, 채소를 가꾸는데 호미로 할까요? 삽으로 할까요? 둘 다 필요하죠. 그러면 호미로 할 때 영생을 얻습니까? 삽으로 할 때 영생을 얻습니까? 둘 다 관계없죠. 인간은 바로 영생을 얻는데 수단을 집어넣으려고 하고, 방법을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우리교회 방법이 제일 낫습니다. 세상에! 방법을 인간에게 하청을 준 적이 없어요. 그걸 맡긴 적이 없습니다. 삼성그룹이나 하청을 주지, 하늘나라에서는 하청 준 적 없습니다. 목사한테 그걸 맡긴 적이 없어요. 진정한 복음을 하는 목사는 할 소리가 이거밖에 없습니다. “내 구원에 대해서 내가 한 게 없습니다.” 이거만 증거 해야 돼요. “혹시 여러분 중에서 그런 분이 계십니까?” 이거 확인하라고 목사 세운 거예요.
내 구원에 대해서 내가 한 게 없는데, 다시 말해서 나는 천국 가고 싶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물론 지옥도 가기 싫지만. 어쨌든 간에 나는 돈 벌이에 바빠 가지고 천국이든, 지옥이든, 그건 나중 문제로 미루어놨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셔서 강제로 납치해가듯이 납치해가셨습니다. 누군가 보니까, 주님이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나밖에 모르는 이 세상에 사탄을 보내가지고, 의도적으로 만들어놓고, “니 힘으로 못 빠져나오지? 그지?” 라는 식을 동반해서 통과하면서, 아무도 못 빠져나오는 그 구석을 주님이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면서, 빠져나오면서 발생된 그 빠져나오는 능력을,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집어넣어주니까, 그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머물게 하지를 않고 자꾸 빼내요.
“나와! 이 자슥아!” 질질 끌면서 천국으로 땡기는데, 우리는 우리의 본성도 만만치 않습니다. “11월에 애 결혼식 하고 가겠습니다.” 하고 고집을 부리면서, “좋은 낙을 봐야 될 거 아닙니까? 어디 사업 한 번 벌였는데 소문보고 가겠습니다.” “이리 와!” “아닙니다. 다음 주가 내 생일인데 생일축하 받고 가겠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우리의 본성은 육신의 본성인데, 강력하게 지남철처럼, 정들었던, 그놈의 정이 문제라. 초코파이가 뭔지. 그 놈의 정들었던 세상에 대해서 이걸 쥐고 있으니까 손톱이 다 빠지는 거예요. 지지지익~ 잡아 땡겨도 기어코 다시 가가지고, “나 미워했던 자에게 복수하고 가겠습니다.”
“심판은 내게 맡겨라” 로마서 12장 19절의 말씀을 해도 듣지도 안 해요. “내 손으로 부모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해가지고 또 가요. 우리의 모든 행동은, 나에 대한 복수심에서 바탕이 깔려있는 거예요. 모든 복수에요. ‘날 무시했지? 무시한 놈 이리 와! 내가 성공해서 보여줄게.’ 그러니까 이 얼마나 개인주의입니까? 교회에서 기도하는 사람치고, 기도 내용이 자기 인생역전 기도 안 하는 사람 봤습니까?
뭔가 빵구 났던 그 빵구를 메우기 위해서. 보상받기 위해서. 때우기 위해서. 기대수치는 높은데, 그동안 보증서다가 망한 거. 얼마나 남들이 놀리겠으며, 쪼다같이 보증이나 서고. 그 창피스러움과 수치스러움을 만회하기 위해서, 나는 기도빨로 메웠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다. 결국 인간은 자기가 만든 인형 같은 여호와 삼위일체를 만들어놓고, 그거 지금 자기하고 노는, 혼자 노는 시체놀이하고 있는 거예요. 시체놀이 하는 거예요. 그러 얼마나 재미있으면 살이 찌겠습니까?
오늘 강의의 제목을 붙인다면 한마디로 말해서 이렇게 하겠습니다. 오늘 강의의 제목은 뭐냐, ‘장난’입니다. 모든 하는 것이 장난입니다. 제가 뉴저지 강의 마지막 시간에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실컷 강의를 다하고, 만약에 죽을 때 되어가지고, 앞에 연세 많으신 74살이신 집사님도 계셨는데, 만약에 죽을 때 되어 주님께서 니 인생이 어떠냐고 묻거든, 제가 이렇게 답변하라고 칠판에 썼습니다. “주님.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나라는 것이 가짜였기 때문에.
주님이 부글부글 만들어서 그때그때마다 조립된 자아가, 그때마다 조립된 자아가 계속 다른 다양한 자아로 내 속에서 만들어졌을 뿐이지,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걸 야고보서 4장에서 인생은 안개니라. 안개가 뭡니까? 안개라는 말은 안개 있다, 그걸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결국 인간은 자기도 모르면서, 사탄의 질서 잡힌 세계에서, 질서 잡힌 가정에서, 집안에서, 너는 이런 인간이어야 돼. 그래야. 그래야 우리 집안의 가문에 먹칠을 하지 않아. 라는 것을 계속 부여받았기 때문에, 혹시 실수로 먹칠하게 되면 자살합니다.
