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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5강-믿음과 의인(2:4)이근호130303

아빠와 함께 2013. 3. 3. 18:56

믿음과 의인(합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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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3-03 15:34 
믿음과 의인

2013년 3월 3일                         본문 말씀: 하박국 2:4


(합 2:4, 개역)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이 말씀은 로마서 1장이나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이라서 우리는 이 구절을 따로 분리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가 먼저 적혀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러나’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곧 ‘적의 등장을 통해서 자아를 자아답게 정립한다’는 원칙이 적용시키기 위함입니다. 즉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나를 해롭게 하는 적이 나타나면서 명확하게 윤곽이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의인’이고 싶어하는 자들은 자기를 의인으로 만들어 줄 죄인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저 죄인과 같이 않습니다”고 곧 다른 말로 말하는 “저는 의인 맞지요? 하나님”이라는 식으로 나온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래, 너는 의인이지”라고 답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시는 겁니다. 즉 누구누구는 의인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믿음이 작용해서 만들어내는 자라야 후차적으로 의인에 해당된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소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소지한다면 필히 그 사람은 ‘그 믿음의 소지한 당사자’를 의인으로 간주하고 싶은 충동으로 가득한 채 하나님께 다가서려는 자가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식이 아니라 이방나라 식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의문을 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잔인한 민족들에 의해서 처참하게 뭉개져야 하느냐 하는 겁니다.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면 그냥 곱게 인생 살다가 “네 믿는가?” “예, 저 잘 믿고 있습니다”고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서 얼마든지 천국가게 하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이 인간들의 생각입니다.

따라서 고난과 역경과 수모가 구태여 이스라엘에게 들이닥칠 이유를 우리 인간들의 머리로는 찾을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스라엘 나라의 특수성에 주목해야 합니다. 창세기 28:10-12에 보면,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움직일 때마다 하늘과 소통되는 유일한 사다리도 같이 움직이게 됩니다. 즉 이 세상 천지에 모든 인간들이 숨쉬고, 내뱉고 하는 모든 행동들을 보여주더라도 그 가치와 의미를 오로지 이스라엘과 상관하는 가운데 그 의미성이 정리가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세상 아무 집에서 누구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 그 죄가 어떤 의미에서의 죄냐 하는 것은 그냥 하늘에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로 인한 이스라엘의 연관성과 결부해서 파악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만약에 아무런 종교도 없는 어떤 사람이 부부싸움을 벌릴 때, 그냥 그것만으로 죄의 의미가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그 죄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부부싸움을 한 그 부부는 ‘믿음으로 살지 않기에’ 죄가 되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다른 이방나라에서는 신의 문제가 시급한 문제이고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간들이 고통없이, 괴로움없이 살아가는 삶 자체가 우선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야곱에게 내린 하나님의 약속(언약)에 의해서 지상에 나타난 민족이기에 항상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연결구’를 갖게 됩니다.

연결지점에서는 지상의 모든 죄와 하늘의 하나님이 준비해두신 모든 은혜가 만나는 지점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서 평가받은 그 평가 기준이 결국에는 모든 인류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심판의 기준이 되는 식으로 이스라엘의 움직임을 따라 확산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지상에 움직이는 나라로 만드셨습니다. 아무개 동네, 아무개 나라 그 한적한 시골 집에서 부부싸움하는 경우, 그 죄를 이스라엘을 경유해서 하나님께서 평가내리시는 그것은 곧 ‘우상숭배’의 죄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저지른 모든 죄는 ‘우상숭배 했다는 죄목으로 저주를 받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방나라에서는 신 문제가 우선이 아니라 자기네들의 육신 유지가 최우선 과제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다릅니다. 참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스라엘의 승패를 좌우합니다. 제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이 모든 행위를 죄를 묻는 근거는 자기네들의 육신을 통해서 우상숭배 경향이 녹아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적의 등장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정립하는 인간들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께서는 구원자를 사람 눈에는 도리어 ‘하나님의 원수’로 보이게끔 행동하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인간들의 ‘신 섬김’이라는 것이 실은 인간 내부에 자리잡은 악마의 술책이다는 사실을 폭로시키고자 하십니다.

