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강-고전 15장 25-28(사망이라는 원수)160529-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5장 25-28절입니다. 신약성경 282페이지입니다.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방금 읽은 본문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이야기를 우리 이야기로 하려면 절차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경유해서, 그 말씀의 미끄럼틀을 타고 그 다음에 나에게 도착해야 됩니다. 예수님 쪽에서 뻗어 나온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는 겁니다. 그 계시인 본문을 우리가 지금 보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계시 앞에서 우리는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서 조작해내고 만들어내는 나름대로의 나를 위한 계시는 여기서 멈춰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계시 앞에서 내가 기대하는 나의 희망과 나의 계시, 나의 미래상, 이런 것은 접어야 돼요. 그런데 평소에 보게 되면 인간이 하나님을 거론하는데 그냥 하나님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라고 언급하게 되면 그 뒤에 딸려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이렇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하고 하나님과 그 뒤에 (더하기) 나의 계시를 연결시켜버립니다. 흔히 간증이라는 것이 그런 거지요. 하나님의 뜻은 상관없고 “내가 희망하는 대로 그렇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아는 신의 계시다.” 이렇게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조작해내는 신의 계시라 하는 것은 이런 거예요. 내가 할 것은 해보고 안 되면 보충한다고 하나님을 불러들이고 끌어들입니다. 자기가 해보고 안 되면. 자기 밑천 들여서 회사경영해 보다가 잘 안될 때는 은행 빚 끌어당기고 친한 동창생 만나서 동업을 할까, 그렇게 당기듯이 항상 자기 힘이 부친다 싶을 때, 이미 계시의 틀은 자기가 만들어 놓았어요. 이런 저런 방식의 인생 틀을 만들어놓고 좀 무리다 싶을 때 하나님을 거기에 동원시키는 겁니다. 이것을 자기고 저는 하나님과 자신의 합자회사라 하는데, 합자영화, 합자드라마가 아마 적당할 거예요.
거기서 뭐가 빠지는가 하면, 예수님이 빠져버립니다. 특히 예수님의 죽으심이 빠져버려요. 고린도전서 15장을 보게 되면, 예수님의 죽으심 빼놓고는 예수님의 부활을 언급할 수가 없다는 것이 사도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21절에 보면,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망이라는 것을 언급하고, 모든 인간은 죽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의 이야기가 예수님은, 예수님은, 예수님은,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죽었다는 말은, 내가 만들어낸 신의 계시도 같이 죽어야 돼요. 인간이 죽으면 신도 같이 죽는 겁니다. 사람들이 신을 찾고 예수를 찾는 이유가, 자기가 엄연히 살아 있다고 여기기에 자꾸 자기가 미흡한 것을 보충하려고 교회도 오고 자꾸 신을 찾는데, 교회 오는 것은 자기가 죽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와야 돼요. 살고자 하면 이 시간 이 자리에 있으면 안돼요. 살기 바쁜데 왜 이 자리까지 옵니까? 살기 바쁜데 이 자리까지 왔다는 것은 어떤 꼼수가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살고자 하는 것이 나의 본성과는 분명히 틀린 것이다. 쉽게 말해서 지저분한 것이다. 그 살고자 하는 마음자체가 지저분한 거예요. 그것을 성경에서는 속되다, 또는 세속이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람이 지저분해서 지저분한 것이 아니고 이모저모로 살아보려고 하니 지저분해지는 거예요. 지저분해진 것을 다리미질해서 하나님 앞에, 또 남 앞에 거룩해보려고 하니까, 그런데 그게 잘 안되니까 “지저분한 것은 내가 저질렀는데 깨끗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좀 처리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계시를 조작해서 만들어내는 겁니다.
우리가 왜 그렇게 자기를 위한 계시를 만들어내는가 하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니까 그런 것인데요,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무엇을 생각하는가? 내가 없어지는 것을 죽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죽음이 아니고 생명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은 신의 계시가 아니에요. 내 속에서 말하는 마귀의 계시가 우리 몸을 통해서 그렇게 나타났고 우리는 날 때부터 평생 지금까지 휘둘려 살아온 겁니다. 속은 거예요.
조희팔만 속인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 잘 모르지요? 그 사기꾼, 세상자체가 전부 다 조희팔세상이에요. 왜 조희팔에게 말려드는가? 살고자 하니 그런 거예요.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시입니까? 계시라고 우기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을 안 봐서 그래요. 성경을 보면 내가 사는 것이 신의 계시가 아닙니다. 오히려 살아 있는 이것이 말썽을 일으켜요. 내가 살아 있기에 내 위주로 계시를 만들었고 그 계시가 진짜 세상을 운용하는, 활용하고 있는 진짜 예수님의 계시를 지금 훼방하고 있습니다.