굶어죽어서 자살한 것이 아니고, 노령연금 못 타서 자살한 것이 아니고, 땡겨서 자살한 것이 아니고, 자존심 때문에. 그 자존심 어디서 형성되었습니까? 어릴 때부터 우리 집안은 이런 집안이라는 것을, “우리 집안은 전부 다 서울대에 갔어. 니는 뭐고?” 이런 것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그게,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아버지가 살아계시면 내 모습 어떻게 볼까?’ 십자가 지신 주님께서 어떻게 볼까는 생각 안하고 주님께서는 아예 우리를 죄인으로 봐요. 니가 세리, 창녀, 깡패가 되도 그것을 묻지를 않습니다.
쪼개서 성령이 있으면 구원이고, 성령 없으면 지옥이에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거 하나님의 아들 아니죠. 로마서 8장10~11절처럼. 성경이 뭐 그리 복잡합니까? 굉장히 간단한 문제에요. 예수님 자기이야기인데. 예수님 자기 이야기인데 복잡하게 된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 이야기를 누구이야기로 돌렸다? 사탄의 지배와 통제와 명령과 통치와 압력 하에, 너 죽으면 안 돼! 너 잘되게 하기 위해서, 니 인생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나의 이름으로 할 때부터 드디어 문제는 꼬이기 시작한 겁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이스라엘 자체가 여호와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자체를 살려보려고 애썼기 때문에 그들이 멸망당한 거예요. 이스라엘은 처음에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잖아요. 그럼 책임을 누가 집니까? 하나님이 책임지는 건데. 막상 이스라엘이 되고 보니까, 본인이 이스라엘이니까 자기중심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남 민족 죽든 말든 나만 안 죽으면 되고, 나만 행복하면 된다는 거예요.
일본 지진 날 때,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고소했습니까? 위안부 했기 때문에 이제 저주 받았다고 이야기하고, 36년 압제했기 때문에 벌 받았다고 했는데, 자 경주 지진 날 때 일본사람이 뭐라고 이야기했겠어요? 지난 번 축구 이겨서 벌 받았다고 이야기할 거예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우리의 모든 행동은 밑에 복수심이 깔려 있어 타인의 눈을 응시합니다. “그래? 니 나 욕했지? 에이씨.” 이런 말을 써서 죄송합니다만, 욕 아는 것도 별로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우이쒸, 한 번 두고 보자. 니가 내 무시했제? 내 이렇게 잘 되는 것 보여줄게.” 도대체 누구를 위한 삶입니까? 그 인간 죽어도 죽은 귀신 붙들고 복수할 인간이에요. 인간이.
복수 없는 인간 없고, 울분 없는 인간 없고, 분노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뭐, 웃는다고요? 그거 왜 웃는지 알아요? 그게 복수심을 가릴 수 있는 멋진 찬스기 때문에 웃는 거예요. 웃는 게 웃는 게 아닙니다. 모나리자의 미소에요. 뒤에 칼 갈고 있어요. 그래서 모나리자가 명작이 아니고, 모든 인간이 명작이에요. 위선덩어리고 가면덩어리로서 멋진 작품들을 사탄이 다 그렇게 만들어놨습니다.
사탄은 장담합니다. 어느 누구도 너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거는 사탄이 아주 장담합니다. 그 이야기가 욥에 나와요. 욥에 나옵니다. 하나님 우리 내기합시다. 인간이 자기를 미워해요?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돈 잃어버렸지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여기는 그 나를 나는 사랑합니다. 예수 믿는 나를 사랑합니다. 어느 인간이 마귀를 벗어납니까? 예수 믿는 것이 마귀 짓인데. 예수 믿고 구원받겠다고 하는 것이 마귀 짓이에요.
구원은 그렇게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허락 없이, 예상 없이, 난데없이 구원받는 겁니다. 사울이 주님 만날 때, ‘아이구 이거 뭐고? 약속시간 늦었나?’ 그래서 한 게 아니에요. 다메섹쯤 와가지고 또 보고, 한발 걷고 또 보고, 이래 해서 한 게 아닙니다. 난데없이 왔어요. 소경이었습니다. 소경이니까 자기를 볼 새가 없어요. 그냥 보는 것은 주님만 보는 것입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그거는 이사야 6장에 나온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원래 니만 망한 게 아니고 다 망해요.
근데 망하게 되었다는 인식을 한다는 자체가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구원받은 사람하고 안 받은 사람하고 사는 것은 똑같아요. 하루 세 끼 먹고, 어떤 사람은 두 끼 먹지만. 다이어트 한다고. 하지만 다 똑같은데 다른 점이 뭐냐 하면, “망해야 되는데 왜 오십니까?” 라고 따지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고. “도대체 뭐 합니까?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안 살려주고? 왜 저를 자꾸 불행에 몰아넣습니까?” 이게 바로 불신자에요. 내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내 꺼.
