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123서

뉴저지 주사랑교회 13강 160911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6. 9. 30. 18:28
2016-09-25 00:16:58조회 : 72         
20160911 요한1서 뉴저지(주사랑 교회)강의13-이 근호 목사이름 : 이미아 (IP:122.43.165.245)

20160911 요한1서 뉴저지(주사랑 교회)강의13-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우리가 아는 이야기 합시다. 십자가라는 것은 우리 죄 때문이다. 죄 때문이기 때문에 십자가가 있게 되면 우리의 모든 가치는 사라지고, 우리와 함께 했던 분의 가치가 새롭게 우리에게 쏟아져 들어옵니다. 그 쏟아져 들어오는 가치가 뭐냐 하면, 너는 죄인인데, 그 죄를 이용해서 하나님의 의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방금 한 이야기는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너가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예요. 루터가 그걸 몰랐어요. 너가 의인이 된다가 아니라 너를 통해서 하나님이 의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이게 로마서 5장에 나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우리가 의를 이루는 것, 하나님이 의인되게 하는 것. 고린도후서 5장 21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화목하게 하여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가 되면 계속해서 뭐가 작렬해야 하느냐 하면, 죄인인 너를, 악랄한 너를 계속해서 내가 용서하는 지속적인 작업이 주어지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서울에서 대전 지나서 대구에 왔다면, 내 쪽에서, ‘대전은 잊어버리고, 십자가 뒤로 하고 새 생명으로 가자.’ 라고 할 때, 그 가자고 하는 주체는, 사실은 그것은 안 죽은 주체에요. 십자가 통과한 적도 없는 주체입니다. 그냥 십자가를 이용하는 가짜에요.

 

진짜 십자가를 통과했다면, 통과라는 말 자체가 안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바로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안에서, 다른 말로 성령 안에서, 다른 말로 하면 예수 안에서, 라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 있게 되면 우리는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이 ‘안’이라는 의미는 지난 시카고강의에서 소속이라는 의미로 했습니다. 그 소속이라는 의미는 요한일서 2장 19절에도 나오죠. 19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이 문장 자체는 사실은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원인, 결과가 뒤섞여 있어요.

 

이발소가 어디에 있어요? 미장원 옆에. 그럼 미장원은? 이발소 옆에. 말하나마나죠. 그처럼 너희들이 나간 것 보니까, 우리 소속이 아니구나. 따라서 우리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나갔어. 이게 무슨 말이에요? 여러분, 성경그대로입니다. 제가 지금 틀린 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나가는 일이 있어줘야, 우리 소속이, 정체성이 성립된다는 거예요. 나가지 않으면, 뭔가 구분되지 않으면, 우리가 누군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진짜 그리스도가 개입되면, 긴 이야기하지 말고 쉽게 합시다. 참, 목사님. 적그리스도가 뭡니까? 그것도 우리가 몰라요. 제가 이 이야기하려고 지금까지 빙빙 돌려서 이야기했는데, 우리는 적그리스도를 모르는데, 우리는 뭐가 잘못이냐 하면, 목사님. 저 신천지가 적그리스도입니까? 저 이만희가 적그리스도입니까? 여호와증인이 적그리스도입니까? 자꾸 묻는 거예요. 누구한테 물어요? 목사 지도 몰라요.

 

목사 지가 뭐 이미 그리스도에게서 나가있는데, 그리스도에게 소속되지도 않았는데, 소속되지도 않은 사람한테 적그리스도를 물으면 뭐합니까? 자기 집단에 소속되지 않은 것 때문에 적그리스도랑 이야기를 하죠. “김집사, 박집사 우리 교회 나갔죠? 적그리스도입니다.” 분명히 그렇게 이야기할 거 아니냐 말이죠. 그걸 누구보고 물어요? 누구보고?

 

반드시 기준은 그리스도가 기준인데, 문제는 그리스도가 결과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에요. 아, 이 말이 어렵다. 예수님이 계시고, “애들아 저거 그리스도다.” 이렇게 가르쳐주시는 것이 아니고,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고 난 뒤에, 적그리스도가 공개한 쪽이 그리스도에요. 적그리스도가 공개한 쪽이. 근데 더 어려운 문제가 있어요. 여러분, 적그리스도치고 자기를 적그리스도라고 한 사람 봤어요? 못 봤어요? 못 봤죠.

 

구약에 보면 우상이 나오죠. 우상 믿는 사람치고, “아저씨! 나 우상 믿어요.” 라고 하는 사람 봤어요?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뭐라고 합니까? 참참참참참참 신을 믿는다는 거예요. 참 신을. 살아계신 참 신. 참도 한 개만 붙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가 붙어요.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도 모자라도 참 예수, 참 성령, 참 복음 믿는다는 겁니다. 다른 교회는 없는데 우리교회만 참 신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교회보고 우리교회는 망해야 된다고 했어요. 우리교회 망해야 된다. 망하지 않으면 우리교회 안 된다. 왜? 우리교회만 복음 있다고 주장할 적그리스도적인 성령이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교회는 참 복음을 아는 교회고, 우리교회는 다 구원받습니다.” 라는 말을 누가 합니까? 우리교회가 하죠. 그러니까 우리교회가 수상한 거예요. 이상한 거예요. 그건 잘못이라 이 말이죠.