훼방한다는 그것을 일본말로 ‘겐세이’라고 하는데 남자들은 다 알아요. 당구용어거든요. 자신이 쳐야할 경로를 방해하는 것을 두고 겐세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 존재가 주님이 하신 일을 겐세이하는 겁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겐세이라고 하고 싶은데, 훼방하고 있는 거예요. 살려달라는 겁니다. 주께서는 “뭘 봐서 살려줘? 네가 지저분한데.” “지저분한 가운데서 일부는 또 고상한 게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우기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인간이 살고 싶은 욕망이 우선이기에 어쨌든 살고 싶어서 온갖 아양을 다 떠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런 게 입에서 막 나오는 거예요. 이게 천주교의 본류입니다. 이게 불교의 본류고 기독교의 본류에요. 진짜 꿍꿍이는 이러나저러나 살고자 하는 그것, 그것이 본심인데 아닌 척 하면서 거룩의 일꾼인양 행세하는 것, 이게 기독교, 불교, 천주교, 모든 종교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알지 못하고 자기가 살고자 하는 욕망은 뒤로 빼돌린 채, 자기가 살고자 하는 욕망은 은근히 들키지 않은 채로 신에게 아부함으로써, 내가 할 수 있는 것까지는 해보되 미비한 것은 신의 자비로 보충함으로써 내가 일찌감치 구축한 나를 위한 계시가 실현되기를 간곡히 소망하면서 교회를 찾아 나오는 겁니다.
그렇게 나오는 사람에게 저는 묻고 싶어요. 오늘 본문 26절에 보면,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원수는 사망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해석해보라고 묻고 싶습니다. 원수가 사망이랍니다. 객관식 문제를 낸다면, “다음 중 우리의 원수는 누구입니까?” (1) 사기꾼. (2) 북한. (3) 새누리당을 중심으로 한 대통령.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4) 나에게 잔소리를 해대는 부인. 혹은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 (5) 사망.
사망을 지목할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원수라는 것이 실체가 있는 대상일 경우에 원수라고 보거든요. 내가 실체가 있는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래요. 나에게 원수라고 하는 것은 얼마 전에 내 돈을 떼먹고 도망친 그런 사람이라고 보는 겁니다. “감히 내 것을 건드려?” 그렇게 돼요. 자식들 결혼해서 애먹이면 뭐라고 합니까? 나이 들어 황혼이혼을 할 때 아내들이 하는 소리가 뭡니까? “이 웬수야!” 하지요.
쉽게 말해서 살고 싶은 나를 왜 건드리냐는 말입니다. 거기서 계시가 나온다니까요? 성경을 천 독, 만 독하면 뭐합니까? 모든 성경의 해석은 자기가 구축한 데서 뿜어 나오는 욕망으로 다 겐세이 놓아버리는데, 훼방놓아버리는데 성경을 보면 뭘 합니까? 요한계시록을 만 독을 한들 뭐 합니까? 신천지밖에 더 나와요? 신천지에서 하는 요한계시록 해석이 뭐냐 하면, “우리의 원수는 당신을 힘들게 합니다.” 그런 쪽이에요. 그 자체가 마귀의 계시라니까요. 마귀의 해석이에요.
성경은 이겁니다. “내가 너보고 죽었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좀 죽은 그 입 좀 다물어라.” 왜 죽은 자가 그렇게 말이 많으냐는 거지요. 죽은 자가 왜 계시를 뿜어내요, 죽은 자가! “부활해 봤어?” “아닙니다.” “그러면 죽은 것이 맞네. 왜 네가 말이 많아?” 우리는 살면서 말이 굉장히 많아요. 좀 더우면 덥다고 말이 많고 추우면 춥다고 말이 많고.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사망이 원수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돼요? 우리 원수는 사망이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됩니까? 해석불가지요. 해석자체가 안되지요.
이게 신의 계시에요. 이게 진짜 계시입니다. 우리의 원수가 사망이라고. 그러면 우리가 어느 자리로 이전을 해야 되느냐? 내 원수는 내 돈 떼먹은 사기꾼, 내 원수는 북한, 이런 식의 현재의 내 위치, 내 자리를 고수할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서 사망의 원수가 보이는 그 자리로 이동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이사를 가야 돼요. 무슨 수로 이 자리를 스스로 포기합니까? 안됩니다. 포기할 수가 없어요. 할 수가 없지요. 어디에 가봐야 내가 있으니까.