그 방법이 바로 평소에 흠모해 마지했던 그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유대나라가 혹독하게 당하도록 만드신 취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 바벨론 제국을 가리켜서 ‘마음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다’고 평가를 내리십니다. 결코 믿음 생활을 할 수 없고 결코 의인이라고 할 수 있는 민족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야합니까? 본디 자신의 기능대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고 해서 지옥간다든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 나라가 하나님의 원수처럼 행세하게끔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하나님의 원수’로 오해하게끔 지상에 보내셨습니다.

누가 봐도 미워할 수 밖에 없는 분으로 오셨는데 이는 곧 그 누구라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우선시하는 우상숭배자일 따름임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건강 진단기기 앞에서 사람들은 환자복 입고 동굴처럼 생긴 기계 속으로 끌려들어 가면서 온갖 것을 점검받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자기 백성을 심사하시고 준비된 은혜로 용서하시면서 그 연결구, 그 관계를 가지고 ‘의’이라고 말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쓰레기 같은 우리도로 의인을 만들어 내시는 그 언약을 우리가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강-합2장4(믿음과 의인)1303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하박국 2장 4절입니다. 구약성경1303페이지입니다.

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적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것, 이건 우리 사람들의 방식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로마서 1장 17절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 그리고 갈라디아서 3장 11절에 나오는 말씀이기도 하는데 우리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만 잘라서 그것만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 앞에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해서 현재 유대나라를 공격하는 바벨론, 그 바벨론이라는 그 실체가 건방지고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함부로 날뛰고 있다는 것을 주변 환경으로 삼아놓고 그 속에서 뭔가 새로이 끄집어내요.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힘으로 보아서는 적들이 힘이 세요. 그리고 현재 유대 나라는 패배하고 있습니다. 인생으로 말하면 인생 쫄딱 망한 거죠. 그런데 거기다가,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말을 바꿔야 돼요. ‘살고자 하는 자는 믿어라‘가 아니라 믿게 된 사람은 어떤 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그 사람은 의인이다. 이런 뜻 이예요.

한번 살아보는데 의인돼야 살지 싶어서 ‘내가 맘껏 착한 일 해봐야지, 그러면 이 악한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주겠지.‘ 하는 요런 수작 부리지 마라 이 말이죠. 환경이 너무 힘들어서 어떤 수가 없을까 ’옳지, 예수 믿어야지.’ 요런 되도 않은 얄팍한 수를 내지 말라 이 말이죠. 환경이 악하든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그 환경의 배후까지 꿰뚫어보는 사람이 믿음으로 사는 의인이다 이런 뜻 이예요.

하지만 우리는 이 본문 보면서 또 여기서 자꾸 의문점이 나오는데 어떤 의문점이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받을 백성, 의인들을 이렇게 구태여 이렇게 힘들게 할 이유가 무엇이냐, 힘들지 않더라도 충분하게 천국 보내시면 되는데 그냥 조용하게 고요하게 살면서 ‘그래, 천국 오너라.’ 이러면 될 수 있는데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시면서 우리보고 ‘참아라. 견뎌라. 믿어라.’ 이렇게 어렵게 일을 하시는 그 하나님의 취지가 무엇인가? 하는 그 점입니다.

그 점을 우리가 알기 위해서는 이 구약 전체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 앞에 매를 맞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돼요. 우리 대신 맞는 것이고 우리를 대표해서 맞는 건데, 하나님께서 매를 때릴 때 때리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나쁘다. 악하다.’가 아니라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때린다는 겁니다.

우리가 집안의 자식들 보고 나무랄 때 공부 못해서 때리는 경우는 있지만 니가 우상 섬겨서 때리는 법은 없잖아요. 우상을 섬기는 것보고 때리는 ‘니가 벌 받아야 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원래 이스라엘에 만들어질 때부터 이게 관련이 있어요. 어떤 게 관련이 있느냐 하면 신의 세계, 진짜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세계와 우리 지상과 유일하게 소통되는 소통의 장이 이스라엘입니다. 유일하게 통하는 그 연결고리가 돼 있어요.

창세기 28장 12절에 보면  야곱이 길을 가다가 꿈을 꾸게 되는데 “꿈에 본즉 사다리가 땅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그래서 생긴 나라가 이스라엘이라는 거예요. 이스라엘이라는 그 움직이는 나라는 사다리를 지고 움직인다고 생각하시면 굉장히 간편하고 쉽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냥 일반 나라처럼 자기 몸뚱이만 그냥 움직이면 되는 나라가 아니고, 사다리를 지고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일종의 소방차라 보면 돼요. 소방차 뒤에 사다리 있잖아요. 그 고가 사다리는 높은 건물 가기 위해서 하는 거잖아요.