 

그 논리는 굉장히 어려운 논리인데, 집합논리에요. 부분집합이 전체집합보다 더 커요. 이러한 집합이론까지 나오는 겁니다. 무한은 한계 속에 있다. 이런 말이 있는데, 이왕 말이 나왔으니까 해볼까요? 선이 있는데 이 선을 3등분합니다. 3등분 한 것을 또 3등분합니다. 또 3등분합니다. 그러면 어디까지 갈 수 있습니까? 어디까지 갈 수 있냐고 한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무한이죠. 그런데 이 선은 한 15센티 정해져있죠. 유한이죠. 유한 속에 뭐가 있다? 무한이 있다. 그럼 묻습니다. 여러분, 유한이 큽니까? 무한이 큽니까? 이거 몰라서 자살한 수학자가 있어요. 참 희한해요. 이게 모든 논리의 최후의 논리에요. 논리의 모순입니다. 어떻게 속에 있는 것이 무한이 되고 어떻게 겉에 있는 것이 유한이 되느냐 이 말입니다.

 

이와 같이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지적해야 적그리스도가 되는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언제 나타나느냐 하면 적그리스도가 나타난 후에 예수님이 나타난다는 사실. 적그리스도가 나타난 후에. 여기 ‘후에’라는 말을 썼는데, 예수님 재림은, 뭐 예수님의 십자가는..여러 가지 곤란하니까 차라리 동반해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 더 잘 이해되겠죠. 동반해서. 십자가 복음을 전할 때 비로소 아무것도 없던 그 현장이 적그리스도 등장하게 되어 있어요.

 

사도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그냥 사울로 있을 때에 자기는 그냥 여호와에게 열심을 냈잖아요. 아무 문제없었어요. 정상이에요.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을 다한 겁니다. 아무 문제없어요. 근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나타나서 만나주실 때, 졸지에 자기만 변한 것이 아니라 자기 주변의 모든 상황이 반대로 다 변합니다. ‘아, 이게 진짜 내가 거꾸로 살았구나. 잘못되어 있었구나. 이거는 한두 군데만 고칠 문제가 아니고 전면적으로 완전히 반대로 살았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럼 그 전에는 사울이 어떻게 살았어요? 내가 여호와에 대한 정보를 채집함으로서 내가 여호와의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내가 여호와를 알려고 했던 그것이 나를 구원하는 과정중의 일부였다는 겁니다. 어렵죠? ‘내가 그전에는 예수님을 몰랐던 죄인입니다.’ 이게 아니라, 여러분 잘 들으셔야 합니다. ‘아이구, 바보야 바보. 내가 예수님을 못 알아봤어. 이제부터 예수님을 똑바로 알아봐야지.’ 이게 아니라, ‘똑바로 알아보지 못해서 구원되지 않고 똑바로 알아봐서 구원되었다.’ 이게 아니라, 그 똑바로 못 알아본, 예수님을 핍박한 그것이 이미 구원이 시작된 거예요. 그게. 이미 구원에 포함이 되었단 말입니다. 포함이.

 

그럼 내가 주체가 된 것이 아니라 주체는 따로 있었고, 나는 뭐냐, 그 주체가 벌인 작업의 일부로서 나는 이미 편입되어 있는데, 그걸 뒤늦게 소급해서, 뒤늦게 확인하는 차원이죠. 이거는 뭐가 날아가느냐, “저 어떻게 구원받아요?” 라는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실을 뒤늦게 눈치 챘죠. 뒤늦게 눈치채놓고, ‘에이, 진작 알려주지. 진작.’ 이런 식이다 이 말이죠. ‘진작 해주지. 진작. 진작 구원했는데, 구원받으려고 괜히 십일조 냈잖아. 진작 알려주지. 복 받으려고 헌금내고 했잖아.’

 

진작 알려줘도 되는데요, 진작 알려주면 안 돼요. 몰라야 되는 그것도 하나님의 적절한 조치였던 것입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그것은 십자가 이후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그래놓고 한 십년 뒤에, 지금 알았으니까 2026년대에, 진작 십자가를 알려주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진작이 또 나와요. 진작이 아니고 10년 전에 십자가 안 그것이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겪어야 될, 반드시 너가 겪어야 될 하나의 절차였고 과정이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어느 구석에서, 십자가가 확정된, 이 ‘확정된’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을 한다면, ‘확정된’입니다. 확정된 사항을 우리가 인식하는데 있어서는 우리에게 시간이 필요한데, 왜 필요 하느냐, 바로 우리의 구원이 목적이 아니고 우리의 구원을 파괴했고 예수님께 대들었던 적들도 우리가 동반해서 인식이 되어야 해요요. “나 구원자 인식한다. 안다.” “누군데?” “예수님.” 이러면 그건 안 되고. “나 안다.” “뭐?” ‘적그리스도.’ 이렇게 되어야 돼요.

 

그렇다면 적그리스도를 우리가 판정하고 만날 문제가 아니고, 주님께서 준비된 적그리스도를 주께서 이렇게 펼쳐놓으신 겁니다. 뭐하라고? 십자가가, 예수님의 피가 얼마나 고귀하고 감사한 일인지를, 우리에게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 주변에 적그리스도를, 사탄, 이단을 쫙 깔아두시는 그 친절한 조치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자, 그러면 이번 강의를 잘 들었는지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우리가 판단하는 적그리스도와 예수님이 판단하는 적그리스도는 다르죠.

