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강-고전 15장 20-24(부활의 열매)160522-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5장 20-24절입니다. 신약성경 282페이지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성경말씀이 이렇게 나와 버리면 이 성경은 우리와 동떨어진 말씀으로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끼리 따로 일하시고, 따로 일하시는데 그 일하는 원칙은 성경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한다든지 거기에 관심을 가질 수 없고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일하고 우리는 우리대로 일을 따로 하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십니다.” 해도 우리한테는 별 영향이 없는 것처럼 느끼면서 하루하루를 우리가 보내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일과 우리가 하는 일과 접촉되는 것을 느껴야 되는데 워낙 우리가 우리 자신이 살 궁리만 하기 때문에 그 연결과 접촉되는 것에 대해서 평소에 느끼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늘 본문도 이야기합니다. 22절에 보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라고 되어 있어요. 아담 자체가 일종의 운구해야 될 관처럼 느껴집니다. 아담 같은 육신, 아담의 몸을 가진 자는 자기 관안에 자기가 놓여 있다, 이렇게 성경은 소개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의 조상이 아담이라면 당신은 이미 죽었습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죽었다.”라는 것을 계속해서 현실로 만들어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활동입니다. 분명히 성경에서는 인간에 대해서 언급을 안 한 것이 아니에요. 분명히 언급을 했어요. 너는 죽었다, 라는 언급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걸 못 느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우리 쪽에서 하나님의 일에 접근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규정을 지어놓았거든요. “모든 인간은 죽었다.”라고 했을 때 그걸 보고 ‘아, 죽었구나.’ 윽! 이렇게 쓰러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상하다? 아직까지 팔팔하게 살아 있는데 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은 죽었다고 이야기했을까?’ 별 관심을 두지도 않고 못 두지요. 그래서 성경말씀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제시하는 것은, 그 성경말씀대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두꺼운 층이 있어서 그 두꺼운 층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들고, 반대하고 그것에 대해서 우습게 보는 다른 힘에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과 더불어서 우리를 깨우치도록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게 만드는 어떤 권력과 권세 안에서 너희들이 놀아나고 있다는 겁니다. 보통 술 취하면 정신이 나가서 어른도 못 알아보고 집안 식구도 못 알아보잖아요. 그 때 사람들이 “술에 취했구나. 술이 너의 정신을 완전히 통치하고 지배하고 있구나.”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보통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말이지요. 정신 차리라고. 그런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지요. 육신 속에 알코올이 들어가면 정신을 못 차리지요. 우리가 정신 차려서 하나님에게 관심을 갖고 있어도 이미 육신자체가 술에 취하듯이 마귀의 힘에 지금 취해서 삽니다. 돌이 떡 되게 하고, 인기 때문에 살고, 세상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 탐욕, 세상 모든 것을 얻을 때까지 쉼이 없는 것, 이 모든 것은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마귀와 단독적으로 만남으로서 나타난 현실의 내막이에요.
그 현실의 내막 속에 충분하게 도취되어 살아갑니다. 술에 취한 것처럼. 술에 취하고 도취되어 있으니 이 성경말씀에 대해서 기피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 죽었다는 것은, 네가 알아서 나에게 돌아올 수 없는 처지에 있다. 두꺼운 막 때문에 폐쇄적으로 갇혀있다는 말이지요. 마귀가 쳐놓은 그 장막 안에서 못 빠져나오기에 아무리 노력해 봐야, 아무리 거기서 각성해봐야 거기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불교에 문무관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지요. 1001일 동안 하루 한 끼만 먹으면서 닫힌 공간,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근 곳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도를 닦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는 모양입니다. 1001일 이면 3년 가까이 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도가 닦이느냐 그 말입니다. 원인에 대해서 성경은 간단히 이야기합니다. 네가 도를 닦고자 하는 그 대상이 뭐냐 하면, 몸이라는 겁니다. 자신의 몸에서 나온 정신이 자기 몸을 다른 몸으로 바꾸려고 시도하는 그 자체가 네가 죽어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는 겁니다.