그러면 현재의 나의 자리가 잘못되었다. 네 자리를 포기하고 다른 데로 이사 가야 한다고 한다면 우리 속에서 뭐가 나오는가? 대항이 나와요. “내가 뭐가 잘못되었는데? 뭐가 잘못되었기에, 현재 내가 딛고 있는 이 기초자체가 문제가 있단 말입니까? 최선을 다해서 바르게 살면 되잖아요. 성실하게 살고, 착하고 바르게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살고, 믿으라고 하는 것은 다 믿고, 지키라는 것은 다 지키면 되잖아요. 왜 이 자리자체에 시비를 걸고 문제가 있다고 합니까?” 라고 물으면 주님은 이렇게 합니다. “네가 너를 알아?”
네가 너를 아느냐는 말이지요. 네가 너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렇게 중얼대느냐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 자리에서 내가 누구라고 확답을 내릴 수가 없어요.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우리가 생각해 낸 현실 속에서는 우리가 날마다 달라집니다. 변화해요. 변화하는 줄 알면서도 여기서 억지가 들어가고 무리수가 들어가요.
예를 들면, 한 달 백만 원으로 살던 사람이 있어요. “나는 백만 원만 있으면 살아.” 어디서? 우간다에서. 어디서? 에티오피아에서, 나이지리아에서. 백만 원만 있으면 충분히 살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해서 강남에 살게 되었더라. 교회 어떤 모임에 나갔는데 어떤 집사님이 “실례지만 집사님은 한 달 수입이 어떻게 됩니까?” “백만 원인데 잘 살아요.” 그러면 다른 사람 듣기에 앞뒤가 연결이 안돼요.
백만 원인데 지금 살아요, 가 듣는 사람에게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말하는 그 사람은 순수한데. 그 사람이 우간다에서 온지 얼마 안 되어서 그래요. 좀 지내다 보면 내가 백만 원짜리 인생이 아닌 것을 본인이 저항을 해요. 왜? 주변 사람들이 천만 원짜리거든요. 한 달에 천만 원짜리로 살게 되면 그저 숨은 좀 쉰다. 이런 식으로 제일 하질이 월 천 만원 수입으로 사는데. 그걸 보는 순간 전에 백만 원짜리 나는 내가 아니고 천만 원 짜리정도 되어야 그게 나라고 변동을 시도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사람은 환경 따라서 본인을 수시로 변장하고 위선을 떱니다. 내가 누군지를 모른다니까요. 내가 누군지를 모르면서도 어떤 억지를 부리는가 하면, 어떤 동일성을, 나, 자아라는 동일성을 자꾸 만들어내려고, 사수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 동일성이 뭐냐? 하나님의 원수가 돼요. 이게 주님의 원수입니다. 동일성은 예수님만 이야기할 수 있어요. 아무도 인간은 자기에 대해서 자기를 모릅니다.
그런데 모르면서도 이게 나야, 라고 유지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그냥 변화하는 데로 달라지면 되는데 내가 나를 관리하려고 덤벼드는 겁니다. ‘나는 이정도 돼야 돼. 나는 이렇게 되어야 해.’ 한 5천명 모이는 교회 다니다가 3명 모이는 교회에 가게 되면 혹 등록하라고 할 까봐서 얼른 내빼서 도망칩니다. ‘나는 적어도 5천명교회의 장로인데 3명 다니는 교회는 안 되지.’ 똑같은 신체, 몸을 가지고 행동을 해도 나에 대한 규정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상황 따라서 나에 대한 것을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윤곽이 잡히는 겁니다.
말을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쉽게 해서 이렇습니다. 평소에는 내가 누군지를 생각을 안 해요. 의식도 없어요. 그러나 내가 익숙한 환경이 아니면 그 때 등장하는 것이 나는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 돼. 가 윤곽이 잡히면서 그게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원수로 포착이 돼요. ‘내가 이 정도는, 내가 이 정도는 ……’ 그게 하나님의 원수 되는 공식입니다. ‘나는……이다.’ 라고 할 때 그 ‘……’에 해당되는 부분은 여러분 마음대로 써보세요.
그거 몇 년 지나면 다 바뀝니다. 사람이 여럿이 있으면 견디지요. 그러나 혼자 있으면 못 견뎌요. 참 인간이라는 것이 상황 따라서 같이 고생하고 같이 배고프면 며칠 더 견딥니다. 그런데 혼자 왕따 되면 못 견뎌요. 자살하든지, 그런 생각을 해요. 자기를 그냥 치워버릴 생각부터 먼저 합니다. 똑같은 나인데 환경 따라 달라져요. 배경 따라 색이 달리 보이게 되어 있어요. 이게 게슈탈트심리학에 나오는 겁니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다른 것은 있어도 마치 없는 것처럼 전혀 기억나지 않아요. 얼마나 인간이 일방적으로 자기보고 싶은 것, 쉽게 말해서 내가 알고 싶은 것, 더 쉽게 말해서 내가 욕망하는 것,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것을 보충하는 식으로 모든 행동에 나서게 되어 있어요.