 

우리가 판단하는 것은 내가 있고 판단하고, 예수님이 판단하는 적그리스도는 우리를 결과물로 소급해서 뒤늦게 눈치 채는 식이에요. ‘아이, 적그리스도였구나.’ 하고 뒤늦게 무릎을 치면서 아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늘 무릎이 아파요. 무릎을 치면서 ‘아이고, 진작 이야기해주지.’ 무릎을 치면서 ‘진작 알려주지.’ 이렇게 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예수님이 아는 적그리스도는, 우리가 이렇게 ‘진작 알려주지.’ 하다 보면, 내 힘으로 연구했다, 파악했다가 됩니까? 안 됩니까? 아니에요. 666을 내 내 힘으로 알았다, 그건 내 힘으로 666을 안 것이 아니에요. 지가 666인데 뭐.

 

뭐, 요한계시록 내가 알았다가 아니라, ‘이렇게 진작 알려주지.’ 이런 식으로, 요한계시록을 포함해서 모든 성경말씀이 한꺼번에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것을 가지고 요한일서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2장 14절을 다 읽으면 기니까 끝부분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우리가 “들어오지 마세요.” 라고 하면 안 들어옵니까? 들어오죠.

 

그럼 우리는 쉼 없이 놀다가 성령을 받게 되면, 그전부터 주께서 말씀으로 우리 안에 작업을 시작했다는 것을 이제야 아는 거예요. 이제야. “아이고, 이제 눈치 채게 하시는군요? 진작 알려주지요?” “아니야. 그때는 몰라야 됐었어. 몰라가지고 돈 뺏기고 집 뺏기고 다 뺏겨야 됐었어. 그게 절차고 과정이야.” “왜요?” “니는 바로 니 죄를 알아야 돼. 남 손가락질 할 필요 없어. 니 죄를 위해서 내가 죽었지. 그래, 니 죄를 위해서 내가 십자가 졌기 때문에, 남 죄 할 것 없이, 그 죄 진 놈도 너하고 똑같아. 똑같은 인간이야. 누구 욕 할 것 없어. 저거 적그리스도고, 저건 엉터리고, 저건 이단교회고, 그럼 너는?” “내가 다니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돼야 돼요.

 

그래서 교회를 믿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지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믿으면, 그 교회가 항상 실망으로 주어집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놔라했죠. 놔라는 말은 내 속에서, 여러분 가제트형사만화영화 다 아시죠? 팔아 길어져라! 하면 팔이 쭉쭉 길어지죠. 모든 인간은 존재하면 반드시 가제트형사처럼 자기에게서 쭉쭉 뻗어나가는 것이 있어요. 이걸 놓든지 끊어버리든지 해야 됩니다.

 

목회자가 목회를 끊어야 돼요.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재벌이 돈을 끊어버리면 행복해요. 재산을 누구 주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그저 목회를 그만두라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고. 놔라는 말은 주님께서 한 소리에요. 부모가 자식을 교육할 때 자식을 놔두세요. 그러면 그게 자녀교육입니다. 아버지에게 효도한다고요? 아버지한테 효도하면 아버지 골치 아파요. 제발 효도 좀 하지마세요. 아버지를 놓으세요. 놓으시면 그게 바로 효도입니다. 아버지를 놓으시면.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행함에는 십자가를 반대하는 적그리스도적인 요소가 있어가지고 그리스도가 싫어해요. 짜증내요. 적그리스도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주여, 저 가치 있습니다. 저도 뭐 했습니다. 저도 이번에 충성했습니다. 이번에 한 번 목돈 냈습니다.” 이런 것들이 예수님이 지신 그리스도의 용서라는 의미를 자꾸 희석시키고 그걸 훼방하고 가려버려요. 마귀적인 모습으로 등장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요한시대에는 사도요한은 모이면 계속해서 그 점을 이야기해요. “우리는 죄인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죄인입니다.” 이렇게 하니까, 그게 듣기 좋겠어요? 싫겠어요?

 

이게, 놔버린 사람은 아멘하고 받는데, 뭔가 꿍꿍이 노림수가 있는 사람이 있어요. ‘어디 목회를 해볼까? 잘해볼까? 멋지게 해볼까? 이상적인 교회를 해봐? 장로로서 내가 목돈 내면 다른 교인들이 감동받아서 우리 장로님이 선봉자에 서가지고 모범을 보이셨구나. 그럼 집사들이 장로님을 본받아서 목돈을 내어서 어서 빨리 예배당을 지어야지. 이렇게 한 번 내가 솔선수범해보는 동기부여를 해볼까?’ 근데 요새 집사는 약아가지고 “장로님 참 수고했습니다.” 이렇게 하고. 또는 상당히 약삭빠른 장로라든지, 구린 장로, 인색한 장로한테는 와가지고 “봉투, 봉투 열렸네.” 해가지고 돈 빼내는 것. 요새 젊은 사람들이 어수룩한 노인들을 그렇게 놀립니다.

 

놔라는 말은, 항상 우리에게서 자꾸 뭔가 끊임없이 나오는 것이 있어요. 기대하는 것이 계속 나와요. 기대하는 게. 기대하는 것이 나오니까, 그냥 나오는 법이 없죠. “예수님. 요거 그저 주님 보시기에도 괜찮은, 경건한 아이템이잖아요. 주님. 도와주셔야 됩니다.” 하고 또 뻗어 나와요. 주님께서는 뭐냐, 놓아라. 놔라. 왜냐하면 이미 모든 작업은 주께서 알아서 다 하고 있습니다. 다 하고 있어요. 놓기만 하면, 구원된 것은 기본이요, 그 놈의 스트레스를 안 받아요. 놓으면. 스트레스를 안 받아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자, 19절 한 번 읽어보고 문제 하나 던질게요.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자, 문제 던집니다. 그렇게 어떤 일단의 사람들이 복음 듣기 위해서 나갔잖아요. 그러면 뭐가 남아 있어요? 남은 자가 있겠죠. 그 남은 자 교회입니까? 이게 질문입니다.