도를 닦겠다는 것, 뭔가 깨달음을 얻겠다는 것이 죽은 자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반발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몸, 다른 말로 하면 육에 있습니다. 우리의 육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인간은 육의 욕망을 정신이 이기지를 못해요. “정신 차려라. 이 바보야!” 하고 아무리 결의를 하고, 다짐을 하고, 결심을 하고, 자각을 해도 인간에게 육이 있는 한 육이 뿜어내고 있는, 그 분출하고 있는 욕구와 욕망은 인간의 정신으로 다스려지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정신이 육을 못이기는 정신으로 이미 마귀로부터 제공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기지를 못해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성경대로 죽었다고 하니 ‘아, 죽었구나.’ 이렇게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참 쉽지요? 참 쉬운 거예요. 나라고 형성되어 있는 그 자리를 삽으로, 또는 일본말로는 수금포로 푹 뜨는 겁니다. 푹 떠서 내 던져버리면 그 자리가 주님 자신의 말씀 그대로 실행에 옮기는 그 현장이 되는 거예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죽었다고 하는 그 사실을 지금 말씀으로 실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현장을 누가 마개처럼 가로막느냐? ‘나에게는 몸이 있고 이 몸은 고통의 질곡에서 벗어나야 해.’라고 자신의 몸을 자기가 다루려고 하니까 그 자리가 뭐냐? 말씀의 자리가 아니고 나의 자리가 돼요. 내가 잘되는 자리, 내가 희망을 꿈꾸는 자리, 나의 미래가 보장되는 자리, 찬란한 미래의 계획의 첫걸음을 옮기는 자리. 온갖 것으로 자기를 미화하면서 그 자리를 꾸준히 내 자리라고 계속 지탱하고 있습니다.
내 자리라는 게 없습니다. 왜 없는가? 그 자리는 죽음이 내 몸을 가지고 말씀대로 네가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리지요. 말씀으로 시작해서 ‘야, 역시 말씀대로 나는 죽은 것이 맞구나.’라고 확인해야 될 자리지 내가 내 스스로 관리해야 될 내 자리는 아닌 겁니다. 그러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죽는 사람이 “죽은 뒤에 어떻게 됩니까?” 그런 식으로 궁금하면 안 되지요. 본인이 죽고 싶어서 죽는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강제로 죽인다면 그 강제권을 인정해서 ‘아, 죽는구나. 죽고 난 뒤에 그 모든 상황은 나를 죽이는 그 분이 알아서 할 문제지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구나.’ 그렇게 되면 되지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너는 꿈도 없고 희망도 없느냐?”라고 막 묻고 따지게 되면, “내가 깔고 앉았던 그 방석같은 자리는 전에는 내 자리인줄 알았는데 내가 오히려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그 자리를 훼방했던 자리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를 떠나고자 합니다. 내가 내 엉덩이의 먼지를 털고 내 밑에 뭐가 깔려 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하고 보니까 그게 고린도전서 15장 22절의 말씀이 그 안에 깔려 있었던 거예요. 질식될 정도로 깔려 있었던 겁니다. 말씀의 자리에요. 아담 안에서. 내 자리가 아니고 성경대로 하면 누구의 자리인가? 아담의 자리에요. 죽은 조상 아담의 자리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에서 아담이 나오니까 자꾸 아담을 기억하려고 하는데 죽은 자에게는 죽음과 더불어서 기억도 다 부질없는 거예요. 기억하는 것조차 비현실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나와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니까 예수님을 기억하려고 하는데, 이 순신장군이야 수집해서 기억하려고 하지요. 하지만 그 이순신 장군이 이순신장군이 아닙니다. 본 사람이 있어야지요. 우리보다 일찍 죽었으니까.
마찬가지로 예수라는 분을 믿고 싶어도 우리는 뭘 기억을 해야 되는데 우리의 기억은 임의로 다 조작된 것이거든요. 조작된 이미지에 불과한 겁니다. 예수가 흑인인지 백인인지 황인인지도 구분도 안 되고, 키가 몇 센티인지 알지도 못하고, 그야말로 경상도 말로 지줌지줌, 각각 예수 상을 기억을 하는데 그 기억을 죽여야 돼요. 그 기억을 없애야 돼요. 우리는 예수님을 기억해서 믿을 권한이 없습니다. 그것은 본인이 본인에게 해대는 속임수에 불과한 겁니다.
예수 믿으라고 강요가 들어오니까, 예수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자기 속에 예수님을 기억하는데 그 예수를 도와지 꺼내놓고 그려보라고 하면 예수의 얼굴이 각각 다 다를 거예요. 자기가 전에 알던 남자들 인상가운데서 뽑아서 괜찮아 보이는 것을 그릴 겁니다. 키가 140도 안 되는 예수를 그릴 사람은 별로 없어요. 그러니 인간이 기억하는 그 자체를 뭘 로 바꿔야 되는가? 기억할 자격이 없을 정도로 우리는 이미 죽은 자라고 하는 거지요.
