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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2강-갈대아 사람(1;5-11)이근호130210

아빠와 함께 2013. 2. 11. 07:35

갈대아 사람(합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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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2-10 15:53 
갈대아 사람

2013년 2월 10일                     본문 말씀: 하박국 1:5-11


(합 1:5,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합 1:6, 개역)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합 1:7, 개역)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심판과 위령이 자기로 말미암으며』

(합 1:8, 개역) 『그 말은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 기병은 원방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기병이라 마치 식물을 움키려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

(합 1:9, 개역)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합 1:10, 개역) 『열왕을 멸시하며 방백을 치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취할 것이라』

(합 1:11, 개역) 『그들은 그 힘으로 자기 신을 삼는 자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득죄하리라』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의해서 달성됩니다. 하나님의 열심과 성실성으로만 가능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단체도 이스라엘이 책임질 단체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만드신 하나님의 손길에서 완성될 단체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의 구현체로서 이 세상에 등장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운명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성실함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직업 이스라엘 나라, 즉 유대 나라를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 나라인 갈대아 사람, 즉 바벨론 제국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선지자는 입장은 유대나라 편도 아니요 갈대아 사람편도 아닙니다. 선지자는 하나님편에 서 있습니다.

선지자는 어느 누구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실하게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나가시는 과정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앞으로 갈대아 사람들이 유대나라를 침공하고 모든 것을 빼앗게 될 것이라는 통고해주십니다. 이렇게 되면 갈대아 군대들의 전략 회의에 하나님께서 몰래 참관하시어 정보를 빼내신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들의 전략회의를 주재하신 바가 됩니다.

즉 하나님 자신이 친히 세우신 나라를 자신 손으로 공격하여 파괴시킨다는 뜻이 됩니다. 이런 황당한 예언에 대해서 곧이 들을 유대인은 없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전제가 바로 ‘아무도 믿지 못할 예언을 하겠다’로 시작하십니다. 어느 인간이 자신이 망하는 이야기 전개를 진정성 있는 하나님의 계획으로 듣겠습니까.

하지만 선지자는 굴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전합니다. 그런데 유대나라를 침공하는 갈대아 사람들은 쉽게 말해서, 미친 자들입니다. 제 정신이 아닙니다. 무목적인 목적으로 움직이는 겁니다. 맹목적이죠. 꼭 도박하듯이 움직이는 자들입니다. 도박이란 오기와 오기의 만남입니다.

합당한 이유도 없습니다. 참으로 배후에 누가 조정한대로 정신없이 움직이는 집단 같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무지막지한 자들을 동원하여 하나님이 친히 키우시는 유대나라를 멸망시키려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무에서 유의 창조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즉 ‘無(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있어도 없는 것’으로 간주하신다는 말입니다.

즉 그동안 유대나라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주변 나라의 힘을 너무 부러워했습니다. 그래서 효험이 있다는 그들의 우상들이 나라 내부에 유행을 했습니다. 지도자들은 백성들이 원하고 좋아한다 는 사실에 편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모든 게 ‘무에서 유’가 아니라 ‘유에서 유’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유대나라가 그토록 부러워하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나라를 부려서 하나님의 나라를 치게 하시므로서 둘다 같은 종류의 나라일 뿐임을 분명히 보여주시고자 하십니다. 신약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면 ‘육신’이 ‘육신’을 치는 겁니다. ‘육신’이란 인간의 묘사하는 말이 아니라 ‘죽음을 함유된 존재로서의 인간’을 의미합니다.

목숨 끊어지는 그것이 죽음의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곧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이 무엇을 대신 품고 있기에 나타난 결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사람들을 부르면서 그 실체를 보여주십니다. 첫째는 그들은, 곧 육신된 자들은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들을 소유하려고 덤벼듭니다.

소유란 실제로 인간의 ‘자기됨’을 채우는 실내용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내가 여기 있고 그 다음에 그 빈 내용을 소유로 채운다’로 여깁니다. 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사람이란 홀로 있는 게 아니라 사회에서 대인관계를 통해서 자신을 정립하기 때문에 ‘자기 것’이라고 간주되는 것을 규합하고 그것을 테두리 치면서 비로서 ‘나’라는 것을 정립합니다.

즉 ‘여기서 여기까지나 내 것’이고 ‘저기서 저기까지는 너의 것’이라는 것으로 나와 너를 구분 짓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무 것도 변변하게 가진 게 없으면 남들도 그러하고 본인도 그러하고 하급 인간들이 간주합니다. 즉 맹목적으로 자기 것이 아닌 남의 것을 취득하려는 이 갈대아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육신의 진면목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겁니다.
둘째로 법에 관한 겁니다. 법이라는 것도 역시 소유와 관계있습니다. 세계 최초의 법은 상법입니다. 상품 거래와 관련된 겁니다. 즉 사람들이 옛적부터 소유에 준해서 자신의 존재 의의를 파악하기 때문에 물건을 주고받는 그 법을  확실히 해주면서 정의로움을 주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의로움이란 승리한 자의 몫입니다. 승자에 한해서 정의를 언급할 권리가 있는 것으로 사회는 인정해주고 있습니다. 패배자를 옹호해줄 정의라는 것은 없습니다. 이 육신의 세계에서는 이유를 막론하고 무조건 최종 승자가 되는 길만이 곧 정의로움을 자신에게 적용한 권리를 가지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법으로 인하여 고통 받고 우는 자들이 발생합니다. 사실 운다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일종의 반항심의 발로가 곧 울음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뜻대로 안되고 곧장 울어버리는 겁니다. 깡짜를 부리는 겁니다. 앙탈을 부리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무에서 유로 창조해서 그렇게 친히 창조하신 자만이 천국에 넣어주십니다. 그래서 강제로 울게 하시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나라로 하여금 하나님이 친히 조성하신 사태 안에서 그동안 나름대로 버텨왔던 규칙과 원칙들이 깨어지게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원칙에 현실이 맞아떨어지지 아니하면 울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적 인간은 무엇입니까? 영적인간이란, 이러한 육과 육의 만남을 주선하면서 자기 자신에 크게 실망하게 만드는 그 작용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하신 일이라는 사실을 믿는데 있습니다. 셋째로 이 육신적인 갈대아 사람의 특징은, ‘힘을 신’으로 여긴다는 겁니다.

사실 ‘힘을 신으로 신봉하는’ 이 정신과 버릇은 모든 인간들에게 전부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아무도 힘을 싫어할 위인은 없습니다. 그래서 참된 선지자는 상처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성도나 선지자는 한결 같이 고대하는 것은 곧 ‘주의 강림’입니다. 이 ‘주님의 강림’이 무에서 유의 창조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육신이 우리 자신을 마음껏 육신인 채로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