제가 이렇게 강의하면 또 보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는 다 아는 이야기를 자꾸 합니까? 합니다. 여기는 버지니아Virginia거든요. 버진,virgin처녀들. 처녀지역에 살잖아요. 너무 오랫동안 안 봤잖아요. 기초 한 번 닦아놓으시고, 일단 물걸레 한 번 청소해야 되지 않습니까? 잊어버린다고요. 이거 물걸레질 안 하면요, “목사님, 저쪽에서는 구원파로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우리는 정통교리로 구원받죠?” 또 호미냐? 삽이냐? 또 들고 나온다니까요. “어느 방법이 우릴 구원하는데 진리입니까?” 또 나온다 이 말이죠.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살아가시는 것은, 어디까지 악랄할 수 있느냐? 체험하라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 악랄함의 의미가 남한테 피해를 주는 것도 문제지만, 남한테 피해주는 것만 악랄한 것이 악랄함이 아니고, 바로 주님의 몸을 내 몸이라고 여기고, 나한테 집착하는 그것이 주님에 대한 악랄한 짓이 되는 겁니다. 얼굴 이쁘다고 얼마나 평소에 자랑질 해오셨습니까? 그게 악랄한 짓이에요. 왜? 주님이 해가지고 들어갈 것 들어가고 나올 것 나왔는데, 왜 갑자가 그걸 에고ego, 나라는 이름의 명찰로 바꾸어버려요? 주의 몸인데.
그래서 뉴저지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죠? 환란이 따로 없다. 부자가 되는 것이 환란이다. 자꾸 내 돈이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의 돈인데. 자꾸 내 돈이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왜, 그럼 그걸 남한테 주지? 아니요. 내 것을 남한테 주면 내가 기부했다는 생각이 드는 그 이유는 뭘까요? 그러니까 주지 말고 부둥켜안고 절대 빼앗기지 말고. 그러면서도 환란을 겪어야 돼요. 이 75억이 왜 자꾸 내 돈처럼 생각됩니까? 왜 내게 이런 환란을 주십니까? 왜 자꾸 이렇게 하셔가지고 저 사람 기도 많이 해서 복 받았다는 그런 오해를 당하게 하시고 이 수모를 당하게 하십니까?
왜 주님의 자식인데 그렇게 공부를 잘해서 남들로 하여금 마치 내가 교육 잘해서, 맹모삼천지교 잘해가지고 또 영어로 STA 일등 수석 했다는, 그런 오해를,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수모를 당해야됩니까? 그 이야기가 사도행전 3장에 나옵니다. 저 앉은뱅이가 낫게 한 것은 주께서 하셨잖아요? 왜, 사람들은 베드로와 야고보의 경건하심과 신앙 깊으심으로 나은 것으로 왜 자꾸 오해하게 하십니까? 한 4분만 기다리고 파리를 잡읍시다. 이 파리 때문에 쉬어야 되겠어요. 파리 때문에 강의가 안 돼요. 주께서 보내신 파리입니다. 강의 끝내고 잡읍시다.
하나님이여, 나를 얼마나 향상시켜주실 겁니까? 우리는 말은 하지 않아요. 이 몸을 주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맨날 번지르르하게 말은 하지만. 인간은 대가바라지 않고 보상이 없는 것에는 나서는 법이 없어요. 그리고 그 보상, 대가 받아가지고 자신을 응시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은 거예요. “나 봐! 무시했지? 잘 됐잖아?” “누구야! 니 나와 봐! 내가 열심히 해서 복 받아서, 하나님이 나를 믿는 자라고 복 줬잖아. 니는 복도 없지? 지지리 못난 인간아! 지옥에나 가거라!”
이게, 첫째시간 결론내리겠습니다. 진리는 어두움이 없이는 진리는 나오지 않는다. 이게 첫째 시간의 결론입니다. 이 짧은 멘트 이야기 하려고 이렇게 길게, 뭐 헛소리는 아닙니다. 다 맞는 이야기인데, 길게 이야기를 한 거예요. 오늘 요한일서 2장에서 왜, 적그리스도를 이야기했고, 앞에 적그리스도 나와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어디서부터 왔다? 아까 이야기한 세상으로부터 왔다. 안정된, 정돈된 세상으로부터 왔다.
그 이야기를 왜 깔아놨는가, 진리는 바로 그런 것을 휘하에, 하나의 휘장으로 둘러치고 있는 거예요. 갇히는 거예요. 어두움을 갇히게 해서, 어떤 인간도 지 재주로써 어두움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는 겁니다. 분명히 해두는 거예요. “동영상 초점이 안 잡히니까 다음 시간에 길게 이야기하면 안 되겠습니까?”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마지막 질문이 뭐냐 하면, 그럼 주님, 우리가 어떻게 살면 됩니까? 우리라는 것을 죄인으로 만들어서 의인되는 것은 십자가로만, 주님의 전문영역이거든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사느냐, 죄인으로 살면 되고, 얼마나 내가 악랄한지를 생각하세요. 악랄하게 되면 복수심도 날아가요. 너보다 내가 더 악랄한데? 무슨 복수를 해요. 내 돈 떼어먹은 너보다 내가 더 악랄하다고? 이러면 저절로 복수심이 없고. 악랄하다는 말은 결국은 사람의 응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의 응시?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내세우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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