그러면 우리 몸이 내 몸이 아니라면 이 몸은 누구의 것인가?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 우리의 몸은 아담의 몸입니다. 아담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고 현재 내 몸이라고 여기는 이 몸을 가지고 살아 있어요. 우리가 아담과 분리되었다고 억지를 부리는 말도 안 되는 오해 속에서 이 몸은 옛 조상 아담의 몸이 아니고 내 몸이라고 우기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기는 것이고요. 아담의 몸, 아담의 DNA를 전수받아 놓고는 이것은 이름도 부모가 줬으니 내 몸이라고 착각들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죽은 자로 다루면 아담에서 새끼 친 모든 자손들도 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 작업을 하신 거예요. 죽은 자인데 왜 내 세포는 뛰는가? 세포가 멈춰야 죽었다고 하는 것은, 내가 내 몸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거기서 유발된 잘못된 논리에요. 논리자체가 거짓된 논리입니다. 말씀을 깔고 뭉개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로 보지 않고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현실로 보니까 ‘살아 있는 내 몸 가지고 내가 뭘 할 것인가?’ 이렇게 아이디어가 자꾸 돌아가니까 살아 있다는 것을 어떤 개념으로 하는가?
그냥 살아 있다, 가 아니라 일단은 ‘내가 살아 있다.’로 출발해서 ‘내가 살아 있는데 나처럼 되는 것을 보니까 너도 보니까 나처럼 살아 있네? 어? 나처럼 되는 사람은 다 살았네?’ 그렇게 되는 겁니다. 나처럼 되니까 살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떤 단어의 개념을 잡을 때 내가 느끼는 그 한계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않아요. 사랑이 뭐냐? 사랑은 내가 사랑이라고 느끼는 것이 출발점이 되어서 내가 느끼는 사랑에 포함되면 사랑이고 아니면 사랑이 아니라고 보는 거예요.
엄마가 애를 때리면 “엄마는 나를 사랑한다고 해놓고 왜 나를 때립니까?” 그러면 “너의 사랑은 뭐고 내 사랑은 뭔데?” 그것은 모르지요. 분명히 애는 아빠도 좋아하고 엄마도 좋아하고 둘 다 좋아해요. 애가 좋아한다는 그 속에 둘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손님이 물어요. 애를 힘들게 하지요. “너는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자기는 분명히 둘 다 좋다는데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는 거예요. 이것은 애를 힘들게 하는 겁니다. 얼마나 일방적입니까? 삽으로 이걸 퍼내야 돼요. 모든 것을 나로부터 시작하는 이것을 다 퍼내야 돼요.
그걸 퍼내지 아니하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 있는 존재고 아담이 죽었으니 그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자가 자동적으로 다 죽은 것’이라고 보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 대해서 우리가 동의 될 수가 없습니다. 20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되어 있거든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하니까 우리가 여기서 ‘잠자는 자’를 찾아내야 돼요.
그런데 나로부터 시작한 어떤 논리도 ‘잠자는 자들’이라는 말이 성립이 안 돼요. 설교시간에 잠을 자면 그것이 잠자는 자들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잠자는 자들’이라는 것은 다시는 깨어날 수 없는 자를 잠자는 자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잠든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요? 잠자는 자, 잠든 사람은 그 이후에 대해서 개입할 수 없습니다. 손을 놔 버려요. 잠자고 있으면서 30분 이내로 알람 울려서 깨서 내가 잠자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그렇지 않습니다. 잠 잘 때는 푹 자야 돼요. 다시 깨어난다는 보장 없이 그냥 팍 자야 됩니다.
그 잠자는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고 해서 잠자는 자와 살아났다는 것을 여기서 반대말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잠자는 것은 뭐냐? 죽은 자를 잠자는 자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몸이 죽은 자. 그러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하면 되는데 왜 잠자는 자로 이야기하느냐 하면, “네가 살아 있을 때도 네 몸이 아니고 죽어 잠자고 있을 때도 네 몸은 네 몸이 아니다.” 하는 겁니다. 죽은 자라고 해서 네 몸이 끝났다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죽은 것을 두고 잠자는 자로 일방적으로 낙인을 찍었다는 말은, 살아 있을 때도 네가 살고 싶다고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에게 말씀 가운데 너의 몸을 주물럭거리면서 다루기 위한 용도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붙이는 거예요. 잠자는 자는 죽은 자로 하고 잠자기 전에 있는 사람은 산자로 보겠다는 쪽이지요. 그런데 그 살았다는 말은 아담 안에서 죽은 그 상태를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 맘대로 개념을 붙여요.