 

자, 일단의 사람들이 복음 듣기 위해서 나갔습니다. 그럼 남아 있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뭐가 됩니까? 우리는 복음 아는 사람들이 되겠죠. 그럼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입니까? 라는 것이 제 질문입니다. 지금 이 영상을 보는 사람들도 그 답변한다고 바빠요. 머리 굴리면서. 아닙니다. 왜? 이게(놔라) 안 되기 때문에. 그걸 놔야 돼요. “우리끼리는, 다른 사람 다 나갔지? 우리끼리는 이제 참된 교회지?” 이거 놔야 됩니다.

 

왜, 놔야 되는가? 나가게 하신 것이 우리가 눈꼴시어서 나간 것이 아니고, 주께서 끊어냈다면, 남아있는 사람들이 정신차려가지고, “이 교회 우리 거 아닙니다.” 하고 항상 반납을 하고 주님께 드리는 자들이 되어야 해요. “지금 이십 명 남았는데, 여기서 열 명을 남게 하든, 두 명을 남게 하든, 주님 마음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되어야 하죠.

 

왜냐하면 주님의 십자가 작업은 하자가 없어요. 요새 대구나 한국에 아파트 하자 수리 때문에 골치 아파요. 여기 뉴저지는 모르겠지만. 튼튼하게 짓는다고 하니까 하자가 없겠죠. 그렇죠? 아예 하자업체가 없는 거 아닙니까? 집사님 어떻습니까? 한국보다는 낫죠. 하도 튼튼하게 지으니까, 그 하자보수는, 하자보수가 일체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하자보수, 진작이야기하지.” 진작 할 수 없는 게, 끊어져 나가면서 “아이고, 남아있는 우리만큼은 헤어지지 말자.” 라고 실수를 범해줘야 해요. 제가 오랜만에 바른 소리 합니다.

 

이것이 모든 것이 실수에요. 우리는 실수. “아이고, 나간 사람은 아깝지만 할 수 없어. 우리끼리 단결하자.” 이게 놔라가 아니에요. 그렇다면 항상 우리 것을 갖게 되면, 다시 말해서 주님 은혜로 여기 남게 되면, 여기(놔라)에 뭐가 끼어들게 되느냐 하면 여기에 또 다시 주께서는 작용해서 적그리스도라는 작업조를 여기에다 또 투입을 시켜요. 작업조. 사탄의 움직임도 주님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왜? 사탄은 천사기 때문에, 천사는 개인적인 행동을 못해요. 윗사람의 지시에 따라서 파견근무하게 되어 있어요. “어이! 사탄아 욥한테 모든 재산 다 빼앗아버려!” “예. 하나님.” “야! 사탄아! 욥의 건강도 빼앗아버려! 저 마누라 욕하도록 해봐라!” “예.” 사탄은 신이 나서 하죠. “사탄아! 쟤한테 가서 십계명 안 지켰다고 욕해!” “예.” 근데 사탄은 돌아와서 실망스러워요. “저 베드로를 시험해라!” “예.”

 

그런데 모든 택한 백성한테는 어떻게 됩니까? 모든 택한 것이 실패로 끝나죠. “사탄아! 내가 너를 꾸짖는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옷 입힌 사람은 니가 아무리 흔들어봤자, 이미 내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너는 실패로 끝난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적그리스도라는 말이 나왔다는 말은 간단히 요약하면 뭐냐 하면 신나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자, 여러분 아시죠? 이제 적그리스도가 어떤 것인지를 아시죠? 이미 알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미리 알고.

 

우리는 이 사실을 모르고 적그리스도 나오니까, 궁금해죽겠는 거예요. 목사님. 적그리스도가 누굽니까? 알아서 뭐하게요? 피할라고요. 아니에요. 적그리스도는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피해버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구원은 누구 손에 달렸습니까? 내 손에 달린 것이 돼요. 우리는 이미 적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알게 하시는 수단으로써 활용되고 있는 거예요. 누구 손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손에 의해서 활용되고 있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좀 더 구체적으로, 대략은 알았는데, 노골적으로 적그리스도가 어떤 주장을 합니까? 이젠 이걸 알아야 되겠죠. 어떤 주장을 하기에 사람들이 미혹돼서 그렇게 적그리스도에 말려 들어가는가? 사도요한의 계시에 의하면 적그리스도는 간단하게 나와 있습니다. 뭐냐 하면,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사람, 부정하는 사람을 적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을 하니까 여러분, 띵하죠? 예수님이 육체로 온 것 맞는데? 그러면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을 인정하면 어떤 공식이 돼요? 누구든지 예수님이 오신 것을 인정하면 이거는 적그리스도가 일단은 아닌 게 되니까, 야! 그거 참 쉽네요. 적그리스도 안 되기 굉장히 쉽네요. “믿어요! 믿어요!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신 것을 믿어요!” 굉장히 쉽네요. 바로 그러한 오해를 우리가 가질 수 있어요.

 

요한일서 5장을 미리 한 번 봅시다. 그래서 요한일서가 의외로 복잡하게 됩니다. 5장 6절, 이건 중요한 구절이니까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7절, “증거 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8절, “증거 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무슨 암호도 아니고, 비유 어디 글도 아니고, 우리가 쉽다, 쉽다하는 성경이 이렇게 깊을 수가! 이렇게 어려울 수가! 저는 한글로 보고 있잖아요. 여러분들도 한글로 보고 계시죠? 한글로 보나 영어로 보나, 어디 영어로 본다고 쉽습니까?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에요? 무슨 말입니까? 갑자기 예수님의 육신을 뭐로 분해해놨습니까? 물과 피와 성령, 셋으로 분해를 해놨습니다.

