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의 등장
2013년 2월 3일 본문 말씀: 하박국 1:1-4
(합 1:1, 개역) 『선지자 하박국의 묵시로 받은 경고라』
(합 1:2, 개역)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합 1:3, 개역)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합 1:4, 개역)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는 방식에 대해서 인간들은 무척이나 오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신앙이라는 것을 끄집어내려고 하니, 항상 자기 자신이 당연히 ‘의인’일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 다음에 이 당연히 의인은 자신과 세상과 억지로 맞추려고 하니 이게 맞아질 리가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억지가 억지를 부르는 겁니다. 그리고 이 억지 끝 지점에다 하나님을 배치해 놓고서 섬기려고 합니다. 이 모든 오류는 바로 자기 자신은 당연히 의인이다 사실에 준해서 신앙을 이어가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사람은 이런 존재입니다. 자신이 공들인 만큼 반드시 이익을 덧붙이 소득으로 챙기고자 합니다.
이러한 원리에 하나님마저 끼어 넣을려고 합니다. 자기에게나 하나님에게도 양쪽도 수지맞는 장사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신앙생활 하니 항상 예민하게 관리하고자 하는 자기 자기 자신입니다. 그런데 나 자신을 관리하는 것도 문제가 큽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참으로 의인인 것을 증명해줄 때 마음에 드는 의인과 악인들이 등장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과 비교가 될만한 대상을 찾아서 그들과의 격차를 통해 자신의 과연 잘난 존재라는 사실을 소급해서 확인해주는 경우들이 시시때때로 생겨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를 위하여 항상 세상에 대해서 새롭게 조립하는 과정에 나서야만 해야 합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자기보다 더 악한 자의 등장을 반기고, 반면에 자기보다 더 착한 자의 등장에 대해서는 기어이 흠을 찾아내 때까지 탐색을 멈추지 않게 됩니다.
이처럼 하박국 선지자가 등장한 시대상은 이러한 점들을 분명히 들추어내고 그런 인간들인 상식이 전혀 하나님의 참된 구원방식과 상관없음을 알려주는 계기가 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인간과, 그 섬김을 받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하나님이 같은 방향에서 만나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생각지도 못한 돌발지역을 통해서 유다나라를 다루십니다. 그것은 곧 멸망입니다. 즉 멸망을 통해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멸망이란 ‘없음 상태’의 다른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여기는 그들 자신을 아예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릴 때, 과연 신앙생활을 잘해서 의인이라고 여기는 그들의 반응은 어떠한가를 살피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탄식하다시피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세상 천지가 불신의 세상이 되었답니다. 그렇지만 의인만큼은 따로 살펴서 신앙생활을 지속하도록 해주시는 것이 옳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즉 지금 본인이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에게 제안해놓고서, 하나님도 나의 제안에 동의해주어서 그래서 역시 나는 의인이라는 확신을 보장해달라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자기 자신이 당연히 의인이라고 여기는 그 출발점을 문제삼습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는 겁니다. 도리어 불신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신앙은 뭘까요? 신앙이란 바깥 세상과의 관계를 아는게 신앙입니다. 즉 나라는 존재는 독야청청 바깥과 격리된 채 버틸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을 자백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하게 돌아가도 나만은 버틸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실은 불신앙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신앙인을 길러내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마치 레미콘차에 실린 레미콘 안과 같습니다. 거기에는 자갈과 모래와 시멘트가 같이 콘크리가 되어 돌아갑니다.
한데 섞여 돌아갑니다. 아무리 하나가 자갈로서 순수함을 유지하고 품위를 유지하고자 애를 쓰고 소용없는 짓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각 개인의 마음 속에 그대로 녹아져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일본에 유학하라고 아들을 보냈는데 그 학생이 어느날 지하철 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술취한 자를 건지려다가 그만 전동차에 치어 죽게 됩니다.
살아남은 유족들에게 아무리 위로와 격려와 칭송의 말을 하여도 부모의 입장에서 원상복귀가 되지를 않을 겁니다. 도리어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필이면 내 아들이 거기에 뛰어드는가? 참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그 시점에 전동차가 들어오지 말아야 하고, 더 나아가서 그 아저씨는 그날 저녁에 술 마시지 않아야 하고, 마셨더라도 내 아들과 같은 지하철 역에서 타지 말아야 했어”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바로 여전히 자신은 옳게 살아가는데 하나님께서 이 옳은 자기 인생을 뒤죽박죽을 만들어놓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아무리 세상이 악해도 하나님을 잘믿는 자는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지켜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방식에 맞다 는 식으로 오해와 억지를 부르는 겁니다.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이런 식이 아닙니다. 선인이고 악인이고 같이 죽여버립니다. 없애버립니다. 마치 여자가 아이를 임신하여 배가 불러올 때에, 아랫배 근육이 쥐포처럼 뚝뚝 갈라져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를 임신하는 순간, 그동안 곱게 관리되었던 엄마의 몸관리는 여기저기서 파괴됩니다.
즉 아이는 엄마의 인생을 파괴합니다. 파괴당하지 않을 정도로 의롭다고 여긴 엄마로 할지라도 아기 임신이라는 새로운 상황, 곧 외부 환경이 찾아들게 되면 환경과 자아는 따로 격리된 처지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아무리 혼자서 고상하게 살고 싶어도 외부 환경에 영향을 안 받을 수는 없이 인간들입니다.
분명 유대나라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나라입니다. 신앙이 좋다면 그 조건으로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망하지 않으리라는 믿음도 유행합니다. 하지만 후대에 들어와서 믿음 좋은 요시야이 등장했지만 그 세 명의 아들들, 곧 엘리야김, 여호아하스, 시드기야 라는 이 후기 왕들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 왕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유발되었고 유대 민족들은 주변 각 지역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디아스포라’ 뜻은 ‘흩어지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상황으로 만들어놓고 그 속에서 비로소 의인을 생산합니다. 그러니까 의인이란 인간들이 자기 관리해서 빚어내는 것이 아니라 종말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생겨갑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 잘남을 위한 구원방식을 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