그럼 이스라엘이라는 소방차는 뭘 하기 위해 있느냐, 이스라엘이 있는 곳에 가야 하나님과 지상이 연결되는 고리가 거기에만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주목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팔짝팔짝 뛴다고 천당 가는 게 아니고 가야 될 자리가 있어요. 이스라엘이 있는 현장에 가야 그 이스라엘이 사다리가 내려왔던 그 현장이거든요. 이스라엘 속에 합류해야 비로소 이스라엘 속에서 위를 쳐다보면 그 사다리가 유일하게 하늘나라와 지상이 연결이 되는 그러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이걸 제가 대전강의(울산강의)에선 그걸 연결구라고 했죠. 배관공들이 이쪽 배관하고 저쪽 배관하고 연결할 때 연결고리를 만들잖아요. 그처럼 하늘과 지상을 연결고리를 딱 끼게 조합해서 거기서 유일하게 만남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걸 신약의 용어로 하면 중보자, 많이 들어봤죠? 그걸 쉽게 말해서 연결구가 되는 거예요. 연결구 지점이 어떤 지점이냐 하면 땅에서 올라오는 죄들은 거기 집합하고 하늘이 주신 은혜는 거기 같이 집합해서 거기서 만나는 거예요.

이 말 여러분이 들으면 굉장히 쉬운 말이라고 하지만 말하는 저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어려운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왜냐 하면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인간이 죄 졌으면 바로 하늘로 올라가지, 왜 이스라엘을 통해서 올라가는가, 하는 질문이 그 뒤에 똑똑한 사람은 그 뒤에 계속해서 이어진다 말이죠. 아니 어떤 절에 가는 사람이 죄 지었다. 그럼 하나님이 다 눈치 채는데 ‘아이쿠, 너 죄 졌구나.’ 해서 심판하면 끝나는 거지, 뭐 그걸 절에 가는 사람이 죄 짓는 거. 교회 안 오는 사람이 죄 짓는 거. 그걸 모아 모아서 이스라엘이 안고 이스라엘이 연결구라 해서 하나님하고 연결되고 그렇게 복잡하게 이야기하느냐 이 말입니다.

마치 물통이 비올 때 받는 물통이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하느냐, 왜 인간이 죄 졌다고 이스라엘을 끌어 모아야 되느냐 하면 인간이 죄를 새삼 짓는 게 아니고 늘 짓거든요. 그 죄를 지을 때 죄를 짓게 된 그 배후에 있는 동기를 알아야 돼요. 그냥 죄졌다 하면 안 되고 이런, 이런 이유 때문에 죄를 지었는데 그런 죄에 대한 이유, 근원을 파악해야 구원하는 분이 이런 이유 때문에 이런, 이런 죄와 만나서 이런 일을 이렇게 구원한다는 구원의 방식이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원의 방식! 죄졌다. 벌하라. 그러면 모든 것은 가만히 있어도 벌 받죠. 꼭 벌해야 됩니까? 하나님께서 ‘죄 졌다.’라는 말을 하면서 같이 마중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 ‘너도 죄졌는데 너는 구원 받고 천국 가는 이유는 그 죄에 부합되는 요러한 은혜가 맞춤 은혜가 준비돼 있기 때문에 너는 거기서 용서받는 거야.’ 라고 해서 용서해 주는 주님의 독특한 그 모양새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홍수 났다. 우리가 생각하는 죄 졌는데 홍수 났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냥 우산이죠. 우산 들면 되잖아요. 우산 들고 물이 고이면 높은 산에 올라가면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미리 방주를 계산해 놓고 죄 졌다고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본인들이 생각하는 죄는 우산만 있으면 되는데 노아가 제시하는 것은 뭐냐, 방주에 꼭 들어오라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노아 말을 안 믿는 겁니다. 왜, 내가 생각하는 비는 우산만 있으면 되잖아요. 우리의 상식이고 우리가 살아온 거예요.

홍수와 방주의 만남! 이게 뭔가 어울리지 않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에 보면 “사랑하라. 용서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살인하지 말라.” 좋은 말 있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우리의 대책은 뭐냐, 살인 안 하면 되고 간음 안 하면 되고 원수 사랑하면 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용서하는 방식은 뭐 ‘하고 안 하고’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였다 이 말이죠. 그리고 예수님의 피는 아무나 아는 게 아니고, 대통령 됐다고 아는 게 아니고, 성령을 받아야 비로소 알아 가는 겁니다. 성령을 받아야!