 

만약에 의사가 보면 뭐라고 하겠어요? 머리 부분, 몸통부분, 다리부분이라고 하겠죠. 머리 부분, 몸통부분, 다리부분으로 해석하면 뭐가 나타나지 않습니까? 적그리스도가 발각되지 않죠. 근데 예수님의 몸을 물과 피와 성령으로 하게 되면 뭐가 등장하겠어요? 적그리스도의 정체가 발각되겠죠. 그러니까 성경을 해석할 때, 예수님은 인간이다. 인간은 무엇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 마음대로 쭉쭉 쭉, 나름대로의 연쇄 고리를, 논리 고리를 만들어내면 안 돼요.

 

예수님이 누구시냐? 그 해석한 내용까지 성경에서 너무나 친절하게 다 이렇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궁금해? 궁금해? 그러면 예수님을 분해할 때, 뭐로 분해하라? 물과 피와 성령으로 분해하라. 성령은 어디서 나옵니까? 예수님에게서 나와요. 예수님에게서 나오는데, 마지막 순서가 성령이잖아요? 그러면 성령은 어디를 거쳐서 나옵니까? 예수님의 몸은 물이고, 예수님의 몸은 피고, 그 몸과 피라는 그것을 확정지으면서 성령이 나와 버립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물과 피를 모아버리면 예수님은 육체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온 것이 분명하다.” 라는 이 말 자체가, “예. 아멘.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이 분명합니다.” 라고 한다고 해서 그 의미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그 예수님의 육체를 가지고 하나님은 무엇을 나타내고자 함이냐, 그것까지 동의해줘야 돼요. “예수님의 몸을 가지고 물과 피와 성령을 드러내는데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면 오케이가 되는 겁니다.

 

아, 이거, 뭐 제가 일부러 여러분을 애먹이려고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름 이 성경보다 더 쉽게 해드리고 있는 거예요. 친절을 베풀고 있는 거예요. 뭐 마땅하지만. 아주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죄를 깨끗하게 씻는다는 겁니다. 죄를 깨끗하게 씻을 때는, 뭐 씻는다는 말 자체가 이상하잖아요. 죄를 깨끗하게 씻는다 할 때는 구약적 용어를 들이대요.

 

그걸 가지고 요한일서 2장 2절에 보면, “저는 우리 죄를 위한”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화목제물이니” 화목제물이죠. 그럼 화목제물이라는 단어를 거론했다는 말은, 화목제물과 더불어 구약적 배경도 동반해서 함께 일어선다는 말입니다. 화목제물을 이해하려면 구약 전체, 화목제물을 유발시킨 그 현장이 동시에 이렇게 부각되어야 하고. 무대 중앙에서 한 무대가 올라오듯이, 구약 전체가 솟구쳐 올라와야 됩니다. 그러면 거기서 화목제물 등장하죠.

 

그러면 화목제물에 근거해서 지금 사도요한은 그리스도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여, 너는 화목제물을 이루기 위해서 니 몸에서 물과 피와 성령이 나와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적그리스도는 뭡니까? 적그리스도는 중보자가 왜 필요해? 우리가 직접 뭐 지키면 돼요? 우리가 구약말씀 지키면 되고, 우리가 사도들의 명령과 권면 지키면 되잖아? 된다는 겁니다.

 

왜? 전에는 성령 없어서 못 지켰는데, 우리가 성령 받아야 된다는 거죠. “성령 받았으면 괜히 받았느냐, 말씀 지키라고 준 거다. 성령을 받지 못했을 때는 우리가 실수했지만,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온전히 지킬 수 있다. 그래야 거룩을 이루니까.” 라고 한다면 지금 무엇을 통째로 빼버린 것이 돼버려요?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우리한테 잔소리한 거 밖에 안 돼요. 똑바로 살아! 왼뺨을 치거든 오른뺨을 대줘라. 잔소리했을 뿐이지. 잔소리는 잔소리로 끝날 뿐이에요. 실제로 효력 없어요.

 

예예예~ 구하라 주실 것이요. 예예예~구하겠습니다. 철야하고 구하겠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 예예~사랑하겠습니다. 말만 예예~ 예예~ 그랬던 열두 제자가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랬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그 말씀은 예수님을 위한 말씀인데, 인간은 자꾸 머리가 이상하게 돌아가서, 저 말씀은 내가 지켜야 될 말씀. 그래서 영광 돌려야 할 말씀. 자꾸 일방적으로 그렇게 호도하면서 말씀을 자꾸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는 거예요.

 

여기서 제가 옛날 여러 번 써먹었던 예를 한 번 들을 테니 양해해주시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조카가 결혼식을 했어요. 서울에서. 그래서 제가 대구에 있다 조카 결혼식이라고 해서 올라갔습니다. 전문 홀에서 하는데, 빰빠라빰빰~♬ 갑자기 위에서 천사처럼 신랑이 내려와 가지고 온 이벤트를 다 벌이는데, 뭐 그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케이크를 하나 준비했어요. 우리 신랑 측이 아니고 저 신부 측 하객에서 철딱서니 없는 애가, 제가 아무리 봐도 세 살이나 네 살 같아요. 웨딩 케익을 잘라야 하는데 지가 손가락으로 파먹고 있는 거예요. 그걸 어느 누구도 안 말리는 거예요. 신랑 측에서 화가 잔뜩 났죠. 그렇다고 결혼식 케이크 때문에 파토 낼 수 없고, 웨딩에서 약간의 안 좋은 추억이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성경말씀을 누가 지키느냐, 예수님의 전당을 세우기 위해서 필요한 배치물들, 장식, 여러 가지 필요한 집기들이 뭐냐, 성경말씀도 그렇고, 십계명도 그렇고, 모든 것이 예수님이 다 지켰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온 그런 배치물인데, 아까 철딱서니 없는 애가 손으로 케이크를 파먹듯이, 적그리스도가 와가지고 흠집을 내는 거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한테 너그(너희의 경남 방언)애비는 악마라고 했습니다. 죄 없다고 하니까.