우리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다루는데 인간들도 다루는 거예요. 주물럭 알지요? 돼지고기 양념으로 주물럭 할 때 돼지고기가 이미 죽은 자인데 “왜 자꾸 저를 건드립니까? 간지럽습니다.” 이런 돼지고기가 없잖아요. 그냥 주물럭대면 주물러지는 것처럼 주께서는 아담의 몸으로부터 그 모든 몸을 말씀에 의해서 주물럭을 만드는 거예요. 하나님은 셰프입니다. 요리를 하는 거예요. 자기 맘대로 갖고 노시는 거예요.
죽었다고 울고 있는데 죽은 것이 아니고 잠자는 자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잠자는 자로 규정하는 이유는 너를 살리기 위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아담을 만들었고 그리고 DNA를 가지고 아담 뒤에 모든 인간이 생산되도록 조치를 한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삽으로 자기를 파내세요. 말씀의 자리를 깔고 앉아있으면 안됩니다. 엉덩이로 말씀의 자리를 턱 깔로 앉아서는 “하나님, 살려주세요.” 해봤자 소용없습니다. “너의 그 덩치 치워라. 엉덩이 치워봐. 치워보면 원래 네 자리라는 것은 없어.” 그 자리가 말씀대로 진행되는 자리에요.
죽었을 때도 잠자는 자로 규정받듯이 죽기 전의 우리의 이 몸을 주께서 가지고 규정하시는 그 개념이 있어요. 그 개념이 있어요. 그 개념이 뭐냐? “너는 아담 안에서 이미 죽은 자라.”라는 통보를 말씀을 통해서 계속해서 부여하고 있는 겁니다. ‘아, 아담 안에서 죽은 자구나.’ 그러면 우리는 물을 수가 있어요. “우리가 지금 펄펄 살아 있는데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담 안에서 죽은 자로 규정합니까?” 그것은 너를 위함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함이라는 말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멀쩡하게 살아 있는 너를 아담 안에서 죽은 자로 규정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구 맘대로?” 그것은 하나님 맘대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기분 나빠요? 하나님 맘대로 우리가 죽으면 “죽은 것이 아니야. 잠자고 있다.” 이렇게 규정하고 살아 있으면 “너는 아담 안에서 죽은 자야.” 이렇게 규정하고.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무슨 이의를 걸 수 있습니까? 일방적으로 그렇게 했다는데.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증거하기 위해서 외부환경을 다 그렇게 몰아가겠다는데 이의 있습니까? 이의 있을 수가 없지요.
그런데 그 잠자는 자들 가운데서 첫 열매가 되었다는 거예요. 이제 오늘 설교의 핵심부분에 도달했는데요. 첫 열매라 하는 것은, 그 전에 예수님 빼놓고는 어떤 자도 부활의 첫 열매가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세자로 하면, 획일성이라고 해요. 열매의 획일성이에요. 획일성이라는 것은 오직 하나가 하나 되기 위해서 다양성이 미리 분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모든 것이 하나로 모아져야 돼요. 이게 획일성입니다.
획일성이라는 말을 썼는데, 사실 유일성이라는 말이 더 적당하지만 늘 상투적인 말이라서 획일성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주님은 핵심을 예수 그리스도로 잡고 나머지는 그냥 겉절이정도, 자체적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독자적으로는 의미가 없는 거예요. 오직 하나를 돋보이기 위해서 다른 것들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예수님의 획일성, 유일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천지를 창조했습니다.
그걸 다시 환수를 해요. 어디로 환수하는가? 예수 그리스도로 다시 끌어 모읍니다. 이것을 가지고 두 자로 ‘심판’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판을 새로 짜는 거예요. 판을 새로 짜는데 판을 새로 짜다 보니까 우리는 철거대상이 되는 겁니다. 철수돼야 돼요. 무엇을? 우리 것, 내 인생이 이렇다는 것이 철거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서울의 신림동이나 부산의 영도를 보면 보통 개발지역이 나오잖아요. 6, 70년대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어찌 보면 숨 막히고, 또 어찌 보면 굉장히 소박해 보이고 낭만적으로도 보이는 그 동네지요. 지금도 부산역 앞에 보게 되면 무슨 동인지 버스 타고 올라가다 보면 닥지닥지 붙어 있어요.