성령을 받게 되면 십자가 피를 알게 돼 있고, 십자가 피를 알게 되면 비로소 이거는 세상의 모든 걸 알게 된 거예요. 세상의 모든 게 죈데 그 죄에서 용서받는 것은 예수님의 피 밖에 없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부터 시작해서 죄가 무엇인가? 예수의 피를 믿지 않는 것이 죄다. 로마서 14장 끝에 나오는 말씀,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새로운 개념이 성립되는 겁니다. 믿지 않는 게 죄다. 성폭행이나 살인이 죄가 아니고 믿지 않는 게, 예수를 믿지 않는, 복음을 믿지 않는 게 죄다. 그런데 믿지 않는 게 죄 같으면 우리가 믿으면 되잖아. 그런데 어떤 누구도 예수의 십자가를 믿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믿지 않는 게 죈데 죄 안 짓기 위해서 믿으려고 하니까 주님께서 ‘못 믿는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 말은 뭔 뜻입니까? ‘니가 믿지 않는 죄인이기 때문에 믿지 마라.’ 이 말입니다. 천국 오지 마라, 이 뜻 이예요. 아무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러면 천국 간 사람이 있지 않느냐, 엘리야, 모세부터 간 사람이 베드로, 분명히 다 갔잖아요.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간 거죠. 믿어서 간 게 아니고 은혜로 간 거예요. 왜 그렇게 복잡하게 하느냐, 믿음도 행함에 속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내가 믿을 수 있으면 믿을 수 있다고 우기는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비해서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이왕 어렵게 한 거 계속 어렵게 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믿는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교회 나와서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럴 때 믿지 않는 사람이 교회 처음 나와서 ‘어떻게 구원 받지? 어! 저 사람이 믿네. 저 사람이 믿으니까 나도 믿으면 되겠네.’ 라고 하니까 그게 믿음이 아닌 거예요. 왜냐 하면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을 흉내 내서 믿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은 성령이 임해서 믿었는데, 이쪽에 두 번째 사람은 성령을 잘라버리고 성령은 듣기 싫어서 내버리고 ‘니 하는 대로 하게 되면 나도 믿는 사람이다.’라고 하겠다는 거예요.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행함이 되고 믿지 않은 게 되고 믿지 않으니까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죄를 범하게 되는 거예요. 예수 믿는 죄!

여기서 처음부터 다시 하면 적을 통해서 자기를 정립한다 하죠. 적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구축하기 때문에 하나님 방법은 뭐냐 하면 예수님을 우리의 적으로 보낸 거예요. 적으로 보내니까 예수님은 적이고 나는 나고, 예수님과 나를 결별하려고 하는 겁니다.

베드로가 모닥불에 불을 쬐면서 한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예요. ‘나는 저 사람을 저주 하면서 모른다.’고 한 거예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예수님을 적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풍토와 분위기를 통해서 우리는 교육받았고 성장해 왔거든요. 우리는 유별나지가 않아요. 우리는 모든 사람이 ‘아니오.’ 할 때 ‘아니오.’ 할 사람이지 모든 사람이 ‘아니오.’ 할 때 혼자 ‘예’할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유별나지를 않아요.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말이 평범하게 산다는 거예요. 평범하게 사는 거,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틔지도 말고 너무 낙오되지도 말고 그저 보~통 사람으로 그저 이 근처에 살았던 노태우처럼 그저 보~통 사람으로 사는데 그 보통 사람으로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틔면 안 되는 거예요.

그 보통 사람으로 살고 싶어 하는 우리의 충동 때문에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적으로 오셨습니다. 적으로 왔기 때문에 제자들도 예수님을 배반했고 제자들도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것은 실험을 충분히 해봤다는 거예요.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교육 받아봤지만 결국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예수 믿지 않았다는 것은 어느 위인도 예수님을 못 믿는다는 뜻 이예요. 예수님이 적으로 옴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도 예수님 빼놓고 우리 다 같은 편이예요.

그 같은 편중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 오늘 본문에 유대나라도 포함돼 있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나라는 오해해서 바벨론이 등장하니까 바벨론하고 자기하고 같은 편인 줄 모르고 둘 다 우상 믿고 둘 다 다른 신을 믿는 자기편인 줄 모르고 이거는 ‘하나님이여, 왜 적들이 와서 착한 우리를 공격합니까?’ 라고 그렇게 오해한 겁니다.