 

너희들이 죄 없다고 하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내가 죄 있다고 하매, 내가 있으매, 예수 그리스도가 오매, 너그 애비는 악마고 너그는 죄 있는 것이 돼요. 이 말을 제가 말한다는 것이 참 미안스러운 말인데, 제가 말하게 되면 여러분 말고 다른 쪽에서 의아해할 거예요. 아니 사람이 되어서 성경보고 읽는 이유가 뭐며, 이걸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뭐냐? 지켜서 기쁘게 해주면 장차 우리에게 좋은 것이 올 거야. 말씀을 묵상 왜 합니까? 나중에 의인의 회중에 들기 위해서 하잖아요. 그거 빤한 논리 아닙니까? 그 당연한 것을 그게 아니라고 하면, 그럼 지금까지 우리는 뭐했느냐? 이래 되죠.

 

지금까지 뭐하긴 뭐했어요? 죄만 졌지. 가로챘지요. 가로채는 것, 지금이라도 그런 짓 하지 마세요. 애도 아니고, 예수님 장식하라고 주신 말씀을 왜 지가 손댑니까? 주님요, 효도했습니다. 왜 자꾸 지가 효도했다고 해요? 왜 지가 효도했는데? 이 효도하면 얼마나 우리 아버지가 기뻐하셨는지. 주께서 기뻐하시게 하셨겠지. 누굴 통해서? 니로 하여금 용돈 드리게 해서 기뻐하게 하셨겠지. 모든 주인공은, 행동의 주체는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우리는 수단에 불과한데. 왜 자꾸 모든 영광을 수단에게, 본인에게 겸손한척 하면서, 은근히 뒷돈 챙기듯이, 뒷돈 챙깁니까?

 

우리가 행한 대로 복 받는 것이 아니고, 행함도 안 했는데 복 받았어요. 행하지도 안했는데 복을 줬으면, 그 복이 복의 값어치를 하려면, 내가 했다고 하는 소리를 하지 말아야죠. 실컷 공짜로 얻어먹고, 뒤에 가서 돈 10원 내놓고, 이 음식은 내가 샀다고 이래 하면, 주인한테 많이 맞습니다. 나 이제 니 친구 안 할란다. 왜, 인생을 주님의 인생인데 왜 자꾸 내가 공들였다고 케이크에다가 손가락 가지고 침 발라가지고 남의 결혼식 왜 다 배려놓느냐 이 말이죠. 그러지는 말자는 겁니다.

 

적그리스도가 하는 말이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지 않았다는 것을 왜 자꾸 주장하느냐 하면, 우리 멀쩡한 인간 있고, 우리가 성령 받았으면, 우리가 말씀 지켜서 말씀 지킨 보람만큼 하늘나라에서 상급 더 받고, 보너스 많이 받고, 게을러빠진 것들은 천국 가더라도 저 구석에 있고, 그것도 못한 인간은 지옥가고. 모든 것은 우리하기 나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우리한테 내추럴 한 것, 아주 자연스럽다는 거예요. 자연스럽다에 동의합니다. 왜? 악랄하기 때문에.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자연스럽다, 자연스러운, 그것은 진리가 아니에요.

 

아니, 예수를 믿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까? 부자연스러워요. 그러니까 성령께서 책망하죠. 성령께서 와서 우리의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우리를 책망하잖아요. 책망하는 이유가 자연스럽게 놔두면 지 잘난척하는 것밖에 남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성령께서 날마다 간섭해 주시잖아요. 뭘로? 말씀을 앞장세워서. 물과 피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물과 피, 성령 했기 때문에 나머지기는 니가 하라는 말이 아니고, 물과 피와 성령 자체가 이미 악마를 이긴 거예요.

 

자, 마지막 테마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자, 이겁니다. 왜 예수님의 물과 피와 성령이냐, 앞에 악마가 꼼짝도 못해요. 자, 그 이유를 알아야죠. 왜? 그게 뭐라고? 왜? 마귀는 딴 것은 다 용납하면서도, 예수님의 물과 피와 성령으로 하나 됨, 그게 하나이거든요. 한 몸에서 나왔으니까. 왜 그렇게 하나 됨을 못 보고 못 듣도록 하고, 왜 그렇게 교회에서 예수님의 피를 싫어하느냐 말이죠. 그 자체를 완료하는 것은, 왜 싫어하는지, 그것은 예수님의 육체가 화목제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화목제물은 제사 중에서 제일 마지막 제물이에요. 마지막 제물은 무슨 말이냐 하면, 더 이상의 제사를 내가 너희에게 내려 준 적이 있다? 없다? 없어요. 자, 히브리서를 한 번 보겠습니다. 여러분 피곤하시더라도 몇 분 안 남았기 때문에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0장, 제가 참 좋아합니다. 정말 좋아합니다. 히브리서 10장 18절, 제가 정말 좋아합니다. 누가 한 번 크게 읽어주시고 제가 읽겠습니다. “이것을 사하였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여러분, 죄가 있는 것에 저주 있는 것이 맞습니다. 충분히 동의해야 해요. 아멘, 해야 돼요. 죄가 있으면 저주 있습니다. 그러면 죄가 사해지면? 뭐가 없어집니까? 저주가 없어지죠. 저주 없으면 나머지기 모든 인생의 굴곡과 모든 것은 뭐냐, 저주가 아니고 축복이죠. 축복입니다. 그러면 진즉에 이야기해 줄 것이지,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습니다. 문제는 이게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겁니다.

