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질문
2013년 2월 24일 본문 말씀: 하박국 2:1-3
(합 2:1, 개역)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그리하였더니』
(합 2:2, 개역)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합 2:3, 개역)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하박국은 하나님에게 세 가지 질문을 합니다. 인간들이 질문을 하는 것은 하나님과 자기와는 이제 막연한 사이라고 간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생각은 다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질문을 유도하셔서 그 질문으로 인하여 질문자의 문제성과 한계를 도출하시려고 합니다.
사람들의 질문은, 그 질문을 통해서 해답을 얻고 그 얻어진 해답은 이미 자신이 확보한 진리창고에 모순없이 추가될 수 있는 정보라고 간주하고 싶어합니다. 많이 알고 그만큼 더 현명해지리라는 희망을 안고서 말입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18-21에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나옵니다.
즉 질문자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질문자가 스스로 똑똑해지려는 모든 것을 무산시키는 식으로 답변해버리십니다. “제발 어리석은 자가 되어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응답이 얻기 위해 질문자는 자신의 똑똑함과 총기 있음을 버리지를 못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박국은 다음 세 가지를 질문입니다.
1. 왜 유대나라를 심판하는 심판자들이 유대나라보다 악한 자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가? 2. 왜 그토록 잔인하게 심판하시고 유대나라에 남아있는 의인마저 그 혹독한 처우를 받아야 하는가? 3. 언제까지 이런 수모와 수난을 받아야 하는가? 언제 이 환란의 날이 끝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하나님이 더 이상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하십니다. 인간들의 권력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선택하고 결정짓는 그 경로들을 집합시킨 흔적으로의 권력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만을 위한 권력체 안에 자신이 놓여있고 싶어합니다.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닙니다.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한 일에 억지로 하나님을 자기 편으로 끌어드릴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그래놓고서 질문해댑니다. “하나님, 어찌 우리보다 못한 나라가 우리를 공격하게 만드십니까?”라고 말입니다. 일반 재판에서 피고보다 더 악한 자가 판사가 되어 판결하면 권위가 안 서겠지요. 정의 사회가 마련되지 않겠지요. 그 원리를 하박국이 거론하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들과 따로 일하시겠다”는 겁니다.
두 번째 질문은 “비록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렸다 치더라도 여전히 이스라엘 내부에 의인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의인들을 특별 취급해야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속성에 합당하지 않습니까?”라는 투로 말하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답변하시기를 “잔혹함을 이해하고 감수하는 자가 의인이다”는 겁니다.
한 예를 들면, 의로운 욥이 심한 고난을 받습니다. 욥은 참다 못해 하나님에게 질문을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저에게 악인들이나 받아야 될 심판을 안겨주십니까?”라고 나옵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네가 별 만들 때 무엇했지?”라고 말입니다.
“네가 묘성을 매어 떨기 되게 하겠느냐 삼성의 띠를 풀겠느냐 네가 열두 궁성을 때를 따라 이끌어 내겠느냐 북두성과 그 속한 별들을 인도하겠느냐”(욥 38:31-32) 즉 평소에 욥이 자신을 따지면서 별의 존재와 연관해서 따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하면서 그 주변에 자기를 모시기 위한 권력의 장을 형성해온 것입니다.
세 번째 질문은, “언제 이 고난을 끝나겠는가?”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의 문제점은, 그 고난의 시기가 끝났다고 해서 과연 본인의 뜻이 그 때에도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고 여기는데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일하심에는 원인보다 결과가 더 크게 작용하시는 겁니다. 인간들이 자기 예상을 의해서 준비된 그 원인보다도 엉뚱하게 전혀 다른 결과로서 마중나오시면서 그 원인을 삼켜버리시고 삭제시켜 버리시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 그 어떤 주도권을 안겨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하면 된다”를 못 발설하게 하시는 겁니다. ‘된다, 아니된다’는 연관에서 인간들이 배제시켜버리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원인성을 인정해주면 인간들은 천국에 가서도 자기 주도권을 포기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그렇게 되면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사람의 나라 연장이 되는 겁니다. 욥은 별을 생각하면서 자신이 그동안 세상을 보면서 형성한 세상관이 너무 자기 위주였음을 하나님께서는 깨닫게 만드시는 겁니다. 마태복음 26:1-6에 보면,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 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모든 처녀들이 다 잠을 잤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신랑은 갑자기 왔고 신랑은, 자기 신부가 구원받을 수 있는 근거를 ‘기름 준비’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미리 마련하신 바에 대해서 인간이 주도권을 쥘 수 없다는 점을 지혜로운 처녀들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어리석은 처녀들은 신랑이 올 때 기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기름을 미리 준비하면 기껏 어리석은 짓이 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발상이 구원의 근거에다 자신의 똑똑함을 미리 집어넣어 계속 주도권을 쥐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고난의 시기란 인간의 모든 주도권이 박탈되는 작용과 더불어 발생되면서 그 마지막에 이르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제발 어리석은 심정으로 십자가만 쳐다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