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나라
2013년 3월 10일 본문 말씀: 하박국 2:12-15
(합 2:12, 개역) 『피로 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합 2:13, 개역)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열국이 헛된 일로 곤비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말미암음이 아니냐』
(합 2:14, 개역)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합 2:15, 개역) 『이웃에게 술을 마시우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로 취케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어떤 나라가 하나님의 백성된 나라일까요? 그것은 반대 경우를 답변으로 하면 됩니다. 즉 ‘어떤 나라가 하나님의 백성된 나라가 아닐까요?’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축복받은 자들이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은 저주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나쁜 짓해서 저주받은 것이 아니라 저주가 무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그들은 저주받을 짓을 해야 합니다.
저주 받을 짓 ‘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게 저주받을 짓이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뭘해도 저주받기 위해서 일어나야 될 일들입니다. 즉 저주받을 자들은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난 자들입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저주 안 받을 짓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특별히 나빠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주신 축복이 왜 축복일 수 밖에 없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안 믿는 자들이 안 믿는 모든 짓들은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저주받기 위해서’ 그들은 그렇게 살아가야하고 그렇게 움직이어야 합니다. 이는 그들이 저주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축복받은 자들이라는 점이 중요하고, 더 나아가서 그들에게 축복을 주신 그 하나님이 더 중요하게 부각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이 복 받은 것은 다른 민족보다 나은 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만 알고 계시는 정보를 그들에게 흘렸기 때문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여호수아 8:33-35에 나옵니다. “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이왕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한 대로 함이라
그 후에 여호수아가 무릇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모세의 명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인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거하는 객들 앞에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 즉 하나님 백성이 아닌 자들은 자꾸만 뭔가 신으로부터 얻어내려고 시도하는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자꾸면 뭔가 새겨지게 됩니다.
산이란 원래 특별한 성분들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동일합니다. 지구 내부에서 올라오는 마그마 성분이 지표면에서 변화된 것이 지각이고 그 중에서 뽀족 튀어나온 것이 산입니다. 따라서 산 자체는 일반적인 산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 산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을 드러내십니다.
그것이 바로 축복산이요 저주산입니다. 산만 보면 우리는 등산할 마음만 품지 결코 “저 산은 하나님의 축복을 보여줄까 아니면 저주를 보여줄까?”를 생각하지 않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인 보통 산을 갖고서 저주와 축복을 표현해내십니다. 요단강을 건너온 이스라엘 12지파를 두 패로 나눕니다.
야곱의 정식 부인에서 태어난 지파와 그 정식 부인들의 여종에서 태어난 자식들을 구분짓습니다. 그래놓고서는 정식 부인들의 지파는 축복산이라고 이름 짓게 될 그리심 산에 배치하고, 종들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들 지파는 에발산에 서게 하십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란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하기 위해 기능해야 될 자들입니다.
즉 ‘자신의 것’이라고 따로 챙길 입장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축복산에 선 자들은 맞은 편 서 있는 지파를 향하여 축복된 법들을 외치게 합니다. 즉 “이런 말씀을 지키게 된다면 이런 복을 받습니다”는 식으로 외칩니다. 반대로 저주산에 서 있는 지파들은 “이런 말씀을 아지키게 되면 반드시 저주받습니다”를 외칩니다.
이처럼 산과 백성의 만남에서 하나님께서 기획하신 것은 저주와 축복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에 의해서 주도된다는 점입니다. 사람들 본인들이 선택할 사항이 아닙니다. 축복이 되었던 저주가 되었던 인간들이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하고 전달할 뿐입니다. 바로 이러한 기능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왠 저주인가’를 생각할 게 아니라 ‘왠 축복인가’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생은 ‘상속’이라는 입장에서 주어지는 겁니다. 상속이란 아들에 대해서 아버지가 제공하는 겁니다. 따라서 상속받은 아들은, 순전히 아버지 것만 있을 뿐입니다. 이는 천국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제 자랑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상속은 곧 영생입니다.
창세기 3:24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로 하여금 아예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시켰습니다. 이는 생명나무 과실은 오직 ‘아들에게만’ 주어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이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상속’이라는 방식을 동원하셨고 그 대상은 오직 아들에만 해당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에는 저주도 동반한다는 사실을 놓치면 아니됩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저주받은 것은 진정 영생을 받기 위한 아들됨에 대해서 그들이 눈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 자체가 축복받을 만해서 받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저주받아도 마땅하다는 사실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즉 저주를 실제화 되지 아니하면 그 어느 경우도 축복도 실제화 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축복과 저주를 실제화하기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저주보다 축복이 지극히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인간들에 의해서 예수님께서는 거부당했습니다. 이로서 이들은 저주받아도 할 말이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오른편에 주님으로 앉으셨습니다. 그 오른편은 이제 마음놓고 세상을 저주할 수 있는 자격자가 계시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의 손에 잔이 들렸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노의 잔’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진노의 잔이 오른편에서 쏟아져 온 세상에게로 다 번지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보면서 더 이상 핑계치 못합니다.
요한계시록 16:19-20에 보면,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 데 없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생각해두신 저주와 축복의 적용이 이제는 이스라엘을 넘어서서 온 지구상에 다 퍼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저주의 보편화를 먼저 지면에 시도하시면서 동시에 축복이란 오직 예수님에게만 상속이라는 차원에서 주어짐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가 ‘가져야 될 내 것’ 없다고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 생각을 품고 있었음을 폭로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