보충해서 어떻게? 보충하게 되면 고대했던 나의 이미지가 손에 잡힌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전부 다 자기생각밖에 없어요. 나머지 생각은 뭐냐? 나머지 생각은 전부 다 지저분한 생각이에요. 남편이 어떻고, 우리 애가 어떻고, 남편이 어떻고, 우리 집안이 어떻고, 교회 문제생긴 것이 어떻고, 전부 다 지저분한 거예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지요? 황사가 어떠니, 북한의 핵문제가 어떠니, 왜 일어나면 안 되는데요? 조희팔이 등장해서 사기를 치고, 왜 그런 일은 일어나면 안 되는데요?
어떤 검사장이 백억을 벌고, 왜 백억 벌면 안 되는데요? 저런 인간은 조들호가 나서야 된다고. 조들호가 나서든 누가 나서든 그 일은 일어났잖아요. 이미 일어났다는 말이지요. 왜 안 되는데요? 내가 만든 계시에 본인 폐쇄적으로, 지금 자폐증환자로 지내고 있어요. 내가 만든 계시에 스스로 포로 잡혀 있어요. 예수님은 간섭하지 말고 내가 부를 때나 오라는 거예요. 내가 빡세게 기도할 때나 찾아오고 그렇지 않을 때는 간섭하지 말라는 거예요. 내일은 내가 알아서 하되 실수하거나 미흡할 경우에나 뒤치다꺼리나 주님이 알아서 해달라는 거예요. 기도는 빡세게 해줄테니.
“왜 그렇게 해야 되는데?”라고 물으면 “그거야 내가 살아야 되니까 그렇지요. 내가 여기 있으니 그렇잖아요.” “그게 뭔데?” “이게 생명입니다.” 인간들은 이렇게 하지요. 자기가 만든 계시 안에서.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그게 생명이 아니라는 겁니다. 처음부터 이야기가, 계시가 틀어져 있어요.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채운 겁니다. 지금 인간들이 엉뚱한 곳에 와 있어요. 요한일서 2장 2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같이 성경 보는데도 이런 말씀은 왜 안 보이는지 몰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한 것이 있는데 그게 ‘영원한 생명’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이 뭐냐? 우리한테는 생명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한테는 생명이 없으니까 살려고 하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이 말씀은, 살려고 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너는 살 필요도 없다는 거예요. 왜? 내가 살려주니까. 깔끔하지 않습니까? 깔끔하지요. 더덕더덕 붙어있지 않지요. 깔끔하잖아요. 더 깔끔한 것 알려드릴까요?
성경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26장 3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우리가 속해 있는 세상은, 베드로가 속해 있는 세상은 배반의 세대에요. 모든 것이 겐세이 놓는 세계에요. 주님이 하는 것에 대한 배반 외에는 할 줄 모르는, 그것만 익히고, 그것만 습득하고, 양육 받고, 그것으로 교육받은 세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입에서 뭐만 나오면 전부 다 주님에 대한 배반이고 겐세이고 훼방이고 방해에요. 주님의 원수입니다, 우리가. 왜? 내가 살아야 되니까.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어요.
제가 수만 번 이야기한 것이 뭐냐? 십자가를 생각하라고. 오죽하면 마을 이름도 십자가마을이겠어요. 십자가를 생각하라는 말은, 당신은 십자가에 의해서 이미 좀비입니다. 이미 죽은 자에요. 자기가 죽어 있으면서도 살아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식스센스> 그 영화의 마지막 반전밖에 없을 거예요. 그 영화에서 부르스 윌리스가 ‘내가 죽었네?’ 자기가 죽은 것도 몰랐다가 마지막에 알아요.
죽었으면 숨을 안 쉬어야 되는데? 아니에요. 예수님의 계시에서는 죽은 자가 숨을 잘 쉬어요. 주님의 세계에서는 죽은 자가 설치기는 그렇게 설치고, 나대기도 그렇게 나대고, 촐랑대기도 그렇게 촐랑대요.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보세요. 얼마나 촐랑댑니까? 죽은 자기 때문에 자기 의를 놓치지 않으려고 하고 죽은 자기 때문에 성화가 생기고 죽은 자기 때문에 교회 다니는 거예요. 죽은 자기 때문에 교회 가고 성당에 가는 거예요. 지저분해도 봐달라는 거예요.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우리의 원수는 사망입니다.” 이 간단한 명제, 아주 간단한 공식이에요. 우리의 원수는 사망입니다. 풀이하세요. 그걸 납득되도록 이해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제가 묻는 것만이 아니고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의 사망은 특정 실체의 대상물이 아니고 사망이 우리의 원수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설명해보세요. 설명하려면 우리의 자리를 이동해서 떠나야 돼요.