 

우리가 아는 축복의 상황과 살아온 인생길이 이게 합치가 안 된다는 것이 우리에게 또 다시 갈등을 유발합니다. 축복? 꼬라지 참 좋다. 진즉에, 날 때부터 축복이라고요? 축복 꼬라지하고는, 축복 더 했다가는 난리 나겠다. 조금만 더 축복 줬다가는 집안 거덜 나겠다. 그래서 모든 축복의 기준은 우리의 삶이 축복의 모티브가 아니고, 토대가 아니고, 근거가 아니고, 기준이 아니고, 예수님의 물과 피와 성령이 축복의 근거입니다.

 

이걸 누가 아느냐, 마귀가 알아요. 왜냐하면 뱀의 후손이기 때문에. 마귀가 알고서 우리로 하여금, 니 저주 받지 말라고 그렇게 친절한 닦달을 내는 거예요. 친절한 닦달. 우호적인 저주를 퍼부어요. 우호적인 저주. 상냥한 저주로 이야기합니다. 고마운 저주. “인생은 너 하기 나름이다.” 인생은 니 하기 나름이다. 니가 게으르면 니 미래는 보장되지 않고, 니가 열심히 하면 열심히 한 만큼 대가를 얻게 될 것이다. 축복은 니 손에 달려있지, 누구한테 의지하지 말라.

 

하나님? 하나님이 있더라도 복 주지 않는다. 니가 기도빨을 발휘해야 된다. 니가 기도를 해야 주지, 멍청하게 가만히 있으면 주께서는 주시지 않는다. 왜? 구하라 주실 것이라고 했잖아요. 갑자기 산상설교를 거기다가 들이대 버려요. 여러분 모든 말씀은, 제가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 모든 말씀은 예수님이 인터셉트, 가로채갔어요. “구하라 구할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이 모든 말씀을 누가 가져갔는가?

 

우리한테 오기도 전에 주께서 찾아오시고 우리한테 내밀고. 우리는 껍데기만 내밀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서 “구하라 주실 것이요” 라는 그 결과물을 우리에게 주면서, 아울러 뭘 주느냐 하면, 이것이 바로 “구하라 주실 것이요” 라는 것에 근거해서 너에게 온 축복의 성과가 바로 너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대신 구했던 결과물이 우리니까, 우리는 주님한테 감사할 때, 뭘 경유해야 하느냐, 구하라 주실 것이라는 것을 경유하면서, 주님의 공로가 우리의 느려터진, 우리의 게으름, 우리의 죄, 우리의 이상스런 간구함. 세상 것을 구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구하는, 그걸 결사적으로 구하는, 그 잘못된 구함을, 십자가에서 아울러 밝혀질 때, ‘진작 이렇게 복 받을 걸. 진작 이야기하지.’ 라는 감사가 주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건 오늘 이야기고, 내일 되면 내일 또 우리가 알아야 될 몫이 남아있기 때문에, 내일 살게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모레 되면 우리가 또 깨닫고 감사해야 될 몫이 또 있기 때문에 우리는, 혹시 이 중에 모레까지 사시는 분이 있다면 모레까지 가서 또.. 죽을 때까지 계속 가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 죽게 되면 면류관 다 벗어던지면서, 미쳤어? 미쳤어? 이 면류관을 내가 왜 써? 내가 여기 왜 왔는데? 얼른 갖다 던지죠.

 

주님 앞에 면류관이 가득 쌓여있습니다. “아이구 잘 아네. 그렇지! 그렇지!” 핀셋으로 집어가지고 “누가 이런 마음을 주셨지?” 예수님 본인이 집어넣어 주셔놓고 묻기는 우리한테 물어요. 성경에 그런 대목이 많아요. “누가 이런 사랑을 알았지?” 주님 자신이 넣어놓고, 자신이 끄집어내면서 감격해가지고, 이렇게 칭찬을 해대시는 겁니다. “이 귀하고 귀한 자들아! 이 복 받은 자들아!” 뭐 했다고? 복을 집어넣어 놓고 핀셋으로 복 받은 자들을 끄집어내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야기했던,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 거기에 다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아무것도 지키지 마세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주께서 움직이는 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교통 범칙금에 걸리면 걸리세요. 걸리시고, 운전할 때 기도하고 싶거든 기도하세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도하세요. 참 말이 모순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기도하면 안 걸릴 거라는 생각을 하지 마시고, ‘아, 이거 찝찝한데 오늘 기도해야 되겠어.’ 기도한다고 10초 멈췄는데, 내 앞에서 10초 동안에 다른 차는 교통사고 나고. 나는 같이 과속했는데 통과하고. 10초기도 안 했으면 큰 일 날 뻔 했어요. 이건 간증거리죠.