그럴 때 나온 것이 뭐냐, 하나님 말씀은 “의인은 그 믿음으로 살리라” 이렇게 돼 있다 말이죠. 이제 이걸 설명을 해야 되겠어요. 아까 제가 창세기 이야기할 때 사다리 이야기했잖아요. 사다리 이야기함으로서 그게 연결고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소방차가 돼서 사다리를 끌고 다니는 그런 쪽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자, 여러분들이 오후 되면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제가 되풀이해서 반복해서 이야기를 해드립니다. 그렇게 될 때 이스라엘만큼은 하나님과 연결돼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 죄는 ‘왜 나쁜 짓 했는가, 왜 어려운 사람을 학대하느냐.’ 그런 문제지만, 이스라엘한테는 이렇게 물어요. ‘너는 왜 참된 신을 놔두고 다른 나라 우상을 섬겼지? 그러니까 니는 멸망해야 돼.’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른 나라 필리핀이나 아프리카 알래스카 이런 사람들이 볼 때 ‘저 이스라엘은 이상해.’ 다른 나라는 신이 그렇게 시급한 나라가 아니에요. 신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나라의 흥망성쇠가 참된 신을 섬길 것이냐, 다른 신을 섬기냐, 신 문제가 그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문제가 되는 겁니다. 지금 여기 4절에 보면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이 구절은 바벨론에 대한 말이거든요. 그 뒤에 5절에 나옵니다. “그는 술을 즐기며 궤휼하며 교만하며…” 죽 나오는데 이건 바벨론을 이야기하면서 5절 끝에 보면 “자기에게로 만국을 모으며 만민을 모으나니” 바벨론이 하는 짓거리가 신을 어떻게 바른 신을 섬기자가 아니고 인간의 신이라는 것은 내가 우선 있고 그 다음에 신이 있는 거예요.

그들이 어떤 신을 섬기는 것은 그 신을 해석할 자가 내가 신을 섬기기 때문에 내가 신을 해석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좀 달라요. 다른 나라에서는 인간이 우선이고 신은 나중 문제인데 이스라엘은 참된 신 여부가 우선문제고 그 다음이 인간문제인 겁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신을 언급하게 되면 그 다음에 이스라엘 속에서 이런 고백이 나오니까 잘 들어보세요. ‘하나님이여, 우리가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 바벨론으로 우리를 치는군요. 그러니까 우리 이스라엘 입장에서 저주받고 축복받는 것은 우리 노력에 관계없이(다른 나라에서는 그렇게 해요. 노력하면 복 받고 노력 안 하면 저주 받는데) 우리나라 유대나라,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신을 잘못 믿으면 저주 받고 신을 제대로 믿으면 복 받는군요.’ 라는 이야기를 주변 나라가 이렇게 지켜보게 되면 그 이스라엘 나라에서 저주 문제가 등장해요.

저주 받는 이유가 신을 잘못 섬기면 저주 받는다.를 그냥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구체화 시킨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가 뭐냐 바로 이스라엘 나라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라거든요. 여러분이 지금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아서 다시 한 번 쉽게 가기 위해서 먼저 언급을 하나 해드립니다. 지금 제가 하는 입에서 나오는 용어들이 뭐냐 하면 율법, 저주, 의, 믿음, 그런 용어들이잖아요. 사다리, 야곱, 이스라엘, 그런 용어죠.

이건 안 들었다 치고요. 세상 나라에 가서 ‘복 받으려면 열심히 노력하고 행해야 되고 착해야 되고 부지런해야 되고.’ 이런 용어는 세상 용어다 이 말이죠. 방금 제가 한 것은 ‘우상 섬겼고 우상 섬겼기 때문에 저주 받았고.’ 이 용어는 이스라엘 용어에요. 지금 이스라엘 용어를 쓰는 이유가 연결구! 유일하게 하늘과 땅이 연결된 나라가 이스라엘뿐이기 때문에 지금 여러분들이 생소하기 짝이 없는 그 용어를 제가 사용하는 거예요.