살고자 하니까 가짜 계시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내가 살고자 하는 것이 기본이 되니까 자꾸 신의 계시를 왜곡해서 겐세이를 놓고 헛된 망상들을 하는 거예요. 어린 애들 보세요. 어린 애들이 한 6개월 지나면 딸랑이를 흔들면서 놀아요. 4개월쯤에는 자기 팔을 흔들고 5개월쯤이 되었을 때 엄마가 딸랑이를 손에 쥐어줍니다. 그러면 딸랑이를 흔드는 것이 아니고 전에 자기 팔을 흔들던 그 연속성, 동질성에 딸랑이 하나 덧붙인 것뿐이에요. 그런데 제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6개월쯤 되니까 스스로 딸랑이를 흔든다고요.
이미 자립한 거예요. 흔들 줄 안다, 가 되는 겁니다. 딸랑이가 안 예쁜가? 굉장히 예뻐요. 그래서 어린애는 주위의 매료되는 것에 대해서 본인의 본능이 거기에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온 천지에 선악과나무입니다. 내가 누구냐, 는 아직 구체적이 아니에요. 내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을 얼마만큼 내가 차지해서 내 소유로 만드는가, 내 마음에 매료된 그것을 언제 내 것으로 현실화시키는가, 거기에 온 에너지를 다 투자하고 소비합니다. 어린애입니다. 그게 어린애에요.
스님이 머리를 깎고 중 복장을 해야 살 수가 있어요. 머리 안 깎고 중 옷 안 입고 있으면 중 아니라고 시주를 안 해주거든요. 신부들이 유니폼을 입어야 신부로서 권위가 서요. 그거 안 입으면 별로 좋지 않게 보는 겁니다. 그게 뭐냐? 퇴행이에요. 유아기속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내 바깥의 아름다운 것을 내 것으로 가져와 버리면 그 세계가 단층의 세계, 층이 하나밖에 없는 세계가 되어버립니다.
베드로는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내가 매료되고 고대하고 있는 세계에 메시아가 왔다고 하니 그 때부터 베드로는 기분이 째집니다. 이제는 주님한테 잘 보이기만 한다면 이제는 이 세상에 속해 있는 나의 욕망을 신의 자비와 축복으로 마저 보충하고 채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예수님에게 모든 힘을 다 쏟았습니다. 거기다가 네가 수제자, 라는 소리까지 하니 기분이 업 되었지요.
그런데 그 수제자는 배신을 대표해야 될 수제자라는 것을 상상도 못하고, 주님에 대해서 배반해야 될 배반자의 대표 격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하늘나라 가면 좋은 자리에 앉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미리 이야기했습니다. 너의 세계는 배신의 세계, 배반할 수밖에 없는 세계 속에 너는 그동안 속해 온 거예요. 그 안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동질성을 사수하고 지키려고 목숨까지 내놓았습니다. 제 목숨 바칠 테니 이 몸 주님과 함께 주님 가신 나라 가게 해달라고 목숨까지 내놓는다 하지요.
이게 바로 어린애 같은 사고방식입니다. 내가 보고 있는 이 가시적 세계 외에는 다른 세계가 없다는 것, 이게 현실의 전부라는 겁니다. 평소에 닭을 볼 때 원래 닭은 우는 것이고, 나중에는 잡아먹는 것이고요. 나중에 치킨 집에서 프라이드치킨으로 변모되는 그것이 닭이지요. 왜? 나에게 속해 있는, 내 곁에 있는 가축일 뿐이에요. 그런데 그 닭이 웁니다. 어디에 보조 맞추어서?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고 나자 닭이 맞춰서 울어버리지요.
닭이 울고 난 뒤에 그 때부터 내가 했던 내 시간이라 하는 것은 애초부터 없었어요. 시간은 예수님의 말씀이 임할 때 그 모든 시간들이 나의 시간, 내 위주의 시간, 나를 위한 시간이 아니라, 나의 동질성을 지키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이루는 말씀의 세계에서 흘러가는 시간인 것을, 그것을 닭이 울자 베드로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 조건이 세 가지에요. 베드로는 배반해야 되고, 그 다음에 닭이 울어야 되고, 그 다음에 네가 울면서 회개해야 되고, 이게 삼종세트에요. 배반해야 되고 닭이 울어야 되고 그 다음에 회개해야 되고.