재개발 한다고 그걸 깡그리 다 철거해버리면 마치 바리캉으로 고등학생들 머리 밀면 갑자기 훤해지지요. 획일화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른손에 바리캉 들고 있어요. 완전히 백고 치듯이 밀어버려요. 나름대로의 추억이 있고 나름대로 어릴 때의 향수가 있는 그 모든 것을 백고 쳐버립니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고 다람쥐 쫒던 그 시절 있잖아요. 완전히 다 없애버립니다. 그게 심판이에요. 주께서는 모든 것을 예수님으로 환수시켜버리고 회수해버려요.
따라서 이런 회수에 대해서 마귀가 가만있겠어요, 가만있지 않겠어요? 가만있지 않지요. “예수님, 당신은 우리를 멸하러 왔습니까?” 하고 시비 걸고 대들었지요. 예수님께서는 모든 세상을 예수님의 획일성으로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이웃사랑을 해서는 안 됩니다. 도와줘서도 안 되고 동정해서도 안 되고. 동정하고 이웃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의 단결의 의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깡패들 모아서 “우리의 이 정든 달동네에서 절대로 물러서지 말자.” 데모하는 이것밖에 안돼요.
열매의 반대말이 뭐냐? 오직 첫 열매는 예수님뿐입니다. 성경의 개념은 뭐든지 반대말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어요. 열매의 반대말은 협동입니다. 협력. “지금 내가 열매인데 왜 나를 철거하느냐 그 말입니다. 거기에 대한 반발. 지금 내가 열매인데 하나님이 주신 그 열매를 갑자기 완전히 탈모시키고 없애버리는가, 이걸 왜 싸그리 깎아버리는가? 이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기도하다보면 그런 한 맺힘이 계속해서 분출돼요.
주께서 이야기합니다. “네 몸이 내가 원했던 그 몸이 아니거든? 네 몸은 아담 안에서 네 몸이 아니고 아담의 몸인데 그 죽은 몸을 대대로 인수인계 받고 있는 몸이라서, 그래서 그 몸 안에는 뭐가 있는가? 마귀와 결탁되어 있기에 예수님의 획일성에 대해서 강력한 반발을 보여주는 몸으로 너는 지금 마귀에게 다루어지고 있다.” 이것을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강력한 저항을 보이지요. “이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 몸이 요구하는 것은 그거예요. “탐을 내라.” 이것은 선악과 따먹을 때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탐을 내라. 그리고 네 것으로 만들어라. 원하는 것을 가져라. 쉬지 말고 탐을 내고 그래서 너의 것으로 전환시켜라.” 우리는 이 마귀의 명령에 항상 순종할 수 있는 몸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그것을 회수하십니다. 따지고 보면 얼마나 고맙습니까? 이 탐심에 시달리고 있는 몸을 주께서 죽은 것으로 규정시켜서 이것을 심판해주시는 거예요. “주님이여, 탐심을 냈습니다.” 하니까 주께서 “탐내지 말라.” 이렇게 나오시는 것이 아니고 “그래, 원래 죽은 몸은 탐내게 되어 있어.” 하고 이해해주시면서 죽은 자로 규정해주시니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어떤 개척교회 목사가 “주님이여, 제가 10년 동안 목회해서 교인 10명 모았습니다. 이렇게 게을러서 어떡합니까?” 하면 “그러면 소원이 뭐냐?” “50명은 되어야 교회 유지가 되니 50명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냐? 그러니까 너는 이미 죽은 놈이야. 그걸 희망으로 삼으니까 네가 죽은 놈이야.” 주께서는 죽은 존재라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10년 동안 10명밖에 안주신 거예요. “왜 우리 집에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습니까?” “네 몸이 죽었거든.” 죽었으니까 너에게서 아들을 낳게 해달라는 탐심이 나오게 되는 거예요. 이해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보고 아담 안에서 이미 죽었다고 하니까, 대체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이 살아 있는 몸을 죽었다고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잖아요. 살아 있는데 왜 죽었다고 하느냐? 그것은 죽었다는 개념이 달라서 그래요. 우리는 숨 쉬지 않는 것을 죽었다고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것을 죽었다고 보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증거로서 우리의 몸을 활용해 주시니까 이보다 더 고마울 데가 어디 있습니까?
살아가는 모든 모습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없고, ‘탐을 내자. 탐을 내는 것을 가져야 돼.’ 이러한 더러운 성질, 그 더러운 성질을 유감없이 뿜어내게 해주시니 그것으로 일괄적으로 “아담의 몸 안에 네 몸은 정상이 아니고 죽은 거야.”라고 규정해주기 위해서, 규정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규정에 합당한 증거들이 나오도록, 그 몸을 가지고 마음껏 탐욕에 유린되도록, 놀아나도록 조치를 해주시니, 모든 상황을 몰아가시니 아이고, 생각하니 감사하기 이를 데 없네요. 감사하기 이를 데가 없어요. “고마워라~!” 찬송이 절로 나옵니다.