세상에서는 저주 받는 것은 나쁜 짓하면 저주 받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게 아니에요. 다른 신을 섬기면 저주 받게 돼 있어요. 어느 쪽이 좋으냐의 문제는 우리가 결정하지 말고 이스라엘에게 일어나는 일로 결정하도록 우리가 해둡시다. 제 말이 이 말입니다. 어쨌든 이스라엘에게 벌어진 일이거든요. 하박국 선지자가 이스라엘 선지자다 이 말이죠. 이스라엘에게는 다른 신을 섬기면 저주 받는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섬긴 이유가 다른 나라, 옆의 나라를 흉내 내서 그런 거예요.

그럼 다른 나라는 뭐냐 하면 제가 오늘 다섯 번째 이야기합니다. 다른 나라는 뭐냐 하면 신이 우선이 아니에요. 누가 우선이냐, 밥 먹고 사는 내가 우선이라니까요. 내가!!

여러분, 십자가라 하는 것은 우상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막상 십자가 보면 거기는 아~무 것도 의미가 없어요. 대전 가서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어떤 분한테 목수가 십자가를 만들어줬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물었어요. 십자가 만드는데 꼭 목수가 동원돼야 되는가, 내가 나무작대기 두 개로 홈파서 못 박으면 끝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걸 믿어요? 그럼 나무 작대기를 믿어요? 말이 안 되거든요. 그러니 십자가를 믿는다 하지만 십자가 믿어봐야 거기 아무것도 없어요. 세상에 만화도 그런 만화가 없어요.

엑소시스트란 영화에 보면 소녀가 침대에서 귀신들려서 모가지 픽픽 돌아가니까 신부라는 작자가 나무 작대기로 십자가라 해서 ‘십자가다. 사탄아 물러가라.’ 그 나무 작대기가 뭡니까? 거기서 게르마늄이 나옵니까? 거기서 방사능 나와요?

십자가를 믿으라는 뜻은 헛것을 믿어라 이 말입니다. 왜, 인간 자체가 평소에 헛것을 믿어왔기 때문에 인간 자체들이 헛것과 헛것이 아닌 것을 구분했어요. 자기한테 중요한 것은 헛것이 아니고 자기 빼놓고 신에 관한 건 다 헛것 이예요. 아쉬울 때만 신을 찾고 기도하면 된다니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헛것이 아닌 것은 이 몸이 갖고 있는 배고픈 것, 머리 아픈 것, 치과에 가는 것, 이건 헛것이 아니에요.

그러나 신에 관한 건 헛것이라니까.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 이예요. ‘아이구, 자식아, 저 인간이 복음을 안 믿다니’ 이렇게 울며 기도하는 것은 우리들 교인들밖에 없어요. 다른 교회 교인들은 자식이 취직 못해서 기도하고 시집 못가서 기도하고 그런 거 기도해요. 뭐 복음 몰라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들 교인밖에 없어요. 우리들 교회 지금 10년 넘었다고 지금 칭찬 남발하고 있는데, 아니 인간이 지 몸뚱이가 최고예요. 지 몸뚱이와 무관된 것은 다 헛짓이고 다 헛것 이예요.

문재인 찍어주고 안철수 옹호한 사람 박근혜 대통령 되면 아무 의미 없어요. 그건 지가 찍은 대통령 아니니까 의미 없다고요. 자기가 결정하지 않은 건 다 의미 없는 거예요. 그게 바로 이방나라인데 그 이방나라와 같이 섞인 게 누구냐, 유대나라인 거예요. 다른 나라는 손 안 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저주한다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인간 육체 속에 하나님께 저주 받을 진짜 원수가 인간 육체마다 다 들어있다는 이야깁니다. 그걸 다른 나라는 모르고 오직 이스라엘 통해서만 그게 밝혀내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지 몸뚱이 챙기고 살아도 아무 탈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걸 가지고 오늘 본문에 뭐냐, “교만하다. 정직하지 못하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듣는 사람 기분 나쁘겠지만 자기는 정직하게 하고 자기는 축복 받아서 강자가 됐는데, 주님 보시기는 진짜 연결고리, 진짜 하나님과 소통 관계가 없이 살아가는 모든 것은 다 정직하지 못한 것이고 악한 게 된다는 거죠.

그런데 이스라엘과 유대나라로 하여금 그런 나라한테 지독하게 시달리게 하는 것은 봐라. 니가 그토록 같이 좋아했던 것이 나한테 압박으로 다가오잖아. 하지만 그렇게 저주 속에서 니가 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에 의해서 믿는다는 새로운 사실을 내가 저주 안에서 만들어내겠다. 분명히 헛것 이예요. 십자가는 헛것입니다. 그런데 그 헛것을 진실로 믿는 믿음의 일을 내가 발생시키겠다는 겁니다. 그거는 미래에 그렇게,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는 거예요.