이 세 가지, 베드로가 울고 나서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이미 베드로가 아무렇지도 않을 때, 그냥 평범한 일상의 생활을 할 때 예수님께서 자신의 말씀에 입각해서 베드로를 거기에 배치해놓은 거예요. 베드로는 뭐냐? 소품입니다. 하나의 벽돌이에요. 처음부터 모든 것이 예수님의 세계였던 거예요.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아남을 위해서 이미 형성된 세계에 대해서 인간들은 자기 동질성을 고집하면서 나의 세계라고 따로 챙겨놓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된 겁니다.
그 원수 배후에는 지옥의 권세, 마귀의 권세, 악마의 권세가 인간을 그렇게 길들여왔지요. 사도바울의 복음에서는 그것을 한자로 이야기해요. 그것을 육이라고 합니다. 육의 반대말은 뭐냐? 영, 부활의 세계를 영이라 해요. 육의 세계는 나의 동일성이 버티고 있는 세계입니다. 나의 동일성이 버티게 되면 내 입에서 나를 위한 계시가 드라마처럼, 연극처럼 쏟아져 나와요. 그 육의 세계의 자체 내에 딜레마가 있습니다.
그 육의 세계의 딜레마에 대해서 십자가마을에 글을 올려놨어요. 올려놔도 보는 사람이나 보고 안보는 사람은 보지도 않지만. <채식주의자>라는 소설의 평을 올라놨습니다. 성은 한, 이름이 강, ‘한강’이라는 작가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문학상을 받았어요. 그 책이 <채식주의자>에요. 수상소식 들리자마자 그 책을 사기 위해서 대구교보문고에 갔습니다만 벌써 재고가 다 떨어지고 없었어요. 거리가 머니까 가는 동안 다 팔린 거예요.
왜 그 책을 사보려고 했는가 하면, 상을 줬잖아요. 상을 줬다는 말은, “한강이라는 작가 당신이 우리의 평소 잠재되어 있는 모든 사고방식을 이렇게 잘 꾸며서 작품화시켜서 너무 고맙습니다.” 하는 뜻에서 상을 준 거예요. 우리나라 문학상이 아니고 전 세계의 지식인들이 모여서 최고의 작품이라고 상을 준 거예요. 그 책이 최고의 작품이라고 상을 받았다는 말은, 한강이라는 그 작가의 사고방식과 정신 밑에는 전 세계 60억 인구가 다 엮여 있다고 보시면 되는 거예요.
그 책을 보게 되면 현재 돌아가고 있는 이 육의 세계의 내막을, 육 자체가 만들어낸, 조작해 낸 자기들의 계시에 의해서 어떻게 해결책을 찾아내는가, 그걸 살펴볼 수가 있어요. 그 책 한 권에 1만 2천원입니다. 얼마 안 해요. 십자가마을에서 나온 책은 1만 3천 8백 원인데 그 책은 1만 2천원이거든요. 현지판매는 만원으로 되어있어요. 지영 씨가 저 뒤에 색도 넣어서 글을 써서 붙여놨어요.
그러면 대비하기가 너무 좋은 거예요. 그 작가 인터뷰할 필요도 없어요. 그 상 받은 책만 읽어보게 되면 전체가 복음과 대비가 되면서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그 진짜 성질, 성격이 그 책에 다 들어 있습니다. <채식주의자>의 주제가 뭐냐? “인간의 욕망은 내가 살아가는 가족도 지켜주지 못했다. 그리고 나도 나를 지켜주지 못했다. 진짜 나라는 생명의 본류, 원류가 뭐냐?” 그리고 답은 없어요. 자기도 모르니까. 알 수가 없어요.
문제는 양심 때문에 그래요. 나의 양심은 나로 하여금 고상하게 만든다는 것이 기존의 이 세상에 통용되는 윤리고 도덕이었는데 이 현실에 와서 그 윤리도덕이 안 통하더라는 말이지요. 고기를 먹어야 내가 살 수 있다는 것을 뻔히 알지만 내 양심은, 어릴 때 아버지가 날 물어버린 그 개를 진짜 개 취급해서 오토바이에 묶어서 동네를 일곱 바퀴 질질 끌면서 돌아가지고 처참하게 죽이고, 그 죽은 고기를 나(이거 먹어야 개 물린 자리 것 낫는다고)를 포함해서 이웃사람들에게 다 먹이는 그런 식의 윤리도덕의 비닐하우스, 그 배양액 안에서 본인이 태어났기 때문에 ‘그건 아니야. 그것은 잘못이야. 개를 그렇게 때려죽이면 안 되지. 그것은 인간적으로 내 생명이 있는 한 용납을 못해.’ 라는 그것이 그 여인으로 하여금 채식주의자로 만들어버렸어요.