얼마나 고맙습니까?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하니까 이게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는데 따지고 보니 죽은 것이 맞네요. 그리스도에 반대하니 죽은 것이 맞네요. 왜 그리스도에 반대하는 것이 죽은 것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첫 열매가 그리스도기 때문에 그래요. 비교해보라는 거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 첫 열매된 그리스도에 대해서 네가 네 몸을 통해서, ‘그리스도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있느냐, 아니면 네 몸을 그냥 유지하고 싶으냐’를 한 번 점검해 보라는 말이지요.
우리는 나에 대한 집착에서 무슨 수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이 나에 대한 배려인데. 나에 대한 변명이고 핑계로 일관하는데 거기서 “나는 예수님께 반대한 존재입니다.”라는 그러한 진지한 고백이 어디서 나와요?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만 첫 열매’라는 그 작업에 죽은 자로 관여된 것에 감사하자는 말입니다. 이야기를 오래 했습니다만 전혀 어렵지 않지요. 지금 출발이 뭐냐 하면, 내가 남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살아서 내가 나를 구원시키려고 하니까 출발점이 잘못되어서 그게 꼬여있는 거예요. 마귀 때문에 그게 꼬여 있는 거예요.
성경에 나오는 이웃사랑, 이웃을 동정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도와주고, 그 몸은 환수된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그 몸끼리만 그러한 관계가 성립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몸끼리만. 예수님의 몸으로 새롭게 바뀐 몸에 대해서는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도와주고, 어려울 때 관심 가져주고 위로하고, 그렇게 하라는 거예요.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그 몸에 대해서만. 내 몸을 내가 살리겠다는 그 몸은 절대로 사랑해서는 안돼요.
그래서 어떤 사람을 동정하고 사랑할 때, “나는 동정 받을 자격도 없고 사랑받을 자격도 없으니까 저에게 그렇게 신경 안 써도 됩니다. 굶어죽든 말든 신경 쓰지 마세요.”라는 말이 나오면 그 사람은 자기 몸이 그리스도 몸 앞에서 죄인인 것을 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획일화에 포함된 몸이기 때문에 사랑받을 권리가 있고 자격이 있는 거예요. “우리 같은 교인이니 서로 도와줘야 되지 않습니까?” 절대로 도와주지 마세요. 그거 사기꾼입니다. 절대로 사랑하지 마세요. ‘굶어죽어도 그냥 두고 볼 거야. 굶어죽는다고 해도.’ “디모데후서에 ‘많이 가진 자가 어려운 곳에 나눠주라.’ 했는데, 그래서 구원의 덕을 쌓으라고 했는데 덕 안 쌓을 거야?” “덕은 불교가서 많이 쌓아라. 난 안 쌓을 거야.”
도와주게 되면 협동이 되고 협력이 돼요. 그것은 우상이 되는 겁니다. 교회라는 이름의 우상이 돼요. 그것은 그리스도 몸의 획일화가 아니라 교회의 획일화가 돼요. 교회의 권력이 됩니다. 권력단체로서의 교회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소환시키는, 환수시키는 심판을 행사하기 위해서 구약 때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라는 것을 만들었어요. 유일하게 하나님 인정하는 거룩을 나타낼 성막 안 지성소에 안치할 언약궤로 만들었습니다. 특징이 뭐냐? 언약궤 앞에서 모든 인간은 다 죽는 거예요.
심지어 대제사장도 그냥 건성으로 들어가면 죽습니다. 그래서 언약궤 앞에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갈 때는 어떻게 하는가? 진즉부터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그런 티, 그런 증거물을 가지고 언약궤 앞에 나서야 돼요. “우리는 살아온 모든 것이 지금 주님 보시기에 죽은 모습입니다.” 하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물을 안고 언약궤 앞에 가야 돼요. 그게 7월 10일 대 속죄일에 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흠 없는 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는데 그 피는 먼저 경유하는 곳이 있어요.
성막 안에 뜰이 있는데 그 뜰 안에 제단이 있고 그 제단에서 바쳐진 제물이 흘린 피, 숫염소나 숫양의 피를 가지고 제사장은 언약궤 앞에 서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인간 쪽에서 나오는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어요. 스스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자도 자기 몸 가지고 자기가 관리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죽은 몸이 백날 해봐야 죽은 짓 밖에 더 나오겠어요? 죽어야 될 짓만 자꾸 증거물로 내놓을 뿐이에요. 안 된다는 말이지요.