 

모든 매사가 기도하고 싶을 때 한다는 말은, 니가 알아서 기도하지 마라. 놔버리라는 말이죠. 놓고. 주께서 이렇게 잡아 땡기면 땡기는 대로 하면 돼요. 걱정거리 있으면 걱정할 수밖에 없어요. 염려할 일 있으면 염려해야 돼요. 하지만 내가 걱정하고 내가 염려하지 마세요. 염려하게 하신 것도 주께서 시킨 것이고 걱정하게 하신 것도 주의 일입니다. 애가 갑자기 가출했는데 부모가 걱정 안 할 부모가 어디에 있습니까? 걱정 안 한다면 그거는 로봇이지 인간이 아닙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뭐하라고? 돌아온 탕자 한 번 경험해보라고. 잃었다가 얻었으니까 그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여러분, 같은 지갑이라도, 혹시 배낭이라도, 한 번 놔두고, 배낭 잃어버렸다고 미국에 올 일은 없을 거 아닙니까? 배낭 잃어버렸다가 얻어 보세요. 그 놈의 배낭이 얼마나 예쁜지. 주의 형제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어요. 그래서 참 발걸음을 주께서 인도하시는구나. 모든 범사에 이미 느긋한 마음으로 요한일서를 보시기 바랍니다. 벌벌 떨지 마시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이걸 그림으로 그려야 멋있는데,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육체에서 물과 피가 나왔죠. 물이라는 것은 물세례를 말하고, 피라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의미합니다. 물이라는 것은 제가 아까 설명했습니다. 물이라는 것은, 의인이면서도 일부러 죄인의 세계에 들어갔기에,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여지를, 가능성을 주신 거예요. 접촉할 수 있는 여지를 주신 겁니다. 물세례부터 시작해서 어디까지 가느냐, 주께서는 불세례까지 가는데, 불세례가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이 불세례는 십자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세례 받았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아버지의 모든 말씀을 본인이 회수해서 짊어지고 가시는 거예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십자가로 가시는 거예요. 갔을 때, 예수님의 육체가 있습니다. 자, 그 다음에 성령은 뭐냐, 예수님의 육체에서 성령이 나와 버리면, 일어나는 모든 상황이 누구의 지시 하에, 누구의 명령 하에, 누구의 관리 하에 있느냐 하면, 성령의 관리 하에 나타나고 있는 현상들입니다.

 

그러면 이걸 누가 아느냐, 성령 받은 사람은 알아요. 어떻게? 내가 했습니다가 아니고, 아하! 예수님의 피와 예수님의 물에서 나온 효과로 인하여 구원받았구나! 라고 우리가 어느 집에 있든지, 미국의 집에 있든지, 한국의 집에 있든지, 다시 중심으로 소환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육체로 하신 그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가 아니고 참, 참, 참 그리스도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 혼자 이루었기에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라는 것을 날마다 되풀이하기 때문에 절대로 우리는 십자가를 뒤로 돌리지 않습니다.

 

“이제는 내가 가서 말씀 지키겠습니다.” 이게 안 나와요. 왜냐하면 모든 것이 성령의 관할 하에 있기 때문에. 그러면 성령의 관할 하에 있으면 우리는 다 지킨 것이 되네요? 다 지킨 것이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뭐가 주어지느냐 하면, 책망이 주어집니다. 책망이. 책망이라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악랄한지를 알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악랄하다? 주님이 하신 모든 업적과 결과를 악랄한 우리는 뭐로 조치합니까?

 

내가 한 걸로, 내가 기도하고, 헌금하고, 복 받은 걸로, 전부 나한테 돌리니까, 이때 성령께서 계속 관여합니다.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우리 기도를 주께서는 탄식하면서, 저 놈의 기도는 제켜 주지고 제 기도 받아주시옵소서. 기도하는 우리 곁에서 주님의 성령은 따로 기도합니다. 응답은 내 기도 응답이 아니고 주님의 기도의 응답에 의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귀중함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목사님. 예수님이 귀중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을 깨닫는 즐거움을 이야기합니다. 이 순간,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그래서 제가 시카고강의에서 그토록 여러 번 강조했는데, 글쎄, 듣는 사람은 이 강조의 의미를 알았을까? 안다고 제가 믿쑵니다. 시카고강의에서 결론이 뭐냐 하면, 아무 일도 우리한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 우리는 없어지는 안개이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왜? 아무 일도 아니기 때문에.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솔로몬이 그렇게 큰일을 했지만, 다 헛된 일. 있으나마나. 없어져도 그만. 있어도 그만. 따라서 하나님께서 죽이시기고 하고, 필요하면 죽이시기도 하고, 살리시기도 하기 때문에, 그 죽이시고 살리시는 주님 앞에 우리는 이렇게 하세요. “주님이여, 죽이시든 살리시든, 내 차원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고민한다는 것은 내가 중요하다는 뜻인데, 전혀 그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지금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서, 지금도 내 심장은 뛰고 내일도 할 일은 많습니다. 그리고 해질녘에 잠잘 때 이렇게 하세요. “주여! 오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군요.” 어떻게? 그저 옥색 원피스 입으시고, 두 손을 모으시고, 침대에서 원피스 살짝 올려서 다리만 약간 보이시게 하시고, 소녀의 기도하면서, “주여! 오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날 고민은 그날에 족하니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큰 치마 두르듯이 이 세상을 덮쳤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유발된 일인 것을, 우리는 잊어버리고 나의 현실관만 고집했습니다. 내 인생만 고집했고, 나의 역사만 붙들었습니다. 이제는 그것이 얼마나 적그리스도와 유사한 사고방식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예수님 육체로 오신 의미를, 이제는 우리 몸까지 전달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