작가는 말합니다. 문제는 그게 해결책이냐는 말입니다.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이 스스로 양심 지키고 고기를 안 먹는다고 해서 그것으로 만족스러우냐는 그 말입니다. 그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면 아주 음란한 내용이 나와요. 음란한 내용이 나와야 생명의 본류에 들어가요. 채식주의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그것이 생명의 원천이 아니고 생명의 본류는 리비도라 하는데 욕망, 욕망이 있어야 자식을 낳게 되어있거든요.
그 원천, 그것에 대해서 인간들은 고상한 말로 채색을 해놓았지만 작가는 그 뚜껑을 뜯어내는 거예요. 뜯어내니까 상을 받은 거예요. 평소에 사람들이 말 못하는 그 속에 있는 음란한 것을 뜯어내서 다 공개시켜 주니까 사람들이 잘했다고 상을 주는 거예요. 그 인간의 음란함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생명에 도달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도달해보니까 인간이기가 부끄럽다. 그래서 이제는 나무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발가벗고 거꾸로 서요. 나무처럼. 나무처럼 머리를 땅으로 하고 다리를 위로 하면서 “나는 하나의 나무로서 이 세상에 환원되겠다.” 그게 상받은 이유입니다.
그게 뭐냐? 자기동일성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부활은, 모든 인간은 동일성을 갖출 자격이 없다는 거예요. 왜냐? 피조물이기 때문에. 보통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인간의 원수는 마귀다.” 아니 “인간의 원수는 마귀다.”가 다가 아닙니다. 마귀의 적이 원수에요. 왜냐하면 마귀도 피조물이기 때문에. 필요에 따른 주님을 위한 소품입니다. 필요에 따른 소품이기 때문에 마귀가 원수가 아니고 사망이 원수에요.
성경이 <채식주의자>라는 책보다 더 어렵지요? 한강이라는 작가는 독자를 힘들게 한다고 해요. 쉬운 해석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루 말할 것도 없어요. 사망이 원수라는 그 말은, 네가 사망의 자리에 가지 않으면 이 말이 이해 안 된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사망의 자리로 가기 위해서 자살할까요? 자살해서 우리가 죽는다고 해서 사망의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십자가의 자리가 진짜 감추어진 사망의 자리입니다. “네가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따먹었습니다. 죽음을 알았어요? 몰랐어요. 선악과 따먹으면 죽는다는 그 말씀을 예수님이 안고 십자가에 죽었고 다 이루었을 때 비로소 완성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 안에 있을 때 ‘정말 주께서 말씀한 사망이라는 것이 이런 형편을 두고 이야기하는구나.’ 모든 것이 예수님의 동일성을 위해 배치된 것이고, 소품이고, 움직거림이고, 모든 변화거든요.
여기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 뭐냐? 그것이 바로 사망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 그런가? 예수님은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야기가 정리하면 간단해요.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 예수님은 살아나신 분이군요. 살아 있는 존재군요.” 이렇게 이야기해요. 누구처럼? “저도 살아 있거든요. 그렇게 나처럼 살아 있는 존재군요. 하나의 개체고 대상이군요.”라고 하거든요.
주님은 그게 아니고 내가 생명이라는 겁니다. 생명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생명이라니까요. 제가 이야기하니 처음 안 겁니까? 예수님은 생명을 가진 분이 아니고 예수님 자체가 생명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뭐라고 겐세이를 놓는가 하면, 예수님은 생명을 가진 분이라고 이렇게 방해를 해요. 왜? 내가 살고 싶어서, 내가 예수님 덕분에 살고 싶어서, 이 몸 그대로, 이 몸의 동질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의 현재 있는 이 동질성을 떠나야 되는 겁니다. 떠나야 되는데 떠날 수가 없어요. 떠날 수도 없으면 어떻게 우리가 어떻게 이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 고린도전서 15장을 봅시다. 22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첫째 부활 그 다음 부활, 그 순서는 예수님의 죽음에서 나온 효과입니다. 우리가 있어서 그걸 받아 챙기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러한 열매를 스스로 생산하고 제조해내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영생의 자리에 갈 수가 있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이렇게 하면 돼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요, 현재 있는 그것을 예수님이 생명을 만들어내는 거푸집, 주조 틀로 보는 거예요.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소품이 되고 벽돌 한 장이 돼요. 사망이 원수라는 말은 개성을 찾지 말라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직업이나, 나이, 학력과 관계없이 똑같아요. 이슬람교나 천주교나 기독교나 관계없이 똑같아요. 이 말은, 부활의 열매가 나왔다는 말은 부활의 열매를 갖게 되면 우리는 동일한 부활을 받는 것이지 내게 맞는 부활, 내가 원하는 부활, 내가 만든 계시에 부합되는 그런 부활을 우리에게 주지는 않습니다.