잘 이해를 못하시는 것 같은데 다니엘 3장 25절에 보면 아주 분명합니다. 다니엘 3장 25절에 다니엘의 세 친구가 나오지요. 다니엘의 세 친구가 자기가 만든 법을 어겼다고 해서 느부갓네살이 죽이는데 일곱 배나 더 세게 해서 용광로에 다니엘의 세 친구를 집어넣습니다. 이 말은 뭐냐? 인간은 아무리 살았다고 하지만 불에게는 지더라. 불속에서조차 살 수는 없다는 자기한계를 인간이 스스로 만든 거예요. 잘 들으셔야 돼요. 불로 죽임으로 말미암아 저 불 속은 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곳이에요.
‘저 불속에까지는 못 들어가.’라는 것을 인간이 이미 정해버렸어요. 그 불속에 던져졌거든요. 그런데 그 불속에서 세 명이 살아 있었어요. 사실은 주님과 합해서 네 명인데 그 불속에 살아 있는 그 네 명으로 인해서 불 바깥에 있는 모든 사람은 불이라는 것을 통해서 이미 불속에 포위된 셈이 되어버렸어요. 인간이 백날 노력해도 인간의 몸은 불을 이기지 못하더라. 그런데 그 불을 이긴 새로운 몸이 등장하더라. 그것을 너희가 확인해 봤잖아. 불속에 넣어봤잖아.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있으니까 불에도 견디더라.
어쩜 이렇게 견디지요? 희한하지요. 기이하지요. 제가 시비 거는 것은 이겁니다. 자꾸 성경말씀을 기억하려 하지 마세요. 이걸 자꾸 기억하려 하니 흉내만 낼 뿐인데 성경말씀을 기억하는 것은 죽어야 될 자가 내는 죽음의 기억에 불과해요. 말씀에 위배되는 마귀 편에 선자의 기억일 뿐이라는 말이지요. 예수가 되었든, 성령이 되었든, 삼위일체가 되었든 그것은 관계없이 전부 다 썩어 죽어야 될 기억들이에요.
다니엘 세친구도 분명히 뭔가 기억이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주님께서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 일하시는 것은, 그리고 고마운 것은 다니엘 세 친구를 말씀에 입각해서 그들의 인생을 생생하게 그렇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실제로 죽였고, 실제로 불속에 들어갔고, 불속에 들어갔는데 살았고, 따라서 다니엘 세친구의 평소의 몸은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몸이 아니고 기이한 몸, 이상한 몸, 낯선 몸이에요.
또 예를 들면, 변화 산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대표로 올라갔습니다. 그 때 갑자기 예수님이 해같이 변했고요, 뿐만 아니라 함께 등장한 모세와 엘리야도 해같이 빛났습니다. 베드로는 굉장히 기이한 몸으로 봤습니다. 왜? 자기 몸과 다르니까. 베드로의 몸은 평소에 다른 몸과 비교할 때 네 몸이나 내 몸이나 똑같은 사람 몸이라고 했지만 변화 산에서 자기 몸은 아무런 쓸데없는 몸이었던 거예요. 아무런 쓸데없는 몸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는 같은 인간이면서도 다른 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다른 몸으로 넘어가는 경계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를 흘려야 비로소 넘어가서 얻을 수 있는 그 몸을 미리 당겨서 보여준 게 된다는 말이지요. 오늘 읽었던 이 본문이 장난입니까? 이게 소설이에요? <채식주의자>같은 한강이라는 작가가 지은 소설밖에 안됩니까? 소설은 낙서에요. 소설이란 인간이 밀폐된 공간 안에서 그 벽에 한이 맺혀서 낙서를 해놓은 그것이 문학이에요. 그게 노벨문학상이라니까. 자기 한풀이에요. 여기까지 나는 여기까지 왔노라.
아담의 몸이 내뿜는 죄의 파편들이 문학이고, 그게 미술이고, 음악이고, 건축이고, 디자인이고, 예술이에요. 나 안 죽었다는 그 말이거든요. 나는 진선미를 추구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존재라는 그 말이거든요. 예술뿐만 아니라 과학도 마찬가지고 철학도 마찬가지에요. 폐쇄된, 밀폐된 공간에 있습니다. 그 밀폐된 공간의 벽을 형성하는 암굴 같은 곳, 막장이지요. 그 막장에 서 있는 것은 ‘죽으면 안 돼.’ 이것들이 온 벽에서 다 피어나요. 예배당도 눈에는 안보이지만 ‘죽으면 안 돼.’가 좍 깔려 있다고 보면 돼요. ‘죽으면 안 돼. 기도해서 더 살아야 돼.’ 이게 좍 깔려 있다고요. 그것은 악마의 전당입니다.