핍박받는 이스라엘! 이스라엘 사람 보기에는 ‘이제 끝났어. 끝났어. 우리나라는 끝났어. 이방나라에 잡혔어. 더 이상 하나님이고 뭐고 다 날라 갔어. 우리는 죽었어.’라고 할 때 너희 이스라엘은 죽었지만 너희들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은 안 죽었다는 이야깁니다.

더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있는 나라가 안 믿는 나라한테 당하게 하는 그것조차도 진짜 믿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절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니가 믿으라는 거예요. 그런 것도 하나의 과정 이예요. 우리 인간 속에 있는 이 저주 성. 이 악마성은 우리가 못 벗어납니다. 마귀가 너무 강렬해서. 비록 하나님께는 저주 받지만 인간한테는 저주 받는 줄 알지만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 사실, 어떤 인간도 우리 육신의 탐욕에서 어떤 것도 이길 수가 없어요.

아까 기도하신 분이 기도 내용에 했지만, 왜 식구들이 기도할 때 웃음이 나오는지. 형수가 시숙 기도하실 때 얼마나 권사님은 조마조마하면서, 내가 복음 알아서 기도하라 했는데 과연 복음대로 해야 목사한테 지적 안 받을 텐데…. 하나님께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만드는 이것도 진짜 우리가 두 번 다시 ‘세상 좋다. 나, 내 몸뚱이가 최고야.’ 그런 식으로 사는 게 사는 게 아님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쓰레기 같은 우리를, 폐기물로 우리를 가지고 거기서 믿음을 뽑아내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이것은 우리가 나가는 것이 아니고 더러운 우리 속에 주님이 찾아오는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니 같은 인간도 나한테는 쓸모 있다는 겁니다. 건강 진단할 때 MRI 할 때 하얀 기계 동굴 속 같은 데 들어가죠. 그 선반 위에 누어서 들어갈 때 환자 복 입혀서 ‘자, 조금만 기다리세요.’ 해서 들어갔다가 진찰하고 촬영하고 나오잖아요. 쓰레기 같은 우리를 거기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다가 집어넣어요. 집어넣게 되면 쓰레기 밖에 없는데 그 쓰레기 속에서 ‘니는 쓰레기다.’ 하지만 그 쓰레기 속에서 너를 쓰레기 되게 하신 그 작용이 오히려 너를 건져내는 작용이 되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선 율법으로 쬐어요. 율법으로 촬영을 합니다. 율법으로 쫙 쬐어 보니까 우리는 모든 것이 율법대로 못 사는 죄인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율법으로 해서 우리가 죄인 맞다. 하지만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서 거기다 은혜가 주어져요. 하나님의 용서가 주어지게 되면 그 율법에서 용서가 연결되는 그 연결 자리를 뭐라 하느냐 하면 ‘의’라 합니다. 하나님의 의! 하나님이 직접 댔던 흔적을 말합니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산 자가 곧 의인이 되는 거예요. 주님이 살려주고 주님이 개입한 자가 의인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주님이 살려주고 개입하는 것을 강조하다 보니까 ‘나는 뭘 해도 쓰레기고, 죄인입니다.‘라는 말을 우리는 즐거이 너무나 감사한 마음으로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나는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죄인입니다.‘ 그럴 경우에 그 십자가는 나무  크로스한 게 아니고, 하나의 사건으로 우리 속에 들어온 게 돼요.

바로 이 말씀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것은 모든 것을 다~ 경과하고 난 뒤에 세상 모든 것이 율법 아래 저주 있다는 걸 다 꿰뚫고 다 안 사람에게만 결국은 마지막 때 이 말이 나오는 거예요. ‘저요? 믿음으로 살아요.’ 이 말은 ‘율법의 행함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개입으로 주께서 살려내는 그 살려냄에 이끌려서 하나의 연결구로서 이스라엘로 살아가는 겁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사람들은 살려내시는 하나님이 우선이 아니고, 살고자 의욕 하는 본인이 노력과 본인 수고가 더 우선이 되는 그런 주변의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웬 은혠지 웬 사랑인지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지만 믿음 주셔서 예수님이 살렸다는 그 사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행복, 유일한 행복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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