나라는 것이 생겨버리면 나와 네가 달라져 버리고 개성이 생겨버려요. 이걸 없애버리고 주님 안에서 똑같다는 주님 동일성으로 모든 것이 정비가 되어버립니다. 정리가 되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제 답변은 이겁니다. 정리되세요. 주께서 전부 다 똑같이 만드는 그 작업에 휩싸였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고 고마워하면서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똑같이 가는 거예요. 그러면 직업이 농사짓거나 교사거나, 이렇게 다 다른데 어떻게 같은가?
모든 사람, 농사짓는 것, 교사하는 것, 목회하는 이것은 뭐냐? 죽이기 위한 동일한 방식으로 거기에 관여한 겁니다. 노래방을 하고 뭘 해도 다 죽이는 방법이에요. 네가 거기서 네 자신이 운영하는 업체가 아닌 것을 알라는 말이지요. 손님도 주께서 보내준 손님이고, 말썽꾸러기 손님도 전부 다 주께서 보내신 거예요. 왜? 살려고 하지 말고 죽으라는 그 말입니다. 죽는 과정에 있다는 거예요. 누구를 위한? 예수님은 동일한 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에 우리가 말려든 거예요. 어디에 있든지 간에.
서로 멀리 있어도 한 곳에 모인다는 것이 있잖아요. 골목골목에 있어도 피리 부는 소년이 피리만 불면 골목골목에서 놀던 애들이 피리 부는 소년 따라 다 오는 거예요. 주님은 피리를 불고 있어요. 주님만 동일성을 유지하고 나라고 할 수가 있고 우리는 주께 소속된 우리에 불과한 겁니다. 하나의 파생된 결과지요. 그래서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우리를 두고 포도나무열매라고 했어요. 포도나무는 주님이고.
어떤 직업이든지간에, 진짜 직업 없이 백수로 논다고 할지라도 까보면 안에 포도가 들어 있어요. 주님의 것이 들어있을 때 ‘아, 주께서 죽이는구나.’ 어디서? 베드로가 속해 있는 권세의 세계에서, 인간만의 세계에서, 날마다 거기서 배신하고 배반한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고, 거기서 닭소리가 말씀의 소리로 들려오고, 외부의 이 성경말씀이 내 안에서는 나를 깨우치는 닭소리로 들려야 돼요. 꼬꼬댁! 요새 우리 집은 아침마다 닭소리 때문에 잠이 깨요. 옆 집 할아버지가 닭을 키워서.
닭이 늘 닭소리를 내고, 우리는 거기서 다시 한 번 내가 있는 자리가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소품으로 동원된 주님의 생명의 세계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이 땅에 있을 때는 우리의 기질, 성깔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냥 성깔이 그대로 드러날 때 하나님보고 해결해달라고 요청하지 말고 그 성깔, 성질이 어디서부터 나왔는가? 베드로가 배신하기 이전에 자기가 배신할 줄도 모르고 자기가 주의 원수인줄도 몰랐어요.
베드로는 지금 주님한테 충성하는 사람이지 원수는 예수님을 괴롭히는 저쪽에 있는 줄로 알았어요. 하지만 저쪽 세력이 자기를 이미 품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지요. 아무리 예수님 따라가고 싶어도 저쪽에서 허락하지 않으면, 사망이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을 따를 수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주님을 따를 수 없는 이것이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주님을 재생산해내는 주조 틀로 삼아버리면 우리는 내가 있는 이 자리가 곧 두 층이 겹쳐져 있는 중첩된 자리, 지옥과 부활이 같이 있는 자리로 보는 겁니다.
그러면 이미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주님이 일하시는데 참여자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겁니다. 누굴 만나든, 어떤 사람이 시비를 걸든 그 시비는 내가 다시 한 번 나로 하여금 이미 구원받았음을, 주님의 동질 성안의 몸의 지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나를 그렇게 성질나게 하는 인간도 만나게 하고 그런 겁니다. 심지어 얼마나 심했으면 광주의 어떤 집사님은, “말 안 통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은 정신적인 강간”이라고 표현했어요. 얼마나 시달렸으면. 힘들어서 죽겠는 거예요. 같이 있는 것 자체가 괴로워요.
여러분, 그것이 우리를 깨우치는, 네가 너 나름대로의 계시를 날마다 조작해내고 있다는 그것이 주님의 원수라는 것을 깨우치고, 그 원수에서 우리를 이미 건져주셨습니다. 그것도 거룩한 자로, 성도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십자가의 의로. 그래서 성도는 결국 십자가만 자랑하고 그것만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이 우리를 위한 세상이 아닌데 어린애가 되어서 매료되고 선악과나무에 빠지고 유혹받았습니다. 그것이 다 탈탈 털리게 해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울 자격도 없고 짜증낼 권한도 없음을, 이미 구원되었음을 토대로 해서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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