열매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얻을 수가 없어요. 이쪽에서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굉장히 미미한 존재에요. 그런데 그 많은 덩치 큰 모든 것들을 예수님께서는 미미한 존재로 다 환수시킨다는 그것을 제가 심판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31절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겨자씨 한 알은 굉장히 작은 씨앗이에요. 미미한 겁니다. 주님께서는 이 천지, 거대한 우주를 그 미미한 존재, 예수 그리스도로 환수시키고 한 알의 밀알 같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그것을 확대시켜 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로 확장시켜 나가버립니다. 퍼뜨려버리지요. 자신이 갖고 있던 새로운 몸을 퍼뜨려버리면 우리는 뭐냐? 잠자는 자가 되는 겁니다. 전에는 우리 몸이 주의 말씀을 엉덩이로 깔고 앉았지만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되면 이제는 반대가 되어서 우리의 죽어야 될 이 몸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서, 오늘 본문 말씀을 우리에게 뒤집어씌움을 당하게 되지요.
그러면 이제는 나의 자리라는 것이 없고 말씀이 말씀대로 실행하기 위해서 나를 주물럭처럼 다루는 그 현장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개인적으로 나는 인생을 이렇게 살았다, 어느 학교를 나오고, 얼마나 사업을 잘하고,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아담 안에서 죽은 자였는데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새 몸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의가 방출되는 몸으로 다루어진다. 이제는 용광로 불에 들어가도 괜찮고, 저 심해의 바닷물에 빠져도 괜찮고, 구름위에서 공중폭발 되어도 괜찮고, 화장해도 괜찮고, 묘지 써서 묻어도 괜찮고, 납골당에 가루로 넣어도 괜찮아요.
어떻게 죽는 것도 괜찮다면 죽기 전에 어떻게 살아가는 그것도 괜찮아요. 치매 걸려도 괜찮고, 암 걸려도 괜찮고, 피부 암 걸려도 괜찮고, 어떻게 살아도 괜찮다면, 암 걸리기 전의 살아 있는 그 모습이 어떻게 살든 괜찮은 것이 돼요. 미장원에 가서 머리 잘 못 나와도 괜찮고, 옷을 사이즈 44로 샀는데 몸에 안 맞아도 괜찮고, 애가 말썽부려도 괜찮고. “주님 말씀대로 하시옵소서.”
끝으로 로마서 5장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로마서 5장은 오늘 본문을 그대로 겹쳐놓았어요.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인데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모든 사람을 통치한 것처럼 이제는 한 사람 의인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몸이지요, 새로운 몸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토해진, 예수님에 의해서 확장된, 새롭게 분출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인으로 이 땅에 뽑혀 나왔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을 것이라, 생명에 이르느니라. 19절에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따라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죄가 넘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이 일방적인 작업을 일방적으로 우리 인생에 퍼부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대로 수용하시면 됩니다. 내 인생이라는 것이 없어요. 자신의 운명을 걷어 치워버리세요. 나의 운명마저 차버리세요. 그것은 내 기억 속에 있는 운명이니까 그것 없애버리세요. 운명을 안 따져도 괜찮아요. 그 운명 없어도 괜찮아요. 왜? 이미 나의 있음 자체가 예수님의 자기 의를 증거하기 위한 운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뭘 특별히 하라는 것이 없어요. 성경에 뭘 특별히 하라는 것이 없습니다.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서 네가 지금 움직거리고 있음을 아셔야 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추억이 아니고 성령이에요.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밑에 있는 것을 위로 하고 위에 있는 것을 밑으로 해서 바뀐 사실을 매일같이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 인생에 실패란 없습니다. 그리고 성공도 없습니다. 있다면 주님이 성공작, 주님의 열매인 우리밖에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누굴 모델로 삼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저 사람처럼, 이 사람처럼, 그것 자체가 아담의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의 모습인 것을 저희들이 새롭게 인식하게 하여주시고 그 가운데서 그렇게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 그것이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의 영에 의해서 이미 부활되었기에 그런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우리 몸이 정말 기이한 몸인 것을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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